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6

通達無我法者 2011. 2. 27. 20:5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마음은 열 가지, 백 가지의 잘못된 마음을 부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과보를 만들어서 가속도를 냅니다.

하나의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면, 선하지 못한 마음이 계속 계승되며,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을 영양으로 삼아서 자라게 됩니다.


하나의 선한 마음은 열 가지의 백 가지의 선한 마음을 부릅니다.

선한 마음은 선한 과보를 만들어서 가속도를 냅니다.

하나의 선한 마음이 일어나면 선한 마음이 계승되며

선한 마음은 선한 마음을 영양으로 삼아서 자라게 됩니다.


어떤 마음이나 시작은 하나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므로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마음부터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을 새로 내는 순간부터 선한 마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마음은 언제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제 17장 사견을 어떻게 제거하는가?>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숨을 들이쉬려는 의식이 일어날 때 이렇게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려는 의식이 일어날 때에도 이렇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 또는 자아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수행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수식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개아라든가, 나라든가, 주관성, 혹은 자아의식 등이 어느 정도 없어지면

유신견이 어느 정도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정견의 주도하에 철저한 수행을 거친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호흡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기능입니다.

호흡은 살아있는 조건에 의해서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이것이 나의 호흡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수식관은 경전에 있는 아나빠나 사띠를 말하는데

코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빨리어 아나빠나는 들숨과 날숨을 말합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의 주 대상을 호흡으로 선택합니다.

코의 호흡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의 수식관은 호흡의 대상을 모양으로 알아차리며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할 때에는 호흡의 숫자를 하나, 둘, 셋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세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는 코로 들어가는 바람과

나오는 바람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자여러분!

집중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사견을 제거하고, 정견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라는 계(戒)와 집중이라는 정(定)과

정견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정정(正定)으로만 이끌어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정견과 정사유가 주도하여 정정진과 정념(正念),

그리고 정정(正定)이 뒤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정정(正定)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집중을 말합니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에 의해 집중이 요구되지만 집중도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중이 지나치면 혼침에 빠져 나태하거나 졸음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을 강화하여 모든 것들이 균형을 이룰 때,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지혜가 있어야 알아차릴 수가 있고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집중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집중력이 바로 지혜를 키우는 것입니다.


유신견은 나, 자아,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느낌, 지각, 행위가 일어날 때

일어난 것은 단지 느낌, 지각, 행위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느낌이고, 나의 지각이고, 나의 행위가 아니라고 이해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각이 일어날 때도 그것이 나의 지각이 아니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행위가 일어날 때도 역시 똑같이 그것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유신견이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이 이 글을 읽는 것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알아차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사견을 근절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모두 느낌이라서 느낌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은 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이 있고,

육체적, 정신적 느낌은 좋고, 싫고, 덤덤한 느낌이며,

이 느낌은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한 것입니다.


느낌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느낌으로 아는데

모든 것을 알 때 바로 ’내가 안다, 나의 느낌이다’라고 알면 잘못된 견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더 강해지고,

그럼으로써 수행자가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느낌, 지각, 행위가 하나의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잘 지켜보아야

자신의 오온에 대한 통찰지혜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느낌, 지각, 행위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말합니다.


잘못된 견해는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없애려고 하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 지혜가 나면 잘못된 견해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것만이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것이 사견을 제거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무상, 고, 무아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는다면

아직 통찰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단계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라고 부르며,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더 높은 지혜가 수행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곱 가지 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함께 성숙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일곱 가지 청정 중에 제일 먼저 계율의 청정이 이루어지고,

다음에는 마음의 청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견해의 청정이 생깁니다.

견해의 청정이 생기면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더불어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단계적인 지혜는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에서는 16단계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10단계의 지혜로 분류하셨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분류한 위빠사나 수행의 1단계 지혜는

바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고

제 2단계 지혜는‘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이고

제 3단계는 ‘현상을 바로 보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현상을 바로 보는 지혜부터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의 단계로 분류하셨습니다.

청정도론의 분류는 위빠사나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견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사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이러한 지혜를 얻지 않고서는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마음이 몸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 수행에서는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본 적이 없고

더구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더욱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알아차림을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대상과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부처님께서 처음 시도하신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몸으로써의 대상은 물질적 현상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알아차려서 의식하는 것은 정신적 현상입니다.

이렇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이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에도 호흡은 몸의 대상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하나가 각기 다른 역할을 해서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호흡을 할 때 호흡의 일어남이 있고 호흡의 꺼짐이 있습니다.

호흡은 호흡대로 일어남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이라고 아는 마음이 있어야

일어남이 있는 것이 완성됩니다.

역시 호흡은 호흡대로 꺼짐이 있고, 이것이 꺼짐이라고 아는 마음이 있어야

꺼짐이 있는 것이 완성됩니다.

이런 식으로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각각 역할을 해서

비로소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막연하게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지혜가 성숙되려면 무심히 아는 것이 아니고

깨어서 아는 분명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나 추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직접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알고 추리로 아는 것은 지식이지 지혜가 아닙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에도 보이는 대상이 있고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고,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 세 가지가 있어야

아는 것이 비로소 성립됩니다.


여기서 대상은 물질이고,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은 정신입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역할이 다른 것을 아는 것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귀라는 감각기관이 소리를 알아차림에 의해서 듣고

소리라고 아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코라는 물질의 감각기관이 냄새라는 대상을 알아차림에 의해서 접촉하고

무슨 냄새라고 아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혀와 맛과 아는 마음과,

신체와 부딪침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의 결합으로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지혜가 생길 때,

여기에 자아가 없습니다.

단지 두 가지 현상에 의한 조건만 있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내가 알고, 영혼이 알고, 남자나 여자가 알고,

사람이 알고, 중생이 아는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지혜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다음 단계의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렇듯, 지혜는 하나의 단계가 완성되면,

다음 단계로 거듭 발전하면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는 알아차린 결과로 와지는 것입니다.


먼저 정신과 물질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런 지혜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다음 단계의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현재 있는 것을

단순하게 지켜보는 것이 의무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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