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7

通達無我法者 2011. 2. 27. 22:3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의 실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의 필름들이 모여져서

하나의 줄거리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필름의 한 장면 한 장면처럼

순간순간의 마음들이 모아져서 지속됩니다.


개미들이 줄 지어 갈 때에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리씩 떨어져서 가고 있습니다.

개미가 한 마리씩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개미처럼 순간의 마음들이 모여서 지속됩니다.


한 순간의 마음은 생멸하므로, 다음 마음과 다르며,

한 생 역시도 생멸하므로 다음 생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과보가 전해져서 지금과 지금 이후나,

전생과 이생이 같은 것이 아니며 같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같은 마음이면 상견(常見)에 빠져 무상(無常)을 부정하게 되고

다른 마음이면 단견(斷見)에 빠져 원인과 결과를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전생의 마음과 이생의 마음이 같은 마음도 아니고,

다른 마음이라고 할 때에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이지,

마음이 있는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조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그 과보에 의해서 새로운 재생연결식을 받는 것이지,

결코 같은 마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제 18장,

상견과 단견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명은 12연기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시간을 말하는 시작이 아니고, 근본 원인이 되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명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을 강화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으로 인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속화되어서 지속됩니다.


수행자가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게 되고

다음 단계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면 사견이 제거됩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나서 바르게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면 먹고 싶은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어서 그것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일어나고, 업의 생성이라고 하는 육체적 행위가 따릅니다.

달리 말하자면 갈애가 일어나자마자 이어 집착이 따라 오고

다시 업의 생성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 하나를 보는 것에서도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 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

이것은 갈애와 집착 사이에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애나 집착, 어느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12연기의 도표를 보면 부분 1에 무명 다음에 행(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무명과 행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원인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무명과 행이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원인이 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 연기이고 이때 행은 연생입니다.

원인에 의해서 새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명에 의해서 일어난 행이 결과이지만

다시 이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행을 원인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인을 빨리어로 빳자야라고 합니다.

빳자야는 원인, 조건, 동기, 연(緣)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연은 연기를 말합니다.

연기는 조건 지어진 법, 또는 원인으로서의 법과 조건에 따라 생긴 법을 말합니다.

이처럼 연기에서는 원인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 되었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원인이 반드시 있어서

그 다음에 결과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원인을 알려고 하면 사유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가까운 원인으로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원인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원인을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유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바른 원인을 알려면 알아차린 결과로서 원인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원인은 지혜에 의해서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원인은 결과를 가져오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다음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그러나 무명과 갈애를 일으키는 것은 유신견을 원인으로 한다는 사실 또한

다시 한 번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그 다음 연결고리는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 입니다.

업의 생성은 원인이 되는 집착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집착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음 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원인을 남기며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원인은 인과 관계에서 연속을 의미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존재는 갈애와 집착, 그리고 업의 생성이 끊임없이 연속하여 일어나는

소용돌이 속에서 회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것이 과연 연기법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일치하는 것인지 탐구해 봐야겠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는 갈애와 집착 사이의 원인을 독립된 요소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연속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집착은 원인이 되는 갈애로 인해서 일어나며

갈애는 집착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착은 왜 일어납니까? 저절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갈애로 인해서 일어납니까?


그렇습니다. 집착은 갈애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상견과 단견은 잘못된 것입니다.


유신견, 상견, 단견은 원인과 결과가 배제된 견해입니다.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이므로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일방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집착이 갈애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들이 연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익숙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집착이 갈애로 인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수행자는 이를 통해서 이 세계의 현상들이 저 스스로 원인 없이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과 관념을 없애야 하겠습니다.


선행하는 현상인 갈애는 집착이라는 결과가 일어나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집착이 일어나기 위한 길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집착은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숙고해야만 하겠습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연결 고리를 분명하게 알면 연기법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현재의 결과에 앞서 일어난 과거의 원인의 결과입니다.

도표에 있는 부분 2는 부분 1의 결과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다고 하는 믿음을 고집한다면

이는 단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12연기의 열두 가지 요소는 낱낱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지만 크게 보면

부분 1과 부분 2가 원인과 결과로 연속되고,

부분 2와 부분 3이 원인과 결과로 연속되고,

부분 3과 부분 4가 원인과 결과로 연속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먹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면 먹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이 따라 오고,

다시 신업인 행위와 구업인 말이 따라 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아!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밖에 나가서 음식을 먹어야겠어’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는 이렇게 계속 이어집니다.


먼저 먹고 싶은 갈애가 일어나서 집착이 일어나는 것을 원인으로 남기며 사라집니다.

이때의 집착은 갈애와 집착 사이의 연결 고리로 작용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하겠습니다.


또한 집착은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식이 작용하여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로써 현상은 단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상에 자리를 내주면서

사라진다는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수행자는 상견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견과 단견의 원인과 결과를 비교해 봤습니다.


다음 단계로 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그것은 나, 자아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단순한 의식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써 수행자는 그것들이 단순한 의식일 뿐,

그 이상이 아님을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수행자는 거기에 집중하여 각각의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일어남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나, 자아, 나 자신, 내 것 등으로 인격화할 만한 것이 없는

단순한 정신적 현상일 뿐이라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탐, 진, 치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유신견을 가진 상태가 되지만,

탐, 진, 치를 알아차리면 단지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바뀌기 때문에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과 아는 마음 밖에 없으므로 사견이 붙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계속하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유신견이 사라지는 과정을 겪습니다.


안식(眼識)이 일어날 때 보는 자가 없으므로 보는 것은 내가 아니고,

이식(耳識)이 일어날 때 듣는 자가 없으므로 듣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흐름일 뿐이지, 거기에 나, 자아, 나 자신, 내 것 등으로

인격화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볼 때, 보는 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믿음이나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단지 안식(眼識)일 뿐이고,

의식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지각한다면 거기에는 단지 몸이 있다라는 유신(有身)만 있지,

그것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은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유신(有身)은 단지 몸이 있다는 견해로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나 유신견(有身見)은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아는 잘못된 견해로

바르지 못한 견해입니다.


유신은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하는 오온을 뜻합니다.

오온 중의 하나를 나, 자아 혹은 인격체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바로 사견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眼識)이 일어날 때 내가 보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이 유신견입니다.

이상 유신견에 대해서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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