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

참 고향은 어디인가

通達無我法者 2011. 6. 15. 20:20

 

 

 

참 고향은 어디인가

 

Our Real Home

 

 

 

Ven. Ajahn Chah

아쟌 차 스님 지음

박 용 길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7. Bodhi Leaves No. B 111)

 

 

 

 

 

* 모든 주는 역주(譯註)

 

 

아쟌 차 스님에 대하여

 

스님은 태국 동북부에 있는 농촌의 유복한 대가족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고 스무 살이 되면서 비구계를 받았다. 젊어서는 주로 경논 등의 교학(敎學)을 공부하였으며, 그 후 고행주의의 전통대로 깊은 숲 속에 들어가 선지식들을 모시고 참선에 몰입하였다. 이어 여러 해 동안 전국을 행각하며 숲과 동굴 그리고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노숙을 하는 등, 고행승으로서 갖가지 만행을 닦았다. 특히 당대의 선지식으로 유명했던 아쟌 문(Ajahn Mun) 선사를 친견하고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더욱 다잡았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수년 동안의 행각 끝에 마침내 스님은 고향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마을 근처 나무가 빽빽한 숲에 들어가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이 숲은 코브라와 호랑이 등 맹수는 물론, 온갖 귀신들이 들끓는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그때까지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이러한 곳이야말로 숲속 고행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말하며 기꺼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그 곳에는 스님을 모시고 그 가르침대로 수행하기 위해 찾아드는 출가재가자들로 커다란 승가가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태국 전역은 물론, 영국과 호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사십여 개의 산과 숲속 지부를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빠 뽕(Pah Pong) (Wat-)에 들어서면 먼저 우리는 샘에서 물을 긷는 스님들이나, “조용히 해주십시오. 정진 중입니다.”라고 씌어있는 푯말과 쉽사리 마주치게 된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대중 정진을 갖는데, 정진의 핵심은 오히려 일상생활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손수 자신의 옷감을 마름질하거나 염색하기도 하며, 그 외의 일용품도 자체적으로 마련하여 사용한다. 도량 내의  모든 건물과 마당이 그들의 손에 의해 청결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루에 한 끼 탁발 공양을 하고 그 외에도 의복을 비롯한 일체의 소유물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등,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모든 사람들이 지극히 소박한 일상사를 영위하며 정진하고 있다. 주변 숲 속에는 혼자 기거하며 참선에 전념할 수 있는 자그마한 오두막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으며, 나무 밑으로는 행선(行禪)을 하기에 알맞은 오솔길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곳의 청규(淸規)1)는 아주 엄격해서, 수행인이라면 누구든지 그 곳의 소박하고 청정한 생활방식을 좇아 대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게 마련이며, 그러는 가운데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三學)을 고루 닦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 어느 장광설보다도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스님 특유의 법문은 서구인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 함께 수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여러 해를 묵으며 불교 공부와 참선수행에 전념하는 이들도 있다. 1975, 빠 뽕 사 근처에 세워진 빠 나나차뜨 사(Wat Pah Nanachat)는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점점 증가함에 따라 특별히 이들의 편의를 위해 설립된 곳이다. 이곳을 거쳐나간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은 오늘날 서구 각국에서 널리 불법을 펼치고 있으며, 스님 또한 두 차례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방문하여 직접 법음을 전한 바 있다. 영국의 서쎅스(Sussex)에는 스님이 건립한 지부가 번창일로에 있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스님은 바로 승가 전래의 이와 같은 단순한 생활방식을 통하여 우리 불자들이 오늘날 어떻게 법을 공부하고 수행해야 하는지를 직접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스님의 가르침이 너무 간명하기 때문에 자칫 우리는 그 깊은 뜻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여러 번에 걸쳐 스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홀연히 마음이 열리게 되거나 가르침의 뜻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때와 장소에 따라, 청중의 수준에 알맞게 법을 설하는 스님의 능력은 가히 놀랍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끔 우리는 스님의 말씀이, 특히 그것이 활자화되었을 때 내용의 앞뒤가 안 맞고,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어디까지나 그 분의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스님의 말씀이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결코 속단하지 말고, 우리는 이 존경스러운 스님이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실제적인 선정 체험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참 고향은 어디인가

임종을 앞둔 노신도에게 해주신 법문

 

 

 

우선 지극한 불심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하겠노라고 깊이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은 바로 눈앞에 부처님을 대한 듯이 생각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 다음, 마음을 가라앉혀 이를 한 곳으로 모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온전히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신 부처님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지혜와 진리와 청정함이라는 이 세 가지 보물1)을 겸허히 받아들여 그대 가슴속에 지니도록 하십시오.

 

오늘 내가 그대에게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인 재화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곧 법()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공덕을 쌓으신 부처님도 육신의 죽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대는 잘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령에 이르자 그 분은 자신의 육신을 떨쳐버림으로써 비로소 그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던 것입니다.

이제 그대 또한 이 육신에 의지하여 살아온 지난 세월이 그것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 몸뚱이는 그대가 사용하던 컵이나 받침이나 접시 등과 같은 가사용품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구입했을 당시 그것들은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하고 깨끗했지만,

이제 오래 사용하다보니 점점 낡기 시작합니다.

어떤 것은 보기 흉하게 이가 빠지기도 하고, 더러는 아예 박살이 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조차도 꾀죄죄한 그 모습은 이미 처음의 그것이 아닙니다.

성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본성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대의 육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그날부터 이미 그대의 육신은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현재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한결같이 계속 변해 왔습니다.

그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도 누누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인연법의 결과로 생겨난 것[saṅkhārā, 諸行]2)은 내면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외부적인 것이든 어느 것도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無我], 변화가 바로 그들의 본성이라고.

이 진리가 명확하게 이해될 때까지 깊이 숙고해보도록 하십시오.

 

여기 이렇게 누운 채 스러져가고 있는 이 몸뚱이가 바로 사짜담마(saccadhamma), 즉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실상이 곧 사짜담마이며,

이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육신을 잘 관찰하고 수관(隨觀)하여 그 본성에 순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오직 이 육신일 뿐,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마저 감옥에 보내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대의 몸은 나이 따라 늙고 쇠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에 거역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결코 마음마저 늙고 쇠하도록 그냥 두지 마십시오.

마음은 따로 챙기십시오.

아울러 사물의 존재방식에 관한 진리3)를 깨달아 그대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으십시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육신의 본성이며,

달리 어떻게 될 수 없노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그대는 지금 현실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그대의 육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이 진리를 간절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설사 홍수나 화재로 그대가 살던 집이 무너지더라도 재난을 당한 것은 그 집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 하십시오.

아무리 큰물이 밀려온다 해도 그대의 마음까지 거기에 휩쓸리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아무리 불길이 거세다고 해도 그대의 마음마저 잿더미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물에 떠내려가든, 불에 타든, 그것은 단지 집에 한한 일일 뿐, 그대 자신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사건에 불과합니다.

부디 애착을 버리십시오.

바로 지금 말입니다.(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대의 생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 그대는, 눈으로는 형형색색의 물건을 보고 귀로는 온갖 소리를 들었습니다.

참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것은 단지 경험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대는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았을 것입니다.

좋은 맛은 역시 좋은 맛일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쓴맛 역시 쓴맛일 뿐 그것이 전부입니다.

눈앞의 아름다운 형상 역시 아름다운 그것이 전부이며, 추한 형상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귀에 들려오는 달콤하고 황홀한 소리 역시 그 뿐이며,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혹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 세상의 어느 중생도 한 상태로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하고 흩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에 있어 이는 문자 그대로 진실이며, 이에 대해 우리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입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자신의 육신과 마음을 깊이 관()하여 그 무자성(無自性)을 깨닫는 것, 즉 그 어느 것도 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일시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집과 같습니다.

명의상으로 그것은 분명히 그대의 소유이지만 정작 그대는 그것을 어디로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스러운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 일컫자면 이들 모두가 그대의 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이들 모두가 그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진리가 그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이는 마찬가지이며, 부처님과 그의 깨달은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와 다른 점은 오직 하나, 그분들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달리 딴 존재방식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분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그리고 다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육신을 면밀하게 살펴보라고 이르셨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보이십니까?

애초부터 깨끗했던 부분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무언가 변함없는 실체라고 인정할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구석구석까지 이 육신이 쇠락해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뿐.

그래서 부처님은 육신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줄 알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변화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대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릇된 생각, 그것이 바로 그대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주범입니다.

바른 것을 잘못 알았을 때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강물과 같습니다.

물은 당연히 경사를 따라 아래로 흐릅니다.

그 반대로 흐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물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기고 어리석게도 물줄기를 되돌려 위로 흐르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고통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외에 어떤 일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은 결코 마음 편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흐름을 거스르는 그 자신의 그릇된 견해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바른 견해를 가졌다면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이를 깨닫고 진리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혼란스러운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아래로만 흐를 수밖에 없는 저 물은 바로 그대의 육신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을 지나 노쇠해진 그대의 육신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습니다.

부디 허황된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그대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사물의 참 존재 방식을 깨달으라고,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놓아버린 마음을 그대의 피난처로 삼도록 하십시오.

 

설사 아주 피곤하거나 기진하더라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호흡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몇 번이고, 깊은 호흡을 해보십시오.

그러고는 부처님(buddho)4)을 부르면서 마음을 호흡에 실어보십시오.

이는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일단 그것이 익숙해지면 피로가 심해질수록 그대의 집중력은 더욱 예민해지고 또렷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야만 어떤 통증이 느껴지더라도 이를 견뎌낼 수 있을 터이니까요.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면 곧 모든 생각을 멈추고 마음이 절로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하여,

이를 호흡을 관하는 데로 돌리십시오.

부처님, 부처님하고 속으로 거듭 되뇌면서 외적인 일은 모두 놓아버리십시오.

자식이든 친척이든, 어떤 생각도 붙잡지 마십시오.

놓아버리십시오.

마음을 한 점으로 모이게 하여, 그렇게 가다듬어진 마음이 호흡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로지 호흡만을 생각하고 다른 것은 다 놓으십시오.

마음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일체의 감정이 담담해질 때까지,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명료함과 각성이 크게 자라날 때까지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설사 통증이 일어나더라도 저절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마침내 그대는 자신의 호흡을, 마치 그대를 찾아온 친척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친척이 떠나갈 때면 우리는 그를 따라나가 배웅합니다.

걸어서 가든 차로 가든 우리는 그가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호흡도 이와 같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호흡이 거칠면 우리는 곧 호흡이 거칠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반대로 호흡이 고르면, 우리는 곧 그것이 고르다는 사실도 금방 압니다.

호흡이 점점 섬세해지면 놓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따라갑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도 깨어납니다.

 

드디어는 숨결도 아주 사라져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깨어있는 느낌뿐인 상태에 이르게 되지요. 이를 두고 부처를 만났다고 합니다.

위에서 우리는 투명하게 깨어있는 의식상태를 가리켜 붓도라고 했는데, 이는 온전히 아는 이이며, 깨어있는 이이며, 광명을 발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혜와 또렷함으로 부처님과 만나는 것이며, 더불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생에 몸을 받으셨던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반열반에 드셨지만, 투명하고 밝은 지혜라는 원래 의미의 부처는 지금도 우리가 얼마든지 도달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부처님과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냥 두고 보십시오.

[正知] 이외의 일체를 말입니다.

혹시 참선 중에 환상이나 환청이 일어나더라도 이에 속지 마십시오.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아무것도 붙들지 마십시오.

오로지 순일한 의식만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과거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고요히 계시기만 하십시오.

마침내 그대는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또 머무를 수도 없는 곳, 붙들 것도 집착할 것도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곳에는 자아(自我), ‘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러한 것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어떤 것도 지니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알아라. 그리고 알았으면 놓아라.”

(, Dhamma), 즉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실천하는 것은 누구든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십시오.

진실로 관법 공부에 모든 노력을 쏟으십시오.

가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동안 그들은 지금처럼 계속 지내겠지만 장차는 역시 그대처럼 되겠지요.

이러한 운명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불변의 실체를 결여한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따르면 그대는 곧 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순리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괜한 일로 걱정도 말고, 또 무엇인가를 붙들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참선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 그것이 지혜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자식들을 생각할 때도 지혜롭게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결코 어리석은 생각은 마십시오.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하게 되면 일단 지혜로써 깊이 헤아려 그것의 본성을 알아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진정 무엇인가를 지혜롭게 알게 되면 그대는 반드시 그것을 다시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아무런 고통도 맛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마음은 밝고 즐겁고 평화로워져서 어느덧 불편했던 심기도 말끔히 가시고 일심으로 모아지게 되겠지요.

이 모든 것을 위해 지금 당장 그대가 도움을 구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그대의 호흡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그대 자신의 일이며,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그들대로 각기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대에겐 그대 나름의 의무와 책임이 있을 뿐, 가족들의 의무와 책임까지 떠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걸머지지 마십시오.

놓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대 마음이 평온해 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대에게 맡겨진 유일한 책무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평온을 되찾는 일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다른 이에게 맡기십시오.

형상, 소리, 향기, 맛 따위를 섬기는 일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만사를 제쳐놓고 오로지 그대 자신의 일만을, 그대 자신의 책무만을 다하도록 하십시오.

그대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든, 남에 관한 걱정이든, 그 밖의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향해 말하십시오.

나를 방해하지 말라. 이제 너는 더 이상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마음속에 그러한 현상[諸法, dhammas]이 일어나는 대로 줄곧 이 말을 되뇌도록 하십시오.

 

담마(dhamma)란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담마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무엇이냐고요?

세상이란, 지금 이 순간 그대를 들쑤시고 있는 다름 아닌 그 정신현상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내가 죽고 나면 누가 그들을 뒷바라지 해줄까? 과연 그들은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 모두가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죽음이나 고통을 두려워하는 생각이 일어나기만 해도 그것은 곧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내던져버리십시오.

 

세상은 저 나름대로 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대 마음속에 일어나 식()을 지배하도록 놔둔다면, 마침내 그대의 마음마저 흐려져 더 이상 그대 마음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그 무엇이 일어나든 오직 이렇게만 다짐하십시오.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본질을 벗어난 것, 그것은 내 알 바 아니다.”5)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대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당장 죽고 싶다는 생각 또한 옳지 못합니다.

이 역시 그대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인연법의 결과로 생겨난 것은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나름대로의 법칙을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참견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대는 젊은 처녀들이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손톱을 가꾸듯, 잠깐 동안이라도 자신의 육신을 청결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몸단장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늙음 앞에서는 누구나 별수 없이 한 배를 타야 합니다.

그것이 곧 육신의 존재방식인 이상,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그대 힘만으로도 향상시키고 충분히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누구든 목재나 벽돌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은 집은 우리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며, 명목상의 집일뿐이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집이며, 세상의 법칙을 따릅니다.

진정한 보금자리는 우리 내면의 평화입니다.

외면의 물질적인 집은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모르나 생각만큼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그곳에는 이런 저런 걱정과 근심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눈앞의 한 사물에 불과할 뿐, 따라서 언젠가는 버려야만 하는 그런 것입니다.

진정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자신이나 혹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역시 세상에 속하는 또 하나의 다른 집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오늘날 늙고 병들기까지 그대의 육신은 나름대로 그 자체의 길에 충실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순리이니까요.

따라서 그 길이 좀 달랐더라면 하는 바람 따위는 오리더러 병아리를 닮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 오리는 어디까지나 오리이고, 병아리는 어디까지나 병아리여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육신이 늙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오히려 우리는 활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육신이 오래 버텨주기를 염원해도, 그것은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 뿐입니다.

 

제행(諸行)은 참으로 무상하구나.

생멸을 면할 수 없으니.

생기한 것은 멸하기 마련이니

그 고요함에 축복 있어라.”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위의 제행, 즉 상카라(saṅkhārā)라는 말은 바로 이 육신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해서, 생겨났다가는 곧 사라지고, 일어났다가는 곧 스러져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꿈꿉니다.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우리의 호흡을 보십시오.

들이마셨다가는 내쉬고, 또 들이마셨다가는 내쉬고, 이것이 호흡의 본성이며 존재방식인 것입니다.

흡기(吸氣)와 호기(呼氣)는 반드시 교차되어야 하며 변화해야 합니다.

상카라는 이와 같이 변화를 통하여 존재하며 아무도 이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숨을 들이쉬지 않고 계속 내쉴 수만 있겠습니까?

그 기분이 좋겠습니까?

또 숨을 들이쉬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물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들이마신 숨은 반드시 내뱉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 다음에는 반드시 들이마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호흡의 본성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일단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나이 먹고 병들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카라가 제대로 몫을 해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호흡이 그 나름의 방식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죽어갑니다.

출생과 죽음은 사실 하나입니다.

이는 마치 한 그루의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으며, 뿌리가 있으면 반드시 가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가지가 있으면 반드시 뿌리가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결코 이 둘은 따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스운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가 죽으면 한없는 비탄에 잠겨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반대로 아이가 탄생한 경우에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실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정작 울어야 할 때는 오히려 아이가 태어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탄생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탄생이고, 뿌리가 곧 가지이고 가지가 곧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꼭 울어야 하겠거든 그 뿌리를, 다시 말해 모든 탄생을 서러워하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새삼 죽음이란 것도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점, 이해가 됩니까?

 

복잡하게 따지려들지 마십시오.

그저 이것이 바로 세상 이치로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그대의 일이며 의무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의 가족도 그대의 재산도 그대를 도울 길은 없습니다.

지금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그대 자신의 올바른 인식뿐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십시오.

놓아버리십시오.

모두를 내던져버리십시오.

설령 그대가 놓아주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은 이미 갈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육신 구석구석이 어떻게 하나 둘 떠나가려 하고 있는지 느끼지 못합니까?

머리카락을 예로 들어 봅시다.

젊은 시절 그토록 아름다웠던 머리채, 하지만 지금은 드문드문 빠져버려 볼품없이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눈 또한 맑고 시력이 좋았지만,

보십시오.

지금 그대는 시력은 나빠지고 눈에서 빛은 사라졌습니다.

신체의 각 부위는, 웬만큼 됐다 싶으면 곧 우리의 육신을 떠납니다.

그들의 고향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그대의 치아는 희고 단단했지만, 지금은 뿌리째 흔들립니다.

어쩌면 의치를 하고 계신가요?

그대의 눈, , , 혀 등등, 이 모든 것들도 역시 자신들의 고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 막 그대의 육신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상카라 안에다 영원한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대는 다만 잠깐 동안 거기에 머무르다가 때가 되면 다시 떠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빌려서 살던 자신의 작고 초라한 고향집을 침침해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요? 이도 흔들리고 귀도 어둡고, 온 육신이 어디 성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이 모두가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육신은 그저 잠깐 쉬었다가 가는 곳일 뿐, 진짜 고향은 엄연히 따로 있으니까요.

태어난 이상, 세상의 본질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이란 언젠가 분명히 사라질 것들만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대의 육신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의 모습대로 변하지 않은 부분이 어디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피부가 옛날 그대로입니까?

머리카락은요?

분명히 그대로가 아니지요?

그때 그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세상 이치란 그런 것입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모두가 다 이를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세상이란 정말 믿을 것이 못되는 셈이지요.

혼란과 근심, 기쁨과 고통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 세상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거기에는 평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집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저기에서 잠깐, 한시도 편할 틈이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진정한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무엇을 하든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집을 떠나면 누구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진정 편히 쉬려면 자신의 집 말고 달리 어디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그 어디서도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해서는 평화를 누리기가 어려우며, 부유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며, 그렇다고 어린이라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해서 평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어디에도 평화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본질입니다.

재산이 적어도 고통스럽고, 많아도 역시 고통스럽습니다.

, 어른, 노인 모두가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고통스럽고, 젊으면 젊은 대로 고통스러우며, 돈이 많으면 많아서 고통스럽고, 또 돈이 없으면 없어서 고통스럽고 이래저래 세상은 고통뿐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에 익숙해지면, 그대는 곧 덧없음[無常]과 괴로움[]이란 말의 의미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모두가 덧없고 괴롭기만 할까요?

한마디로, 그들은 진아(眞我)가 아니기[非我] 때문입니다.

 

여기 이렇게 누워서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몸, 그리고 그것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 둘을 모두 법(dhamma)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생각이나 느낌, 인식과 같이 형체가 없는 것을 따로 명법(名法, nāmadhamma)이라고, 병으로 앓아누운 육신과 같이 형체가 있는 것은 색법(色法, rūpadhamma)이라고 합니다.

물질적인 것도 법이고 비물질적인 것도 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과 더불어 그 법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정작 우리 자신 역시 법이기도 합니다.

 

사실 진아(眞我)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으며, 오로지 법만이 그 속성대로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태어남[]과 죽음[]을 번갈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분께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진실한 말씀만을 하셨는지, 절로 나오는 찬탄과 아울러 진심으로 우리는 그 분을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비록 불법을 실제로 수행한 일은 없어도, 무언가 하나씩 이치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 아무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에 관해 아무리 깊이 연구하고 수행했다고 해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진실됨을 확인하기 전에는 우리는 내내 집 없는 떠돌이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중생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살만큼 산 다음에는 모두가 제 갈 길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모든 존재는 반드시 이와 같은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이란 원래 이런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과 아울러 이제 그대는 이 세상이 한낱 지겨운 곳 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도 절감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 곳에는 기대어도 좋을 만큼 견고하다거나 실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단순히 지겹다는 생각을 넘어서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인가에 홀려 있다가 막 풀려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그대가 세상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할 걸요.

그대는 이제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며,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비로소 집착심도 여읠 수 있게 됐고요.

그대는 이제 즐겁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 따위에 끌리지 않고 다만 지혜의 눈으로 제행(諸行, saṅkhārā)의 무상함[無常性]을 볼 뿐이기에, 모든 세상(saṅkhārā)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제행은 무상합니다.

하지만 이 무상함이야말로 부처 그 자체인 걸요.

무상한 현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는 그것이 불변이라는 것, 즉 변화하는 그 본성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불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누리는 불변성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서 청년 시절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며, 그와 같은 무상함, 그와 같은 본성이야말로 영구불변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변화를 바라보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곧 평안해질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변화는 그대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와 같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문득 모든 사물이 지겨워지면서 지금껏 무엇인가에 홀려 있다가 홀가분하게 풀려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관능적인 쾌락의 세계에서 누리던 기쁨도 곧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볼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결국 많은 것을 뒤에 남겨야 한다는 뜻이고, 가진 것이 적다는 것은 적게 남긴다는 뜻일 뿐이라는 사실을.

재물은 그저 재물일 뿐이요, 장수(長壽) 또한 그러할 뿐,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가르쳐 준대로 우리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며, 지금껏 그 방법을 설명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자신의 집을 짓도록 하십시오.

비우십시오.

나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물러섬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리고 머무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평온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마음을 계속 비우십시오.

쾌락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고통도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쾌락이나 고통 따위는 결국 쇠하여 사라집니다.

 

거룩하신 스승,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카라[]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우리에게 그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임종에 이르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미리 내려놓아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끌고 다니기에는 너무 벅찬 짐덩이인데 왜 바로 지금 그것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않으십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을 끌고 다니느라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

내려놓고 좀 쉬십시오.

그리고 가족들에게 그대를 보살필 기회를 주도록 하십시오.

병든 이를 구완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데에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기왕에 병석에 누워 모처럼 남에게 병구완의 기회를 주게 된 바에야 일이 수월하도록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어디가 아프다든지 또는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일일이 그들에게 알려주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가지십시오.

한편, 부모님을 구완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을 자상하게 써야 하며 행여 귀찮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부모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 오늘날이 있기까지 여러분은 줄곧 부모님에게 의지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리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백방으로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실로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녀와 친척 분들은 이제 여러분의 부모였던 분이 반대로 여러분의 어린애가 된 것을 보고 계십니다.

전에는 분명히 여러분이 그분들의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그분들이 여러분의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자꾸 들다보니 마침내 도로 어린애가 된 것입니다.

그들의 기억력은 이미 쇠퇴해졌고, 눈도 귀도 어두운데다가 때때로 헛말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당황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병구완하는 이들은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뭐든 뜻대로 하려들지 말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맡기십시오.

어린애가 말을 안들을 때면, 부모들은 때때로 저대로 놀도록 놔두어서 한바탕 소란도 피우도록 하여 아이의 기분도 풀어줍니다.

이제 여러분의 부모님이 바로 그런 어린애와 같습니다.

그들의 기억과 지각(知覺)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더러 자식들의 이름마저 얼버무리기도 하고 컵을 달라고 하면 접시를 내놓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상입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환자께서는 병구완하는 이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참을성있게 통증을 견디어 보십시오.

정신을 바짝 다잡아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산란해지지 않도록, 그래서 구완하는 이들이 난처해하지 않도록 노력해보십시오.

병구완하는 분들은 후덕하고 자상한 마음을 갖도록 하십시오.

침과 가래를 닦아주고 오줌똥을 받아내는 등의 궂은일을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고, 부디 최선을 다하십시오.

또한 가족 모두가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말고 이에 협력하도록 하십시오.

 

그분들은 여러분의 하나뿐인 부모님이십니다.

생명을 준 것은 물론 여러분의 스승이자 간호사이자 의사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여러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을 길러주고 가르쳤으며, 재산을 함께 나누고 마침내는 모두 유산으로 물려주었으니 아무리 부모라지만 이보다 더 은혜로운 이가 다시 어디에 있겠습니까?

때문에 부처님도 은혜에 감사하고[知恩, kataññu] 애써 보답하는[報恩, katavedi] 공덕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둘은 보완적인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모님의 형편이 어렵다든지, 건강이 안 좋다든지 곤경에 처해 있다든지 하는 때에는 당연히 그 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알고 그것을 갚는 것(kataññukatavedi)이며, 이러한 공덕 때문에 세상은 유지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가정 또한 붕괴되지 않고 더욱 건실하고 화기애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병석에 누운 그대에게 드리는 선물로 담마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저 자신 달리 드릴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재물이라면야 이미 이 집에 충분히 마련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담마는 그 가치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은 물론, 아무리 써도 닳아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일단 나로부터 받고 난 뒤에는 얼마든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으며, 아무리 주어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질은 원래 그러하니까요.

오늘, 그대에게 이처럼 담마를 선물로 드릴 수 있어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대가 병석의 고통을 이겨나가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출가 수행자들에게 부과되는 생활 및 수행규범.

 

1) 세 가지 보물[三寶] :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여기서는 삼보를 그 특질에 따라 열거하고 있다. 즉 지혜의 완성자이신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로서의 법,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청정한 행을 닦아나가는 승가를 말한다.

2)  한역으로는 행(), 혹은 제행(諸行).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정확한 우리말 번역이 가장 어려운 불교용어의 하나임. 영역에서는 condition 외에 activity, formation 등이 쓰이고 있으며, 요즘 일본어 역에서는 형성력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통 교학에서는 일체 유위법(有爲法)을 행으로 표시하여, 유무위법(有無僞法)을 모두 포괄하는 법(, dhamma 혹은 dharma)과 구별하고 있다. 천류(遷流)라고도 옮긴다.

3) 연기법을 말함.

4) buddha의 주격.

5) 법륜존재의 세 가지 속성­삼법인(2005) 참조.

 

출처:http://cafe.daum.net/cho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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