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通達無我法者 2007. 1. 22. 13:59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제8회 선우논강
일시 : 불기 2547(2003)년 8월 22일(금) 저녁 6시-10시
장소 : 지리산 실상사


주제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 간화선의
전통과 조계종의 교육제도"

기조강연 : 철오스님(사천 구룡사, 선우논강
실행선우 대표)


발제 : 원경스님 (송광사 강원 학감)
논평 : 도법스님(실상사)
월암스님(경주 남산 칠불암)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철오(선우논강 실행선우 대표)


오늘은 제8회 선우논강일입니다. 이렇게 많이 동참해주신 제방의 비구, 비구니스님들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작년 하안거 후에 선우논강이 6년에 부활되어서 제6회 선우논강의 "초기불교의 수행과 수행환경"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어 많은 스님들이 수행에 대해서 진지하게 점검해 보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난 동안거 후에 개최된 제7회 선우논강에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라는 주제로 남북의 양대 수행법을 비교해 보고 특히, 한국 간화선의 문제를 점검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번 제8차 선우논강에서는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간화선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측면에서 한국 수행풍토를 점검해 보는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한국 스님들은 간화선을 두고 최상승의 수행법이라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한국불교 특히, 한국승가는 최상승인 간화선 수행을 전통으로 해오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수행전통을 가진 집단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60개가 넘는 선원에서 2,000여명의 스님들이 안거에 동참하고 있고 그 숫자는 증가추세에 있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 이전의 중국 수행전통에서도 간화선적인 요소를 찾을 수는 있지만 간화선은 분명히 중국에서 대혜종고 스님(1089~1163)에 의해서 주창된 수행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처님으로부터 1500여년 이후에 중국식으로 변화된 수행법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왜 간화선이어야하는가. 왜 간화선이 최상승 수행법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합리성에 바탕한 질문을 해봐야합니다<간화선은 과연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하는 수행법인가>하는 점입니다. 먼저 이 점에 확신이 서야 우리는 자신있고 당당하게 간화선이야말로 최상승 수행법이라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무아/중도로 집약된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것은 초기 불교와 상좌부불교, 대승불교에 모두 공통되는 불교의 핵심중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간화선은 과연 이런 불교의 근본사상에 바탕한 수행법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선가에 전해 내려오는 무자십절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자화두는 유무지무도아니요 진무지무도 아니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떤 가정이나 전제조건 없이 무자화두와 있는 그대로 매순간 대면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떠한 존재론적인 전제조건도 붙이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존재론적이요,실재론적인 어떤 근본 당체를 부정하는 무아와 연기라는 불교의 근본사상에 그대로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분석도 이론도 사유도 거부하고 취모검과도 같은 촌철살인의 대지혜인 의정을 돈발하게하는 것이 무자십절목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러 선의 종장들의 어록에서도 이런 무전제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있으며 이것은 저 아인중생수자의 사상

을 거부하는 금강경의 입장과도 그대로 상통하며 그래서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로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물론 선정도 강조하셨지만 지혜를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8정도에서도 정견을 처음에 두셨고 4성제와 12연기를 통찰하는 것, 또한 지혜라고 하셨습니다. 간화선에서도 선정에 함몰되기 보다는 지혜를 촉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 있는 가르침이라고 질타하시고 앉아서 선정에 함몰하기 보다는 24시간 화두를 챙기는 깨어있는 수행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소의경전인 금강경에서도 지혜바라밀을 제일바라밀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저는 간화선이야 말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부합하는 수행법이며 가히 최상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행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최상승이라 자부하는 수행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것에 걸맞는 수행자적 태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 예로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 스님들은 거의 대부분이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생사를 받지 않는 참된 성품 혹은, 생사를 초월한 진아/대아 등의 존재론적인 실체를 인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으로서 수행을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이뭐꼬 화두를 힌두교의 진아여여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등의 진아를 참구해 가는 수행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무아/연기사상과는 정면으로 상충되는 견해입니다. 연기와 무아의 가르침은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란 결단코 없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이치를 바르게 철견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존재론적인 그 무엇을 설정하는 어리석음(무명)과 그런 것을 '나' 또한 '내 것'하는 것으로 집착하는 탐욕과 그것이 잘 구해지지 않으면 일어나는 분노에 휩싸여 허망한 세월을 다보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는 정반대로 존재론적인 그 무엇을 세우고 그것과 합일하려 애를 쓰는 무지와 엄청난 집착을 기르고 그렇게 잘 안되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지 탐욕 성냄이 한국선방에 그대로 난무하고 있지 않습니까?

명분상으로는 견성성불 화두타파를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제법 영명하다는 스님들조차 참생명이니 진아니 대아니(아니면 실제로 무아까지도 세워서 무아가 진아라고 주장하는 스님들조차 있습니다)하고 실체를 내세워서 그것을 추구해 들어가는 그런식으로 이뭐꼬 화두를 해 나가는 엄청난 무지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법 영명하고 그나마 정진께나 잘한다는 스님들 이야기이고 그밖에 더 안타까운 일은 대중공양이나 해제비등에 마음을 빼앗겨 아까운 정진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그러고서도 최상승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옛스님들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은 도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 대신 바로 지금 여기서 방하착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방하착(놓아버림)합니까?

구해서 얻을것이 있다고 하는 그 집착을 방하착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탐진치로 대표되는 저 불선법들이요 저 강력한 의도들입니다. 그러므로 화두참구는 진아에 몰입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되고 탐진치 삼독을 해소하고 소멸시키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그래야 불교수행법입니다.


둘째, 우리 스님들은 최상승이라는 허상에 걸려서 중노릇이 최소 기본인 승행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거창하게 비구 250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불교의 근본 계율인 오계를 수행과 연결짓지 못합니다. 아니 계를 부정해야 최상승인 듯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실은 세상에 대한 엄청난 탐심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제하기 무섭게 세속의 욕망의 늪에 빠서 무애행이니 만행이니 하는 미명아래 온갖 불선법을 다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사판들은 매일 이렇게 오욕락에 젖어 살지만 우리는 한철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했으니 그래도 우리가 더 낫다. 우리는 이것을 만행으로 하고 역행공부 혹은 요중공부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저 속인 놈들은 매일 주지육림에 살지만 우리는 한철 제대로 살았으니 백배 낫다. .......이런 발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세상 그 어느 누구가 이를 일러 최상승이라 인정한단 말입니까?


셋째, 제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수행하려는 스님들은 상기병이나 소화불량등의 병에 걸려있습니다. 일어나지 않는 의정을 돈발하게 하려는 화두참구법 자체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들은 최상승이라는 방패막이를 들고 외도선과 막행막식과 머터러움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제대로 수행을 하려는 스님네들이 참선병에 걸려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고통받던 스님들이 요가나 기공이나 무예나 다른 유사 수행법을 만나서 현혹이 되면 10년 선방에 앉는 것 보다 한달 이런 수행한 것이 더 뛰어나다며 돌아다니는 것을 제법 목격하고 있습니다.


넷째,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슬퍼게도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간화선 지도자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된다 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큰 스님들이 보여주신 비상식적이고 비불교적인 언행을 접하면서 우리는 아무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예욕, 이기심, 탐욕, 집착 등으로 대표되는 세속적인 가치관 앞에서 무력해지는 큰 스님들의 모습을 보고 대부분의 후학들은 신뢰를 하지 못합니다. 큰 스님이 아니더라도 선방의 중진이나 구참 스님들을 통해서 후학들이 아무런 공부의 지도와 경책을 받을 수 없다고 한탄들합니다.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지도자가 부재하

다는 사실입니다.

기껏해서 내어 놓고 간화선의 우월함을 설하는 분들에게서 듣게 되는 것은 비불교적인 존재록적인 그 무엇을 찬탄하는 잘못된 가르침뿐이라고 한다면 잘못일까요?


다섯째, 지금 한국선방은 앉는 수행(좌선) 일변도로 치달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지도자도 없고 제대로 된 문제의식도 없고 그러다보니 수좌스님들의 행이 점점 머터럽게 되어가자 지금 한국선방은 이런 것을 막는 방책으로 앉는 수행(좌선) 시간을 자꾸 늘려가는 방향으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무조건 많이 앉아야 시비도 없고 막행막식도 하지 않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구조에 지배되어서 각 선방에서 앞을 다투어 좌선시간을 늘리고있습니다.

분명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지 수레를 때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조사스님께서 좌선만을 강조하신 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간화선은 묵묵히 앉아서 본래부처임을 관조한다는 묵조선의 좌선을 비판하고 이륙시중에 활발발하게 의정이라는 지혜를 일으킬 것을 강조한 수행법 아닙니까?


이상 최상승임을 자부하면서도 제대로 된 수행을 하지 못하는 한국불교 간화선의 현실을 몇가지로 지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간화선이어야하는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더 던지면서 제 기조강연을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저는 앞에서 간화선은 연기/무아라는 불교의 근본핵심사상과 일치하는 수행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간화선은 현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출가승단에게 꼭 필요한 수행법인가하는 점을 두고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화선은 이 시대에 필요한 수행법인

가 하는 문제의식이 "왜 간화선이어야하는가"하는 주제에 들어있다고 봅니다. 과연, 간화선만이 이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해탈/열반/성불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냐 깊이 고뇌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시대에 간화선 위기론이 나오고 있는 것은 간화선에서 다그치는 무전제의 극단적이고 직관에만 의존하는 수행체계 자체가 지금 시대 상황과 맞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도 솔직하게 점검해보자는 말입니다. 아무리 무전제와 직관적인 수행법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해도 지금 시대에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의 근기에 맞지 않는다면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해보아야할 것입니다.


현대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존중하는 시대입니다.

과연 간화선은 이런 현대의 흐름과 같은 맥락에 있는지 고뇌해봐야 할 것입니다. 중국 선종사도 천 몇백년 동안을 시대별로 시대정신과 시대의 문제의식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천태지관 북종선 남종선 간화선 염불선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시대에 궂이 대혜스님이 주창하신 간화선만을 최상승이라 고집 부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뇌해봐야 할 것입니다.


흑묘 백묘론이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화선이든 염불이든 기도든 위빠사나든 그 모든 수행법이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을 성취하고 또한 불교의 근본취지에 맞는 길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이런 것이 최상승을 표방하는 간화선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런 여러 수행법을 인정하고 그래도 해결 안되는 측면이 있다면 결국 간화선 수행법으로 확실하게 인도해주는 것이 더 최상승답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마무리 짓는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변해도 우리는 불교수행자입니다. 그리고 간화선이 불교수행법인 이상 그것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무아/연기/중도에 합치하는 수행법이어야만 합니다. 간화선 수행하는 출가수행인은 이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최상승이라는 이름으로 자칫 외도수행을 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부제;看話禪의 傳統과 曹溪宗의 敎育制度-


                                                 元 鏡(송광사 강원 학감)

                                                ekayanawk@hanmail.net










1. 들어가는 글


2. 看話禪의 傳統에 나타난 問題點

 1) 불교사상사를 통해 본 看話禪의 형성 과정

 2)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서 본 看話禪에 대한 인식 심리

 3) 수행법의 단일성에 따른 문제점


3. 現行 曹溪宗의 敎育制度와 敎科課程 檢討

 1) 看話禪의 實參과 교과과정 수학의 관계

 2) 현행 교육제도와 교과과정의 비판적 검토


4. 看話禪 傳統의 正體性 확립 方案


5. 마무리하는 글




1. 들어가는 글


  이 번 제8회 善友論講의 제목인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느낌이 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본 발제자는 현재 조계종의 제방 선원에서 實參하고 있는 수행법이 간화선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조계종의 수행법은 간화선이다.’라는 전제 하에 효과적이고 심도있는 논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부제목으로 ‘간화선의 전통과 조계종의 교육제도’라고 붙이게 되었다. 우선 논강의 원제목을 살펴볼 때 ‘현재 우리가 닦고 있는 간화선 수행법에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났을 경우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동차의 기계적 결함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운전자의 과실에 의한 것인가’ 라고 했을 때 발제자가 부제목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논강의 제목을 통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추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부제목에서는 운전자 과실에 의한 사고라는 가정 하에 간화선 자체에 대한 분석[기계적 결함] 보다는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행자의 교육적 측면에서 이 논강의 주제에 접근하려고 한다.   

  간화선을 최고의 수행가치로 표방하고 있는 조계종의 선방에서는 안거 때마다 대략 2천여명의 수좌들이 좌선수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수좌들이 어떤 결심으로 또 얼마나 올바른 방법으로 參禪을 實修하고 있는지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여 아무도 모른다고 하겠다. 즉 結齊에 들어간 수좌들이 각각 선방의 자기 좌복에 앉아서 呪力[다라니]을 하든, 묵조선을 하든, 수식관을 하든, 위빳사나를 하든, 염불선을 하든, 無記空禪을 하든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점검해주거나 간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사실 조계종의 선방이 간화선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의외로 많은 수좌들이 화두참구가 아닌 다양한 다른 수행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一心을 參究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심지어 화두를 참구하는 수좌 본인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법에 대해 비판적 반성을 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지만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이 정말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의 是非를 가려줄 인물도 제도도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의 수행법을 점검하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수행법을 점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소정의 교육과정을 통해 형성된 자신의 修行觀에 기초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전통강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선방에 입방한 수좌나, 또는 기본선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좌선하고 있는 수좌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 자신의 수행을 검증하며 좌선을 實參할 수 있을 만큼의 이론적 , 또는 실천적 불교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구나 수행을 하기 이전에 철저한 수행관을 확립하고 나서야 올바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간화선법이 최상근기가 수행하는 ‘最上乘禪’이라면 그 수행법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정확한 이유와 배경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오직 내 것만이 최고라는 상대적 최고병에 빠져 있거나, 최고라는 관념적 매너리즘[타성]에 빠져 있는 한 수행에 진취가 있기는커녕 그로 인한 독선의 해악은 자신부터 불치병 수준으로 병들게 하며 무의미하게 귀중한 시간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우선 간화선은 중국불교라는 특수한 배경 속에서 발생하여 꽃피운 하나의 불교 문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중국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대․소승의 여러 경전들을 5세기경 구마라집 때까지 거의 모두 한자로 번역하였으며 이후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종파(宗派)에서 각각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해 체계적으로 불교의 학문적 이론을 정립하였다. 즉 화엄종, 천태종, 삼론종, 정토종, 법상종 등의 교학체계가 정립된 이후 7․8세기 경부터 선종에서 차츰 조사선의 전통이 확립되어 꽃피게 되었다1). 다시 말하면 중국에서 禪佛敎의 수행법이 확립된 것은 선종의 외적 측면에서 불교 전체에 대한 이론적 확립의 토대 위에 이를 밑바탕으로 하여 중국인들이 이것들을 뛰어넘는 禪이라는 독특한 수행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문화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상위문화가 하위문화권으로 전래될 때에는 상위문화의 당시 모습이 그대로 화석처럼 고정화되는 ‘문화의 화석화 현상’이 대부분 발생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생성․성장․쇠퇴․소멸의 과정을 보이는데 화석화된 문화는 유기체로서의 변화가 정지되고 화석처럼 고정되게 된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전래된 禪의 전통, 그 가운데 간화선의 전통도 현재 우리의 불교문화 속에서 화석화된 문화현상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에 대해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 안에서 간화선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고려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현행 기본교육체계 및 교과과정 상에 나타난 문제점을 관련지어, 이에 한정하여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라는 이 논강의 주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2. 看話禪 傳統에 나타난 問題點


 1) 불교사상사를 통해 본 看話禪의 형성 과정


  여러 가지 측면들 가운데 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석존의 위대성은 對機說法에 있다고 하겠다. 요즈음 표현으로 한다면 ‘눈높이 교육[指導]’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불교 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교설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4성제, 3법인, 12연기설과 수행법으로서 8정도, 4념처 등 37조도품을 기본으로 하여 각자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그에 알맞게 對治法을 시설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전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비록 같은 病名의 질병의 경우 근본적인 처방은 같더라도 개인의 조건에 따라 약간의 처방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치는 하나로 통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참으로 각인각색이 됨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 길을 통하여 정상에 도달하게 된 결과는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론과 실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常同常別의 관계이다. 따라서 완전한 이론적 뒷받침 없이 올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토끼의 뿔이요, 거북의 털이다.

  석존의 깨달음은 5천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인도의 요가적 전통2) 위에 BC 6~5세기 경에 위빳사나-사마타-삿띠의 수행법과 중도적 연기설로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AD 6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150년경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대․소승의 여러 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 불교가 서서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5C 경 구마라집의 방대한 역경불사와 이에 따른 반야사상의 현창으로 인하여 중국인이 格義佛敎에서 벗어나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6C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전체 불교를 하나의 관점으로 敎相判釋하여 종파를 수립함으로서 교리, 사상적인 측면에서 불교가 가장 번창한 시기이기도하다. 바로 이 무렵 인도 향지국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중국으로 건너와 禪法을 펼치기 위해 9년을 面壁하며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마대사는 『능가경』3)을 기본으로 한 선법을 전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달마대사가 禪法을 중국에서 펼쳐지게 중요한 된 배경 가운데 하나도 당시 중국불교가 대소승의 여러 경전을 모두 번역한 후 이를 바탕으로 諸宗에서 교판에 따라 불교관을 전개하여 불교학이 번창한 위에야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즉 교법의 측면에서 튼튼한 학문적, 이론적 바탕 위에 새로운 창조적 문화로서 선종의 수행법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후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 확립한 이론과 실천적인 측면의 학문적 성과와 여래장계 경론이나 기신론 등의 경론이 뒷받침되어 선수행법은 중국적 배경 속에서 조사선의 전통을 수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달마가 선법을 전래한 이후 간화선의 전통이 확립되기 이전에 무수한 종류의 선수행법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4) 만일 이처럼 이론적 교리적 배경이 없었다면 선종의 수행법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5)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중국불교에 있어서 敎宗은 지나치게 정권과 밀착되어 法亂과 王朝의 흥망에 깊이 영향을 받아 그 역사가 오래가지 못하였으나 禪宗은 교종에서 이룩한 사상적 토대 위에 산중에서 선법을 펼치며 자급자족함으로서 법란과 왕조의 흥망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달마대사의 面壁觀 이후 宋代에 대혜스님의 간화선 전통이 수립되기 까지 수많은 조사들이 등장하여 독특한 가풍으로 선을 지도하면서 오히려 선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풍토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튼튼한 사회구조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한 사회는 자칫 경직되고 정신적 문화적 발전이 멈추게 된다. 사상적 혼란이 아니라 건전한 토론의 분위기를 통해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간의 의사소통을 통하여 문화는 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문화로서의 선수행법도 같은 논리로 살펴볼 수 있다. 수많은 조사들이 나타나서 다양한 선법을 펼치다가 자연스럽게 경쟁하는 가운데 마침내 간화선이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전통이 고려시대에 한반도로 전래되어 1천년 가까이 화석화된 형태의 문화적 단상을 보이고 있다. 오직 하나만이 인정되는 간화선의 선풍은, 여래선에 있어서 석존이 應病與藥式으로 지도하여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마치 萬病通治藥式 수행법으로서 다른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된다.  

  불교의 사상이나 수행법은 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시대와 인물에 따라 차츰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에 나타난 이론이나 실천법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전체 불교에 대한 역사관과 사상관이 수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수행법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배경 없이 어떻게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라고 하듯이 이론에 대한 분명한 立脚地가 없이는 수행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2)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서 본 看話禪에 대한 인식 심리

  

  우리의 문화 가운데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들이 많이 있다. 옛날부터 우리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우리의 문화 속에 이식시켜 나름대로 한민족의 전통 문화를 수동적으로 형성하였다. 비록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어떤 것은 중국의 문화와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중국문화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권으로 轉移될 때, 즉 상위의 문화가 하위의 문화에 이입될 때에는 상위 문화가 하위 문화권에 그대로 전이되어 그 문화 속에 화석처럼 굳어져 남아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이 ‘문화의 화석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6)

  한국의 佛敎文化 속에서 간화선의 전통도 또한 문화의 화석화라는 현상에서 바라볼 경우, 다른 문화 현상 가운데 화석화된 것처럼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위문화권에서는 전이되기 이전 상위문화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해바라기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감히 하위문화권에서는 상위문화를 변화시킨다는 의식조차도 불경한 것인 양 인식하여 원형 그대로를 잘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상위의 문화권에서 한 문화가 하위의 문화권으로 전이된 상태 그대로 성장을 멈춘 채 박물처럼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위문화권에서 발생된 그 문화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문화 가운데 화석화된 그 문화에 대하여 대단히 경직된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박제된 동물이 그 변화를 멈춘 채 수 천년이 흘러가도 항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것처럼 화석화된 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골화[硬直]된 채 변화를 멈추게 마련이다.7)

  단적으로 조계종의 간화선 전통 속에서 1700공안은 마치 금과옥조처럼 되어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하나의 禪文化 현상이 되었다. 우리는 간화선에 있어서 1700공안이야말로 경전의 가르침에 앞서는 깨달음의 준칙으로 까지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는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서 오는 전형적인 인식 심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우리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 현상에 대해 생멸하는 싸이클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로서 인식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화석화된 이 문화는 영원히 성장이 멈춘 이상한 기형물로서 한 문화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또 한 가지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을 절대시함으로써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치]도 모른 채 그것을 무조건 ‘최고’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최고라고 하는 의미의 진정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 최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이 최고인 의미는 그것을 최고이게 하는 어떤 과정[상황] 속에서 최고라고 하는 가치가 창출된 것이다. 그런데 하위문화권에서 받아들인 그 상위문화의 모습은 조건 없는 최고에 빠져 오히려 그 가치를 왜곡해서 절대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간화선이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宋代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간화선과 상대적인 측면에 위치해 있었던 묵조선과의 관계에서 바라볼 때 간화선이 가지는 최고의 의미가 바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한 정황을 모른 채 무조건 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최고병일 뿐이다.8) 

  한편 화석화된 문화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로서 그것에 대해 경직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의 문화를 원형 그대로 보존함으로서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남방불교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위빳사나의 수행법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남방불교권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수행법이나 경전들이 원형 그대로 오늘날까지 전래․보존되어 그 생명을 이어간다고 하는 점에서는 문화의 화석화라고 하는 것이 그저 단점만 가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래된 상위의 문화에 대해 경직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화를 발전시키고 새롭게 다른 문화로 창출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 따른 문화의 이중성인데 역시 한국불교 안에서 간화선이 가지는 성격도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문화 속에서 간화선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3) 수행법의 단일성에 따른 문제점

  

  현재 조계종은 선종이며 간화선법을 정통으로 인정하면서도 通佛敎的 종교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 있어서 종파에 따른 소의경전을 무엇으로 정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과연 그 종지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수행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현재 조계종에서 하고 있는 기도[천수경 독경]나 염불과 신도포교방법에 있어서도 전혀 선종으로서의 특징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현실은 수좌들이 선방에서 염불선을 하든, 주력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신도포교에 있어서는 완전히 염불종에 준하는 것이어서 과연 무엇을 가지고서 조계종을 선종이라고 할 것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수행이든 포교든 불사든 모든 것이 선종의 본래 종지로 일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확한 가치 정립이 되지 않으면 조계종 스님들조차도 간화선을 대하는 입장이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이번 논강의 주제인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 역시도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우리는 단일한 수행법인 간화선을 고집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선종의 모습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수행법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에는 한국불교사에 나타난 특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불교가 통일신라시대 원효스님 이후 통불교적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과 조선시대 왕권에 의해 교종과 선종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여러 종파가 가진 특징들을 외압에 의해 상실한 채 하나의 통합불교라는 모습 속에 두리뭉실하게 섞이게 된 것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9)  

  우리는 과거에 역사의 심한 굴절을 겪으면서도 간화선의 전통을 가장 주요한 것으로 여겨 그 전통을 전등방식에 의해 이어왔고 다른 수행법 가운데 몇 가지는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다양한 수행방법이나 전통들이 올바로 계승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선종이나 교종의 각 종파들이 원형대로 그 전통을 계승하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수행법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 비교하는 분위기 속에 교리적으로나 수행법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문화란 경직된 구조 안에서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다양한 종파와 수행법이 있는 상황에서는 역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각각의 수행법이 정체되지 않고 깨어있기 때문에 발전을 위한 유동적인 상태라고 하겠다. 즉 각각의 것들은 정체된 수행법이 아니라 수행법 간 선의의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유기체로서의 역동적 싸이클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각 수행법들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더 발전하게 된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 고려 말까지는 여러 종파에서 다양한 교리적 체계와 수행법이 경쟁적 생멸구조 속에서 흥망을 거듭하면서 이론과 실천체계가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능동적이고 유기적인 구조가 조선조 왕권에 의해 인위적인 구조변화를 당하면서 전통이 왜곡되고 경쟁관계가 느슨해지면서 유기체로서의 생명력은 소멸되어 갔다고 하겠다.10) 그 이후 간화선의 전통은 단일 문화 속에서 역동적 분위기를 잃은 채 그 명맥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3. 現行 曹溪宗의 敎育制度와 敎科課程 檢討


 1) 看話禪의 實參과 교과과정 修學의 관계


  비록 고려 때 간화선의 전통이 한반도에 전래되어 오다가 조선 세종 이후 여러 다른 수행법 간에 서로 경쟁적 발전이 멈춘 상태로 화석화된 문화의 단상을 보이고 있지만 과거에는 체계적인 강원 기본교육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전체 불교를 조망할 수 있는, 그래서 나름대로 간화선을 수행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상태에서 선수행을 실천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아무런 이론적 기초도 없이 누구나 간화선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굳이 최상승선이라고 이름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보면 그 분들이 과연 얼마나 교법과 수행에 관한 이론에 해박한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행에 대한 이론적 바탕 위에 투철한 실천이 뒷받침 되어야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1)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를 냉철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우리는 출가하여 일정기간 승가에 대한 기초 습의과정으로서 행자들의 기초교육 과정이 있다. 그리고 사미, 사미니를 대상으로 한 기본교육 기관으로서 講院(승가대학)과 동국대학, 중앙승가대학 등이 있다. 주로 이 과정 중에서는 宗憲에 따라 “석가세존의 自覺覺他 覺行圓滿한 根本敎理를 奉體하며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하기 위한 4년의 기본교육 과정을 이력하게 된다. 물론 기본선원에서는 사미를 대상으로 선수행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어떤 것이, 즉 강원에서 기본교육을 이수한 후에 선을 實修하는 것과 곧장 기본선원에 들어가 선을 實參하는 것 가운데 선수행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총체적인 교육체계나 교과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수행, 특히 간화선의 수행법이 교리발달사에서 최고로 발전된 것일진대 선수행법은 근본불교 이래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교리적으로 발달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교리사적으로 초기대승불교 시대에 반야경계와 『화엄경』,『법화경』등 여러 대승경전의 발생과 중기대승불교 시대에 龍樹 보살과 無着, 世親보살 등에 의한 중관, 유식불교의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여래장사상 등도 선불교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데도 선수행법을 배우기 전에 이러한 기초 교리사와 이론적 배경없이 무조건 앉아만 있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수행법은 이처럼 사상사적 배경에 따라 기본적으로 반드시 배워야할 것 과목을 배우지 않고는 도저히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수학에서 1,2,3,4… 등의 아라비아 숫자와 가감승제, 2차방정식, 3차방정식 등 수학의 기초조차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미분, 적분을 가르쳐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정한 교리적 기초나 사상사적 발달과정을 알지 못하고는 선수행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捨敎入禪이라는 것은 교리가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교관을 수립한 다음 모든 교리적 인식의 틀을 접어두고 實參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성립한다. 이론이 없는 실천은 무지한 행동으로 흐리기 쉽고,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허한 말장난이 되기 쉽다. 智目行足, 이론과 실천이 잘 조화를 이룰 때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2) 현행 교육제도와 교과과정의 비판적 검토


예를 들어 조선시대 강원기본교육 기간은 10여년이었으며12) 이 기간 중에 간화선을 실참하는데 기초가 되는 대부분의 모든 경론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한문이 기본적인 공용어로 쓰여지던 시대적 상황에서 일정 기간 강원 공부만 하여도 스스로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시대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란 오늘날에 있어서 4년여의 짧은 기간에 강원의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선수행을 하는 경우와는 어느 면으로 보나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기본 교육의 모습은 수행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기초마저도 완전히 이력하지 못한 채 성불이라고 하는 목표지상주의에 빠져 최상승선을 한다는 최고병에 떨어져 숫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형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강원교육 과정에서 불교의 이론체계를 완전하게 배우기도 불가능하지만 꼭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기본적인 불교관 내지는 수행관을 확립할 정도의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 강원의 기본교육에 나타난 실정은 그러한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는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한국불교사 등과 교리발달사, 불교사상사, 수행법 발달사와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라고 할 중관사상,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등에 대한 이해도 없이 후기 대승경전 이후에 나타난 禪書나 조사들의 선어록 등을 중심으로 편성된 교과과정을 숙고해보면 오늘에 직면하고 있는 종단의 여러 문제들이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현재 학인이 강원의 교과과정을 통해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 수행관, 불교관을 종합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실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인들조차도 강원은 비구계를 받기 위한 이력과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강원을 마치고 참선을 한다고 했을 경우에도 수행관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자연히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선방의 부정적 문화에 물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기본교육기관인 강원에서 학인이 4년 동안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현재 조계종의 교육체계로 보아서 강원 등의 기본교육기관은 실질적인 교육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나 마찬가지다. 즉 조계종이 선종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본 교육기관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 있거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이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의문이 있으면 이것을 해결하고자 다시 배울 수 있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일단 기본교육과정을 이력하여 마치고 선방에 들어가면 그것으로서 모든 형식적 교육은 끝나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개인적으로 책을 본다든지 누구에게 물어보는 과정이 있을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현재 선방의 수좌들이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무엇을 묻고 배우려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어떤 형태로든 공부가 잘 되면 물을 것이 있겠지만 공부가 되지 않는다면 물을 것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수립하지도 못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 수행자는 무엇을 가지고 망상과 혼침이라는 크나큰 번뇌마를 물리치고 성불할 것인가.

      


4. 看話禪 傳統의 正體性 확립 方案


  고려시대 태고보우스님 이후 간화선이 변함없이 선종인 조계종의 수행 전통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러한 옛날의 역사와 전통에 취하여 간화선만이 최고선이라는 자랑에만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역대조사스님들이 간화선을 통해 부처님의 혜명을 단절하지 않고 이어오고 있더라도 그 사실만을 가지고 현재 우리들에게 있어서 간화선의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화선 수행법을 잘 수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조의 혜명을 잇기는커녕 자신의 지혜 종자조차도 태우는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한국불교가 통불교라는 특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선종인 조계종 안에서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인 염불이나 주력, 사경, 절 등의 행법에 대해 아무런 생각없이 관대하게 용납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근본불교에서 행하여 내려오는 위빳사나 수행법 등에 대해서는 경계와 천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조계종이 분명 선종이라면 기본적으로 일체 모든 의식이나 수행이 禪과 관련지어 일관되게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스님들이 하는 매일 매일의 예불 의식이나 심지어는 신도를 포교하는 일에 있어서도 참선을 매개체로 하여 그 모든 불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약 10~20% 정도의 스님들이 수행하는 참선을 마치 자랑스러운 전유물처럼 생각하며 수좌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화선법을 정통으로 하는 조계종의 정체성 확립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부터 진지한 숙고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또한 누구나 최소한 조계종사[선종사]를 정확히 배워 우리가 정통으로 여기고 있는 간화선의 뿌리를 잘 인식하고 수행법의 발달과정을 올바르게 이해한 후 수행에 임해야할 것이다. 근본 뿌리도 알지 못하고 어찌 바른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간화선을 수행하기 위해 사전에 이론 정립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불교사에 입각하여 불교 전반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 기본교육과정에서 교육기간이나 체계를 바꿀 수 없다면 꼭 필요로 하는 과목에 대해서는 한글로 된 교재를 통해서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수행하는 가운데 이론 공부가 필요할 경우 해제 기간 중 언제든지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학림들이 개설되어 수행풍토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배우는데 인색한 풍토에서는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요사이 기본교육기관으로서의 강원이 현대화에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무엇을 ‘강원의 현대화’라고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3) 모든 교과과정을 동국대나 중앙승가대처럼 현대화한다고 하여 우리의 의식이 현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강원이 간직하고 있는 수행전통을 살리면서 이에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는 과거 역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위에 세울 수 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거울이며 미래를 예측하는 나침반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도 불교의 역사와 사상사, 수행방법들에 대한 발달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요소를 포용하면서도 일정한 질서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선종인 조계종 내에서 다양한 수행방법을 인정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러 수행법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점에서 엄정한 연구가 되어야할 것이다. 분명히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법이라면 다른 수행법과의 비교에 있어서 분명히 간화선법의 변별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간화선을 전통으로 하는 현재의 수행법에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객관적 측면에서 다른 수행법과의 同異点에 대하여 깊이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무조건 아전인수식의 최고라는 주장이 아니라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서 분명히 그 최고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묻고 연구하는 승가의 풍토가 조성되어야 문화적 경직성이 사라져 발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다. 수행의 이론이나 방법에 대해 경직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에서는 발전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禪이 최고이고 교학을 하는 것은 천하다는 잘못된 인식, 즉 교를 무시하는 식의 사교입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올바른 풍토에 따른 수행의 결과[깨달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5. 마무리하는 글


  이상에서 조계종 간화선의 수행법 위기를 현행 교육체계 및 교육과정 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앞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간화선 참구에 대한 공부방법론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에 몇 가지 제안 사례를 인용하여 보려고 한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지만 비판적 입장에서 눈여겨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 최근에는 수행자들의 전유물처럼 간주되던 간화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특유의 매력과 함께 마음의 평화와 건강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일반인들까지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추세다. 각화사 선원장 고우 스님은 “간화선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음으로써 사상의 대전환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라며 “간화선은 1000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 검증된 탁월한 생활 수행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간화선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간화선에 대한 잇따른 비판에서 알 수 있듯 부족한 선지식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수행체계의 확립과 대중화의 노력은 한국 간화선이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있다14)


  2. 특히 오늘날 선불교 혹은 조사선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는 ‘공안선(公案禪)’과 ‘돈오선(頓悟禪)’ ‘견성성불(見性成佛)’ 만을 주장하는 목소리만 한없이 높아져 있으며, 그러한 주장과 선사상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주창되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고 소위 그들이 강조하는 ‘견성성불’이라는 목적에만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여 선사상 혼자만 제멋대로 치달리게 하고 있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15)


  3. 선우논강 제7차에서 각묵스님이 지적했듯이 “남방불교의 가장 큰 매력과 힘이라면 이런 두 유형의 참선수행(사마타/위빳사나)에 대한 분명한 방법론과 여러 단계의 명상주체를 체계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수행방법론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간화선의 전통에서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아닐까.


  4. 앞으로 이러한 수행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모든 수행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바로 얼마 전 서울대생 8명이 동시에 출가한 일이 있었는데 그 동기가 된 책이 있었다. 그것은 재가인으로서 부단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한 翠巖 姜丁鎭거사가 쓴 『영원한 大自由人』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행단계에 따라 수행방법에 달라져야 한다”고 하여 觀法→念法→疑心法[화두]을 통해 돈오에 이르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즉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관하게 되면, 수행이 나아가면서 그 觀이 念으로 바뀌어 삼매로 이어지게 되고, 그 삼매가 수행자의 거친 麤煩惱를 평정하게 되면 드디어 수행자는 삼매인 한 생각이 나오는 근원을 알고자 하는 대의심이 문득 일어나게 된다. --- 이렇게 하여 최초의 부처님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수행의 단계와 그 깨달음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시 남방불교는 관(념)법에 치중하여 의심법을 모르기 때문에 구경각에 이르지 못해 선지식이 출현하지 못하였고, 북방불교는 처음부터 의심법[화두법]만을 고집하므로 돈교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부터 초보자들에게 조사어록에 나오는 격외의 도리가 수행의 방편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자칫 착각 도인을 만들어내어 수행불교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간화선법이 수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앞으로 수행법 자체에 대해서는 제방 선원의 입승 및 선원장 이상의 스님들이 모여 진지하게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왜냐하면 간화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선학자의 측면에서 접근하는데도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며, 나아가 간화선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하여 선방 대중 자체 내에서 수행자의 입장에서 냉철히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참고문헌

1.『僧伽敎育』제1집(조계종 교육원,1995)

2. 法寶新聞 706호 2003년 5월 19일

3. 鄭性本 지음, 『禪思想史』(불교사상사, 1993)

4. 鄭性本 著, 『禪佛敎 槪說』(韓國禪文化硏究院)

5. 翠巖 姜丁鎭, 『영원한 大自由人』(경서원, 2001)

6. 董群 著/김진무․노선환 共譯, 『祖師禪』, (운주사, 2002)



제8회 선우논강 - 왜 간화선인가

논평문 1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를 읽고

                                        도 법(실상사 주지)


발제문을 잘 읽었다. 덕택에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 발제문에 나타난 발제자의 문제의식에 대부분 공감한다. 종단의 선수행 풍토에 대한 현실진단과 문제제기와 방향제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발제문은 아쉽게도 간화선의 본래 의미와 정신 또는 특징과 장점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자기 성찰과 문제제기 부분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짚어내기 보다는 교육제도의 이름으로 두루뭉실하게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발제문 내용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성격과 다르게 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컸다. 주최측이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하는 주제를 잡은 것은 간화선을 우뚝 일으켜 세우려는 충정에서였다. 종단의 전통적 수행법인 간화선의 특징과 장점들을 분명하게 들어냄으로써 간화선의 전통이 오늘 다시 빛나게 하는 길을 열어보려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물론 간화선을 우뚝 세우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중요하다고 여겨온 여러 가지 것들을 혁파하거나 버리는 아픔도 각오하여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불교에선 정확한 현실진단과 원인분석을 통해서만 올바른 해결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문제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솔직하게 들어낼 때 비로소 새로운 태어남이 가능하다고 한다. 간화선을 우뚝 세우려는 충정이 진실이라면 모든 아픔과 수치를 각오하고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하고 그렇게 된 원인을 명확하게 찾아내는 데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자리가 선우스님들이 뜻한 바대로 간화선을 반듯하게 세우는 자리가 되도록 하는데 운력하는 심정으로 발제문에 대한 질문과 평자의 고민을 솔직하게 내놓고자 한다. 혹시 내놓는 내용들이  과도한 점이 있을지라도 간화선을 빛나게 하기 위한 충정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1. 발제문에 대한 질문


■ 선방의 현실진단에 대해 요약해본다.

  ■ 간화선이외의 수행이 혼재함 ■ 간화선에 대한 올바른 신념이 빈곤함

  ■ 지도해줄 선지식이 없음 ■ 일방적인 간화선 최고주의에 빠져있음


  발제자가 진단한 내용을 보면 우리 현실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비상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병이 깊다고 여겨진다.


■ 간화선 전통의 문제점에 대하여 간추려 본다.

■ 교학적 이론의 토대위에 조사선(간화선)이 수립되었는데 오늘 우리는 이론적 토대를 간과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맹목의 간화선으로 매몰되고 있음.

■ 수기설법, 응병여약의 전통에 따라 독특하고 다양한 가풍이 활발발하게 전개되어 왔는데 우리 현실은 개방성과 다양성이 용납되지 않는 간화선 획일주의에 빠져들고 있음.

■ 주체적이고도 창조적인 입장에서 간화선 전통을 가꾸어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중국으로부터 전해 받은 간화선 전통이 화석화 되었고 그로 인하여 간화선 절대주의에 매몰되었으며 나아가 간화선위기에 처하게 됨.


정리해 보면 간화선 정신에 대한 무지와 왜곡, 간화선주의의 편협성과 배타성, 간화선 계승의 비주체성과 비창조성으로 요약된다. 발제자의 문제제기로 보면 간화선의 사상사적 진단과 획기적인 모색이 있어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 간화선수행법의 단일성의 문제를 정리해본다.

“선방자체에서 염불, 주력하는 등 선종의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또는 선종의 본래 종지로 일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보면 수행법이 단일해야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문화란 경직되면 발전할 수 없다 또는 다양한 종파와 수행법이 있을 때 역동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보면 수행법이 다양해야 된다는 뜻으로 파악된다. 발제자의 본뜻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드러났으면 한다.


■ 간화선의 실참을 위한 이론교육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선수행법은 사상사적 배경에 따라 이론체계를 확립하지 않으면 올바른      수행이 불가능하다. 捨敎入禪 이란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불교관을 수립     한 다음 실참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발제자의 견해에 의하면 현행 기본교육의 내용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선사(방장, 조실, 구찰)들의 선에 대한 인식과 지도의 문제라고 여겨진다.


■ 현행 교과 과정의 문제와 간화선 정체성 확립의 문제를 짚어본다.

 (두가지 내용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보여짐으로 함께 묶었음)


  “한글세대, 서양식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에게 현행 교재를 갖고, 4년간 공부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짧다. 교리발달체계에 따른 교과과정을  수립하여 올바른 불교관, 수행관을 확립하게 해야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직강사 스님들이 뜻을 모아서 교재의 한글화와 교 리 발달체계에 맞는 교과를 편성했으면 한다.


■ 마지막 제안에 대해 살펴본다.

“선지식의 공백을 대신할 수행체계 확립과 대중화 노력을 해야 한다.” “공    안선, 돈오선 절대주의와 견성성불이라는 목적에만 가치부여 한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제기에 대하여 귀 기울이고 바람직한 모색을 해야 한다는데  공감한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최근 간화선에 대한 비판을 “간화선 흔들기”로 규정하는가 하면 문제의 핵심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간화선만이 최고라고 아부하는 일부교계 신문들의 정치적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진다.


2. 간화선을 세우기 위한 평자의 고민 몇 가지


 ■ “부처님은 공양 때가 됨에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고 공양하고 발우를 씻고 정좌했다” 중생의 삶은 온통 탐진치의 삶이다. 2600여 년전 부처님께서 탐진치를 넘어서는 수행자의 윤리적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금강경의 첫대목이다.

■ 선불교의 전통을 확립시킨 대표적 인물이 백장선사이다.

자발적인 청빈과 자립적인 삶을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이 “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다. 백장청규 정신을 상징하는 “一日不作 一日不食”은 천수백년전 중국 땅에서 탐진치를 넘어서려는 수선납자의 윤리적 삶을 온몸으로 웅변한 내용이다.

■ 탐진치를 극대화시키는 체제가 자본주의사회 또는 현대문명사회다. 탐진치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과 그를 넘어서기 위한 납자의 윤리적 삶이 나와야 한다.

부처님과 백장선사처럼 탐진치를 극대화 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을 넘어서는 수선납자의 윤리적 실천이 실제 일상생활에 살아 있어야만 간화선을 우뚝 일으켜 세울 수 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무아사상이다. 연기무아 사상을 확대 심화시킨 것이 대승불교이고 연기무아 사상의 대승불교적 표현이 “본래청정, 본래부처”의 논리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부처’임을 자각 확신하고 살아가는 자를 보살이라고 했다.

특히 화엄경에 오면 수행하고 깨달아서 부처되는 논리를 넘어서 본래 부처이므로 지금 바로 부처짓 하자는 입장이다. 연기무아 또는 본래 부처의 사상과 정신이 선사상의 기본토대이다. 본래부처의 입장임으로 無所救 無所得의 실천이 이루어진다.

‘본래 부처’ ‘無所救 無所得’의 활발발한 실천이 간화선이다. 따라서 ‘연기무아’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기본으로 할 때 간화십종병을 극복하게 되고 나아가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론으로 생명력을 갖게 된다.

■ “발심수행자들이 어떻게 마음 써야 합니까!”

‘모든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지만 실제 제도 받을 중생은 없다’라고 해야 한다. 금강경 내용이 출가수행자인 싯달타의 마음 씀과 실천이라고 한다면

“비록 홀로 은거수행 하지만 일찍이 한순간도 중생의 고통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 수행자의 이야기는 보리달마의 종교적 양심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수선납자의 일상적 삶이 同体大悲의 서원과 실천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간화선이 빛날 수 있다고 본다.

■ “無我相, 無人相… 者가 보살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백척간두에 진일보” “大死得活”등은 간화선정신의 특징을 나타낸 가르침들이다. 자기존재를 완전히 내던지는 무아의 실천을 극명하게 드러낸 표현들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大死)할 때 본래면목이 활발발하게 현현(得活)함을 뜻한다. 선방상(相), 간화선상(相), 수자상(相), 조실상(相), 방장상(相)을 일도양단하는 본래부처 殺佛殺祖정신으로 숨쉬고 밥 먹기 위해 정성을 모을 때 간화선은 우뚝 일어선다.

■ “應無所住 而生其心” “隧處作主 立處皆眞”은 늘 상 “지금 여기”라는 현장정신, 주체적이고도 창조적인 자유정신, 무한한 개방성과 유연성을 나타낸  불조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간화선은 현장성, 개방성, 자유성이 온전히 존중되고 온전히 펼쳐질 때 21C 구원의 수행론으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매우 단순화 시킨 논리이긴 하지만 평자 나름의 뼈아픈 성찰과 모색을 통한 제안이다. 오늘의 이 자리가 간화선 수행풍토의 문제를 해결해내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를 읽고


                                                                    月  庵

                                 

  불교가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선이 선 본래의 면목을 찾는 것이 한국불교의 당면과제이다. 한국불교는 가장 비불교적인 요소가 불교적인 요소를 지배한지 오래 되었다. 불교에 있어서 수행과 깨달음, 즉 수증의 문제는 가장 핵심논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비불교적 요소에 의해 잠식당한 채 제 기능을 발휘해 본적이 드물다. 간경, 주력, 염불, 참선 등의 전통적 수행론은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고, 조계 승단은 시대의 요구와 문명사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한편으로 수행이란 명목 아래 아란야의 정처에 매몰되어 세속의 질곡과 고통의 역사에 대한 대승적 희생을 상실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화의 방편이란 미명아래 외도사법을 자행하며 시대대중을 미혹시키고 말류적 세속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불교의 무지와 위기 앞에 그나마 역사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信行結社가 조직되고 나아가 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불교의 수행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자생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다가 온다. 이와 같은 처절한 고뇌와 반성의 심정으로 선우논강이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아울러 무한한 가능성으로 발전되길 희망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해 있다. 이러한 다변화의 시대에서 “불교만이 진리”이라든가 여러 宗旨가 함께 어울려 있는 불교 가운데서도 “禪이 최고 가치이며, 선 가운데서도 看話禪만이 최상의 방법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하지만 불교의 위상정립과 간화선 수행전통 회복을 통한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이라는 대작불사의 원력으로 우리는 불교가 이 시대의 최고 진리임을 설파해야 하고, 선문화가 미래문명의 대안임을 설명해야 하며,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방법임을 이론과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여러 가지 정립되지 못한 수행방법들이 어지럽게 혼재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수증론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간화선 수행에 대한 논강이 이루어 진 것이다.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 -간화선의 전통과 조계종의 교육제도-라는 부제를 단 발제문에 대해 논평자는 발제자의 전체적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이 시대의 간화선 재정립이라는 주제의 특성상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라는 발제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지만 조계종의 교육제도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반성하는 자세는 매우 생산적이라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 조계종의 정체성의 문제 특히 수증론에 대한 재정립의 문제에 있어서 교육제도는 가장 핵심 문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발제자는 시의적절하면서도 기본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어서 크게 비판적으로 논평할 대목이 없는 것 같다. 간화선 재정립에 대한 다방면의 발제가 아쉽긴 하지만 이후에 이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면서 기본적으로 발제자와 같은 관점에서 몇 가지 점을 보충하면서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으로 논평에 임하고자 한다.


                                   

  우선 “왜 간화선이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은 두 가지 구체적 물음이 가능하리라 본다. 첫째 “조계종의 수행법은 간화선이다”라는 전제하에 꼭 간화선이어야 하는 이유로써의 물음이며, 둘째 통불교적인 역사가 강한 조계종에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을 수 있는데 “왜 간화선만을 강조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발제자는 전자의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면서 여기에 다른 제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역사와 조계종이라는 범주 안에서 과연 “조계종의 수행법이 간화선이다”라는 명제가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발제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한국불교는 역사적으로 통불교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수행방편이 시설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看經, 呪力, 念佛, 參禪 등의 수행과, 참선 가운데에서도 念佛禪, 楞嚴禪, 呪持禪, 看話禪 등의 다양한 수행방편이 혼재한 가운데 전문 수선 납자들에 의해 간화선 우위의 입장이 견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계 승단이 출가와 재가의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었다고 인정한다면, 出家二衆의 10% 내외와 극소수의 재가 불자들이 주로 참선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참선하는 대중 가운데에 看話에 의해 수행하는 수는 이보다 더 적어질 수도 있다. 그 외의 대중은 아예 불교적 수행을 하지 않거나 참선 외의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입장에서 말하면 간화선 이 외의 다양한 방편이 수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왜 간화선만을 강조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유원한 불교역사에서 근 1000년 이상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정통 수행론으로써 아직도 그 수행전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또한 간화선이다. 이러한 간화선풍을 더욱 진작시켜야 하며 문화의 화석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간화 본래의 역동성을 되살려 이 시대에 가장 알맞은 수증론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조계종의 수행법은 간화선이다”라는 입장에 동의해야 한다. 외국의 불교학자들에 의해 한국에는 “禪은 있되 禪學은 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이것이 한국선학이라고 천명할만한 것이 없는 것 또한 우리의 실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제자는 간화선을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 비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불교에서 간화선에 대한 완벽한 수증이론의 정립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이다.

 

                                    

  발제자는 먼저 조계종의 수행방법이 간화선이라는 전제하에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간화선의 형성과정을 통해 본 오늘의 문제를 지적함에 있어서, “불교의 사상이나 수행법은 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시대와 인물에 따라 차츰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에 나타난 이론이나 실천법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전체불교에 대한 역사관과 사상관이 수립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로 한국불교의 문제는 구성원들의 많은 수가 전불교에 대한 역사관과 사상관이 투철하게 수립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다. 간화의 종장이 간화선에 대해 시대의 언어로 대응하지 못하는 현상이 우리의 실정이다. 간화의 배경과 정신에 투철해야 하는 것은 간화행자의 기본이다.

  사족을 붙여 간화선이 형성되는 불교 사상사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직접적인 원인으로 대두되는 것이 첫째 文字禪 둘째 黙照禪 셋째 無事禪(無勞動) 넷째 無悲禪에 대한 비판과 함께 마지막으로 中華主義의 고취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과 사상에 대해 우리 선자들이 확고한 역사관과 사상관을 가질 때만이 올바른 수행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어떤 수행법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배경 없이 어떻게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불교사상 전체와 선사상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고, 간화방법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바탕위에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신심과 중생제도를 위한 깊은 원력으로, 화두를 의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의 현성공안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간화선은 수행되어지기 어렵다.

  그리고 간화의 방법론에 대하여 간화선의 종장들은 決擇, 問答 參究, 琢磨, 行脚, 點檢, 擧揚, 印可, 保任 등 다양한 수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방법들은 모두 情態的이고 消極的인 坐禪의 모습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活潑潑한 적극적이고 역동인 일상삼매, 일행삼매적인 行禪의 모습이다. 이러한 다양한 수증방법을 통해 일상생활이 禪行으로 승화되게 하는 간화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첫째 선지식의 敎示, 둘째 간단없는 疑情, 셋째 중생을 향한 悲願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 있어서 선지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화두의 결택으로부터 공부 경계에 대한 문답, 거량, 점검, 인가에 이르기까지 선지식의 지도는 가히 필수적이다. 어떻게 보면 직접 깨닫는 것은 당사자이지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선교방편에 있어서 스승인 선지식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간화의 생명은 公案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다. 의정이 없는 간화는 사구로써 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저절로 간단없이 일어나는 現成公案이 되지 않는다면 간화선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지혜는 자비의 땅에 피는 꽃이다. 따라서 중생을 향한 비원이 없이 간화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옛 조사들은 누차 강조한다. 이러한 인연이 성숙되어야만 원만한 공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의 정통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불교역사에서 이러한 간화선의 전통이 제대로 정립되어 주동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는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제대로 실현된 역사가 있다면 계승 발전시키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시급히 재정립해서 간화선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발제자의 관점과 같이 우선 철저한 간화의 정신과 방법론에 의해 수행지침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行住坐臥의 見聞覺知라는 전생활 영역에서 활발발하고 치열한 수행정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혜가 간화를 수선의 원리로 내세워 선풍을 새롭게 진작하고,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以悟爲則) 간화의 방법론이 지금까지의 선수행법에 비해 徑截門임을 확인해 주었지만, 선의 깨달음이 格物과 經世라고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송대의 사상계는 이미 주자를 중심으로 하는 신유학에 주도권을 넘기고 마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의 보조선사가『간화결의론』을 통해 간화선을 도입하고, 고려말 태고, 나옹선사가 원나라에 들어가 간화선 중심의 임제법통을 전수받아 왔지만 어지러운 시대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는 고려는 멸망하고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에 의해 척불시대로 접어든다. 척불의 시대를 살다간 조선의 선사들과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간화선과 간화의 종장들은 한결같이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적 대안을 창조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제자는 문화의 화석화 현상에서 간화선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발제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문화의 화석화라고 하는 것이 꼭 단점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전통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그 만의 장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이며 경직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에서 간화선이 세계문화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조계종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그 바탕위에 다양한 근기의 수행자를 위해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수용하되 이 또한 간화선적인 기초위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간화선이 제출되었던 중국에서조차 송대 말 이후부터 연명연수를 연원으로 하는 선과 정토의 결합인 禪淨一致의 종지에서 念佛禪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 후 명, 청대를 거처 선의 쇠퇴기를 맞이하다가 근대의 虛雲에 의해 선이 중흥되면서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선자들이 “念佛者是誰?”(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염불선적인 화두를 들고 있다. 물론 어떤 선의 방법론도 방법론 그 자체가 최고일 수는 없다. 최고의 방법론은 방법을 수용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가정할 때 간화의 방법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그리고 유연성 있는 實事求是적인 방법론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선자가 경론을 보게 되면 교가라고 폄하되고, 선자가 염불이나 주력 혹은 설법의 방편을 하게 되면 이단시 되어지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는 선이 한낱 無知禪 내지 暗證禪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옛 조사들은 간화선을 “徑截門”이라고 말하고 혹은 “독으로써 독을 치는 것”(以毒攻毒)이라고 했다. 바로 끊어드는 지름길과 독으로써 독을 치는 처방 등은 최고의 상근들이 실행하는 최상승의 방법론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항상 긴장과 선병의 위험이 수반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상근기들만이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증상만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란 백년에 한두 명 날까 말까한 그런 최상근기(生而知之)에 의해 주도되어 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평범하고 하열한 다수의 중하근기 중생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徑截의 최상승을 표방하되 繞道의 평범한 길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선을 하되 교가 폄하되지 않는 禪敎兼修의 길이 열려야 하고, 간화를 하되 경우에 따라 염불, 주력 등이 함께 수행되어져서 다양성과 역동성을 살려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수행의 단일성에 따른 여러 문제가 해결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제방선원에서는 안거를 기준으로 해서 이천 명 이상이 결제에 입방하여 불철주야 용맹정진하고 있다. 이러한 대작불사는 한국불교의 생명이자 장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고무되어 있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다. 설사 우리 조계종도 전체가 다같이 결제 해제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그 정신과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다면 단 한 사람의 명안종사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 우리는 그 정신과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뼈를 깎는 아픔으로 과감하게 환골탈태해야 한다. 긍정적인 면은 덮어두고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아 반성의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발제자가 지적한 간화선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제문 내용을 기초로 하여 평자의 소회를 보태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불성 주인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불교는 無我, 緣起, 中道, 眞如, 佛性 등을 핵심 교설로 설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선원에서 실참하고 있는 납자들 가운데에는 佛性, 主人公, 本來面目 등이 마치 화두의 動靜一如, 夢中一如, 熟眠一如를 넘어서서 아뢰야식의 미세망념마저도 끊고 난 뒤에 나타나는 절대의 경지라고 하는 이원주의에 빠져있는 선자가 있다. 이것은 中道가 佛性이라는 선의 기본인식이 부족한 경우라 하겠다. 둘째, 교외별전, 불립문자에 대한 오해가 있다. 선은 교를 떠나 그 우위에 있기 때문에 경론은 배울 필요가 없고 언어문자는 知解이므로 배격되어야 한다는 조사선제일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즉 진정한 조사선의 정신과 실천을 무시한 채 껍데기만 흉내 내어 경교를 폄하하고 교학자를 무시하는 맹목적인 禪 우월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선교겸수의 기본원칙을 모르는 경우이다. 셋째, 좌선 획일주의에 빠져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간화선이 간단없는 화두 참구가 생명이라고 한다면 “좌”(坐)는 앉아있음의 형식이 아니라 일체가 공함을 앉음으로 삼는(一切皆空爲坐), 즉 지금 여기에서 화두로 깨어있음을 앉음이라 정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선방 분위기는 누가 오래 앉아 있느냐의 장좌제일로 나아가고 있다. 장좌불와와 용맹정진은 권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억지로 앉혀 놓는다고 제대로 정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방선원에서는 경쟁적으로 정진시간 많이 짜는 것으로 장기를 삼아 전체주의, 획일주의를 강요함으로 해서, 선농겸수를 제창하여 동정일여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강조해온 대혜의 생활선 정신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넷째, 지금 선원에서는 간화선을 실참하기 위한 기본 수행규범과 보조수행에 대한 지침이 전연 없다. 초학자나 구참자를 막론하고 자기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익혀 간난하게 수행해 나가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수선자가 선방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초학자는 초학자에 맞는 수행지침이 있어야하고 구참자는 활발한 문답과 거량에 의한 탁마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지식이 계시다면 선지식을 잘 모셔 지도를 받아야 하고, 선지식이 부재하다면 간화수행 방법론에 맞는 체계(시스템)를 구축해야 한다. 아무리 용사가 동거하는(龍蛇同居) 선불장이라 하더라도 수행가풍과 위계질서는 바로 서야 한다.    


                                   

  발제자의 관점과 같이 간화선의 위기는 “간화선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禪을 운용하는 禪者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선 우리 실정(특히 한글세대)에 맞는 철저한 간화의 정신과 방법론에 의해 “간화선 修證正宗”이 수립되야 한다. 오늘날의 간화선자들이 주장하듯이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 최상승의 가치와 원칙이 철저히 견지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가치와 원칙이 다른 수행방법과 공존하고 다른 것을 섭수할 수 있는 유연성과 포괄성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간화의 종장들이 경론의 정형어를 뛰어넘어 일상 생활언어로써 선법을 재구성하고 있듯이, 오늘의 간화행자들도 간화의 종지와 선풍을 화석화된 문화로 정체시키지 않고 다시 이 시대의 대중이 요구하는 시대의 언어와 보편적 개념으로 최상승선의 선지를 설명해야 한다.

  오늘날 선원의 모습을 보면 눈 밝은 선지식의 교시가 아쉽고, 삼사십년 동안 수선 안거한 선참납자는 선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초참자들은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 발제문은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승려 기본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발제자는 “선수행법을 배우기 전에 기초 교리사와 이론적 배경이 없이 앉아만 있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수행법은 이처럼 사상사적 배경에 따라 기본적으로 반듯이 배워야 할 과목을 배우지 않고는 도저히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원 관계자와 기본 교육기관 종사자 그리고 전문가들이 모여 교과과정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난 후의 과정으로 선교육기관인 선강원(禪講院), 선림원(禪林院) 등을 설립하여 선수행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익히도록 하는 선학교육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 같다.

  馬車가 움직이지 않으면 말에게 채찍을 가해야 한다. 오늘날 간화선의 문제는 간화선자에 대한 교육의 문제이다. 이것은 바로 조계종의 정체성 확립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간화선 바로 세우기 불사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