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通達無我法者 2007. 1. 21. 22:42

<제7회 선우논강 발제문>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각 묵(초기불전연구원)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2-1.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2-2. 간화선의 성립배경

 2-3. 어떻게 화두를 참구하는가

 2-4. 결론

3. 위빳사나란 무엇인가

 3-1. 위빳사나란 무엇인가

 3-2. 사마타란 무엇인가

 3-3. 위빳사나의 대상 ― 법

 3-4. 隨觀과 內觀

 3-5. 위빳사나와 마음챙김은 같은가

 3-6. 지금 남방에서 가르치는 위빳사나

   3-6-1. 마하시 위빳사나

   3-6-2. 고엔카 위빳사나

   3-6-3. 기타

 3-7. 결론

4. 같은 점

 4-1. 경절문(徑截門)이다

 4-2. 챙김을 중시한다

 4-3. 깨달음의 성취 ― 견성과 해탈

 4-4. 대신심․대분지․대의정과 오근․오력

 4-5.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

 4-6. 결론

5. 다른 점

 5-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5-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5-3. 정해진 대상(화두), 변하는 대상(법)

 5-4. 교학 무시와 중시

 5-5. 인가 중시와 무시

 5-6. 결론

6.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苦言)

7. 맺는 말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각 묵(초기불전연구원)




1. 들어가는 말

2.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3. 위빳사나란 무엇인가

4. 같은 점

5. 다른 점

6.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苦言)

7.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간화선과 위빳사나,1) 무엇이 같고 다른가’라는 주제를 받고 발제자는 무척이나 망설였다. 간화선이라는 하나의 주제만으로도 화두의 본질, 간화선의 성립배경, 전개, 참구법, 견성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해 볼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양의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위빳사나라는 주제로도 같은 방법으로 많은 글들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관점의 많은 논란거리를 가진 두 주제를 발제문 20쪽 정도로 간추리고 더군다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위빳사나에 대해서는 그 이론적 배경인 아비담마와 더불어 아직 한국에서 학문적인 연구도 일천하고, 그 실제 수행에 대해서도 연구와 소개가 많지 않은 시점에서 이 둘의 같고 다름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너무 이른 감이 많다. 그러므로 자칫 주마간산이나 수박겉핥기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북방의 대표적인 수행체계이며 특히 한국 전통 수행법의 대명사가 된 간화선과 그 연원을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수행법에다 두고 있다고 자부하며 남방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온 위빳사나 수행법을 비교하여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본다. 정보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적지 않은 스님들을 포함한 불자들이 남방에 가서 위빳사나 수행을 체험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위빳사나 수행법을 보급하고 있고 이런 추세가 더욱더 심화되어가는 시점에서 남․북의 두 전통수행법을 비교해서 서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카더라’ 수준의 논의에서 머물지 말고 제대로 된 근거를 갖추어 비교 검토를 해보아야한다는 공감대가 많은 스님들 사이에서 형성이 되고 있으며, 이런 배경에서 7차 선우논강의 주제를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로 잡았다고 본다.

발제자는 본 발제문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모든 것을 말 할 수 없다. 단지 발제자의 관점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간화선에 대해서는 이미 좋은 글들이 많이 발표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에 발표된 글들을 인용하여 편집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발제자의 관점을 첨가할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아직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으므로 조금 상세하게 논의하려 한다. 위빳사나는 사마타와 비교할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 둘의 차이점을 조금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한국의 몇몇 스님들이 관법으로는 해탈하지 못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관법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골관 등의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라는 것은 남방 수행체계를 조금이라도 바르게 아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이처럼 한국 스님들은 남방수행체계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지에 바탕해서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물론 남방에서도 북방 간화선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발제자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것들이다. 그래서 정확한 쪽번호를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점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혹시 발제자의 논점에 무리가 있다 하더도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차이를 비교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받아들여주시기 바라며 잘 못된 점에 대해서는 많은 질정을 바란다.


2.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2-1.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간화선(看話禪)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송대 대혜종고 스님(1089~1163)에 의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간화에서의 간은 참구를 말하고 화는 화두를 말하는 것으로, 곧 화두의 참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여기서 화두라는 것은 조사스님들의 인연설화 가운데서 극칙처(極則處)에 도달한 기연․언구와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 인연설화를 공부인이 참구하는 명제(命題)로 삼은 것을 말한다.

이런 참구명제는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엄정해야 하며, 추호의 사정(私情)이 개재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공안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공안으로 채택된 조사의 기연․언구는 최후의 극칙처에 도달한 것이라야 한다고 간화선의 종장들은 강조한다. 이런 저런 모든 기연이나 언구들이 모두 다 화두나 공안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참구자를 구경의 깨달음으로 인도해줄 투철한 명제여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낙보원안은 “마지막 한 구절이라야 비로소 곧은 관문에 도달하나니, 요긴한 길목을 가로막아서 범․성이 다 통하지 못한다(낙보원안: 834-898의 게송이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극칙처를 쇠망치로도 부술 수 없는 굳건한 조사스님들의 관문(祖師關)이라고 부른다.2)

오직 이 조사공안을 참구하여 그 의단(疑團)이 타파되면 정식(情識)의 알음알이가 말끔히 없어져서 가슴 속에 털끝만한 정습망상(情習妄想)이 남아 있지 않게 되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가 멈추고 대해탈을 이룬다고 한다. 흔히 공안의 수를 1700공안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아마도 전등록에 등재된 인물의 숫자가 1701명인 데서 기인한 듯하나, 실제로 전기를 싣고 있는 조사의 숫자는 964인에 불과하다.3)

간화선은 임제종 양기파에서 파생하고 있는 오조법연(?~1104)-원오극근(1063~1135)-대혜종고(1089~1163)의 계열에서 정착되었다. 특히 오조법연 스님은 ‘무자화(無字話)’의 강조를 통해 공안 참구를 본격화시킨 인물이며, 제자 원오극근 스님은『벽암록』의 저술로 간화 수행의 전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대혜 스님에 이르러 완전한 간화선으로 정착하고 있다.4)

2-2. 간화선의 성립배경

간화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간화선의 성립배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학자들은 간화선의 성립배경을 대체적으로 다음의 셋을 들고 있다.

첫째, 남종선의 돈오가 무사선으로 오해된 폐풍을 들고 있다. 돈오를 주장하는 남종선의 기본입장은 김호귀의 “본래 自性淸淨佛이므로 모든 行住坐臥의 행위는 다 본래부터 깨침의 현현이다.”는 명제로 압축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당대선종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의 가르침으로 신회가 정리한 것으로 판명이 된 육조단경에 이미 보리자성 본자청정 단용차심 직료성불이라고 나타난다. 한편 이런 입장을 臨濟義玄은 『臨濟錄』에서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드러낸다.


“납자들이여, 불법은 애써 用功할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無事하게 屙屎送尿하고 着衣喫飯하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고인이 말했다.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라고. 그대들은 이미 隨處作主이고 立處皆眞이다. 그러니 경계를 맞이하여 회피하지 말라.”


이러한 입장은 또한 종밀이 『裴休拾遺問』과 『圓覺經大疏抄』 卷三下에서 洪州宗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 곳에서도 볼 수가 있다.


“홍주의 주장은 心을 統御하여 사념을 작용시키고, 손가락을 튀기고 눈을 꿈벅꿈벅하며, 所作하고 所意하는 것이 모두 모두 불성 그대로의 작용이지 다른 작용이 아니라고 말한다. 貪․瞋․癡가 그대로, 선을 짓고 악을 짓는 것도, 고라고 느끼고 락이라고 느끼는 것도 모두 불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밀이 홍주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하택종의 종지와 비교하려는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홍주종의 입장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5)


두번째로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가 ‘불이문자(不離文字)’로 되어버린 ‘문자선(文字禪)의 폐풍을 들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兩宋 선종의 주된 흐름으로 이른바 ‘不立文字’에서 ‘不離文字’로 표현되는 ‘文字禪’을 그 특징으로 말하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폐해를 극복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시 말하여 晩唐․五代, 北宋에 걸쳐서 語錄이 대량으로 출현하고, 또한 이른바 ‘公案’에 대하여 拈古․頌古․評唱․代別 등의 註釋이 대거 나타나게 됨으로써 점차 선의 수행은 일종의 주석학으로 빠져들게 된다. 특히 臨濟계통의 汾陽善昭(947~1024)의 『頌古百則』,『公案代別百則』,『詰問百則』등의 저작에서 ‘公案’해석에 대한 통일된 형식과 답안을 제시함으로서 이른바 ‘繞路說禪’의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를 이어 수많은 선사들이 모두 頌古를 짓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大慧선사의 스승인 圓悟克勤 스님의 『碧岩錄』에 이르러 文字禪은 극성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선의 수행은 모두 문자를 통한 文字禪의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점차 사대부 문인들의 언어적 유희로 전락하게 되어 그러한 폐해를 고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대혜선사가 바로 스승인 원오극근 선사의 『碧岩錄』을 모두 불살라 유포를 금지시킨 것은 바로 이런 문자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었다.6)

이런 무사선과 문자선의 폐풍을 고치고자 등장한 것이 묵조선이다. 김호귀는 묵조선의 입장을 “본래 自性淸淨佛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에 걸맞는 좌선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좌선할 때는 반드시 깨침이 현현한다.”라는 명제로 설명한다. 간화선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정립되고 있는 묵조선은 조동종 계열인 宏智正覺(1087~1157)에 의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정각이『묵조명(黙照銘)』에서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하면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한 깨달음의 세계로 그대로 드러난다. 비출 때는 확연하여 텅 비어 있지만 그 불성의 본체는 영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 깨달음의 세계는 묵묵히 좌선하는 그 곳에 있으며, 또한 방편인 좌선은 깨달음의 세계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듯이 본래 깨달음의 상태에 있고, 그것을 좌선이라는 방법을 통해 드러낸다는 내용이다. 곧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본래 깨달아 있는 것으로 묵묵히 좌선하게 되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가 현현된다는 것이다.7) 이처럼 무사선의 폐해를 자성청정불을 확인하는 좌선이라는 實修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이 묵조선인 것이다.

셋째, 묵조선의 폐해를 들 수 있다. 본자청정을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묵조선의 입장을 대혜는 ‘묵조사선’이니 ‘아무 말 없이 흑산 아래 귀신굴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니 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정작 투철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식정의 분별로 본자청정이라 여기고 그 경지를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발상자체가 미혹에서 나온 분별망상일 뿐이라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대혜의 묵조선에 대한 공격은 묵묵히 좌선하는 坐의 형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잘못 망상에 빠져 그것을 깨달음의 현성이라 간주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곧 話頭없이 바로 그 당체를 威音那畔의 일과 空劫已前의 마음자리로 대신하여 無事寂靜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때문이다. 항상 어디서나 一行三昧와 一相三昧로 일관해야 할 치열한 구도심을 접어둔 채 현실을 무시한 안이한 모습의 부정이라 할 수 있다.

대혜 스님은 묵조사선의 병통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공안 참구의 중요성은 대혜가 일생을 두고 강조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조주의 무자화두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대혜의 무자화두에 대한 주안점은 어디까지나 動靜一如한 입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곧 看話的인 성격에 대한 이전부터의 관점을 계승이라 할 수 있다. 대혜에게 있어서 간화적인 것이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의 언제 어디서나 무자화두에 대한 일념의 지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대혜가 무자화두를 통하여 제시하는 간화선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혜 스님은 바로 일상의 행위가 반야의 실천이 되는 화두공부를 주창하고 있다.8)

이처럼 간화선은 본래성불, 본자청정, 즉심시불 등의 명제에 함몰하여 번뇌의 때가 새까맣게 끼어있으면서도 깨달은 양 착각하여 날뛰는 악성적인 무사선과 미혹인지 깨달음인지 분간도 못하고 미혹한 상태에서 묵묵히 근본을 반조한다면서 앉아있는 묵조선과 불입문자를 표방하면서도 온갖 훈고학적 문자놀음을 일삼은 문자선을 극복하고 실참실구를 통해서 본자청정을 구현하려는 체계이다.


2-3. 어떻게 화두를 참구하는가

대혜스님의 가르침을 위시한 여러 선장들의 어록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화두 참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화두에는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가 없어야한다. 그러므로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沒巴鼻)’거나 ‘아무 맛도 없다(無滋味)’9)거나 ‘손잡이가 없는 쇠망치(無孔鐵鎚)’10)같다거나 하는 등의 비유는 이렇게 어떤 길로도 통하지 않는 화두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본질을 실현하게 되면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졌다(心路絶)’11)고 표현 하는 것이다.

둘째, 화두는 그자체가 예를 들면 ‘無’는 있느냐 없느냐 하는 등 논란거리가 아니라 이를 놓고 벌어지는 모든 분별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요한 뜻을 가진다.(무자십절목 참조) 이처럼 조주의 화두를 참구한다고 하는 것은 화두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양귀비가 시녀 소옥이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소옥아! 소옥아!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無!’라거나 ‘어째서 무라했는고!’라고 화두를 드는 것은 의단이라는 지혜가 독로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며 의단이 독로할 때 모든 사량분별이 끊어져 본래심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오극근 스님은 ‘공안(화두)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敲門瓦子)’이라고 하신 것이다. 本來心의 자기 집 대문에 화두라는 기왓조각으로 두드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 안은하게 앉아 安心立命의 삶을 가꾸는 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러므로 언어에 의존하는 어떤 구절이나 그 한계를 넘어서 표현하는 방과 할까지 모두 사구이다. 그러므로 화두는 어떤 전제든 다 부정하는 ‘무전제의 수행’이라고 발제자는 표현하고 있다. ‘무전제’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무아’와 같은 말이요 용수 스님의 공(空)을 뜻한다. 아울러 이것은 『금강경』과 최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숫따니빠따』4장에서 말하는 일체 산냐(개념, 관념, 경계, 인식, 명칭)를 척파하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자리잡았고 한국불교의 대명사요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들이대고 아무리 대신심을 가지고 대분지를 촉발해도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것은 간화가 아니다. 그래서 화두를 향해서 끊임없고 쉼없이 의정을 촉발할 것을 종장들은 고구정녕히 설하고 있다. 한 생각이 두 생각이 되기 전에 화두를 제기하여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간화선의 출발이다. 화두를 지속적으로 챙길때 때 의단이 독로한다. 이런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것 이외에 간화선에 다른 방편은 없다. 화두는 개념적 사고나 특정한 인식 범주를 수단으로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에는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은산철벽 앞에 선 것과 같이 어떻게 해 볼 수단도 전혀 없는 경계까지 가야 비로소 禪語로서의 화두가 그 효용을 발휘한다. 그래서 고봉스님은 “바로 이러할 때는 은산과 철벽을 마주한 것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자니 문이 없고 물러서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禪要』)”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퇴가 모두 막힌 상황에서 궁구하도록 하는 것이 배촉관이다. 대혜가 “무소뿔로 만든 미끌미끌한 쥐틀에 들어가 거꾸로 뒤집혀서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쥐”(『書狀』「答張舍人狀」)라 한 비유도 마음이 더 이상 어떤 수단과 기량도 부릴 수 없는 은산철벽의 경지를 이른다. 이렇게 되어야 참으로 바른 의심 덩어리(의단)를 이룬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 기연을 만나서 견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12)


2-4. 결론

간화선은 정통 남종선이 본자청정이므로 아무런 공용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무사선과, 불립문자가 불리문자로 되어버린 문자선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그것을 깨달음의 현성이라 간주하여 앉아서 묵묵히 좌선하는 묵조선의 폐풍을 극복하고자 대혜 스님이 주창한 수행법이다. 대혜 스님은 이렇게 무사선과 문자선과 묵조선의 폐풍을 화두나 공안이나 조사관 등으로 불리는 극칙처라는 관문을 세워 이를 통과하는 것으로써 극복한 것이다.

한편 화두는 화두 그 자체보다는 모든 분별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요한 뜻을 가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정을 일으켜야하며 이 의정이 타성일편이 되어 의단이 독로할 때 화두는 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화두 참구는 무전제의 수행이며 이것은 불교의 핵심인 무아와 합치하며 산냐의 척파를 가르치는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3. 위빳사나란 무엇인가13)


3-1. 위빳사나란 무엇인가

vipassanāvi(분리해서)+√dṛś(to se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in-sight)을 의미한다. 물․심의 현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觀으로 옮겼고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한다. 영어로는 insight로 정착되었다.

『중부(Majjhima Nikāya)』의 131번 경부터 134번 경까지의 네 경은 부처님이 읊으신 ‘경사스런 하나에의 몰입(bhaddekaratta)’이라 부르는 게송에 대한 설명과 관계된 것이다. 이 게송의 핵심은,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14)


는 것이다. 여기서 ‘통찰하다’로 옮긴 원문은 다름 아닌 위빳사띠(vipassati)인데 위빳사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한결같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물․심의 현상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ṭivedha, 洞察)15) 혹은 수관(隨觀)하는 것(anupassanā)16)으로 위빳사나를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빳사나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향하는 지혜(반야, paññā)라는 것이다. 즉, 위빳사나는 바로 반야(지혜)를 뜻하지 선정이나 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17)


3-2. 사마타란 무엇인가

위빳사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남방 수행의 두 핵심 용어인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사마타와 대가 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samatha는 √śam (to be quie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원 의미는 ‘고요함, 맑음’ 등이다. 모든 해로운 상태[不善法]가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止로 옮겼다. 이 단어는 삼매(samā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8가지 선정의 경지(samāpatti, 等持) ― 네 가지 색계 禪(아비담마에서는 5禪으로 나눔)과 네 가지 무색계 禪 ― 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 cittassa 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18)

여기서 우리는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사마타/禪/삼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숙지하고 있어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혼란없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첫째, 禪의 경지는 결코 깨달음의 경지(출세간)가 아니라는 것이다. 禪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이요 과정이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을 보는 데도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 할 명제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禪은 사마타의 경지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마타만으로는 결코 번뇌를 멸할 수가 없다.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안으로 들여다봐서(內觀 = in-sight = vipassanā) 번뇌를 꿰뚫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야 하겠으나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위빳사나(내관)는 禪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禪이 없이 위빳사나만 닦는 것을 숙카 위빳사나(sukkhavipassana, 마른 위빳사나)라고 부르며 경에 나오는 혜해탈(慧解脫, 빤냐 위뭇띠, paññā-vimutti)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禪(특히 무색계禪)과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 해탈한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俱分解脫, 우바또 바가 위뭇띠, ubhatobhāga-vimutti)이라 부르는데 초기경(M65/i.439; M70/i.477)에도 나타나는 술어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禪定수행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으며 선정을 닦은 사람은 반드시 번뇌멸을 위한 내관을 닦아야 해탈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같이 닦은 자는 신통을 갖추지만 위빳사나만 닦아서 해탈한 자는 신통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번뇌멸이라는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행법이라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북방의 간화선이 묵조선을 묵묵함에 빠져있는 경지로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4/5禪이 바탕이 되어야만 다음의 四處 즉 무색계 四禪에 도달할 수 있다. 무색계선은 모두 색계 4/5禪을 닦아야 도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까시나 수행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4장의 까시나 수행편을 참조할 것)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무색계선을 제4/5선에 포함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셋째, 이런 수행을 『청정도론』에서는 사문이 해야 할 일19)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이 없이는 번뇌멸의 위빳사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없는 위빳사나는 사실 불가능하다.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고서 어떻게 미세한 번뇌를 관찰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꿰뚫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위빳사나를 강조하는 주석서들에서도 카니까 사마디(khaṇika-samādhi, 刹那三昧)라 하여 어떤 식으로든 禪定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자세한 것은『아비담마 길라잡이』9장 §29의 해설을 참조할 것)

그리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지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전제를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한다.


전제⑴: 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라는 점이다. 마음과 마음들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 매순간에 기멸하는 마음들이 대상에 집중된 상태가 사마타이고 이 마음들이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전제⑵: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처럼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 ‘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이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든 사마타든 남방수행은 항상 대상에 대한 수행이다. 즉 위빳사나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하는 수행이고 사마타는 대상에 집중하여 대상이 익힌 표상이 되고 닮은 표상으로 승화되어 이런 표상에 집중된 상태가 다름 아닌 사마타이다.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물․심의 제 현상은 찰나생찰나멸이기 때문에(전제1) 마음들은 하나의 대상에만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없다. 집중하려는 그 대상은 찰나생찰나멸이라서 다음 찰나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들의 집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멸하지 않는 대상에 마음이 고착되어야한다. 남방불교에서는 개념(혹은 명칭, 빤냣띠)은 삼세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집중은 물․심의 현상인 법이 아닌 개념을 대상으로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마타는 대상에 집중하여 그것에서 익힌표상을 습득하고 다시 닮은 표상을 일으킬 때 그 닮은 표상은 개념(빤냣띠)이므로 그것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이라 불리는 개념인데 오랜 사마타 수행에 의해서 대상이 익힌표상이 되고 마침내 닮은 표상이 되어서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은 모두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고도로 집중이 된 상태를 사마타라고 한다.

이런 사마타는 전통적으로 ⑴ 감각젹 욕망 ⑵ 악의 ⑶ 해태와 혼침 ⑷ 들뜸과 후회 ⑸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20)를 극복한 상태로 표현한다. 『위바위니 띠까』는 해태․혼침과 들뜸․후회가 쌍으로 합해져서 나타나는 이유를 그들 각각의 기능과 조건과 대처하는 방법이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해태와 혼침은 둘 다 정신적인 해이함을 생기게 하는 기능을 하고 게으름과 나른함을 조건으로 가지며 정진(viriya)을 일으켜서 대처해야 한다. 들뜸과 후회는 동요를 생기게 하는 기능을 하고 혼란스러운 생각을 조건으로 하며 삼매(선정)를 닦아서 대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함만으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요함(사마타)의 상태란 마음들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내관)라는 강력한 지혜를 개발시켜서 이런 지혜의 힘을 통해서 이들을 여실지견하고 꿰뚫어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혜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고 선정의 힘이 아니면 지혜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은 초기경에서부터 남․북방 불교에서 모두 다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초기경에서도 거의 대부분 함께 붙어서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止觀수행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보조국사께서 定慧雙修를 주창하신 것이다.


3-3. 위빳사나의 대상 ― 법(dhamma, 물․심의 현상)

앞에서 사마타의 대상은 법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말했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빤냣띠, paññatti)이라는 술어와 법(담마, dhamma)이라는 술어를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냣띠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최소단위를 아비담마에서는 법(dhamma)이라 부른다. 개념(빤냣띠, paññatti)은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다.

반면에 위빳사나의 대상은 물․심의 현상 ― 바로 법이다. 남방에서 법은 찰라생찰라멸을 거듭하는 우리 인식에 개재되는 최소단위라고 규정한다. 남방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 1,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 52, 물질(구체적 물질 18, 추상적 물질 10), 열반 1하여 모두 82가지 법을 들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 물질은 구체적인 토대가 없으므로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 10가지를 제외한 72가지 법들을 위빳사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마음은 지나간 마음이다. 지나간 무수한 마음들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의 통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열반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성자들에게만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72가지 법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위빳사나이고 이렇게 제법을 철저하게 꿰뚫을 때 해로운 법(불선법)들의 뿌리인 탐․진․치를 철견하게 되고 그래서 탐․진․치를 멸절하여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빤냣띠)이요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숙지하고 있어야한다.


남방불교의 가장 큰 매력과 힘이라면 이런 두 유형의 참선수행(사마타/위빳사나)에 대한 분명한 방법론과 여러 단계의 명상주제를 체계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을 집대성해서 남방불교 부동의 준거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청정도론』이다. 그럼 『청정도론』에 준해서 위빳사나를 통한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3-4. 隨觀과 內觀(아누빳사나와 위빳사나)

위에서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수관(隨觀, anupassanā)하는 것이라 정의한다고 했다. 이처럼 삼특상을 수관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시작일 뿐 아니라 위빳사나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삼특상을 관찰하는 것을 隨觀이라고 부른다. 수관으로 옮긴 anupassanāanu(따라서)+√dṛś(to se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따라서 본다’는 문자적인 뜻을 살려 ‘수관(隨觀)’으로 옮겼다.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하는 vipassanā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위빳사나는 10/11/16가지 위빳사나로 아비담마에 기초하여 물․심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체계 전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아누빳사나는 여기서처럼 삼특상 등을 관하는 것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빠띠삼비다막가』와 이를 주요한 출처로 삼는 『청정도론』에 의하면 18가지로 물질과 정신을 수관하는 것을 마하(큰) 위빳사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매 단계에서 정신-물리적인 현상을 수관(아누빳사나)하는 것이 내관(위빳사나)인 것이다.

『청정도론』을 보면 아래에 나타나는 열 단계의 위빳사나의 지혜는 거친 물질에서 출발해서 점점 미세한 마음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수관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쳐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 해탈도 아래 §27에 나타나듯이 공, 표상 없음, 원함 없음의 수관을 통해 성취된다. 그만큼 아누빳사나와 위빳사나, 즉 隨觀과 內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10단계의 위빳사나의 지혜를 설하고 있다. 그것은 ⑴ 명상의 지혜 ⑵ 생멸의 지혜 ⑶ 무너짐의 지혜 ⑷ 공포의 지혜 ⑸ 위험의 지혜 ⑹ 역겨움의 지혜 ⑺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⑻ 깊이 숙고하는 지혜 ⑼ 상카라[行]에 대한 평온의 지혜 ⑽ 수순하는 지혜이다.


이 10단계 각각은 모두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관찰(수관)하는 것이 더욱더 정교해지고 깊어지는 단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처럼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관찰[隨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무상․고․무아를 관찰하는 것으로 끝을 맫는다.


이 열가지 위빳사나의 지혜가운데서 ⑵ 생멸의 지혜와 ⑶ 무너짐의 지혜와 ⑼ 평온의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 간략하게 이들을 『청정도론』을 통해서 살펴보자.


<생멸의 지혜>

[청정도론 XXI]: “2. 무슨 목적으로 생멸의 지혜를 수행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삼특상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3. 무엇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아 특상들이 나타나지 않으며, 무엇이 그들을 가려 특상들이 나타나지 않은가? 무상의 특상은 생멸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흐름(santati)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고의 특상은 계속되는 압박(sampaṭi-pīḷana)을 마음에 잡도리않고, 행동거지[威儀, iriyā-patha]에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아의 특상은 갖가지 요소[界, dhātu]의 분리됨(vinibbhoga)을 마음에 잡도리않고, 견고함(ghana)으로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

[청정도론 XXI]: “10. 그가 이와 같이 관찰 반복하여 무상․고․무아라고 물질과 정신을 고찰하고 조사할 때 그의 지혜가 예리하게 작용하면 상카라[行]들이 빨리 나타난다. 지혜가 예리하게 작용하고 상카라들이 빨리 나타날 때 그는 일어남(uppāda), 혹은 머묾(ṭhiti), 혹은 [업에서 생긴 물질의] 진행(pavatta), 혹은 [상카라들의] 표상(nimitta)을 취하지 않고, 오직 파괴함(khaya), 사그라짐(vaya), 무너짐(bheda), 멸함(nirodha)에 그의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11. 그가 ‘행들은 이와 같이 생겼다가 이와 같이 멸한다’라고 볼 때, 이 곳에서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라 불리는 위빳사나의 지혜가 일어난다. 그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어떻게 대상(ārammaṇa)을 깊이 숙고한 다음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가 위빳사나의 지혜인가? [생멸하는] 물질을 대상으로 가졌기 때문에 마음은 생겼다가 멸한다. 그 대상을 깊이 숙고한 다음 그 마음이 무너짐을 수관한다. 수관한다는 것은 어떻게 수관하는 것인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이라고 수관한다….(Ps.i.57-58)”

27. 그가 이와 같이 동요되지 않고 멸하지 않은 것은 멸할 것이고 부서지지 않은 것은 부서질 것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가 깨지는 것처럼, 가는 먼지가 흩어지는 것처럼, 볶인 깨가 터지는 것처럼, 모든 상카라[行]들의 일어남과 머묾과 진행과 표상을 내려놓고 오직 부서짐을 본다. 마치 눈을 가진 자가 호수가나 강둑에 서서 억수 같이 비가 내릴 때 물 표면에 커다란 수포 덩어리가 계속해서 생겼다가 곧 바로 부서짐을 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상카라[行]들이 계속해서 멸함을 본다. 이와 같은 수행자를 두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신기루처럼 보는 자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Dhp.170)”라고.”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

[청정도론 XXI]: “53. 그가 이와 같이 깊이 숙고함을 수관하는 지혜로써 모든 상카라[行]들이 공하다고 파악하고 다시 “이것은 자아가 없고 혹은 자아에 속하는 것이 없다(M.ii.263)”라고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을 파악한다. 그가 이와 같이 자아와, 자아의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다시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M106/ii.263-64)”라고 네 가지 측면에서 설한 공을 파악한다.

61. 이와 같이 공하다고 본 뒤 세 가지 특상을 제기하고 상카라들을 파악할 때 공포와 즐거움을 버리고 상카라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중립적이 된다.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취하지 않는다.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여기서 평온으로 옮긴 우뻬카는 捨로 한역되었다. 한편 『영가집』에서 우필차로 음역되어 나타나는데 사마타(禪定)의 4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술어이다.(우뻬카사띠빠리숫디, upekkhāsati-pārisuddhi, 평온과 그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 捨念淸淨) 여기서 보듯이 평온[捨]은 위빳사나에서도 해탈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단계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영가집에서는 우뻬카[捨]를 사마타와 위빳사나에서 분리독립하여 사마타(止)-비파사나(觀)-우필차(捨)로 그 핵심을 삼고 있으며 이 셋을 원이삼점(∵)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위빳사나의 지혜가 익으면 마침내 해탈이 있게 된다. 위빳사나로 증득되는 해탈에 대해서는 아래 4-3에서 설명하겠다.


3-5. 위빳사나와 사띠(sati, 念, 마음챙김)21)는 같은가

한편 남방의 몇몇 위빳사나 대가들은 위빳사나를 사띠(念, 마음챙김)와 같은 개념으로 보고 아무런 구분 없이 이 둘은 같은 것이라고 설하고 있고 특히 한국에서도 남방수행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발제자는 그런 관점은 남방 아비담마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방에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에서 기인한 듯하다.

초기경에서 마음챙김은 (大)念處經(마음챙김의 확립, D22; M10)과 念身經(몸에 대한 마음챙김, M119)과 出入息念經(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M118)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념처경에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身(몸)․受(느낌)․心(마음)․法으로 정리하고 있고 염신경에서는 몸의 여러 현상에 마음챙기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출입식념경은 호흡하나에 마음챙기는 것을 설하고 있다. 특히 염처경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제목 하에서 몸 등을 隨觀(anupassanā)한다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수관은 다시 무상․고․무아로 수관하는 것을 위빳사나라 정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띠→수관→위빳사나의 관계를 따라서 사띠를 위빳사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염처경의 원문에서 사띠는 삼빠자노 사띠마(sampajano satimā,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가 되어)라는 구절 등으로 나타날 뿐 사띠를 아누빳사나(수관)와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된 출처는 발제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염처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과 염신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은 같다. 그러나 염처경과 염신경의 중요한 차이는 염처경은 법념처로 인도하여 5가지 장애와 7각지와 4제를 수관하는 [위빳사나를 통해서] 해탈로 인도하고 있고 염신경은 몸에 대한 챙김을 개발하여 4선과 5신통을 개발하는 사마타(삼매)로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번뇌를 멸하여(누진통) 해탈하는 것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입식념경은 첫 단계에서는 다분히 사마타로 인도하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사념처와 칠각지를 통해 [위빳사나로] 인도하여 해탈로 결론짓고 있다. 이처럼 이 세 가지 마음챙김에 대한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모두 다 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사띠는 사마타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에 의하면 마음챙김은 전적으로 유익한 마음부수법(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뜻하는 위빳사나에도 반드시 있게 되고 유익한 마음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에도 반드시 있어야하는 마음부수법이다. 이들 세 가지 경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음챙김은 사마타를 개발하든 위빳사나를 개발하든 반드시 제일먼저 개발되어야할 유익한 마음부수법이기 때문에 수행을 설한 세 경에서 제목을 마음챙김(처, 신, 출입식)으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지혜(반야)이며 그래서 모든 유익한 마음에는 항상 함께하는 마음챙김과는 다른 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와 사띠는 결코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물론 사띠와 위빳사나는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위빳사나에는 항상 사띠가 함께 하기 때문이며 사띠의 작용없이 위빳사나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띠는 위빳사나건 사마타건 유익한 마음작용에는 반드시 함께하는 심리현상이며 위빳사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이야기 하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개발하는 단계 그 자체는 사마타가 아니고 위빳사나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사마타는 4선-4처(욕계禪과 무색계禪)의 지고한 삼매의 경지이고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열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 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는 사마타나 위빳사나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본격적인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개발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염처) 단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마음챙김이 확고하게 될 때 사마타도 위빳사나도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수행 3경들에서도 사마타나 위빳사나 대신에 사띠를 경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지금 남방에서 수행되고 있는 사마타 기법이나 위빳사나 기법은 사마타라 불러서도 위빳사나라 불러서도 안된다. 정확하게 붙이자면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띠(정념, 마음챙김)을 개발하는 수행’이라 불러야한다. 그러므로 남방수행법은 통틀어 ‘정념수행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처님 원음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3-6. 지금 남방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법

이상을 다시 정리해보자.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태도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것에 치중하여 수행을 하여 그 대상의 표상을 일으켜 그것에 집중하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이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수관)하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이다. 이 둘에는 반드시 마음챙김이 함께한다. 마음챙김이 없다면 사마타도 위빳사나도 불가능하다. 위빳사나에는 근접삼매 수준의 집중(사마타)이 항상 함께 한다. 여기서 위빳사나에 개재되는 삼매를 근접삼매라고 하는 이유는 본삼매에 들었을 때는 위빳사나란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삼매는 표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된 경지이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위빳사나만 닦으면 사마타는 자연적으로 닦아진다고 하며 이런 힘으로 사마타에 전념하면 쉽게 사마타의 경지, 즉 삼매=선정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타를 닦는다고 해서 위빳사나는 얻어지지 않는다.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타를 많이 닦은 자는 그런 집중력으로 쉽게 무상․고․무아를 깊이 관찰할 수 있음은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사마타 상태에서는 위빳사나를 할 수없다. 반드시 사마타에서 나와야한다. 그래서 사마타는 入定과 出定이 있게 마련이다.


3-6-1. 마하시 위빳사나 ― 순수 위빳사나

그래서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사마타를 아예 무시한다. 사마타를 닦는 동안에는 위빳사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는 근접삼매에 준하는 찰나삼매가 매 찰나 현전하기 때문에 위빳사나만으로도 근접삼매 수준의 사마타는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마하시 전통을 순수 위빳사나라 부르고 미얀마에서는 정통 위빳사나로 간주한다.

마하시 스님(Mahāsī Sayādaw, 1904-1982)이 지도한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은 좌선할 때는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mūlālambana)으로 배의 움직임(일어남, 사라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행선(걷기 수행)이나 행주좌와의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선할 때, 물론 배의 움직임만을 대상으로 삼으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네 가지 물질적인 요소(四大)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움직임의 요소(風界, vāyo-dhatu)인 배의 움직임을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알아차리라고 하신 점은 마하시 수행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선의 경우에도, 걷는 동작(바람의 요소)에 마음을 챙기면서(사띠, 念) 무릎 아래 부분의 다리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중심으로 알아차리라고 한 점과 일상적인 동작을 면밀하게 관찰하라고 한 점은 마하시 수행법을 특징지울 수 있는 수행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움직임의 요소를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곧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22) 이처럼 풍대라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수관하는 수행법을 기본으로 한 것이 마하시 수행법이다.

한편 마하시의 제자 중의 한분인 세우민 사야도가 개설한 세우민 센터에서는 마음을 보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데 매 찰라의 마음은 바로 법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수관하는 것 역시 위빳사나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러한 心隨觀을 가르치는 세우민 사야도의 지도법을 사마타라고 근거 없이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기본정의조차도 모르는 무지한 발상이다. 세우민 사야도의 수행법은 마음이라는 법을 수관하는 순수 위빳사나이다. 이처럼 마하시 계열에서는 사마타를 무시하고 법을 수관하는 위빳사나만을 주창한다하여 순수 위빳사나라 부른다.


3-6-2. 고엔카 위빳사나 ―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병행

한편 미얀마가 낳은 최고의 학승이자 수행승이었던 레디 사야도(1846-1923)에서 비롯된 수행법이 전승되어 오는데 4대째가 인도에서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고엔카 거사이다. 고엔카 수행법에서는 전체 일정 가운데서 30% 정도는 사마타를 닦고 70% 정도는 위빳사나를 닦을 것을 권한다. 여기서 권장하는 사마타는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숨을 쉴 때 일어나는 코 주위의 느낌에 집중할 것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온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다양한 방법으로 관찰할 것을 가르친다. 이런 관찰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평온(우뻬카, 捨)이라고 가르치는데 발제자는 이것을 고엔카 위빳사나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모두 우뻬카(평온)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은 법에 속하므로 이런 느낌의 무상․고․무아를 수관하는 것은 위빳사나인 것이다.23)


3-6-3. 기타

한편 모곡 사야도는 사마타로서 4선까지 체득하고 그 힘으로 위빳사나를 닦을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초기경에서도 4선-3명 혹은 4선-6통으로 정형화된 경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초기 수행자들이 많이 닦던 방법이었다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4선 자체도 자유자재로 체득하기란 용이하지 않으므로 이런 4선을 자재하게 닦고서 위빳사나를 개발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경절문이 아니며 오히려 사마타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수행으로 간주해야할 듯하다.

한편 북방에서 소승선이라하여 백골관이나 수식관이나 호흡관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런 것은 사마타 계열에 속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히 마하시 수행법이 널리 보급된 미얀마에서는 이런 수행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백골관 등을 위빳사나라고 말하고 있는 일부 우리나라 스님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서 바로 잡아야한다. 남방에서도 사마타로서는 결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고 간곡하게 설하고 있음을 유념해야한다. 한편 이런 사마타 수행을 위한 명상주제는 40가지로 『청정도론』에 정리되어 나타나며 『아비담마 길라잡이』9장에서 정리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3-7. 결론

본 장에서 발제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와 마음챙김의 차이점을 살펴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방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수행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마타는 4선 4처에서의 유익한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이다. 위빳사나는 법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무상․고․무아를 수관 혹은 통찰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제행에 대한 완전한 평온(우뻬카)을 개발하여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한편 마음챙김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둘 다를 개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심리현상으로서 전적으로 유익한 마음에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경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염처경을 설하였고 身․受․心․法의 넷으로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닦는 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사띠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마음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빳사나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한편 전적으로 사마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내관만을 행하는 것을 순수한 위빳사나라 부르고 마하시 계열에서 가르치는 수행법이다. 어느 정도 사마타를 닦고 이를 바탕으로 위빳사나를 행하는 것이 고엔카 계열의 수행법이다.

우리가 소승 수행법으로 알고 있는 백골관 등의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법으로는 해탈 못한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4. 같은 점


발제자는 2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간화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고찰해보았고 3장에서 위빳사나에 대해서 사마타와 비교해보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고찰해보았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4장과 5장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보겠다.


4-1. 경절문(徑截門)이다.

먼저 남북불교에서 공히 각각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각각 견성과 해탈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간명한 방법이라고 설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경절문이라하여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들고 있다.

여기서 경절문이란 다양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뜻이다. ‘경절’이라는 용어는 대혜가 “공부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힘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빠르고 간명하게 힘을 얻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24)라고 한 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역시 화두를 올바로 공부하는 방법을 두고 지적한 것이다. 보조 스님은 『간화결의론』에서 “경절문(徑截門)은 직접 비밀한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 말도 없고 가리키는 것도 없어 듣고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법계가 막힘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곧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고 완전하게 알게 되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혜심 스님의 『眞覺國師語錄』, 서산 스님의 『禪家龜鑑』, 鞭羊彦機의 『禪敎源流尋劒說』, 震虛捌開의 『三門直指』 등에서 모두 조사의 公案 상에서 이루어지는 ‘경절’의 방법 곧 화두 공부를 최고의 수행법으로 삼았다. 이는 대혜선에서 자극받은 보조 스님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선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25)


한편 미얀마에서도 위빳사나 수행은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쉬운 수행법이라고 입을 모아 가르치고 있다. 미얀마 사가잉의 시따구 사야도(Sitagu Sayadaw)는 아비담마는 보잉 777의 슈퍼퍼스트 클라스에 미국 뉴욕행 티켓을 예매해두는 것이요 위빳사나는 실제 그런 특일등석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서 편한하고 즐겁게 지구 최상의 도시인 뉴욕으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사마타 수행은 인도 맛살라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에어인디아를 타고 ― 그것도 이코노미 클라스 제일 뒷자리에! ― 혼란의 도시 캘커타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위빳사나야말로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쉽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북방 최고의 수행이라 자부하는 간화선과 남방 최고의 수행이라 힘주는 위빳사나에서 공히 각각은 견성과 해탈이라는 근본을 실현하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고 직절한 방법이라 표현되고 있다.


4-2. 챙김을 중시한다

간화선의 출발은 화두에 의정을 일으키는데 있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들이대고 아무리 대신심을 가지고 대분지를 촉발해도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것은 간화가 아니다. 화두를 향해서 끊임없고 쉼없이 의정을 촉발할 것을 종장들은 고구정녕히 설하고 있다. 한 생각이 두 생각이 되기 전에 화두를 제기하여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간화선의 출발이다. 설혹 그것이 염화두일지라도 거듭거듭 간단없이 화두를 제기하여 의정을 일으켜야한다. 그렇게 애를 쓰다보면 타성일편이 된다.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것 이외에 간화선에 다른 방편은 없다. 의정을 돈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화두를 챙겨야한다. 한국 선방에서 정착된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은 그래서 화두를 거듭거듭 제기하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 말이다. 생기지 않은 의정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의정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드는 기능이 바로 챙김이다. 화두를 간단없이 챙김에 의해서 의정이 돈발하고 그것이 타성일편이 되고 은산철벽처럼 되어야사 비로소 간화라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챙기는 것은 간화선의 핵심중의 핵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챙김은 아래『청정도론』의 인용에서도 보듯이 마음챙김으로 사띠와 같은 심리현상이라 해야한다.

한편 위빳사나에서도 명상주제를 간단없이 챙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몸 느낌 마음 법으로 정리되는 위빠사나의 대상을 거듭거듭 마음을 챙겨 관찰해야한다. 대상을 챙기지 못하면 무상․고․무아를 수관할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이렇게 설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a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함[念處, sati-paṭṭhāna]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patiṭṭhitattā),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rakkhaṇato)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26)


이처럼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로 수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 수행법은 화두나 법, 대상 혹은 명상주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이처럼 화두를 챙겨 의정을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는 수행은 흑산귀굴에 앉은 것으로 표현되는 묵조(삼매)의 수행이요 대상에 마음챙겨 무상․고․무아를 수관을 하지 않는 남방수행은 단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만을 설하는 사마타 수행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간화와 수관은 화두와 법이라는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을 통해서 마음이 매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중시하는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같다.


4-3. 깨달음의 성취 ― 견성과 해탈

이런 챙김에 바탕한 간화와 수관은 견성과 해탈로 승화되어 귀결된다.

선종의 모토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見性이다. 見性27)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종에서 설하는 마음[心]이란 술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김태완은 “祖師들의 語錄에서 단순히 마음[心]이라고 할 경우는, 그 문맥에 따라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⑴ 어떤 경우에는 性과 相을 포괄하는 一心의 의미로 사용되고, ⑵ 어떤 경우에는 無相․無住의 淸淨心인 性의 의미로 사용되며, ⑶ 어떤 경우에는 극복되어야 할 衆生心인 相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서 적절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선종 심성론에서는 마음을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과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은 生滅하여 無常하다는 특색이 있고,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은 生滅이 없이 恒常한 것이며 머무는 장소도 없으므로 虛空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無相의 心을 性이라 하고, 有相의 心을 相이라 하여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 禪宗의 心性論에서는 일반적이다. 宗密의『都序』에서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性이고, 인연따라 변하는 것이 相이지만, 性과 相은 모두 一心 위의 뜻[義]임을 알아야 한다. 性과 相을 2宗으로 보고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眞心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心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다만 이것을 八識이라고만 여기고, 八識이 곧 眞心이 因緣에 따른 뜻임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馬鳴菩薩은 一心으로 法을 삼고, 眞如와 生滅의 二門으로 뜻을 삼았던 것이니,『起信論』에 말하기를, ‘이 마음에 의지하여 大乘의 뜻을 드러내면, 心眞如는 性이요 體이며, 心生滅은 相이요 用이다’라 한 것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는 “일체제법(물․심의 모든 현상)은 다만 妄念(의식의 의미작용)에 의해 [상호간의] 차별이 있을 뿐 만약 心念(수많은 의식들)을 떠나면 바로 일체 경계의 상(형상의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相을 여의고 名字의 상을 여의고 필경에는 평등하여 변이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견성은 相을 여읜 본자청정한 性을 체득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량분별이나 의지작용이 끊어진 자리요 끊어졌다는 것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견성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언설이나 사량분별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을 활연개오나 돈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위빳사나의 지혜가 익으면 해탈이 있게 된다.『청정도론』(XXI.66;70;71)에 의하면 위빳사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행자는 수행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결심이 서고 무상이나 괴로움 또는 무아 중 하나에 확고하게 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무상에 확고하게 되고 집중력이 강한 자는 괴로움에 확고하게 되고 지혜가 강한 자는 무아에 확고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바로 출세간 도의 해탈을 체험하는 경지로 접근하게 된다. 그것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바로 이 ‘공함, 표상없음(無相), 원함없음(無願)’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해탈의 관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아비담맛타 상가하』는 말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아의 수관은 공의 수관이라 이름하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 전도된 표상을 버리는 무상의 수관은 표상이 없는[無相] 수관이라 불리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 갈애로 인한 원함을 버리는 고의 수관은 원함이 없는[無願] 수관이라 불리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28)


이처럼 남방에서도 해탈은 아무런 자취[相]가 없고 공하고 어떤 마음의 의도도 다 끊어진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견성이 無相인 性에 계합함인 것처럼 위빳사나를 통한 해탈도 無相이요 모든 자취나 의도가 끊어진 공한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견성과 해탈로써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구경은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혹자는 견성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頓悟]이지만 남방에서 설하는 해탈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다르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간화선도 깨닫기 전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린다.29) 그러나 깨닫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위빳사나를 통해 수관을 닦는 기간 역시 많은 세월이 걸릴지 모르나 해탈하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청정도론』의 설명에 의하면 범부의 경지에서 성인의 지위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네 마음찰나(心刹那)라는 엄청나게 짧은 순간만이 걸린다고 한다.30)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깊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처럼 즉각적으로 해탈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방의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돈오라는 입장도 공유하고 있다.


4-4. 대신심․대분지․대의정과 오근/오력(信․精進․念․定․慧)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의 세 가지가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되었다. 이것은 솥의 세발과 같아서 이 셋이 튼튼하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결코 화두는 타파될 수 없고 견성이란 불가능하며 간화선은 의리선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셋을 간략하게 분석해보자.

대신근은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는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라’31)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이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본자청정한 심진여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 스님은 ‘이 마음이 있다면 부처가 되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우되 대다수 스스로가 걸림돌을 만드는 것은 굳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서 자신이 화두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 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 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대분지는 화두참구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해태하는 마음이나 그 외 불선법들이 마음에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화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간절한 노력이다.

그러면 무엇이 대의단인가. 화두에 강력한 의정을 일으켜서 나아갈래야 갈수도 물러설래야 설수도 없는 의단독로를 말한다. 대혜 스님은 昏沈․忘懷․黙照 등과 掉擧․著意․管帶 등 두 가지의 선병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혜 스님이 간화선을 주창하게 된 근본이유 중의 하나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혼침과 도거(산란함)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혼침은 거듭거듭 화두를 제기함으로 극복되며 이런 화두의 제기는 바로 지혜(지혜, 慧)의 기능이다. 도거는 적정처에서 면밀하게 화두를 듦에 의해서 극복되는데 이런 주도면밀함은 다름 아닌 고요함(선정, 定)을 말한다. 그래서 성적등지 적적성성 정혜쌍수를 주창하는 것이다. 한편 이런 화두를 면밀하게 제기하는 것을 우리는 화두를 챙긴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챙긴다는 것은 마음이 화두를 물샐틈없이 들고 있는 것을 말하며 이런 심리현상을 초기불교에서는 사띠(마음챙김, 念)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는 화두에 의정을 일으키는 현상에는 화두를 간단없이 챙기는 심리현상(사띠, 念)과 그런 화두에 대해서 덤벙대거나 성급하거나 조급한 등의 육단심을 내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면밀하게 덤벙대지 않는 심리현상(定)과 나아가서 화두라는 언어와 일체 상대적인 분별을 뛰어넘으려는 심리현상(慧)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지혜는 의정의 대표적인 심리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의정을 의혹이나 사량분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간화선에서 제일 강조하는 요점이다.32)

물론 화두공부에는 이 이외에도 평온[捨, upekkhā], 희열(pīti), 행복(sukha) 등의 유익한 심리현상도 함께 작용하겠으나 자성청정심과 선지식을 신뢰하는 심리현상(信) 분발하는 심리현상(精進)과 화두를 챙기는 심리현상(念), 고요함(定),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분별경계를 뛰어넘는 심리현상(慧)이라는 이런 다섯 가지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가 이렇게 논지를 전개하면 이미 영리한 분들은 발제자가 대신심 대분지 대의단을 초기불교의 信․精進․念․定․慧의 五根/五力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알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에 관계된 37조도품 모두가 중요한 것이겠으나 실참의 심리현상을 제일 적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오근/오력이다. 수행의 기본 요소가 되는 심리현상이라해서 오근이란 술어를 사용하며 이 근이 실참에 작용할 때 수행은 큰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해서 오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확신하고(adhimokkha), 분발하고(paggaha), 확립하고(upaṭṭhāna), 산만하지 않고(avikkhepa), 판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dassana).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단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함을 극복한다. 『청정도론』의 설명을 더 살펴보자.


[청정도론 IV]: “47.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지혜의 균등,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samatā)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등함으로써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삼매는 게으름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자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정진은 들뜸(uddhacā)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이 둘 모두 균등함으로써 본삼매(appanā)를 얻는다.

48. 다시 삼매(사마타)를 공부하는 자에게 강한 믿음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믿고 확신하면서 본삼매를 얻는다. 삼매[定]와 지혜[慧, 반야] 가운데서 삼매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집중(ekaggatā)이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본삼매를 얻는다. 위빳사나를 공부하는 자에게 지혜가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그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을 통찰함(paṭivedha)을 얻는다. 그러나 둘 모두 균등함으로써 본삼매를 얻는다.

49.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과 지혜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보호(ārakkha)로써 나타난다. 마음챙김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paggaha)과 절제(niggaha)가 없다”라고.”


이처럼 간화선의 기본인 신심․분심․의심은 위빳사나의 기본 요소인 信․精進․念․定․慧의 오근/오력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간화선의 의단은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에서 강조하는 念(마음챙김)․定(선정)․慧(지혜)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4-5.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

대혜 스님이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있는 것으로 혹평을 한 연유는 묵조선의 아류에 빠져있는 자들을 적묵함에 함몰된 선정에 머물러있는 자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묵조선에서는 본자청정에 계합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좌선을 천양한 것이지 그냥 묵묵히 앉아있는 것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혜는 많은 수행자들이 좌선에 몰입하는 것을 본자청정을 꿰뚫지 못했으면서도 그냥 고요함에 안주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대혜 스님은「答李郞中」에서 ‘가장 하열한 무리는 黙照無言과 空空寂寂으로 귀신굴에 빠져 있으면서 그 곳에서 구경의 안락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단견이란 자기 마음의 본디 오묘한 밝은 성품을 없애고 한결같이 마음 밖에서 공을 집착하여 선적(禪寂)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대혜 스님은 서장의 여러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반야의 현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대혜는 말한다.


“능히 行住坐臥에 있어 노승이 가르쳐 준 요점대로 쉬지 않고 수행해 가십시오. … 이렇게 하면 가령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가르쳐 준 대로 죽는 날까지 계속해 나아간다면 저승사자도 범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반야 속에 머물러 있어 잡념이 일지 않기 때문입니다.”33)


대혜 스님이 행주좌와어묵동정에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는 것을 강조하고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상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 자체가 반야의 실천이 되는 공부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혜가 주창한 간화선은 고요함(선정)보다는 지혜(반야)를 강조한 수행법이다. 이런 중국 남종선계통의 선을 대표하는 언구가 바로 육조단경에 나타나는 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이다. 오직 견성만을 논할 뿐 선정을 통한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편 이미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위빳사나는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위빳사나는 선정의 고요함에만 빠져있는 사마타를 거듭거듭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순수 위빳사나를 주창하는 미얀마 마하시 계열의 수행센터에서는 앉는 데만 집착하지 못하도록 수행자들을 독려하고 있으며 행주좌와어묵동정에 항상 정해진 대상(법)을 수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4-6. 결론

이렇게 몇 가지 측면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살펴보았다. 이들 몇 가지 관점은 모두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둘다 공히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하고 있다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이 경절문인 소이도 견성을 중시하는 소이도 화두라는 참구대상을 설정하는 이유도 모두 선정의 고요함에 함몰하기 보다는 지혜로서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요 위빳사나가 최고의 수행법인 이유도 사마타의 적정처에 머무르지 않고 온갖 물․심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를 통찰하여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화두참구와 위빳사나를 깊이 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요 위빳사나이다.


5. 다른 점


5-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위에서 우리는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그냥 적정처에 안주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혜 스님은 이를 흑산귀굴에 앉아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남방에서는 사마타로 표현하면서 이런 경지가 깨달음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간화선은 적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화두참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사마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는 법을 관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이 공히 대상을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제일 큰 차이점은 바로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참구의 궁극은 은산철벽이나 전후제단 등으로 표시되듯이 참구하는 자와 참구대상의 차별이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를 투과해야 주와 객, 심과 법의 대를 넘어선 절대의 경지 바로 性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런 주객이 끊어진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야말로 견성이다(心法雙忘 性卽眞 - 증도가).

후대로 오면서 많은 수행자들이 본자청정을 부르짖고 자신은 깨달았노라고 그래서 할일을 다해마쳤으므로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잠오면 잘뿐이라는 무사선의 아류에 빠져있음을 통탄하고 대혜는 조사관을 마련하여 이런 조사관을 투타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고불고조를 꾸짖고 돈오를 이야기해도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화두를 공문서 혹은 조사관이라 불러서 이런 공안이나 관문을 꿰뚫고 통과해야 깨달음이라고 주창하게 된 것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다. 위빳사나는 매 순간의 마음이 72가지로 정리된 법(대상)을 변하고 괴로움이요 실체가 없음으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위빳사나에서는 주와 객, 심과 법의 합일이라든지 초월이라든지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초월이라고 한다면 그 초월이라는 것도 마음의 대상일 뿐이라고 본다. 물론 마음이 대상에 완전히 집중되어 말길이 끊어진 경지(제4선)에 있을 때는 집중되어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심과 사와 희열 등이 끊어졌으므로) 그러나 이런 경지도 매 순간의 마음들이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매는 유익한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위빳사나는 집중이 아니므로 매순간 마음의 대상이 되는 물․심의 현상(법)을 무상(변함)과 무아(실체없음)로 철견하고 통찰을 계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변함과 실체없음을 통찰할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심의 현상(오온)이 해체되어버림을 통찰하는 멸괴지와 모든 현상(상카라)들에 완전히 초탈하여 평온하게 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공하고 상이 없고 바램이 끊어진 해탈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을 수관하는 위빳사나의 이런 태도는 분별망심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물․심의 현상이란 게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인데 이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순이며 설령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 해도 매순간 변해가는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엄청난 분별심을 기르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남방불교 내지는 아비다르마 불교를 我空法有라고 인식하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심의 현상(법)이란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이므로 공함을 직관해야지 그것을 매순간 다시 무아로 실체없음으로 통찰한다는 것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위빳사나는 본래실체가 없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으로 수행을 삼고 있다고 해명한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찰라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심의 제 현상[法]들을 변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통찰해내지 못하고 매순간 이런 무상․고․무아를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공이나 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진여 등에 즉각적으로 계합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빤냣띠, 산냐)놀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탐진치에 놀아나면서도 본자청정을 부르짖는 무사선의 폐풍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묵묵히 본자청정을 반조한다는 묵조선을 비판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순간에 화두를 실참실수하여 분별망심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과 같은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5-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또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심의 현상(법)을 분석하고 이것을 수관하여 무상․고․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아무 구분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다. 먼저 힌두 수행은 모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자리라는 식으로 아뜨만(자아)이나 브라흐만(梵)을 설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은 이런 대상을 향해서 몰두하고 몰입한다. 때로는 그 아뜨만․브라흐만으로 옴(Aum)자를 설정하고 이 옴을 찬찬히 발성하면서 그 진동음속으로 몰입하기도 한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모두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게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āra, 요즘 아봐타로 발음하기도 한다)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이다. 그래서 힌두 수행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이다.『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ññān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이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ātmā-samjñā)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빳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과 물질[色]의 72/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無我, anattā]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 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며 그래서 삼차결집을 주도한 아쇼까 대왕때의 띳사 스님에서 유래된 상좌부 불교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분석을 설하는 자들)’이라 하며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요즘 일본 학자들은 ‘분별상좌부’란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5-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간화선의 화두는 정해져 있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자는 무자화두만 참구해야지 화두를 ‘이뭐꼬’나 ‘간시궐’ 등의 다른 화두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유 없이 화두를 바꾸는 일이다.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것이 간화선의 제일 중요한 측면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인 법은 매찰나 바뀐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일어남과 꺼짐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온몸의 느낌은 의식이 집중되는 매순간 바뀌어 간다.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찰나찰나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오히려 이런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법)들을 매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무치게 꿰뚫어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대상의 변화와 실체없음을 망각해버리고 대상의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은 위빳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이런 위빳사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처음 한국에 위빳사나를 소개한 어떤 스님과 그에게서 위빳사나 수행을 지도받은 사람들이 간화선을 비판하는 제일 중요한 근거가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마타 수행으로는 번뇌를 꿰뚫지 못하고 그러므로 생사해탈을 못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해왔다.

만일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간화선은 분명히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화두는 단순한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가 소옥아!하고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안록산에게 그 목적이 있듯이 단순히 집중을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화두는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이라 하는 것이다. 화두에서 중요한 것은 의단이요 전후제단과 은산철벽이 된 화두는 지혜의 돈발이지 사마타(선정)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화는 염불이나 주력과 같은 집중을 닦는 삼매(사마타)수행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 몇몇 스님들이 남방수행을 비판하면서 ‘관법수행은 入定․出定에 걸려있으므로 선정을 닦는 소승선이다’라거나 ‘관법으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하는 것을 보아왔다. 여기서 그 스님들이 관법이라 표현한 것은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일컷는 것 같은데 이런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방에서도 부정관으로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사마타에는 입정출정이 있지만 위빳사나는 없다. 24시간 매순간 일어나고 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북방 공히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으로는 해탈을 못하고 지혜를 돈발하는 간화선, 혹은 위빳사나로만이 생사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오해하여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이므로 해탈 못한다고 하고, 위빳사나는 선정수행이므로 해탈못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남의 수행체계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기초 이론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5-4. 교학 무시와 중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교학을 무시하고 중시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간화선의 기본모토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물론 이 언구가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실현하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자를 무시하고 교밖의 가르침임을 강조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발제자는 이런 선종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경지나 진여의 자리를 현란하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는 대승교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보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오늘날 사람은 自心과 自性이란 말을 들으면 얕고 가깝다 하고, 장애 없는 法界란 말을 들으면, 깊고 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마음이 바로 法界의 도읍이며 부처와 중생의 근본임을 알지를 모른다. 만약 마음을 返照하여 情量이 다하면 곧 法界가 완연히 나타난다. 다만 그 마음을 잘못 사용하여 寂靜에 걸릴까 염려스럽다. ……”34)


이처럼 性을 내세워 현란한 법계를 그려내는 화엄을 상수로한 대승의 교학체계를 대부분의 중국과 한국의 선사들은 비판하여왔다.35) 그래서 달마대사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며 후대에는 마음 깨치는 이 공부법을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 불렀다고 발제자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란한 교학에 매몰되어버리면 마음이라는 바로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선종의 모토로 제시하였고 대혜 스님은 일체전제를 거부하는 무전제의 수행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였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위빳사나에서는 바른 위빳사나의 전제조건으로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아비담마는 현란하지 않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남방의 강원에서는 아비담마를 중시하고 있다. 아비담마란 다름 아닌 물․심의 현상(법)을 대면하여 이를 해체하고 분석하여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비담마의 밑그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법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고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에서는 말하고 있다.

지금 남방, 특히 미얀마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체계는 모두 아비담마에 바탕을 하고 있다. 이런 바탕 하에서 각 센터마다 지도자 스님들이 여러 가지 독특한 기법을 고안하여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여러 물․심의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발제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세기 미얀마 최고의 위빳사나 대가로 추앙 받는 레디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 두 분 스님은 아비담마에도 최고의 달인들이셨다는 점이다. 이 두 분 스님들이야말로 아비담마에 대한 분석지가 위빳사나 수행의 큰 디딤돌임을 보여주는 산 증인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아비담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자칫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기가 배운 기법만을 정통으로 고집할 우려가 있고 이 테크닉이라는 지엽적인 것에 걸려 위빳사나를 팔정도를 실현하는 큰길로 살려내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를 통해서 물․심의 여러 현상을 분석해서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에 속기 십상이다. 물론 아비담마는 수행의 길라잡이라는 것이 그 근본이다. 수행이라는 근본을 잃어버리면 아비담마는 그냥 고담준론이나 메마른 해석학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36)

발제자는 간화선은 무전제의 수행이요 이런 무전제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무아와 일치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무전제적 입장을 바로 이해하여 여기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를 이해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무전제가 일심이나 본자청정을 생사를 초월한 진아, 아뜨만, 대아, 주인공, 내부처 등으로 이해하여 저 힌두의 아뜨만 논리로 흘러가버린다고 보며 실제 작금의 한국 간화선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스럽다. 한편 남방의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의 분석에 철저히 바탕하고 있으며 아비담마의 분석은 바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이다. 북방 간화선도 이제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사무쳐야한다. 무아에 사무칠때 의정은 돈발한다고 발제자는 확신한다.


5-5. 인가 중시와 무시

교학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는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입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가이다. 저 학인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는 객관적으로 없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기본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인가와 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맥을 중시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특히 법맥을 계통 나열하여 한 종장의 권위를 확보하려 애쓰며 우리는 선종사를 통해서 이런 법통을 속가의 족보이상으로 중시여기는 점을 알 수 있다.37) 이는 한편으로는 법맥이 끊어진 간화선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는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조때 법통이 끊어졌음이 분명한 한국간화선이 그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빳사나에서는 인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는 인물 중심의 수행 법통을 중시하지 않는다. 실제 현대의 미얀마 위빳사나의 맥은 레디 사야도(1846-1923)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인가받았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미얀마에서는 굳이 스승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여러 지침서 등이 빠알리어와 미얀마 말로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에 무지한 몇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남방에까지 가서 인가 운운하며 남방 큰스님들을 괴롭혀왔다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몇몇 불자들은 어느 누구가 어느 사야도에게서 예류과에 들었다는 인가를 받았다는 둥 해가면서 수행을 흐려놓고 있다. 제대로 된 위빳사나 행자라면 이러한 탐욕과 무지를 드러내기 이전에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진단하여 겸손할 줄 알아야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수행자일 것이다.


5-6. 결론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빳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수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빳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고․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빳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6.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苦言)


이처럼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보았다. 오늘 여러 스님네들이 구참과 후학, 비구․비구니를 막론하고 한자리에 모여서 이처럼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비교해보는 것은 한국에서 바른 수행풍토를 진작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라도 만들어보자는 것일 것이다. 발제자는 다음의 몇 가지 苦言을 한국 간화선 수행에 붙여보고자 한다. 발제자는 화두에 대한 의정 때문에 출가하였고 지금도 화두참구를 기본수행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발제자의 苦言을 발제자를 키워주신 한국 수좌계에 바치는 충정으로 받아주실 것을 엎드려 빈다.

첫째, 한국 간화선은 힌두화 되어가고 있다. 발제자는 감히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한국 간화선은 성, 불성, 여래장, 심지어 참나, 대아, 주인공, 내부처, 본래면목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아뜨만(자아=진아)이라는 대상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 되는 수행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국불교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타락이라 본다. 수행자가 수행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은 그 어떤 타락보다 심각한 것이다. 일례로 ‘진아여여’나 ‘나는 누구인가’ 등 라마나(Ramana)가 주장한 힌두의 수행법을 ‘이뭐꼬’ 화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이런 책들을 최고의 수행지침서로 이미 제방에서 읽고 있으며 강원에서 까지 읽고 간화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중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힌두적 발상과 서양의 상업주의가 결탁된 아봐타(Avatar) 수행에 스님들과 불자들이 뛰어드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성스러운 부처님제자가 되어 최상승이라는 간화선을 하면서 소승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외도선을 찬양하고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면 어느 佛祖인들 통탄하지 않으랴. 한국에서 간화선이 피폐해가고 남방 소승 수행법인 위빳사나가 뿌리내려간다고 걱정하기 전에 소승도 아닌 외도선을 찬양하고 있는 제방의 풍토부터 통탄해야하지 않겠는가? 거듭 제기하지만 아뜨만-브라만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것에 몰입하여 그것과 합일하려는 힌두적 발상과 모든 전제를 부정하고 부정한다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간화선의 직관은 전혀 다른 수행법이다.

물론 모든 전제를 부정하는 화두수행은 어렵다. 그래서 합리성을 존중하는 현대에 와서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고 그래서 간화선 위기론이 지금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을 제대로 하려면 부처님의 무아의 선언에 뼈시리게 사무쳐야한다. 무아에 대해서 처절하게! 사유하고 고뇌해야한다. 그런 뼈를 깎는 자기점검이 없고서는 간화선은 간화선이 아니고 힌두아류로 떨어질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속의 부귀영화 따위는 뒤닦은 휴지버리듯 버리고 출가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이처럼 사무치지 못한다면 이미 화두하고는 십만팔천리리라. 사무침이야말로 대분지요 대의단 아니겠는가?

둘째, 한국 불교의 수행에는 힘의 논리가 팽배해있다. 화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여서 온 몸과 마음을 몰아세워가고 있다.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에 도인이 되고 부처가 되어 만중생의 존경과 귀의와 찬탄과 예경을 받게 되는 것으로 돈오돈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국 수행자들은 너무 긴장해있고 날카롭다. 도대체 한국 수행자들에게서 편안함이나 고요함이나 자비심을 찾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절집안이 맹수집단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생기지도 않는 의심을 힘으로 밀어부쳐 일으켜서 이를 타파하려는 발상을 하고 있는 수행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겠는가 발제자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이해가 간다.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강한 의도를 일으키는 이면에는 본자청정,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 대아, 진아, 여래장, 불성, 진여, 내부처라는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는 발상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고 그래서 ‘이뭣고’를 라마나의 ‘나는 누구인가’로 파악하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업이 되면 매사가 그런 힘을 쓸려는 강력한 의도에 지배되어 면밀히 살피고 사유하는 기능이 개발되지 못해서 경계에 속게 될 것이다. 아니, 건전한 상식이나 경우를 무시하고 세상사 모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발제자는 반성해본다.

셋째, 한국 간화선은 화두만 타파하면 다 된다는 단세포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있다. 그러다보니 합리성을 놓치고 있다. 물심의 현상(법)에 대한 분석적인 사유가 결여되면 자칫 허공에 구름 잡는 주장을 대승불교나 간화선 아니면 頓悟라는 이름으로 하게 된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나 직관을 보여 주어야할 우리 불교가 오히려 궁극에 가서는 의지해야할 판단기준이 없어져 더욱더 세속의 논리나 세속적 가치판단을 중시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바른 정진[正精進]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바른 정진을 善․不善의 판단에서부터 구하고 계신다. 선․불선을 판단하여 선은 유지하고 더 증장시키고 불선은 없애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정정진이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기서 선이란 고의 소멸, 즉 해탈․열반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이로운 심리현상이요 불선은 고의 소멸과 해탈에 장애가 되는 심리현상이다.

선․불선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바른 견해를 갖추어야한다. 불교의 출발은 초기․남․북을 막론하고 바른 견해[正見]에서부터 비롯된다. 저 팔정도의 출발이 정견이지 않는가. 발제자가 처음 선방에 다녔을 때 노스님들은 ‘견해가 비루한데 어찌 바른 수행이 있겠는가’라고 항상 정견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견해가 비루한 놈들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고 꾸짖으셨다. 위산 스님께서도 그대의 견해가 바른 것만을 본다고 하셨다. 바른 가르침과 바른 도와 바른 수행을 두고 사유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화두에 바른 의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연목구어이다. 화두를 참구하여 의정이 펑하고 터지면 즉시에 도인이 되고 … 하여 만인의 귀의와 존경을 받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의정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의정은 한 순간 반짝한 반딧불 의정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발제자는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면 그 화두를 내려놓자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정견이 뭔지 고뇌하자고 말하고 싶다. 부처님은 사제를 아는 것이 바로 정견이라 하셨고 사제를 완전히 통찰하는 것을 번뇌를 소멸한 지혜, 바로 깨달음이라고 정형구로 표현하고 계신다. 사제는 팔정도로 귀착된다. 사제는 그 자체가 연기․연멸의 연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최소한 사제가 뭔지, 팔정도가 뭔지, 연기법이 뭔지, 이것이 내 중노릇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도는 사유하고 고뇌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제․팔정도․연기의 근본입각처인 무아를 두고 고뇌해야할 것이다. 고뇌하고 고뇌하여 아무 전제도 붙지 못할 때 그때야 비로소 의정이 돈발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어야사 참으로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후제단, 은산철벽, 몰자미가 되어야사 참화두이며 그전에는 모두 염화두일 뿐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가.

넷째,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간화선의 권위의 원천인 인가해줄 사람이 없다는데서 찾아야할 것이다. 인가해줄 권위를 확보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간화선의 현실이다. 이제 대안을 찾아야한다. 간화선의 권위를 인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수밖에 없다. 인가의 법맥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가라는 간화선의 권위를 강조하면 할수록 자기모순에 빠지는 수밖에 없다. 지난번 6차 논강의 기조연설에서 고우 스님께서는 이제 법체계를 세워야하며 법으로서 모든 판단의 근거를 삼아야한다고 역설하셨다. 발제자는 크게 공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가대신에 법(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물․심의 현상이든)의 정확한 이해를 강조하는 위빳사나로부터 법체계화를 배워야할 것이다.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대략 네 가지로 한국 간화선의 문제점을 들어 보았다. 이 네 가지는 다시 ‘한국 간화선은 무아를 잊어버렸다’라는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에 바탕한 무전제의 수행이다. 부처님 원음은 무아에 바탕한 사제․팔정도․12연기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간화선 수행을 하는 자는 먼저 이런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하고 그것을 내 중노릇과 수행에 적용시켜야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는 것은 고사하고 버젓이 불조의 밥을 먹고 외도를 찬양하는 꼴이 되고 만다고 덧붙이며 苦言을 접는다.


7. 맺는 말


이상으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고 몇 가지 입장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았다. 전체적으로 위빳사나의 입장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게 되었는데 한국불교가 간화선 수행전통에 충실하므로 간화선에 대한 좋은 글들은 많이 소개 되었지만 위빳사나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화선은 남종 돈오선이 無事禪으로 오해되고 불립문자가 소위 말하는 불리문자가 되어버린 文字禪의 유행과 본자청정을 좌선으로 확인한다면서 적정처에 안주해버린 黙照禪의 병폐를 극복하고자 대혜선사가 주창한 수행법으로 화두를 간단없이 챙겨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지고(心路絶)고 은산철벽 앞에 선 것과 같이 되어 무전제와 무아에 사무치게 하여 견성하는 수행법으로 지혜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빳사나 역시 사마타 수행이 빠져있는 선정의 경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물․심의 현상(법)이 무상․고․무아임을 간단없이 챙기고 수관하여 공하고 모든 자취가 없고(無相) 의도들이 없는(無願) 해탈을 성취하게 하는 수행법이다.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는 한 구절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이 경절문이요 견성을 중시하고 화두라는 참구대상을 설정하는 이유도 모두 선정의 고요함에 함몰하기 보다는 지혜로서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요 위빳사나가 해탈에 이르는 가장 빠른 수행법인 이유도 사마타의 적정처에 머무르지 않고 온갖 물․심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를 통찰하여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간화선과 위빳사나 둘 다 선정을 중요시하기는 하지만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부정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하며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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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내려받은 인터넷 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보조사상연구원  http://www.bojosasang.org

불교학연구회    http://www.bulgyohak.org

실상사 홈페이지 http://www.silsang.net

위빠사나 까페   http://cafe.daum.net/vipassana

초기불전연구원  http://cafe.daum.net/chobul

한국선학회      http://www.seonstudy.or.kr

한국불교학회    http://www.hanbulhak.or.kr


   <선우논강 토론문>


대승불교와 간화선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인경 / 禪상담연구원







주지하다시피 북방불교에서는 초기불교나 아비담마 불교를 소승불교라는 이유로 폄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배척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아비담마의 입장에 서 있는 발제문은 이런 분위기의 반동으로써,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에 간화선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의 부분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매우 고심한 끝에, 한국 간화선 불교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비롯된 점임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간화선의 역기능적인 측면만을 드러낸 까닭에 간화선에 대한 평가가 정당하지 못하고,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그 정체성을 왜곡시킬 위험에 놓일 수도 있다고 본다. 


사실 어떤 수행론도 완벽하지는 못하다. 수행론을 완성시키는 사람은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각 개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수행론은 끊임없이 변천했다. 위빠사나나 간화선은 역사적인 우리의 유산물로서, 그것들에 대한 역사적인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그 수행론의 단정과 장점을 모두 공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이미 지난 2002년 10월에 보조사상연구원 학술발표회에서 「위빠사나와 간화선」(부록참조바람)이란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간화선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아니면 오직 간화선만을 옹호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각 수행론이 가지는 사상적인 관점과 그것의 장단점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확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토론자로 나선 이상 필자는 위빳사나와 간화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고, 더욱이 발제문과는 다른 반대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대승불교와 간화선의 입장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발제문을 보고자 한다. 아마도 이것이 토론자로서 소임(악역?)을 충분하게 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발제자께서는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1.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이 아니라 표상이다.



1.1 일반적으로 ‘사마타란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어서, 고요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발제문에서 ‘사마타의 대상’을 ‘개념’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점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는다. 우선 발제문에서 사마타의 대상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 ‘표상(nimitta)’,개념(pannatti)’ 및 ‘산냐(sanna)’라는 표현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성을 느낀다.


1.2 일반적으로 언어는 <음운기호, 개념, 이미지>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산’이란 낱말에서 음운기호란 소리나 잉크자국으로 표시되는 자국을 말하고, 개념은 산이란 낱말이 가지는 사전적인 의미이고, 이미지는 산의 시각적인 표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마타의 대상을 개념이라고 말한다면, 결국은 소리나 표시로서의 기호와 영상적인 이미지가 제외된다. 개념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고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다. 필자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불교에서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pannatti)가 아니라, 바로 표상(nimitta)이라고 이해한다. 개념은 분별적인 의미가 있고, 추상적인 관념이기에 선명하게 출현하지 못한 반면에, 표상은 시각(知覺)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분명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서 사마타의 직접적인 대상은 분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소리나 표시로서의 기호 혹은 이미지로서 표상이라는 것이다.


1.3 어떤 대상에 집중하려고 하면, 그것은 분명하게 일정 시간에 지속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상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분명하게 표상(nimitta)은 빌려와서 구성 내지는 시설된다는 의미에서 Pannatti(假立)에 속한다. 사물의 추상화되고, 공통화된 속성으로서 개념과 함께 시각적 이미지로 드러나는 표상은 모두 구성물이지만, 분명하게 구별된다. 또 발제문에서 산냐(sanna) 역시 빤냣띠와 동일하게 추상적인 개념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물론 산냐에는 개념 혹은 관념이란 의미도 있지만, 오히려 사마타의 대상이 되는 표상(nimitta)을 구축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래서 산냐의 작용에 의해서 사마타의 대상인 니미타는 시설(pannatti)된다. 


1.4 따라서 발제문에서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이고, 산냐이고, 관념인 까닭에, 척파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재검토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된다. 아울러서 ‘표상(nimitta)’,개념(pannatti)’ 및 ‘사유(sanna)’ 등의 팔리어는 정확한 번역과 함께 그 역할에 대한 논의가 필요가 있다고 본다.    


1.5 필자의 의견을 먼저 말해보면,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대상을 구별하는 발제문과 달리 초기불교와 아비다맘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대상은 모두 ‘法’이라고 본다. 그 근거로는 사마타의 대상이 되는 표상(nimitta)도 개념이 아닌 법의 일종이며, 만약 발제문의 주장대로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라면, 남방 아비담마 체계에서 위빳사나의 대상들과는 다르게 사마타의 대상들은 제외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면 만약 발제문에서 말하는 바처럼 사마타의 대상이 산, 사람과 같은 개념이라면, 그것은 법이 아니기에 법에 관한(아비담마) 체계에 포함될 수 없는 관습적인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사띠(sati)와 위빳사나의 구별은 이론상 가능할 뿐이다.  


2.1 발제문은 남방수행에서 사띠와 위빳사나를 동일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 비판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사띠는 위빳사나 뿐만 아니라 사마타에도 적용되는 개념이기에 위빳사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사띠는 마음에 부수되는 유익한 법(心所)이고 위빳사나는 지혜(반야)로서 서로 다른 심리현상으로서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그래서 셋째로 사띠는 본격적인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개발하기 위해서 획립되어야 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넷째 결론적으로 발제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방수행을 사마타나 위빠사나라고 불러서는 안되고, ‘사띠(正念)를 개발하는 수행’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한다.


2.2 이런 관점은 초기불교의 입장과도 구별되는, 철저한 남전 아비담마의 체계에 의거한 분석적 접근이라는 학풍의 반영이라고 본다. 이는 사띠의 확립이란 측면과 사마타․위빳사나의 경계선을 명료하게 분석하여 구별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구별은 역시 동시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위빳사나를 사띠와 구별됨으로써 수행에서 사마타(止)․위빳사나(觀)를 고원한 경지로 만드는 결과를 만든다. 그럼으로써 아비담마의 법체계에 의한 남방 수행론은 대중과 현실을 떠난 특별한 자질과 환경에서만 적용되는 수행법이 된다. 이점은 소승불교라고 비판하는 대승불교에게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만약 사띠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와는 엄격하게 구별된다면, 사띠와 구별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독자적인 수행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구체적인 자기 개발 방법이 없다면, 위빳사나는 또 다른 개념, 혹은 관념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만약 사띠를 통해서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완성된다면, 사띠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일부이거나 아니면, 사띠는 위빳사나의 내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생각한다.


2.3 북방불교의 전통에서는 正念과 止觀과의 관계를 별개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수행의 과정에서 각각의 경계에 따라서 그 이름을 다르게 부를 뿐, 각 단계는 전혀 다른 내용일 수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처음 발심하여 수행할 때는 사띠(正念正知)라 하고, 수행이 깊어져서 익어질 때를 사마타․위빳사나(止觀)라 하고, 일상에서 무너지지 않을 때를 선정․지혜(定慧)하고, 완전하게 부처를 이룰 때를 보리열반(菩提涅槃)의 단계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 발심에서 최종의 성불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지 않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의 모든 과정을 일통 하는 ‘오직 한 맛’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화엄종에서 初發心時便正覺이나 선종에서 萬法歸一과 같은 話頭가 성립되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서 전통적으로 선사들이 話頭參究에서 正念의 역할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조해온 사실을 상기해야할 것 같다.      



3. 불성사상은 불교신앙의 원천이다.   


불성사상은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 심지어 살인자까지도 불성이 있어, 그의 죄까지도 참회가 가능하다. 불성은 대승보살의 자비를 의미한다. 그래서 간화선의 모토도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는 견성성불이다. 화두는 이런 이념(지혜와 자비)을 구현하는 참구의 도구, 혹은 그 과정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동북아 수행전통의 오랜 신념체계이다.


그런데 발제문는 성 혹은 불성의 개념을 브라흐만과 같은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본질’로서 이해하는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발제문을 읽으면서, <힌두아류에 떨어질 수 있는 대승불교의 佛性이란 개념을 폐기하고, 아비담마의 물심의 현상으로서 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이 문제가 아비담마의 과 대승불교의 이란 개념의 혼란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했고, 양자간의 개념에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과제임을 절실하게 다시금 통감했다.     



1) 佛性의 유래 


3.1.1 대승불교에서 性이란 용어는 여래종성, 여래성, 혹은 불성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여래성이란 용어는 tathagata-gotra의 번역어로, gotra(性, 姓)란 말은 ‘혼인이 금지된 동일 계통의 가족’이란 의미로서, ‘대승에 속하는 불교도로서 신앙 공동체’ 곧 소승의 聲聞乘이나 獨覺乘과는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이다. 그래서 반대로 a-gotra라고 하면, 외도로서, ‘불교도가 될 수 없는 자격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매우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개념을 가진다. 그런데 가족이나 혈통을 의미하는 gotra라는 용례에 철학적인 의미를 첨가한 것은 바로 아비담마 불교였다는 사실이다. 이 種姓이란 용어는 아비담마 논서에서 발견되는데, 모두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최고 단계에 이르는 순간, 그 직전에 나타나는 중요한 개념이다.


3.1.2 사마타 수행에서 욕계에서 색계로 넘어가는 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범부가 욕계를 벗어나서 성인의 道로서 처음으로 禪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행이란 범부가 성인이 되는 과정이라고 전제한다면, 이 과정은 중요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준비(parikamma)→근접(upacara)→수순(anuloma)→종성(gotrabhu)→본삼매(appana)라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종성(gotrabhu)은 본삼매에 이르기 직전에 나타나고, 성인의 징표가 된다. 왜냐하면 범부의 가계에서 성인의 가계로 변화되는 결정적인 시점이기 때문이다.   


3.1.3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역시 종성(gotrabhu)이란 용어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여섯 번째 道淸淨의 단계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知見淸淨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본삼매가 나타나려는 때에 경험하는 마음(gotra-citta)이다. 여기서 종성은 열반을 향하는 마음이고 최초의 出世間의 도가 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3.1.4 이상으로 보면, 아비담마의 논서에서 나타나는 종성의 개념은 범부와 구별되는 성인의 씨족이란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처의 가문으로서 동질성에 대한 확립을 말한다. 말하자면 동남아 수행전통에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바로 석씨 가문의 자질과 징표를 확인하는 수행체계이고, 동북아 선종에서 말하는 인가의 방식도 사실은 바로 석씨 가문에 입문하는 종교적 통과의례인 것이다. 이제 대승의 불성이란 개념은 종교수행의 결과(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원인(因)이 된다. 실제로 gotra(종족)라는 낱말에는 수행의 원인이란 뜻의 hetu(원인, 性)란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2) 아비다맘의 法과 대승불교의 性


3.2.1 아비담마의 種姓에서 비롯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란 개념은 처음에는 소승(성문, 독각)과 대승보살을 구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나중에는 대소승 모두를 포괄하는 큰 하나의 종성(一乘)이란 의미로 발전하였다.


3.2.2 이것은 아비담마에서 사용하는 법이란 개념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法이란 ‘개별 사물이 가지는 독자적인 본성, 성격’이란 의미를 가진다. 아비담마의 법체계란 복수형으로서 諸法의 존재를 전제하고, 각각의 법은 스스로 단일한 자성(svabhava)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의 법은 다원론적인 입장에 있고, 그렇다보니 법들 사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법에 관한 분석작업과 더불어서 법들 사이의 관계를 수학의 공리체계처럼 세울 필요가 있다.


3.2.3 그러나 대승의 종성의 개념은 모든 법에 내포된 공통된 성격을 지칭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법이 아니라, 모든 법(諸法)의 성품이다. 그래서 法性(dharma-dhātu)이라고 부른다. 모든 개별적인 법들의 공통된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緣起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바로 여래, 곧 불성을 본다. 연기란 그 자체로 無自性이다. 발생하나, 발생하는 그 자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것들은 원효뿐만 아니라 의상이 말한 것처럼, 모든 법들에서 자재하고 원융하며, 두 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一卽多이고 多卽一인 법인 까닭에, 말하자면 이것은 다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3.2.4 그래서 대승불교의 불성은 직관과 통찰의 대상이지, 아비담마처럼 개별적인 차별을 구분해 내는 분석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이점이 간화선과 위빳사나와의 결정적인 경계선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수행론은 그 자체로 문화적인 현상이고, 그 만큼 상대적이고 독자적인 배경을 가진다. 문화를 평가할 때는 일부가 아닌 총체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본다. 



3) 삼보의 확립과 사회적인 자비실천의 근거


3.3.1 붓다가 태어난 당시는 힌두적인 의미의 현상의 배후에 놓인, 혹은 초월한 본질로서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적 사유방식이 사회적 지배가치였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불교는 사물의 현상의 배후나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아뜨만이나 신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 붓다는 사물과 현상 그 자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와서 보라>고 외쳤다.

3.3.2 그렇다면 와서 보아야할 <있는 그대로의 존재>란 무엇인가? 이것을 아비담마는 法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사물의 개별적인 자기 성품(人無我)으로서 法이 아니라, 연기하는 그 자체(法無我)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자기의 성품이 결여된 無自性, 空, 緣起를 의미한다. 이것은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무시이래로 존재해온 것이며, 모든 존재에게 평등하게 내재된 성품으로서, 이것을 원인으로 하여 윤회가 있고, 열반을 획득한다고 본다.


3.3.3 대승불교에서 불성, 여래장에 대한 종교 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 거의 모든 대승경전과 논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들 개념은 ꡔ寶性論ꡕ과 ꡔ大乘起信論ꡕ 등에서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의하면 種姓(gotra)은 佛法僧 三寶가 출생하는 원천이고 원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성의 의미이다. 佛이 성의 근원적인 바탕이라면, 法은 성의 모습이나 공덕을 의미하며, 僧은 성이 역사 현장에 작용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性에 대한 부정은 삼보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서 승가 공동체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초래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3.3.4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불성이란 개념을 비불교적인 개념이라고 부정하거나 혹은 그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일은, 현대사회의 다종교 현상 속에서 오히려 ‘불교도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도 동시에 노출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수세기를 불자들이 사용해온 불성이란 개념을 포기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사회학적인 의미와 더불어서, 종교적인 의미를 대중 안에서 명료하게 확립시키는 전략이 현 불교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본다.


3.3.5 특히 아비담마에서 법을 사물의 자성이라고 해석하고,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구별함으로써, 여기에 기초한 수행론은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현실 사회로부터 멀리 떠나는 풍조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실을 외면하는 이런 아비담마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대두한 불교가 바로 대승불교이다.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불성을 지닌다는 대승의 불성사상은 다름 아닌 불교의 대사회적인 책임과 자비의 실현을 실현하는 대승보살의 사상적인 입각점이다.    



4. 아비담마의 법은 또 하나의 개념이고 관념이다.

 

4.1 아비담마는 ‘법(dhamma)에 관한(ahbi)’ 체계이기 때문에 먼저 법과 법 아닌 것을 구별한다. 법은 사물의 궁극적인 단위로서 다른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실재이다. 이를테면 사람, 자아란 법이 아니라 개념이다. 이들은 마음(의식), 정신적 요소들, 물질, 열반으로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일종의 언어적 사유이고, 관습에 의해서 임의로 조작된 형태이다. 그러나 마음(의식), 정신적 요소, 물질, 열반 등은 자신의 실재적이고 고유한 자기의 성품(sabhāva)을 가진다. 그래서 법이다. 법은 변화될 수 없는 자신의 성품(自性)을 말한다.


4.2 이런 정의는 남전 아비담마 뿐만 아니라, 북전의 구사론에서 동일한 관점을 가진다. 구사론에서도 그 자신의 본성을 가진다고 정의한다. 아비다맘에서는 사람이나 자아의 존재를 개념으로써 부정하고 법의 존재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無我說이고 法有說이다. 자아나 사람이란 관습적인 개념(sammuti)을 부정함으로써,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사물의 본질(paramattha)로서 법의 존재를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으로 드러내려 한다. 이것이 아비담마불교이다.  


4.3 그러나 龍樹의 中觀學派에서 아비담마의 법에 대한 정의를 비판한다. 부처님의 법에 관한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법의 본래적인 의미는 그 자신의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아비다맘처럼, 법에 그 자신의 고유한 실재로서 어떤 성품이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 고유한 성격은 그 자체로 연기하지 않는 무엇이 되어 버린다. 주지하다시피 붓다의 연기설은 모든 사물은 어떤 조건과 인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상호 의존된 현상을 설명한다. 만약에 아비다맘에서 이해하는 방식으로 법을 ‘최종적인 사물의 본성(paramattha)’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붓다의 緣起說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법 자체도 일종의 시설된 개념(pannatti)이다.


4.4 그렇다면 아비다맘의 법에 대한 해석은 철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연기설은 <A가 있기에 B가 있다>고 설명한다. A와 B는 상호 의존된 관계(因緣)에 놓여 있다. 여기서 아비다맘에서의 연기설은 A와 B의 존재, 그것의 객관적인 실재를 전제한 연기설이다. 그러나 중론에서는 인식하는 주관(A)과 인식되는 대상(B), 마지막으로 인식 그 자체도 본래적으로 자기 고유한 성품이 결여된 연기설이다. 그래서 法이란 緣起이고, 空이라고 이해한다. 법은 실재하지 않으며, 승의제도 아니다. 아비담마에서 구별하는 유위법과 무위법 역시 또 하나의 개념(sanna)이고 또 하나의 세속제(sammuti)이다.   


4.5 아비담마에 기초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법의 존재를 전제하여 성립된다. 그리고 아비담마의 법체계를 충실하게 구현하는 내증하는 수행이론이다. 그러나 아비맘마가 人無我說에 기초한다면, 대승 중관의 입장은 법의 자성를 부정하는 法無我의 입장에 서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승의, 개념, 시설, 세속이란 언어는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함축한다. 따라서 수행에서 얻어진 반야의 내용도 서로 다르다. 無常, 苦, 無我라는 위빳사나의 중심된 아비다마의 개념을 대승에서는 방편 가운데 하나로 보지, 그것을 결코 궁극적인 실재(paramattha)라고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는 또 다른 집착이고, 관념이고, 희론일 뿐이다. 그것들은 연기공에 대한 철저한 자각으로서 법무아에 대한 통찰이 없는 소승의 반야이다. 다시 말하면 대승의 반야가 아니다. 위빳사나와 간화선에서 般若라는 공동으로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아비담마에서 반야는 사물의 本性으로서 법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간화선의 반야는 일체의 분별을 초탈한 연기공의 理法를 체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동일한 내용이 아니다.     



5. 한국 간화선을 찬탄하면서


5.1 최근 간화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본 발제문도 마찬가지이다. 그 만큼 간화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방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간화선의 승가에 대한 기대와 변화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라고 보고 싶다. 아마도 쓴 소리는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5.2 다만 간화선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간화선이 성립된 배경과 그 사상적인 특질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기를 권하고 싶고, 외형으로 나타난 모습만을 보지 말고, 그 내면에 흐르는 실존적 자기 고민과 역사적인 책임에 대한 아픔을 함께 보았으면 한다. 부처님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고뇌했고, 마침내 출가하지 않았던가? 우리 앞에는 이론, 사상, 체계로 풀리지 않는 생사의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누구도 이 문제를 빗겨갈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직면과 정면 돌파가 바로 간화선의 힘이다.


5.3 그래서 너무 긴장되고, 날카롭다고 말한다. 적절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깊은 대승에 대한 믿음, 열렬한 정진, 자신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실존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이것을 힘이라고 한다면, 확실하게 화두는 힘의 본능을 가진다. 이 자기문제에 대한 진솔한 직면이 바로 자비이다. 이 힘의 본능은 대승의 경전에 기초해서 성립된 신앙이다. 간화선은 개별적인 법에 대한 분석이나, 법체계에 대한 순차적인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법은 개별적인 자기의 성품(自性)이 결여된 연기일 뿐이다. 이 연기법은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나오지 않거나 관계없이, 존재하는 그대로 법계이다. 모든 법은 하나로 귀결되며, 각각의 법은 모두 한 맛(一味相)으로서, 그 자체로 空性이다. 이것은 오직 직관, 돈오에 의해서 인식된 중도이다. 여기서 아비담마적인 분석적 접근은 오히려 적절하지 못한다.


5.4 그렇다. 간화선은 종성, 법무아, 연기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과 통찰을 중요시한다. 체계적인 분석은 체질적으로 맞지가 않는다. 간화선은 선대의 문답과 삶의 현장에서 오는 자기 의심에서 비롯되는데, 직관은 그 의심의 당연한 결과이다.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 직관도 없다. 모든 선문답의 본질은 바로 궁극적으로 見性에 있다. 성품에 대한 직관은 개념적인 이해나 분석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숨막힌 답답함이 일시적인 폭발하는 순간(噴地一發)에 의해서 의심이 해소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긴장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 긴장은 창조적인 힘이다.


5.5 분명하게 간화선은 교설이 아니다. 교설은 매우 유용한 도구이고 사회적인 가치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설은 시대적인 결과이고, 그것은 도그마에 떨어지거나 관료적인 체계에 갇히기 쉽다. 간화선은 어떤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 교설을 벗겨낸다. 삶의 진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어떤 교설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만나는 방식을 제공한다. 그래서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고뇌가 없으면, 간화선은 이해되지 않는다. 간화선은 과학적인 분석이 아니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



인경스님의 ꡐ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ꡑ에 대한 논평문을 읽고




각묵(발제자)


* 논평자로 나선 인경스님의 논평문이 발제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논평을 담고 있어서 발제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씁니다.


⑴ 인경스님은 발제자의 발제문에 대해서 ꡒ위빠사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에 간화선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ꡓ고 적고 있는데 본인의 발제문은 결코 간화선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발제자는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두 입각처를 있는 그대로 인용하여 나름대로 정확하게 썼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발제자는 간화선이야말로 무전제의 수행이요 이런 무전제는 산냐척파를 설하는 선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숫따니빠따 4장 등 최초기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간화선을 대표되는 선종은 스스로가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고 자부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단지 이런 무전제의 최상승의 간화선을 ꡐ나는 누구인가ꡑ나 ꡐ진아여여ꡑ식의 힌두적인 외도선으로 치부하는 한국 간화선의 폐풍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발제자의 발제문을 정독해주실 것을 권하며 발제자의 발제문의 요지를 왜곡시키지 말 것을 부탁드린다.


⑵ 인경스님은 ꡒ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각 수행론이 가지는 사상적인 관점과 그것의 장단점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확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ꡓ라고 논평문에 적고 있다. 발제자의 발제문은 인경스님의 이런 주장에 그대로 부합한다고 자부한다. 발제자의 발제문 2장에서는 간화선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간화선 성립의 배경을 세 가지로 들고 간화선 참구법을 요약하고 있으며 위빳사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위빳사나의 이론체계인 남방 아비담마의 입장을 3장에서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마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위빳사나는 사마타를 극복한 수행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배경하에서 4장에서는 같은 점을, 5장에서는 다른 점을 각각 다섯 가지로 관찰하고 있다. 이것은 둘에 대한 공정한 평가요 공정한 비교라고 발제자는 자부한다.


그러면 왜 인경스님은 발제자의 발제문을 위빳사나에 치우친 발제문이라 보는가? 인경스님의 논평문을 통해서 본다면 그는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바담마와 위빳사나를 남방에서 설하는 방법으로 보지 않고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평하게 상대를 이해하려면 상대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ꡐ내 일기장에 나쁜 놈이라 적혀있으니 너는 나쁜 놈일 수밖에 없다ꡑ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하 인경스님의 위빳사나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비판해본다.


⑶ 인경스님은 ꡒ1.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이 아니라 표상이다.ꡓ라고 했는데 이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표상(nimitta)은 개념(pa~n~natti)에 속한다. 이것은 청정도론을 위시한 남방의 모든 주석서에서 설하고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식의 주장을 늘어놓는 자체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방에 가서 ꡐ사마타의 대상이 법ꡑ이라고 하면 모두가 어처구니없어서 웃을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면 먼저 정확하게 상대의 가르침을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⑷ 인경스님은 ꡒ2. 사띠(sati)와 위빳사나의 구별은 이론상 가능할 뿐이다.ꡓ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인경스님의 이런 주장은 본인 스스로가 위빳사나 수행에 문외한이라는 말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위빳사나는 남방의 수행법이다. 남방의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통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오해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⑸ 인경스님은 본삼매에 들어가기 직전의 고뜨라부(種姓, gotrabhu)와 성자의 경지(예류도)에 들어가기 직전의 고뜨라부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 둘은 용어만 같을 뿐 다른 개념이다.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정확하게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봐버리면 본삼매(초선)에 드는 것과 출세간도(예류도)에 드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 출세간도에 드는 고뜨라부는 본삼매에 드는 고뜨라부와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분명하게 구분해야한다. 그리고 이런 두 고뜨라부(종성)의 마음은 오직 한 찰라만 존재하는 것이라서 여래장계통의 불성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⑹ 남방에서는 두 가지로 법의 특징을 설한다. 하나는 개별법의 고유성질(svabhava)을 말하고 하나는 모든 법의 공통된 성질(saama~n~na)이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은 탐하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성냄(dosa)은 성내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모든 법은 모두 무상고무아라는 공통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제법무아사상이며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분석 없는 직관이 가능한가 묻고 싶다. 반야경에서도 아공 법공 색공 수공 ...을 설한다. 아 법 색 수 상 ... 등의 법이 없이 어떻게 공을 말할 수 있는가? 공은 즉공에 다름아니라고 본다. 즉공이 아닌 공은 무기공, 악취공일 뿐이다. 초기남방의 무아와 대승의 무아를 다르게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반야중관의 무아와 유식의 무아와 화엄의 무아와 법화의 무아와 선의 무아와 그 외 중국에서 전개된 다양한 종파의 무아는 모두 달라야하는가. 다른 점은 ꡐ오직 직관ꡑ과 ꡐ분석을 통한 직관ꡑ이다.


⑺ 인경스님은 ꡒ3. 불성사상은 불교신앙의 원천이다.ꡓ라고 했다. 과연 불성이 있어야만 자기 정체성이 확보되는가 심각하게 묻고 싶다. 불교도의 가장 근본적인 자기정체성의 확보는 바로 삼귀의와 5계(계율)에 있다. 불법승계야말로 초기부터 남북방의 궁극적인 자기정체성의 기초중의 기초 아닌가. 이런 엄연한 불자들의 귀의처가 있음에도 다시 불성이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논리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

⑻ 인경스님은 ꡒ4. 아비담마의 법은 또 하나의 개념이고 관념이다.ꡓ라고 하고 있는데 남방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출발점이라 본다. 아비담마에서 강조하는 법은 ꡐ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ꡑ이다. 이것은 내안에서 적나라하게 매순간 전개되며 흘러가고 있다. 매찰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개념이고 관념이라 파악한다면 남방 아비담마에 전혀 문외한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방에서도 제법은 무아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제법무아를 매찰나 내안에서 확인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결코 관념이 아니다. 그래서 관념(빤냣띠)과 법을 정확하게 구분지어 살필 것을 남방에서는 강조한다. 아공법유는 북방에서 남방을 폄하하기 위한 모토로 들고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낀 빨간 안경으로 상대를 보고 빨갱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특히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비교하는 자리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먼저 상대의 입각처를 분명히 알자고 말하고 싶다.


⑼ 인경스님은 ꡒ분명하게 간화선은 교설이 아니다. 교설은 매우 유용한 도구이고 사회적인 가치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설은 시대적인 결과이고, 그것은 도그마에 떨어지거나 관료적인 체계에 갇히기 쉽다. 간화선은 어떤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 교설을 벗겨낸다. 삶의 진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어떤 교설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만나는 방식을 제공한다.ꡓ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간화선은 교설이 아니다. 간화선은 교설을 부정한다. 일체의 모든 전제를 부정한다. 부정한다는 것 까지도 부정한다. 거기에는 소승도 대승도 없다. 그래서 불입문자요 교외별전이다. 하물며 진아니 대아니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내부처니 주인공이니 아공법유니 아공법공이니 공공이니 하는 관념놀음이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런 대부정 위에서 전후제단의 의정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최상승이라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무리 아공법공이다 진공묘유다 대승반야다라고 내세운다 해서 화두에 의정이 돈발하는가? 오히려 아무것도 붙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세우고 그것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외도선에 떨어져있지 않은가? 아니면 인가라는 권위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인가라는 권위를 잃어버린 지금 우리가 의지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고뇌해봐야 한다.


⑽ 인경스님은 ꡒ그래서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고뇌가 없으면, 간화선은 이해되지 않는다. 간화선은 과학적인 분석이 아니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그 자체일 뿐이다.ꡓ라고 결론짓고 있다. 의정이 살아있는 간화선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심각한 고뇌는 의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일어나지 않는 의정을 억지로 붙들고 시름하는 것은 육단심을 자극하는 불선법일 뿐이다. 일어나지 않는 의정을 몰록 일으키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화두 참구자의 생명이 걸린 물음이다. 이 문제에 고뇌해야하고 이 문제에 솔직해야한다. 발제자는 이것이야말로 간화선하는 자의 철저한 고뇌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지 말에 지나지 않는 문자고뇌에 지나지 않으리라. 발제자는 화두 때문에 출가했다. 그래서 출가 후 강원가지 않고 선방에 갔다. 24시간 화두에 의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뇌했다. 바로 지금여기에서 화두에 몰록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면 아무리 아공법공을 말하고 거룩한 대승반야를 논하고 돈오를 주장해도 그게 화두참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즉각적인 의정이 돈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염화두이다. 간화선에서 보자면 망상분별일 뿐이다. 염화두는 괜찮고 오온에 대한 분석적 접근은 나쁜가. 아니 염화두도 않고 온갖 망상분별에 놀아나는 것은 괜찮고 초기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분석적인 접근을 통한 실체없음(무아)의 확인은 안되는가? 우스운 발상아닌가?

불교의 정신은 자귀의 법귀의이다. 자귀의를 초기경에서는 사념처로 설하고 있다. 자귀의는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최종 의지처는 법귀의가 되어야한다. 역사를 아는 우리는 그 법의 최종판단을 부처님 원음에서 찾아야한다. 그래서 사제 8정도 12연기 37조도품 등으로 귀착되는 법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내 중노릇과 내 수행에 적용시켜야한다고 발제자는 발제문에서 제안한 것이다.

발제자는 ꡐ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ꡑ에서 초기 남북불교의 골수중의 골수인 무아에 사무쳐야 그것이 바른 간화선이라고 제언하였다. 오온무아가 제시하듯이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분석적으로 접근하셨다. 화두가 도저히 안되어 온갖 망상이 다 들고, 온갖 육단심이 동하여 헤메거나, 온갖 나쁜 짓거리를 다하고 다니기 보다는 나의 존재를 하나하나 분석적으로 고찰하고 사유하여 실체없음에 사무치는 것이 과연 화두 참구에 도움되지 않는단 말인가?


발제자는 내세울 것은 없지만 화두참구를 한다. 남방에 가서 오히려 화두 수행법을 되찾았다. 발제자는 ꡐ이것은 더 수승하고 저것은 저열하다ꡑ는 이분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발제자가 10여년을 그렇게 버리려고 노력한 화두를 다시 참구하는 이유는 화두참구가 발제자에게는 이제 이것이 더 쉽고 더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 뿐이다. 발제자는 결코 억지로 화두를 참구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애쓰는 마음이야말로 버려야할 불선법이고 애쓰는 최초 한생각에서 여러 불선법들이 따라 일어남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발제자는 평소에 대상을 대하면서 그 대상에 반연하여 내안에서 어떤 물심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보려한다. 화두는 아침에 눈떴을 때 십중팔구 자연스레 들리고 그 외는 억지로 화두들려 애쓰지 않는다. 일없이 심심할 때는 ꡐ노느니 염불한다ꡑ는 식으로 화두참구한다. 위기상황이 돌출하면 대개는 화두를 챙기는 습관이 있다. 화두는 편안한 가운데 들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화두는 몰록 전후제단이 되는 것이라고 경험으로 알고 있다. 육단심을 일으킨다고 해서 몰록 화두가 들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히 화두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즐겁고 기쁘게? 간직하고 들고 하다보면 순숙해간다고 판단한다. 그보다는 선불선법을 바르게 판단하여 불선법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없애려 하고 선법은 일어나게하고 증장하게 하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편이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지금 내가 하는 화두참구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다.


끝으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발제자는 결코 간화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간화선이야말로 바르게 접근하면 최상의 수행법이라고 판단한다고 지난 번 금강경 결제부터 누누이 강조했다. 정말 간화선을 최상이라고 믿는 자는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 한 다른 수행법도 같이 귀중하게 생각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큰 그릇이고 그것이 최상의 그릇일 것이다.



일시 : 불기 2547(2003)년 2월 25일(화) 저녁 6시 - 9시
장소 : 지리산 실상사

주제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기조강연 : 혜국스님 (제주 남국선원)


발제 : 각묵스님 (초기불전연구원)
대표토론 : 정화스님, 인경스님(보조사상연구원)

사회 : 미산스님(백양사 참사람수행원장)

일정 : 오후 4시 접수. 오후 5시30분 공양. 오후 6시30분 예불 및 논강
대상 : 조계종 비구, 비구니


<발제문>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각묵스님


<논평>
대승불교와 간화선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인경스님(禪상담연구원)

<재반론>
인경스님의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 대한 논평문을 읽고 /각묵(발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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