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돈오돈수 돈오점수-청화 큰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3. 25. 13:00

 

 

 

: [선문정로]가 출판된 이후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문제가 한국불교의 중심문제의 하나로 부각되었습니다. 여기에 관한 책도 몇 권 나왔고 불교계 차원에서 볼 때 대규모 학술토론회도 몇 번 있었습니다. 몇 일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종교학회 연례 세미나의 한국분과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주제로 채택되어 대토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 스님께서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철 스님의 보조스님 돈오점수 비판에 대한 스님의 견해, 그리고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들려주십시오.





스님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논쟁은 선()과 교()의 논쟁과도 관계가 있는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일찍이 중국의 [마하연나 스님]과 인도의 [카마라실라 스님]이 티벳의 랏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끝내 양편이 자기편이 이겼다고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보조 스님이 떠난 지 거의 800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선과 교를 일치한 회통불교의 분위기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돈오점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조계종에서 오랫동안 종정을 지내시고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그의 선문정로에서 옳지 않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전문학자가 아닌 참선수자이기 때문에 교학적인 분석에는 능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복잡미묘한 논쟁에는 끼어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먼 길에 일부러 찾아오신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에 혹 공부하시는 불자님들에게 참고라도 되실까 하여 저의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조스님에 대해서는 비단 한국불교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 선각자로서 오랫동안 추앙을 받아 왔다는데 문제의 중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성철스님에 대하여는 개인적으로 우리 종단의 종정스님으로서 후학의 입장에서 깊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단의 상징인 종정스님의 위상에 다소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염려스런 마음에서 몇 마디 사견(私見)을 말씀드립니다.


문제의 초점인 성철스님이 지적한 바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이 과연 옳지 않은 것인가? 제가 알기로는 돈오점수설은 이미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수용한 불교 일반의 수승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오돈수라는 개념은 성철스님이 맨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육조단경, 돈점품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돈오점수라는 개념도 중국 당나라 때 화엄종 4대 종사인 징관스님이 비로소 사용했다고 하나 종밀스님이나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뜻이 대체로 돈오점수의 사상으로 일관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돈오돈수설은 어떠한가? 저는 돈오돈수도 깨달은 뒤의 닦음을 무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도 옳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도 또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의 두 법문이 표현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근본 취지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경의 돈점품에 나오는 돈오돈수설이 깨달은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아서 자타시비의 차별이나 높고 낮고 깊고 옅은 등의 분별심은 끊어졌으나 아직 번뇌의 습기(習氣)는 남아있기 때문에 이른바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수행(無念修行) 곧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경을 정독하면 그런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 단경의 부촉품에 그대들이 만약 일체 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성취해야 하느니라… 등을 참고하든지 전등록 제5장 남악회양장에 보면 육조스님이 남악회양스님의 깨달음을 인가할 때도 깨달은 뒤에도 닦고 증()함이 없지 않으나 무염오수행 곧 무념수행이어야 한다고 고구정녕이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해오(解悟)가 됐든 증오(證悟)가 됐든 간에 지극히 수승한 근기가 아닌 보통 근기로는 깨달음이 바로 구경각인 묘각 성불의 자리에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에 견도(見道) 이전의 해오(解悟)에도 사선근의 깊고 옅음이 있고, 견도 이후의 증오에도 보살 10지 등의 심천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깨달은 뒤에도 착실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이 오류일 수가 없습니다.


대소경론에서 묘각(妙覺) 성불(成佛)의 일체공덕을 간략으로만 살펴봐도 삼명육통(三明六通)과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였는데 석존 이후 오랜 불교사상에 과연 얼마만의 선지식들이 이러한 원만 성불의 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인가… 우리 불자들은 매양 겸허한 마음으로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따르되 그때그때 인연에 따른 표현과 말에 걸리지 말고 그 깊은 의미를 배워서 일심 정념(正念)으로 공부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육조스님의 돈오돈수설이나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나 또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이나 다 같이 중생교화의 배경과 인연이 다를 것이므로 그이들의 표현방법과 그에 따른 함축된 의미도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한결같이 미혹한 중생들이 미처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증득했다고 하고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이른바 증상만(增上慢)을 경책(警責)하며 올바르고 철저한 수행과 깨달음을 위한 노파심절한 근본정신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보약도 잘 못 쓰면 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많은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귀감으로 할지언정 거기에 걸리거나 구속을 받지 말고 철저한 고증과 투철한 자기수행의 점검으로 원만 무결한 깨달음을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면 의미로 볼 때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같은 의미입니까?





스님 :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나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조국사와 같은 대천재적 선지식이 돈오돈수란 뜻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의미로 봐서는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육조대사가 깨달음 다음에 왜 돈수라고 했을 것인가? 이것은 의심이 되겠지요. 돈오돈수의 뜻은 돈점품, 부촉품, 남악회양대사와 육조대사가 거량한 것 등을 통해서 살펴보면 한 번 돈오했다고 했을 때 돈오 그것이 성불(成佛)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삼명육통과 일체종지를 갖춘 깨달음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단박 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것과 같겠습니까? 따라서 돈오돈수는 일체구경각 즉 묘각이 아닙니다. 원만무결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돈수라고 수()자를 붙인 것이지 오() 다음에 닦음이 없으면 수는 왜 붙입니까? 마땅히 돈수라고 할 때는 수()가 있으니까 수를 붙였겠지요. 다만 그 수는 자타시비, 고하계급을 가리는 수가 아니라 무념수행(無念修行)입니다. 무념수행이란 자타시비, 고하계급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깨달음이란 자타시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해오가 되었던 증오가 되었던 돈오가 되어버리면 비록 구경각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타시비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점차로 올라가고 높고 낮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회향선사가 육조대사한테 인가 받을 때 육조대사가 "닦음과 증득이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회양대사가 "닦음과 증득이 없지 않으나 차별과 시비를 두지 않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육조스님께서 "염오하지 않는 수행은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생각하는 바요, 그대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점수라 해도 하등 오류가 안되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나와 네가 있고, 고하계급이 있다는 등의 상을 둘까봐 노파심에서 돈수라 했다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보조는 화엄학에 투철한 분인데 그 분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을 모르고 묘각을 모르겠습니까? 보조의 돈오점수는 깨달은 뒤에 묘각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습기를 착실히 닦아야 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 것입니다. 돈오돈수라는 언어도 육조가 쓴 말인데 오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말을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는 성불이다. 성불은 수()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철스님 주장대로 성불만 오()라고 한다면 점수뿐만 아니라 돈수라는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 스님께서도 『정통선의 향훈』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수행이 부족한 분들의 도인 행사는 우리 불교계의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돈오점수가 이 거짓 도인행세의 이론적 뒷받침을 하는 폐단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 :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오점수 때문에 미증(未證)을 증으로 하고 미오(迷悟)를 오로 했다는 증상만(增上慢)의 도인이 나온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보조국사가 완전한 깨달음을 무시했다면 모르거니와 완벽한 성불을 목적으로 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점수를 주장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함부로 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성불만이 깨달음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성불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불이라는 것도 우리가 불경을 보면 삼명육통과 일체종지와 만공덕을 갖춘 것인데 삼명육통과 만공덕을 갖춘 분은 누구누구인가 생각할 때는 의문이 갑니다.


보조국사가 성불을 무시했으면 모르거니와 그것을 전제로 해서 돈오점수를 말했기 때문에 돈오점수가 거짓도인 행세의 이론적 뒷받침이 될 수 있다는 그 지적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고 반대로 돈오점수를 말해야 섣부른 도인이 못나옵니다. 그리고 아함경 등 경전에도 아라한들에게도 깨달음의 깊음과 옅음의 심천이 있다고 했고 그런 깨달음의 심천을 알아두어야 내 공부는 이만치다라고 점검할 수가 있겠지요. 완전 원만한 성불만이 깨달음이 아니라 깊고 옅음이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고 번뇌와 습기를 소멸하는 수행의 도리가 또한 그러합니다. 깨달음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단계가 많은 것인데 본래 부처님의 경계에서는 하나이지만 중생의 수행해 가는 데는 깊고 옅은 단계가 많습니다. 다만 그런 단계도 본래는 공()이기 때문에 집착 말고 걸리지 말라는 것이지 단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조는 돈오점수라 했고 육조스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학적으로 너무 걸려 있으니까 교학에 걸리지 말라는 뜻으로 돈오돈수라 했습니다. 도인들은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씀을 하시니까 후대에 우리가 섣불리 비판하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