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無住堂 淸華 大宗師

通達無我法者 2007. 3. 25. 11:27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오늘 납월(臘月) 팔일(八日) 성도절(成道節)은 우리 인류사회(人類社會)에 있어서나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가장 의의(意義)깊은 날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인간의 무명(無明)을 헤치고서 참다운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위없는 깨달음, 가장 중정(中正)한 도리를 깨달은 날이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하나의 육신(肉身)으로 태어난 날은 사월초파일(四月初八日)이지만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法身), 법왕(法王)으로 태어나신 날은 바로 오늘 십이월 팔일, 즉 납월 팔일입니다.

오늘이 아니었던들 인류사회는 무상정변지, 위없는 그런 중정한 길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眞理)를 어렴풋이는 알았다 하더라도 진리의 그런 구경각(究竟覺)까지 다 알 수 있는 무상정변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납월팔일로 해서 즉 하나의 법왕으로 해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이 날부터서 비로소 비롯된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신명(身命)을 내 걸고 구해 보지 않은 분들은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또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무명으로 헤매다가 그 무명 때문에 인간이 가지가지의 그런 죄업(罪業)을 지어서 심각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절한 인생고를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가 또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진리를 모르기에 우리 마음이나 이 세계는 어두운 암흑(暗黑) 가운데 항시 쌓여 있는 것이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길을 몰라서 가지가지의 그런 삼업(三業), 많은 악업(惡業)을 행한단 말입니다. 악업을 행하면 그에 상응한 고()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명과 그 무명으로 인()해서 짓는 업()과 그 업()으로 인해서 받는 고(), 무명은 혹() 그러는 것인데, 그런 미혹(迷惑)된 무명과 미혹으로 해서 우리가 짓는 여러 가지의 번뇌(煩惱)와 또 번뇌로 인해서 행()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 몸으로 짓는 행동(行動),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우리 뜻으로 짓는 무명업(無明業),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쌓이고 쌓여서 인생의 가지가지의 고뇌(苦惱)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혹업고(惑業苦)는 전전(轉轉) 무변(無邊)해서 끝도 갓도 없이 영원히 인류를 윤회(輪廻)의 수레바퀴 가운데 몰아넣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혹업고 삼업을 벗어나는 길이 비로소 부처님의 성도(成道)로부터 열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는 안이(安易)하게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육년 고행이라 하는 심각한 고행을 거쳐서 깨달으신 것입니다. 또 육년고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 세월동안 불교 말로 하면 이른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 하는 과거에 무수무량생(無數無量生)을 거듭 하면서 선행(善行)을 쌓고 자기 몸을 희생(犧牲)하곤 했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굶주린 범새끼를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중생(衆生)의 고뇌를 구제하기 위해서, 중생의 빈곤(貧困)을 구제하기 위해서 바닷물을 품어서 바다 속에 들어 있는, 용왕(龍王)한테 간직해 있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찾기 위해서 끝도 갓도 없는 노력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여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몇 천번 자기 몸을 바치고, 어떤 때는 도()를 얻기 위해서 자기 눈을 바치고, 자기 사지(四肢)를 바치고, 이러한 희생적인 행동을 무수히 지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거 무량세월의 자기 희생적인 보살행(菩薩行)은 물론 금생에도 영화로운 왕자(王子)로 태어나서도 육년고행이라 하는 그러한 심각한 고행을 거쳐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구하실 때는 어느 한가지에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고행외도(苦行外道)한테 가서 무시무시한 고행을 다 했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苦行象)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피골상접(皮骨相接)이라, 다만 앙상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잡수시는 것은 하루에 일마척맥(一麻隻麥)이라, 한 일()자, 피마주 마()자, 조각 척()자, 보래 맥()자, 한 조각의 피마자와 낱알 한 조각이 보리알, 이러한 것만 하루에 자시고 공부 했다 하는 그런 식적(食的)인 면에서, 음식이나 그런 면에서도 극도로 고행을 하셨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을 위한 고행은 지양(止揚)하고 또는 안일(安逸)을 지양합니다만 그래도 부처님께서 당초에 하신 것은 그야말로 고행을 위한 고행 정도로 심각한 고행을 하셨던 것입니다.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위해서 위없는 길을 위해서 자기 몸을 불살으시고 희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행외도(苦行外道)한테 가서 배우고 배웠으나 역시 고행외도가 올라가는 길은 기껏 해야 욕계(欲界)를 초월해서 범천(梵天)에 가는 그런 길밖에는 안되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라신 바는 삼계(三界)를 해탈(解脫)하고 오직 참다운 자유인(自由人)이 되고자 했던 것인데 고행외도라 하는 것은 고행은 많이 하지만 기껏해야 욕계를 초월하는 길뿐인 것입니다. 욕계를 초월하는 길도 역시 허무한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욕계만을 초월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면 참다운 진리의 빛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방문한 외도(外道)는 아라라가란(阿羅邏迦蘭)이라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인데 이 분한테 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무소유처(無所有處), 무색계(無色界)의 두 번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만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그러한 경계가 세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제일 밑에 욕계(欲界), 즉 음욕(淫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등 이러한 욕심을 주로 한 세계가 이제 욕계, 그 다음에 참다운 미세정묘한 일체 물질의 미묘한 그런 색()만 존재하는 색계(色界), 또한 그 위에는 색은 없고 물질은 물론 그런 정묘한 색도 아무것도 없이 다만 심식(心識)만 인간의 영식(靈識)만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합니다. 헌데 아라라가란 이 사람은 욕계를 떠나고 또는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 무색계에도 네 개의 천계가 있는데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이와 같이 네 가지 하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세 번째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법(禪法)을 공부한 분이 아라라가란입니다.


아라라가란한테 가서 부처님께서는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법을 배웠습니다. 이것도 역시 사실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욕계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또는 과거 전생에 무수한 세월동안 선근(善根)을 심어서 거기에서 나온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얼마 안가서 아라라가란이 올라간 선법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해탈(解脫)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소유처라 하는 하늘에 올라가는 즉, 천상(天上)에 올라가는 법뿐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그러한 해탈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해탈의 길을 구하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 그래서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당신보다 더 깊은 도를 아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아라라가란이 ‘내 아들이지만 나보다 더 높이 올라간 분이 우다카다.’ 우다카한테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래 우다카한테 가서 법을 물으니 우다카는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삼계(三界)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있었습니다. 이 하늘이 삼계에서는 가장 높은 하늘입니다. 여기에 올라가는 선법을 공부했습니다. 벌써 무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는 올라가셨으니 거기서 한 발짝 위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삼매(三昧)에 드셔서 그냥 올라가셨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라 하는 그런 천상에 올라가는 법, 즉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동시에 수명(壽命)이 팔만대겁(八萬大劫)인 천상입니다. 겁이라는 것은 무량세월 아닙니까. 그런 팔만대겁까지 살 수 있는 처()입니다.


그렇게 오래 산다 하더라도 역시 인연(因緣)이 다하면 그 천상에서도 미끄러져야 합니다. 다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는 욕계에 있으나 색계에 있으나 무색계에 있으나 어느 하늘에 가나 또는 제 아무리 안락스러워서 모든 것이 다 풍족하지만 결국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죽어져야 합니다.

헌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하시는 길은 죽음이 없는 생사가 없는 영원한 해탈(解脫)의 길입니다. 죽음이 있다든지 기타 번뇌(煩惱)가 있으면 해탈의 길이 못되는 것입니다. 해탈의 길은 영생불멸(永生不滅)의 길입니다. 오직 영생불멸의 길만을 구하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하나의 구도심(求道心)인데, 이러한 무색계의 가장 높은 하늘, 중생계 가운데서는 가장 최상천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올라갔다 하더라도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역시 어느 중생이나 간에 참다운 도를 구하는 분들은 어느 하늘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광명(光明)이 빛나는 그러한 색계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추고 있다시피 하는 그런 안락스럽고 팔만대겁이라하는 오랫동안 장수(長壽)하는 그런 하늘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특히 유위(有爲) 상대(相對)인 그런데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위(無爲) 적적(寂寂)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이 아니고서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비상비비상처,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그런 찬란스럽고 아주 황홀한 그런 세계에서 내가 이만큼 공부했으니 이제는 거의 됐겠구나. 그렇게 해서 자만심(自慢心)을 좀 품었습니다.


그런 때 - 이제 밀교에서 보면 -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가만히 은근히 와서 싣달타 - 부처님의 보살 때, 즉 말하자면 수행할 때 이름은 싣달타 아닙니까. - 그대가 가는 곳은 아직은 유위상대인 천상에 불과하니 다시 경각해서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진정한 해탈을 구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경각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 경각심을 받고서 삼세제불한테서 오상성신(五相成身) 법문이라.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이란 법문을 얻어서 그 법문을 가지고서 다시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 최상안온(最上安穩)한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대도를 성취하셨습니다.

제가 뒤에 보탠 말은 밀교(密敎)에 있는 말이므로 참고로만 할 뿐입니다만 아무튼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무상대도(無上大道),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必三菩提)를 성취하셨습니다. 완전무결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분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외에는 아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정통(正統) 조사(祖師) 모두가 이와 같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분들입니다.


헌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납월 팔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라! 금성(金星)이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것을 보시고서 깨달으셨는데 그때 깨달으실 때에 그런 감격스러운 정황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그러한 장엄스러운 광경을 묘사한 법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선 간단히 말씀하면 우화동지(雨華動地)라! 비 우()자, 꽃 화()자, 움직일 동()자, 땅 지()자.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그런 꽃비가 내리고 땅이 육동(六動)으로 진동해서 즉,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성불을 찬탄했습니다.

어제 어느 신도님께서 불경(佛經)을 보면 꽃비가 내리는 그런 말씀이 많이 있는데 이 말이 참말입니까? 상징에 불과합니까? 이와 같이 물어 왔습니다. 이것은 불경에 있는 말씀으로 조금도 흠축이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때에 하늘에서는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라, 네 가지 하늘 꽃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때, 또는 무상대도까지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에 대해서 희귀한 일, 아주 귀한 일이 있을 때는 이와 같이 만다라화 또는 마하만다라화 꽃, 이것이 마하만다라화 꽃입니다.

만주사화! 만다라화보다도 더 찬란스럽고 더 영원에 가까운 그러한 천상화 이것이 만주사화입니다. 마하만주사화! 만주사화보다 더 완전무결한 그런 하늘 나라 꽃이 이것이 마하만주사화입니다.

이러한 천상 꽃이 마치 비가 오듯이 꽃비가 내린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꽃비가 내려서 - 꽃비는 천상 인간들이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부처님을 찬탄하신 그런 꽃비입니다.

우화동지(雨華動地)라! 천상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천지우주는 육동(六動)으로 진동해서 좌우전후(左右前後), 상하(上下) 어디도 흠축 없이 빼놓을 틈도 없이 천지가 진동해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부처님의 무상대도 성취하심을 찬탄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도 보면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하늘에는 천상의 만다라화 꽃이 항시 이렇게 피어 있고, 하늘에 있는 북은 자연히 울리도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소승경전(小乘經典)에서는 그런 말이 없으나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는 이러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상대도를 성취하실 때나, 또는 기타 그런 대승법(大乘法)을 찬탄할 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또는 천지 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해서 부처님 법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실 때 부처님은 무상의 그런 희락(喜樂)을 느끼시면서 -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는 인간의 재미라는 것은 오욕경계, 욕계에 있는 오욕(五慾)을 다 맛볼 때 비로소 있는 것이지 오욕을 떠나면 재미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오욕을 떠나면 떠날수록, 오욕에서 멀어가면 멀어 갈수록 영원적인 참다운 법락(法樂)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법락을 미처 맛을 못 보므로 그와 같이 인간의 재미는 욕계 밖에는 없구나,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이성(異性)끼리 잘 사귀고, 물질이 풍족하고, 이러한 것에가 행복이 있는 것이지, 이러한 것을 떠나서는 참다운 행복은 없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합니다만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영원적인 법락은 더욱 더 증장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이 깨달을 때는 맨 처음에 환희지(歡喜地) 아닙니까. 환희란 말입니다. 환희라는 것은 자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깨달아서 환희지에 이를 때는 그 안락스럽고 행복스러운 것을 어디다가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끔 말씀을 합니다만 마하가섭(摩訶迦葉)같은 분은 - 마하가섭은 부처님으로부터 무상대도의 법을 전수받으신 정법 조사입니다. 헌데 마하가섭과 같은 그런 굉장히 근엄한 분, 평생 동안에 두타행(頭陀行)이라, 고행(苦行)을 취하고 누더기 하나와 바리때 하나로 평생을 지낸 분입니다만, 이 분같이 근엄한 분도 보살초지(菩薩初地)의 환희지(歡喜地)를 성취할 때는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었단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좌선중(坐禪中)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되고 이른바 경안지(輕安地)에 이르고, 경안이 좀 나아지면 희락이라, 기쁠 희()자, 즐거울 락()자 희락지(喜樂地)에 이르면 그 기쁨을 어디에 감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좀 맛본 사람들은 아! 정말로 인간세상의 그런 오욕,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 하고서 다시없는 희락을 느낍니다만 영원적인 그런 맛을 못 본 사람들, 다시 말하면 염불삼매(念佛三昧)라든가 또는 기타 삼매를 통해서 - 삼매(三昧)라는 것은 주문(呪文)을 외우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나, 또는 염불(念佛)을 하나, 어떻게 하던지 간에 또는 경()을 외우든지 간에 삼매에 딱 들면 삼매경계(三昧境界)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 어느 한 가지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산란심(散亂心)이 제거가 되고서, 우리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에 들어만 가면 그때는 어떻게 들어가든지 간에 아까 말씀마따나 욕계가 멀어감에 따라서 무한의 환희를 느낍니다.


무한의 환희를 느끼는 것은 그냥 몸과 마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적에 맛보시던바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 이러한 사종 천상 꽃이 비 오듯이 온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맛보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하가섭과 같은 근엄한 대도인(大道人)도 너울너울 춤을 춘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온전히는 맛을 못본다 하더라도 조금쯤 맛을 봐야 인간세상의 그러한 오욕락에 대해서 집착을 않습니다.

오욕락은 그냥 순간에 불과하고, 이러한 참다운 영원적인 희락 이것은 불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같이 희락 가운데서 위없는 그러한 환희 가운데서도 최상의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셨습니다.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시고 보니 자기 혼자만 성불(成佛)한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보리수(菩提樹)라든지, 보리수의 잎파리 하나하나, 보리수의 줄기 하나하나, 또 그 주변에 있는 그런 숲,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부처님의 성불과 동시에 같이 성불(成佛)해 버렸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이 성불(成佛)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산하대지(山河大地) 산천초목(山川草木)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동시(同時)에 성불했다는 그 의의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산을 보고 땅을 보고 또는 여러 가지 만상(萬象)을 봅니다. 만상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장(業障)에 가려서 바로 못 봅니다. 업장이 녹아지면 녹아진 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바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바른 모습에 가까워져서 업장이 온전히 녹아지고서 참다운 자아(自我), 참다운 참 나에 이르렀을 때에, 참다운 진정한 자기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주(宇宙)의 참 모습을 봅니다. 우주의 참 모습을 볼 때는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우주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생명(生命)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산이나 또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가 생명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華嚴經) 약찬게(略纂偈)에 보면 산도 살아있고, 냇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있고, 일체 동물이 모두가 다 우리 인간과 차이 없이 생명을 갖추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물에는 용왕(龍王)이 있고, 또는 도량에는 도량신(道場神)이 있고 그런 것이 다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모양은 이와 같이 보이지만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이 있으니까 이제 인간존재란 말입니다. 만일 우리 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똑같이 산에도 역시 모양은 산이지만 그냥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쉽게 말하면 산의 혼(), 산의 혼은 결국은 산신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있으면 나무라는 모양뿐만 아니라 나무에는 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내야 이제 나무 목()자, 귀신 신()자, 목신(木神)입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있으면 그때는 돌 석()자, 귀신 신()자, 그때는 석신(石神)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교는 신()만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오해(誤解)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거기에는 혼()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生命)이 거기에 이제 갈마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眼目)에서는 그것이 죽어 있다고 보지만 그런 무생물(無生物)이나 모두가 바른 안목, 바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수 있는 안목, 본질을 보는 안목에서는 모두가 다 생동(生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엇이나 순수생명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덕분에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라 하는 그러한 인생 고해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그런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도인들 역시 부처님같이 온전히는 다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정통조사님들은 모두가 다 무상대도의 맛을 봤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는 전쟁도 하고 어떤 때는 무시무시한 고뇌(苦惱)를 다 겪지만 그러한 무수한 성자(聖者)들의 가르침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서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바라보고 우리가 희망이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은 이것은 한계가 없이 그냥 좋고, 또는 마음이 개운하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수 오묘(奧妙)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깨달음을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기신론(起信論) - 마명대사(馬鳴大師)가 저술한 기신론에 의해서 깨달음의 그런 한계 차서(次序)를 말하면, 이제 사각(四覺)이란 말입니다. 네 가지 차원으로 깨달음 경계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대도(無上大道)라 한다 하더라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심천(深淺)의 관계, 깊고 얕은 관계를 잘 모르면, 우리가 자칫하면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합니다.


처음에 초범(初梵)만 가 가지고 다 됐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중간쯤 가서 다 되었구나, 이것이 무상대도구나,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맨 처음까지 가기도 어렵지만은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은 무상대도(無上大道)이기 때문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체 공덕을 갖춘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成佛)에 대해서 보다 더 감격을 해야 한다. 보다 더 신심(信心)을 내야 한다. 하고서 편달도하고 여러 가지 법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우리 인간 정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성(本性)이 돼 있는 그런 불성(佛性), 그런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功德)을 우리가 제대로 잘 모르면 그때는 바른 신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 욕계(欲界)에서는 욕계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것인데, 먹는 것, 입는 것, 이성끼리 만나서 사는 것, 그래저래 재미가 있는 것인데, 부처님한테 가는 길, 부처님한테 갖추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그러한 위대한 것이 있으면 모르려니와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욕계를 버리고서 무상대도로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아직은 그런 부처님 경계에 들어 있는 즉 불성(佛性) 가운데 들어있는 무한한 공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고구정녕히 부처님께서는 말씀했다 하더라도 체험을 못하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은 아직 못했다 하더라도 그 법신(法身) 부처인, 우리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여기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불경(佛經)에 나와 있는 말씀만 가지고도 백사십불공법(百四十不共法)이라. 공덕이나 재미나 이런 행복 같은 것이 백 마흔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간추려서 말씀한 것이지 사실은 몇 겁을 두고서 계산을 잘하는 도인들이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백사십불공법, 일반 보통 사람들이나 보통 낮은 성인들은 같이 더불어 할 수 없는 그런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입니다.

또한 동시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삼명육통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이나 인과율(因果律)에 얽매지 않습니다. 도()라는 것이 시간에 얽매이고 공간에 얽매이고, 인과율에 얽매이면 이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성품(性品) 이것은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고 또는 시공을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 불성(佛性)과 온전히 하나가 못될 때는 삼명육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만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는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또는 어떤 성자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그 자리 법성(法性)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그 자리를 온전히 우리가 체험했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인과율을 초월하고 또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못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다 없고, 못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법신(法身) 공덕(功德)입니다. 이것은 어떤 누구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 가운데 원래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 무한의 환희(幻戱)신 - 그런 무한의 공덕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다보여래(多寶如來)라! 많을 다()자, 보배 보()자, 다보여래라. 그 보배가 하도 많으므로 다보여래라 했습니다. 또는 부처님의 몸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서 우주를 다 포섭하니까 그때는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라! 또한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환희로워서 어떻게 가눌 수가 없어 그때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또는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란 말입니다. 환희는 내내야 이것은 마음도 몸도 한없이 기쁜 것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그 환희가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자성공덕(自性功德), 우리 불심(佛心)은 그와 같이 환희심(歡喜心)쪽으로 보나 또는 공덕이 많은 보배로운 쪽으로 보나 무한합니다.

또는 행복(幸福)이 충만한 자리 또는 광명(光明)이 충만하니까 그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청정하니까 그때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이와 같이 우리 자성, 우리 본래면목은 한이 없어 어떻게 그 공덕이나 행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조금도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경론(經論) 따라서 이런 행복스러운 자성(自性) 자리,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우리가 상기하고 다시 되세기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명(身命)을 내걸고, 한 세상 어차피 살다가는, 세상을 다른 길로 안 떨어지고, 이런 환희심이 충만하고 또는 영생할 수가 있고 무한한 공덕을 발휘할 수 있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를 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스러운 자리라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세(過去世)에 지은 나쁜 버릇 때문에, 또 금생(今生)에 지은 버릇 때문에 단박에는 성불을 못합니다. 그래서 성불하는 과정을 이와 같이 네 가지 깨달은 경계로 구분했습니다.


본각(本覺)이라. 이것은 본래 우리가 불성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공부를 조금만 안한다 하더라도 준준무지(蠢蠢無知)한 무식자(無識者)라 하더라도, 어떠한 존재나 모두가 다 본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성 청정심(淸淨心)이라 또는 본원각성(本源覺性)이라. 어떤 존재나 본각(本覺)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각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성불(成佛)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菩提樹下) 성도(成道)하실 적에 모든 존재가 다 본각, 모든 것이 다 부처구나. 이와 같이 바로 보셨단 말입니다. 불안청정(佛眼淸淨)한 안목으로 보셨으니까 그와 같이 바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각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우리 중생(衆生)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각은 있지만 닦지 않으면 우리 중생은 본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부처님 불성이 잠재(潛在)만 돼 있지 우리가 부처의 공덕을 못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공부하면 그때는 상사각(相似覺)이라, 서로 상()자, 닮을 사()자, 깨달을 각()자, 비록 본각과 똑 같지는 않지만 본각에 거의 닮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시각(始覺)이라. 비로소 시()자, 깨달을 각()자. 그때는 겨우 본각을 알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본각을 알기 시작할 때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육근은 내내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아닙니까. 우리 그런 안목이나 즉 우리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또는 우리 의식(意識)이나 모두가 청정이 돼야만이 비로소 본각(本覺)을 어렴풋이 깨닫는 상사각(相似覺), 시각(始覺)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훌륭한 법사(法師)님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만 역시 우리 생리(生理)가 정화(淨化)가 안되면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체험(體驗)을 못합니다. 이치(理致)로야 좀 재주가 있으면 해오(解悟)는 할 수가 있지만 참다운 증오(證悟)라, 참다운 법성(法性)을 증()할 때는 역시 우리 생리가 정화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생리가 정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도덕률(道德律), 즉 말하자면 우리가 도덕적인 계율(戒律)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안 지키면 우리 생리가 정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가 되면 마음이 정화가 되고, 마음이 정화가 되면 몸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설사 바른 지견(知見)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생리가 정화가 안되어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근청정이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우리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우리 의식이 그때는 청정하단 말입니다. 이렇게 청정해짐으로써 비로소 불심 가운데 들어있는 자성공덕인 본 깨달음을 맛봅니다.


그러나 이 이상을 더 모른 사람들은 이만큼 되면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 때문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해서 재미지고 도취해서 몰입해 가지고 공부가 다 되었구나, 그리해서 여기에서 만족을 취해서 공부가 다 되었다고 하는 분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뒤에도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근세에도 안 나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始覺)으로 또는 거의 닮은 깨달음 이걸로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로 해서는 아직 육근청정이 완전히 못 되므로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율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시 인과(因果)에 묶여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생사(生死)를 못 벗어납니다.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인과율을 초월해야만이 생사를 벗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온전히 알고서 아직 멀었구나 하고 더욱 열심히 닦는단 말입니다. 더욱 닦아서 차근차근 수분각(隨分覺)이라. 자기 닦는 분수에 따라서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초지(菩薩初地)에서는 초지(初地)만큼, 이지(二地)에서는 이지만큼 차근차근 깨달아 올라갑니다. 올라갈수록 부처님 공덕을 우리가 더욱더 발휘합니다.


화엄경(華嚴經), 능엄경(楞嚴經) 기타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는 깨달아서 올라가는 그런 한계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그런 경전을 잘 안보고서, 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전 말씀은 모두가 다 문자(文字)다, 방편(方便)이다 해서 이것을 의중(意中) 안 두고서 아만심(我慢心)을 부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이나 그런 경전 말씀에는 어떤 때는 상징(象徵)과 비유(譬喩)가 있지만은 모두가 이것은 참다운 금구설(金口說)이라. 참다운 진리(眞理)에 입각한 말씀입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집착해서 본래 자성자리, 본래 자성에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자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서 그것을 무시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는 한에는 우리는 올라가는 과정을 분명히 느끼고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것은 보살초지(菩薩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 올라간단 말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는 각 초지(初地), 이지, 삼지, 사지, 오지, 육지, 칠지, 팔지, 구지, 십지(十地) 이러한 것도 역시 각 경()에는 다 소상히 어디에 올라가면 얼마만큼 공덕이 있다,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체계(方法體系)가 방법차서(方法次序)가 없다고 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성불의 목적지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또 목적을 이루어 가는 방법체계도 이와 같이 뚜렷히, 소상히 밝혀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어느 한 법을 주문(呪文)이나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기타 어느 부처님 법에 입각한 정당한 법을 하나 간택(簡擇) 했으면 그 다음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 공부가 어디에 머물지 않고서 차근차근 올라가는 이른바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깨달음이 완성돼서 원만무결(圓滿無缺)한 자리,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이라. 그때는 다시 갈 수 없는 가장 끄트머리의 깨달음입니다. 이른바 이것이 묘각(妙覺) 또는 대각(大覺)이라. 정각(正覺)이라고도 합니다. 구경각, 심심미묘(甚深微妙)하다고 해서 묘각(妙覺)이라고 합니다. 위없는 각이라고 해서 그때는 무상각(無上覺)이라고 합니다. 또는 가장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에 바를 정()자 정각(正覺)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야 만이 비로소 우리 중생은 인간에 태어난 또는 우리 중생이 본래 갈 수 있는 참다운 고향(故鄕)에 완전히 이른 것입니다. 여기에 미처 이르지 못하면 그때는 번뇌(煩惱) 때문에 비록 십지(十地)까지 시각(始覺)을 떠나서 이런 수분각(隨分覺) 십지까지 올라 왔다 하더라도 역시 인연(因緣)이 다하면 그때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다시 합니다. 다시 죽어서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묘각(妙覺)에 이르러서 그때는 온전히 번뇌를 다 녹이고서 자기 본래 성품인 불성과 우주의 본래성품인 불성과 하나가 딱 되어버리면 그때는 다시 윤회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환고향(還故鄕)을 했다고 합니다.


앞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비록 우리가 훌륭한 행법(行法)을 취해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 도덕적인 계율(戒律)이 앞서지 않으면 공부 성취가 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성취가 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우리는 계율적인 문제 그 도덕적인 문제를 굉장히 중요시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러 깨달음 문제만을 주로 하는 분들은 도덕적인 문제, 윤리 문제 그런 계율 문제를 소홀히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부처님 법은 이러한 도덕성 문제를 소홀이 할 수가 없는 하나의 기본적인 걸로 해서 역설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의 법문에도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계율(戒律)로 말미암아서 선정(禪定)이 생기고, 인정생혜(因定生慧)라. 그런 삼매 선정 - 선정이나 삼매나 같은 말입니다. - 삼매로 말미암아서 그때는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생긴다. 이와 같이 말했듯이 우리는 계율이 없으면 참다운 선정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 경에도 이제 시라(sila) 청량(淸凉)이라, 시라(尸羅) 이것은 계()란 말입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불현전(三昧不顯前)이라. 삼매가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출가인(出家人)들은 출가인대로,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은 재가불자대로 거기에 상응한 분수에 맞는 계행(戒行)을 지켜야 만이 비로소 삼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정(禪定)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 죽이고 선정에 들 수 없고, 도둑질하고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욕질하고 선정에 들 수가 없고, 욕심을 내고 선정에 들 수가 없고 하여튼 이와 같이 계율이 선행(先行) 안되면 선정에 못 드는 것입니다. 선정에 못 들면 구두선(口頭禪)이라, 말로는 부처님 법문을 해설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반야지혜(般若智慧), 공지혜(空智慧)를 우리가 맛볼 수가 없습니다.


계율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우선 현재 여러 가지로 해악(害惡)이 많기 때문에 해악이 되는 부분만 딱 집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중금계(十重禁戒)라. 여러분들은 보살계(菩薩戒)를 여러번 받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보살계는 십중금계와 48경계가 있습니다. 열 가지 무거운 계와 48가지 가벼운 계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도 여법(如法)하니 공부하신 분들은 한 달에 두 번씩 포살(布薩)을 해서, 한 달에 두 번씩 이와 같이 십중금계 사십팔경계를 법사(法師)가 외워서 그때그때 우리가 점검을 받고 비판을 받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법히 잘 못할 때는 그와 같이 않습니다만 마땅히 앞으로도 여법한 도량(度量)이 된다고 할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부처님의 그러한 청정한 계율, 열 가지 무거운 계, 또는 마흔 여덟 가지 가벼운 계를 대중 앞에서 외워서, 같이 스스로 마음을 더욱 더 편달(鞭撻)하고 또는 비판(批判)을 받고, 참회(懺悔)를 하곤 해야 합니다.


그렇게 청정한 계율을 지켜야만 삼매에 들어서 참다운 부처님의 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 살계(殺戒)라. 불살생(不殺生), 죽이지 말라. 둘째 도계(盜戒)라 훔치지 말라. 셋째는 음계(淫戒)라, 출가인들은 불음(不淫)이라, 일체 음란한 것은 피하지만 재가인들은 자기 배필 이외의 그런 삿된 음행을 말라. 넷째는 망어계(妄語戒)라, 거짓말, 욕설, 이간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 등을 하지 말란 것입니다.


망언(妄言) 가운데도 가장 큰 망언이 무엇인가 하면 미증(迷證)을 증()으로 하는 것입니다. 도()를 못 증하고서 증했다고 하는 그런 거짓말 또는 도인(道人)이 아니면서 도인(道人)인체 하는 그런 거짓말 이것이 가장 큰 망언입니다.

그래서 같은 거짓말도 보통 방편적인 거짓말 그것은 큰 죄는 안되지만은 도를 못 증하고 증했다, 또는 못 통하고서 통했다. 이 망언은 우리 승려같으면 승복(僧服)을 빼앗기고 축출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거짓말 이른바 대망언(大妄言)입니다. 성자(聖者)를 사칭하는 것같이 큰 거짓말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 이것은 고주계(嘆酒戒)라, 술팔 고()자, 술살 주()입니다. 술을 팔고 사고 또 먹고 하는 것은 허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역시 술을 팔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습니다만 부득이 해서 술을 팔 때는, 이 술이 본래 오염된 것이 아닌 것인데, 술 이것은 이른바 만약지왕(萬藥之王)이라, 잘 쓰면 만약의 왕인데 ‘내가 파는 이 술 자시고서 모두가 다 보리심(菩提心)을 내서 무상대도를 성취하여 지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기원하고 술을 팔면 됩니다.

사바세계 중생은 살기 위해서 직업적으로 어떤 때는 인연 따라서 그런 직업을 안 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앞서 말씀과 같이 오염된 술이 아닌 본래는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리는 만약지왕 같은 지금 저 사람이 먹고서 무상대도를 성취하겠다는 그러한 보리심(菩提心)을 내서 한사코 금생에 무상대도를 성취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술을 팔면 큰 죄가 안됩니다.


제 육, 설사중과계(設四衆過戒)라,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중(四衆)은 내내야 부처님 제자인 사부대중(四部大衆) 아닙니까. 출가한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널리 보면 신부(神父)나 수녀(修女)나 다 같이 여기에 포함 됩니다. 우리가 좁은 의미에서는 꼭 불교 하지만 불교라는 것은 불교라는 테두리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여튼 집을 떠나서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공부하는 분들은 비구나 비구니나 신부나 수녀나 모두가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출가승들이나 또는 출가하지 않고 집안에서 공부하는 분들 불교인(佛敎人)이나 기독교인(基督敎人)이나 이슬람교인이나 도교인(道敎人)이나 간에 하여튼 진리를 지향하는 분들 이런 분들 가운데서 남자, 여자 이분들을 불교말로 소위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아닙니까.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입니다.

이와 같이 출가한 비구, 비구니, 신부, 수녀 이런 분들이라든가 또는 재가(在家) 집안에 계셔서 진리를 구하는 그러한 청신사, 청신녀 이분들이 사부대중인데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제가 여기 열 가지 무거운 계()를 지금 쓴 의도(意圖)가 무엇인가 하면 저는 주로 제 육에 있는 설사중과계(設四衆過戒)를 제가 말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지금 이런 것을 범하는 분들이 하도 많으므로 그로 인해서 우리 승가(僧家)나 우리 진리를 구하는 분들이 너무나 중상(重傷)을 받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앞서 말씀과 같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으신 분들이 계십니다만 사실은 행동을 보면 잘 지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사중죄(四重罪)라. 출가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이런 분들의 허물을 말하는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것이 출가한 사람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가장 죄가 무겁습니다. 같이 불교를 믿는 분들이라 하더라도 역시 출가한 사람들 우리가 좁은 의미에서 출가한 사람들은 벌써 삼보(三寶) 가운데서 승보(僧寶) 아닙니까.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불법을 탐구하는 모든 분들이 다 승보입니다만 좁은 의미에서는, 이적 의미에서는 그때는 모두가 다 승보이지만, 사적인 의미에서는 우리 출가한 사람들이 승보입니다.

삼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헌데 그런 승보라 하는 것이 목적은 비록 완전무결한 성불에 있다 하더라도 아직 수행 도중에서는 완전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절 집은 그야말로 용사(龍蛇)가 공집이라. 범성(凡聖)이 공주(共住)라. 범부와 성인이 아울러 있습니다. 성자같은 중도 있는 것이고 뱀같은 독사같은 스님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도 삼십 몇 본사(本寺)가 있습니다만 그 본사는 도인네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총무가 있고 재무가 있고 부목이 있고 또는 깡패같은 중도 있고, 이와 같이 아울러서 한 본사를 지키는 것입니다.


불교의 명맥(命脈)이 이조(李朝)의 그런 숭유배불(崇儒排佛)이라, 부처님 법을 그와 같이 배척할 때도 역시 불법의 명맥을 이어 왔습니다. 우리 출가한 분들은 팔천민(八賤民)이라, 일반 노예같은 천민이어서, 일반 농부나 누구나 ‘여보게 대사’ 이와 같이 하소를 한단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그렇게 하시했던 것입니다. 우리 스님네는 비록 도인이라 하더라도 서울 장안(長安)엘 못 들어 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힘으로 나라에 영향을 미쳐 비로소 우리 승려가 장안에 발을 딛었던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당할 때에도 역시 가까스로 불교의 명맥을 이어 왔습니다. 누가 이어 왔는가 말입니다. 물론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같이 협력해서 이어 왔지만 그래도 역시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그런 위대한 부처님 법을 닦고 경()도 출판하고 그렇게 그 간신히 이어 왔단 말입니다. 이것은 역시 출가인(出家人)들입니다.

출가인들은 앞서 말씀과 같이 다 도인같은 스님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데 우리 사부대중 가운데서는 출가인들이 조금 허물이 있으면 그걸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퍼뜨려 비방을 합니다. 같은 도를 구하는 사람끼리 서로 비방 하는 그런 죄가 무거운데, 그런 가운데도 출가인들이 범한 죄를 퍼뜨려서 비방하는 것같이 무거운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살계(菩薩戒)에서 보면, 여러분들이 나중에 보살계을 받으시면 알지만 어느 사람들이 짐짓코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면 마치 그 허물을 딱 들을 때 이것은 천백(千百)의 그런 창()으로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는 못할망정 하물며 우리가 입으로 해서, 삼보(三寶)를 믿는다는 불자(佛子)로 해서 어떻게 함부로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범망경(梵網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부대중, 진리를 구하는 분들의 허물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은근히 그 사람을 만나서 간곡한 정성으로 바른 길로 나가기를 기원하면서 충고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책임자,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큰스님들이나 위대한 그런 지도 인물이나 그런 분들한테 우리가 가만히 말씀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온편히 그러한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조금 잘못하면 그것을 퍼뜨려서 얘기하면 그 때는 차근차근 커집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세인들은 더욱 더 불신하고 맙니다.


제가 출가인들을 변호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지금 사회가 얼마나 혼란한 사회입니까. 얼마나 지금 개방적인 사회입니까. 이러한 사회에서 지금 젊은 출가 수행자(修行者)가 어떤 때는 더러 미끄러질 때가 있습니다. 옆길로 잘 못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호사하고 살기가 풍족하고 개방적이고 이러한 때에 젊은 사람들이 고등학교, 대학 나오고 해서 자기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산다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거의 한 평생 동안을 산중에서 지낸 저 같은 사람은 느낍니다만 혼자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아직 도를 잘 모르는 경계에서 아직 미숙한 범부지(凡夫地)에서 독신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출가인들은 다른 재미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한테로 지향하는, 진리로 지향하는 그 재미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먹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까? 사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까? 단란한 가정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렇게 혼란한 세상에 더러는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러 미끄러져서 조금 아니꼽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그 출가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만큼 위대한 것이므로, 또는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불교의 명맥을 이어 왔으므로, 마땅히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서 온편히 부처님 법에 입각해서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충고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승단(僧團)이나 교단의 우두머리를 만나서 말을 해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사중과계(設四衆過戒)라, 사부 대중의 허물을 말하는 죄를 면해야 합니다. 그렇게 못하면 결국은 열 가지 무거운 죄를 우리가 범하는 것입니다.

좋은 스님 네와 나쁜 스님 네,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는 스님 네와 못 지키는 스님 네를 대비해서 말씀을 해도 안됩니다. 자기 최선(最善)만 다 할 것이지 이러한 스님 네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스스로의 선근(善根)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도를 깨닫는 그것만 가지고도 바쁩니다.


제칠(第七)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는 죄, 제팔(第八) 간석가훼계(卞惜加毁戒), 내 것 아끼려고 남을 욕하는 죄, 제구(第九) 진심불수회계(嗔心不受悔戒), 잘못을 참회하는 이를 화내서 물리치는 죄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여기 태안사(泰安寺)에서 10여명의 학인들하고 같이 지냈습니다. 그때 제가 큰 허물을 범했습니다.

제가 그 때 아홉째인 진심불수회계(嗔心不受悔戒)를 범했습니다.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편이 참회할 때에 그 참회를 받지를 않았습니다. 별 것도 아니면서 나만 청정(淸淨)하다. 그런 상()을 내서 학인(學人)들 가운데서 허물을 범해가지고 참회(懺悔)를 한 사람을 제가 참회를 못 받았습니다.


어느 수좌(首座) 하나가 그때에 담배를 피우고 또 그 우악스러워서 저네들끼리 이렇게 싸움이 났습니다. 싸움이 벌어져서 그 무시무시한 식칼을 들고서 상대편을 찌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말려서 못 찌르고 상처는 안 났지만 하여튼 속인(俗人)도 큰 허물인데 하물며 출가 수행자가 담배를 피우고 또 싸움판이 벌어져서 칼로 상대편을 찌르려고 했으니 얼마나 큰 허물입니까. 그래서 제가 나무라니까 이제 저한테도 반항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시간이 경과하니까 잘못을 느꼈던가 이제 가사(袈裟)를 수하고서 참회(懺悔)하려고 왔습니다.

저는 그때 보살계를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은 이러한 대목을 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까진 녀석은 용서할 수가 없다. 너는 삼보(三寶) 가운데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참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몇 시간 되에 다시 왔습니다. 그때도 안 받았습니다. 또 세 번째 왔습니다. 그때의 제 마음은 도저히 칼을 들고서 같은 스님들끼리 싸울려고 했던 그 사람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뒤에 승복을 벗고서 환속(還俗)을 해서 살고 있습니다만 저번에도 한번 와서 만났습니다. 하여튼 그 사람의 참회를 제가 그때 만일 받았더라면 공부해서 위대한 성자(聖者)가 됐을지도 모르는 것인데, 참회할 때는 그와 같이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이라, 원래 마음에서 지은 씨앗을 씻어 버리면 벌써 그 사람의 마음에서는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계율(戒律)의 항목을 잘 모르고서 저는 그때 참회를 못받은 것을 지금도 가끔 뉘우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비록 세간 법은 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출세간 법은 마땅히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면 그때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중금계(四重禁戒)라. 살생계(殺生戒) 남을 죽인다거나, 투도계(偸盜戒) 출가인이 훔친다거나, 사음계(邪淫戒) 음행을 범한다거나, 또 망어계(妄語戒) 출가인으로 해서 대망어(大妄語), 즉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허위로 말하는 죄, 이러한 사중죄(四重罪)를 범한 출가인은 승가 내에서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십(第十)에 가서 방삼보계(謗三寶戒)라.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비방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앞서 사중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나 거의 비슷합니다만 우리 생명의 뿌리가 되어 있는 또는 일체 존재의 가장 귀중한 그런 성보(聖寶)인 삼보를 비방할 수가 없습니다. 삼보를 비방하면 벌써 우리 선근을 멸종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선근을 없애는 것입니다. 착한 선근이 쌓이고 쌓여야 할 것인데 선근을 없애면 우리가 그때는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허물 때문에 성불도 못하고 승가를 더럽히고 일반 사회인들도 우리를 불신합니다.

특히 여섯 번째 있는 설사중과계(設四衆過戒)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이러한 사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열 번째에 있어서 방삼보계(謗三寶戒)라. 불법승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이러한 말씀을 우리 출가인도 명심을 해야 합니다만 특히 재가인들이 지금은 비판을 잘할 때인지라 자기 허물은 저만큼 두고서 남의 허물을 말하기 쉽게끔 하는 그런 풍조가 있는 때인지라 곧장 우리 스님들도 지나친 비방을 많이 받습니다. 몇 십 년 애쓰고 공부했지만 조그마한 허물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을 그냥 매장 시켜 버립니다.


여기에 거의 걸맞는 견서사자게(堅誓獅子偈)를 소개하고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견서(堅誓) 이것은 굳을 견()자, 맹세할 서()자입니다. 그리고 사자(獅子) 노래 게()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 이 외의 세상이 더 많은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앞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 내에 있는 각각의 세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청정(淸淨)한 도인(道人)만 있는 세계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범중천(梵衆天)이라, 범중천 이것은 욕계의 때가 묻지 않은 욕계의 번뇌를 떠난 중생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또 무색계(無色界)는 몸도 무엇도 없이 마음만 의식(意識)만 있어서 신묘한 선정(禪定)에 잠겨 있습니다. 행동도 않고 몸뚱아리도 없고서 그냥 마음만이 심묘한 삼매에 잠겨 있는 그런 하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런 경계가 많이 있는 것인데, 또는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도 역시 지금 같은 모양으로 항시 있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때에는 어느 세계에서는 일반 축생(畜生)도 말을 했으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무수겁(無數劫) 전에 사자(獅子)도 범도 말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자 한 마리 금모사자(金毛獅子)라. 털이 금색 찬란한 사자가 있었는데 이 사자는 털이 금색으로 잘 된 만큼 역시 그 사자의 식()도 높았습니다.


앞서도 말했습니다만 산의 식은 산신 아닙니까. 물의 식은 역시 용왕입니다. 나무의 신은 목신입니다. 도량의 식은 역시 도량신입니다. 우리 사람의 식 역시 우리 마음이듯이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작고 크고 간에 하나의 전자(電子)나 하나의 산소(酸素) 역시 이것도 식이 있습니다. 원자(原子)에 들어 있는 무수무량(無數無量)의 정보, 이것 역시 원자나 소립자의 식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의 미세한 소립자 가운데 들어 있는 정보, 그런 식이나 우리 인간의 식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량대도를 성취하신 그런 식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조그마한 미세한 가운데도 시방세계의 진리(眞理)가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은 사자 가운데도, 사자는 동물이므로 마땅히 식이 있겠지요. 그런데 금모사자이므로 마땅히 보다 더 식이 빛나 있단 말입니다. 같은 사람 가운데도 얼굴이 더 잘 생긴 사람들은 분명히 식이 더 빛나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못생긴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업장 때문에 식이 덜 빛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상호(相好)는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입니다.

그러나 설사 못생겼다 하더라도 부처님 믿음으로 해서 그때는 모두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내내야 마음은 주인(主人)이고 우리 몸뚱아리 이것은 종()인지라 설사 추악한 몸이라도 역시 - 중국(中國)의 도안(道安)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굉장히 못생겼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믿음으로 해서 그냥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는 다 초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헌데 그런 금모사자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벽지불(抗支佛)이라,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하신 신선 도인이 산중 숲속에서 깊은 삼매에 잠겨 있었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서 어떤 동물이나 어떤 맹수가 오든지 간에 하여튼 설법을 하신단 말입니다.


따라서 금모사자도 이러한 벽지불의 즉 말하자면 도를 통한 나한 아라한인 그 자리에 가끔 들어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때는 각 동물도 지금의 동물 같지 않고서 식이 보다 발달된 동물이 있었던 그런 시기였겠지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무엇을 잘 몰랐지만 금모사자가 벽지불을 만나서 차근차근 법문을 들으니,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소중하고, 부처님 법()이 소중하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 내용이 소중하고, 법 따라서 행동하는 출가한 분들은 물론 재가인들의 그런 존재가 소중하고, 마침내 삼보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벽지불 아라한은 설법하실 때는 항시 가사(袈裟)를 입고 이렇게 법의(法衣)를 수호하고 설법을 했습니다.

마침 그때에 포수가 사냥을 나와서 아주 찬란한 금모를 가지고 있는 사자가 벽지불한테 이렇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설법은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포수인지라 마땅히 그 금모사자의 금색찬란한 가죽이 욕심이 났겠지요. 내가 금색이 찬란한 사자를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왕자한테 드리면 왕자가 나한테 큰 상을 내리겠지? 이와 같이 흑심(黑心)을 품었단 말입니다.


이래서 사자를 잡으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굉장히 몸집도 크고 또는 금모사자인지라 외형도 그렇게 훌륭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이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보통 사자 역시 우리 인간들은 해낼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금모사자와 같이 그런 괴력을 갖추고 무시무시한 그런 힘이 있는 사자를 포수인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활로 쏘려고 맘먹으면 그야말로 금모사자(金毛獅子)인지라 영험(靈驗)도 있을 것이고 하기 때문에 그냥 알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꾀를 내서 저 사자(獅子)는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는 그런 아라한 밑에 그와 같이 고분고분 들어가 무릎을 꿇는 걸로 보니까, 내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활과 독화살을 가사 속에 감추고서 가면 사자가 그만큼 두려움도 품지 않고서 내가 접근할 수가 있겠지, 이와 같이 맘을 먹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포수가 머리를 깎고서 가사를 걸치고서 활을 그 가사 속에 숨기고 갔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금모사자가 이제 환희심을 내서 자기 발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고서 이렇게 다소곳이 있단 말입니다. 이때를 놓칠세라 그 사냥꾼은 독묻은 - 한발만 맞아도 독이 몸에 번져서 죽을 수 있는 그런 독화살을 쏘아 댔습니다.

아무리 괴력이 있고 힘 있는 그런 사자라 하더라도 역시 무서운 독이 있는 화살을 맞았으니 살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화살을 맞고서 그냥 죽을 수는 없었겠지요. 더구나 무시무시한 그런 힘을 가진 사자인지라 독화살을 비록 맞았지만 그 순간만은 더구나 그 원망과 사무치는 성내는 진심(嗔心) 때문에 그때 분출되는 힘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진심을 내서 포악스럽게 순간 그 사냥꾼을 덮쳐서 죽일려고 맘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삼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법문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방삼보계(謗三寶戒)가 상기(想起)가 돼서 그때 읊은 슬픈 노래가 이것이 여기 있는 견서사자게(堅誓獅子偈)입니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하니, 원컨대 내 신명(身命)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이라, 끝내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향어괴색복(向於壞色服)이라, 향할 향()자, 말미암을 어()자, 헐을 괴()자, 괴색(壞色)은 우리 가사(袈裟)의 색입니다. 모든 색을 다 합하면 괴색이 됩니다.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을 한데 모으면 그때는 괴색이 됩니다. 우리 법의를 가리켜서 괴색 그럽니다.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끝내 남을 헤치고자 하는 그런 악심은 품지 않겠으며, 특히 괴색복 가사를 입은 법의를 입은 그 이에 대해서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비록 독시위를 나한테 쏘았다 하더라도 그 가사를 입었다는 그것 때문에 - 그 사냥꾼이 배신자요, 그 욕심밖에는 없는 사람이요, 또는 스님도 아닌, 그러나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는 그것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도 역시 내 신명을 곧바로 바친다 하더라도 내가 악심을 품지 않겠나이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하니,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이라. 이것은 감격스러워서 되풀이됩니다. 원컨대 내 신명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끝내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향어출가인(向於出家人)이라, 출가인한테 대해서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너무 출가인들을 돋보이게 말씀을 드려서 한편 언짢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소중한 것입니다. 재가인도 소중하고 다 소중합니다만 특히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이렇게 살기 좋은 때 집안을 떠나서 삼십대 이십대에 그 나이로 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하는, 또 늙은 말년에 오십, 육십이 되어서 자손들한테 시봉 받고 편히 지낼 수 있는 분들이 혼자 지낸다 하는, 그러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가정의 단란을 맛본 분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마땅히 우리 출가인들이 설사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괴색복 승복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사자 역시 그와 같이 스님도 아닌 엉뚱한 나쁜 사냥꾼이 입었지만 그 괴색복 때문에 악심(惡心)을 낼 수 없습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지극히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나쁜 맘으로 해서 가사(袈裟)를 걸쳤다 하더라도 가사를 걸친 그것만으로 해서 그 사냥꾼은 나중에 성불할 수 있는 인연(因緣)을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에 취한 바라문(婆羅門) 외도(外道)가 부처님한테 계()를 받으려 왔습니다. 술을 취했거니 부처님의 그런 청정한 안목으로 해서 그걸 모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선래비구(善來比丘)라, 아! 비구여 잘 왔구나. 그 한 마디로 머리를 깎아 버리고 이제 법의를 입혀 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과 그 사람의 원력(願力)으로 해서 무슨 계를 받는다, 준다 하는 말 없이 그냥 선래비구라! 비구여 잘 왔구나. 그 말 한 마디에 그냥 머리가 떨어지고 법의가 입혀졌으니 계를 받아서 하루 밤을 잤단 말입니다.


그러나 술김에 계를 받았지만 술을 깨고 보니, 바라문이 술김에 와서 계를 받고서 그 이튿날 아침에 도망쳐 버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난 존자나 그러한 분들이 이제 부처님한테 책망스러운 말씀을 했습니다. 세존께서는 다 알으시면서 그와 같이 술 취한 사람에게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주십니까? 이와 같이 힐난조로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대 부처님이 ‘우담바라화(優曇跋羅華)는 비록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보다도 더 향기롭느니라!’ 비록 파계(破戒)는 하고 나가 버렸지만 한번 가사를 걸친 그 공덕(功德) 때문에 계율(戒律)을 전혀 안 받은 사람보다는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계를 받겠다는 그 마음을 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기 잠재의식(潛在意識)에 훈습(薰習)이 되어서 몇 생 후에는 그 인연(因緣)으로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안 받은 사람보다는, 마치 우담바라화 꽃이 비록 시들었다 하더라도 여느 일반 꽃보다도 더 향기롭듯이 그 사람이 일반 사람보다는 더 존중한 선근(善根)을 심었다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성불의 길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해서는 앞서 말씀과 같이 해오(解悟)로 해서는 이치(理致)로 아는 것으로 해서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다 말할 수 있지만, 역시 그런 도덕적인 윤리 행동이 앞서서 우리 생리(生理)가 정화(淨化)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생리가 정화가 안되면 도를 못 증명합니다. 따라서 사실은 도를 증명(證明)하신 분들은 참다운 증오(證悟)를 하신 분들은 파계(破戒)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욕계 번뇌가 끝나고 색계 번뇌가 끝나고 무색계 번뇌가 끝나서 삼계 번뇌가 끝나버리면 앞서 말씀과 같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합니다. 시간, 공간을 초월하고 인과를 초월하는 그 분들이 어떻게 계율을 지킬 수가 없겠습니까? 인과에 얽매어서 좋다, 궂다, 사랑스럽다, 밉다 하는 그런 마음, 유위(有爲) 공덕에 얽매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지, 그런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분들은 죄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이라 하면 그 사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 자기 아()에 걸리고 또는 음욕에 걸리고 어떤 유위 상대적(相對的)인 것에 걸리면 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마땅히 출가인이나 재가인이나 부처님 법을 그냥 구두로 해서 알뿐만 아니라 참다웁게 증명해서 참다운 영원한 희락(喜樂), 영원한 법락(法樂)을 맛보기 위해서는 꼭 계행(戒行)은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천태지의(天台智?) 선사(禪師)같은 분도 공부하는 방편문(方便門)으로 해서 첫째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지계청정하지 않으면 아는 것 그것에 그치고 사실은 힘이, 법력이 없단 말입니다.


현대 같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땅히 선오후수(先悟後修)하는 먼저 부처님의 대요를 알고, 실상묘혜(實相妙慧)라. 우주의 실상을 우리가 바로 느껴야 합니다. 비록 우리 범부지(凡夫地)에서 보는 이것은 실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자가 보는 사실 그대로를 관()해야 합니다.


어제 여러 법사님들이 아주 훌륭한 말씀을 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좋은 말씀을 다 하셨으므로 저 같은 사람이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것을 증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계율이 앞서야 합니다. 청정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가 다생 겁 내로 지나오면서 지은 우리 누겁의 그런 습기(習氣)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훈습(薰習)된 것은 그냥 단박에는 못 녹아집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빨리 갈 수 있으나, 선근이 희박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녹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계(五戒), 또는 십계(十戒), 또는 더 나아가서 부처님의 청정대계인 보살계(菩薩戒), 이러한 계율을 지켜야만이 생리(生理)와 심()이 둘이 아니고, 몸과 우리의 불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그때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도덕적인 그런 계율을 앞세우면서 그런 실상지혜(實相智慧)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됐습니다만 또 우리 만남이라는 것이, 항시 느낍니다만 ‘루터’나 ‘칸트’같은 사람도 단상에 오르면 이 법문이 마지막 법문이구나, 이와 같이 느꼈다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나이도 많이 먹어지고 또는 그때그때 이와 같이 무상(無常)한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이렇게 법상(法床)에 오르고 보면, 법상 이 자리가 부처님을 대신하는 자리인데, 부처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이 아니면 저 같은 사람이 올라 올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부처님 말씀을 조금 더 해 드리고 싶습니다.


헌데 여기 광촉(光觸)이란 말이 있습니다. 빛 광()자, 접촉할 촉()자, 광촉이란 말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공부가 돼 가면 갈수록 광명(光明)에 우리가 접촉이 됩니다. 부처님의 광명에 접촉이 되면 우리 업장(業障)이 순식간, 또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굉장한 많은 업장을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파사닉(波斯匿) 왕의 공주(公主) 하나가 아주 못생겨서 추녀(醜女)란 말입니다. 어떻게 못났던 지간에 왕이 너무나 보기 싫어서 자기 딸이지만 가두어 놓고서 밥만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과년이 돼서 시집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승(政丞)의 아들을 골라 시집을 보냈습니다.

지금 같음사 그렇게 못난 공주를 맞이 하겠습니까만 그와 같이 전제 전권시대인지라 왕의 명령에 할 수 없이 대신(大臣)의 아들이 장가를 들었습니다. 젊은 대신 아들은 공주가 맘에 들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도 그녀를 가두어 놓고 자물쇠를 채워 놓고서 열쇠를 자기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들어가게 한단 말입니다.


그 당시 풍습도 친구들 곁에 같이 모여서 피로연도 하고 하는 때가 있었겠지요. 그 대신들 아들들이 이제 새로 장가들었으니 우리 같이 모여서 잔치를 열자 그렇게 종용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 아내가 예쁜 대신 아들들은 홀연히 수락을 했겠지만 그와 같이 추녀를 맞이한 대신 아들은 마음이 내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다 여러 가지 팡계를 대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정승 아들들은 그때마다 더욱 의구심을 품고서 이 사람이 자기 아내가 너무나 예쁘니까 남한테 보이기 싫어한다.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공주와 결혼한 정승 아들을 불러다 놓고 친구들이 술을 많이 먹였습니다. 술에 취해서 쓰러지자 방 열쇠를 훔쳐가지고서 추녀 방문을 열었습니다.


열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미녀(美女)란 말입니다. 미녀가 찬란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미녀는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추녀였는데 어떻게 해서 미녀가 됐는가?

비록 얼굴은 못 생겼지만 자기 아버지 파사닉(波斯匿) 왕은 물론 황후나 왕자 역시 부처님을 높이 믿는지라 그 딸도 부처님 법을 독실히 신봉(信奉) 했습니다. 그녀도 자기 얼굴, 자기가 보고 굉장히 한탄심을 내고 자기 스스로를 증오를 했겠지요. 그래서 자기 온 정성을 다해서 그야말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부처님한테 기원(祈願)을 드렸단 말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과거세(過去世)에 무슨 죄()가 있기에 이렇게 못났습니까? 차라리 저를 이렇게 못난 체로 살게 할 바에는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간절히 빌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빌고 빌고 그러한 것이 부처님 마음에 감응(感應)이 돼서, 부처님께서는 다 아시고 32상과 80종호를 갖추신 부처님의 모습을 간절히 빌고 있는 그 추녀의 앞에 나타내셨습니다.

앞에 나투시어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 그 추녀(醜女)를 감쌌습니다. 감싸고 어루만졌습니다. 그렇게 하자 순식간에 추녀가 미녀(美女)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奇籍)이 아닙니다.


지금은 인체에 있는 암균(癌菌)을 레이저 광선으로 쏘이면 그 균이 죽는다고 합니다. 다른 병도 역시 그 병 부위에 레이저 광선을 쏘이면 나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물리적인 광선도 우리 몸의 병소를 나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고, 이른바 무한의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는 부처님의 광명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무한의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벙어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소경이 눈을 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다 할 수 있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부처님의 그런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영원적인 능력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정성(精誠)이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사무친 마음이 부족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을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을 접촉하는 길은, 이것은 우리가 공부하는 삼매(三昧)에 의해서만이 비로소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한 불성광명(佛性光明), 자비광명(慈悲光明)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생명파장(生命波長)이 정화가 돼서 부처님의 파장하고 일치가 돼야 합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별같이 광명이 보이다가 다음에는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될수록 광명이 차근차근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도인들의 임종게(臨終偈)를 보면,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마음 심()자, 달 월()자, 외로울 고()자, 둥글 원()자입니다. 마음 달이 오직 홀로 둥글게 우주를 비추니,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빛 광()자, 삼킬 탄()자, 일만 만()자, 형상 상()자. 부처님의 그런 청정미묘한 광명이 만상을,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삼켜 버린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그때는 광명 뿐인 것입니다.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우리 마음이 정화가 돼서 청정미묘한 그런 마음 달이 마음의 광명이 오직 홀로 천지(天地)를 비추고서 둥그렇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광탄만상이라, 그 광명이 만상을 다 삼켜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때문에, 어두움은 내내야 무명(無明) 아닙니까. 어두움 때문에 중생은 바로 못 보지만 어두움만 가시면은 그냥 바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광명(光明) 하나로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무량광명(無量光明)뿐이기 때문에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법신 부처님의 별명이 대일여래입니다. 대일여래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가득히 두루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들 눈앞에는 광명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은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나도 너도 일체 존재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광명, 일체를 나투고 할 수 있는 광명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저변에는 시공을 초월해서 생명의 자비광명, 자성광명과 생명의 리듬, 천상음악(天上音樂)이 충만 되어 영원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공부를 하던지간에 화두(話頭)를 드나 주문(呪文)을 외우나, 주문도 내내야 가장 기본적인 주문이 광명진언(光明眞言)입니다. 어떤 주문 가운데나 광명진언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염불(念佛)을 하던 어떻게 하던지 광명의 이미지, 광명의 영상(映像) 두고서 공부하면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광명 이것은 실상세계(實相世界)의 하나의 영상이기 때문에 광촉(光觸)이 되면 우리 업장(業障)이 바로 녹아내립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도 하느님도 다 들어 있습니다. 물도, 불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를 생각하는 즉시(卽時) 우리 마음은 부처입니다. 중생을 생각하면 중생이고, 물을 생각하면 물이 사무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이 물로 화()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과 같이 불을 생각하여 사무치면 우리 몸에서 불의 광명(光明)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저런 모든 생명의 근원이 이제 영원적인 청정광명(淸淨光明), 적광(寂光)이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적광토(寂光土)인 것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적광정토(寂光淨土), 밀엄국(密嚴國) 모두가 다 이와 같이 광명세계(光名世界)를 말씀한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근본(根本) 실상 광명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안주(安住) 시켜서 하는 그 공부가 이것이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공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빨리 성불(成佛)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