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1. 육즉불 - 3) 염불은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26



염불은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염불(念佛)과 참선(參禪)문제. 염불과 참선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불교인도 ‘염불은 하근중생(下根衆生), 근기 낮은 사람들이 하고 참선은 근기가 높은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도 아닐뿐더러 정통 조사 말씀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염불은 우리가 본래로 부처인데 그 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단 말이니다.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또는 부처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생명의 공덕(功德)이 거기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 마음에 들어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생각하고, 무량공덕의 이름을 외우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방편(方便) 공부가 될 수 있습니까?

다만 염불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처님은 저 밖에 어디 계신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부처님이 계신다.’ 이렇게 할 때는 그것이 방편 염불이 됩니다.


그러나 참 염불 그것은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앞서 우리가 배우지 않았습니까. 본래 우리가 부처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를 성취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욕심도 부리고 못난 이 마음, 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그 공부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방편이라든가 낮은 차원의 공부가 되겠습니까? 사실 어떠한 공부나 주문(呪文)을 외우거나, 화두(話頭)를 참구하건, 염불을 하나, 기도를 모시나, 모두가 다 사실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방편을 내 세우는 것이지 본래 부처가 없다면 불교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천지 우주가 바로 하나의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그대로 충만해 있는 생명의 광명(光明)입니다.


때문에 염불은 부처를 대상적으로 밖에서 구할 때 이것이 낮은 공부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내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요,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염불을 하실 때에는 사실 가장 가까운 공부입니다.


우리 심리학에서 자기암시(自己暗示)라, 자기 암시라는 것은 가사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아무 힘도 없다. 나는 시험만 보면 매번 떨어만 진다.’ 이렇게 자기 비하(卑下)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꼭 떨어지고 맙니다. 내가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의사가 잘 못 오진(誤診)을 해서 ‘당신은 무슨 병입니다.’ 한 둘이 아니라 몇이서 그래 놓으면 정말로 아파버립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암시 아닙니까?


우리 참다운 자기가 누구입니까? 참다운 자기가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는 본래 부처다. 그러므로 나는 무한공덕을 본래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기 암시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부처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옳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위대한 도인들이 안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그 분들이 다 증명하시고 구구절절이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달마(達磨) 스님, 그리고 이조(二祖) 혜가(慧可) 스님 말씀이나,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말씀이나 그냥 직설(直說)로 바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비었으면 ‘비었다’, 부처면 ‘부처다.’ 그리고 『육조단경』에서도 ‘심즉시불(心卽是佛)’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그런 말씀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매 번 달마스님과 혜가스님의 일화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이 어디가 별도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좋고, 궂고 어디 있는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버릇을 잘 못 붙였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자리’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부처가 지금 보입니까? 자기는 못나게 보이고 이상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많이 있곤 하니까, 아! 저 따위 사람들한테 무슨 부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아들ㆍ딸한테나 친구한테나 그 사람을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본래대로 부처같이 보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그렇게 먼저 부처님같이 봐 놓고서 ‘다만 인연 따라서 내 아들로 태어났구나. 저 사람도 본래는 부처인데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쁜 행동을 보일 뿐이구나.’


부처님의 은혜(恩惠)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실은 무량한 은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가 은승창열은(隱勝彰劣恩)이라. 부처님의 은혜가 많지만 부처님의 좋은 점은 숨기시고 나쁜 점을 우리한테 보인 은혜(恩惠)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사람들도 본래는 부처인데 부처란 좋은 점을 지금 가리고서 도둑이라는 나쁜 걸로 해서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대하나 딸, 남편, 아내, 누구를 대하든지 먼저 ‘아! 저분도 본래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여 놓고서 그 다음에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다 보니 아들딸이 되고 남편이 되었구나’ 그래야 바르게 관계가 섭니다.


이것이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연기법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본래 무아(無我)고, 본래 무아기 때문에 사실 내 소유(所有)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큰 빌딩을 가지고 있고 또는 막대한 재벌가가 된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탈탈 다 털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괴롭지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기업도 경영하고, 장사도 잘하고,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그래야 사회도 풍요롭게 되고 그렇겠지요. 그래서 최선으로 한다 하더라도 본래 이것은 나도 내 것이 아닌데,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닌데 저 따위 것들이 무슨 내 소유일 것인가?

다만 이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인간들의 공유물인데 내가 지금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최선으로 관리해야 내가 인간으로서 내 책임을 다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불자로서 우리 기업인으로서 자기 사업에 대해서 가지는 바른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 인간 세상에 참다운 평화가 옵니다. 그렇지 않고서 연기법으로 보지 못하고서 그냥 세간적인 지헤로 분별시비(分別是非)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인류 사회에 갈등(葛藤)과 반목(反目), 전쟁(戰爭)과 부패 여러 가지 비리(非理)같은 것을 도저히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인 것이지 그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염불을 저는 강조했습니다. 해서 참선을 하신 과거의 선지식(善知識)이라든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인용해 가지고서, 내가 원래 부처인데, 내 이름 내가 부르는데, 사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그런 이름이 바로 내 진짜 이름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것은 금생에 작명가나 부모가 붙인 가짜 이름입니다.

내 진짜 이름은 바로 ‘부처’가 진짜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침에 쇳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미타불이 어디 한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구천오백 동명동호아미타불(同名同號阿彌陀佛)이라! 한도 끝도 없이 아미타불뿐이란 말입니다. 이름도 같고 호도 같고,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런데 가서 ‘두두물물’이란 말씀이 해당됩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고 아미타불이란 말씀입니다.


인생(人生)이란 마음 한 생각 돌이키면 참 행복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계가 바로 그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다 아미타불인데 극락세계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바뀌고 우리 행동도 바뀌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부처님 믿고 변신하지 않으면 믿은 보람이 없지요. 부처님이 되고자 해서 부처님이 되어 가는 그런 쪽으로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 근기가 약해서 단박에 비약적으로 바꿔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바꿔져야 신앙인으로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지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신명이 지킨다는 이른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지킨다는 것을 꼭 명심(銘心)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불()ㆍ법()ㆍ승() 삼보(三寶)만 믿어도 36부 선신들이 우리를 다 지킵니다. 오계(五戒)만 우리가 지켜도 오오는 이십오라. 25선신이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천지 우주라는 것은 우주의 도리, 우주의 법도(法道)에 따르기 때문에 신장이나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들이나 모두가 다 우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우주의 법도를 따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또 그런 신장들이나 천신들이 우리를 가호(加護)합니다. 그래서 염불과 참선이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쪽으로 제가 정리를 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 위대한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원효(元曉) 스님, 의상(義湘) 스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서산(西山)대사, 태고(太古) 대사 모두가 그리했습니다. 이조 13대 종사의 글을 다 봤습니다만 그 분들 글도 역시 다 그렇습니다. 조금도 집착이 없단 말입니다.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닙니다. 참선할 때도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 있으면 참선이 되지만 그냥 덮어놓고 ‘이뭣고’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화두(話頭) 나올 때 그 자체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참구하고자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화두를 들든지 간에 분명히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도 부처님이 저 밖에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참선이 못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그대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하면서 염불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우리가 참구할 때도 하나님을 저 밖에서만 생각할 때는 그것은 참선이 못되겠지요. 그러나 내 마음이 본래 하나님이고 천지 우주는 하나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신 데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 주여’ 할 때는 그것도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이 꼭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종교도 비로소 화해(和解)가 되고 그렇게 되어야 자기 마음이 넓어지곤 합니다.


본래 우주 구조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온 것인데 진여불성 안 여의고 생각한다고 할 때에는 모두가 술술 풀이가 됩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우리 공부를 북돋을 수 있는 게송(偈誦), 즉 말하자면 불교 시()를 몇 구절 넣어서 마무리를 잡았습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것만 생각하시면 사실은 그냥 보기만 하셔도 쭉쭉 같은 도리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육즉불(六卽佛) 이것 풀이만 하시도록 하십시다. 이것 풀이만 해도 한 두 시간은 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