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 삼시교판 - 2) 제이시교(第二時敎)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32

 

 


제이시교(第二時敎)18) 



18) 제이시교(第二時敎), 공교(空敎)소승중(小乘衆)의 실법(實法)을 집착(執着)을 파(破)하기 위하여 제법공(諸法空)의 리(理)를 설(說)함.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




처음에는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이른바 유교(有敎), 우리 중생의 유무를 따지는 그런 경계를 가르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교(空敎)라. 빌 공()자 공교는 참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교를 해석을 못하면 반야(般若)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모르면 중도(中道)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교를 알아야 합니다. 공교를 알아서 정말로 무상(無常)이 우리 몸에 배어야 합니다. 무상이 몸에 배어야 그래야 우리 행동이 빗나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공교를 말씀한 경이 반야경(般若經)이라. 반야경 이것은 600부라.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두가 다 본래로 공이라.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색()이 공()이라. 이런 것을 말씀하신 부처님 경전이 600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아주 집착돼 있는 그런 마음을 풀어서 모두 다 해방시켜야 할 것인데, 해방시키려면 본질대로 진실 그대로 말씀해야 할 것인데 사실 그대로 말하다 보니까 모두가 다 비었다는 그 말씀을 안 할 수가 없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째서 있는 것보고 비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 불교인들이 알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인 아닌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교인들도 불교를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말씀들 들어보면 결국 공 도리(空道理)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공()일 것인가? 앞 시간에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연기법이란 인연(因緣) 따라서 모두가 다 잠시간 모양을 낸단 말입니다.

사실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같이 우리 중생들이 사실로 착각하여 있다고 집착하는 세계가 중생계입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강물 속에 비친다고 생각할 때에 분명히 물 속에 달이 있어 보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그림자이듯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하고, 밉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틀림없이 물 속에 비치는 달 그림자나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도 누누히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흘러가는 흔적에 불과합니다. 흔적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어제 마음 오늘 마음이 같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순간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항상 이대로 같지 않는가? 몸뚱이도 역시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마지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 분의 일도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연기법(緣起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物質)이란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따라서 시간성(時間性)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인과도 있겠지요.

연기법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법문에도 있습니다만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법은 결국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인연생’이라는 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흘러가는 것을 잘 파악을 못하니까 실제로 있다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몇 천 번 외운다 하더라도 이 공 도리를 모르면 반야심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또 내 의식(意識)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다 공이라 했지 않습니까.

어째서 공일 것인가? 인연생이기 때문에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있는 것같이 보일뿐입니다.


젊은 나이에는 사무치게 느끼기가 좀 곤란스럽겠지요. 나이가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면 젊은 시절의 청춘도 별 것이 아닌 것이고 몇 년 안 지나면 무덤에 들어가겠구나. 죽어지겠구나. 죽어지면 또 뭐가 남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인간의 경륜(經綸)으로 해서는 느낄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은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자기 청춘이 항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예쁜 얼굴이 항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무상을 느껴야 신앙의 문에 참답게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못 느끼면 신앙의 문에는 못 들어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내 몸뚱이 그대로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대로 있고, 항시 이별도 없고, 재산도 차근차근 불어나고 이렇게만 생각하다가는 깊은 신앙에 못 들어옵니다. 기본적인 범주에서만 뱅뱅 돈단 말입니다. 복()이나 빌고 하는 정도밖에는 안됩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내 스스로 밝혀서 내가 참답게 나를 알고, 우주의 도리를 참답게 밝혀서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공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상하지 않는 참다운 생명을 우리가 추구하고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그대에게 주어지리라.’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구하면 다른 것은 따라 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냥 부스러기만 구하려고 생각합니다. 부스러기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허물어지기가 알맞지요. 있다가는 없고 없다가는 있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명 자체, 생명의 본체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도리를 우리가 참으로 구할 때는 다른 것은 적당히 다 우리한테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남한테 봉사하고 남한테 바치고 하려는 경우 같으면 몰라도 정말로 우리가 영원적인 진리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필요한 만큼은 다 갖추어집니다.


이 공 도리를 알아야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참다운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우리 공부가 순풍에 돛단배가 됩니다. 우리 공 도리를 모르면 항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항시 빡빡합니다. ‘이렇게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 버려야 합니다. ‘금쪽 같이 아끼는 이 몸뚱이 이대로 공이다.’ 이렇게 느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이 몸뚱이 이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가족만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만 소중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 정도로는 참다운 도덕(道德)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덕은 ‘진리에 따라서 진리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다 허망무상하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도덕이 확립이 됩니다. 도덕은 참다운 철학(哲學)이 있어야 참다운 도덕이 됩니다.


이렇게 비었다는 것을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만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물질의 기본적인 작은 알갱이가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물질도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로 구성 안 된 것은 없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다 그렇습니다. 모든 물질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무엇이 되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성분이 도고 우리 세포가 되고 다 그러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어떠한 것이고 모두가 다 기본적인 조그마한 알갱이는 내내야 전자, 양성자, 중성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를 구성한 물질의 근본 이들 알갱이는 위치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앞 시간에 말씀드린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그런 위대한 천재들은 그야말로 훌륭한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대 천재가 평생 동안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전자현미경을 놓고, 또 그렇게 어려운 고등 수학과 사고(思考)로 풀어 봐도 결국은 물질의 알맹이는 측정할 수 없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란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몰라버리니 그들로 이루어진 것 역시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물리적인 차원의 기본은 장() 에너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해답을 못 내립니다.


그 에너지가 좌편으로 진동하면 양성자가 되고, 에너지가 우편으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금진좌선자기(金塵左旋磁氣)요, 금진우선전기(金塵右旋電氣)라. 순수 장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서 음양(陰陽)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는 음양이 나오는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를 태극(太極)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음이 되고 양이 되곤 한단 말입니다. 이러는 것이지 고유한 물질은 없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공()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에너지의 진동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번복을 시키겠습니까. 수많은 우수한 과학자, 철학자들이 다 결론을 내린 것이고 또한 동시에 부처님께서 다 밝혀 놓고 옛날 성인들이 다 밝힌 것입니다.


그리스의 플라톤도 역시 현상계(現象界)와 이상계(理想界)라. 참다운 이상계만 존재하는 것이고 현상계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했습니다.

어느 철인들이나 대체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칸트 같은 대 천재도 물() 자체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 이것이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는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있다는 차원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렇습니다. 싸우고 아귀다툼하고 전쟁이고 다 그렇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다고만 생각해 버리면 그런 저런 것 다 풀려버립니다. 그래서 반야사상(般若思想) 즉,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공부는 앞서 말씀과 같이 순풍(順風)에 돛단배와 같습니다.


이 몸뚱이 다 빈 것이거늘 고행 좀 하면 무슨 상관 있겠는가. 내 몸뚱이 본래 빈 것인데 덜 먹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명이란 것은 본래로 빈 공체(空體)이기 때문에 좀 덜 먹고 더 먹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꼭 몇 칼로리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는 것에 착()을 하니까 그런 것을 채우려고 막 먹는 것이지 본래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몸무게도 본래 없기 때문에 이대로 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가 빈 것이기 때문에 본래 사실은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무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인(道人)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하늘로 훌쩍 날라 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해도 신통(神通)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러면 ‘그것은 재주나 부리는 것이지 참다운 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함경이나 기타 부처님 경전을 보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신통’이라는 말씀이 하여튼 수 천 군데가 넘습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이 공 소식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의 번뇌를 쳐부수기가 하도 어렵기 때문에 600부나 되는 부처님 경전에서 공 소식을, 이것도 비고 저것도 비고, 금강경(金剛經)만 보아도 아상(我相)인 나라는 상도 없고, 인상(人相)인 너라는 상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고, 또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짧다 길다도 없다고 설파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목숨은 80년이다. 70년이다 그렇지만 그런 연한(年限)도 역시 물질이 있다고 전제(前提)할 적에 그런 시간(時間)도 있는 것이지 물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무슨 시간이 있겠습니까.


‘비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항시 느끼십시오. 느끼시고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는 ‘내 몸뚱이도 본래 빈 것이고’, ‘생명은 본래 무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명은 본래 꼭 칼로리만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인도에서 어느 수행자는 120일 동안 물만 먹고살았어요. 120일 동안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증명을 했습디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잠재력은 우리가 정말로 마음만 굳게 먹으면 부사의한 힘을 다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밖에는 아니다’, ‘나는 꼭 얼마를 먹어야 된다’, ‘하루 세끼 먹고 간식도 먹어야 내 체중을 유지한다’, ‘고기는 얼마를 먹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빈 소식을 알 수가 없지요. 그렇게 믿으니까 그렇게 안 먹으면 허기가 지고 영양실조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