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 삼시교판 - 3) 제삼시교(第三時敎) = 중도교(中道敎)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34

 

 


제삼시교(第三時敎) = 중도교(中道敎)19)



19) 제삼시교(第三時敎)…중도교(中道敎)…소승(小乘)의 유집(有執)과 보살(菩薩)의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破)하기 위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중도(中道)를 명(明)함. 해심밀경(解深密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제삼시교는 삼시교 가운데 마지막 시교인데 중도교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 비었다고만 해버리면 그때는 너무나 허망하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은 모두 비기는 비었는데 참다운 알맹이는 결국 부처님입니다. 이른바 중도교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고 부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잘못 아시는 분들은 기독교는 비과학적이고 현대에는 맞지 않다. 그렇게 말하지만 현대와 같이 이렇게 개명(開明)한 시대에 18억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가신지 1900년 세월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믿어 왔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순 소박하게 말씀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이론적으로 체계가 별로 안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기가 곤란스러운 것이지 진리상으로 봐서는 모든 진리가 하나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이나 다 존중하고 숭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 그럴 때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전들은 ‘천지 우주는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가르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함경만 보신 분들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만 말해 있으니까 꼭 그것만 집착해 가지고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야심경, 금강경 같이 모두가 비었다고 가르치는 경만을 주로 보신 사람들은 모두는 비었으니까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부처님 공부를 하실 때는 꼭 이 중도사상(中道思想), 본래 부처님께서 조금도 에누리 없이 진리(眞理)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그 도리를 가르친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이런 경들을 보셔야 우리 마음이 허무에 물들지 않고 마음의 번뇌만 끊어버리면 이대로 다 진여불성 중도실상이며 이 세상도 이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일 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도 바로 안심(安心)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되어서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시교를 부처님 비유담으로 ‘삼수도하(三獸渡河)’라 합니다.

삼수도하란 세 마리의 짐승이 냇물을 건너단 말입니다. 토끼와 말과 코끼리 셋이 내()를 건너가는데, 토끼는 몸집이 가벼워서 냇물 위에 둥둥 떠서 방정맞게 건너간단 말입니다. 말은 덩치가 토끼보다는 크고 무게가 있으므로 잠기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불안스럽게 건너갑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덩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뚜벅뚜벅 강 바닥에 발자국을 내면서 안전하게 건너갑니다.


그래서 유교는 모든 것을 중생의 상식 차원에서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이런 것만 따지는, 마치 토끼가 내를 건너가는 격입니다. 우주의 진리가 깊고 심심미묘한데 깊은 진리까지는 음미를 못하고 그냥 겉만 피상적으로 흘러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말()은 조금 덩치가 크므로 가끔 깊이 잠기기도 하지만 또 역시 바닥을 미처 음미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교’라. 다 비었다는 소식만 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 것이 비었지 참으로는 진여불성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뚜벅뚜벅 진리의 바닥을 다 딛고 건너갑니다. 때문에 코끼리가 건너는 것을 중도교에 비유합니다.


화엄경ㆍ법화경ㆍ열반경,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중도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쁘셔서 어느 세월에 이와 같은 경들을 다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못 보신다 하더라도 이 중도교의 도리를 아시게 되면 보신 것이나 똑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최후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가르침입니다.


첫 시간의 안심법문에서 말씀드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질이나 우주 만유의 본바탕이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하신 것도 중도의 법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법문 같지만 그 하나 가운데 상식을 초월하고 부처님이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도님들이 오시면 반야심경을 드립니다. 반야심경을 드리는 이유가 뭐인고 하면 너무나 상식에만 끌려서 항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일상적인 가르침에만 머물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세속적인 ‘있다 없다’하는 저속한 데만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타파하려면 ‘모두가 다 비었다.’ 반야심경에 있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색온(色蘊)도 공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溫)도 공이다. 따라서 육진 경계인 색()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냄새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내 감촉도 공이요, 내 뜻으로 짓는 제법도 공이다.

이런 법문으로 해서 우리가 공 소식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반야심경만 봐 놓으면 그야말로 모두가 다 공인 줄만 알고 참말로 진정한 알맹이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으로 해서 우선 우리 마음의 허망한 상을 다 쳐부수고 그 다음에는 중도실상,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불성 자리, 본래 부처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리방편문』을 드리곤 합니다. 저희가 많이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쇄를 해가지고 짊어지고 미국까지 건너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실 적에 듬뿍듬뿍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반야심경』, 『보리방편문』 말입니다.


제법 공 도리, 반야사상 또는 중도사상, 참다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공과 중도가 같이 어울려 있어야 참다운 반야바라밀이 됩니다. 우리가 법문을 할 때에 항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을 봉송하지 않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