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 삼시교판 - 1) 제일시교(第一時敎)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31

 

 

삼시교판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설법을 ‘49년 설()’이라 합니다. 더러는 45년 설도 있으나 부처님이 30세에 깨달았다고 보면 보통 49년 설이 정설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한꺼번에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따라서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도(印度)란 나라는 지금도 9억쯤 되는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큰 나라이고 땅덩이도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 때 당시는 교통이 아주 나빠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사셨지만 부처님이 금생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3분의 1도 못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어디서 위대한 사람이 태어났다 하면 금방 알고는 합니다만 석가모니 같이 위대한 성인(聖人)이 인도에 태어나서 80년 동안 지냈지만 3분의 1도 몰랐다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분들은 아주 극소수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아주 쉽게끔 어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애초에는 부처님계서 신중(神衆)들이나 고급 영()이나 그런 중생들한테 화엄경(華嚴經)을 법문 하셨다 합니다. 화엄경 법문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그대로 아주 에누리 없이 말씀하신 고도의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는단 말입니다. 신장이나 알아듣지 우리 인간은 통 못 알아듣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차원을 낮추어서 일반 사람들한테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17) 



17) 제일시교(第一時敎), 유교(有敎)실재한 아(我)가 있다는 망집(妄執)을 깨뜨리기 위하여 아(我)는 공(空)하나 사대오온(四大五蘊) 등의 제법은 실유(實有)하다 함. 아함경(阿含經)등의 소승경(小乘經)이 해당된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그런 차원에서 중생 시각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第一時敎)입니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아는 것은 제일시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짓도 하고, 앞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쁜 짓 하면 거기에 상응된 벌을 받고 좋은 일하면 그만큼 정화가 되고 행복이 온다. 그런 정도의 법문들은 모두가 제일시교에 해당된 법문입니다.


이것을 있을 유()자 유교(有敎)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이 있다 하는 세계 아닙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산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세계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세계고 그리고 거기에 맞는 가르침이 유교입니다.

유교 이것은 아함경(阿含經) 등 소승경이 유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보는 대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차원의 유교 이것은 대승(大乘)이 못됩니다. 이것은 소승(小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비록 소승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 가운데는 다 대승이 갈무리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자로 해서는 표현은 안했다 하더라도 다 깨달은 우주의 만유를 제대로 온전히 통달한 부처님 차원의 말씀이기 때문에 중생이 불쌍해서 중생에 걸맞게끔 낮은 법문을 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대승 법문이 다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지 ‘소승 법문에는 대승은 전혀 없고 소승뿐이다.’ 그래 버리면 또 허물이 됩니다.


아무튼 아함경 같은 그런 경은 초기에 부처님께서 일반 대중들한테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부처님 육성 같고 동시에 우리 수행 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법문이 많이 들어 있는데 지금 와서 이 쪽 대승권에서는 좀 소홀히 합니다.


불교는 대승권, 소승권이 있습니다. 대승권은 중국(中國), 한국(韓國), 일본(日本) 이런 나라가 대승권이지요. 소승권은 저쪽 스리랑카, 또는 네팔이라든가 동남아 지방에 있는 불교는 대체로 소승권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승권들은 주로 아함경 같은 경을 합니다. 소승권에서 허물이 무엇인가 하면 앞서 우리가 누누히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말을 소승권에서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승권에서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보았을 때 스리랑카나 동남아에서 온 불교는 수행 면에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모양은 좋게 보이지만 불교로 봐서는 소승권이기 때문에 안심법문이 못됩니다. 항시 갑갑합니다.

‘본래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다.’ 이런 소식을 그네들은 모른단 말입니다.


대승은 거기에 대해서 가장 근원적인 본체를 딱 들어낸단 말입니다. 본래적인 형이상학 그런 것이 완전히 대승권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 거기에 치우쳐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도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라든가, 계율이나 그런 것을 대승권에서는 함부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술이나 고기나 그런 것도 먹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말입니다.

‘본래 때묻지 않은 것이고 본래가 부처인데 그것이 뭐 허물이 될 것인가?’ 어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먹기는 먹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합리화 시켜서 먹어서는 안됩니다.


소승경에서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고기 먹는 것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고기를 먹어서 이른바 단백질은 좀 많아지고 스태미너는 나아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걸로 해서 우리 세포는 더욱 오염되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는 진화가 훨씬 덜 된 동물들 아닙니까. 불교 말로 하면 업장이 훨씬 더 무거운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내 몸 세포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좋을 턱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현대 병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병인 당뇨병, 고혈압, 심장병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성자가 하신 말씀은 지금 인류 과학자들이 미쳐 다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信仰人)들은 일단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를 내다봅니다.


과거를 환히 내다보는 이른바 숙명통(宿命通), 또는 미래를 내다보는 천안통(天眼通)을 하십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천안통은 미래 세상을 다 알고 동시에 이 현세를 모두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또 남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일체 세간의 음성(音聲)을 다 듣는 것이고, 가령 개가 멍멍 짖으면 저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서 짖는가? 그걸 다 안단 말입니다.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라. 신여의통 이것은 쉽게 말하면 축지법(縮地法)이란 말입니다. 순간에 마음을 먹으면 천리만리 가 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모양을 바꿔서 중생한테 다른 모습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중생이 불상하면 중생한테 극락세계의 훤한 빛나는 모양을 그대로 다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 수대로 빵을 기적적으로 만들어 내 놓곤 하신 것이 모두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자의 경계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물질 세계를 초월한 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들이 물질 세계만 가지고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본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입니다.


물질을 떠난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성자들은 훤히 보고 느끼지만, 우리가 불성(佛性)이 보입니까? 여래(如來)가 보입니까?

불교를 믿는 분들도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려고 합니다. 우선 중생제도(衆生制度) 하려면 무슨 빌딩 많이 짓고,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주고, 물론 그런 봉사 사업도 필요는 합니다. 필요하나 그것이 더 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제하는 일이 더 급선무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것이지 물질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사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종교인 점은 우리 정신구제(精神救濟)에 있습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힘이 닿으면 유치원도 짓고, 무엇도 하고 다 좋겠지요.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설사 유치원도 못 짓고, 노인당도 못 짓는다 하더라도 정신구제 하는 일이 제일 급하고 큰일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한계를 우리가 알아두어야 그래야 자기 점검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