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 4 장] 1. 오종선 - 1) 오종선(五種禪)

通達無我法者 2007. 4. 13. 07:38

 

 

오종선(五種禪)32)


  

1.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2.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3.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4.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

                             여 닦음.

5. 최상승선(最上升禪)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

                             (信解)하고 닦는 선(禪).



외도선은 불도가 아닌 외도들이 호흡법이나 마인드 컨트롤 등 요새 별스러운 것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외도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도 믿지 않고 그냥 참선을 하면 몸도 가볍고 건강도 도모하고 스테미너를 증진시키는 따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텔레파시로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맞히고 하는 그런 유위공덕(有爲功德), 인과를 믿지 않는 단계에서 하는 선을 외도선(外道禪)이라 합니다.

유루공덕(有漏功德), 이것은 때묻은 공덕입니다. 말하자면 상()을 떠나지 못한, 자기라는 관념(觀念)을 떠나지 못한 공덕은 다 때묻은 공덕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떠나버린 공덕이 되어야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 때묻지 않은 공덕입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무아(無我)라는 관념이 없으니까 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때묻은 공덕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 이것은 비록 상()을 떠나버리지는 못했더라도 외도꾼 같이 때묻은 공덕은 아닙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일반중생의 공덕을 위해서 하는 선이 범부선(凡夫禪)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선()을 행하면 반드시 안락(安樂)의 과보(果報)가 있고 악()을 행하면 또 그 원인으로 인해서 고통의 보()가 따른다는 게 인과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인과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외도꾼들은 인과를 믿지 않으니까 함부로 사기도 치고 뇌물도 먹고 하겠지요. 그러나 인과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가 사기를 치고 뇌물을 먹고 나쁜 짓을 하면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업보를 받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이 혹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은 인과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를 믿으면 부도덕한 행동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악보(惡報)를 받아 인생의 고과(苦果)가 따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소승선 이것은 범부선보다는 좀 더 높아서 아공(我空)이라, 본래 나()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잠시간 모인 것에 불과하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수()상()행()식()이라, 감수하고 분별하고 느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간 모여 있을 뿐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잠시간 모여서 무상(無常)한 것이 우리 범부인 아()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본래 비었다고() 생각하고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여기서의 아공(我空)은 오온개공(五蘊皆空) 까지는 미처 못 간 것입니다.

그냥 나타나는 이 몸뚱이라는 것은 원소가 모여서 잠시간 된 것이고 내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이라, 분별하고 느끼고 감수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 모여서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서 닦는 선, 이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뚱아리에 대한 관념을 무상으로 분명히 느껴야 이른바 소승선도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질긴 것이 자기(自己)라는 관념(觀念)입니다. 자기 몸뚱이, 또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말입니다.

넷째로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자기도 비어 있지만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념이나 개념도 그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개념이나 자기라는 존재가 다 비었다고 믿고서 해탈(解脫)의 법을 닦는 것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여기까지 되면 그야말로 상당히 온 것이지요.

우리가 앉아서 망상도 하고 분별시비도 하는 것은 아공, 법공을 믿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남에게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걸 가지고 마음 고생을 하고, 배 고프면 고프다고 생각하고, 추우면 춥다고 생각하고, 배 고프면 고프다고 생각하고, 추우면 춥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만 망상이 생기고 진여불성 자리로 우리가 굳게 못 나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법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움직여 가는 것이지 실지로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육조단경의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아무 자취가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 가서 티끌인들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마음을 다 열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다만 존재하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인 이 순수 생명자리 이것만 결국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에만 치우쳐 버려도 이것은 허무가 됩니다. 우리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그냥 말로만 느끼면 허무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실지로 닦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공()해지고 모두 텅 비어지면 그와 더불어서 진여불성의 광명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느껴도 닦아서 느끼는 사람은 공()에 떨어지지 않지만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느끼면 공에 떨어지고 맙니다.

다섯 번째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우리가 지금 문제시 하는 것은 최상승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의 대승권에서 하는 참선이 최상승선이지요.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이 그것입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싸움도 아주 치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통불교(會通佛敎)를 지향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의 도원선사 같은 분도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여래선’, ‘조사선’이란 말도 없었던 것이고 달마에서 육조까지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후대 중생들의 근기가 약해지니까 괜히 분별시비가 나와 가지고 여래선, 조사선을 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싸우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공부가 조사선이고 여래선이고 그런 것이지, 그것은 바로 일체방편을 떠나서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는 무루지성품(無漏知性品)이 구족(具足)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닦아야 참다운 여래선이고 조사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最上乘禪) 즉, 외도선이나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등을 훌쩍 뛰어 넘어서 최고의 정상인 최상승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내 마음 가운데는 모든 무량공덕이 다 들어있으며,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참구하는 선이 되어야 이른바 가장 고도한 참선인 최상승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 부처님 뜻을 따르는 것이고 또, 달마에서 육조까지의 순수한 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른바 안심 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합니다.

 내가 지금 못 나고 못 배웠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은 무식해도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마음 자리만 바로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팔만대장경을 다 독파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자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인 것이고, 불성 가운데는 때 묻지 않은 무루공덕이 본래 갖춰져 있고, 때묻지 않은 무루공덕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화두를 들어도 좋고 들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여러분들께서 평생을 해야 할 공부입니다. 평생 동안 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공부가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인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됩니다. 허튼 짓을 하면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너무 욕심을 부려도 참선에 장애가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어느 존재나 다 진여 연기법으로 해서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고, 좋아하고, 욕심내고, 집단 이기심이나 개인 이기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여불성 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모양은 참선 모양을 내면서 마음은 탐욕과 어리석은 그대로 있으면 참선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나타내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생각하는 듯이 모두 다 진리에 맞게 나아가야 참다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최상승선이라, 이것은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을 최상승선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고도한 최상승선의 참선법은 먼저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이치를 모르고 덮어놓고 하면은 최고의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께서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치로(理入과 行入)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마선이란 이치로 먼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라,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본래 부처라는 이 말을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처음부터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나한테는 잘나나 못나나, 늙으나, 젊으나 누구나가 다 법신부처님의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나, 자비나, 원력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야 본래 부처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어도 그냥 무턱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해(信解)라, 믿어 의심치 않고 이치적 체계를 세워야 신해(信解)가 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해()는 못되고 가까스로 신()만 되겠지요.


부처님 법문은 조금도 빠뜨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한 것입니다. 더러는 ‘경()은 필요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필요없는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 할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천 오백년 동안을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 왔겠습니까? 다 우리 마음의 때를 없애고 우리를 부처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최상승선,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자기 비하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천상천하에 누구에게도 꿀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아니라 사실로 들어가면 어느 누구나가 다 천상천하에서 자기가 제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려야 매사에 자신이 생깁니다. 사업을 하나, 시험공부를 하나, 그런 자신을 가지고 하면 훨씬 더 사업도, 공부도 빠르게 됩니다.


제가 항시 비판을 듣는 문제는 어려운 법문을 하고 생활 법문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활이란 것이 무엇을 따로 두고 생활이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생활이란, 바로 우주의 법도를 따르는 생활이 가장 좋은 생활입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고, 돈 벌고 하는 것이 좋은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좀 어렵더라도 부처님 법에 따르는 생활이 참다운 생활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세속화 시켜 일반 대중들을 안이하게 만들고 종교를 재미로 하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들은 고도한 법문을 대중 누구나가 다 알아듣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불자님들이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십이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을 보면 다 기가 막힌 법문들입니다.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는 진리들입니다. 공덕뿐만이 아니라, 당장 금생에 바로 행복이 오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따르면 남편과 싸울 수도 없고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도 없으며, 자식에게 불신 받는 부모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스승에게 불손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불신하는 것은 모두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스승이 스승답지 않다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바르고 진리를 바르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가사, 기독교나 불교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것에 대해서 다른 점과 좋은 점들을 갖추어서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냥 다 승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 것은 좋고 다른 종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말해버리면 젊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겠습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다 높은 교육들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총명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을 시켜야지 덮어놓고 주장하고 강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불교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리 몇 가지만 알아버리면 참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불성, 이것은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분명히 우주에 영생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에너지가 흐르듯이…. 에너지 불멸 법칙이라, 다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좋게 보이는 것은 긍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겉에 좋은 것도 나쁠 수가 있고 겉으로 나쁜 것도 좋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를 다 근본도리에서 봅니다. ‘하나님’이나 ‘아멘(Amen)’이나 그것도 역시 근본 도리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는 말했습니다. ‘참다운 구제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의해서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을 우리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불심을 떠나지 않고 우리 본 성품을 떠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제 선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