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주해13

通達無我法者 2007. 8. 21. 09:51

〈14-29〉

 ≪주해≫

* 1) 진정성괴(眞正成壞) 운운 : 임제 자신의 용처(用處)에 관한 진술.

성괴는 성주괴공(成住壞空)에서의 두 가지로 건립(建立;긍정), 소탕(掃蕩:부정)을 가리킨다.

* 2) 아편착수반의(我便著數般衣) 운운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어 분장을 바꾸면」이라는 뜻이다. 수반의(數般衣)는 다음 절〈14-30〉에 나오는 보리의(菩提衣)․열반의(涅般衣)․조의(祖衣)․불의(佛衣) 등을 가리킨다.

* 3) 고재 할독자(苦哉瞎禿子) 운운 :「아아, 슬프구나, 눈먼 이들이여」라는 탄식의 소리.

* 4) 편생흔욕(便生忻欲) : 기쁜 심정을 일으킴. 이때 벌써 학인은 임제의 트릭(trick)에 넘어간 것이다.

* 5) 학인실심(學人失心) : 선지식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는 학인의 실망. 아무의(我無衣)의 아(我)는 임제 자신. 트릭의 명수다운 임제의 독백이다. 보지(寶誌)의 《대승찬(大乘讚)》에는,「누런 낙엽을 금이라고 집착하니 금을 버리고 보배를 구할 줄 모른다. 그 까닭에 바른 생각 잃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겉모습만 애써 유지하려고 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 6) 이식아착의저인부(儞識我著衣底人否) :그대가 옷을 바꿔입는 인간을 알겠는가? 옷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 여기서 착의저인(衣底人)은 동격(同格).


〈14-30〉

 ≪주해≫

* 1) 단유성명문구(但有聲名文句) 운운 : 단유(但有)는「전부」「모두」라는 말. 종래에는 단유(但有)를「다만 음성문구(音聲文句)가 있을 뿐이다」라고 읽었는데 이것은 맞지 않다. 의변(衣變)은 의복에 의한 표면적 변화라는 뜻.〈14-4〉에서의 의변(衣變)과 같다.

* 2) 종제륜기해중고격(從臍輪氣海中鼓激) 운운 : 배꼽 아래의 기(氣)를 진동시켜 이빨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온다는 것. 성명언구(聲名言句)가 성립되는 과정을 설명하여 그 실체는 공(空)이라는 것을 보인다. 제륜기해(臍輪氣海)는 단전(丹田)이라고 부르는 인체(人體)의 중심으로 배꼽 아래로부터 일촌(一村)아래에 있다고 한다. 건강체(健康體)라면 기체(氣體)가 항상 그곳에 모여 있다고 한다.《대지도론》6, 《대일경소(大日經疏)》3에도 보인다.

* 3) 외발성어업(外發聲語業) 운운 : 밖으로 표현되는 어업(語業)은 내면의 사업(思業)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뜻.

* 4) 이사유념(以思有念) 운운 : 내면의 사념(思念)이 밖의 행동을 유발시킨다는 것으로, 행동 그 자체에는 실체가 없고 오직 사념의 움직임일 뿐이라는 것.《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의 근본사상이며 유식가(唯識家)의 대표적인 업사상(業思想).

* 5) 타착저의위실해(他著底衣爲實解) : 타착저의(他著底衣)의 타(他)는「누구라도」의 뜻.「눈에 보이는 옷에 매달려 실해(實解)를 낸다면」의 실해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말에 합당한 실질(實質)이 어디엔가 있다는 망념(妄念)을 가리킨다.

* 6) 진겁(塵劫) : 한 티끌을 한 겁으로 세어야 할 무한의 영원(永遠).《법화경》화성유품(化城喩品)에 보인다.

* 7) 의통(衣通) : 옷에 매달리는 외면적인 이해.〈14-4〉에서의 의통(依通)과 같다.

* 8) 삼계순환(三界循還) 운운 : 삼계(三界)에 돌고 도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거듭하는 것. 순환(循還)은 「循環」이라고도 쓴다.

* 9) 상봉불상식(相逢不相識) 운운 : 서로 만나 대화하고 같이 행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이 구절은《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12 남전어요(南泉語要)에도,「누구인가 말하기를〔故云〕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아마도 당시 어느 시인의 말인 듯하지만 자세하지는 않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단절감(斷絶感)을 나타내지만 이면에는 본래의 평상무사(平常無事)함이 깔려 있다.


〈14-31〉

 ≪주해≫

* 1) 대책자상(大策子上) 운운 : 대형 노트에 노사(老師)의 설법을 베껴 적는 것.《전등록》28 약산(藥山)의 시중(示衆)에는,「책 속의 말구절을 기억해서 자기의 견해라 여기지 말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경멸하지 말라」라는 간절한 법어가 있다. 그래서 약산유엄(藥山惟儼)은 당당히 선언한다.「나는 일찍이 경(經)이라든가 논(論)을 보지 않았다.」마찬가지로 어떠한 종교의 성전(聖典)이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실존(實存)이며, 또한 우리의 삶이 바로 경전인 것이다. 사람이 경전을 만든 것이지 경전이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사실이다. 그것을 자신의 실존 속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경전에 현혹되고 압도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2) 이위보중(以爲保重) : 소중하게 여김.

* 3) 향교중취의탁상량(向敎中取意度商量) 운운 : 경론(經論) 중에서 언구(言句)를 추려 내어 헤아리는 것. 여기서는 진정한 견처도 없으면서 언구를 추려 내어 자기의 견해인 양 사람들에게 설법하는 것. 문제는 진정한 견해이다. 여기서의「도(度)는「탁」으로 읽는다.

* 4) 시괴자(屎塊子) : 굳은 똥덩어리.

* 5) 유여속인(猶如俗人) 운운 : 전구령(傳口令)은 발음하기 어려운 가사(歌詞)를 귀에서 귀로 전하는 주석(酒席)의 놀이.《운문광록(雲門廣錄)》에도 보인다. 타(打)는 행한다는 말.

* 6) 야도아출가(也道我出家) : 종래에는 야(也)자를 윗구절에 붙여서 읽었지만 바르지 않다. 야(也)는 속어로서 어세를 강하게 하는 발어사(發語辭)이다.

* 7) 안사칠돌(眼似漆突) 운운 : 두 개의 새까만 눈이 돌연히 연기가 나오는 굴뚝처럼 되고 입은 한 일자로 꾹 닫힌 모습을 나타낸다. 편담(楄擔)은 저울막대기 형으로 생겼으므로 꾹 다문 입에 비유함.

* 8) 미륵출세(彌勒出世) 운운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2에서 설해진다. 오십육억 칠천만 년 후에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여 석가불의 교법을 완성한다고 한다. 불교문헌에서는「영원의 미래」,「최후의 기회」라는 뜻으로도 자주 쓴다.

* 9) 이치타방세계(移置他方世界) 운운 :《화엄현담(華嚴玄談)》7의 이야기. 법을 잘못 설한 과보로 차방아비지옥(此方阿鼻地獄)에서 타방아비지옥(他方阿鼻地獄)으로 옮겨져 전전하다가 최후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천불(千佛)이 출세하여도 구제할 수 없다 함. 법을 잘못 설한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무한의 고(苦)를 받는다는 이야기.


〈14-32〉

 ≪주해≫

* 1) 답니각판활(踏儞脚板濶) : 너무 걸은 탓으로 발바닥이 편평해진 것.《연등회요(聯燈會要)》20 덕산(德山)의 장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 2) 무불가구(無佛可求) 운운 : 불도(佛道)는 물건을 구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전등록》14 단하(丹霞)의 장에는,「요사이의 학자들이 소란스럽게 구는 것은 모두가 참선하고 도를 묻는 일인데, 나에게는 닦을 도(道)도 없고 증득할 법도 없다」라고 설해지고 있다.

* 3) 외구유상불(外求有相佛) 운운 : 유상(有相)의 부처를 구하면 그대의 본심을 잃을 것이라는 것. 인도(印度)의 제 8 조 불타난제(佛陀難提)의 게송.《보림전(寶林傳)》2,《전심법요》에도 인용되어 있다.

* 4) 망망업식중생(忙忙業識衆生) :《대승기신론》에서 설해지는 중생심(衆生心). 자세히는 여래장식(如來藏識)이라고 하며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불일불이( 不一不異)하게 섞여 있는 우리들의 프리미티브(primitive)한 마음. 망망은「恾恾」이라고 쓰며, 막막히 먼 것을 나타내는 말. 이 말은《조당집》3의 남양혜충(南陽慧忠)의 장, 18의 앙산(仰山)의 장에도 보인다.


〈14-33〉

 ≪주해≫

* 1) 진불진법진도(眞佛眞法眞道) 운운 : 전단(前段)에 이어서 삼자혼융화합(三者混融和合)을 바탕으로 한 자성(自性)의 세 가지 법을 설한다.

* 2) 여진정학도인(如眞正學道人) 운운 :《속개고존숙어요(續開古尊宿語要)》와 《오등회원(吾燈會元)》본(本)에서는「작도인(作道人)」,《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본에는「학도인(學道人)」,《연등회요(聯燈會要)》9권의 텍스트에서는 간단히「도인(道人)」이라고 되어 있다.《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11에는「지공작도인(志公作道人)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의미는 분명치 않다.

* 3) 염념심불간단(念念心不間斷) 운운 : 이 구절은 앞에서 나온 〈10. 6〉의 「단일체시중갱막간단촉목개시(但一切時中更莫間斷觸目塏是)」와 같은 내용이다. 「어떤 때 , 어떤 장소에서도 다시 단결함이 없어서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궁극적인 진리의 현전(現前)일 뿐」이라는 뜻.

* 4) 자달마대사(自澾磨大師) 운운 : 인혹(人惑)을 물리치려는 것은 달마가 주창한 선(禪)의 근본정신이다.《임제론》에서는〈10-3〉,〈14-17〉에서 달마의 선사상을 소개하고 있다.《조당집》2에서는 달마와 혜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조사(祖師)께서 낙양(洛陽)에 이르신 뒤에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예전부터 낙중(洛中)에서 오랫동안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익히다가 나이 사십이 넘어 조사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소림사(少林寺)까지 따라오면서 항상 조사께 법을 물었으나 조사께서는 전혀 말씀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탄식하며 말했다.〈옛사람들은 법을 구하기 위해 뼈를 깨고 골수를 꺼내고 피를 뽑아 성상(聖像)을 그리고 머리채를 풀어 진흙에 펴고 벼랑에 몸을 던지고 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무엇을 아끼라?〉

  때는 태화(太和) 10년 12월 9일. 법을 구하기 위해 신광은 눈오는 밤을 서서 새웠다. 날이 밝도록 그는 밖에 서 있었다.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었다. 조사께서 보시고〈그대는 무엇을 구하느냐?〉하셨다. 신광이 슬피 울면서 말했다.〈바라옵나니 화상이시여! 감로(甘露)의 문을 활짝 열어 못 중생을 건져 주십시오〉조사께서 말씀하셨다.〈부처님들의 완전한 깨달음은 여러 겁(劫)을 수행한 것이다. 그대가 작은 뜻으로 대법(大法)을 구하려 해도 끝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광이 이 말을 듣자 곧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끊어서 조사 앞에 놓으니.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법을 구할 체에는 몸을 몸으로 여기지 않고 목숨을 여기지 않았는데, 그대가 이제 팔을 끊어 믿음을 보였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그리고는 신광(神光)이라는 이름을 고쳐서 혜가(慧可)라 했다. 혜가가 조사께 사뢰었다. 〈화상께서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조사께서 이르셨다.〈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편안케 해주리라.〉〈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읍니다.〉〈찾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겠느냐?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느니라. 너는 보느냐? 〉혜가는 이 말씀에 단박 깨닫고 화상에 사뢰었다.〈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空寂)함을, 오늘에야 보리(菩提)가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에 움직이지 않고 완성된 지혜의 바다에 이르면,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조사께서 말씀하셨다.〈옳은 깨달음이니라.〉〈화상이시여, 이 법은 문자로써 기록할 수 있습니까?〉〈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느니라. 문자를 쓰지 않느니라.〉」

  이로부터 중국선(中國禪)의 전통이 세워지게 되며 보리달마는 선(禪)의 상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보리달마는 남인도(南印度) 출신으로서 대승불교를 배웠다,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를 사법(嗣法)한 인도 제28조로서 A.D. 520년경 중국 남부에 도착하여 당시 성행하던 소승선관(小乘禪觀)을 압도하고 독자적인 대승선(大乘禪)의 전통을 확립했다, 그의 우수한 직계제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종이 시작되었다,

* 5) 약제일구중(若第一句中) 운운 : 한 마디〔一言〕에 돈오(頓悟)하는 사람은 조불(祖佛)을 스승으로 하지 않고 조불의 스승이 된다는 것.

* 6) 자구불요(自救不了) :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대승찬》에서는,「세간의 수많은 어리석은 이들은 도(道)를 가지고 다시 도를 구하니 모든 이론을 찾아 헤매면서도 스스로조차 구하지 못하네」라고 되어 있다


〈14-34〉

 ≪주해≫

* 1) 여하시서래의(如何是西來意)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의 줄임말.「달마께서 중국에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 이 질문은「여하시불(如何是佛)」과 함께 선(禪)의 근본정신을 묻는 선문답(禪問答)의 정형(定型)이 된다.〈10-3〉의「활조의(活祖意)」를 참조하라.

* 2) 득자시불득(得者是不得) : 자신의 절대적 주체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득, 부득이 소용이 없다는 뜻.《반야심경》의「고(苦)도 집(集)도, 멸(滅)도 도(道)도 없으며, 지(智)도 없고 득(得)도 없다.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이다」라는 명구(名句)를 상기하라.

* 3) 조사언 돌재장부(祖師言 咄哉丈夫) 운운 : 조사는 보리달마를 가리킨다. 현존하는 달마의 어록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는다.「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면 그대를 위해 편안케 해주리라」는 이야기의 변형인 듯 하다.「돌재장부(咄哉丈夫)」는 경전에도 보이는 말이며(《법화경)》五百弟子授記品), 상대방을 질타할 때의 표현이다.「장두멱두(將頭覓頭)」는〈10-7〉에 보이는 야쥬냐닷타의 고사(故事)를 가리킨다.

* 4) 언하(言下) : 법문을 듣는 즉시.

* 5) 회광반조(回光返照) : 회광반조 이 말에 원래 석양 무렵 광전의 반사를 의미한다. 두보(杜甫 712~770)의 시(詩)에「반조(返照)」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듯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저녁햇살에 비추어질 때 그 숨은 모습을 드러냈다. 한낮의 작열하던 태양이 그 그림자를 거두어 갈 때의 고요함〔寂〕속에서 비춤〔照〕은 더욱 사물의 선명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때 비춤의 의미는 더욱 강화된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비춰지던 것이 스스로를 비출 수 있는 힘을 되찾아서 바치는 것을 되비추는 것이다. 이 회광반조(回光返照)는 비추는 햇빛도, 그 비춤을 받는 대상도 모두 일여(一如)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의 영성적(靈性的) 자각을 상징하게 된다.《조당집》18의 앙산(仰山)의 장에는,「그대들이여, 모두들 각자 회광반두(回光返頭)하여 자신을 찾을지언정 나의 말만을 기억하지 말라」라는 상당법어가 실려 있다.


〈14-35〉

 ≪주해≫

* 1) 화도설출(話度說出) : 이야기를 지껄인다는 당시의 속어(俗語).

* 2) 허다부재정(許多不在淨) : 부재정(不在淨)은「더럽다」는 말.「쓸데없다」]는 뜻.

* 3) 시장엄문불사문(是莊嚴門佛事門) 운운 : 밖으로 꾸며내는 수행이나 공덕을 좇는 보시는 제이의(第二義)적인 불법이라는 뜻.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 보리달마와 양무제(梁武帝)의 회견에서도 같은 취지의 법문이 나오고 있다,

  서기 527년경 중국 남부에 도착한 보리달마는 황제의 측근들에 의해서 수도로 초치되어 독실한 불교신자인 양무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양무제는 수수께끼의 인물인 인도 출신의 사문(沙門)에게 물었다,

  「짐(朕)이 즉위한 이래 무수히 많은 절을 지었고, 수많은 경전을 출판하여 보급하였소. 그리고 수많은 스님들의 수행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덕은 실로 크지 않겠소?」

  「전혀 공덕(功德)이 되지 않습니다.」

   달마의 퉁명스런 대답에 약간 당황한 양무재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는 거요?」

  「그러한 것들은 인천(人天) 속세에서의 조그마한 행위이고, 과보(果報)가 조금씩 새어나오는 옹달샘에 불과한 것,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그들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한 진정한 공덕이란 도대체 무엇이오?」

  「청정한 지혜는 현묘(玄妙)하고 원융(圓融)한 것이어서 실제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덕은 세간적인 방법으로는 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양무제는 거듭해서 물었다,

  「그러면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오?」

  「그것은 아무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는 공(空)일 뿐이요.」

  화가 난 양무제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짐을 대하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모르겠소.」

* 4) 지재지계(持齋持戒) : 계율을 세밀히 지키며 수행을 신중히 한다는 뜻. 지재(持齋)는〈13-36〉을 보라.

* 5) 경유(擎油)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고귀덕왕품(高貴德王品)의 고사(故事). 왕의 칙령에 의하여 발우(鉢盂)에 기름을 가득히 담아 25리나 되는 복잡한 길을 기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통과하는 것과 같이 신중하고 여법(如法)하게 수행에 전념한다는 것.

* 6) 입도불통리(入道不通理) 운운 :《보림전(寶林傳)》3에 보이는 제 15조 가나제급(伽那提汲) 존자의 게(偈). 존자가 인도의 비라국(毘羅國)을 심방했을 때, 79세의 장자가 아들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의 정원에 있는 노목(老木)에서 맛있는 나무버섯〔木耳〕이 솟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게를 설했다. 이 부자(父子) 두 사람은 일찍이 성의를 다해서 한 비구(比丘)를 공양했는데, 그 비구가 불법(佛法)을 깨닫지 못한 과보로 그 몸을 나무버섯으로 바꾸어서 계속 그 빚을 갚았고, 그 빚 갚는 일도 장자가 팔십일 세가 되어야 마친다고 말한 이야기. 장자의 둘째 아들은 뒤에 존자의 계자가 된 제 16조 라후라다(羅候羅多) 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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