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상당1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15:20
상당  18(끝)


9-2 삼현삼요(三玄三要)

師又云, 一句語 須具三玄門이요 一玄門 須具三要 有權有用이라 汝等諸人 作麽生會 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또 말씀 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어서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진실한 자리에는 본래로 먼지 하나 두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적적하다.

이론이나 문자를 세우지도 않는다.

닦고 깨닫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섭수하고 교화불사를 일으키는 마당에는 한 가지 법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래서 좀 어수선 하다.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

임제스님은 삼현삼요에 대해서 위의 말씀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구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우선 “한마디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했는데 그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과 구중현(句中玄)과 체중현(體中玄)이다.

현중현은 말의 그 자체로서의 진실이다.

구중현은 말의 인식 위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체중현은 말의 실천 속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우가 한 마디의 말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다.

한마디 말에 공관(空觀)의 입장과 가관(假觀)의 입장과 중도관(中道觀)의 입장이 있다.

진제(眞諦), 속제(俗諦),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도 있을 수 있다.

한마디 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이 다 가능하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 가지로 현묘하고 유현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났을 때 또는 제자들을 훈도할 때 말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현문(一玄門)에 반드시 삼요(三要)가 갖춰져 있다는 삼요란 세 가지 중요한 것,

세 가지 요점, 즉 본질[體)과 현상[相]과 그 작용[用]이다.

이 본질과 현상과 작용이란 무슨 물건 어떤 말에도 다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을 제접할 때 근기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얕고 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구 중에 삼현문이 있고, 일구 중에 구요(九要)가 갖추어져 있다.

다시 모르는 말 한마디 더한다.

제 일구를 운문종(雲門宗)으로 치면 다종다양한 부류의 근기들을 단칼에 다 잘라 버린다.

조동종(曹洞宗)으로 치면 바른 위치다.

그리고 소탕이다. 제 이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하늘과 땅을 다 덮어 버린다.

조동종으로 치면 치우친 지위다. 그리고 건립이다.

제 삼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아 간다.

동종으로 치면 모든 것을 함께한 가운데 이른 것이다. 

임제록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삼구와 삼현과 삼요다.

하지만 순전히 엉터리다.

그렇다면 엉터리가 아닌 강설은 무엇인가.

이제 여러 분도 다 아는 “할”이다.

“할”을 하는 나다.

활발발한 무위진인이다.

오로지 이 사실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