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 16
8. 집안과 길거리
上堂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되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離家舍호되 不在途中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앞에서는 치우친 견해를 들추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이면으로는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보다 조화로운 경우를 말하고 있으나 실은 앞의 사람은 전수문(全受門)의 삶이고,
뒤의 사람은 전간문(全揀門)의 삶이다.
긍정과 부정의 관계다.
본문을 달리 표현하면, 예컨대 한 사람은 언제나 바깥에 있으면서 집안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집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경우가 실은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
이(理)와 사(事)의 두 면을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잘 처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다 치고,
이와 사 어느 것도 관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사를 한 가지도 관계하지 않는 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할까?
실은 이와 사에 있어서 어느 면에서도 그와 같이 물들고 집착하지 않은 자세[中道]가 되어야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들의 설법원칙인 중도(中道)에 기준하여 해석한 것이다.
본래 이 내용의 원형은 이렇다.
문수는 언제나 집안일[理·智]을 담당하지만 바깥일[事·行]에도 어둡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바깥일을 담당하지만 집안일에도 어둡지 않다.
좌와 우, 아내와 남편, 이판과 사판, 국민과 정치인, 동양과 서양,
물질과 정신 등등 모든 상대적인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中道]를 뜻한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부처님이라고 할 때 그를 문수와 보현의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