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1/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15:48
시중  1


시중(示衆)


강의 ; 시중이란 대중들에게 보이다.

대중들을 위하여 가르치고 훈시하다 라고 한다.

또 상당시중도 있다.

소참시중도 있고 대참시중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시중은 상당(上堂)과는 격을 좀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과 시중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다.

임제록에서의 예를 쉽게 설명하면, 형식도 상당은 반드시 법상에 높이 올라가서 한다.

시중은 책상을 놓고 의자에 앉아서한다.

칠판에 판서도 해 가며 강의 하듯이 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법어는 극치의 법을 드러내어 드날리는, 종지를 거량하는 식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

종사(宗師)가 당신이 드날릴 법을 드날리면 그 다음은 청중의 책임이다.

그러나 시중은 좀 더 친절하고 자세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시중에도 상당법어 같은 법문이 있긴 하지만 대개는 친절하게 설명하여 일러준다.

청중이 이해를 못하면 설법자는 안타까워한다.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도 맞춰야 하므로 그만치 청중이 못 알아듣는데 대한 책임도 있다.

성철스님의 법어집 중에서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상당에 해당되고 백일법문(百日法門)은 시중에 해당된다.

세존이 영산회산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상당법문이고,

경전을 설하신 것은 시중법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10-1 사료간(四料揀)

師晩參 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이요 有時奪境不奪人이요 有時人境俱奪이요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임제스님이 저녁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는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강의 ; 만참이라는 저녁법문은 아침에 하는 조참(早參)과 시간에 구애 없이 자유로운 시간에 하는 소참(小參)과 같이 별다른 형식이 없다.

매우 간소하다.

그러나 진지하고 알차다.

아주 길게도 한다.

임제록의 중심이 되는 법문이다.

강의나 경전해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사료간은 시중법문의 서론에 해당한다.

사료간이란 사람들을 제접할 때 법을 쓰는 네 가지 방법이다.

전광석화 가운데서 일기일경(一機一境)을 드날리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을 드려 헤아리고 사량하고 조작하고 건립하는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 격이다.

하지만 부득이 해서 자비를 베풀어서 펼쳐 보인 것이다.

잘 살펴볼 일이다.

상당법어가 끝나고 시중법문에 들어서면서 여러 근기의 학인들을 제접하면서 전계될 몇 가지 경우들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어쩌면 양해를 얻자는 뜻도 있다.

상당법어에서는 전광석화 속에서 바늘을 꿰지만 시중에서는 촘촘한 그물을 드리워 크고 작은 고기들을 많이 건져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지식이 찾아오는 학인의 입장은 부정하고 모든 경계는 그대로 두면서 그를 깨우친다.

둘째는 경계는 부정하고 학인은 그대로 두면서 그를 깨우친다.

셋째는 학인도 경계도 다 부정해 버리고 그를 깨우친다.

넷째는 학인도 경계도 다 인정하면서 그를 깨우친다.

아래에 일문일답이 있다.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 師云, 煦日發生鋪地錦이요 孾孩垂髮白如絲로다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 師云, 王令已行天下徧이요 將軍塞外絶煙塵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 師云, 幷汾絶信하야 獨處一方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떠오르니 땅에 비단을 편 듯 하고,

어린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희구나.”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명령이 이미 떨어지니 천하에 두루 시행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을 할 일이 없어 졌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강의 ; 첫째, 주관[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객관을 살리면,

다시 말해서 나를 완전히 비우고 상대를 모두 인정해 주면 세상은 더 없이 아름답다.

아주 좋은 세상이다.

살만한 세상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막 태어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하다.

거기에 무슨 시시비비가 있겠는가.

둘째, 남을 부정하고 나를 내 세우면 일인독제(一人獨制)다. 나라에는 임금 한 사람이 있고 절에는 주지 한 사람이 있다.

요즘은 아니지만 요순시대에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왕의 명령 하나로 전쟁까지도 멈춘 상태다.

세째, 너를 부정하고 나를 부정했을 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국민은 국민이다.

각자 따로 따로 유아독존이다.

래서 변두리 지방에서는 중앙과 절교하고 딴 살림을 사는 꼴이다.

조정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꼭 나쁜 법은 아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다.

네 번째,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므로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격이다.

그래서 왕은 궁중에서 정치를 잘하고 백성은 백성대로 태평가를 부른다.

네 가지가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다.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사람을 제도할 때 근기와 상황에 맞춰서 법을 쓰는 표준이 된다.

명안 종사에게 지나치게 일구법문이나 방, 할 같은 것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다.

만약 한결같이 최상승 법문만을 거량하면 법당 앞에 풀이 한 길이나 자랄 것이다.

아마도 고용을 해서 풀을 뽑아야 하리라.

그러나 요즘은 너무 지나치게 세속적인 대중들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

비불교적요소가 너무 많다.

불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너무 지나치다. 잘 살펴보고 반성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