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복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이 마치 폭류와 같으니 아라한의 자리에서 버려진다.
(해 설)
이 송문(頌文)은 이미 3송에서 아뢰야식의 체성을 밝힌 데 이어 아뢰야의 성질을 밝힌 구(句)이다. 아뢰야의 성질이란 범부로부터 불보살에 이르기까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품성을 말한다.
인간은 품성에 따라 불보살이 되기도 하고 고뇌중생이 되기도 한다. 만약에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염원한다면 고뇌의 근원인 마음의 체와 성(性)을 깨달아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의 체성을 깨닫고 나면 고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품성은 무한해서 뜻을 발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나 본래 생멸이 없는 큰 길은 버리고 작은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래장을 설하시어 아뢰야가 천하의 주인임을 밝히신 것이다.
무부무기(無覆無記)
무부는 물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번뇌가 일지 않고 경계에 부동함을 말하고 무기는 그 원인이 선악에 속하지 않고 결과 또한 고(苦)와 락(樂)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제8 아뢰야의 성질은 물들지 않으므로 번뇌가 없고 선악이 없으므로 인과가 없고 인과가 없으므로 고락을 받지 않는다. 아뢰야의 성질이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 없고 업을 받는 일도 없다.
다만 여래장 또는 진여법성이라고도 하는 제8식은 맑고 깨끗하여 자체의 성(性)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선악을 지어 훈습한 습기를 섭수하여 보존하여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촉등(觸等)
송문 제2구에서 말한 촉등은 제8식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로서 촉·작의·수·상·사(觸·作意·受·想·思)를 말한 것이니 곧 오변행심소이다.
오변행심소는 제8식의 심소로서 말하자면 감각을 일으키는 자리가 촉(觸)이요, 분별하고 변화하는 자리가 작의요, 선악의 경계를 수용하는 자리가 수(受)요, 면전의 경계를 분별하여 생각하는 자리가 상(想)이요, 스스로 사량을 일으키는 자리가 사(思)이다.
이러한 오변행심소도 역시 작용은 하되 물들지 않고 장애도 받지 않으며 인과를 짓지 않으며 고락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오변행심소의 작용도 무부무기이다. 이렇듯 아뢰야식은 심체가 무부무기요, 작용도 무부무기여서 본래청정이라 하고 본래청정하므로 일체만법에 상응하고 일체만법에 상응하므로 심왕(心王)이라 하는 것이다.
심왕이 청정하므로 심소도 청정하여 체와 성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무한하여 중생의 식견으로는 가히 알 수 없어서 불가지(不可知)라 한다. 제8식의 한계를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8식의 체성이 본래 없고 오직 만법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8식은 일체법과 모두 상응하면서도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법이 장애되지 않는 8식의 한계를 어찌 중생의 식견으로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물들지 않고 전변하지 않는 자리에서 8식의 체와 성을 요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항전(恒轉)
항전이란 항상하면서 변화한다는 뜻이다. 8식의 마음은 불생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부지불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화의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6식의 전념과 후념의 변화는 누구나 흔적을 느끼지만 8식의 변화는 미세하여 변화의 상황을 겉으로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폭류(瀑流)
폭류는 급류하는 물이라는 뜻이다. 물의 흐름은 표면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나 안으로는 흐름이 급속해서 멈춤이 없다. 8식도 이와 같아서 외관상으로는 생각의 실처를 알 수 없으나 안으로 끊임없이 분출되어 나오는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는 8식의 마음을 폭류에 비유한 것이다. 8식은 6식의 업인과 7식의 번뇌가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8식에 함장되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어서 항전하기를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8식이 항전함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제8아뢰야식의 실체는 상주불멸하여 본래 생사가 없어서 육신이 멸할 때 6식과 7식만이 따라서 멸하고 8식은 불멸한다. 불멸할 뿐 아니라 불변하기 때문에 마치 금(金)으로 가락지나 목걸이를 만든다면 형상은 변했어도 금의 실체가 변하지 않듯이 육신이 윤회를 계속한다 해서 8식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둘째, 7식은 때로 선악의 업을 지어서 선악의 습기가 종자가 되어 8식에 함장시켜 다음 과(果)를 받게 하므로 항전의 뜻이 있고 이를 업인의 습기가 진행한다는 뜻으로 진(進)이라고도 한다.
셋째, 8식 안에 훈습되어 성숙된 종자의 수량은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자류(自類)와 같은 외연(外緣)을 기다려 서로 합하여 외연이 충족되면 현행하다가 연(緣)이 다하면 점차 소멸되므로 이를 출(出)이라 하여 업인이 다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8식은 업인에 일진(一進)하고 업인에서 일출(一出)함을 반복하기 때문에 항상 불멸하는 뜻으로 항(恒)을 쓰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전(轉)을 써서 항전이라 했다. 이러한 8식은 외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는 폭류처럼 변한다.
아라한(阿羅漢)
아라한은 성문4과 중 제4위에 해당되며 증과하는 최상의 위치가 된다. 아라한과가 수행자의 최상의 위(位)에 해당되지만 아직 소승에 속하는 것은 비록 견혹과 사혹을 타파하여 밖으로 경계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나 보리심을 발하여 중생구제의 대원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범어로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① 살적의(殺賊義) : 수행자에게 가장 큰 적(賊)은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적(賊)을 파해 없앤다는 뜻이다.
② 응공의(應供義) : 아라한은 이미 모든 루(漏)가 멸하여 덕이 수승하여 세상에 존경의 대상이 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③ 불생의(不生義) : 불생불멸하는 열반을 증득하여 다시는 생사의 길에 들지 않으므로 불생이라 한다.
사(捨)
사(捨)는 7식의 업인에 물들지 않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위(捨位)라 한다. 사(捨)는 집착을 버리고 외경에 부동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전환의 뜻이 있으니 탐진치를 집착하던 마음이 탐진치를 버리고, 유루를 집착하던 마음이 무루를 증득하여 범부의 식견을 버리고 성현의 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뜻한다.
성문4과의 수행인이 인식의 대전환을 성취하여 아라한위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한결같이 아공관을 닦아야 한다. 아공관이란 아뢰야의 실체가 공함을 깨닫고 마음이 분상에서 마음이란 영원함이 없어서 무상하고 법의 분상에서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서 무아임을 인식하므로 본래 내가 없음을 관함을 말한다.
이렇듯 아공관을 닦아 아집과 법집의 이집(二執) 가운데 아집을 끊고 번뇌장과 소지장의 2장(二障) 가운데 번뇌장을 끊는다. 이를 버린다는 뜻으로 사(捨)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나(我)는 버렸다 하더라도 진리를 집착하여 주창할 사상을 고집하고, 바깥 경계에 순역함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이 부동하지 못하고, 악(惡)은 끊었으나 선종자(善種子)가 남아 있어 다시 과(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이 위(位)이다.
수행자는 오직 아공의 이치를 깨달아 분별아집을 끊고 번뇌장을 끊은 후에 다시 구생아집(俱生我執)을 끊고 소지장을 끊어 선악을 모두 초월하여 일체법에 부동하고 허덕임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발심해야 한다.
본래 청정한 8식이 상황에 따라 폭류처럼 변화하지만 아라한의 위에 이르러 번뇌와 집착이 모두 쉬어서 고락의 과(果)를 받지 않고 생사에 물들지 않음을 사(捨)라 한 것이다.
'유식30송(唯識三十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식30송-7/혜거스님 (0) | 2007.09.21 |
---|---|
유식30송-6/혜거스님 (0) | 2007.09.21 |
유식30송-3-2/혜거스님 (0) | 2007.09.21 |
유식30송-3-1/혜거스님 (0) | 2007.09.21 |
유식30송-2/혜거스님 (0) | 2007.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