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唯識三十頌)

유식30송-3-2/혜거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21. 17:04
제 3 송 - Ⅱ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요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전편에서 제8식의 정상(情狀)을 요약해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송문(頌文)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불가지라고 한 3자는 가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8식이 지니고 있는 집수와 8식의 자리[處]와 요별[了]을 가히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집수라는 말은 지니고 수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니고 수용하는 것을 알 수 없다 한 것은 8식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8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한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처(處)는 소처로서 마음자리를 말한다. 이 자리는 오묘하고 불가사의해서 그 실처를 범인은 알 수 없음을 뜻한다. 요(了)는 요별이니 곧 분별해서 아는 힘이다. 이 또한 극미하고 미세하며 광대하고 무변하여 일체만물의 장단호오(長短好惡)를 가려내는 능력으로서 역시 범인의 소견으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불가지집수, 불가지처, 불가지요의 뜻을 요약해서 불가지집수처요(不可知執受處了)라 한 것이다. 이를 다시 세분해서 한 단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불가지(不可知) 
가히 알 수 없다고 한 이 말은 집수와 처(處)와 요(了)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는 모두 8식의 경계[소연경所緣境]와 움직임[행상]으로서 상응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을 요달해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라 말한 것이다.

집수(執受)
지니(執)고 수용(受)한다는 뜻이다. 집수의 한계가 무한해서 이를 알 수 없는 8식은 마음의 주체이며 스스로 경계를 요별할 수 있는 능연(能緣)이라 한다. 8식의 능연인 집수가 있으므로 소연(所緣)의 경계를 인해서 마음이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가사의해서 가히 알 수 없는 8식의 집수 능력은 8식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음과 밖에서 반연해 오는 경계가 일치해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집수라 한다.
처(處) 
불가지처(不可知處)인 처(處)는 아뢰야식이 작용하는 처소로서 안으로는 그 공능을 알 수가 없고, 밖으로는 산하대지, 우주만유가 8식의 소연처가 아님이 없다. 8식이 바깥 대상을 반연함에 각각 업에 따라 감수하는 것이 동이함이 있으니 이를 공업과 별업이라 한다.

요(了)
'불가지요'인 요(了)는 요별, 변별, 분별 등의 뜻으로 객관적인 정황을 분별하는 견분(見分)의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낱낱의 식(識)에는 보는 것[견분]과 보이는 것[상분]이 있어서 아뢰야도 역시 식이므로 견분이 있고 요별이 작용이 있다.
 
아뢰야식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움직임(행상)이 미세하여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범부는 선·악을 일으키는 6식으로 작용을 하므로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 6식과 7식의 작용이 쉬어서 생사가 끊어진 자리가 아뢰야이므로 6식과 7식으로 마음을 쓰는 중생은 8식의 실처와 분별의 한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가지처요‘라 한 것이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업혹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5변행심소만이 상응한다. 무소불능의 변행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 4일체(四一切)라고 한다.

① 변일체성(遍一切性) 
선(善)·악(惡)·무기(無記) 삼성에 두루함을 말한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라 하고 다시 여기에서 선·악·무기에 두루한다 함은 8식이 모든 심소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식은 선·악의 씨를 지니지 않으므로 선·악과 더불어 상응하지는 않는다.

② 변일체지(遍一切地)
모든 경계에 두루한다는 뜻으로 변삼계구지 또는 변삼지(遍三地)라고도 한다. 이는 8식이 삼계에 두루 응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③ 변일체시(遍一切時) 
마음 곧 아뢰야식이 존재할 때 모든 곳 모든 때에 두두함을 말한다.

④ 변일체구(遍一切俱)
8식은 육도에 능입하므로 범부업을 지으면 범부가 되고 보살업을 지으면 보살도를 이루기 때문에 일체구(一切俱)라 한다.

위에서는 8식의 공능인 집수, 처(處), 요(了)를 요약했고, 다음엔 8식의 심소(心所)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5변행심소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촉(觸)
촉은 6근, 6식, 6경, 3법이 화합하여 감각을 일으킴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촉(觸)은 삼화(三和), 분별), 변역이라 설명하고 있다. 삼화는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여 의식의 감각이 일어남을 뜻하고, 분별은 감각이 일어난 후에 분별이 일어남을 뜻하고, 변역은 분별의 상황에 따라 변역이 있게 됨을 말한 것으로 이는 촉(觸)이 심소의 첫째가 되어 모든 심소의 의지처가 됨을 뜻한다.

작의(作意) 
작의는 반응을 뜻한다. 근(根), 경(境), 연(緣)이 삼화를 이루어 분별하고 변역하는 반응을 일으키고 경각심을 내어 주의하고 삼가는 등 경계에 대해서 한번 재고하는 심소이다.

수(受) 
수는 수용의 뜻이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를 수용한다는 말이다.

상(想) 
상은 앞의 경계를 헤아려서 각종 이름[명언名言]을 붙여 개념을 존재하게 하는 심소이다.

사(思) 
사는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작위하게 하는 심소로서 행동 이전의 사상이며 사고력이며 선·악을 일으켜 모든 업을 짓게 하는 심소이다.

이상의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는 일체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변행심소라 하고 변행심소이기 때문에 제8식과 7식, 6식 등 모든 식(識)과 더불어 상응하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 중에서도 제6식과 상응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작용하므로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며, 살피고 판단하며, 수용하고 배척하며, 동작을 일으키고 정지하며, 차고 더움을 분별하며, 견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려내는 작용을 약간의 오차 없이 충실하게 해낸다.

그러나 7식과 전5식(前五識)으로 더불어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하고 작용은 거의 미세하다. 가령 말하자면 눈으로 볼 때에는 눈이 볼 뿐이고, 귀로 들을 때에는 귀가 들을 뿐이고, 코로 냄새 맡을 때와 입으로 먹을 때,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도 역시 상응해서 알 뿐 별도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5변행심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자리가 6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8식과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할 뿐 작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8식은 종자를 보장하고 있을 뿐 능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뢰야식은 생명의 근원이며 종자의 창고로서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하여 5변행심소와 더불어 상응하되 작용하지 않고, 윤회해서 변역하되 부동하는 자리이다. 색수상행식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종자가 되고 선(善)·악(惡)의 구별이 없으므로 탐진치가 없다. 이는 아뢰야식이 5수 가운데 오직 사수(捨受)와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5수(五受)란 고·락·우·희·사를 말한다. 이는 모두 경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고·락은 신체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 신체적인 고통은 고(苦), 신체적인 즐거움은 락(樂)이라 하고, 우·희(憂喜)는 정신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서 정신적인 괴로움은 우(憂), 정신적인 기쁨은 희(喜)라 한다.

사(捨)는 순하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신체적으로는 고통(苦)과 즐거움(樂)을 여의고 정신적으로는 근심(憂)과 기쁨(喜)을 여의었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수(捨受)라 한다. 제8 아뢰야식은 경계를 인식하여 선·악을 구별하지 않으며, 고통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만법의 근원이면서도 만법을 간섭하지 않고 생멸의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불종자가 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8식의 심소는 언제라도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부처님법을 만나면 성불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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