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승행록(緇門崇行錄)
어려서 실없는 일과 노는 것을 끊다(幼絶 掉)
당(唐)나라 현장법사(玄奬法師)의 성은 진씨(陳民)며 한(漢)나라 태구공(太丘公)의 후손이며 형 진소(陳素)를 따라 출가하였다.
나이 열한살에 유마경(維摩經) 법화경을 외었으며, 탁월하고 굳세고 방정하여 시류(時流)에 흐르지 않았었다.
사미(沙彌)들이 심한 말로 떠들며 노는 것올 보고서“경전에서 말씀하지 않았던가? 무릇 출가한 사람은 무위법(無爲法)을 해야 한다고. 어찌 이제 다시 어린아이의 장난을 하랴. 이는 백년의 세월을 부질없이 흘러 보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스님의 덕의 그릇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았다.
찬탄하여 말한다.
어린 나이에 성대한 덕을 갖춤은
하늘에서 받은 혼자의 훌륭함이 아니라
생각컨데 속세의 습관을 잊지 않음이니
이것을 안다면
곧 내생의 일을 오늘하는 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주 : 현장법사(玄奬法師)
현장법사는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이다. 일찍 출가하여 교학을 열심히 연구하다가 마침내 서천(西天)으로 가서 직접 불교를 배우기로 결심하여 스물아홉살(A.D629년貞觀三年 冬)에 당나라를 떠났다. 4년여의 여행끝에 인도에 도착하여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러 나란타사(那蘭陀寺)에 이르러 계현논사(戒賢論師)에게서 수학하여 유식논에 정통하게 되었다. 정관(貞觀) 19년(A.D645년)에 당나라로 돌아오니 17여년 동안의 긴 세월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소설화한 것이 유명한 서유기 (西遊記)이다. 중국에 돌아와서는 범본(梵本)의 번역에 힘써 75부 1335권이나 되었고 유식론(唯識論)을 천양하여 중국에서 법상종을 개창하였다. A.D 664년 옥화궁(玉華宮)에서 입적하셨다.
2. 시자를 엄중하게 훈계하다(嚴訓侍者)
당(唐)나라의 지정(智正)스님은 정주(定州)의 안회현(安喜縣) 사람이다.
개황(開皇) 10년에 칙명을 받들어 승광산(勝光山)의 인수사(仁壽寺)에 머물었었다. 다시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로 들어가 연법사(淵法師)와 도반이 되어 28년간을 일체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제자에 지현(智現)이라는 이가 있어서 법과 가르침을 엎드려 받들었다.
지정스님이 저작할 것이 있어 단정히 앉아서 생각을 하면 지현은 종이와 붓을 잡고 서서 시중을 들며 구술함을 따라 써나갔다. 몇 년 동안 처음부터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발이 아파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땅에 엎어져 버렸다.
그러자 지정스님은 꾸짖으며 말하였다.
“옛 사람은 한 발만 딛고 철일 동안 서서 정진하였다. 너는 지금 겨우 서자마자 자빠진 것은 마음이 경솔하기 때문이다”
그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찬탄하여 말한다.
땅에 옆어져도 오히려 꾸짖음을 더하니
너무 심하다 하지 않겠는가.
아아!
옛 사람들이 몸을 잊고 법을 위함이여
혜가대사는 허리까지 눈이 쌓이도록 섰었고
정자(種子)의 제자들은 눈이 땅에 석자나 쌓이도록
섰었으나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요즈옴은 앉아서 도(道)를 논의하면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싫어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승조스님은 선정을 돌아보지 않자
그 책이 스스로 없어졌다고 한다.
엄한 스승의 도가 폐지된지가 오래이구나
슬프다.
3. 그릇을 깨뜨리다(破壞酒器)
당(唐)나라의 현감(玄鑒)스님은 택주(澤州)의 고평현(高平縣) 사람이다. 성품은 인정이 두렵고 강직하며 잘못된 법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말하며 꾸짖고 나무라며 강한 사람이 막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였다. 절을 수리하고 짓는 일이 자주 있었다. 기술자들이 득실거리며 많았으므로 혹 그들에게 술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마다 중지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짓는 절은 반드시 법답게 할 것이다. 차라리 절을 짓지 않을지언정 술 마시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 때 청화사(淸化寺)에서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경영하였다. 그 주(州)의 호족(豪族)인 손의(孫義)란 사람이 술 두 수레를 보내오자 현감스님은 즉시 술독을 깨뜨려 버리니 흘러 땅위에 질퍽하였다.
손의가 크게 성내어 다음날 그에게 괴로움을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칼로 찌를듯이하니, 이에 깨닫고서 몸소 나아가 참회하였다.
찬탄하여 말한다. 요즈음 시대에 기술자와 일꾼들에게 음식을 줌에는 술을 쓸 뿐만 아니라 다시 비린내 나는 고기까지 준다.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안치하는 상량식에는 귀신에게 푸닥거리하고 손님들에게 잔치까지 하는데 이르러서는 또 다시 정원(丁桓)의 칼날을 붉게 한다. 천당을 아직 가지 않았는데 지옥을 먼저 이룬다 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직접 경영과 수선을 맡은 이는 마땅히 뼈아프게 계율로 하여야 하리라.
4.전당을 힘써 호위하다(力衛殿堂)
당(唐)나라의 혜주(惠主)스님은 시주(始州)의 영귀현(永靜縣) 사람이다.
율학(律字)에 오로지 정진하며 청림사(責林寺)에서 살았다. 그때 능양공(陸陽公)이 익주에 부임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심이 적었었다. 백여 마리의 짐 실은 말을 끌고 절로 들어와서 불전 강당 승방에 매어두었으나 감히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혜주스님이 장원(莊園)에서 돌아와 그 더럽고 잡됨을 보고 곧 방에 들어가 절을 떠나려고 석장과 세벌옷올 가지고 나오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오늘이로다”
그리고는 석장을 들고 노새를 치니 일시에 거꾸러 엎어지는 것이 죽은 것과 같았다. 혜주스님이 손을 높이들어 노새를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니 고을의 관리들이 크게 놀랐다.
혜주스님올 잡아놓고 상황을 보고하니 능양공은 기뻐하며 말하였다.
“율사(律師) 덕분에 나외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부수었으니 매우 큰 이익이로다”
그리고 침향 열근과 비단 명주 열단(十段)올 보냈다 후에 서울로 돌아가서는 보살계를 받았다.
5. 선서(仙書)를 받지 않다
당나라 법상(法常)스님은 양양(襄陽) 사람이며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며, 납의(納衣)와 주머니와 발우로법답게 실행해 나갔다. 정원(貞元) 년간에 천태산에서 매산(梅山)으로 갔다.
매산이란 매복(梅福)이 옛날에 은거했던 곳이다. 법상스님이 여기에서 머물러 살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범상한 사랍이 아니다. 이 돌 창고 가운데는 성스러운 책이었다.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것이다”
법상스님이 말하였다.“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승조(僧稠)스님은 선경(仙經)을 돌아보지 않자 그 책이 스스로 없어졌다고 한다. 나는 오직 열반을 낙으로서 즐거움을 삼을 뿐이라”
이에 신인(神人)이 탄복하였다.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마음을 거둔다면 심지가 단정하고,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법을 가지면 법문이 서게 된다.
6. 조서(詔書)에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다.
당나라 지실(智實)스님이 낙양 근처에 살때였다. 태종이 낙양에 행차하여 도사(道士)들의 지위를 승려들의 앞에 열지어 서게 조서를 내렸다. 서울과 시골의 사문(沙門)들이 항의하였으나 유사(有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실스님은 황제가 탄 가마를 따라가며 표문(表文)을 아뢰고 그 잘못된 점을 심하게 논하였다. 황제는 재상인 잠문본(岑文本)으로 하여금 황제의 칙령의 뜻을 설유하여 그를 보내게 하였다.
지실스님이 고집하며 황제의 조서를 받들지 않자 황제가 진노하여 지실스님을 조당(朝堂)에서 매를 때리게 하고, 그에게 속복을 입혀 밖으로 유배케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가 진퇴(進退)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고 나무라자 지실스님은
“나도 처음부터 형세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투었던 까닭은 후세에 대당(大唐)에 스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함 때문이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7. 세속 일을 담론하지 않다
송(宋)나라 광효안(光孝安)선사는 청태사(淸泰寺)에 머물고 계셨다.
선정(禪定)에 들어서 두 스님이 기둥에 기대어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스님이 이야기하는데 처음에는 천신(天神)이 옹호하고 호위하더니 한참 잇다가는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다음에는 악한 귀신이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마침내는 두 스님의 발자취까지 쓸어버렸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두 스님이 처음에는 불법(佛法)을 의론하고 다음에는 오랫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말을 하였으며 끝으로 세속적인 살림살이에 대해 의논했기 때문입니다”
안스님은 이로부터 종신토록 세상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찬탄하여 말한다.
옛 사람은 생사를 위해 행각하였다. 스승과 도반을 만나기만 하면 쉬지않고 힘써 이 일을 의논하였다.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논의하였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종일토록 잡된 말만 한다. 두 스님과 감은 경우를 구해 보아도 다시 얻을 수없다.
귀신이 곁에 있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리오.
아아 ! 두렵구나.
총 론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승려를 육화(六和)라 하며, 인욕을 실행하므로 엄격함을 취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나, 그러나 이는 내가 말하는 바의 엄격함을 혹독하게 하는 엄격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엄격함이란 바름의 엄격함이다.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마음을 거둔다면 심지(心地)가 단정하고,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법을 가지면 법문이 서게 된다.
만약 기특함을 나타내어 칭찬을 요구하고 흉폭함을 드러내 위엄스러움을 보이는 경우는 지금의 엄격하고 바름과는 실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남자라면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주:육화(六和)
승(僧)이란 화합을 뜻하니 여섯가지 행동을 같이 함으로써 성취한다. 이를 육화경(六和敬)이라고도 한다.
1. 신화경(身和敬): 예배등의 신업(身業)을 같이 한다.
2. 구화경(口和敬) : 찬불 염불등 구업(口業)을 같이 한다.
3. 의화경(意和敬) : 신심등의 의업(意業)올 같이 한다.
4. 계화경(戒和敬) : 계법(戒法)을 같이 한다.
5. 견화경(見和敬) : 불교 이론에 대해서 같은 견해를 가진다.
6. 이화경(利和敬) : 옷과 음식등의 이익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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