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치문승행록(緇門崇行錄)-스승을 존중한 행(尊師之行)-2

通達無我法者 2007. 11. 23. 15:44

치문승행록(緇門崇行錄)

제3 스승을 존중한 행(尊師之行)

6. 정침에 맞이하고 거처하다(迎居正寢)
당(唐)나라 석상 경제 (石露慶諸:807~888 청원하 四世) 선사는 도오(道吾 :769~835 청원하 三世) 스님에게 법을 얻고 후에 유양(瀏양)의 동산(洞山)에 은거하였다.
유양에 고불(古佛)의 말씀이 있다고 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도오스님이 돌아가실 무렵에는 당신이 거느리던 대중을 떠나 경제선사에게 갔다. 경제선사는 도오스님을 정침(正寢)으로 모시고 걸을 때는 반드시 부축하고 앉으면 반드시 받들면서 공경과 봉양의 예의를 극진히 하였다.

7. 여러 해를 지내며 시자노릇하다(歷年執侍)
당나라 초현 통(招賢通)선사는 어려서 육궁(六宮:당나라 후궁(後宮)의 관명(官名)) 의 대사(大使)가 되었다.
조과(鳥果)스님에게 나아가 출가할 뜻을 말씀드리니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분연히 출가할 뜻을 밝히니 마침내 머리를 깎아 주었다.
옆에서 시봉하면서 부지런히 애를 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십육년을 지나도록 법에 대해 말씀해 주신적이 없었다. 그래서 떠나려 하니 조과선사가 물었다.
“어느 곳으로 가려는가?”
“제방에서 불법을 배우려고 합니다”그러자 조과선사가 “불법(佛法)이라면 여기에도 조금은 있지”
하시고는 포모(布毛)를 집어드니, 이것을 보고 통(通)선사가 크게 깨쳤다. 그래서 그를 포모시자(布毛侍者)라고 불렀다.
찬탄하여 말한다.
사람들은 시자가 포모 아래서 깨치는 것만 보았지 십육년동안 베를 짠 노력은 알지 못한다.
여러 해 동안의 신고(辛苦)와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눈 밝은 스승을 만난 수행자들이여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것을 바라노라.

삼가 유명을 지키다(護守遺命)

송(宋)나라 회지(懷志)스님은 금화(金華) 사람이며, 어려서 강사가 되었다. 한 참선자로 말미암아 강사직을 버리고 제방으로 다니며 참선하였다. 늦게 동산(洞山)에 아르러 진정 문(眞淨文)선사에게 법을 얻었다.
여기서 오래 머물러 있다가 하직하고 떠나려 하니 진정선사가 부촉하여 말씀하였다.
“너의 참선이 비록 남보다 뛰어난 품격이 있으나 인연이 뛰에나지 못함이 아까울 뿐이다”
회지(懷志)선사는 절을 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원주(遠州)에 이르니 그 고을 사람들이 양기산(揚기山)의 주지로 청하였으나 팔을 뿌리치면서 떠나버렸다.
상강(상江) 가에서 노니니, 담주의 목사(牧使)가 상봉사(上封寺)나 북선사(北禪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받지 아니하였다. 형악(衡嶽)에서 이십여년이나 암자를 짓고 살았고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모든일 쉬고 어리석고 어리석으니
종적이 때로는 들사슴과 함께 하네
삼베옷 벗지 않고 팔베게 하였으니
몇몇 생이나 꿈속에서 녹라암(錄羅庵:산중 토굴을 말함.)에 있었던가?”
늦게 용안(龍安)선사에게 폼을 맡겼는데 용안선사는 그를 최락당(最樂堂)에 거처하게 하니 마침내 여기서 늙은 몸을 마쳤다.
찬탄하여 말한다.
현달(顯違)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데도 유명(遺命)을 따라 모든 청을 거절하였으니 어려운 일이라 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을 좋아하여 예의를 버린다.
청하지 않는데도 가는 자가 많다.
그러고도 어찌 스승의 명을 기억했다고 하겠는가?

9. 훈계를 따라 끝내 은둔하다(遵訓終隱)

송나라 청소(淸素)스님은 법을 자명(慧明) 스님에게서 얻어 대중 처소 가운데 살면서 숨어 지냈다.
도솔 열(도率脫:1044∼1091 임제종 황룡파)선사가 그때 대중 가운데 있었다. 밤에 대화를 하다가 자명선사의 시자였음을 물어 알고서는 크게 놀랐다.
다음날 위의(威嚴)를 갖추고 참례하며 도를 물었다.
말을 주고 받으며 심성을 개발하여 마침내 대오(太悟)하였다.
그러자 거듭 도솔 열선사에게 경계를 시키며 말하였다.

“나는 복이 박하여 선사(先師)께서 수기(授記)하시어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을 허락하지

요즈음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을 좋아하여 예의를 버린다.
청하지 않는데도 가는 자가 많다.
그러고도 어찌 스승의 명을
기억했다고 하겠는가?

않으셨다. 너의 정성을 가련이 여겨 선사의 훈계를 망각하였으나 그대는 이후 절대로 나의 법을 잇지 말라”
그리고는 종신토록 세상에 그대로 숨어 살았는데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10. 병난에도 떠나지 않다(兵難不離)

원(元)나라의 인간(印簡)스님은 산서(山西)의 영원(寧遠)사람이다. 여덟살에 중관 소(中觀沼)선사에게 예배하고 사사하였다.
열여덟살 때에 원나라 군사가 영원지방을 점령하였다.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난리를 피하여 도망하였으나 인간스님은 스승인 중관스님을 시중들기가 전과 같았다.
중간스님이 말씀하기를
“나는 죽을 때가 임박하였다. 너는 지금 나이가 한창인데 무엇 때문에 옥석(玉감)을 함께 태우려 하느냐? 피하여 숨음이 마땅하다”
하니, 인간스님이 울면서 말하였다.
“인과(因界)는 어긋남이 없고 생사(生死)는 천명(天命)이 있읍니다. 어떻게 스승을 떠나서 구차하게 난리를 면하겠읍니까?”
다음날 성이 항복을 하자 원나라 장수인 사공 천택(史公天澤)은 중관스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사문(沙門)이요”
“고기를 먹습니까?”
“무슨 고기를 말합니까?”
“사람 고기를”
“호랑이나 표범도 서로의 고기를 먹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의 경우이겠읍니까?”
스승을 배반하기를 진상과 같이 심한 경우는 태양평의 시자같은 부류의 사람이 반드시 없는 것이 아니다. 하는 자도 있으며, 부처님을 버리고 도교를 숭상하기를 영소 같이 하는 자도 있다.

사공 천택 (史公 天澤)이 기뻐하면서 그를 석방하여 주었다.

·총 론
옛날의 제자들은 스승이 돌아가시면 믿음이 더욱 견고하여졌다. 요즈음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는데도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바꾸어 버린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최초의 출가가 실지로 참다운 스승에게 의지하여 생사를 결택하려고 바라지 않는 것에 연유하는 것이니, 일시적으로 우연히 사제지간의 인연이 합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 마음이 이익을 보면 스승을 바꾸고, 나쁜 친구의 유혹을 만나면 스승을 바꾸고, 그 스승의 올바른 훈계가 힘들면 스승을 바꾸어 버린다.
이 보다 심하게는 스승을 배반하기를 진상(陳相)과 같이 하는 자도 있으며, 부처님을 버리고 도교를 숭상하기를 영소(靈素) 같이 하는 자도 있다.
이 보다 더 심한 경우는 태양 평(太陽平)의 시자같은 부류의 사람이 반드시 없는 것이 아니다.
아-아 슬픈 일이다.

여기서 태양 평 (太陽平)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대양 경현(大陽警玄:942~1027)선사를 말하니 조동종 스님이다.
스님은 강하(江夏: 湖北省) 사람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중부(仲父)인 지통(智通)이 숭효사(崇孝寺)의 주지로 있었으므로 그에게 출가하였고 뒤에 양산 연관(梁山 緣觀) 선사의 법을 이었다.
세수 팔십오세 법납 육십육세로 천화하였는데 그의 법을 이은 이가 이십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대양스님은 그 제자들이 큰 그릇이 되지 못함을 늘 불만스러워 하다가 임제종의 부산 법원(浮山法遠)선사에게 피리 (皮履)와 가사 장삼을 주면서 “눈 밝은 납자가 있으면 한 사람 골라 나의 상수 제자(上首弟子)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그때 법원선사가 “스님의 시자가 있지 않습니까?” 하니 대양스님이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시며 “그 놈은 여기서 죽는다”고 하셨다.
법원선사는 대양스님의 부탁에 따라 투자 의청(投子義靑)으로 하여금 대양스님의 법을 잇게하여 주었다.
대양스님이 돌아가신 뒤 그 육신을 화장하지 아니하고 전신(全身) 그대로를 모시고 탑을 만들었다.
이 글에 나오는 대양스님의 시자는 자기에게도 법이 있는데 자기가 스님의 법을 잇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스님의 법을 이은 것에 불만을 품어 왔었는데, 대양스님이 돌아가신 뒤 십년이 지나자 그 시자가 “스님의 탑을 헐고 화장하여야 한다”고 우겨서 할 수 없이 그 탑을 헐어보니 대양스님의 모습은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대양스님의 육신을 다비하려 하였으나 타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 시자가 괭이로 대양스님의 머리를 쪼개 깨뜨리고 화장을 하니 마침내 탔다.
그 후에 관청에서 이 일을 알고 “스님에게 크게 불효한 놈”이라고 하여 중옷을 벗기고 산문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 사자는 그 길로 행각에 나서 낭야 혜각선사와 법원선사를 찾아가 뵈옵고 받아주기를 청하였으나 다시 쫓겨났다. 그러다 어느 날 깊은 산속을 가다가 세 갈래 길 (三叉路)에서 범을 만나 잡아 먹혀 버렸다.
그 말을 듣고 뒷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양스님께서 생전에 손가락 셋을 펴 보이시면서 시자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다”고 하며 대양스님을 찬탄하였다.
이와같이 대평스님의 시자는 총림에서 최악질 시자로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네 살림 형편에 있어 어디 철따라 그 철에 맞는 옷을 바꿔 입듯이 뒷짐지고 유유자적 즐길 수 있을까만,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은 유독 전면적인 그 어떤 의미 부호로 우리네 가슴을 옭아매며 꺼칠한 찬바람을 풀어 놓는다.
그렇잖아도 스산한 가슴에 자꾸만 먼 산빛우로 멀어지는 시선을 다잡아 둘 수 없는 까닭도 까닭이지만, 달리는 차창에 엇비슷이 기대어 눈팔고 있으면 다북다북 안겨오는 누우런 들판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헤실한 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인 억하 심정에 설까.
조·석간 지면마다 금메달 수가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는 굵직굵직한 활자를 대하는 것도, 시골길을 달리는 차에 중간중간 오르는 농부들 너나 할 것없이 금메달화제로 의기양양해 하며 서투른 예상과 관전평을 듣는 것조차 시큰둥하니 이 모두가 가을 탓이라면 땅바닥에 떨어져 으깨어진 홍시보다 더 난처한 일이겠다.
언제부터 이 나라가 그렇게 스포츠 왕국으로 부상되고 자처하였는지는 몰라도 좁은 땅덩어리 온통 스포츠 열기로 흠뻑 혼을 빼앗기고 있으니, 세칭 불전에서 부지런히 목탁만 두드리면 만사가 형통될 중(僧)이지만 내심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약속이나 한듯 아시안게임이 시작되는 날부터 이 나라 신문 방송엔 그나마 꿈틀거리고 모색되던 정치가 사라지고 경제가 사라지고 작은 기침들과 우리들의 그림자마저 사라져 버렸다. 오직 가을 햇살을 미친듯 뒤집어쓰고 펄럭거리는 만국기와 공허한 애국적 함성들 그리고 잔뜩 부풀은 허파들 뿐. 물론 우리의 건강한 아들 딸들이 일본놈들을 불끈들어 메어쳐버리는 것도 십억 인구라는 중공을 내돌리는 장면들은 장하고 통쾌하고 체중이 내려감직한 맛도 없지 않다. 그리고 외소한 체구의 어린 소녀의 사력을 다해 달리는 모습은 차라리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기까지도 한다. 지금까지의 국제적 관계에서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고간에 그렇게 통쾌한 맛을 국민적 감정으로 확인하였을까. 오직 스포츠라는 경쟁에서나마 간접적 우리들의 피해의식에 대한 카타르시스며 해소일 밖에. 그런 의미에선 스포츠는 영약이며 비교적 신사적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어찌 우리네 처지가 그렇게 잔치 마당이나 벌리고 온 국민이 삼삼오오로 앉아 박수만 치고 언제까지나 불카한 얼굴로 있을 계젠가.
우리의 국민성을 의심해야 할지 아니면 위정자들의 통치술의 모양이 원래 그런지 언론매체들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뭏든 우리의 사회생리를 볼라치면 한마디로 양은 솥바닥보다 더 신속하고 옅기 짝이 없다. 먼 과거까지 떠올릴 필요없이 묵은 달력 한 두장만 되넘겨 짚어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지싶다. 아시안 게임의 열기가 있기 얼마까지는 온통 깡패들의 극악한 핏투성이된 소란이, 독립기념관 화재로 인한 경악과 긴긴 통탄들이, 정치적 공방과 언론으로까지 비등했던 부천 성고문사건 미국의 윽박지름, 일본 놈들의 깐죽거림 등등… 이루헤일수 없는 사건과 사태들이 회오리쳤던 달들이 첩첩이 껴있었건만 그 어느 한번이고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온 국민적 반성과 대처에 즈음하는 해답과 다짐의 요식을 치뤘던가. 자책의 겨를도 상처에 대한 곱씹음도 그저 속수무책 그 자체로 우리는 홍수에 휩쓸리듯 떠내려가고 있는 무감각은 아닌지. 아니, 그 사실조차도 까마득히 내팽겨쳐 버린 집단적 무관심에 길들여지지는 않았는지 되살펴 볼 일이다.
역사는 지나가버린 추억담일 수도 비화적(秘話的)인 호기심을 채우는 아녀자의 속옷이 아닐진데 우리는 지나가버린 사실들에도 편리한 기억상실증으로 은폐해서는 안되리라. 법화경에 이 세계가 불에 휩싸여 타고 있다는 비유의 말씀은 중생들 개개인의 내부에 있는 미망을 일컬은 말씀이리라. 곧 우리 자신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악업들 말이다.
가을 하늘은 끝없이 높다. 무한한 햇빛이 반짝이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까닭에서일게다. 우리는 조상의 무덤을 벌초하듯 우리의 역사에 늘 벌초의식을 가져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