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승행록(緇門崇行錄)
11. 세속의 자리에는 가지 않다(不000) !
당나라의 도광(輪光)선사는 영은산( 隱山) 서쪽 봉우리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자사(지史)인 백거이(白居易)가 음식을 갖추어 놓고 그를 맞으려 하자 도광은 게송으로만 답례하고 찌 않았다. 그가 답한 시 귀절에는, 성시(城市)에 석장을 달려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놀란 꾀꼬리 화려한 누각 앞에서 지저궐까 염려해서라네. 하는 귀절이 있으니, 그가 고상하게 이룬 경지가 이와 같았다. 찬란하여 말한다.
일찌기 고덕이 조정에 있는 귀한 사람의 연회에 초청된 것을 거칠하여 옳은 게송에 이런 귀절이 있다.
어제는 일찌기 오늘을 기약하였더니
문을 나서 지팡이에 기대어 또 생각하네.
승려는 산골짜기에 거처함이 합당하며
나라 선비의 잔치에 감은 마땅치 않다네.
이는 도광스님의 고상한 경지와 앞뒤를 가릴수 없으니 같은 바퀴자국에서 나온 듯 하다. 아, 이 두 게송은 납자라면 아침 저녁으로 한번씩 �조려야 옳으리라.
12. 옷과 호칭을 받지 않다(不受衣0)
당나라의 전부(全付)스님은 오군(吳都)의 곤산(崑山) 사람으로, 어느 날 남탑용(南港浦)선사를 뵙고, 그의 심지(心地)를 밝힌 바 있다.
그 뒤에 청화전원(淸化전院)에 주석하자. 전당(鍾曺)의 충현왕(忠憲王)이 사신을 보내어 자가사(紫袈娑)를 하사하였다. 이에 전부스님은 소장(廣意)을 올리고 애써 사양하였으나, 사신이 거듭 내왕하자 또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곁치레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본받아 자기의 욕심을 펼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도 왕이 순일선사(純一神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스님은 다시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3. 하사한 옷을 힘써 사양하다(方0關藏)
오대(五代) 시대의 항초(桓超)스님은 범양(范陽) 사람으로,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경론을 이십 여년이나 강론하였다.
그 동안에 고을의 목사(救使)와 사신들이 저마다 명함을 디밀며 뵙기를 구하였으나 스님은 대부분 동자에게 명함을 거두라 하며, 접대한사람이 팩 드물었다. 이때에 군수인 이공(李公)이 조정에 아뢰고 자의(緊衣)를 하사하려 하자 이를 시(詩)로써 사양하였는데, 맹세코 경론을 전수하다 죽을지언정 명리에 오염되어 살지는 않겠노라. 는 귀절이 있었다.
이공이 다시 다른 사람을 시켜 권면하였으나, 항초스님은 확고한 그 뜻을 결코 바꾸지 않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다시 오면 나는 노룡(盧龍)의 변방 밖에 있으리라.’,
상국영왕(相國瀛王)인 풍공(馮公)도그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자 항초는 이렇게 말하였다.
“빈도는 일찍 부모를 버리고 뜻을 극복하며 수행 하였읍니다. 이는 본디 미록보살께서 이름을 알아주시옵기를 기약한 것이지 헛되이 조정의 재상들에게 전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어찌 헛된 명예와 들뜬 이익에 마음을 머물도록 하겠읍니까? ,,
이 말을 들은 풍공은 그를 더욱 정중히 여겨,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리고 억지로 자의(緊衣)를 하사하였다. 항초스님이 죽던 날에는 천악(天樂)이 허공에 가득하였는데, 이는 그가 도솔천에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찬탄하여 말한다. 황금빛 가사를 폼에 두르고 재상의 문전에 사교하는 일은, 뭇 사람들이나 깊이 원하면서 이를 얻지 못할까 염려할 뿐이다. 전부, 항초 두 공께서는 두번 네번 거듭하여 굳게 사양하면서 그런 것들이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일인 양 여겼다.
맑은 바람이 늠름하게 천고에 부니 진실로 분주하게 달리는 불꽃같은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명리에 취한 눈을 깨어나게 했다 하겠다.
14. 왕궁을 즐겁게 여기지 않다(不業王宮)
후당(佛唐)의 정변(貞辦)스님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스님은 각고의 수학을 하면서 피를 뽑아 경전을 서사하였다. 이때에 병주(井州 )에서는 외부의 승려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정변스님은 들판 밖으로 나아가서 옛 무덤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무제(武帝)가 사냥놀이를 하고 있을 때 정변은 무덤에서 나와 깃발이며 말, 수레들을 보고는 다시 무덤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제는 그를 사로잡아 그 까닭을 묻고 무덤 속을 돌아보니, 풀로 만든 방석과 책상, 벼루, 소초(廣 )만이 널려져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왕부(王府)에 들어오게 하고 공양하였으며 관태후(管太后)께서도 깊이 우러러 존중하였는데, 정변은 마침내 태후께 호소하며 말하였다.
“본래 이 몸은 불법 배우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읍니다. 이렇게 왕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은 마치 수갑을 차고있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가 자유롭게 살도록 놓아주었다.
15. 추천서롤 소매 속에 넣다(0000)
송나라의 설두현(雪竇題)선사는 지문조공(智門祚公)에게 법을 얻었다. 한번은 스님이 절동(漸東) 절서(漸西) 두 지방에 유람하려 하자 학사(學士)인 증공(曾公)이 말하였다.
“영은산( 隱山)이 천하의 명송지이며 산선사(璥輝師)는 나의 친구이다.”
그리고는 편지를 써서 중현(重顧)스님을 추천히여 주었다. 중현 스님은 영은산에 이르러 삼년 간을 대중 가운데 숨어살았다. 얼마쯤 지나서 중공이 절서지방에 봉사(奉使)하여 영은산으로 중현스님을 방문하였는데 대중 가운데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때에 스님이 천 여명이나 살았으므로 관리를 시켜 승적을 모두 뒤지게 하였다. 이에 중현스님을 찾아내어 지난날 부쳤던 추천서에 대해 묻자 스님이 소매 속에서 이를 내어놓았는데 봉함(封織)이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공의 뭇은 갸륵합니다. 그러나 행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따로 없는데 감히 추천이나 영달을 바라겠읍니까’’
중공은 크게 웃었고, 산선사( 輝師)는 이로써 중현스님을 기이하게 여겼다. 찬탄하여 말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귀한 벼슬아치의 편지를 얻으면 한 웅큼이나 되는 구슬을 얻은 듯 여기며 밤낮으로 팔리기를 구한다. 이는 설두의 가풍을 들어보지 못해서 이리라. 나는 설두스님이 염창(站唱)한 종송(宗秉)이 번갯불이 걷히듯 우뢰가 진동하듯하여, 덕산(鎭山), 임제(臨溶)의 모든 노숙(老宿)들에 양보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더니, 그의 평생을 상고해 보니 그 그릇과 도량이 원래 범상치 않았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느니라.
16. 편지툴 뜯어보지도 않고 버리다(0書不折)
송나라 무령(武寧)의 혜안(慧安)선사는 원통수(圓通秀) 스님과 함께 철벽같은 마음으로 천의(天衣)스님을 참례하였다.
혜안스님은 무령 (武寧)의 황폐한 마을 부서진 사원에서 외롭게 삼십여년을 지냈지만 원통스님은 조서에 응하여 법운사(法雲寺)에 거처하였는데 그 위광(威光)이 매우빛났다. 하루는 원통스님이 편지로서 혜안스님을 초청코자 했으나 혜안은 이를 뜯어 보지도 않고 버렸다. 사자가 그 까닭을 묻자. 혜안은 말하였다.
“나는 처음 원통스님에게 정채 (精彩)가 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에야 그의 어리석음을 알겠다.
출가한 사람이라면 무덤 사이나 숲 아래서 그 일을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까닭 없이 팔방으로 통하는 번화한 거리에 큰 집을 지어놓고 수 백명의 한가한놈들 을 기르고 있구나. 이는 참으로 눈뜨고 침상에 오줌을 싸는격이니,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그를 대하겠는가”
찬탄하여 말한다. 원통스님은 대중이 많았고 혜안스님은 홀로 있었으나 이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면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혜안스님이 원통스님을 비난하고 꾸짖었던 것은 세상의 완악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모여있는 것을 경책 하였을 뿐이다. 미루어 보건데 그나마 한가한 놈을 기르는 것은 그래도 옳다할지라도 요즈음에 길러지는 것들은 부질없이 바쁜 놈들이니 하물며 무엇을 말하겠는가.
17. 사신을 마주하고 발우를 태워버리다(월使윷활)
송나라의 혜련(慧f連)스님은 장주(灌州)사람이다. 황우(皇拍)연 간에 황제께서 화성전(化城殿)으로 불러 질문함에 답하였는데, 황제의 뜻에 걸맞았으므로 호를 대각선사(大覺補師)라 하사 받았다.
혜련스님은 계율을 매우 근엄하게 지녔다. 일찌기 임금이 사신을 보내 용뇌발우(龍腦鉢盂)를 하사하자 사신을 마주하고 이를 태워버리며 말하였다.
“우리의 법은 괴색(壞色)의 옷을 입고 질그릇 발우로 음식을 먹습니다. 이 발우는 법답지 못하므로 쓸모 없읍니다”
사신이 되돌아가 이 사질을 아뢰자 임금은 가상히 여기고 오래도록 찬탄하였다.
찬탄하여 말한다. 혜련 공은 발우를 태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없었으며, 영조(英姐)께서는 아뢰는 말을 듣고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른바 ‘엄자능(廠子陵)선생이 아니었다면 광무제 (光武帝)의 위대함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요, 광무제가 아니었더라면 선생의 고상함을 이루지 못했으리라’한 것이다. 이는 종문(宗門)의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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