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보이신 길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다.'라는 그 말로만 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새기고 곱새기고 해서 차원이 좀 높아져서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런 이승(二乘)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텅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고 모두가 다 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이른바 허무주의적인 경계가 되겠지요.
이승(성문.연각)이란 것은 결국 허무주의와 비슷합니다.성자가 되어야 허무를 극복한 것이고,일반 범부들은 허무인 줄도 모릅니다.허망한 것을 허망한 줄 모르는게 우리 일반 중생들이고,성문.연각 이승들은 일반 중생 보다는 좀 앞서 있지만 또 허무주의에 치우쳐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다 필요없다고 하는,이른바 무정부주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 쉽겠지요.성자가 봐야 영생불멸하는 중도실상을 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영생의 차원에서 봐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봐야 예쁘고 미운 게 아니라 부처님 차원에서 다 부처님같이 훌륭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대 긍정이 될 수 있겠지요. 상식적으로 보는 견해와 모두를 부정해 버리는 견해,또는 성자처럼 대 긍정하는 견해가 세 가지 견해,즉 '삼반견해'인데,우리 중생들은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지만 긍정한 것이나 부정한 그것은 사실 바르지 못합니다.
우리 기분이 그곳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 기분이란 것은 번뇌에 가려져 있으므로,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가 들어 있단 말입니다.원죄에 가려져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우리가 좋다고 보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 고,나쁘다고 보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허무주의적으로 모두를 부정해서 보는 것은 좋은 것도 궂은 것도 모두 다 부정해버린단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 꿈이고 허깨비고 뜬구름이다'라고 보는 것이 모두를 다 부정해버리는 견해입니다.따라서 허무주의적인 것은 옳지 못하고 성자만이 가장 바르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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