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5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30


 
 
능엄경 강의 5

■ 二斥妄心破想蘊以明六識無體分四


《初當機重請定門
爾時阿難在大衆中. 卽從座起 ?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我是如來最小之弟. 蒙佛慈愛. 雖今出家猶恃?憐. 所以多聞未得無漏. 不能折伏娑毗羅呪. 爲彼所轉溺於?舍. 當由不知眞際所詣. 惟願世尊大慈哀愍. 開示我等奢摩他路. 令諸闡提?彌戾車. 作是語已五體投地. 及諸大衆傾渴翹佇. 欽聞示誨
■ 2. 허망한 마음을 지적하고 상온(想蘊)을 타파하여 제육식(第六識)은 자체가 없음을 네 분야로 밝히다.

《 1. 아난이 삼관선정법문을 거듭 청하다.

그 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즉시 앉은 자리로부터 일어나 우측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착지하고 합장[身業] 공경[意業]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口業]

“저는 여래의 가장 어린 아우입니다. 부처님의 자애로우신 은덕으로 비록 지금 출가하긴 하였사오나 아직도 부처님의 사랑을 믿고 교만합니다. 때문에 삼관선정법문을 많이 듣기만 했을 뿐 아직 무루의 도[無漏道]를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비가라선범천주를 꺾지 못하고 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윽고 음난한 집에 빠졌습니다. 이는 진여 실제의 이치를 지적한 바를 몰랐던게 그 이유입니다.

세존께선 대자비로 불쌍히 여기사 저희들에게 사마타수행로를 열어보이사 모든 일천제(一闡提)들까지도 악지견(惡知見)을 무너뜨리게 해 주옵소서.“
《二世尊光示定體


爾時世尊從其面門放種種光. 其光晃耀如百千日. 普佛世界六種震動. 如是十方微塵國土一時開現. 佛之威神令諸世界合成一界. 其世界中所有一切諸大菩薩皆住本國合掌承聽

《 2. 세존께선 광명으로 선정의 실체를 보이시다.

그 때 세존께선 육근이 모두 모인 얼굴로부터 갖가지 광명을 놓으시니[表根性將現] 그 광명은 마치 백천개의 해와 달처럼 빛났고[表諸智將發] 모든 불세계가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으며[表六識將破] 이처럼 시방세계 미진수국토가 일시에 활짝 열렸다[表覆蔽將開]

부처님 위신력은 모든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합성하였는데[表分隔將合] 그 세계에 있는 일체 모든 대승보살들이 모두 그들 본국에 머물면서 합장하고 부처님 법문을 받들며 들었다[表流轉將息]  
[要義] 이 하나의 광명은 삼관선정(三觀禪定)의 완전한 실체이다. 앞에서 세존께선 아난에게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 소재를 따져 묻자 아난은 허망하게도 그 마음이 자신의 육신 안에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아난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통체적인 병통이다. 아난은 자기의 몸은 실제 있다고 단정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에 마음이 그 육신 안에 있다고 답변하였다. 그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입곱 군데서 추궁을 당하였으나 끝내 그 실체를 얻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집착했던 색신은 본래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난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사마타수행로를 보여달라고 거듭 청하였다.

여래께선 먼저 삼관대정(三觀大定)을 말해주리라곤 허락한 뒤에 우선적으로 소재부터 따져 물었는데, 그 의도는 아난으로 하여금 현재의 그 자리에서 사대가 본래 공적하고 오온이 실제로 있지 않은 이치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었다. 아난이 이 이치를 깨달았더라면 그 즉시 삼관대정의 실체가 목전에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난이 깨닫지 못한 이유는 다름아닌 생사망상을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음의 경문에서부터 이종근본(二種根本)을 제시하여 육식망상심인 상온(想蘊)을 타파하고 있다.

이 망상 덩어리인 상온을 타파하려 하면서 여래가 우선적으로 그 얼굴로부터 갖가지 광명을 놓은 이유는 고덕(古德)이 말했던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너희들 얼굴로부터 광명을 놓으면서 대지를 진동하고 있다”한 경우와도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캄캄하게 모른다. 그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망상을 진실한 마음의 실체로 오인하여 이 때문에 육근은 서로가 간격이 막히고 육진은 서로가 장애하여 일진법계로서의 법성원융한 경지를 이루지 못한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이 하나의 광명을 놓음으로써 육근ㆍ육진ㆍ육식의 십팔계(十八界)가 낱낱이 그 근본자리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본바탕임을 환하게 비추신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부처의 세계”라고 하였고, 광명이 나타나 육식무명이 타파됐기 때문에 “여섯 종류의 진동”이라 하였고, 육근과 육진이 끝내 장애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로 합성”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지혜관조의 작용이 나타나면 한 걸음을 옮기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즉시 깨달음의 도량에 오를 수 있다. 때문에 광명 가운데 나타난 타방세계의 보살들 모두가 각자의 본국에 머물면서 합장하고 법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광명을 통해서 부처님은 이미 은밀하게 능엄대정의 전체적 실체인 여래장성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부터서 망상을 타파하고 진실을 드러내는데, 그 드러난 진실은 다름 아닌 이 한 덩어리 광명경계일 뿐이다.

《三總示顚倒根本
佛告阿難. 一切衆生從無始來. 種種顚倒. 業種自然. 如惡叉聚. 諸修行人不能得成無上菩提. 乃至別成聲聞緣覺. 及成外道諸天魔王及魔眷屬. 皆由不知二種根本錯亂修習. 猶如煮沙欲成嘉饌. 縱經塵劫終不能得. 云何二種. 阿難. 一者無始生死根本. 則汝今者與諸衆生用攀緣心爲自性者. 二者無始菩提涅槃元淸淨體. 則汝今者識精元明能生諸緣緣所遺者. 由諸衆生遺此本明. 雖終日行而不自覺枉入諸趣.

《 3. 잘못의 근본을 총체적으로 보이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로 갖가지로 전도된 망상을 일으켜 최초로 업식(業識=種)을 일으키는 발업무명(發業無明)과 그에 상응하여 일어 나는 망상인 윤생무명(潤生無明=業)이라는 이 두종류의 무명번뇌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사고과(生死苦果)를 부른다. 이를 비유하면 하나의 꼭지에 세 개의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악차취(惡叉聚)나무와도 같다. 이처럼 모든 중생들의 생사인과관계인 혹업고(惑業苦) 셋도 일어나면 인과가 동시에 한 덩어리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어리석은 범부만 그러할 뿐만 아니라, 모두 수행인들까지도 그들이 수행을 한다 해도 위없는 보리를 올바르게 증득하지 못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성문이나 연각을 이루기도 하며 또는 외도나 모든 하늘의 마왕과 그 마왕의 권속이 되기도 한다.

그들 모두는 진심과 망상이라는 이 두 종류의 근본을 모르고 착각과 혼란으로 수행을 익혔기 때문에 그 결과 끝내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모래를 쪄서 맛있는 밥을 지으려는 것과도 같아 설사 미진수겁을 지나면서 수행한다해도 끝내 올바른 도를 증득하진 못한다.

무엇을 두 종류의 근본이라고 하는가.

그 첫째는 무시이래로 이어지는 허망한 망상인 생사의 근본, 즉 제8식 가운데 함장된 망상종자인 근본발업무명(根本發業無明)인데, 이것이 바로 전칠식업(前七識業)으로 상응하여 일어나는 반연심(攀緣心 潤生無明)의 근본종자이다.

이는 생사를 부르는 원인인 혹업(惑業)인데도 너와 모든 중생들은 이 망상을 실제의 자성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두 번째는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무시이래로 원래 청정한 보리열반의 자체이다. 이는 바로 망분식정(妄分識情)과 진분원명(眞分元明)이 하나로 화합한 제8식 가운데서, 그 중 식정에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일어난 모든 인연경계에 의해서 물들지 않는 즉 망상인연이 붙지 못하는 너와 모든 중생들의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다. 즉 망분(妄分)과 화합하였으나 본래의 청정함을 잃지 않은 제8식 가운데의 진분(眞分)이다.

망분식정 가운데서 일어난 모든 견분과 상분의 허망한 인연경계에서 본래 밝은 진분청정심이 가리웠으므로 종일토록 수행을 한다해도 끝내 자각하지 못하고 끝내는 모든 생사의 세계인 칠취(七趣)로 잘못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수행을 장애하는 원인이다.“  
[要義]여래께선 능엄대정을 연설하려 하면서 우선적으로 생사의 근본을 제시하셨다.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갖가지로 전도함은 혹업(惑業)이 그 원인이다. 이미 혹과 업이라는 원인이 있다면 반드시 생사라는 괴로움의 과보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악차취 열매가 열리면 세 개가 동시에 한 꼭지에 맺히는 것과도 같다. 이 같은 미혹이야말로 능엄대정으로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때문에 그 도구로서 선정을 우선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미혹 때문에 모든 수행인들까지도 열심히 수행한다 해도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고 이승이나 외도, 심지어 마왕을 이루기까지하는데, 이 모든 결과는 미혹이 그 원인 제공자이다.

이같은 결과를 초래한 이유를 말해본다면 진실한 마음과 허망한 마음, 이 두 종류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모든 데서 기인한다. 그 때문에 착각과 혼란으로 수행을 하게 된다.

두 종류의 근본은 첫째는 중생의 미혹한 제8식 가운데 함장된 망분종자(妄分種子)인 혹(惑=發業無明)과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전7식의 업(業=潤生無明)이 그것이며, 두 번째는 제불이 증득한 제8식의 본체인 진실한 마음인 보리열반원청정체이다.

모든 중생들은 제8식 가운데의 본래 밝은 진심을 망상인연경계에서 잃었기 때문에 무시이래로 지금까지 잘못 생사의 괴로움을 받고 있다.

모든 중생들은 이같은 본래 밝은 마음을 잃고 그 마음이 진망이 화합한 아뢰야식으로 변하여 다시 전칠식으로 망상업(妄想業)을 일으킨다. 이것이 중생생사의 근본이자 그 모습니다.

이러한 전7식의 망상활동[業]과 제8식의 망상종자[種]를 우선적으로 타파해야만 제8식 가운데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는 청정한 본각진심(本覺眞心)이 환하게 드러난다.

이같이 하려면 반드시 능엄대정 즉 삼관법문을 의지해야만 한다. 때문에 망상을 타파하는 시초에 이 선정을 우선적으로 게시하였다.
《四正示顚倒分三

◎初詰顚倒之心分五
初驗詰妄心
阿難. 汝今欲知奢摩他路願出生死. 今復問汝. 卽時如來擧金色臂. 屈五輪指. 語阿難言. 汝今見不. 阿難言見. 佛言. 汝何所見. 阿難言. 我見如來擧臂屈指. 爲光明拳. 耀我心目. 佛言. 汝將誰見. 阿難言. 我與大衆同將眼見. 佛告阿難. 汝今答我如來屈指爲光明拳耀汝心目. 汝目可見. 以何爲心當我拳耀. 阿難言. 如來現今徵心所在. 而我以心推窮尋逐. 卽能推者我將爲心

《 4. 전도된 모습을 세 분야로 보이시다.

◎ 1. 전도된 망심[想蘊]을 다섯 분야로 따져 물으시다.
■ 1. 허망한 마음을 시험하고 따지시다.

“아난아, 네가 지금 지극히 고요한 이치인 사마타수행로를 알고 극도로 요동하는 생사를 벗어나고 싶어한다면 지금 다시 너에게 묻겠다.” 그리고는 즉시 여래께선 금빛 팔을 드시고 다섯 손가락을 굽히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 주먹을 보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팔을 펴고 손가락을 굽혀 금빛 광명이 나는 주먹을 쥐고 저의 눈 앞에 빛나게 보이는 모습을 뵙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대중과 함께 눈으로 보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지금 나에게 답변하기를 여래께선 손가락을 굽혀 금빛 광명으로 빛나는 주먹을 쥐고 너의 눈에 빛나게 보여주신다 라고 하였는데, 너의 눈은 볼 순 있지만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나의 빛나는 주먹을 아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여래께선 지금 저에게 그 주먹을 아는 마음의 소재를 따져 물으시나 저는 여래의 주먹을 마음으로 추궁하고 찾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먹을 추구하는 마음 가짐을 저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 二斥忘想非眞
佛言. ?. 阿難. 此非汝心. 阿難?然避座合掌起立白佛. 此非我心當名何等. 佛告阿難. 此是前塵虛妄相想. 惑汝眞性. 由汝無始至於今生. 認賊爲子. 失汝元常. 故受輪轉
■ 2. 제6식 상온(想蘊)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고 지적하시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쯧쯧, 아난아, 이는 너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다.”

아난은 눈이 휘둥그러져 자리를 피하고 합장하더니 일어나서 부처님께 고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을 제 마음이라고 해야만 합니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이는 너의 목전에 마주한 육신경계를 의지해서 일어난 허망한 망상일 뿐이다. 이 망상 때문에 너의 진실한 성품을 미혹한 것이다.

너는 무시이래로 금생에 이르기까지 도적과도 같은 번뇌망상을 친자식과도 같은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오인함으로써 너에게 원래적으로 있던 상주진심을 잃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생사윤회를 받게 된 것이다.“
[要義] 여기에서는 허망한 마음을 타파함으로써 첫 번째 전도된 마음을 밝혔다. 여래께서 허망한 마음을 타파하려 하면서 아난에게 우선적으로 “사마타수행로를 알고 싶느냐”고 살피신 의도는 여기서부터 이후로 능엄대정의 실체인 여래장심을 나타내려함 때문이다.

사마타는 삼관(三觀) 가운데서 공관(空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래장청정진심엔 본래적으로 한 물건도 따로의 모습으로 존재하질 않는다. 이같은 진공적멸의 마음이 공관으로 깨달아야 할 마음의 실체이다.

이 공관의 실체는 다시 특별한 도리가 따로 없고 단지 허망한 마음과 견해로 육진경계를 마음밖의 상대적인 따로의 모습으로 분별함 때문에, 그 공관의 실체가 은둔하여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허망한 마음과 분별적인 견해[妄心妄見]만 공관수행을 통해서 타파되고 나면 목전의 육진경계는 본래 공적하고 진실한 마음은 그 자리에서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

가령 주관인식인 허망한 분별심[見分]과 그에 상대적으로 떠오른 육진경계[相分]는 상대적이고 허망한 인연관계성으로 일어났으므로 그것은 현재 있다 해도 실체가 없는 이치를 명료하게 안다면 그 즉시 진실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 때문에 다음의 경문에서 아난은 허망한 마음과 그에 따른 견해로 육진경계를 분별하는 작용으로써 질문하자 여래는 단지 공여래장공관(空如來藏空觀)의 실체로써만 답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사마타수행로를 모두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이 공관 사마타를 게시하여 허망한 마음을 타파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께선 처음 아난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하였느냐고 묻자. 아난은 여래를 뵙고 그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 출가했다고 답변하였다. 여래는 그에게 고하시길 너를 생사로 유전하게 하는 것은 네가 눈으로 보고 그것을 상대적인 따로의 모습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마음[心見]이다 라고 하셨다. 이는 아난의 허망한 마음과 그에 따른 분별 견해를 분명히 적시하신 것이다.

이같은 허망한 마음을 일곱 군데서 따져 묻고 추구하였으나 그 모두에서 끝내 실체를 얻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분은 마음의 소재처를 따져 묻는 것이 였으나 실제로는 허망한 육신은 진실한 마음의 의지처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통해서 육신이 본래 실체가 없는 이치를 나타냈다.

아난은 이러한 이치를 단박 깨닫지 못하고 사마타선정법문을 거듭 청하자. 여래께선 오묘한 말씀으로 우선적으로 허망한 마음을 논파하고 다음으로 그에 따른 허망한 견해를 타파하였다. 그 때문에 지금 여래께선 주먹을 들어 아난에게 묻기를 “너의 눈은 볼 수 있으나 보이는 대상을 아는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였는데, 이는 허망한 마음은 본래 공적한 이치임을 나타내려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 따져 물었던 것인데, 아난은 대상을 보고 그것을 분별하고 추구하는 작용으로써 자기의 실체적 마음이라고 적시하였다. 이는 망상생사의 마음을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오인한 것이 된다.

여래는 이로 인해 혀를 차면서 “쯧쯧, 이는 너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다”라고 나무라셨다.

아난은 원래부터 이러한 망상심을 자기의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인식하였기 때문에 지금 여래께서 나무라시는 꾸지람을 듣고 깜짝놀라 여래에게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이를 무엇이라고 해야만 합니까”라고 묻자, 여래는 분명히 그에게 고하셨다.

“이는 목전경계를 분별하는 허망한 망상[第六識想心]일 뿐이다. 즉 육식으로 육진경계를 의지하여 그것을 상대적으로 부여잡고 분별하는 망상일 뿐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아난은 이같은 망상을 진실한 마음으로 인식하기를 마치 도적을 자기의 친자식으로 인식하듯 하였으므로 본래적인 상주진심을 잃고 끝없는 생사에 유전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그 허물이다.
■ 三詰六識無體
阿難白佛言. 世尊. 我佛寵弟. 心愛佛故令我出家. 我心何獨供養如來. 乃至?歷?沙國土承事諸佛及善知識. 發大勇猛行諸一切難行法事皆用此心. 縱令謗法永退善根亦因此心. 若此發明不是心者. 我乃無心同諸土木. 離此覺知更無所有. 云何如來說此非心. 我實驚怖. 兼此大衆無不疑惑. 惟垂大悲開示未悟. 爾時世尊開示阿難及諸大衆. 欲令心入無生法忍. 於師子座摩阿難頂而告之言. 如來常說諸法所生唯心所現. 一切因果世界微塵因心成體. 阿難. 若諸世界一切所有. 其中乃至草葉縷結. 詰其根元咸有體性. 縱令虛空亦有名貌. 何況淸淨妙淨明心性一切心而自無體. 若汝執?分別覺觀所了知性必爲心者. 此心卽應離諸一切色香味觸諸塵事業別有全性. 如汝今者承聽我法此則因聲而有分別
■ 3. 육식상온(六識想蘊)은 실체가 없음을 따지시다.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이 총애하는 아우로서 부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저를 출가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부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찌 유독 현재의 부처님 한 분에게만 공양을 올렸겠습니까. 과거이래로 항하사와 같은 모든 국토를 두루 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선지식들까지 받들고 섬기면서 크게 용맹한 발심으로 일체의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일들을 빠짐없이 실천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제 마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설사 부처님 정법을 비방하여 선근공덕에서 영원히 물러난다 할지라도 이도 역시 이 마음 씀씀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분명하게 작용하는 이것이 내 마음의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지각없는 초목처럼 무심하여, 이처럼 지각하는 마음을 떠나 있으므로 다시는 그 어떤 것도 나의 모습으로 존재해 있질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여래께선 말씀하시길 이는 저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저는 실로 놀랍고 두렵사오며, 여기에 함께한 대중까지도 이 문제를 의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선 대자비를 베푸사 아직 깨닫지 못한 저희들에게 이 도리를 보여 주소서.“

그 때 세존께선 아난과 모든 대중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이 무생법인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고자 사자좌에서 아난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면서 그에게 고하셨다.

“여래는 평소에 늘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모든 만법이 일어남은 우리의 마음 밖에서 따로의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유일진심(唯一眞心)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따라서 십법계(十法界) 가운데서 정보(正報)인 일체의 생사인과와 내지는 의보(依報)인 미진세계까지도 그것은 진실한 마음을 근본실체로 의지하여 성립하였다 했다.

아난아, 이 모든 세계에 존재한 일체의 모든 것과 그 가운데서 크게는 산하대지와 작게는 풀ㆍ잎ㆍ실오라기까지도 그것이 일어난 실체적 근원을 따져 본다면 그 모두는 자체의 성질이 있다.

어찌 유독 미세하게 형질이 있는 것만 그러하랴. 설사 크게는 형질이 없는 허공이라 할지라도 역시 허공이라는 명칭과 막힘 없이 툭 트인 모습이 있다.

하물며 청정[淸淨=本體無垢]ㆍ묘정[妙淨=處染常淨]ㆍ명심[明心=湛寂虛靈]은 일체 분별심이 일어나는 자체 자리인데 어찌 자체가 없겠느냐.

가령 네가 분별심으로 살피고 아는 육식현행심(六識現行心=想)을 너의 진실한 마음이라고 반드시 고집한다면 그 분별심은 물질의 근본요소인 색향미촉사진(色香味觸四塵)으로 이뤄진 일체의 사업을 떠나서 따로의 온전한 성질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네가 지금 나에게 설법음성을 듣는 것도 이는 나의 설법하는 음성[聲塵]을 상대적으로 의지해서 너의 주관적인 분별심이 일어났을 뿐, 나의 설법음성을 떠난다면 너의 분별심도 동시에 사라지리라.[이상은 육식상온(六識想蘊이 진심이 아님을 발힘)
■ 四帶顯七識非眞
縱滅一切見聞覺知內守幽閒猶爲法塵分別影事. 我非勅汝執爲非心. 但汝於心微細?摩. 若離前塵有分別性卽眞汝心. 若分別性離塵無體斯則前塵分別影事. 塵非常住. 若變滅時此心則同龜毛兎角. 則汝法身同於斷滅. 其誰修證無生法忍. 卽時阿難與諸大衆?然自失  
■ 4. 제7식행온(行蘊)까지도 진실한 마음이 아님을 함께 나타내시다.

설사 현재의식으로서 육식분별인 일체의 견문각지(見聞覺知)까지 소멸하고나서 다시 안으로 선정 경계 속에서 나타난 그윽하고 한가한 경계, 즉 제7잠재의식 속에 나타난 극도로 미세한 경계라 할지라도 그것까지도 오히려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망상일 뿐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닌 망상심을 잘못 집착하고 있음을 나무랄 뿐이다. 너는 단지 그 미세한 망상심에서 자세하게 헤아려 보라. 만일 분별의 대상인 목전의 육진경계[相分]를 떠나서 상대적 인식주관인 분별심[見分]이 따로의 실체적 모습으로 있다면 그것이 바로 너의 진실한 마음이라 하겠지만, 만일 육진을 떠난 상태에선 동시에 분별하는 마음의 실체도 따로 없다면 이는 목전의 육진을 인식하여 너의 의식 속에 허상으로 떠오른 그림자[落謝影子]를 따로의 실제모습인양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인식하고 있는 육진경계는 원래 상주분변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찰나찰라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끝내 소멸할 땐 그것을 상대적으로 분별인식하는 주관까지도 함께 변화하면서 사라지므로, 너의 분별하는 마음은 육진경계를 따라 단지 허망한 명칭만 있을 뿐 그 실체는 애초부터 없다.

이같은 망상심을 잘못 너의 진실한 마음이라고 오인한다면 너의 진실한 마음, 즉 법신(法身)은 그 망상생멸과 함께 사라져 끝내는 진심이라할 것 마져도 없는 단멸의 경지를 이루리니. 그렇다면 설사 수행을 한들 무엇이 진실한 주체적 마음이 되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고 그에 따른 과보를 증득하겠느냐.“

그 말씀을 들은 즉시 아난과 모든 대중들은 말없이 망연자실하였다.
■ 五總責顚倒
佛告阿難. 世間一切諸修學人現前雖成九次第定. 不得漏盡成阿羅漢. 皆由執此生死妄想誤爲眞實. 是故汝今雖得多聞不成聖果  
■ 5. 전도된 마음을 결론적으로 책망하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세간에 모든 수행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현재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닦아서 이룬다 할지라도 육식번뇌가 끝내 다하여 아라한의 도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모두가 이같은 생사망상을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한 자기의 마음으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까지 많은 법문을 들었으나 단지 탐욕의 번뇌만 증가하였을 뿐 성스러운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고 단지 삼계 안에서 생사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要義] 아난은 한결같이 육식으로 육진경계를 반연하는 망상분별심을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집착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것이다.

가령 이러한 육식분별심인 상온(想蘊)을 진실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인식대상인 모든 육진경계를 떠나서도 따로의 실체가 있어야만 그것을 진실한 마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식분별심은 육진을 떠나선 따로의 실체가 전혀 없는데 그것이 허망한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상은 육식상온은 허망함을 논파하여 육식이 본래 허망함을 드러냈다. 그 다음으론 제7식까지도 진실한 마음이 아님을 나타냈다.

부처님의 의도를 말해본다면 제6식분별망상심만 진실한 마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사 밖으로 작용하는 일체의 6식분별을 소멸하고 나서 안으로 선정경계 속에서 그윽하고 한가한 상태에 있다 해도 그것까지도 분별심의 그림자로 떠오른 법진경계를 분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상대적인 관점에서 일어나는 분별인식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상태라 해도 끝내 망상이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제7식이 제8식 견분(見分)을 실제의 자내아(自內我)로 집착하고 미세하게 분별하는 마음인데, 이것이 현재 제6식을 일으키는 뿌리로서 모든 생사의 근본 일 뿐이데, 어떻게 이를 진실한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앞으로 행온을 타파하여 제7식을 소멸시키려 하였다. 때문에 이 말씀을 미리하여 그 장본으로 삼으셨다.

아라한은 단지 육식만을 소멸하여 삼계생사를 벗어났을 뿐이다. 이로써 이 대목은 육식상온을 타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망심을 타파했고 다음은 망견(妄見)을 타파한다.
◎ 二詰顚倒之見分三

■ 初當機重請
 
阿難聞已. 重復悲淚. 五體投地. 長?合掌而白佛言. 自我從佛發心出家恃佛威神. 常自思惟無勞我修將謂如來惠我三昧. 不知身心本不相代失我本心. 雖身出家心不入道. 譬如窮子捨父逃逝. 今日乃知雖有多聞若不修行與不聞等. 如人說食終不能飽. 世尊. 我等今者二障所纏. 良由不知寂常心性. 惟願如來哀愍窮露. 發妙明心開我道眼

◎ 2. 전도된 망견(妄見)을 세 분야로 따져 물으시다.

■ 1. 아난이 거듭 법문을 청하다.

아난은 전육식분별, 즉 수상(受想)이 소멸한 선정경계까지도 법진분별일 뿐,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자 거듭 슬피 울면서 오체투지하고 크게 꿇고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을 따라 발심출가한 이래로 부처님의 위신력만 믿고 항상 생각하기를 굳이 수고롭게 제가 직접 수행하지 않는다 해도 여래께선 저에게 삼매를 주시리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몸소 수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는 일은 끝내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저의 본심을 잃었으니, 비록 몸은 출가했다 하나 마음은 도를 깨닫지 못함이 비유하면 가난한 자식[아난 無福慧]이 아버지[本覺眞心]를 버리고[背本覺眞心] 도망간 듯 하옵니다[合塵勞煩惱].

설사, 많은 법문을 듣는다 해도 몸소 수행하지 않는다면 아예 법문을 듣지 않음과 같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는 마치 음식을 입으로만 말하면 끝내 배가 부르지 않은 이치와도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번뇌소지이장(煩惱所知二障)에 얽메여 생사를 반복하는 이유는 동요하지도 생멸하지도 않는 적멸진상심성(寂滅眞常心性)을 모르기 때문임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여래께선 저희들의 구차한 수행로를 불쌍히 여기사 오묘하게 밝은 마음을 발현하시어 지혜의 도안(道眼)을 열어주소서.
■ 二光示一眞
卽時如來從胸卍字涌出寶光. 其光晃昱有百千色. 十方微塵普佛世界一時周?. ?灌十方所有寶刹諸如來頂. 旋至阿難及諸大衆. 告阿難言. 吾今爲汝建大法幢. 亦令十方一切衆生獲妙微密性淨明心得淸淨眼  
■ 2. 지혜광명으로 유일진심(唯一眞心)을 보이시다.

즉시 여래께선 가슴의 卍자로부터 보배광명[表根本智]을 놓으시니, 그 빛나는 광명엔 백천의 색깔이 있었다.[表體含萬德用?河沙]

그 광명은 시방미진수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일시에 두루 충만하여[表圓照法界] 시방세계 보찰(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에 빠짐없이 흘러 들어가게 하더니[表上齊諸佛], 바로 다시 되돌아 와 아난과 모든 대중들에게 당도하였다[表下等衆生].

그리고는 아난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너를 위해 망상을 타파하고 진심을 나타내는 대법당(大法幢)을 건립하며, 역시 시방세계의 일체중생들까지도 묘미밀성[妙微密性=體] 묘정명심[妙淨明心=用]을 깨달아 청정한 지혜의 안목을 얻게 하리라.”
[要義] 지금부터선 망견(妄見)을 타파하고 있다. 아난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육진을 분별하는 허망한 육식분별은 육진경계를 떠나선 따로의 실체가 없음을 확신하였다.

이로써 추리해 본다면 앞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뵈었던 견해까지도 역시 진실한 견해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아난은 오묘하게 밝은 마음을 개발하여 지혜의 도안을 열어 주십사 하고 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망견은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분별이 밖으로 근신(根身)과 기계(器界)엔 실제의 아[實我]가 있다고 집착하면 그것을 자신인 근신의 측면에서 분별아집(分別我執)이라 하고 기세간의 측면에서 보면 분별법집(分別法執)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의식에서 일으키므로 의식분별망견(意識分別妄見) 즉, 번뇌장(煩惱障)이라고 하는데, 이는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번뇌이고, 둘째는 잠재의식인 의식의 뿌리, 즉 제7식의근(意根)에서 제8식 견분과 상분을 실제의 내아(內我)로 집착하여, 견분에서 미세한 분별을 일으키면 그것을 구생아집(俱生我執)이라 하고, 상분법진(相分法塵)에서 일으키면 구생법집(俱生我執)이라고 한다.

이 두 미혹은 선천적으로 이 육신과 함께 일어나므로 제7식구생망견(第七識俱生妄見), 즉 소지장(所知障)이라고 한다.

제7식인 의근(意根)과 그에 의해서 현재목전의 육진경계에 일으키는 육식분별은 동시에 상호의 존관계를 이루면서 일어나는데, 이 모두는 망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본경문에서 “번뇌장과 소지장에 얽매인다”라고 하였다.

여래께서 이 두 망상을 타파하는 시초에 우선적으로 가슴의 卍字로부터 모든 보배광명을 놓은 이유는 이 망상의 근원적인 자체는 여래장심으로서 대지혜광명임을 표시하려함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 광명을 미혹하여 망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윽고 그 지혜광명이 전환하여 허망한 두 종류의 망견(妄見)을 이루었다. 지금은 이러한 망견을 타파하려함 때문에 우선적으로 이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빠짐없이 동시에 비추었다.

이 한 덩어리 광명은 성인과 범부가 본래부터 공유하기 때문에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정수리에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아난과 모든 대중들에게까지 되돌아 왔는데, 이를 통해서 진심(眞心)은 이 지혜광명일 뿐임을 깨닫게 하려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주된 의도이다.

이러한 지혜광명을 미혹하여 망심과 망견을 이루었으므로 지금 이같은 망심과 망견을 전환하여 본래 구족한 광명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멀리 있지를 않고 단지 망상 망견을 전환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가령 이같은 진실한 지혜광명을 깨닫고 오묘하고 청정한 마음을 얻어 지혜의 도안이 열린다면 그 마음의 자체 모두가 진실일 것이다. 이것이 여래께서 대법당을 건립한 이유이다. 대법당은 파사현정의 의미를 갖는다.

다음의 문장에선 마음이 아는 것이지 눈이 보지 않음을 밝혔다.
■ 三會見歸心
阿難. 汝先答我見光明拳. 此拳光明因何所有. 云何成拳. 汝將誰見. 阿難言. 由佛全體閻浮檀金?如寶山淸淨所生故有光明. 我實眼觀. 五輪指端屈握示人故有拳相. 佛告阿難. 如來今日實言告汝. 諸有智者要以譬喩而得開悟. 阿難. 譬如我拳. 若無我手不成我拳. 若無汝眼不成汝見. 以汝眼根例我拳理. 其義均不. 阿難言. 唯然世尊. 旣無我眼不成我見. 以我眼根例如來拳. 事義相類. 佛告阿難. 汝言相類是義不然. 何以故. 如無手人拳畢竟滅. 彼無眼者非見全無. 所以者何. 汝試於途詢問盲人汝何所見. 彼諸盲人必來答汝. 我今眼前唯見黑暗更無他?. 以是義觀. 前塵自暗見何虧損. 阿難言. 諸盲眼前唯覩黑暗. 云何成見. 佛告阿難. 諸盲無眼唯觀黑暗. 與有眼人處於暗室. 二黑有別爲無有別. 如是世尊. 此暗中人與彼群盲二黑較量曾無有異. 阿難. 若無眼人全見前黑. 忽得眼光. 還於前塵見種種色名眼見者. 彼暗中人全見前黑. 忽獲燈光. 亦於前塵見種種色應名燈見. 若燈見者燈能有見自不名燈. 又則燈觀何關汝事. 是故當知燈能顯色. 如是見者是眼非燈. 眼能顯色. 如是見性是心非眼  
■ 3. 보는 눈을 아는 마음으로 귀결시키다.

“아난아 너는 앞서 나에게 대답하기를 광명으로 빛나는 나의 주먹을 보았다 했었다.

이 광명이 빛나는 나의 주먹은 무엇으로 인해 있으며, 어떻게 주먹이 이루어졌으며, 너는 무엇을 가지고 이 주먹을 보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부처님 몸 전체가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아름답고 풍만하기가 마치 보배 무더기로 이루어진 산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청정한 모습으로 세간에 일어나셨기 때문에 빛나는 광명이 있으며, 저는 실로 그 주먹을 저의 육안으로 보았으며, 부처님이 천폭의 수래바퀴 모습과도 같은 지문을 지닌 다섯 손가락을 굽혀 쥐고 대중들에게 보여 주시므로 주먹의 모습이 있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여래는 오늘 현묘하고 고원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 목전에 나타난 실제의 일로 너에게 고하리라.

그러나 글로서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언어로는 그 의미를 끝까지 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지혜있는 사람들은 비유로써 깨달아야만 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나의 손이라는 자체가 없다면 나의 주먹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너의 육안이 없다면 너가 나의 주먹을 보는 일이 성립하지 않는 이치와도 같다.

너의 보는 눈으로써 나의 주먹을 쥔 이치에 견주어 본다면 그 의미가 같겠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미 저에게 보는 눈이 없다면 저의 보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니, 이 예를 여래의 주먹에 견주어 본다면 그 일의 의미가 서로 닮았다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네가 말하는 이 의미는 서로 닮았다함이 옳지 않다.

왜냐하면 가령 손이 없는 사람은 주먹도 끝내 없겠지만 그러나 육안이 없는 사람은 보는 마음마져 온전히 없지를 않다. 왜냐하면 네가 만일 믿지 않는다면 시험삼아 길에서 맹인에게 물어보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고 하면 그들 모든 맹인들은 반드시 너에게 답변하기를 나는 지금 눈 앞이 오직 깜깜한 어두움만 보일 뿐 다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관찰해 본다면 목전의 안근색진(眼根色塵) 즉 육안이 스스로 어두울지언정 목전의 어두움을 보는 마음이야 맹인이라 한들 무슨 감손이 있으랴.“

아난은 이 의미를 통달하지 못하고 말하였다.

“모든 맹인의 눈 앞엔 오직 어두움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두고 보는 마음이 성립한다 하겠습니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모든 맹인들은 육안이 없으므로 오직 어두움만 보인다. 이는 육안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어두운 방에 함께 거처했을 때 이 둘의 어두움은 따로의 구별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어두움 속의 육안이 있는 사람들과 그들 여러 맹인들이 보는 경우의 어두움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그곳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가령 육안이 없는 사람이 목전의 어두움만을 온전히 보다가, 그들이 홀연히 다시 육안이 광명을 얻는다면 목전의 사물에 있어서 갖가지 색깔을 다시 보리니, 이것을 육안으로 목전의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한다 하자.

그렇다면 그들 육안이 온전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 단지 목전의 어두움만은 보다가 홀연히 등불을 만나면 그들 역시 목전의 사물에서 갖가지 물색을 분명하게 보리니, 그렇다면 이는 등불의 광명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겠구나.

가령 등불에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작용이 있다면 그 등불엔 이미 보는 작용이 있으므로 등불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또 등불은 그 자체서 사물을 보는 작용을 일으키는데, 너의 눈으로 보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그 등불은 우리의 눈이 목전의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동시적으로 보조해 주는 증상연(增上緣)으로써 대상사물의 물색이 나타나게 할 순 있을지언정, 그 사물의 색깔을 보지는 못한다는 점을.

이처럼 사물의 색깔을 보는 작용은 눈에 있을 지언정 등불이 아니다. 이 하나의 예에 견주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안이 아는 마음에 동시적인 증상연이 되어 사물의 색깔을 나타나게 할 수 있을 뿐, 그 사물을 보는 성질은 마음이지 육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要義] 허망한 견해를 타파하려 하면서 여래께선 주먹을 들어 보는 눈을 시험한 이유를 말해보자. 소승인들은 팔식삼분(八識三分)을 모르고 단지 육식까지만 알 뿐이다.

그들은 단지 안근과 안식이 상대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뿐이라고 한다. 즉 안근에서 대상색법을 분별하는 안식심(眼識心)이 일어난다고 집착할 뿐 그 근본은 제8식심견분(見分)의 작용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그러므로 육안, 즉 안근이 볼 수 있다 하면서 그 보는 작용이 실은 제8식 자증체(自證體)에서 일어난 견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모른다. 이는 식(識)과 근(根)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안식은 안근을 의지하여 그것을 동시 보조적인 증상연으로 해서 일어날지언 육안인 안근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치를 모랐던 것이다.

여래께선 이처럼 육안으로 보는 작용을 근본 마음자리로 회귀시키려고 금색광명의 주먹을 들어 아난에게 시험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아난은 보는 작용이 육안에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다음부터의 경문에선 전도된 망상을 밝혀 생사심을 타파해 주고 있다. 전도된 견해는 육식분별심으로 허깨비처럼 실제있지 않은 오온신심(五蘊身心)을 실제의 “아”로 집착하여 그것은 상주(常住)다. 또는 무상(無常)이다 하고 분별집착하는 이 두 가지 견해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소승인은 오온신심에서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상주진심의 이치와 애초에 둘이 아님을 모르고 무상한 오온신심이 상주진심 밖에 따로 있다고 잘못 헤아리고, 범부는 따로의 실체가 없는 무상한 오온신심을, 즉 허망한 망상의 모습을 그것은 상주라고 헤아린다. 이것이 범부와 소승의 두 가지 형태의 전도된 망상이다.[八顚倒]

그렇다면 아난이 윗 문장에서 육안에 집착했던 견해는 오리사(五利使)번뇌, 즉 견혹(見惑) 가운데서 신견(身見)에 해당한다. 신견이란 실아가 있다고 나의 신심에 집착하는 아집견이다.
◎ 三示顚倒之人分二

■ 初請
阿難雖復得聞是言. 與諸大衆口已?然心未開悟. 猶冀如來慈音宣示. 合掌淸心佇佛悲誨

◎ 3. 전도된 견해를 가진 사람을 두 분야로 보이다.
■ 1. 아난이 법문을 청하다.

아난은 다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든 대중과 함께 입으론 말이 없었으나 마음으론 그 이치를 아직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여래께서 자비로운 음성으로 선양해 주시기를 바라는 청정한 마음으로 합장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다렸다.
[要義] 아난은 그의 마음이 인식대상인 색온과 그에 따른 감정분별인 수온을 의지해서 있다한 집착은 이미 타파�으나 지금에 와서 육안으로 대상 사물을 보는 작용까지도 마음으로 귀결시킨 데에 이르러선 그 귀결처가 어딘지 막연하기만 하였다. 때문에 어떻게 청할 바를 모르고 말없이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次答分六
△?初示凡夫顚倒
爾時世尊舒兜羅?綱相光手開五輪指. 誨勅阿難及諸大衆. 我初成道. 於鹿園中. 爲阿若多五比丘等. 及汝四衆言. 一切衆生不成菩提及阿羅漢. 皆由客塵煩惱所誤. 汝等當時因何開悟今成聖果 時?陳那起立白佛. 我今長老. 於大衆中獨得解名. 因悟客塵二字成果. 世尊. 譬如行客. 投寄旅亭. 或宿或食. 宿食事畢. ?裝前途. 不遑安住. 若實主人自無攸往. 如是思惟不住名客. 住名主人. 以不住者名爲客義. 又如新霽. 淸暘升天. 光入隙中. 發明空中諸有塵相. 塵質搖動. 虛空寂然. 如是思惟澄寂名空. 搖動名塵. 以搖動者. 名爲塵義. 佛言如是
■ 2. 답변을 여섯 분야로 하시다.
◇ 범부의 전도된 견해를 보이시다.

그 때 세존께선 유연하고 향기로운 광명의 다섯 손가락을 펴시고 아난과 모든 대중들에게 가르치셨다.

“내가 최초로 성도하여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과 너희 사부대중들을 위해서 말하기를 일체중생들이 크게는 위없는 대승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작게는 소승의 아라한까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가 객진(客塵)번뇌를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당시에 무엇으로 인해 깨달았기에 오늘의 성스러운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느냐.”

이때에 교진나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고하였다.

“저는 지금 장노의 신분로서 대중 가운데서 깨달았다는 명성을 홀로 얻은 이유는 객진(客塵)이라는 두 글자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행객[行客=見惑]이 여인숙[分別境界]에 투숙하여 혹은 잠을 자기도[久緣]하고, 혹은 단지 잠시 식자만 하기도 하며[暫緣], 가야할 길을 미리서 준비하므로[捨此彼趣] 그곳에 안주할 겨를이 없습니다[復緣他境].

그러나 여관집 주인은[偏眞法性] 길을 떠날 일이 없습니다[常住不動故].

이같은 비유로 생각해 보았더니, 머물지 않은 사람은 “客”이고, 항상 머무는 사람은 주인입니다. 따라서 머물지 않은 사람을 객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맑은 새벽[破見惑境]에 떠오르는 태양이[見道智日昇於性天] 하늘에 솟아 그 광명이 방문틈새로 들어와[有智能照隱微境界] 텅 빈 방안에 어지럽게 떠도는 미세한 먼지를 비추면[照法性理中有微細思惑] 그 미세한 먼지는 요동하나[思惑起滅不停] 공간허공은 고요하듯 합니다[法性寂然不動].

생각해 본다면 맑고 고요함을 허공이라 하고, 요동하는 것은 먼지입니다. 그렇다면 요동하는 것을 “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객과 진[客塵]은 생멸요동하나 주인과 허공은 고요하여 요동하지 않는다 한 그 의미가 옳다.”
[要義]여기에선 범부의 전도된 견해를 타파하여 미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타파하는 시초에 우선적으로 “객진”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들어 질문한 이유는 범부는 오온신심을 상주불변이라고 허망하게 집착하고 상견(常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객진을 빌려서 그것은 상주가 아님을 논파하였다.

객은 여인숙에 투숙하다가 다시 갈 길을 떠나야만 하나 그 주인은 새삼 길을 떠날 일이 없다. “객”은 중생들이 무상한 삼계생사에 떠도는 모습을 비유하였다. 이처럼 무상한데 어떻게 상주라고 집착하겠는가.

맑은 새벽에 밝은 해가 하늘로 솟아 오르면 티끌은 어지럽게 요동하나 허공자체는 고요하다. “塵”은 생멸무상에 비유하였다. 이처럼 무상한데 어떻게 이를 상주라고 헤아리겠는가. 이는 바로 범부의 전도된 견해이다.
◇ 二示二乘顚倒分二

※初示迷
卽時如來於大衆中屈五輪指. 屈已復開. 開已又屈. 謂阿難言汝今何見. 阿難言. 我見如來百寶輪掌衆中開合. 佛告阿難. 汝見我手衆中開合. 爲是我手有開有合. 爲復汝見有開有合. 阿難言. 世尊寶手衆中開合. 我見如來手自開合. 非我見性有開有合. 佛言. 誰動誰靜. 阿難言. 佛手不住. 而我見性尙無有靜誰爲無住. 佛言如是. 如來於是從輪掌中飛一寶光在阿難右. 卽時阿難廻首右盼. 又放一光在阿難左. 阿難又則廻首左盼. 佛告阿難. 汝頭今日因何搖動. 阿難言. 我見如來出妙寶光來我左右. 故左右觀頭自搖動. 阿難. 汝盼佛光左右動頭. 爲汝頭動. 爲復見動. 世尊. 我頭自動. 而我見性尙無有止誰爲搖動. 佛言如是
◇ 2. 소승의 전도된 견해를 두 분야로 보이시다.

※ 1. 미혹을 보이시다.

즉시에 여래께선 대중 가운데서 다섯 손가락을 굽이시더니 다시 펴고, 펴고 나선 다시 굽히시더니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모든 보배로 장엄한 듯한 손바닥을 대중들에게 폈다가 다시 쥐는 모습을 뵙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나의 손이 대중들 앞에서 폈다간 다시 쥐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나의 손에 폈다 쥐었다 하는 모습이 있느냐. 아니면 너의 보는 눈에 폈다 쥐었다 하는 모습이 있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세존께서 보배와도 같은 손을 대중 가운데서 폈다 쥐었다 하시므로 저는 여래의 손 그 자체가 폈다 쥐었다 하는 모습을 뵐 지언정 저의 보는 마음에 그 손이 폈다 쥐었다 하는 따로의 모습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손이 요동하는 모습을 보는 자는 누구이며, 고요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누구이냐.”

아난은 말하였다.

“부처님 손이 요동하면서 머물지 않을 지언정[客塵] 저의 보는 마음은 고요한 모습도 따로 없는데 무슨 머물고 머물지 않은 상대적 모습이 있겠습니까[主空]”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말이 옳으니라.”

여래께선 이 때 손바닥으로부터 보배와도 같은 하나의 광명을 날리시어 아난의 오른쪽에 두시자 아난은 즉시 머리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다. 다시 한 광명을 놓아 아난의 왼쪽으로 향하자 아난은 역시 머리를 돌려 왼쪽을 보았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의 머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요동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오묘한 보배와도 같은 광채를 저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날리셨기 때문에 왼쪽 오른쪽을 살피느라고 머리가 따라서 요동하였습니다.”

“아난아. 너는 부처님 광명을 곁눈질 하느라고 왼쪽 오른쪽으로 따라서 머리가 움직였다. 너의 머리가 움직였느냐. 아니면 너의 보는 마음이 움직였느냐.”

“세존이시여, 저의 머리가 움직였을지언정 저의 보는 마음이야 고요히 정지한 모습도 따로 없거니 무슨 요동하는 모습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말이 옳다.”
[要義] 여기에서는 소승의 전도된 견해를 타파함으로써 그들의 미혹한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래는 손가락을 굽혀 광명을 날리므로써 보는 마음은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험하고 계신다.

소승은 열반의 고요함 밖에 무상하게 생멸로 요동하는 오온신심이 따로 있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삼계생사에 염증을 내고 열반의 고요한 세계로 떠나려 한다. 이는 중생 오온신심이 일어난 근원은 본래 공적한 진여의 이치, 즉 요동과 고요라는 두 모습이 애초에 없는 도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선 이같은 허망한 견해를 타파하려고 우선적으로 손을 쥐고 광명을 날려 이로써 시험하였다.

아난은 이를 통해서 머리가 움직일지언정 보는 마음마져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이치를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주변환경, 즉 육진경계는 움직인 듯 하나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움직이지 않는 이치를 알 수 있다. 즉 이 세계의 요동과 마음의 고요가 따로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마음을 떠난 밖에 따로의 무상한 신심이 실제있다고 헤아리랴. 이상에서 이미 진여상주의 이치를 은밀하게 보았다.

※次詰責
於是如來普告大衆. 若復衆生以搖動者名之爲塵. 以不住者名之爲客. 汝觀阿難頭自動搖. 見無所動. 又汝觀我手自開合見無舒卷. 云何汝今以動爲身. 以動爲境. 從始?終念念生滅. 遺失眞性. 顚倒行事. 性心失眞. 認物爲己. 輪廻是中自取流轉

※ 2. 미혹을 책망하시다.

이 때 여래께선 모든 대중에게 두루 고하셨다.

“가령 어떤 중생이 공간에서 요동하는 것을 먼지(塵)라 하고, 여인숙에 머물지 않는 자를 행객[客]이라 한다 하자. 너희들은 관찰해 보라. 아난의 머리가 스스로 요동했을 지언정 보는 마음은 요동하지 않았음을 또 너희들은 관찰해 보라. 나의 손이 폈다 쥐었다 했을 지언정[客] 보는 마음마저 손을 따라 폈다 쥐었다한 일이 없다는 것을[主].

그런데 무엇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움직이는 모습을 마음밖에 실제있는 육신[身根]이라하고 요동하는 것으로써 따로의 육진경계[塵境]라고 하느냐. 이같이 마음밖에 본래없는 신근(身根)과 진경(塵境), 즉 상분(相分)경계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생각생각에 생멸하는 모습이 상주하는 마음을 떠나서 따로 있다고 분별집착하는 마음[見分]을 다시 일으켜 상주진성을 잃고 잘못 전도된 수행을 하느냐.

그 때문에 안으론 마음에선 생멸하는 허망한 망상을 진실한 마음으로 오인하였고, 밖으로 경계에선 지수화풍사대의 화합을 참된 자기의 모습으로 잘못 여겨, 허망한 육신과 경계 가운데서 생사유전을 스스로 취했을지언정, 그 생사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또는 타인에 의해서 부여된 것은 아니다.
[要義] 여기에서는 범부와 소승의 두 망상을 총체적으로 하나로 합하여 책망하였다.

범부중생은 요동하는 것은 객진(客塵)일 뿐임을 알았다면 오온신심은 생멸하여 그들이 집착한데로 상주가 아님이 분명한데 어떻게 생멸하는 오온신심에서 상주불변이라는 전도된 견해를 일으키랴.

소승은 머리가 요동할 지언정 보는 마음은 요동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 근본은 스스로 진여상주의 이치임이 분명한데, 떠나야할 무상한 오온신심의 생사가 마음밖에 따로 있고 상주하는 열반이 생사 밖에 따로 있다고 헤아리었는가. 이 모두는 잘못이다.

이같은 상주와 무상의 이치가 둘이 없는 의미를 알았다면 요동하는 것을 따로의 육신이라 하고 움직이는 것을 따로의 경계라고 하겠는가.

이는 소승의 전도된 생각일 뿐이다.

또 이처럼 무상한 육신과 경계를 범부는 무엇 때문에 그것은 상주하는 모습이 내 마음 밖에 따로 있다고 헤아리겠는가. 이는 범부의 전도된 망상일 뿐이다.

바로 이 허깨비와 같은 육신과 경계의 근본은 진여상주이므로 육신과 경계는 바로 법신의 이치가 전체로 발현한 모습이다.

이같은 이치를 모르고 허망하게 헤아리기 때문에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토록 찰라찰라 생멸하면서 진실한 마음을 잃고 잘못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사를 스스로 취하는 중생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