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6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32
능엄경 강의 6

卷第二

唐天竺沙門般刺密帝譯

鳥?國沙門彌伽釋迦譯語

菩薩戒弟子淸河房融筆受
三示外道斷見顚倒
爾時阿難及諸大衆. 聞佛示誨. 身心泰然. 念無始來失却本心. 妄認緣塵分別影事. 今日開悟. 如失乳兒忽遇慈母. 合掌禮佛. 願聞如來顯出身心眞妄虛實. 現前生滅與不生滅. 二發明性. 時波斯匿王起立白佛. 我昔未承諸佛誨勅. 見迦?延毗羅?子. 咸言此身死後斷滅名爲涅槃. 我雖値佛. 今猶狐疑. 云何發揮證知此心不生滅地. 今此大衆諸有漏者咸皆願聞.

△ 3. 외도(外道)의 전도된 단견(斷見)을 보이다.
그때 아난과 함께한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들은 무시이래로 오인하다가 오늘에야 마음이 열렸다. 이는 마치 젖먹이 아이가 홀연히 잃었던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남과도 같다.”
이같이 생각을 하면서 합장예불하고 여래께서 몸과 마음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허망인지를 환하게 드러내 주시어 현재의 목전에서 생멸하는 허망은 무엇이며, 생멸하지 않는 진실은 무엇인지, 이 둘의 성질을 분명히 밝혀주시기를 발원하였다.

그때 파사익(波斯匿)왕이 일어나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지난날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못했을 때 가전연과 비라지자라는 두 외도(外道)를 받들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말하기를 이 육신은 죽은 이후엔 단멸로 사라지는데, 그것은 진정한 열반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부처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들긴 하오나 아직까지도 이 문제가 확연하질 못하여 의심스럽습니다.

어떻게 드러내야만 생멸하지 않는 이 마음의 경지를 직접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저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 번뇌망상이 다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까지 다들 이 문제를 듣기를 원하옵니다.“

[要義]

여기에서는 단견(斷見)에 대한 의심을 드러냈다.

아난은 앞서 객진(客塵)의 비유를 통해서 육신과 육진경계는 요동해도 상주진심은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한 말씀을 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생멸하는 가운데 불생불멸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육진경계를 분별하는 망상을 진실한 마음으로 오인하였기에 이러한 생멸심을 떠난 불생불멸하는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아직은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세존께선 바로 현재의 목전에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허망이며, 무엇을 생멸이라하고 무엇이 불생불멸인지를 분명히 제시하여, 진실과 허망이라는 이 두 가지의 실체를 명료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의심없는 확신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난이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 인데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으므로 파사익왕이 이로 인해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게 된 것이다.

파사익왕은 부처님을 뵙기 이전에 외도인 가전연을 섬겼는데, 그는 일체법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라고 하였으며, 비라지자는 모든 법은 본래 스스로 천연적으로 있다[自然]라고 헤아렸다.

서역인도에 외도가 많긴 하나 그들의 사상을 요약하면 유무단상(有無斷常)이라는 이 두 가지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두 외도가 헤아리는 단견사상을 파사익왕은 이미 받들고 섬겼었다. 그 때문에 지금에 와서 부처님을 뵙고 가르침을 들었다해도 지난날의 습관에 사로잡혀 사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단멸일 뿐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마음은 단상유무로 생멸하지 않는 상주불변하는 성질이라 하는 부처님말씀을 듣자 홀연히 의심이 일어나게 됐다. 때문에 여기에서 이 문제를 밝혀 주십사하고 청하게 된 것이다.

가령 여기에서 불생불멸하는 진실한 마음을 깨닫는다면 아난의 허망한 집착은 사라지고 진실상주한 본성이 스스로 나타나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죽은 뒤엔 단멸 뿐이라는 단견은 서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도 역시 많다.
즉 유학(儒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맑은 기운은 하늘로 되돌아가고 혼탁한 기운은 땅으로 되돌아 가며, 하나의 신령하고 진실한 성품은 태허로 환원한다 하는데, 이는 역시 단멸의 견해이다. 그들의 말대로 태허로 되돌아 간다면 현실적으로 선악업에 따른 인과의 차별상이 영원히 단절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히 인과가 존재해 있는데야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겠는가.

佛告大王. 汝身現在. 今復問汝. 汝此肉身爲同金剛常住不朽. 爲復變壞. 世尊. 我今此身終從變滅. 佛言大王. 汝未曾滅云何知滅. 世尊. 我此無常變壞之身雖未曾滅. 我觀現前念念遷謝新新不住. 如火成灰漸漸銷殞. 殞亡不息決知此身當從滅盡. 佛言. 如是大王. 汝今生齡已從衰老. 顔貌何如童子之時. 世尊. 我昔孩孺膚?潤澤. 年至長成血氣充滿. 而今頹齡迫於衰?. 形色枯悴. 精神昏昧. 髮白面皺. 逮將不久. 如何見比充盛之時. 佛言大王. 汝之形容應佛頓朽. 王言世尊. 變化密移. 我誠不覺. 寒暑遷流. 漸至於此. 何以故. 我年二十雖號年少. 顔貌已老初十歲時. 三十之年又衰二十. 於今六十又過於二. 觀五十時宛然强壯. 世尊. 我見密移. 雖此?落. 其間流易且限十年. 若復令我微細思惟. 其變寧唯一紀二紀. 實爲年變. 豈唯年變. 亦兼月化. 何直月化. 兼又日遷. 沈思諦觀. 刹那刹那念念之間不得停住. 故知我身終從變滅. 佛告大王. 汝見變化遷改不停. 悟知汝滅. 亦於滅時汝知身中有不滅耶. 波斯匿王合掌白佛. 我實不知. 佛言. 我今示汝不生滅性. 大王. 汝年畿時見恒河水. 王言. 我生三歲 . 慈母携我謁耆婆天. 經過此流爾時卽知是恒河水. 佛言大王. 如汝所說二十之時衰於十歲. 乃至六十日月歲時念念遷變. 則汝三歲見此河時至年十三其水云何. 王言. 如三歲時宛然無異. 乃至於今年六十二亦無有異. 佛言. 汝今自傷髮白面皺. 其面必定皺於童年. 則汝今時觀此恒河與昔童時觀河之見有童?不. 王言. 不也世尊. 佛言大王. 汝面雖皺. 而此見精性未曾皺. 皺者爲變不皺非變. 變者受滅. 彼不變者元無生滅. 云何於中受汝生死. 而猶引彼末伽黎等都言此身死後全滅. 王聞是言信知身後捨生趣生. 與諸大衆踊躍歡喜得未曾有

2. 부처님은 대왕에게 고하셨다.

“너는 이 육신이 죽은 뒤엔 단멸로 사라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나는 사후문제는 묻지 않고 단지 현재의 너의 육신만 묻겠다.

지금 다시 너에게
묻겠다.

너의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썩지 않고 상주하느냐. 아니면 변이하면서 파괴되느냐.“

“세존이시여. 저의 육신은 변화를 따라서 끝내는 소멸로 귀결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대왕아. 너는 너의 육신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는데도 끝내는 변이를 따라 소멸한다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아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무상하게 변화하면서 끝내 파괴되는 이 육신이 현재는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곤 하나 저는 현재 목전에서 찰나찰나 뒤바뀌면서 머물지 않고 새로워지는 모습을 관찰합니다.

이는 마치 타는 불이 끝내는 재가 되듯 점점 소멸하면서 죽어가는 일이 쉬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은 끝내는 다 소멸한 이후에야 끝이 난다는 것을 분명히 앎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말이 옳으니라. 대왕아. 너는 지금 이미 쇠잔한 나이로 늙어가고 있다. 얼굴의 모습은 동자시절과 비교해서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지난날 어린시절에 피부결이 윤택하였으며. 나이가 장성해선 혈기가 충만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 가는 나이라서 쇠잔한 늙음이 임박하여 형색은 초췌하고 정신은 어둡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은 하얗고 얼굴엔 주름살이 져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장성하여 혈기가 충만한 시절에 비유하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대왕아. 너의 형체와 용모는 하루아침에 단박 �진 않으리라.”

대왕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간의 변화는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하게 변화합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해가 가면 달이 오면서 춘하추동 사이 절이 뒤바뀌어 점진적으로 여기까지 이르러 왔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나이가 스무 살엔 나이 어린 소년이긴 하였으나 처음 열살 때보다 얼굴은 이미 늙었고, 서른 살엔 이십 세보다 더 쇠잔하여 지금은 육십 두살에 이르렀으나, 이를 오십 세에 비교하면 그 때가 지금보다 분명히 더 강건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은밀하게 변화하면서 사라져 가는 세간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사이에 끝없이 변역하는 모습을 우선 십년으로 한정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령 다시 저로 하여금 미세하게 사유하게 한다면 그 변화의 시기를 어떻게 십년 이십년으로 한정하겠습니까. 실로 해마다 변화하며. 어찌 해마다만 변화하겠습니까. 역시 달마다 변화하며, 어찌 달마다 변화하겠습니까. 다시 매일같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를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본다면 찰나찰나 생각 생각하는 사이에 잠시도 정지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육신은 변화하여 끝내 소멸한다는 것을 미리서 앎니다.”

부처님은 고하셨다.
“대왕아. 너는 정지함 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너는 끝내 소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역시 소멸하는 너의 육신 가운데서 소멸하지 않는 이치가 동시에 있다는 것도 아느냐.”

파사익왕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생멸하는 가운데 생멸하지 않는 성품을 그대에게 보여 주리라.

대왕아. 너의 나이가 몇 살에 항하강 물을 보았느냐.”

대왕은 말하였다.

“제가 태어난지 세살이 되자 자애로운 어머니께서 저를 이끌고 기바천신왕에 무병장수를 빌러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강을 건너면서 그 강이 항하강 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였다.

“대왕아. 네가 말한 것처럼 스무살 땐 열살 때보다 쇠잔하였고, 내지 육십에까지 이르러 가는 동안 날로 달로 해로 염념에 변화하였다.

그렇다면 네가 세살 적에 이 강물을 보았을 때와 십 년이 지난 열세 살에 그 물을 보았을 때와 어떻게 다르더냐.“

대왕은 말하였다.

“세 살에 보았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었으며. 지금 육십둘에 이르러서도 역시 달라진 모습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머리는 하얗게 세고 얼굴엔 주름살이 진 것을 상심해 하고 있다.

너의 얼굴은 분명히 어린 동자 때보다 더 많은 주름살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지금 이 항하강을 볼 때와 지난날 동자시절에 보는 항하강과 그
보는 마음에는 어린 동자와 늙음이라는 차이가 있더냐.”

왕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였다.

“대왕아 너의 얼굴엔 주름살이 갔으나 그러나 보는 마음의 성질엔 아직 주름이 가질 않았다. 변화하는 것은 주름살이 갔으나 변화하지 않는 마음엔 주름살이 지질 않았다.

변화하는 것은 소멸을 받아드리겠지만 변화하지 않는 마음은 생멸이 원래 없다. 어떻게 생멸 변화하는 육신 가운데서 너의 생사를 동일하게 받아 드리겠느냐.

그런데도 말가리 등의 외도들이 모두 함께 말하는 이 육신이 죽은 뒤엔 완전히 소멸한다 한 단견을 이끌어드리겠느냐.”

왕은 이 말씀을 듣고 이 육신은 사후에 금생을 버리면 다시 다음 생으로 간다는 것을 확신있게 알고 모든 대중들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하면 미증유의 법을 얻었다.

[要義]
여기에서는 외도의 단견을 논파하고 있다. 위에서 아난은 부처님께 바로 현재의 목전에서 육신과 마음의 생멸하지 않는 성품을 집어내 주시길 원하였다. 이 이치는 드러내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파사익왕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보여 주고 계신다.

여기에서 파사익은 생멸이 바로 상주의 이치임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사후의 단멸까지 집착한 자이다. 소멸의 근원은 소멸하지 않는 법칙을 굳이 안다면 태어나는 근본은 태어나지 않는 이치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진여상주의 도가 환하게 나타난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본성의 이치는 죽은 이후에 밝히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현재의 신심에서 이를 증험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선 파사익왕에게 “너의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썩지 않고 상주하느냐. 아니면 다시 변이하면서 끝내는 파괴되느냐”고 묻고 있는데, 이 질문은 육신은 끝내 변화하면 소멸해 간다는 말을 이끌어 내려 함 때문이다.

이같은 육신이 찰나찰나에 생멸변화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곳에서 바로 생멸하지 않는 진여상주의 성품을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진여상주의 성품은 무엇을 통해서 보겠는가. 이 문제는 세존께선 항하강 물을 보는 마음을 통해서 인증하고 계신다.

세월따라 육신은 변화를 거듭했건만 그 물을 보는 성품은 변화지 않았다. 이처럼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마음의 성품이 진여상주의 도이다.

이로써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의 변화는 정지함 없이 소멸한다 해도 그것을 따라 변화하지 않는 마음은 육신의 생사를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외도들이 주장하는 사후단멸의 견해를 잘 못된 편견일 뿐이다.

△ 四示顚倒之狀
阿難卽從座起. 禮佛合掌. 長?白佛. 世尊. 若此見聞必不生滅. 云何世尊名我等輩遺失眞性顚倒行事. 願興慈悲洗我塵垢. 卽時如來垂金色臂. 輪手下指. 示阿難言. 汝今見我母陀羅手爲正爲倒. 阿難言. 世間衆生以此爲倒. 而我不知誰正誰倒. 佛告阿難. 若世間人以此爲倒. 卽世間人將何爲正. 阿難言. 如來?臂兜羅?手上指於空則名爲正. 佛卽?臂. 告阿難言. 若此顚倒首尾相換. 諸世間人一倍瞻視. 則知汝身與諸如來淸淨法身比類發明. 如來之身名正?知. 汝等之身號性顚倒. 隨汝諦觀. 汝身佛身稱顚倒者. 名字何處號爲顚倒. 於時阿難與諸大衆. ??瞻佛目睛不瞬. 不知身心顚倒所在
△ 4. 전도된 형상을 보이시다.
3. 아난은 즉시 앉은 자리로부터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합장하고 크게 굻고 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가령 현재 보고 듣고 마음이 반드시 생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고요한 상주진심이어서 모든 부처님과 전혀 차별이 없을 것이온데 무엇때문에 세존께선 저희들이 진실한 본성을 잃고 전도된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 말씀하셨습니까. 원하옵건데 자비하신 마음으로 저희들의 번뇌를 씻어주소서.”

즉시 여래께선 금빛나는 팔을 펴시고 법륜문양이 있는 손을 아래로 늘어 뜨리시여 아난에게 보이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나의 인계(印契)를 맺은 손을 보라. 이 팔은 올바른 자세이냐. 아니면 반대로 뒤집힌 형상이더냐.”

아난은 말하였다.

“세간의 모든 중생들은 이 팔의 자세를 뒤바꾸었다 하겠지만 저는 어느 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어느 상태가 뒤바뀐 자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세간사람들이 이를 뒤바뀐 자세라고 한다면 세간사람들은 다시 무엇을 올바른 자세라고 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여래께서 부드럽고 향기로운 팔을 세우시어 위로 허공을 가리키면 올바른 자세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즉시 팔을 세우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자세를 뒤바뀐 자세라고 한다면 처음과 끝을 서로 교환했을 뿐인데 이처럼 처음과 끝이 뒤바뀐 모습을 일제히 위로 우러러본다.”

그렇다면 너의 육신을 모든 여래의 청정법신과 비교해서 밝혀본다면 여래의 상주진심인 법신은 올바르고 보편하게 아는 정변지(正변知)라 할 수 있고, 너희들이 육신에 집착한 허망한 마음은 뒤바뀐 성품이라고 부를 수 있다.

너희들은 자세하게 관찰해 보라. 너희들이 육신에 집착하는 허망한 마음과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을 비교했을 때 너희들 육신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뒤바뀐 망상이라고 한다면 이미 뒤바뀐 망상이라는 명칭이 있으므로 반드시 명칭이 걸맞는 실제의 알맹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실제의 처소로부터서 뒤바뀐 망상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느냐.”

이 때 아난은 모든 대중과 함께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채 부처님을 직시하였으나 자기들 육신과 마음의 뒤바뀐 실제의 처소를 알 수 없었다.


△ 五正責顚倒 佛興慈悲. 哀愍阿難及諸大衆. 發海潮音. ?告同會諸善男子. 我常說言色心諸緣. 及心所使諸所緣法. 唯心所現. 汝身汝心皆是妙明眞精妙心中所現物. 云何汝等遺失本妙圓妙明心寶明妙性. 認悟中迷
△ 5. 전도된 망상심을 정면으로 책망사시다.
4. 부처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난과 모든 대중들을 불쌍히 여기사 해조음(海潮音)으로 그 법회 대중들에게 두루 고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아. 나는 평소에 항상 말하기를 십일색법(十一色法)과 팔식심왕(八識心王)과 심법을 일으키는 사연(四緣)과 색법을 일으키는 이연(二緣)과 오십일심소(五十一心所)와 이십사종불상응행법(二十四種不相應行法)과 육종무위법(六種無爲法)과 세간 출세간의 의보정보일체법(依報正報一切法)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唯心所現]라고 하였다.

따라서 너희들의 육신과 너희들의 허망한 마음은 그 모두가 오묘하고[離各絶相] 밝고[虛靈洞徹] 진실하고[體無爲妄] 정미한[性無雜染] 이처럼 오묘한 마음 가운데서 나타난 모습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본래 오묘하여 원만하고[圓滿周?] 오묘하고[妙寂常恒] 밝은[明照不昧] 마음의 작용과[心爲性用] 보배와 같이[寶體眞精] 분명하여[明照虛靈] 오묘한[妙湛不動] 마음작용의 자체성품[性爲心體]을 잃은체 본래 진실한 마음은 인식하질 안혹 유독 망상심만을 진실로 인식하여 깨달음 속에서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느냐. 이곳이 전도된 소재이다.”   [要義]
아난은 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고 항하강을 보는 생멸상 가운데 생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는 다름아닌 앞에서 부처님의 금빛나는 주먹을 보았던 마음이 바로 보는 마음의 본성[見性]이다. 이로써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진실한 성품은 생멸상을 따르지 않으므로 본래적으로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난은 아직은 진실한 본성을 보지 못하고 망상심을 진실한 마음으로 오인하여 전도된 망상의 소재를 몰랐었다. 때문에 세존께선 팔을 펴시고 그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는 천연적으로 팔을 밑으로 늘어뜨렸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팔이 위에서 밑으로 꺼꾸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대상경계는 본래 진실상주하는 마음의 모습으로 떠올랐건만 되려 그것을 버리려고 염증을 낸다. 이는 무상한 생사의 모습을 버리고 떠나려 하는 소승외도의 견해이다.

다시 팔을 꺼꾸로 치켜 세우자 이를 올바르다 헤아리는 것은 무상한 생멸을 상주라고 인식한 경우이다. 이는 육도범부들의 전도된 망상심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반된 견해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팔일 뿐이므로 올바름과 뒤바뀜이라는 따로의 모습은 본래없다. 단지 처음과 끝을 서로 뒤바꾸었을 뿐인데도 그에 따라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켜, 세상사람들은 아래로 두었던 시선을 다시 위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여래의 법신과 세상사람들의 육신에 대한 분별심, 이 둘은 그 근원이 모두 하나의 법신일 뿐이다. 이같은 법신과 망상심을 비교해서 말해 본다면 여래의 법신은 정변지(正?知)라 하고, 세간인의 망상심은 본성법신에서 전도된 마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래법신은 편안하게 자유자재하건만 세간인의 망심은 그들의 육신에서 단견 아니면 상견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도된다.

세존께선 아난이 생멸하는 색신에서 상주법신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아난에게 전도된 소재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러나 아난과 대중들은 미혹한 마음 때문에 전도된 소재를 몰랐으므로 부처님은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법회대중들에게 두루 고하여 일체의 색심제법은 유심소현[色心諸法唯心所現]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육신과 그에 따른 분별심. 이 모두가 오묘하고 밝고 진실한 마음 가운데 떠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이치가 이러한데도 무엇 때문에 허망한 신심(身心)을 잘못 집착하여 본래 밝은 마음을 잃는가 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진실한 마음은 본래적으로 미혹하지 않았는데도 망심을 진실로 오인했기 때문에 정작 진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 六示迷悟同源
晦昧爲空. 空晦暗中結暗爲色. 色雜妄想想相爲身. 聚緣內搖. 趣外奔逸. 昏擾擾相以爲心性. 一迷爲心決定惑爲色身之內. 不知色身外 ?山河虛空大地咸是妙明眞心中物. 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惟認一浮?體. 目爲全湖. 窮盡瀛渤. 汝等卽是迷中倍人. 如我垂手等無差別. 如來說爲可憐愍者


△ 6.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의 근원임을 보이시다

5. “무엇 때문에 본래 미혹이 없는 진실한 마음에서 허망한 미혹이 일어났겠느냐.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진법계 여래장성심체엔 허망한 신심(身心)과 세계의 차별상이 본래 없었다. 단지 진실한 마음의 모습으로 청정한 법계 가운데서 최초일념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무명불각(無明不覺)을 이루었다[根本無明]

이 무명불각이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뒤덮어 영명하고 확철한 진공여래장성심체가 지각없이 완악한 허공을 의지하여 근본무명분별[能見相]의 세력이 응결하여 허깨비와 같은 사대색법(四大色法)으로 변하였다[現相]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일념무념으로 미혹하고 나자 본래 있던 지혜광채가 전환하여 허망한 견해로 변하였다. 그 허망한 견해로 허깨비 같은 사대색법을 상대적으로 마주하기를 오래하자 그 사대색법 가운데서 약간의 분야만을 취하여 자기의 허망한 견해와 화합하여 색법은 육신이 되고 허망한 견해는 망상이 되었다.[起業相  業繫苦相]

이처럼 허망한 신심(身心)을 집착하여 이윽고 본래 있던 진실한 성품을 잃으면 안으로는 근신(根身)과 밖으로는 세계가 벌어져 망상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쌓여 안으로는 낙사영자(落謝影子)를 분별하면서 요동하고 밖으로는 대상 색법을 분별하면서 달리는 어둡고 시끄러운 모습을 자기의 진실한 본성으로 여기게 되었다.[智相ㆍ相續相ㆍ執取相ㆍ計各字相]

이처럼 이미 광대한 진심을 미혹하고 나자 조그마한 환망의 오온심신을 내적으로 진실한 자기의 색신이라고 결정코 미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색신밖으로 산하대지와 허공까지도 그 모든 삼라만상이 자기의 묘명진심(妙明眞心) 가운데 떠오른 모습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를 비유하면 맑은 대해수는 버리고 하나의 물거품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이 이미 첫 번째 미혹이다. 다시 그 하나의 물거품을 전체의 바다로 오인함과 같은데, 이는 거듭된 미혹이다.

너희들도 미혹한 가운데 거듭 미혹한 사람이므로 내가 편 팔과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따라서 여래께선 너희들을 가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要義]
부처님께선 위에서 일체제법은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난이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할까 봐 염려스러웠다. 그 때문에 미혹과 전도의 근원을 유추하여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의 근원인 유심(唯心)의 의미임을 제시하여 전도된 망상심과 잘못된 견해를 논파하고 있다.

일체제법과 나의 몸과 마음이 이미 내 마음의 모습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같은 이치를 미혹하였을까. 이것이 아난의 궁금증이다. 그 때문에 이를 미혹한 망상의 유래를 추리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 미혹과 전도의 모습이다.

위에서 이종근본(二種根本)으로부터 지금까지 상온(想蘊)을 타파함으로써 전육식(前六識)을 소멸하여 첫 번째 전도된 망상을 밝히는 일은 여기에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