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7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34
 
능엄경 강의 7
 
 
   
 
◈ 三辯妄見破行蘊明七識無體分二
◈ 3. 허망한 견해[妄見]를 논변하여 칠식행온(七識行蘊)은 실체가 없음을 논파하기를 둘로 하다.
《初破妄分五
《다섯 분야로 망상은 실체가 없음을 타파하시다.
◎ 先徵破分別妄見無體分四
◎ 우선적으로 분별망견(分別妄見)은 실체가 없음을 논파하기를 네 분야로 하다.
▣ 初呈妄見 阿難承佛悲救深誨. 垂泣叉手而白佛言. 我雖承佛如是妙音. 悟妙明心元所圓滿常住心地. 而我悟佛現說法音現以緣心允所瞻仰. 徒獲此心. 未敢認爲本元心地. 願佛哀愍. 宣示圓音. 拔我疑根. 歸無上道
▣ 1. 망상의 견해를 드러내시다.

아난은 부처님이 자비로 구제하시는 심오한 가르침을 듣고 눈물을 떨구며 차수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께 이같이 오묘한 설법음성을 듣고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원래 원만한 상주심지(常住心地)라는 이치를 알긴 했으나 그러나 제가 부처님이 현재하시는 설법음성을 아는 것도 현재의 분별하는 마음이며, 부처님을 우러러 뵙는 것도 단지 이 분별심으로 알 뿐입니다. 이를 감히 본원심지(本元心地)로서 분별없이 직접 증득하는 마음이라고 인식하진 못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부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사 원음(圓音)의 설법으로 저의 의심을 뽑아 없애고 위없는 도로 귀결하게 해 주옵소서.”
 
[要義] 여기부터 선 두 번째로 전도된 망상을 밝혀 나간다. 아난은 전도된 망상심을 자기의 진실한 마음으로 여기다가 지금에야 부처님이 보여주신 묘명진심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설법음성을 듣고 오묘한 마음은 원래 원만한 이치임을 알기는 하였으나 이는 단지 설법음성을 듣는 것으로 인해 그것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분별하는 마음으로 안 것이지 그 본원심지를 분별없이 아는 지혜로 직접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의 마음을 자기의 본원심지라고 아직은 인식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옛 사람은 이 문제를 두고 말하기를 “자기의 마음을 철저하게 확인하여 의심없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그것이 진실한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아난의 깨달음은 단지 음성을 의지한 분별심 즉 생멸망상심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는 의근분별(意根分別)에 속한다. 때문에 의심을 제거해 달라고 하였다.

▣ 二揀妄緣不實

佛告阿難. 汝等尙以緣心聽法. 此法亦緣非得法性如人以手指月示人. 彼人因指當應看月. 若復觀指以爲月體. 此人豈唯亡失月輪. 亦亡其指. 何以故. 以所標指爲明月故. 豈唯亡指. 亦復不識明之與暗. 何以故. 卽以指體爲月明性明暗二性無所了故. 汝亦如是. 若以分別我說法音爲汝心者. 此心自應離分別音有分別性. 譬如有客寄宿旅亭暫止便去終不常住. 而掌亭人都無所去名爲亭主此亦如是
▣ 2. 허망한 인연은 진실이 아님을 간별하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희들은 허망한 분별심으로 설법을 들으므로 그 마음 법까지도 역시 설법음성과 함께 허망한 분별경계를 이루어. 설법이 일어난 본성 자리를 증득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佛]이 손[聲敎佛事]으로 달[眞心]을 가리켜 사람에게 보여주면[聞敎觀心] 그 사람은[聽敎者]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만 한다[因敎觀心].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 손가락을 달의 실체로 여긴다면,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의 본체로 여긴다면 어찌 달의 본체[眞心]만 잃으랴. 역시 그 손가락[聲敎]까지도 잃게 되리라.

왜냐하면 달이 있는 곳을 표시하고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의 실체로 잘못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敎]만 잃으랴. 역시 광명[心有覺知如明]과 어두움[敎體非覺知如暗]까지 잃으리라.

왜냐하면 손가락의 자체[敎體]를 달의 광명[眞心]으로 여겨 광명[覺]과 어두움[非覺]이라는 이 두 가지 성질에 있어서 그 어느 쪽도 명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관조의 작용이 없는 음성을 관조의 작용이 있는 진실한 마음으로 인식한다면 음성과 마음이라는 두 모습이 혼잡하여 이 둘이 동시에 명료하질 못하게 된다.

가령 나의 설법음성을 듣고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망상으로써 너의 진실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 진실한 마음이 설법음성의 분별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홀로 실체가 있어야만 한다.

분별심은 자체의 성질이 따로 없음을 비유한다면 어떤 객[分別心]은 여인숙[설법음성]에 숙박하면서 잠시 머물다간 바로 떠나므로[離塵無體] 끝내 항상 머물지 않으나 여인숙 주인은 도무지 떠날 곳이 따로 없으므로[眞心無還] 그를 여인숙 주인이라고 함과도 같다.

이도 역시 그러하다.”
 
▣ 三示根識俱妄  若眞汝心則無所去. 云何離聲無分別性(下暎前六識無體) 斯則豈唯聲分別心. 分別我容離諸色相無分別性. (下帶顯八識非眞) 如是乃至分別都無非色非空拘舍離等昧爲冥諦
▣ 3. 육근과 육식이 동시에 허망임을 보이시다.
8. “가령 분별하는 망상이 진실한 너의 마음이라면 따로 떠날 바가 없어야만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의 설법하는 음성을 떠나면 분별하는 실체적 성품이 따로 없느냐.

이러하다면 어찌 음성을 분별하는 이식(耳識) 분별심만 그러하냐. 나의 용모를 보고 분별하는 안식(眼識)까지도 모든 색상의 상호를 떠나면 분별하는 본성의 실체라곤 도무지 없다.

육식현행분별(六識現行分別)만 망상일 뿐만 아니라 내지는 분별주관인 육식(六識)자체와 분별대상인 육진(六塵)까지도 없어 현행분별(現行分別)이 끊긴 색법도 아니고 공성도 아닌[非色非空] 제8식을 외도인 구사리 등은 이를 미혹하여 그것이 우주의 시원인 명제(冥諦), 즉 신아(神我)로 헤아리는데 이것도 역시 법진분별(法塵分別) 망상일 뿐이다.”
▣ 四示可還非眞 離諸法緣無分別性. 則汝心性各有所還. 云何爲主
▣ 4. 되돌아 가는 것은 진실이 아님을 보이시다. 
9. “외도가 선정 속에서 명제(冥諦)라고 분별하는 대상 법진(法塵) 제8식과 그것을 주관적으로 사려하는 신아(神我 제7식. 외도는 신아의 성질은 思라고 함), 이 둘[能分別心 제7식, 所分別境 제8식]을 떠나면 분별하는 성질[제7식]은 동시에 없어진다.

이를 따라서 말해 본다면 네가 분별하는 심성은 각자 되돌아가는 바가 있다. 즉 아난의 제6식 분별대상인 설법음성은 성진(聲塵)으로 되돌아가고, 외도의 제7식 분별대상인 명제는 법진(法塵)으로 되돌아가는데, 무엇이 너에게 있어서 되돌아가지 않고 상주하는 진실한 마음이겠느냐.”  
[要義] 여기에서는 안식견정(眼識見精)을 빌려 제7식은 실체가 없음을 논파하여 제8식을 나타냄으로써 그 안에 진실한 분야인 청정한 마음을 상주열반의 자체로 삼으려 하였다.

제7식은 제6의식을 일으키는 뿌리[意根]로서 이것이 분별하는 성질이다. 이 분별성은 제6식 분별에 의지해야만 그 분별의 작용을 현실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분별하는 제7식의 자체성질[分別性]과 제6식의 현실분별작용은 이 모두가 하나로 제8식의 견분(見分)작용은 이 모두가 하나로 제8식의 견분(見分)작용에 속한다.

제6식분별은 밖으로 육진경계와 안으로 법진경계를 동시에 분별한다. 그러므로 이를 연심(緣心), 즉 인식대상을 깔고 그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지금 그 인식대상인 목전의 성진(聲塵)을 떠나면 분별하는 실체가 동시에 없어진다. 때문에 성진, 또는 법진의 편에서 논파하고 있다.

육식은 제7식을 근거로 의지해서 육진에 대한 분별의 작용이 현실화되는데, 지금은 이미 분별하는 실체가 없다면 이 두 종류의 식은 허망일 뿐이다.

분별하는 육칠 두 식만 그러할 뿐만 아니라 분별이라곤 도무지 없는 무의식 상태의 제8식까지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7식은 안으로 법진만을 분별할 뿐 밖으로 오진(五塵)경계에 대한 분별은 떠났으므로 법진 그 것은 실색이 아니며[非實色], 안으로 제8식 견분을 실아(實我)로 집착하기 때문에 실제의 공도 아니다[非實空], 제7식이 이처럼 분별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무명에 덮여 어두운 제8식일 뿐이다. 따라서 이도 역시 진실한 마음의 실체는 아니다.

그런데도 외도인 구사리 등은 이를 우주인생의 시원자리인 명제[冥諦]라고 잘못 헤아리고 집착한다. 제8식도 오히려 진실한 마음이 아닌데 하물며 육진과 법진을 분별하는 육칠식이 그 실체가 있겠는가.

제7식은 육식분별작용의 뿌리[意根]이다. 그 때문에 육식분별의 작용이 일어나는데, 가령 선정에 들어 밖으로 육진경계를 떠나 육식현형분별(六識現行分別)이 쉬면 제7식은 다시 안으로 제8식을 실재하는 자내아(自內我)로 분별한다.

그 때문에 외도는 이를 신아(神我, 즉 사려의 자체성질)로 여기고 이를 명초주제(冥初主諦)로 수립하여 진실상주의 도리로 헤아린다. 그들은 이를 근본시원으로 의지해서 우주만유가 이십오법(二十五法)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제7식을 논파함으로 인해서 칠식이 실재하는 내자아로 집착하는 제8식까지도 진실이 아님을 함께 나타냈다. 가령 법진경계를 떠나 분별하는 자제 성질마저 없어진다면 과연 무엇이 진실한 마음오서 실제하는 주제자이겠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분별성과 함께 되돌아가지 않는 자가 진실한 마음일 것이다.
◎ 二姑借見精以揀緣塵分二

▣ 初請

阿難言. 若我心性各有所還. 則如來說妙明元心云何無還. 惟垂哀愍爲我宣說
◎ 2. 우선 보는 마음[見精]을 빌려 대상분별심[緣塵]을 두 분야로 간별하다.
▣ 1. 법문을 청하다.

아난은 말하였다.

“저의 주관적인 분별심은 각자 되돌아가는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오묘하고 밝은 근원적인 마음은 무엇 때문에 되돌아가는 일이 없는지요. 연민의 마음으로 저에게 이 점을 설명해 주옵소서.”

▣ 次答分三

△ 初立見精
佛告阿難且汝見我見精明元. 此見雖非妙精明心. 如第二月非是月影. 汝應諦聽. 今當示汝無所還地
▣ 2. 답변을 세 분야로 하시다.
△ 1. 보는 마음[見精]을 수립하시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네가 나를 바라보고 아는 마음[見精明元]이 오묘하고 정미하고 밝은 본래적인 상주진심은 아니라 해도 그것은 마치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나타나는 제2월[第二月, 帶妄見精]이 하늘 위의 진실한 달 자체[第一月, 無妄眞心]는 아닐지라도, 제1월과 근접해 있는 상태에서 물 속에 어린 달 그림자[第三月, 分別妄想]처럼 천지현객으로 차이가 나지 않음과도 같다. 제2월은 제1월과 단지 손가락 한번 누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너는 자세하게 듣거라. 나는 지금 되돌아감이 없는 근본 마음의 이치를 너에게 보여 주리라.”

△ 二揀緣塵
阿難. 此大講堂洞開東方. 日輪升天則有明曜. 中夜黑月雲霧晦暝則復昏暗. 戶?之隙則復見通. 牆宇之間則復觀壅. 分別之處則復見緣. 頑虛之中?是空性. 鬱발之象則紆昏塵. 澄霽斂?又觀淸淨. 阿難. 汝咸看此諸變化相. 吾今各還本所因處. 云何本因. 阿難. 此諸變化. 明還日輪. 何以故. 無日不明明因屬日是故還日. 暗還黑月. 通還戶?. 壅還牆宇. 緣還分別頑虛還空. 鬱발還塵. 淸明還霽. 則諸世間一切所有不出斯類. 汝見八種見精明性當欲誰還. 何以故. 若還於明則不明時無復見暗. 雖明暗等種種差別見無差別.
△ 2. 분별심[緣塵]을 간별하시다.


“ 아난아. 이곳 대강당은 동쪽으로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동방에서 해가 하늘로 솟아 오르면 빛나는 광명이 비추고, 달도 없는 어두운 밤중에 구름과 안개마저 자욱하면 다시 깜깜하게 어두워진다.[明暗一對]

창문 틈 사이로는 공간이 통하여 보이고, 담장이 사이를 가로막으면 다시 시야가 막힌다.[通塞一對]

분별하는 처소[色法]에선 분별대상경이 보이나, 지각없는 허공에선 두루 공성(空性)으로 보일 뿐이다.[色法一對]

바람 불어 먼지가 자욱하면 물살이 어둡게 보이고, 날씨가 맑게 개면 다시 청명한 기상으로 보인다.[染淨一對]

아난아. 너는 이 모든 변화무쌍한 물상을 관찰해 보라. 나는 지금 이 모든 물상들을 각자 본래 있던 처소로 되돌려 보내리라.

무엇이 본래의 처소인가[本因]. 아난아. 이 모든 변화 가운데서 광명은 해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해라는 본래의 처소가 없으면 광명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광명의 원인은 해에 소속하는데, 그러므로 광명은 해로 되돌아간다.

이처럼 어두움은 달이 없는 껌껌한 밤으로 되돌아가고, 공간의 소통은 창문 틈으로 되돌아가며, 공간의 막힘은 담장으로 되돌아가고, 분별대상은 그 색법으로 되돌아가고, 지각없는 허공은 공성으로 되돌아가고, 자욱한 먼지는 티끌로 되돌아가고, 청명한 기상은 개인날씨로 되돌아간다.

모든 세간의 일체 소유물이 이 부류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너는 이상에서 열거한 여덟 종류의 물상을 보고 있는데 그 견정(見精)의 밝은 성품은 끝내 어느 곳으로 되돌려 보내려 하겠느냐.

왜냐하면 너의 견정을 광명을 볼 때 광명을 본래의 처소로 하여 그곳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어두움이 찾아 왔을 땐 다시는 어두움의 모습을 보지 못해야 만 한다.

광명과 어두움 등 여덟 종류의 물상이 갖가지로 차별이 나긴 하나 너의 견정은 이 모든 물상들을 일시에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차별상들이 너의 견정 가운데서 자생자멸(自生自滅)하면서 변화할지언정 경정만은 그 차별상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 진다.

△ 三示見性
諸可還者自然非汝. 不汝還者非汝而誰. 則知汝心_妙明淨. 汝自迷悶喪本受輪. 於生死中常被漂溺. 是故如來名可憐愍
△ 3. 견정의 근본성품을 보이시다.
13. 이상에서 열거했던 모든 되돌아가는 물상들의 변화는 자연히 너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겠지만 되돌아가지 않는 진심은 너의 진실한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를 통해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되돌아감이 없는 너의 진실한 마음은 본래 오묘하고 본래 밝고 본래 청정하건만 너는 단지 대상의 차별변화를 따라서 주관적으로 일으키는 분별망심을 진심으로 집착함 때문에 스스로가 미혹하였다.

이 때문에 본래 있던 진심을 상실하고 항상 생사윤회 가운데 빠져 있다. 그러므로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중생이라고 말한다.
[要義] 아난은 되돌아가는 것은 주인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되돌아가지 않는 진실한 마음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실한 마음은 밝히기 어려우므로 우선 견정을 빌려 논파하였다. 보는 마음은 보이는 대상경계에 뒤섞이나 제8식의 정명(精明)한 자체는 보이는 대상경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보는 마음을 견정명원(見精明元)이라고 하였다.

이는 진실한 마음이 아니긴 하나 그 근원은 진여상주의 마음에서 무명업식으로 변화하였으므로 업식이 일어난 자체인 진여와 진실하게 근접해 있다. 때문에 이를 제2월에 비유하고 자체의 달과 동떨어진 물 속에 어린 달 그림자가 아니라고 했다.

이 견정, 즉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 사물에 대한 주관경험적인 분별심을 아직 일으키지 않은 상태의 마음은 되돌아가지 않는 이치임을 깨닫는다면 진실한 마음을 그 자리에서 근접하여 깨달을 수 있다.

앞에선 분별심을 잘못 오인하여 진실한 마음을 잃는다고 했었다. 때문에 분별경계의 편에서 되돌아가지 않는 진심을 간별하였다. 가령 모든 분별심이 끝까지 청정해지면 진실한 성품은 스스로 나타나게 되리라.
◎ 三示見性離緣以顯見精分四

◎ 3. 보는 마음의 본성은 분별심을 떠났음을 보임으로써 팔식견정(八識見精)을 네 분야로 나타내다
▣ 初請不還
阿難言. 我雖識此見性無還. 云何得知是我眞性
▣ 1. 되돌아가지 않는 본성을 청하다.
14.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비록 보는 마음의 본성을 되돌아감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되돌아감이 없는 저의 진실한 성품은 어떻게 알 수 있을른지요.”

[要義] 여기에서 아난은 본성에 대해서 이해만 했을 뿐 아직은 깨닫진 못한 마음을 드러냈다. 우리가 대상 사물을 보고 아는 마음은 제8식의 견분정광(見分精光)이 오근(五根)에 호응해서 오진경(五塵境)을 명료하게 식별[了別]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우선 팔식견정(八識見精)을 빌려서 그 주체를 삼고 밖으로 오진(五塵)경계를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마음과 구별하여 논파하였다.

가령 오진경계에 대한 상대적인 집착심이 끊긴다면 주관적으로 보고 분별하는 마음도 역시 단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대상경계를 보는 다섯 종류의 현량[五種能見量]을 정한 뒤에 논파하고 있다.
▣ 二定見量
佛告阿難. 吾今問汝. 今汝未得無漏淸淨. 承佛神力見於初禪得無障?. 而阿那律見閻浮提如觀掌中庵摩羅果. 諸菩薩等見百千界. 十方如來窮盡微塵淸淨國土無所不?. 衆生洞視不過分寸
▣ 2. 다섯 종류의[五種能見現量] 보는 현량을 정하다.
15.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나는 지금 너에게 묻겠다. 너는 지금 어떤 공간의 장애도 없이 시야가 통하는 무루선정청정한 천안[無漏禪定淸淨天眼]을 아직 얻진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색계초선천(色界初禪天)까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나율(阿那律)은 염부제삼천세계(閻浮提三千大天世界)를 손바닥 안의 암마라과(庵摩羅果)를 보듯하며. 모든 십지(十地)보살들은 초지(初地)에서 백계(百界)로 백천세계를 보며 십지(十地)에 이르면 불가설(不可說)의 무량불찰(無量佛刹)를 보며, 시방여래에 이르러선 미진수(微塵數) 청정국토를 끝까지 다 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환하게 본다 할지라도 그 시야가 한치 한 푼의 공간을 통과하지 못한다.”
▣ 三揀緣塵
阿難. 且吾與汝觀四天王所住宮殿. 中間?覽水陸空行. 雖有昏明種種形象. 無非前塵分別留?. 汝應於此分別自他. 今吾將汝擇於見中. 誰是我體誰爲物象. 阿難極汝見源. 從日月宮. 是物非汝. 至七金山周?諦觀. 雖種種光亦物非汝. 漸漸更觀雲騰鳥飛風動塵起樹木山川草芥人畜咸物非汝
▣ 3. 분별심[緣塵]과 구별하시다.

16. “아난아. 나머지 네 현량견성은 우선 그만 두고 나는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이 머무는 궁전을 보고 있다. 그 중간에 유정물(有情物)로는 물과 육지와 허공을 날으는 모든 생명체의 활동을 두루 보고 있으며, 무정물(無情物)로는 어두움과 광명에 따른 갖가지 형상이 있으나, 이 모든 유정 무정물들은 분별인식대상인 목전의 사물 아님이 없다.

너는 여기에서 자타(自他)를 분별해 보라. 나는 지금 너를 거느리고 보는 마음과 보이는 대상 사물 가운데서 그 본성을 선택하겠다. 이 가운데서 어느 것이 나의 진실한 자체이며, 어느 것이 보이는 모든 물상이더냐.

아난아. 너의 시야를 주도로 확대해 보라. 설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일월궁(日月宮)이라 할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아니며, 최하로 칠금산(七金山)에 이르러서도 두루 자세하게 관찰해 보라. 그 산들에선 갖가지 광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도 역시 보이는 대상 사물일 뿐 너의 보는 마음은 아니다.

여기에서 점점 다시 관찰해 보라. 그 사이에서 구름과 새가 날으고, 바람이 불고 먼지가 일고, 수목과 산천과 풀과 사람과 가축, 이 모든 것은 보이는 사물일 뿐 너의 보는 마음은 아니다.”

▣ 四示見精
阿難. 是諸近遠諸有物性雖復差殊. 同汝見精淸淨所?. 則諸物類自有差別. 見性無殊. 此精妙明誠汝見性
▣ 4. 팔식견정을 보이시다.
“아난아. 가까이서 멀리서 보이는 이 모든 사물들의 성질은 서로가 다른 모습으로 차이가 나나 동일하게 너의 청정한 견정(見精)에 보이는 대상물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들은 그들 스스로 종류를 따라서 차별이 날지언정 너의 보는 성품, 즉 견정만은 그 사물을 따라 달라지질 않는다. 이처럼 정미하고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너의 진실한 보는 성품이다.”  
[要義] 여기에선 견정의 밝은 근원을 정면으로 제시하였다. 대상을 보는 마음은 제8식의 정미한 견분의 광채가 오진(五塵)을 상대적으로 비추면서 그 경계를 명료하게 아는 작용이다. 그 때문에 연진견(緣塵見), 즉 오진경계를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보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보는 마음이 최초로 대상경계를 감정의 분별없이 그 자체[自相] 만으로 인식할 때를 세 종류 인식논리, 즉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사비량(似非量) 가운데서 현량이라고 한다. 이 때는 경험 주관적인 안식분별(眼識分別)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단지 제8식견분의 정미하고 밝은 자체에만 속한다. 가령 그 때는 이미 알았던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비교 추리하는 비량(比量) 인식이라고 한다. 이는 제6의식에 속한다.

앞에서 이미 여덟 종류의 그 자체로 되돌아가는 물질로써 오진경계를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견해는 실체가 없음을 논파하였는데, 이 때의 분별견해가 비량 인식에 속한다.

지금은 제8식 현량의 편에서 대상을 분별없이 자상으로만 비추어 보는 팔식 견정을 나타냈다. 성문과 보살과 부처와 중생이 깨달음의 정도에 따른 성인과 범부라는 위치가 각자 다르므로 대상경계를 비추는 작용도 광협이 동일하진 않으나 그 모두는 제8식 견분 작용인 현량에 소속한다.

이같은 팔식 견분 현량은 천지 허공 만물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다할 지라도 한번 보면 그 모든 대상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환하게 관조한다. 이를 통해서 대상사물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차이가 나지만 그것을 보는 견정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다르지 않은 견정. 즉 보는 마음은 대상사물에 뒤섞이질 않는데, 이 정미하고 오묘하고 밝은 이치가 아난이 보는 마음의 본성자리이다. 이같은 본성의 이치를 안다면 진실한 성품을 깨달을 수 있다.
◎ 四破轉計見精是物分二
▣ 初破轉計
若見是物則汝亦可見吾之見. 若同見者名爲見吾. 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 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 云何非汝. 又則汝今見物之時. 汝旣見物. 物亦見汝. 體性紛雜. 則汝與我幷諸世間不成安立
◎ 4. 팔식견정은 하나의 사물이라는 집착을 두 분야로 타파하다.
▣ 1. 아난의 잘못된 헤아림을 논파하시다.

18. “어찌 유독 보이는 사물만 견정이 아니랴. 견정도 역시 사물이 아니다. 가령 너의 견정이 대상사물이라고 한다면 너는 나의 보는 마음도 하나의 사물로 보여야만 하리라.

가령 너와 내가 하나의 사물을 동시에 볼 때 그 사물에서 나의 보는 마음을 본다한다면 내가 너와 동시에 그 사물을 보지 않을 땐 무엇 때문에 내가 보지 않는 처소, 즉 보는 마음을 따로 보지 못하느냐.

가령 네가 보지 않을 때가 바로 나의 보지 않는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네가 보지 않는 곳일 뿐 당연히 여래가 보지 않는 마음의 모습은 아니다.

가령 네가 보지 않을 때 마음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보는 마음은 당연히 사물은 아니다. 그것이 어찌 너의 보는 마음의 자성이 아니겠느냐. 또 너의 보는 성품이 사물이라고 한다면 네가 지금 사물을 볼 때 네가 이미 사물을 보고 있으므로 보이는 사물 역시 너를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정의 물체와 유정의 보는 자성이 어지럽게 뒤섞여 구분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너의 보는 마음과 나의 보는 마음과 모든 세간의 사물들을 따로 구별할 수 없으므로 각자 일정한 처소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립이 불가능해 진다.”

▣ 二示眞見
阿難. 若汝見時是汝非我. 見性周변非汝而誰. 云何自疑汝之眞性性汝不眞取我求實
▣ 2. 진실한 보는 마음[眞見]을 보이시다.
19. “아난아. 네가 사물을 볼 때는 일정한 너의 보는 마음이지 나의 보는 마음은 아니다. 이 때 너의 보는 마음의 성품은 분명하게 나타나 유정?무정과 자타의정(自他依正), 이 모든 현실차별상을 두루 보편하게 보고 아는데, 이것이 너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무엇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면서 너에게 본래적으로 있는 진실한 본성을 진실한 마음으로 여기질 않고, 도리어 나의 말에서 진실을 추구하느냐.”
[要義] 여기에서는 아난의 다른 헤아림을 논파하였다. 앞에서 만물을 지적하여 견정을 보였기 때문에 아난이 견정도 하나의 사물인가 하고 오인 할까바 여기에서 그렇지 않음을 특별히 게시하였다. 즉 만물은 보이는 대상경일 뿐 보는 견정은 사물이 아니고.

이처럼 모든 사물을 떠나서 보는 마음을 제8식 현량견정으로 귀결시켰다. 이를 안다면 진실한 본성의 이치를 점진적으로 볼 수 있으리다.
◎ 五正破見量以顯眞心分二

▣ 初立量
阿難白佛言世尊. 若此見性必我非餘. 我與如來觀四天王勝藏寶殿. 居日月宮. 此見周圓변娑婆國. 退歸精舍祗見伽藍. 淸心戶當但???. 世尊. 此見如是. 其體本來周변一界. 今在室中唯滿一室. 爲復此見縮大爲小. 爲當牆宇夾令斷絶. 我今不知斯義所在. 願垂弘慈爲我敷演
◎ 5. 제8식 견분현량(見分現量)을 논파하여 진실한 마음을 두 분야로 나타내다.
▣ 1. 견분현량을 수립하시다.
20.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가령 보는 성품이 모든 사물에 본래 두루 보편하여 그것은 반드시 나의 진실한 성품일 뿐, 나머지 사물과 하나로 뒤섞이지 않는다면 모든 처소를 따라서 변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지금 저는 여래와 함께 모든 뛰어난 보배를 간직한 사천왕의 궁전을 굽어보기도 하며, 혹은 위로는 일월궁에 거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보는 성품은 사바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어찌 그리도 크더니 다시 기원정사로 되돌아오면 단지 하나의 가람만 보일 뿐이고, 다시 청정한 마음으로 강당 안으로 들어가면 처마와 회랑만 보일 뿐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선 저의 마음이 어찌 그리도 작은지요.

세존이시여. 보는 마음의 자세가 이와 같아 그 성품이 하나의 사바세계에 본래 두루 보편하다가 강당 안에 있으면 한 방안에만 그득합니다. 이는 보는 성품이 축소되어 작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과 집이 간격을 막아 보는 마음이 단절된 것입니까.

저는 혹은 축소된 것인지, 단절한 것인지. 이 의미의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원하옵건대 커다란 자비를 베푸사 저에게 이 점을 부연 설명해 주소서.”
▣ 次正破
佛告阿難. 一切世間大小內外諸所事業各屬前塵. 不應說言見有舒縮. 譬如方器中見方空. 吾復問汝. 此方器中所見方空. 爲復定方. 爲不定方. 若定方者別安圓器空應不圓. 若不定者在方器中應無方空. 汝言不知斯義所在. 義性如是云何爲在. 阿難. 若復欲令入無方圓. 但除器方. 空體無方. 不應說言更除虛空方相所在. 若如汝問. 入室之時縮見令小. 仰觀日時汝豈挽見齊於日面. 若築牆宇能夾見斷. 穿爲小竇寧無續迹. 是義不然
▣ 2. 정면으로 논파하시다.

21.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일체세간에서 한 사바세계의 광대함과 한 방의 작음과 담장과 집이 공간을 안과 밖으로 단절함. 이들 모든 현실 작용은 한결같이 목전에 나타난 오진경계에 소속하지 않음이 없다. 그렇다면 이같은 목전 오진경계를 두고 너의 보는 마음이 대사에 따라서 크게 늘어났다가 작게 축소되고 다시 간격을 따라 단절한다고 마음이 대상에 따라서 크게 늘어났다가 작게 축소되고 다시 간격을 따라 단절한다고 말해선 안된다.

오진경계상은 크고 작음과 안과 밖의 간격이 있으나 너의 보는 성품은 늘어남도 축소됨도 단절도 연속도 없다.

그것을 비유하면 마치 네모난 그릇에선[一切塵相] 네모난 허공의 모습[見性眞心]을 보는 것과 같다. 나는 다시 너에게 묻겠다. 이 네모난 그릇 가운데 보이는 네모의 허공엔 단정적으로 네모난 허공의 모습이 있느냐. 아니면 단정적인 네모의 모습이 없더냐.

가령 단정적인 네모의 모습이 그 안에 있다면 그 허공의 모습을 따로의 둥근 그릇에 안치한다 해도 그것은 둥근 모습의 허공상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만일 단정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네모난 그릇 속에 있다해도 단정적으로 네모난 허공의 모습은 없으리라.

네가 이 의미를 모르겠다한 그 소재처가 이와 같다. 이처럼 보는 성품은 어느 처소엔들 없는 곳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일정한 소재처를 추구하느냐.

아난아. 허공의 성질이 그릇이 들어가도 네모와 둥근 모습이 없게 하려한다면 네모나고 둥근 차별상의 그릇만을 치우면 된다. 허공의 자체는 네모와 둥근 모습이 본래 없으므로 그 두 그릇을 치운 뒤에 허공에 네모지고 둥근 모습의 소재처를 다시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해선 안된다.

이처럼 보는 성품은 장애가 없으므로 오직 목전의 오진경계만 제거할 뿐 보는 성품엔 대소의 차별이 본래 없다.

가령 네가 질문한데로 방 안에 들어 갈 땐 보는 마음이 축소되어 작은 모습을 이룬다면 우러러 일월궁을 관찰할 땐 너는 그 보는 성품을 끌어당겨 일월궁의 면적과 일제히 평등하게 하느냐.

만일 담장과 집이 간격을 막아 보는 마음을 안 밖으로 단절한다면 그 담장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땐 단절된 보는 성품을 다시 이끌어 그 자취를 안과 밖으로 연속시켜야만 하리라.

이 의미는 필연적으로 그렇지를 못다.”

《二顯眞
一切衆生從無始來. 迷已爲物. 失於本心. 爲物所轉. 故於是中觀大觀小. 若能轉物則同如來. 身心圓明不動道場. 於一毛端변能含受十方國土
《2. 진실한 마음을 나타내시다.
22. “일체 세간 출세간의 범부 외도 소승인들은 시작 없는 이래로 범부와 외도는 사물을 자기의 진실한 본성의 모습으로 오인하고, 소승은 자기의 본성을 따로의 사물로 잘못 집착하여 근본여래장성일심을 잃고 도리어 대상사물의 지배를 받는다. 그 때문에 이 근본일심을 크고 작은 차별적인 모습으로 보면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가 전혀 없다.

가령 그들이 목전의 모든 사물을 전환하여 자기의 일심여래장성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면 그 즉시 여래와 동일하여, 바로 그 마음은 원만하고 밝으리라. 따라서 도량에서 꿈적하지 않은 체 한 털끝에서 시방국토를 두루 빠짐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要義] 여기에서는 제8식견분현량을 정면으로 논파하였다.

모든 중생들은 진실한 마음을 미혹했기 때문에 제8아뢰야식이라는 무명업식이 이루어졌다.

이 아뢰야식은 삼분(三分)을 갖추고 있는데, 첫째는 자증분(自證分), 둘째는 견분(見分), 세번째는 상분(相分)이다. 최초무명의 세력이 응결된지 오래고 나면 이윽고 지각없는 허공이 이루어지고, 다시 허망한 사대환색(四大幻色)이 성립한다.

이로 인해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 사대환색을 자기의 참 모습으로 부여잡아 중생을 이룬다. 그러므로 근신과 기계, 이 모든 만물이 이를 따라서 일어난다.

지금은 이같은 허망의 모습을 타파하여 진실한 본성의 이치를 나타내려 하였다. 때문에 우선적으로 분별대상인 만물, 즉 상분경계부터 구별하여 그에 따른 집착을 버리게 하였다.

우선적으로 보는 성품은 대상경계의 인연, 즉 상분을 떠났음을 나타냈다. 이처럼 상분이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주관적으로 보는 견해까지도 역시 단절하였다. 이는 안식분별을 제8식 견분현량으로 귀결시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안식분별이 이미 단절하여 팔식견분현량이 홀로 존재하나 제8식의 견분현량마저 타파되진 않았다. 이 미세하게 생멸하는 견분현량에 근신과 기계가 분별없는 자체상(自相) 그대로 원만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아직은 차별에 따른 한량이 간직되어 있어 법계를 일시에 원만하게 관조하는 무루현량(無漏現量)의 경지는 아니다. 즉 아직은 유루현량(有漏現量)인 것이다.

때문에 안과 밖과 크고 작은 데 따른 차별적 견해가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제8식 유루견분현량마저 타파되고 나면 근신과 세계에 대한 분별을 둘 다 잊고 시방국토를 원만하고 분명하게 두루 관조 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미가 이같지 않다면 어떻게 유루견분현량이 한번 타파되고 나면 한 털끝에서 시방국토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 이 문제를 그릇의 비유로써 논파한 이유는 원만하고 밝고 오묘한 마음이 지금은 중생의 미혹 속에 있어, 근신과 기계에 한정되어 그 장애를 받기 때문이다.

가령 안으로 신심(身心)의 분별에서 해탈하고 밖으로 세계에 대한 집착심마저 잊는다면 원만하고 오묘하고 밝은 심체가 바로 그 자리에서 목전에 나타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릇만 제거하면 허공의 자체엔 방원의 모습이 본래 없다 하였다. 허공에서 방원의 모습을 따로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옛날 큰스님이 말했던 “진실을 따로 구하지 말고 상대적인 분별심만을 쉬도록 하라”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가령 견분현량이 한번 단절하면 그에 상대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상분경계도 단박 인식대상으로서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상분경계도 단박 인식대상으로서의 상대적 존재성을 잃게 된다. 이것이 사물을 전환하여 자기의 평등일심으로 귀결시키면 여래와 동일한 경계에서 몸과 마음이 원만하고 투명하여 한 털끝에서 시방국토를 함용하는 이치이다.

처음 일심진여의 이치를 미혹하여 그것이 허망한 모습으로 일어났으므로 지금 다시 그 허망한 모습을 전환하여 진여일심으로 귀결시켰다. 때문에 진여일심의 모습인 여래와 동일한 것이다. 이처럼 심오하게 관찰해야만 여래가 설법하신 오묘한 이치를 볼 수 있다.

본래 깨달은 마음으로부터 미혹의 망상에 이르고 미세한 무명에서 거친 번뇌의 모습이 나타나 자연스럽게 기신론에서 수립한 삼세육추(三細六추)의 차별상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망상을 타파하여 진여일심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지말번뇌인 육추번뇌로부터 미세한 삼세의 번뇌로 이르러 최후로 일념생상무명(一念生相無明)마저 끝까지 타파해야만 한다. 이것이 일심진여의 이치로 되돌아가는 순서이다.

이 이치는 기신론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따라서 기신론으로 이 경전의 의미를 비교해 본다면 전혀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라면 이 점을 살펴보기 바란다.

종전에 아난이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제를 받은 이래로 허망한 견해를 논변하여 견분을 타파하고 제7식 행온(行蘊)을 소멸시킴으로써 진실한 마음의 이치를 나타냈다. 이로써 두번째 전도된 망상을 밝히는 일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