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 해제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6:31
해 제(解題)  
 

 『선림보훈(禪林寶訓)』은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스님들의 도와 덕에 대한 교훈을 모은 글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송(宋)나라 때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묘희 종고(妙喜宗果:佛果克勤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5세 법손)스님과 죽암 사규(竹庵君珪:佛眼淸遠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5세 법손)스님이 운거산(雲居山) 운문사(雲門寺)의 옛터에 토굴을 짓고 20여년간을 살면서 송고(頌古) 100여편을 지었는데 이때에 모은 것이다. 이는 총림의 도덕이 쇠퇴하여 감을 염려하여 옛스님들의 말씀이나 수행을 수립하여 납자들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출판 유포되지 못하고 순희(淳熙:1173∼1189) 연간에 동오(東吳)의 정선(淨善)스님이 운거산에 갔다가 조암(祖庵:靑原惟信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4세 법손. 衡岳에 30년간 은거함)스님에게서 보훈(寶訓)을 얻었다. 그러나 벌레먹고 손실된 불완전한 상태여서 10여년간 다른 어록(語錄)들과 전기(傳記)를 참고하여 황룡 혜남(黃龍慧南:남악의 11세 법손)에서 불조 졸암(佛照拙庵:남악의 16세 법손) 및 간당 행기(簡堂行機:남악의 16세 법손)스님까지 50여편을 더 수집 보완하여 300여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편집된 『선림보훈』은 그 뒤 명말(明末)에서 청대(淸代)에 걸쳐 몇가지 주석서가 저술되었다. 명말 숭정(崇楨) 8년(1635) 운서사의 대건(大建)스님이 지은 『선림보훈음의(禪林寶訓踵義)』 1권이 처음 나왔고, 이를 토대로 명말 영력(永曆) 4년(1650) 장문가(張文圈)와 장문헌(張文憲)이 편찬한 『선림보훈합주(禪林寶訓合註)』 4권이 나왔다. 이어 영력(永曆) 8년(1654) 앞의 합주(合註)에 서(序)를 썼던 행성(行盛)스님은 42분 스님의 깊은 뜻을 염송(頌) 74수로써 나타내고, 『선림보훈염송(禪林寶訓頌)』 1권을 지었다. 그 후 청(淸) 강희(康熙) 17년(1678) 덕옥(德玉)스님의 『선림보훈순주(禪林寶訓順)』 4권과 강희(康熙) 45년(1706) 지선(智禪)스님의 『선림보훈필설(禪林寶訓筆說)』 3권이 있다. 이처럼 많은 주석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들 서문에서 번번히 밝히고 있듯 총림이 쇠퇴함에 따라 총림의 귀감이 되는 것을 밝히고자 한 때문이다. 
정선(淨善)스님이 중편(重編)한 명간(明刊)의 선림보훈집(禪林¿訓集) 4권본에 의하면 권1에는 명교 설숭(明敎契崇)에서 진정 극문(眞淨克文)까지 77편, 권2에는 담당 문준(湛堂文準)에서 절옹 여담(浙翁如)까지 72편, 권3에는 설당 도행(雪堂道行)에서 서현사 변공(棲賢寺 辯公)까지 77편, 권4에는 불지 단유(佛智端裕)에서 뇌암 도추(懶庵道樞)까지 64편, 모두 290편을 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일찍 『선림보훈』이 간행되었다. 현재 보물 제7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림보훈』(上·下)는 그 간기(刊記)에 의하면, 고려 우왕(王) 4년(宣光 8년, 1378) 충주의 선찰(禪刹)인 청룡선사(淸龍禪寺)에서 개판(開板)하였다.
양가(兩街) 요암행제공(了庵行齊公)이 『선림보훈』을 얻어보고는 처음 보는 것이라 감탄하여서 그의 문인 상위선사(尙偉禪師)에게 판각하여 유포할 것을 부탁하니, 상위선사는 만회(萬恢)스님과 함께 모연하고 고식기(高息機)와 최성록(崔星錄)이 모연을 도왔다. 그리고 환암(幻庵)스님이 글〔題〕을 써주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조선 중종(中宗) 20년(圈紛 4년, 1525) 순천 대광사(大光寺)에서도 상·하 두 권으로 된 『선림보훈』2이 간행되었다.
선림보훈서(禪林寶訓序)
『선림보훈(禪林寶訓)』은 옛날 묘희 대혜(妙喜大慧:1088∼1163)스님과 죽암 사규(竹庵 君珪:1082∼1146)스님이 강서(江西)땅 운문사(雲門寺)에서 토굴을 짓고 살 때 함께 편집한 것이다.
나는 순희(淳熙:1173∼1189) 연간에 운거산(雲居山)에 노닐다가 이를 조암(祖庵) 노스님에게서 얻었는데, 세월이 오래된 탓에 좀이 슬어 처음과 끝이 완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 뒤 어록(語錄)이나 전기(傳記) 가운데 보이는 것을 10여 년간이나 모았더니 가까스로 50여 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황룡 혜남(黃龍惠南:1002∼1069)스님에서 불조 졸암(佛照拙庵:1121∼1203)·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큰스님들이 남긴 어록을 가지고 절요(節要)하고 수집하여 300편으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이는 얻어진 대로 순서를 정하였을 뿐, 시대순으로 편집하지는 않았다.
대체의 내용은 납자들로 하여금 권세와 이익을 구하거나 나와 남을 구별하는 마음〔人我 見〕을 깎아내고, 도덕과 인의〔仁義〕로 나아가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 문체는 여유롭고 평이하여 궤변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투가 없어서 실로 입도(入道)를 돕는 원대한 법문이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경판에 새겨 널리 퍼뜨리려면 반드시 한 번 보고 마음으로 인정하는 도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비록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늙어 죽는다 해도 뜻〔圍〕과 바람〔願〕이 만족되리라.
동오(東吳)지방 사문(沙門) 정선(淨善)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