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25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를 바탕삼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08
25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를 바탕삼다   산당 도진(山堂道震)스님 / 1079∼1162 
 

 1. 산당 도진(山堂道震) 스님이 처음 조산(曹山)에 주지하라는 명령을 물리치자 군수가 글을 보내 권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사양하였다.
"고량진미의 음식을 먹고 명예나 탐하는 납자가 되려 한다면 초의(草衣)를 입고 먹지 않으며 산에 은둔하는 야인(野人)이 되느니만 못합니다." 『청천재암주기문(淸泉才庵主記聞)』

2. 뱀과 호랑이는 올빼미와 소리개의 천적은 아니지만 올빼미와 소리개가 울부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뱀이나 호랑이에게 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와 돼지는 까치가 타고 놀 것은 아닌데도 까치가 모여서 타고 노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조주(趙州)스님이 어떤 암자의 주지를 방문하였는데 생반(生飯:재나 공양 후 귀신이나 짐승을 위해 조금씩 떼어낸 음식)을 내어왔다. 조주스님이 "까마귀는 사람만 보면 무엇 때문에 날아가버릴까?"하고 말하자, 주지는 망연하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는 앞의 얘기를 받아서 스님에게 묻자, 조주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에게 살생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을 의심하면 그 사람도 나를 의심하며, 외물(外物)을 잊어버리면 외물도 나를 잊게 된다. 옛사람이 독사나 호랑이와 짝을 하고 놀았던 것은 이 이치를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
방거사(居君:?∼808)가 말하기를, "무쇠소〔鐵牛〕가 사자의 포효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흡사 목인(木人)이 화조(花鳥)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극진한 말씀이라 하겠다. 『여주거사서(與周居君書)』

3.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은 은혜로우면서도 지나치게 베풀어서는 안되니 지나치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며, 위엄스러우나 사나와서도 안되니 사나우면 원망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어도 교만해지지 않고 위엄스러워도 원망을 듣지 않게 하려면, 은혜는 반드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베풀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어져서는 안되며, 위엄은 반드시 죄 있는 사람에게 가해져야지 무고한 사람에게 엉뚱하게 미쳐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 은혜가 후하다 해도 대중들에게는 교만함이 없고, 태도가 근엄해도 원망이 없다.
칭찬하기에 부족한 공로인데도 상이 너무 후하거나 따질 정도의 죄가 아닌데도 벌이 너무 무거울 경우, 보통사람이라면 교만과 원망을 내게 마련이다.

4. 불조의 도는 중도(中道)를 얻는 데 있을 뿐이니 중도를 지나치면 치우치고 삿되게 된다. 또한 모든 일에 자기 의사를 끝까지 고집해서는 안되니 그렇게 하면 환란이 생긴다. 예나 지금이나 절제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거의 위태로와서 망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누구라서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어질고 지혜로운 인재만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으니 그것을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5. 산당스님이 상서(尙書)인 한자창(韓子蒼)·만암 도안(萬庵道顔) 수좌·정현 진목(正賢眞牧)스님과 함께 운문암(雲門庵)으로 피난을 하였다.
한공이 이런 차에 만암스님에게 물었다.
"근래에 들으니 이성(李成)의 군사에게 잡혔다더니〔南宋 高宗 紹興 원년(1131)에 있었던 난〕 무슨 수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요?"
그러자 만암스님이 대답하였다.
"포로가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여러 날을 시달리다 결국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우연히도 큰 눈이 내려 집을 덮어버리자 묶여 있던 벽이 까닭없이 무너지더군. 그날 밤에 요행히 탈출한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지."
한공은 다시 물었다.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빠져나오려 하였읍니까?"
만암스님이 대꾸를 않자, 공은 거듭 따졌다. 스님은 "그걸 말해 뭘하겠나. 우리는 도를 배워 바른 이치〔義〕로 바탕을 삼았으므로 죽으면 그만일 뿐 무엇을 두려워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공은 턱을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이로부터 선배들이 세속의 환란을 당해서 사생을 다툴 때 모두 처신과 결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 산당스님이 백장(百丈)스님에게서 물러나 한자창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벼슬을 맡았던 자들은 덕도 있고 명(命)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곡히 세 번씩이나 청해야 나갔고, 일단 마음만 먹으면 물러나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벼슬하는 자들은 오직 권세를 위할 뿐이다.
나가고 물러나는 처신을 알아서 바른 도를 잃지 않는 자라면 현명하고 지혜롭다 하겠다." 『기문(記聞)』

7. 산당스님이 야암(野庵)스님에게 말하였다.
"주지는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야 한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자기에서 나와야만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사랑과 증오의 차별된 감정이 마음에서 생기지 않고, 거칠고 오만하며 삿되고 치우친 기색은 들어갈 곳이 없다." 『환암집(幻庵集)』

8. 이상로(李商老)는 이렇게 말하였다.
"묘희 종고(妙喜宗:1089∼1163)스님은 도량이 넓고 누구보다도 절의(節義)가 굳으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부(老夫)스님과 함께 보봉(¿峯)스님을 겨우 사오 년 모셨는데, 열흘만 보지 못해도 반드시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렸다. 우리집 식구가 온통 종기를 앓자 스님은 집을 찾아와 몸소 약을 달여주며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듯 예의를 다하였다.
되돌아왔을 때 수좌 도원(道元)스님이 그 일을 나무라자 그저 `예예'하면서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식견 있는 자들은 여기서 스님이 큰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당스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고시자(宗侍者:묘희)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데, 내 안타깝게도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담당스님이 죽자, 묘희스님은 발에 못이 박히도록 천리길을 달려가 저궁(渚宮)의 무진거사(無盡居君)를 방문하고 탑명(塔銘)을 부탁하였으니, 담당스님이 죽은 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힘이라 하겠다. 『일섭기(日涉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