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22 출가한 뜻을 저버리지 않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05
22  출가한 뜻을 저버리지 않다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 / 750∼852 
 

 1. 설당 도행(雪堂道行:750∼852)스님이 천복사(薦福寺)에 머물 때 하루는 잠시 들른 납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복주(福州)에서 왔읍니다."
"오던 길에 훌륭한 큰스님을 뵈었는가?"
"요전에 신주(信州) 박산(博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오본(悟本)스님이란 분이 계셨읍니다. 그분께는 아직 절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훌륭하신 큰스님임을 알 수 있었읍니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절로 들어가는 길이 확 트였고, 회랑은 정연하게 닦여 있었으며, 법당에 향과 등불이 끊어지지 않았읍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종과 북소리가 분명하였으며, 두 때의 죽과 밥은 정결하였고, 스님들이 가다가 사람을 보면 합장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그분이 훌륭한 스님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설당스님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본스님은 본래 훌륭하다. 그러나 그대도 안목을 갖추었다."
바로 이 사실을 군수 오부붕(吳傳朋)에게 전달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스님의 이야기가 범연령(范延齡)이 장희안(張希顔)을 추천한 일과 매우 비슷하고, 각하의 훌륭함도 장충정공(張忠定公)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노승은 너무 늙었으니 스님을 주지로 청한다면 문중의 영광이겠읍니다."
오공(吳公)은 매우 기뻐하였고, 오본스님은 그 날로 천복사로 옮겨왔다. 『동호집(東湖集)』

2. 천리나 되는 튼튼한 둑도 개미떼에게 무너지고, 아름다운 흰구슬도 흠 때문에 쪼개진다. 하물며 위 없는 오묘한 도를 둑이나 옥 따위에 비하며,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개미의 파괴나 옥의 흠집 정도에 비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뜻을 확고부동하게 세우고 정밀하게 닦아 나아가며 굳게 지켜 완벽하고 훌륭하게 수행(修行)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할 수 있다. 『여왕십붕서(與王十朋書)』

3. 내가 용문사(龍門寺)에 있을 때, 병철면(昺鐵面)스님은 태평사(太平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떤 이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병철면스님이 고향을 떠나 행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부하던 어느 날 밤에 책을 불에 놓쳐 모조리 타버렸다. 그러자 책을 주웠다가 땅에다 내던지면서 `부질없이 사람의 마음만 어질럽힐 뿐이군!' 하였다." 『동호집(東湖集)』

4. 설당스님이 회암 혜광(晦庵惠光)스님에게 말하였다.
내가 20살 쯤에 독거사(獨居君)를 뵙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에 줏대가 없으면 자립하지 못하고,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한 이 말을 평생 실천한다면 성현의 일이 완성되리라."
나는 그 말씀을 간직한 채,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닦고 출가해서는 도를 배워 드디어는 나 자신을 통솔하고 대중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저울이 무게를 달고 곱자와 콤파스가 원과 사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버리면 일마다 법칙을 잃게 된다. 『광록(廣錄)』

5. 고암(高庵)스님이 대중에 임하면 반드시 "대중 가운데서 지견있는 사람을 꼭 알아야 한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 `행동거지는 뛰어난 무리들을 바라보아야지, 헛되이 용렬한 이들을 좇아가서는 안된다'고 하신 위산(山)스님의 말씀도 못들어 보았는가. 평소 대중과 섞여 살면서도 어리석은 무리에 떨어지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이 말을 했었다. 빽빽한 사람 중에 비루한 자는 많고 식견 있는 자는 드문데, 전자에는 익숙해지기 쉽고 후자와는 친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결단코 누군가가 분발해 낼 수 있다면, 그 힘은 일당백(一當百)쯤 되어서 용렬한 습기가 다하여 참으로 훤출하게 격식을 벗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평생 그 말씀을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출가했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록(廣錄)』

6. 설당스님이 차암수인(且庵守仁 : ?∼1183))스님에게 말하였다.
"일을 맡으면 반드시 중요한 정도를 재보고, 말을 꺼내려면 우선 깊이 생각하여 중도(中道)에 맞도록 힘써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가령 성급하게 일을 해나가면 완성하는 경우가 드물며, 설사 해냈다 해도 끝내 만전을 기하지는 못한다. 나는 대중 가운데 살면서 이익과 병통을 골고루 보아왔는데,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중을 감화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뜻과 재능이 있는 후배들이 살펴 실천하기를 서원하여 바야흐로 커다란 이익이 되어 주었다."
영원(靈源)스님도 일찌기 이렇게 말하였다.
"범인(凡人)은 평소에는 안으로 관조하여 깨우치는 경우는 많아도, 일에 부딪치면 바깥으로 마음이 치달려서 훌륭한 법체(法體)를 잃는다. 반드시 불조를 잇겠다는 책임을 생각하여 후배를 인도하려 한다면 항상 자신부터 단속해야 한다." 『광록(廣錄)』

7. 응암 담화(應庵曇華:1103∼1163)스님이 명과사(明果寺)에 머물자 설당스님이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 만났다. 이 일을 가지고 더러 이렇쿵저렇쿵하는 자가 있자, 설당스님이 말하였다.
"조카 응암은 사람됨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고 먼저는 칭찬했다가 뒤에 가서 비방하지도 않으며, 아부하는 모습으로 구차하게 영합하거나 교묘한 말을 할 줄도 모른다. 더우기 명백하게 도를 보아서 머물고 떠남에 자재하니, 납자들 가운데서도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이므로 내가 굳이 그를 소중하게 여긴다." 『차암일사(且庵逸事)』

8. 배우는 사람의 혈기(血氣)가 심지(心圍)를 이기면 소인이 되고, 심지가 혈기를 이기면 단정한 사람이 된다. 올바른 인재는 혈기와 심지가 가지런하여 도를 체득한 현성(賢聖)이 된다. 
어떤 사람이 억세고 괴퍅하여 곧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함은 혈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며, 단정한 인재가 착하지 못한 일을 강요당했을 때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은 심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광록(廣錄)』

9. 고암스님이 운거사(雲居寺)에 머물 때 보운 자원(普雲自圓)스님이 수좌(首座)가 되었고, 재목감이 될 만한 어떤 스님이 서기(書記), 백양 법순(白楊法順 : 1076∼1139)스님이 장주(藏主), 법통 오두(法通烏頭)스님이 지객(知客), 정현 진목(正賢眞牧 : 1084∼1159)스님이 유나(維那), 조카 담화(曇華)스님이 부사(副寺), 조카 덕용(德用)스님이 감사(監寺)로 있었는데, 모두가 덕업이 있는 자들이었다.
조카 덕용스님은 평소에 청렴하고 검약하여 상주물(常住物)인 기름으로 불을 켜지 않자, 조카 담화스님이 그것을 희롱하였다.
"훗날 큰스님이 되려면 모름지기 시초부터 대범해야 합니다. 이렇게 째째해 가지고서야 되겠읍니까?"
이에 덕용스님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덕용스님은 자기 처신에는 검소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넉넉하게 베풀었으며,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대접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다. 고암스님이 하루는 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씀은 실로 보기 드물다 하겠으나 그래도 상주물을 살피고 관리하여 소홀하게 낭비함이 없도록 하라."
덕용스님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제가 물건을 낭비하는 것쯤이야 작은 허물이 됩니다만, 스님께서 훌륭한 사람을 존대하고 인재를 대접하심에 있어서는 바다처럼 산처럼 받아들이셔야 하니, 자잘한 일은 묻지 않아야 실로 대덕이라 할 것입니다."
고암스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총림에서는 `쓸만한 그릇'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일사(逸事)』

10. 어떻게 닦아 나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납자는 스승과 도반을 찾아서 물어야 한다. 한편 선지식은 도(道) 자체만으로는 교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납자를 통해서만이 도를 드러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절을 주관하는 도덕 있는 스승이 법회를 열면 반드시 훌륭하고 지혜로운 납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호랑이가 포효하면 차가운 바람이 따라 일어나고, 용이 날면 구름도 따라 일어난다"라고 한 것이다.
옛날 강서(江西) 마조(馬祖)스님은 백장(百丈)스님과 남전(南泉)스님을 통해 자신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드러냈고, 남악(南嶽)의 석두(石頭)스님은 약산(藥山 : 745∼828)스님과 천황(天皇 : 748∼807)스님을 만남으로써 대지대능(大智大能)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천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사이였으므로 서로 법담을 나누면서 의심이 없었으니, 마치 고니가 바람에 나래를 싣고 훨훨 날듯, 큰 물고기가 바다에 나아간 듯 패연(沛然)하여 모두가 자연스러운 형세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총림에 공을 세우고 불조를 더욱 빛나게 하였던 것이다.
스승(先師 : 불안스님)께서 용문사(龍門寺)에 머무실 때, 하룻밤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에게 덕업이 없어 강호 납자들을 잘 보살펴주지 못하였으니 결국 동산(東山) 노덕에게 부끄럽게 되었구나" 하시고는 말씀을 마치더니 눈물을 뿌리셨다.
내 보기에 요즈음 남의 스승이 되었노라는 자는 옛사람과 비교할 때 만 분의 일도 안된다. 
『여죽암서(與竹庵書)』

11. 내가 용문사에 있을 때 영원스님은 태평사에 머물고 있었다. 어떤 소임자가 못된 마음으로 소란을 피우자 영원스님은 자기 스승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하였다.
"곧은 마음으로 도를 행하려니 잘 되지 않고, 자신을 굽히고 주지를 하려니 실로 나의 뜻이 아닙니다. 천암만학(千巖萬壑) 사이에 뜻을 놓아버리고 매일 풀열매로 배불리 밥 지어 먹으며 여생을 내 뜻대로 보내느니만 못하겠읍니다. 다시 무엇을 그리워하겠읍니까."
그리고는 10여 일이 채 못되어 황룡(黃龍)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바람이 나서 강서(江西)로 되돌아가 버렸다. 『총수좌기문(聰首座記聞)』

12. 영원스님은 납자의 일을 비유로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도 말했듯이 이 일은 마치 흙인형〔土偶人〕과 나무인형〔木偶人〕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나무인형의 경우, 귀와 코는 일단 크게 해놓고 입과 눈은 우선 작게 만들어 놓고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틀렸다 하겠지만 큰 귀와 코는 깎아서 작게 할 수 있고, 입과 눈은 작아도 파내서 크게 할 수 있다. 흙인형을 만들 땐 귀와 코는 일단 작게 하고 입과 눈은 먼저 크게 만들고자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틀렸다 하겠지만 작은 귀와 코는 더 빚어 붙일 수 있고, 컸던 입과 눈은 좀 떼어낼 수도 있다."
이 말이 소소한 것 같아도 큰 일에 비유할 수가 있다. 납자가 일에 부딪쳐 택하고 버리고 할 때,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진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문(記聞)』

13. 만암(萬庵)스님이 고암스님을 전송하느라고 천태산을 지나갔다 되돌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 높은 관수좌(貫首座)라는 이가 있었는데 경성암(景星巖)에서 30년 동안 은거하면서 그림자가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다. 용학경공(龍學耿公)이 군수가 되어 특별히 서암(瑞巖)에다가 스님을 모시려 하자 게송을 지어 사양하였다.

삼십년 간 빗장을 채웠는데
임명장이 어떻게 청산에 이르렀나.
좀스러운 세간사로
임하(林下)의 한가한 일생 바꾸지 말라.
三十年來獨掩關 使符那得到靑山
休將¡末人間事 換我一生林下閑

사신의 명령이 거듭 이르렀으나 끝내 나아가질 않았다. 그러자 경공은 요즈음의 산중에 은둔하는 진정한 도류(道流)라 경탄하였다.
만암스님은 "그곳에도 이 이야기를 기억할 노숙(老宿)이 있겠지"하더니 이어서 말하였다.
"도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하여 생사에 빠지면 부딪치는 경계마다 마음이 일어나 감정을 따라 사념이 요동한다. 그리하여 사나운 마음,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아첨으로 사람을 속이려 권세에 붙어 아부하고 명예를 찾아 이익에 구차해진다. 이렇게 진실을 어기고 거짓을 좇으며 깨달음을 등지고 세속〔六塵〕에 합하는 일을 사문 납자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도 한마디 하였다.
"관수좌도 스님네들 중에 희대의 기상이라 하겠군요." 『일사(逸事)』

14. 설당스님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교만한 자태가 없었다. 몸소 절약·근검하여 평소에 물질을 일삼지는 않았다.
오거산(烏巨山)에 머물 때 납자 하나가 쇠거울을 바치자 스님은 그에게 말하였다.
"시냇물이 맑아 터럭까지 비추어 볼 만하다. 이를 쌓아둔들 무엇하겠느냐."
그리고는 끝내 물리쳐 버렸다. 『행실(行實)』

15. 설당스님은 인자하고 진실〔忠恕〕하며 인격과 재능 있는 사람을 존경하였고, 우스개나 속된 말은 입 밖에 꺼내질 않았으며, 기세를 부리지도 사납게 노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나가느냐 들어앉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극히 청렴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옛사람은 도를 배워 외물에 대해서 담박하여 맛에 빠져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자기의 권세나 지위를 잊을 뿐더러 바깥의 성색(聲色)을 버리는 데 이르러서는 마치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즈음 납자들은 기량을 다해도 끝내 어찌해보질 못하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의지가 약하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며 요긴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행실(行實)』

16. 황룡 사심(黃龍死心 : 1043∼1114)스님은 운암사(雲巖寺)에 살 때, 집안에서 성내고 꾸짖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납자들이 모두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슬슬 피하는 사정이라 혜방 시자(惠方侍者 : 1173∼1129)가 말하였다.
"불조의 도를 실천하며 인간·천상을 호령하려는 선지식이라면 갓난아기 보듯 납자들을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로 중화(中和)의 가르침을 베풀지는 못할지언정 어찌하여 원수처럼 보았다 하면 꾸짖고 욕을 하시는지요. 이를 어찌 선지식의 마음씀이라 하겠읍니까."
사심스님은 주장자를 가져다 그를 쫓아내며 혼을 내주었다.
"너의 소견이 이 따위니 뒷날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 붙어 아첨하여 불법을 팔아먹고 세상을 속일 놈임이 분명하구나.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했기 때문에 엄중한 말로 그들의 뜻을 분발시켰을 뿐이지 어찌 다른 까닭이 있었겠느냐. 그들이 부끄러운 줄을 알고 허물을 고쳐 잊지 않고 생각하여 훗날 좋은 사람이 되게 하려 했을 뿐이다." 『기문(記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