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28 적시에 폐단을 고쳐 종풍을 간직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11
28  적시에 폐단을 고쳐 종풍을 간직하다   만암 도안(萬庵道顔)스님 / 1094∼1164 
 

 1. 요즈음 총림을 살펴보았더니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아예 없다. 몇 백 군데를 가보아도 아무개가 주지가 되고 대중이 짝이 되어 법왕(法王)의 자리를 빌어 주장자와 불자(佛子)를 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토론이 있긴 하나 경론을 섭렵하지 않았으므로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간을 벗어나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부처를 대신해 교화를 드날리려 하면서 마음을 밝히고 근본을 깨달아 깨달음과 실천〔行解〕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내겠는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왕이라 자칭하다가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과도 같다. 더구나 법왕을 어떻게 거짓으로 훔치려 하는가?
아 - 아, 부처님 가신 지가 더욱 멀어지자 `수료학(水 鶴)' 게송을 지어 부르며 사견을 내는 무리들이 자기 멋대로 하며 옛 성인의 가르침을 날로 침체시키니 내가 말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마침 일없이 지내다가 교풍(敎風)을 매우 해치는 한두 가지를 조목별로 진술해 보았다. 이를 총림에 유포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선배들이 살얼음판을 지나듯 칼날 위를 달리듯 조심스럽게 큰 법 걸머지려는 마음을 지녀 명예·이익에 구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나를 인정해 주는 자에게도, 나를 허물하는 자에게도 나는 변론하지 않으리라. 『지림집(智林集)』

2. 옛사람은 상당(上堂)하여 우선 불법의 요점을 제시하고 대중에게 자세히 물으면 납자는 나와서 더 설명해 주기를 청하였으니, 그리하여 문답형식의 법문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운(韻)도 안맞는 4구게(四句)를 옛 법도를 무시한 채 멋대로 지어놓고는 그것을 조화(釣話:법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말)라 부른다.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불쑥 나서서 옛시 한 연구(聯句)를 큰 소리로 읊조리며 그것을 매진(罵陳:의심을 결단해 주는 진술)이라 부르고 있으니 치졸하고 속되어 비통해 할 만한 일이다.
선배들은 생사의 큰일을 염두에 두고 대중과 마주하여 의심을 결단하였으며, 이윽고 뜻을 밝히고 나서는 생멸하는 마음을 일으키진 않았다.

3. 명성 높은 존숙(尊宿)이 절에 오시면 주지는 자리에 올라 겸손하게 인사하고 높은 지위를 굽혀 낮은 데로 가야 한다. 더욱 정중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내려와 수좌대중(首座大衆)과 함께 법좌(法座)에 오르시기를 청하고 법요(法要) 듣기를 바라야 한다.
요즈음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들어다가 대중들에게 비판하게 하고는 그를 시험한다고들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절대로 이런 마음을 싹트게 하지 말라. 옛 성인께서는 법을 위하여 모든 생각을 떨치고 함께 교풍을 세워 서로가 주고받으며 법이 오랫동안 머물게 하였다. 생멸하는 마음으로 이런 악한 생각 일으키는 것을 어찌 용납하려 했겠는가. 예의 차리는 데에는 겸손하기부터 해야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요즈음 사대부·감사(監司)·군수(郡守)가 산에 들어와 처소를 잡으면 다음날 시자(侍者)를 시켜 큰스님에게 "오늘은 특별히 아무개 관리가 법회에 오르겠읍니다" 하고 아뢰게 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 한 마디는 세 번쯤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예로부터 방책(方冊) 가운데 실린 이름이 모두가 선지식을 찾아온 사대부이긴 하나, 이때 주지는 그들이 참례하는 마당에 속인으로서 불법을 보호하는 방법만을 대략 거론하여 산문(山門)의 본의를 빛나게 하였다. 이렇게 집안 사람이 집안 일 한두 마디를 담박(淡泊)하게 하여 상대방이 공경하는 마음을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곽공보(郭公輔)와 양차공(楊次公)이 백운(百雲)스님을 방문하고, 소동파(蘇東坡)·황태사(黃太史)가 불인(佛印)스님을 뵌 경우가 모두 이런 본보기이다. 어찌 유별나게 망령을 떨어 식견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샀겠는가.

5. 옛사람은 납자들이 선방에 들어오면 먼저 패(牌)를 걸어놓고 각각 생사의 큰일을 위해 힘차게 찾아와 결택(決擇)을 구하게 하였는데, 요즈음은 늙었거나 병들었거나를 묻지 않고 모조리 와서 극진한 공경을 바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사향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향기가 나게 마련인데 하필 일률적으로 몰아붙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결과적으로 예의를 따지는 절차 조목만 부질없이 생겨나 손님 쪽이나 주인 쪽이나 편치 않으니 주지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하리라.

6. 초조 달마(初祖達磨)스님께서는 의발(衣鉢)과 법을 둘 다 전하였는데, 6조 혜능스님에 이르러서는 의발은 전하지 않고 깨달음과 수행방법이 이 도리에 맞는지만을 기준으로 하여 대대로 가업(家業)을 삼았다. 이로부터 조사의 도는 더욱 빛나고 자손은 점점 번성하였다.
6조(六祖) 대감(大鑑:혜능)스님의 후예로는 석두(石頭)·마조(馬祖)스님이 다 적손(嫡孫)으로서 반야다라(般若多羅)스님의 예언에 적중하였으니, "요컨대 아손(兒孫)의 다리를 빌어 걷겠구나"라고 한 말씀이 바로 이 말이다.
두 스님의 현묘한 말이 천하에 퍼져 은밀한 깨달음에 가만히 부합한 자들은 더러더러 있게 되었다.
법을 이어받은 자가 많아지자 가문을 독차지하는 학풍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조계(曹溪)의 원류가 다섯 파로 나뉘었으나, 마치 모나고 둥근 그릇에 물이 담길지라도 물 자체는 변함없는 경우와 같아서 각각 아름다운 명성이 드날리며 자기의 책임을 힘써 실천하였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명령 하나가 온 납자들에게 미쳐 총림이 물끓듯 하였는데 이는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부터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은미하고 그윽한 도를 드러내 밝히기도 하고, 혹은 부정하고 혹은 긍정하면서 설법을 했는데, 그 말 자체는 아무 맛 없기가 마치 나무토막으로 끓인 국, 무쇠로 지은 밥과도 같았으므로 후배들이 이를 씹어보고 염고(古)라고 불렀다.
그러한 게송은 분양(汾陽)스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설두(雪)스님에 이르러서는 변론이 유창하고 종지는 밝게 드러나 광대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후세에 게를 짓는 자들은 설두스님을 부지런히 좇아가기는 하나 도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문체를 아름답게 하는 데만 힘을 쏟아 후학들로 하여금 혼순(渾淳)하고 완전한 옛사람의 종지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아 - 아, 나는 총림에 노닐면서 선배들을 보고 옛사람의 어록이 아니면 보질않고 백장(百丈)의 호령이 아니면 행하질 않으니, 내 이런 태도가 어찌 복고적인 성향 때문만이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에게서는 본받을 만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원컨대 지혜로운 자라면 말 밖에서 내 뜻을 알아내야 하리라.

7. 요즈음 편견으로 집착하기 좋아하는 납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경솔하게 약속을 해대다가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순종하면 좋다 하고 거역하면 멀리한다. 
설사 반쯤, 아니 온전한 분별이 있는 자라 해도 이런 악습에 가리워지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도록 성취한 것 없는 수가 많다. 『지림집(智林集)』

8. 이르는 총림마다 삿된 말이 불길 같다. 즉 "계율을 지키거나 정혜(定慧)를 익힐 필요도 없으며, 도덕을 닦고 탐욕을 버려 무엇하겠는가"라고들 말한다. 거기다가 『유마경(維摩脛)』이나 『원각경(圓覺脛)』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면서 탐진치 살도음망(貪痴殺盜淫妄)을 범행(梵行)이라 찬탄하기도 한다. 
아 - 아, 이 말이 어찌 오늘의 총림에만 해가 되겠는가. 참으로 불법 만세의 병통이다.
또 번뇌에 꽉 얽혀 있는 범부는 탐하고 성내는 애욕과 나다 너다〔人我〕하는 어리석음〔無明〕이 생각 생각에 마주함이 마치 한 솥 끓는 물과도 같으니 무슨 수로 식히겠는가.
옛 성인께서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잘 내다보시고 드디어는 계(戒)·정(定)·혜(慧) 3학(三學)을 마련하여 그런 짓을 그만두고 돌이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지금의 후학들은 계율을 지키지도 정혜를 익히지도 않는다. 도는 닦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지식만 늘리고 억지 변론이나 하면서 세속으로 끌려들어가 잡아당겨도 되돌아올 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말한 `만세의 병통'이다.
바른 발심〔正因〕으로 수행하는 고상한 납자라면 생사를 한 번에 결판내야 하니, 성신(誠信)을 간직하여 이 무리들에게 끌려가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극약을 먹고 싼 똥이나 독사가 마신 물과 같으니 보거나 들어서도 안되는데 하물며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 물이 사람을 죽이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식견이 있는 자라면 자연히 그것을 멀리 하리라." 『여초당서(與草堂書)』

9. 초당스님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산당(山堂)스님만이 옛사람의 풍모를 간직했을 뿐이다. 황룡사에 살 때, 공적인 일을 맡아 주관하려면 반드시 용모를 가다듬고 방장실(方丈室)에 나아가 분부를 받은 뒤에야 차 달이는 예의를 갖추었다. 이런 태도는 시종 변함이 없었다.
지은(智恩)이라는 상좌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금(金) 두 닢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이를 이틀이 지나도 찾지 못하였는데 시자 성승재(聖僧才)가 청소를 하다가 이를 주어 습유패(拾遺牌)에 걸어놓자 온 대중이 이를 알게 되었다.
이는 법을 주관하는 주지가 청정하여 웃사람이 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본받았기 때문이다.

10. 만암스님은 근검·절약하여 소참(小參)에 보설(普說)하면서 공양하게 되었다. 납자들 사이에 나름대로 이를 문제삼는 자가 있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아침에 고량진미를 먹고도 저녁에는 거친 음식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대들이 생사의 큰일을 생각하여 적막한 구석에서 살고자 하였다면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할까만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성인과 멀어진 지가 아득한데 조석으로 탐하고 즐기는 것을 일삼아서야 되겠느냐."

11. 만암스님은 천성이 어질고 후하며 자기 처신에는 청렴하였다.
평소에 법문을 하면 말은 간결하나 의미는 치밀하였으며, 널리 배우고 열심히 익혀 철저히 도리를 따져 나갔으며, 구차하게 중단하거나 허망하게 남의 논리를 따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고금을 평론하면 마치 자신이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닌 듯하여 듣는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분명히 깨달았다. 어떤 납자가 스님을 두고 한 말이 있다.
"세월이 다하도록 참선하는 것이 하루 동안 스님의 말을 듣고 체득하는 것만 못하다." 『기문(記聞)』

12. 만암스님이 수좌 변(辯)스님에게 말하였다.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즈음 참선하는 사람들은 절의(節義)를 대단찮게 여기고 염치를 차리지 않으므로 사대부들이 업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대도 뒷날 이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면 벌레와 한 가지일 것이다. 항상 법도에 맞게 수행할지언정 권세나 이익을 좇느라 남의 안색이나 살펴 아첨하지 말며, 생사·재앙은 일체 그대로 맡겨두어 버린다면 마구니 세계를 벗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부처님 세계에 들어가리라."[법어(法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