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나계 의적(螺溪義寂 : 919~987. 천태종 중흥조)법사가 앞으로 불법을 들을 수 없게 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힘써 모아 보았으나 우선 금화사(金華寺) 장경각에서「유마경의소(維摩經義疏)」한 절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 뒤 충의왕이 불경을 읽다가 내용(敎相)에 막혀 스님께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께서는 천태종의 종지에 훤히 통한 사람이라 칭찬하니 왕이 마침내 의적스님을 불러 강원을 세웠다. 왕이 기뻐하여 특별히 열 사람의 사신을 바다 건너 파견하여 경전을 베껴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이 다시 일어나 지금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덕소와 의적스님의 덕택이라 하겠다. 개보(開寶) 사년(972년) 6월 28일 천태산(天台山) 화정봉(華頂峯)에서 입적하셨는데, 이날 밤 별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서는 큰 눈이 내렸다. 스님께서 열반 하실 때 보인 신비한 징조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법등(法燈 : ?~974) 선사의「행업(行業)」등 글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지자 지의(智者 智顗 : 538~579. 천태종의 개조)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ꡒ나와 같이 공부하던 조(照) 선사는 남악(南嶽) 선사회중에서 고행과 선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한번은 대중의 소금 한 줌을 공양 때 음료에 썼다. 그러고는 줄어든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개의치 않았다. 그뒤 방등참법(方等懺法)을 닦는데 홀연히 어떤 모습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 한 줌 소금이 삼 년 동안 몇 십 섬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금히 시자들을 시켜 자기 옷과 살림살이를 팔아 소금을 사서 대중에게 빚을 갚았다.
이 일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들은 바도 아니니 이것을 거울삼아 후회 없도록 해야 한다. 나는 비록 덕행이 적은 사람이지만 멀리서 가까이서 자못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간에 염령(敥嶺)이 가로막혀 걸어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늙고 병든 사람들이 드나들 경우에는 대부분 대중의 노새로 맞이하고 보내며, 내게 오는 손님은 개인적으로 수고비를 지불하여 피차 허물이 없게 하였다.
나는 대중의 주지이고 노새도 내것이었으나 이미 대중에게 희사한 이상 이제는 내것이 아니다. 내맘대로 쓸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말을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든 것에 불과하나 다른 일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ꡓ
도솔사(兜率寺) 택오(擇梧) 율사는 보령(普寧) 율사에게 공부하였는데, 몸 단속이 엄격하였으며, 하루 한 끼 예불 독송을 끊임없이 하였다. 한번은 경산(徑山) 유림(維琳) 선사에게 도를 물었다. 유림선사는 율사가 계율에만 마음을 두어 도를 통하지 못함을 보고는ꡒ그대는 계율에 몸이 묶여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지 않는냐?ꡓ하고 놀렸다. 석오율사가ꡒ저는 마음(根識)이 어둡고 둔해서 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스님께서 가엾게 생각하여 가르쳐 주십시요ꡓ하였다. 유림선사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ꡒ바수반두(婆修盤頭)는 하루 한 끼 공양에 눕지도 않고 하루 여섯 차례씩 예불하였다. 이렇게 청정무구하여 대중들에게 귀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20조 사야다 존자가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바수반두의 문도들에게 물었다.ꡐ이 두타승이 청정행을 열심히 닦아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ꡑꡐ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어째서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까?ꡑꡐ그대들의 스승은 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정진해 가지고는 티끌 겁이 지나도 모두 허망의 근본이 될 뿐이다.ꡑ바수반두의 문도는 분한 마음을 내지 않고 사야다에게 물었다.ꡐ존자께서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 스승을 비난하십니까?ꡑꡐ나는 도를 깨치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顚倒〕되지도 않는다. 나는 예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처님께 오만하거나 가볍게 굴지도 않는다. 장좌불와(長坐不臥)하지 않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도 않는다. 하루 한끼만 먹는 고행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식탐을 내지도 않는다. 또한 만족도 탐욕도 없다. 이렇게 마음 둘 곳 없음을 도라고 한다.ꡑ
바수반두는 이 말씀을 듣고 무루지(無漏智)를 얻었다.ꡓ유림선사는 일갈대성하고서 말하였다.ꡒ비록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둔한 놈이다.ꡓ석오율사는 이 말 끝에 마음이 활짝 트여 껑충껑충 뛰면서 절하고 말하였다.ꡒ스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으면 어찌 잘못을 알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지키면서도 지키지 않는, 지킨다는 생각이 없는 계율(無作戒)을 지키겠으며, 더 이상 애써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다.ꡓ그러고는 작별하고 떠났다. 방장실로 돌아와서 익혀 왔던 수행을 다 보리고 그저 선상(禪床)만을 지키며 법문하는 일 말고는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하루 저녁은 명정(明靜)법사를 불러서 말하였다.
ꡒ경산스님께서 내게 망정과 집착을 타파해 주신 뒤 지금껏 가슴속에 아무 일도 없다. 오늘밤에는 무성삼매(無聲三昧)에 들어가겠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가 없더니 마침내 영영 누우셨다. 「通行錄」
송나라 진종(眞宗 : 996~1022) 황제가 한번은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를 없애 창고를 만들려고 하였다. 조서가 내리던 날, 한 스님이 절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꼿꼿하게 말하였다. 황제는 중사(中使)를 보내면서 일렀다.
ꡒ절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ꡓ그러고는 칼을 뽑아들어 보였다.
ꡒ그 중이 칼을 보고 겁이 나서 떨거든 목을 베고, 그렇지 않거든 용서해 주어라.ꡓ
중사가 명령대로 하였더니 그 스님은 웃으면서 목을 쓱 내밀며 말했다.
ꡒ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실로 달갑게 칼을 핥겠다.ꡓ
황제가 기뻐하여 폐사를 면했다. 한자창(韓子蒼)이 말했다.
ꡒ지금 세상에도 이와 같은 스님이 있다니 참으로 납자라고 할 만하다.ꡓ「石門集」
법창선원(法昌禪院)의 기우(奇遇 : 1005~1081. 운문종) 선사는 임장(臨漳) 고정(高亭)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큰 뜻을 품고 사방을 돌아다녀 총림에 이름을 날렸다. 부산법원(浮山法遠) 선사는 스님을 두고 행각하는 후학들의 본보기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분령(分寧) 북쪽 천산만학에 은거하여 담이 무너진 옛 집에 머물게 되었다. 간혹 납자들이 찾아 왔는데 모두 고된 일을 힘들어 했다. 스님은 한 마디도 자상하게 문도들에게 가르쳐 준 일이 없었는데, 학인들은 스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또한 그 담담하고도 힘겨운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모두 그곳에서 떠나 버렸다. 결국 혼자 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새벽에 향 피우고 저녁에 등불 밝히며 법당에 올라 설법하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고, 총림에서 하는 법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용도각 학사(龍圖閣 學士) 서희는
ꡒ대중이 없어도 대중이 있을 때처럼 처신하니 진짜 산사람이다.ꡓ하면서 감탄하였다. 돌아가실 즈음에 하루 앞서 게송을 남겼다.
금년 내 나이 일흔 일곱
길 떠날 날을 받아야겠기에
어젯밤 거북점을 쳐 보니
내일 아침이 좋다고 하더라.
서희가 이 게송을 보고 깜짝 놀라서 영원 유정(靈源 惟淸)스님과 함께 찾아갔더니 이미 아무 소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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