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법지존자(法智尊者 ; 960-1028)의 법명은 지례(知禮)이다. 나이 사십이 되면서부터 눕지 않고 늘 앉았으며 문밖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법을 물으러 다니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하루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반 줄의 게송을 보고도 자기 몸을 잊고, 한 마디 법문을 듣고도 불 속에 몸을 던진다 하였다. 성인들은 법을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는데, 내가 신명을 던져 나태한 이들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고는 도반 열 사람과 삼년 결제로 법화삼매(法華三味)를 닦고 기한이 되면 함께 몸을 태우자고 하였다. 이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양억(楊憶 ; 大年)이 편지를 보내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청하면서, 정토를 좋아하고 속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종일토록 모든 상(相)을 깨트려도 모든 법(法)은 이루어지고, 종일토록 법을 세워도 티끌까지도 다 없어집니다.”
그러자 양억이 다시 물었다.
“보배나무에는 바람이 읊조리고 금빛 도랑에는 파도가 인다고 하니,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보고 듣고 하는 경계일 뿐 별 도리는 없습니다.”
“법화경과 법망경은 모두 마왕의 설법입니다.”
“부처와 마왕과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양공은 교리를 가지고도 스님을 굴복시킬 수 없고 말로서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자운(慈雲) 선사에게 편지를 내어 항주(抗州)에서 명주(明州)로 오게 하여, 선사가 직접 그들의 결의를 저지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고을의 장수에게는 그들을 보호하여 분신할 틈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 해에 양공은 스님에게 법호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진종(眞宗) 황제가 양공을 불러 까닭을 물으시니, 공은 이 기회에 스님께서 몸을 버리려 한다는 일을 아뢰었다. 황제가 기뻐 찬탄하면서 양공에게 “세상에 머물러 주십사는 내 마음을 꼭 전하라”고 거듭 말하며, 법지(法知)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이 일로 원행(願行)이 실현되지 않자, 스님은 도반들과 다시 광명참법(光明熾法)을 닦아 자연스럽게 입적하자고 약속하였다. 오일째 되던 날, 가부좌한 채 대중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났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분수다. 그대들은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도를 닦고, 내가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말이 끝나자 스님은 염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원통사(圓通寺)의 거눌(居訥 ; 1010-1071) 선사는 신주(榊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浮因寺)에 주지하도록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懷璉)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英宗)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蘇東坤)가 장규각(辰奎開)의 비문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장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습니다.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요(參寥 : ?-1106) 운문종의 도잠(道潛)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왕〔英宗〕께서 손수 전국 어느 철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셨다. 과연 그렇습니까? 있다면 그 전문(全文)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동파의 장규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목(龍腦木)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흙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밖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양 무제(武帝)가 보지(寶誌) 선사에게 물었다.
“짐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했는데,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은 공덕이나 진정한 공덕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공덕입니까?”
“성품이 깨끗하여 마음이 밝으면 바탕이 저절로 비고 고요해지니 이것이 진정한 공덕입니다.”
무제는 이 말 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이라도 고요히 앉을 수 있으면 항하사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칠보탑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도사 손사맥(孫思週)은 서울〔京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와 하루에 만글자를 외웠다. 노장(老莊)을 잘하고 불전에 더욱 뜻을 두었다. 오십세가 되자 종남산(終南山)에 숨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연홍(鉛汞 : 송화 가루나 약초 등으로 만들어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고 살았다.
도선율사(道宣律師 : 596-667, 智首율사의 법을 이음. 남산 율종의 개조)와 사이가 좋아서 하루종일 법담을 나누었으며, 「화엄경」을 베껴 쓰기도 하였다.
그때 당(唐) 태종(太宗 : 627-649년 재위)이 불경을 읽고자 하여 손사맥에게 물었다.
“어느 경이 가장 크고 높은 경입니까?”
“「화엄경」은 부처님도 높이시던 경입니다.”
“요즈음 현장삼장(玄奘三藏)이「대반야경」육백 권을 번역하였는데(660년) 그것을 큰 경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80권「화엄경」을 크다 합니까?”
“화엄 법계에는 모든 법문이 다 갖추어져 있고 한 법문에 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설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경」은 화엄의 한 부분〔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알아 틀고 그때부터 「화엄경」을 늘 독송〔受持〕하였다.
시랑(待郞) 양억(楊億 : 974-1020)은 한림학사(輪林學士) 이유(李維)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잠깐 남창(南昌)에 태수로 오게 되었는데 마침 광해〔廣寶慧常總〕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공양을 될 수 있는 대로 간소화하여 밥상을 물리고는 여가가 많았으므로 더러는 직접 오시기도 하고 더러는 수래로 모셔오기도 하여 이것 저것 터놓고 물었더니 어둡고 막혀 있던 것이 싹 풀렸습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뒤에는 마치 잊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자다 깨어난 듯 마음이 탁 트여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저절로 탁 떨어져 내려가서 몇 겁을 두고 밝히지 못했던 일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정말로 스님께서 의심을 결택(決擇)해 주시고, 주저없이 지도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옛분들이 큰스님을 찾아뵙던 일들을 거듭 생각해 봅니다. 설봉(雪峰義存)스님은 동산(洞山良价)스님을 이홉번 찾아뵙고 투자(投子義育)스님을 세 번 뵈었으나 마침내는 덕산(德山宣鑑)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임제(臨濟義玄)스님은 대우(大愚守芝)스님에게서 법을 얻었으나 결국은 황벽(黃緊布運)스님의 뒤를 이었습니다.
운암(雲嚴壘展)스님은 도오(道吾圖 智)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마침내 약산(藥山推嚴)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단하(丹霞子諄)스님은 마조(馬祖道一)스님에게 직접 인가를 받았으나 석두(石頭希選)스님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병든 이 몸이 지금 법을 이어받은 인연은 사실 광해(廣慧)스님에게 있으나 처음 일깨워 지도해 주신 분은 바로 별봉(鼈峰)스님이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법지존자(法智尊者 ; 960-1028)의 법명은 지례(知禮)이다. 나이 사십이 되면서부터 눕지 않고 늘 앉았으며 문밖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법을 물으러 다니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하루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반 줄의 게송을 보고도 자기 몸을 잊고, 한 마디 법문을 듣고도 불 속에 몸을 던진다 하였다. 성인들은 법을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는데, 내가 신명을 던져 나태한 이들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고는 도반 열 사람과 삼년 결제로 법화삼매(法華三味)를 닦고 기한이 되면 함께 몸을 태우자고 하였다. 이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양억(楊憶 ; 大年)이 편지를 보내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청하면서, 정토를 좋아하고 속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종일토록 모든 상(相)을 깨트려도 모든 법(法)은 이루어지고, 종일토록 법을 세워도 티끌까지도 다 없어집니다.”
그러자 양억이 다시 물었다.
“보배나무에는 바람이 읊조리고 금빛 도랑에는 파도가 인다고 하니,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보고 듣고 하는 경계일 뿐 별 도리는 없습니다.”
“법화경과 법망경은 모두 마왕의 설법입니다.”
“부처와 마왕과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양공은 교리를 가지고도 스님을 굴복시킬 수 없고 말로서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자운(慈雲) 선사에게 편지를 내어 항주(抗州)에서 명주(明州)로 오게 하여, 선사가 직접 그들의 결의를 저지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고을의 장수에게는 그들을 보호하여 분신할 틈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 해에 양공은 스님에게 법호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진종(眞宗) 황제가 양공을 불러 까닭을 물으시니, 공은 이 기회에 스님께서 몸을 버리려 한다는 일을 아뢰었다. 황제가 기뻐 찬탄하면서 양공에게 “세상에 머물러 주십사는 내 마음을 꼭 전하라”고 거듭 말하며, 법지(法知)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이 일로 원행(願行)이 실현되지 않자, 스님은 도반들과 다시 광명참법(光明熾法)을 닦아 자연스럽게 입적하자고 약속하였다. 오일째 되던 날, 가부좌한 채 대중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났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분수다. 그대들은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도를 닦고, 내가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말이 끝나자 스님은 염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원통사(圓通寺)의 거눌(居訥 ; 1010-1071) 선사는 신주(榊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浮因寺)에 주지하도록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懷璉)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英宗)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蘇東坤)가 장규각(辰奎開)의 비문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장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습니다.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요(參寥 : ?-1106) 운문종의 도잠(道潛)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왕〔英宗〕께서 손수 전국 어느 철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셨다. 과연 그렇습니까? 있다면 그 전문(全文)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시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동파의 장규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목(龍腦木)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흙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밖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양 무제(武帝)가 보지(寶誌) 선사에게 물었다.
“짐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했는데,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은 공덕이나 진정한 공덕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공덕입니까?”
“성품이 깨끗하여 마음이 밝으면 바탕이 저절로 비고 고요해지니 이것이 진정한 공덕입니다.”
무제는 이 말 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이라도 고요히 앉을 수 있으면 항하사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칠보탑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도사 손사맥(孫思週)은 서울〔京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와 하루에 만글자를 외웠다. 노장(老莊)을 잘하고 불전에 더욱 뜻을 두었다. 오십세가 되자 종남산(終南山)에 숨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연홍(鉛汞 : 송화 가루나 약초 등으로 만들어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고 살았다.
도선율사(道宣律師 : 596-667, 智首율사의 법을 이음. 남산 율종의 개조)와 사이가 좋아서 하루종일 법담을 나누었으며, 「화엄경」을 베껴 쓰기도 하였다.
그때 당(唐) 태종(太宗 : 627-649년 재위)이 불경을 읽고자 하여 손사맥에게 물었다.
“어느 경이 가장 크고 높은 경입니까?”
“「화엄경」은 부처님도 높이시던 경입니다.”
“요즈음 현장삼장(玄奘三藏)이「대반야경」육백 권을 번역하였는데(660년) 그것을 큰 경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80권「화엄경」을 크다 합니까?”
“화엄 법계에는 모든 법문이 다 갖추어져 있고 한 법문에 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설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경」은 화엄의 한 부분〔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알아 틀고 그때부터 「화엄경」을 늘 독송〔受持〕하였다.
시랑(待郞) 양억(楊億 : 974-1020)은 한림학사(輪林學士) 이유(李維)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잠깐 남창(南昌)에 태수로 오게 되었는데 마침 광해〔廣寶慧常總〕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공양을 될 수 있는 대로 간소화하여 밥상을 물리고는 여가가 많았으므로 더러는 직접 오시기도 하고 더러는 수래로 모셔오기도 하여 이것 저것 터놓고 물었더니 어둡고 막혀 있던 것이 싹 풀렸습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뒤에는 마치 잊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자다 깨어난 듯 마음이 탁 트여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저절로 탁 떨어져 내려가서 몇 겁을 두고 밝히지 못했던 일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정말로 스님께서 의심을 결택(決擇)해 주시고, 주저없이 지도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옛분들이 큰스님을 찾아뵙던 일들을 거듭 생각해 봅니다. 설봉(雪峰義存)스님은 동산(洞山良价)스님을 이홉번 찾아뵙고 투자(投子義育)스님을 세 번 뵈었으나 마침내는 덕산(德山宣鑑)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임제(臨濟義玄)스님은 대우(大愚守芝)스님에게서 법을 얻었으나 결국은 황벽(黃緊布運)스님의 뒤를 이었습니다.
운암(雲嚴壘展)스님은 도오(道吾圖 智)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마침내 약산(藥山推嚴)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단하(丹霞子諄)스님은 마조(馬祖道一)스님에게 직접 인가를 받았으나 석두(石頭希選)스님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병든 이 몸이 지금 법을 이어받은 인연은 사실 광해(廣慧)스님에게 있으나 처음 일깨워 지도해 주신 분은 바로 별봉(鼈峰)스님이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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