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념처경(大念處經)

4. 마음에 대한 관찰 - 1. 마음을 보고 마음에 머문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0:42

1. 마음을 보고 마음에 머문다

 

그리하여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 할 것인가? 비구는 마음이 탐을 내면 '마음이 탐낸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탐내지 않으면 '마음이 탐내지 않는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성을 내면 '마음이 성낸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성내지 않으면 '마음이 성내지 않는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어리석으면 '마음이 어리석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으면 '어리석지 않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전도되면 '마음이 전도된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넓고 크면 '마음이 넓고 크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좁고 작으면 '마음이 좁고 작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위가 있으면 '마음이 위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위가 없으면 '마음이 위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안정되면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마음이 해탈했으면 '마음이 해탈했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해탈하지 않으면 '마음이 해탈하지 않는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문다.

혹은 마음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또한 지식으로 안 것과 잊지 않고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있다.'고 생각을 떠올리면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문다.

해설
마음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마음이 나타나면 있는 것이고, 나타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니,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 마음은 육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존재한다. 마음과 물질은 한계를 그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인간은 이러한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반대로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참된 모습은 어떤 것인가? 마음을 올바르게 보면 몸을 볼 수 있고, 마음이 나 몸을 올바르게 보면 나를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면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된다. 나의 진실은 나타난 마음 그것이요, 우주의 진실은 나타난 만상(萬象)그 자체이다.

마음을 보는 것이 수행자의 공부이다. 수행자는 마음을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아는 것이 바로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보고 마음을 바르게 쓰는 사람이 성자이다. 탐심이 일어나면 일어나지 않아야 될 것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일어날 인연이 있어서 일어난 것이므로 없어질 인연이면 곧 없어진다. 탐심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잘못된 마음이면 고쳐야 하고 올바른 마음이면 더욱 고양시켜야 한다.

마음은 크고 넓게도 나타나고 좁고 작게도 나타난다. 또한 더없는 극치에 도달한 마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마음도 있다. 고요히 안정된 마음도 있고, 안정을 잃은 혼란스러운 마음도 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마음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마음도 있다. 이런 수많은 마음들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여 그것이 어떤 인연에 의해 일어났으며 어떻게 없어지는가를 알면,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언급한 마음의 현상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곧 탐, 진, 치의 삼독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현상, 잘못된 착각인 전도된 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현상, 크고 넓은 마음과 좁고 작은 마음, 순수성의 차이에서 볼 때 위가 있는 마음과 위가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현상, 안정된 마음과 불안한 마음, 또한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현상 등이다.

마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그것이 그릇된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넓거나 좁거나 크거나 작은 마음을 가려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해탈에 이르는 마음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해탈한 마음이든 탐, 진, 치의 삼독이든 그것이 마음이라는 점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삼독의 오염된 마음이 해탈의 청정한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더없이 깊고, 넓은 큰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청정한 본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청정본심은 허공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고 거울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청정본심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마음과 다른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물과 물결의 관계와 같다. 마음을 관조하면서 마음에 머물면 그 자리가 바로 청정 본심인 것이다. 관찰하는 마음과 관찰당하는 마음이 만나서 하나가되었으므로 주와 객기 없는 진실 그대로의 본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음을 보려는 찰나에 이미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마음이 만난 것이다.

흔히 선(禪)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지만 본성을 보는 마음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보여지는 마음의 본성 역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심과 중생심도 다르지 않다. 나의 마음을 보면 부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나의 마음에서 탐심이 일어나고 또한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 이미 그 마음은 탐심이 아닌 불성이요 해탈한 마음이다.

마음은 넓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큰 파도, 작은 파도, 거친 물결, 잔잔한 물결, 맑은 물, 탁한 물 등 모든 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물결을 물결로 보는 자는 잔잔한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깨끗하고 넓고 크며 곧아서 걸림이 없으나,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고 좁고 얕으며 걸림이 있는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니니, 속(俗)을 보고도 속을 떠나지 않으면서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로 진이 된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법을 보는 명상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