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교외별전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21

언어와 문자 초월한 전법방식

누구나 지니고 있는 ‘정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근거할 때만 가능

“중국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

 

반야다라존자가 말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서 마야부인의 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33조사들에게 모두 다음과 같은 현기를 주셨다. ‘후대에 그대들은 각각 정법안장을 마땅히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종지를 은밀하게 잘 지켜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바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한다.” 그리고는 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마야의 뱃속을 집 삼아 머물러도 (摩耶裏堂)

법계의 체성은 언제나 한결같네  (法界體一如)

서른 세 명의 모든 대선지식들이 (三諸祖師)

동시에 은밀히 수기를 주고받네  (同時密授記)

 

조사선 가풍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본래성불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위의 내용도 예외가 아니다. 도솔천에서 룸비니동산에 내려오기 이전에 이미 성불한 몸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도솔천이라든가 룸비니라든가 카필라성이라든가 하는 부처님의 일생에 관련된 지명도 시간적인 순차로 등장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볼 필요는 없다. 다만 세상사의 일상적인 관례에 기준하여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줄을 자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쳤다는 것도 앞으로 그와 같은 부처라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다. 이미 그 자리에서 완성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설파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게송에서는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와서 마야부인의 뱃속에 머물러 있어도 법계 곧 다르마의 체성으로 보면 한 치도 어긋남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본래자리를 옮긴 적도 없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속성은 인도의 33대 모든 선지식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나아가서 동시에 이미 그렇게들 존재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은밀한 전승일 수밖에 없다. 은밀하다는 것은 당사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지만 달리 한결같이 그리고 완전하게 흐트러짐이 없이 그대로 전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에 구분이 없다. 가섭은 아난에게 전수해주었지만 동시에 아난도 가섭에게 전수한 것이다. 이것은 스승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는 제자에게 전해준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섭이 아난에게 인가하는 자체가 아난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섭과 아난이 상호간에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때문에 정법안장의 계승을 등불에 비유하였다. 스승의 등불은 제자의 등불이 아니다. 스승의 등불은 그저 스승의 등불일 뿐이고 제자의 등불도 역시 제자의 등불일 뿐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등불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등불을 밝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섭의 등불은 그대로 보리달마의 등불이고 보리달마의 등불은 혜가의 등불이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경전과 언설을 통하여 전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외별전이라 하였다.

 

교외별전은 언어문자를 통하면서도 그 언어문자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전법의 방식이 중국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교상판석과 같은 정법(定法)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교외별전의 전승양식은 역대 선지식뿐만 아니라 일체중생 누구나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정법안장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은 믿음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전승방식이기 때문에 굳이 말하자면 교내상전(敎內相傳)이요 정법동전(正法同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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