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삼매의 바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16

“평상심이 바로 깨침”

 

분별심으로 삼천세계 펼쳐지나

여래심의 경계는 휘둘리지 않아

‘일상 그대로의 마음’ 지녀야

 

해상은 바람의 변화로 인하여 갖가지 파랑이 일어나고, 출세간의 안목으로 연고를 관찰해보니 분별심으로 인하여 삼천대천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바다 밑은 지극히 깊기 때문에 바람의 흔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여래심의 경계는 담연하여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영남에 살고 있는 종도(宗道)라는 사람이 이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다.

 

“여기에서 ‘파랑’이라는 것은 현재불의 가르침이 중생이 제각각 좋아하는 바를 따라 설한 오천권의 대장경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바다 밑’이라는 것은 바다가 지극히 깊어 바람이 영향을 주지 못하고 3겁 동안 바람이 불어도 바닥에까지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 부처님의 깊은 의취(義趣)도 또한 그와 같이 대단히 깊고 깊으며 그윽하고 또 그윽하여 뜻으로 헤아릴 수도 없고 말로 설할 수조차 없다”(반야다라해저종영시현기)

 

조사선에서 흔히 언급하는 말에 평상심이 깨침이다(平常心是道)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평상심은 일상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대로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마음이라고는 해도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이 평상심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인간 본연의 본래심이고 청정심이며 무조작심이고 무분별심이며 평등심이다. 그래서 평상심은 인간에 대한 대긍정을 드러낸 말이다. 이와 같은 평상심이야말로 깨침이 아닐 수가 없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평상심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평상심과는 달리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체는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一切唯心造)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위의 평상심과는 반대의 개념으로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행위를 일으키는 중생심이고 분별심이며 범부심이고 번뇌심이다. 곧 일체에 대한 개념은 그 자체가 무언가가 있다고 보는 유루의 조작심이고 분별심으로 중생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출세간의 안목을 지닌 불보살의 청정심으로 보자면 일체가 공하여 일체라는 것 자체가 언급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일체가 존재한다는 의미야말로 중생심의 분별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다물 위에 파랑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이라는 무명번뇌가 작용하기 때문이고, 삼천대천세계라는 형상도 중생의 분별심으로 조작된 가유(假有)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바다 밑은 번뇌라는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여래심의 속성을 비유한 것으로 깊은 삼매의 바다로서 어떤 번뇌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연적정한 불세계를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 청정법신불은 형상이 없고 언설이 없다. 그러나 천백억화신으로 나타난 현재불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설법을 하며 노ㆍ병ㆍ사의 모습을 보이고 출가와 수행과 깨침과 교화의 위의를 나타낸다. 이로써 소위 오천권의 대장경이란 화신불이 중생의 깜냥을 따라 방편으로 설한 팔만 사천 법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도 중생이 좋아하는 취향을 따라 미주알고주알 설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야말로 좌선삼매에서 터득되는 무궁무진한 불보살의 삼매의 공능이 일체대중에게 베풀어주는 약방문이다.

 

그러나 정작 여래의 본의는 바다 밑의 적정세계일 뿐이다. 중생의 어떤 언설과 사량으로도 드러내지 못하는 진면목이다. 바람이 불어도 파랑이 일어나도 깊고 깊으며 그윽하고 그윽하여 어떤 분별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때문에 성인의 삼매는 보살이 엿보지 못하고 보살의 삼매는 성문이 살피지 못하며 성문의 삼매는 중생이 방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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