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이론에 밝다고 하더라도 다만 지식적 알음알이에 그친다면 문자놀음에 불과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행을 통해 이론과 생활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이른바 불교적 삶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불교수행의 근본 지향점과 참된 의미가 있다.
불교의 교리 속에는 다양하고 수많은 형태의 수행법들이 설해져 있고, 이는 욕망의 극복이나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함 등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지만 요점은 자기문제의 바른 인식에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들면 외부의 사물, 소리들을 자신의 감각기관인 눈이나 귀로 대할 때 갖게 되는 인식을 올바로 하도록 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를 하나로 모은 핵심 근원의 세계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등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외부를 대할 때 잘못된 인식이 있게 되면 이로 인해 고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설에서는 이를 육근·육경·육식의 십팔계라던가 불성(佛性), 자성(自性), 마음 등이라 하고 있으며, 선에서는 자신의 본래면목, 하나의 물건이라는 일물(一物), 차별 없는 참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 등 여러 명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줄이면 열 여덟, 펼치면 세상만물이라는 구조로 설명되고 있는 십팔계는 눈으로 물질을 볼 때 물질에는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촉감, 냄새 등 여러 가지가 있어 그중 하나라도 잘못 인식하게 되면 모두를 그르치게 된다는 전체성의 의미가 깃들어 있고, 만물을 하나로 집약한 불성이나 일물은 이 전체를 통일적이고 직관적으로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일물 등은 만물 만법의 근원 인식과 자기 정체성의 체득이라는 선수행의 요체로 되어 있다.
이런 불교의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인간이 가진 논리성과 이성적 능력에 의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와 이성, 합리 등 일체의 사량분별이 배제된 방법이다. 경전을 보는 것이 전자에 해당되며, 관법(觀法)을 포함한 선수행의 방법이 후자에 속한다.
선수행의 행법 또한 셋으로 구분된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과, 모아진 상태에서 하나의 특정 주제에 생각을 집중하여 전개시키는 것, 그리고 내적으로 두 가지가 합해진 가운데 하나의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행법은 현재 남방의 일부 선자들이 가르치고 있는 촛불 응시나 하얀 벽 바라보기 등을 포함해 주력이나 기도, 염불 등이 이에 해당하며, 생각을 전개시키는 방법은 근본불교 등에서 설하고 있는 연기관, 사념처법 등의 수많은 관법들이 그것이고, 두 가지가 합해진 형태로 하나의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초기 선종에서의 무념(無念)수행이나 간화선, 묵조선 등의 행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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