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3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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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3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4) 삼마희다지 ③
  
  다음에1)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들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공한처[空閑]를 좋아하며 관행(觀行)을 수습(修習)하고 내심(內心)으로 정사마타(正奢摩他)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란 능히 와구(臥具)에 대해 탐착(貪著)하고, 혹은 공한처[空閑]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樹下]에 앉아서 염(念)을 묶어서 현전(現前)하며 내지 …… 고 하는 것이다. '공한처[空閑]를 좋아한다'고 하는 이 말은 몸[身]을 원리(遠離)해야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능히 안으로 마음이 아홉 가지로 머무르면2) 이와 같은 것을 '내심
  
1) 총표(總標), 안립(安立), 작의(作意), 상(相), 제 경(經)의 종요(宗要)의 다섯 가지 부분으로 해석되는 삼마희다지(三摩 多地)의 내용 가운데에, 다섯 번째로 제 경(經)의 종요(宗要)에 대해서 밝힌다. 제 경(經)의 종요(宗要)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서 해석된다. 이하는 제 경(經)의 종요(宗要)를 밝히는 내용 가운데에 두 번째의 여러 가지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한다. 이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신(身) 심(心)의 원리(遠離)로 여실(如實)하게 깨닫게[覺了] 된다고 하는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2) 안주심(安住心) 섭주심(攝住心) 해주심(解住心) 전주심(轉住心) 복주심(伏住心) 식주심(息住心) 멸주심(滅住心) 성주심(性住心) 지주심(持住心)의 9종심주(種心住)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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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心)으로 정사마타(正奢摩他)에 안주(安住)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 말은 마음[心]의 원리(遠離)를 나타낸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공한처[空閑]를 좋아하여 머무르면, 곧 능히 내심(內心)을 끌어당겨[引發] 정사마타(正奢摩他)에 안주하게 되며, 만약 내심(內心)으로 정사마타(正奢摩他)에 안주(安住)하면, 곧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끌어당기며,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잘 수습(修習)하고 나면, 곧 제 법(法)에 대하여 여실(如實)하게 깨달음[覺了]을 끌어당길 수 있다.
  다음에3)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들 필추(苾芻)들은 삼마지(三摩地)에서 무량(無量)을 마땅히 부지런히 수습(修習)하며 상위(常委)로 정념(正念)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란 앞에서는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것[總標]이고 삼마지(三摩地)에서 부지런히 수습(修習)하고 난 이후는 세 가지[三事]로 나누어 수상(修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량(無量)'이란 4무량(無量)을 말하는 것이며, '상위(常委)'란 항상 소작(所作)이 있고 그리고 소작(所作)을 위실(委悉)하기 때문에 상위(常委)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정념(正念)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란 4념주(念住)에 그 마음을 안주(安住)함을 나타낸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이 세 가지 수상(修相)을 설하는가?
  첫째 세간원만(世間圓滿), 둘째 출세간원만[出世圓滿]의 두 가지의 원만(圓滿)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량(無量)을 닦기 때문에 곧 능히 세간원만(世間圓滿)을 끌어당기며[引發], 정념(正念)을 닦기 때문에 곧 능히 출세간원만[出世圓滿]을 끌어당긴다. 상위(常委)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속히 통달하게 된다. 이 인연(因緣) 때문에 두 가지에 처하여 설하며, 이 때문에 단지 세 가지의 수상(修相)을 설하는 것이다.
  또한 '무량(無量)'이란 사마타도(奢摩他道)를 나타내며, '정념(正念)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란 비발사나도(毘鉢舍那道)를 나타내며, '상위(常委)'란
  
3)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지(止) 관(觀)을 잘 수습(修習)해야 소지(所知)의 경계(境界)를 깨닫게[覺了] 된다고 하는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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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가지는 속히 증도(證道)에 나아감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무량(無量)'이란 복덕(福德)으로 나아가는 행(行)을 나타내며, '정념(正念)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란 열반(涅槃)에 나아가는 행(行)을 나타내며, '상위(常委)'란 두 가지에 나아가 속히 원만해지는 행(行)을 나타낸 것이다.
  먼저 사마타(奢摩他)에 대해서 잘 수습(修習)하고 나서 뒤에 비발사나(毘鉢舍那)와 더불어 비로소 함께 작용하게[俱行] 되며, 이 두 가지의 삼마지(三摩地)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여실(如實)하게 소지(所知)의 경계(境界)에 대해서 각료(覺了)하는 것이다.
  다음에4) 세존께서 "정려(靜慮)를 닦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등지선교(等持善巧)가 있고, 혹은 등지선교(等至善巧)는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듯이, 자세한 설은 경(經)의 올타남송(嗢拕南頌)과 같다.
  무엇을 등지선교(等持善巧)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공(空) 등의 3삼마지(三摩地)에 대해서 선교(善巧)를 얻기 때문이다.
  무엇을 등지선교(等至善巧)가 있지 않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승처(勝處) 변처(遍處) 멸진(滅盡)의 등지(等至)에 대해서 선교(善巧)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등지선교(等至善巧)이면서 등지선교(等持善巧)는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10종의 변처등지(遍處等至)와 무상등지(無想等至)에서 혹은 들어가고 혹은 나오면서 모두[俱] 선교(善巧)를 얻지만 3삼마지(三摩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모두[俱]에 선교(善巧)라고 하는 것인가?
  
4)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세 번째로 등지(等持) 등지(等至) 등의 상호간의 선교(善巧)에 대한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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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저 두 가지에 대해서 모두 선교(善巧)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두[俱]가 선교(善巧)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저 두 가지에 대해서 모두 선교(善巧)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앞서 설한 바 등지(等持) 등지(等至)에 대해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잘 건립(建立)해야 한다.
  '등지선교(等持善巧)가 있고, 혹은 등지선교(等至善巧)는 있지 않다'라고 설하는 것은 말하자면 등지(等持)의 명(名) 구(句) 문신(文身)에 대해서는 차별(差別)을 잘 알아도 능히 등지(等至)에 들어가는 제 행(行) 상(狀) 상(相)의 차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등지선교(等至善巧)이면서 등지선교(等持善巧)는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잘 알아서 어떤 하나[隨一]의 등지(等至)의 제 행(行) 상(狀) 상(相)에는 능히 들어가고 또한 능히 지금 들어가지만[現入] 그러나 이 삼마지(三摩地)의 명(名) 구(句) 문신(文身)의 차별(差別)의 상(相)을 잘 알지 못하고, 또한 '나는 이미 이러 저러한 등지(等持)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차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보살(菩薩)들은 비록 능히 백(百) 또는 천(千)의 여러 가지의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게 되어도 그 삼마지(三摩地)의 명(名) 구(句) 문신(文身)을 알지 못하며, 또한 '나는 이미 이러 저러한 등지(等持)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차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지 제 불(佛)에게서도 듣지 못했고, 이미 제일(第一)의 구경(究竟)을 얻은 제 보살(菩薩)에게서도 청문(聽聞)할 수 없는 것이며, 혹은 스스로 제일(第一)의 구경(究竟)을 증득(證得)한 이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머무른다[住]고 하는가?
  말하자면 능히 제 삼마지(三摩地)에 잘 들어가서 제 행(行) 상(狀) 상(相)을 잘 취하고, 그것을 잘 취하기 때문에 그 바라는 것에 따라서 능히 정(定)에 안주[住]하며, 삼마지(三摩地)에서 물러남[退失]이 없이 이와 같이 정(定)에 머무르는 것과 또한 물러남[退失]이 없는 것, 두 가지 모두를 머무른다[住]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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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나온다[出]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능히 정(定)에 들어가서 제 행(行) 상(狀) 상(相)에 대해서 다시 사유(思惟)하지 않고, 부정지(不定地)5)의 분별(分別)의 체상(體相)에 포함되는 정지(定地)와 같지 않은 종류의 법에 대해서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삼마지(三摩地)에서 나오거나, 혹은 수소작(隨所作)의 인(因) 때문에, 혹은 정소작(定所作)의 인(因) 때문에, 혹은 기소작(期所作)의 인(因) 때문에 정(定)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수소작(隨所作)이란 의발(衣鉢)을 수습(修習)하는 등의 여러 가지 소작업(所作業)을 말한다. 정소작(定所作)이란 음식 대소변[便利] 사장(師長)을 받들어 모시는 여러 가지 소작업(所作業)을 말한다. 기소작(期所作)이란 어떤 사람이 먼저 시기를 정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야 소작(所作)이 있게 되는 것을 허락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정(定)으로 바꿔 들어가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 인연에 의해서 삼마지(三摩地)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 등을 행(行)이라고 하는가?
  소연(所緣)대로 갖가지 행(行)을 지어서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니, 추행(麤行) 정행(靜行) 병행(病行) 옹행(癰行) 전행(箭行) 무상행(無常行)을 말하며, 또는 이러 저러한 삼마지(三摩地)에 있는 바의 제 행(行)을 말한다.
  무엇 등을 상(狀)이라고 하는가?
  제 정(定)에 막 들어가려고 할 때에, 곧 이 정(定)의 상상(相狀)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상(狀)에 의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나는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상정(相定)에 오래지 않아 들어갈 것이다'고 훤히 알거나[了知], 혹은 '다시 곧바로 들어간다'고 훤히 알 것이다. 그 교수사(敎授師)는 이 상(狀)에 의하기 때문에 또한 그는 오래지 않아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상(狀)의 정(定)에 들어갈 것이라고 훤히 아는 것이다.
  무엇 등을 상(相)이라고 하는가?
  
5) 욕계지(欲界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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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소연상(所緣相), 둘째 인연상(因緣相)의 두 가지 상(相)을 말한다. 소연상(所緣相)이란 분별(分別)의 체(體)6)를 말하며, 이것을 연(緣)하기 때문에 능히 제 정(定)에 들어간다. 인연상(因緣相)이란 정(定)의 자량(資糧)을 말하며, 이 인연(因緣)에 의해서 능히 제 정(定)에 들어간다. 말하자면 정(定)의 교계(敎誡)와 교수(敎授)에 수순(隨順)하여 제 정(定)의 소행(所行)의 자량(資糧)을 적집(積集)하고 구행(俱行)을 닦으며,7) 유심(有心)을 염환(厭患)하려고 하며, 난(亂)과 불란(不亂)에 대해서 심제(審諦)로써 훤히 알며, 또한 혹은 인(人)의 소작(所作), 혹은 비인(非人)의 소작(所作), 혹은 음성(音聲)의 소작(所作), 혹은 공용(功用)의 소작(所作)으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조선(調善)이라고 하는가?
  만약 삼마지(三摩地)가 오히려 유행(有行) 때문에 구속[拘執]되는 것이, 마치 물로 지탱되는 것과 같고, 혹은 법성(法性) 때문에 구속[拘執]되어 고요하지 못하고 묘(妙)하지도 못하고 안온(安穩)의 도(道)도 아니며, 또한 심일취성(心一趣性)을 증득하지도 않는 이러한 삼마지(三摩地)를 조선(調善)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所樂]에 따라서 안온(安穩)하게 머무르지 않는 것, 즉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을 조선(調善)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오히려 유행(有行) 때문에 구속[拘執]된다고 하는 것인가?
  서원(誓願)과 함께 작용하는[俱行] 사(思)에 의하기 때문에 외연(外緣)을 제복(制伏)하여 마음을 정(定)과 작의(作意)에 지키고, 반드시 공용(功用)에 의해서 비로소 능히 운전(運轉)하고, 내심(內心)으로 하여금 밖으로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물로 지탱되는 것과 같고'라는 이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법성(法性) 때문에 구속[拘執]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지(下地)를 관(觀)하는 것을 추(麤)의 법성(法性)이라고 하고, 상지(上
  
6) 제 유루법(有漏法)을 분별(分別)한다고 이름하기 때문에 정(定)의 소연(所緣)을 분별(分別)의 체(體)라고 이름한다.
7) 정(定) 혜(慧)의 쌍수(雙修)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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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地)를 관(觀)하는 것을 정(靜)의 법성(法性)이라고 하며, 적정미묘(寂靜微妙)로서 안은도(安隱道)를 얻고, 그리고 능히 심일취성(心一趣性)을 얻는 것이니, 5성지(聖智)의 삼마지(三摩地)에서 이미 간략히 해석한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소행(所行)이라고 하는 것인가?
  삼마지소행(三摩地所行)의 경계(境界)는 소득(所得)의 정(定)에 의하기 때문에, 이 이상을 초과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제 2정려(靜慮)를 관찰하여 볼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근(根)의 도(度)와 삭취취(數取趣)의 도(度)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인발(引發)이라고 하는 것인가?
  넓은 문(文) 구의(句義)를 능히 간략히 거두며, 그리고 능히 여러 가지 뛰어난 공덕(功德)을 성취[成辦]하는 것이다.
  무엇을 등애(等愛)라고 하는 것인가?
  낙(樂)을 맨 마지막으로 하는 참(慚) 괴(愧) 애(愛) 경(敬) 신(信)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지(正知) 근호(根護) 계호(戒護) 및 무회(無悔) 등을 말한다. 낙(樂)에 따르기 때문에 마음[心]이 곧 정(定)을 얻는 것이며,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불등애(不等愛)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등애(等愛)이면서도 불등애(不等愛)라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참(慚) 괴(愧) 등에 대해서 적은 부분[少分]을 성취하고 적은 부분은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참(慚)과 괴(愧)를 갖추었더라도 애(愛)와 경(敬)은 없으며, 내지 …… 하는 것이다.
  무엇을 증(增)이라고 하는 것인가?
  얻은 정(定)이 계속 다시 증장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감(減)이라고 하는 것인가?
  얻은 정(定)이 도로 다시 잃는 것[退失]을 말한다.
  무엇을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그 두 가지 도(道)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지(止) 거(擧) 사(捨)란 앞에서8) 지(止) 등의 상(相)에서 이미 갖추어 분별(分別)한 것과 같은
  
8) 본론(本論) 제 11권(卷)의 32상(相)의 처(處)에서 이미 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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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알아야만 한다.
  다음에9) 『분별정려경(分別靜慮經)』10)에서 "정려(靜慮)가 있다는 것은 곧 흥(興) 등에 있는 것이니, 말하자면 이를 쇠(衰)라고 하며, 내지 ……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가운데에는 4전(轉)에 2시(時)의 전도(顚倒)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삼마지(三摩地)에서 물러날 때[退墮時]와 승진할 때[勝進時]를 말한다. 물러남[退]으로 나아가는 것과 물러남[退]을 모두 쇠(衰)라고 이름하며, 승진도(勝進道)에 나아가는 것과 그리고 승진(勝進)과 함께하는 것을 모두 흥(興)이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삼마지(三摩地)에 승진할 때[勝進時]의 전도(顚倒)를 알아야만 하는가?
  그가 '나는 지금 이생희락(離生喜樂)을 잃고, 나는 지금 승삼마지(勝三摩地)11)를 잃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려자(靜慮者)는 부지런히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마음이 적정(寂靜)으로 나아가고, 사(捨)에 따라서 행(行)하기 때문에 초정려(初靜慮)로부터 제 2정려(靜慮)의 근분(近分)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이 현상[事]12)에 대해서 잘 요지(了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위(位)에서 초정려지(初靜慮地)의 희락(喜樂)은 이미 벗어났고, 제 2정려지(靜慮地) 중의 모든 희락(喜樂)은 오히려 아직 얻지 못한지라, 곧 '지금 이생희락(離生喜樂)을 잃었다'고 이러한 생각을 짓고는 마침내 도로 거기로부터 물러나서 그곳의 마음을 거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정려(靜慮)를 닦는 자가 그 마음을 전도(顚倒)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떻게 정려지(靜慮地)에서 물러날 때[退失]의 전도(顚倒)를 알아야만 하는가?
  
9)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네 번째로 『분별정려경(分別靜慮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10) 이 경(經)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1) 승진(勝進)의 삼마지(三摩地)를 의미한다.
12) 제 2정려(靜慮)의 근분(近分)의 현상[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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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이 초정려(初靜慮)를 얻고서 열반(涅槃)을 위해서 자량(資糧)을 적집(積集)하고 그는 열반에 대해서 이미 닦은 자량(資糧)을 원만히 하게 되어, 이 인연(因緣)에 의해서 혹은 공용(功用)에 의해서, 혹은 다시 임운(任運)에 의해서 이와 같은 상(想)을 일으켜 작의(作意)를 현전하고, 이와 같은 상작의(想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제 색(色)으로부터 식(識)에 이르기까지 병(病)과 같고 …… 무아(無我)라고 요지(了知)하며, 이와 같은 상작의(想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곧바로 세간정(世間定)에 의해 생기게 되는 희락(喜樂)은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는지라, 곧 '나는 지금 정(定)에서 생겨나는 이익(利益) 및 의지할 곳[所依止]에서 물러났다'고 이러한 생각을 짓고는 마침내 도로 거기로부터 물러나서 그곳의 마음을 거두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이 정려(靜慮)를 닦는 자가 삼마지(三摩地)의 물러날 때[退失]의 전도(顚倒)인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떻게 삼마지(三摩地)에 물러날 때[退失]의 무전도[無倒]를 알아야만 하는가?
  어떤 사람이 초정려(初靜慮)를 얻고서 곧 만족한 기쁨[喜足]을 내어 위로 승진할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애미(愛味)만을 일으키고, 이와 같이 욕(欲)과 함께 작용하는 상작의(想作意)를 일으키기 때문에 마침내 곧 근분[近]의 욕계정(欲界定)에서 물러나지만, 그는 이 쇠퇴[衰]에 대해서 '이는 쇠퇴[衰]이다'고 능히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무전도[無倒]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얻은 정려정(靜慮定)에 의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으면서 '내가 얻은 이 정려정(靜慮定)은 다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며, 이와 같은 욕(欲)과 함께 작용하는 상작의(想作意)를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개(蓋) 전(纏)이 계속 증장하고 계속 두터워져서 곧 정(定)으로부터 물러난다. 그는 이 쇠퇴[衰]에 대해서 '이것은 쇠퇴이다'고 능히 알았는데도 얻은 정려(靜慮)의 제 정(定)을 다른 사람에게 현시(顯示)하여 '여러 국왕과 왕(王)의 신하들은 나에게 공양해야만 한다'고 하고, 정(定)으로부터 일어나서는 이 현상[事]을 심사(尋思)하며, 이와 같은 욕(欲)과 함께 작용하는 상작의(想作意)에 의하기 때문에 모든 개(蓋) 전(纏)이 계속 증장하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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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터워지니, 그 밖의 내용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정려(靜慮)를 닦는 자가 삼마지(三摩地)에서 물러날 때[退失]의 무전도[無倒]인 줄 알아야만 한다. 두 번째의 무전도[無倒]는 처음의 무전도[無倒]를 뒤집어서 그 상(想)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이 두 가지 무전도[無倒] 또한 2시(時)13)에 해당하여 그 상(想)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위와 같이 전도와 무전도의 처(處)에 의해서 4전(轉)을 안립(安立)하는 것이다.
  다음에14) 『분별사검행정경(分別四撿行定經)』에서 "네 가지의 상(相)에 의해서 일체의 삼마지(三摩地) 등의 행(行)을 살핀다[撿]"고 말씀하셨으니, 이 등지(等持)는 순퇴분(順退分)이고 내지 이것은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행(行)을 살피는가[撿]?
  이것은 열분(劣分)이며, 이것은 승분(勝分)이고, 이것은 수승분(殊勝分)이고, 이것은 최승분(最勝分)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차례대로 이것은 다시 어떠한 것인가?
  말하자면 정(定)을 닦는 자가 초정려(初靜慮)로부터 도로 물러나 나오고 나서 제 정려(靜慮)에 다시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또한 이 행(行) 상(狀) 상(相)을 사유하지 않고, 그러나 욕(欲)과 함께 작용하는 여러 가지 상작의(想作意)를 자주 자주 현전(現前)하는 것이니,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그것으로부터 나오고 나서 애미(愛味)를 수념(隨念)하면 마땅히 이 때에 정려(靜慮)를 닦는 자는 스스로 행(行)에 대해서 '나의 삼마지(三摩地)는 지금 사라지고[退劣] 있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또한 정(定)을 닦는 자는 초정려(初靜慮)로부터 도로 물러나 나오고 나서 이 정(定)에 수순(隨順)하는 교법(敎法), 즉 초정려(初靜慮)의 제 행(行) 상
  
13) 물러날 때[退失時]와 승진할 때[勝進時]를 가리킨다.
14)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다섯 번째로 『분별사검행정경(分別四撿行定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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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狀) 상(相)을 듣게 되어 은근하고 간절하게 잘 그 상(相)을 취해서 얻은 정(定)으로 하여금 잊지 않고 굳게 머물도록 하니, 이와 같이 정(定)에 수순(隨順)하는 법(法)을 수념(隨念)하기 때문에 순주분(順住分)을 성취한다. 이 때에 스스로 행(行)에 대해서 '나의 삼마지(三摩地)는 이미 그 뛰어남을 성취하였고, 나의 삼마지(三摩地)는 이미 안주(安住)를 얻은 것인가, 물러나는 것[退]도 아니고 승진[進]하는 것도 아니고 결택(決擇)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닌 것인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또한 정려자(靜慮者)는 초정려(初靜慮)로부터 다시 물러나 나오고 나서 제 2정려(靜慮)에 수순(隨順)하는 교수법(敎授法)을 듣게 되고, 이미 듣게 되고 나서는 제 2정려도(靜慮道)와 함께 작용하는 여러 가지 상작의(想作意)가 자주 자주 현전(現前)하면, 이 때에 스스로 행(行)에 대해서 '나의 삼마지(三摩地)는 이미 수승(殊勝)하게 된 것인가, 물러나는 것[退]도 아니며, 머무는 것[住]도 아니며, 오직 승진(勝進)일 뿐인가, 결택(決擇)에 나아가는 것[進]인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또한 정(定)을 닦는 자는 초정려(初靜慮)로부터 도로 물러나 나오고 나서 고제(苦諦) 등의 상(相)과 상응하는 교법(敎法)을 듣고, 이미 듣고 나서는 고제(苦諦) 등과 함께 작용하는 여러 가지 상작의(想作意)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이 자주 자주 현전(現前)하면, 그는 이 때에 스스로 행(行)에 대해서 '나의 삼마지(三摩地)는 최승(最勝)을 이루었는가, 물러나는 것[退]도 아니고 머무는 것[住]도 아니고 또한 승진(勝進)도 아니지만 그러나 결택(決擇)으로 나아가는 것[進]인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다음에15) 경(經)에서 "안(眼)이 있고 색(色)이 있으며, 내지 의(意)가 있고 법(法)이 있는데 여러 필추(苾芻)들은 실(實)이거나 유(有)인 이 제 법(法)에 대해서 도무지 영수(領受)하지 않고 오히려 상(想)도 받아들이지[受] 않는데
  
15)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로 6경(境)에서 상(想) 무상(無想)을 감수[受]하지 않는다는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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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하물며 무상(無想)이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여러 필추(苾芻)들이 초정려(初靜慮)에서 구족하여 안주(安住)하고, 이 인연 때문에 안(眼) 색(色)으로부터 의(意) 법(法)에 이르기까지 싫어하여 무너뜨리며[厭壞], 싫어하여 무너뜨리기 때문에 위세(威勢)를 사라지게[映奪] 하여 드디어 안(眼) 속에 안의 상[眼想]이 없으나 그 상(想)은 있다 내지 법(法)에 법의 상[法想]이 없으나 그 상(想)은 있다16)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상(想)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안(眼) 등에 대해서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이것은 고(苦)이다', '이것은 집(集)이다', 혹은 '이것은 병(病) 등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제 법(法)에 대해서 자상(自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한다. 여기에서는 바로 무루(無漏)의 작의(作意)를 설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상(無想)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일체의 상(想)을 사유(思惟)하지 않기 때문에 멸진정[滅定]에서 적정(寂靜)을 사유(思惟)하는 것이니, 여기서의 뜻[意]은 제 상(相)을 여읜 상(想)을 설하여 무상(無想)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멸진정에 안주(安住)하는 자를 일체의 제 상(想)이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다음에17) 경(經)에서 "4취도(趣道)18)"를 설하신 것과 같이, 어떻게 연좌(宴
  
16) 안(眼) 등에서 사상(事想)이 있지 않고 오직 4제(諦)의 제 이상(理想)만이 있는 것을 말한다.
17)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일곱 번째로 4취도(趣道)를 설한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18) 첫째는 유루정(有漏定)에 의지하여 무루(無漏)를 끌어 일으키는 것[引起]이니, 견도(見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혜(慧)에 의지하여 정(定)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곧 수도(修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정(定) 혜(慧)에 의지하여 정(定) 혜(慧)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곧 수도(修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는 처음에는 정(定)에 의지하여 혜(慧)를 끌어 일으키고 다음에는 혜(慧)에 의지하여 정(定)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곧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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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坐)하여 제 법(法)에 대해서 사유(思惟)하고 간택(簡擇)하는 것인가?
  앞서 이미 초정려(初靜慮) 등을 증득하였으나 아직 제(諦)를 보지 못한 어떤 필추(苾芻)가 정법(正法)을 듣고 많이 들었기 때문에 능히 연좌(宴坐)하여 삼마지(三摩地)에 의지해서 고(苦) 등의 제(諦)에 대해서 현관(現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行)하는 자는 증상심(增上心)에 의지하여 증상혜(增上慧)를 닦는 것이다.
  또 어떤 필추(苾芻)는 여실(如實)하게 고(苦)를 알고 내지 도(道)를 알았으나 아직 초정려(初靜慮) 등을 증득하지 못한지라 그는 곧 연좌(宴坐)하여 제 법(法)을 사유(思惟)하니, 이와 같이 행(行)하는 자는 증상혜(增上慧)에 의지하여 증상심(增上心)을 닦는 것이다.
  세 번째 행자(行者)는 구득(俱得)이라고 이름하니,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쌍으로 섞어서 굴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 행자(行者)는 아직 정법(正法)을 듣지 못하였고 아직 다문(多聞)을 수습(修習)하지 못한 앞서 이미 초정려(初靜慮) 등을 증득한 자가 뒤에 대사(大師) 혹은 그 밖의 존중받는 사람에게서 제를 보는 법[見諦法]을 듣거나, 혹은 나머지 결(結)을 끊는 법을 듣고서 이것에 의해서 진제(眞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거나, 혹은 다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출리(出離)에서 끌어당겨진 대선(大善)의 희열(喜悅)을 증득하고, 모든 도거심(掉擧心)을 제복(制伏)하기 때문에 도로 다시 연좌(宴坐)하고, 이와 같이 연좌(宴坐)하고 나서는 다음에 마음을 안주하여 정려등지(靜慮等至)에 머무르는 것이다.
  맨 처음의 취도(趣道)는 견도(見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引起 : 引]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수도(修道)를 끌어 일으키는 것[引]이며, 네 번째의 취도(趣道)는 모두[俱]19)를 끌어 일으키는 것[引]이다.
  다음에20) 경(經)에서 "4정승(淨勝)21)이 있으니, 청정(淸淨)을 구하는 데에
  
19)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그리고 무학도(無學道)의 모두 다를 말한다.
20)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여덟 번째로 4정승(淨勝)을 설한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21) 첫째는 시라(尸羅) 즉 계(戒)이며, 둘째는 삼마지(三摩地) 즉 정(定)이며, 셋째는 견(見)이며, 넷째는 해탈(解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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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정승(淨勝)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듯이, 무엇을 정(淨)이라고 하며, 무엇을 승(勝)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얻은 바[所得] 증득한 바[所證] 끌어 일으킨 바[所引]22)의 계(戒) 등을 원만히 하거나 섭수(攝受)하는 것을 정(淨)이라고 이름하며, 부지런히 정진[勤精進]을 일으켜 아직 원만하지 않은 것을 원만하게 하는 것을 승(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시라(尸羅)를 원만히 하고 섭수(攝受)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구족계[具戒]에 머무르며, 또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능히 수호(守護)할지라도 궤칙(軌則) 및 소행(所行)에 대해서 아직 구족(具足)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소죄(小罪)에 대해서 깊이 포외(怖畏)를 보지 못한 경우를 시라(尸羅)에 대해서 아직 원만히 하였다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만약 일체에 대해서 모두 다 만족할 경우에 이에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것을 시라(尸羅)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오랜 시간동안 익히 수습하기 때문에, 곧 근문(根門)을 잘 지켜 머무르며, 내지 …… 할 경우에 곧 시라(尸羅)를 섭수[攝]하여 자체(自體)23)를 이루어 자성(自性)에 안주하는 이와 같은 것을 시라(尸羅)의 섭수(攝受)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삼마지(三摩地)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가?
  만약 이미 가행구경과(加行究竟果)를 얻었거나24) 혹은 4정려(靜慮)를 얻은 것을 이에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고, 이 이하의 위(位)에 대해서는 모두 원만(圓滿)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22) 소득(所得) 등의 이 셋은 모두 4정승(淨勝)에 통하거나, 혹은 소득(所得)은 계(戒), 소증(所證)은 정(定), 소인(所引)은 혜(慧) 및 해탈(解脫)에 통한다는 어의(語義)가 있는 것이다.
23) 계체(戒體)의 무표(無表)를 말한다.
24) 곧 근본정(根本定)을 얻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원만(圓滿)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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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삼마지(三摩地)의 섭수(攝受)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 얻은 바 삼마지(三摩地) 등은 후시(後時)에 청정(淸淨)히 하고 또한 삼마지(三摩地)는 행이 있는 것[有行]으로 인해서 구속되지 않는 것이며, 내지 …… 않는 것이다.
  무엇을 견(見)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의 법음[音]을 듣고 이치에 맞게 작의하기 때문에 정견(正見)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정견(正見)에 의해서 비록 고(苦)로부터 도(道)에 이르기까지 능히 알지만 아직 여실(如實)하지 않을 경우에는 오히려 정견(正見)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만약 능히 그것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알면 이 때 비로소 정견(正見)의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견(見)의 섭수(攝受)라고 하는가?
  후시(後時)에 제 루(漏)가 영원히 다하고 내지 …… 라는 것이다.
  무엇을 해탈(解脫)의 원만(圓滿)이라고 하는가?
  유학(有學)의 지견(智見)에 의해서 탐(貪) 등을 해탈(解脫)할 경우에는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지 않지만, 무학(無學)의 지견(智見)에 의해서 해탈(解脫)을 얻을 경우에는 이에 원만(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탈(解脫)의 섭수(攝受)라고 하는가?
  행하거나 머물거나 간에 항상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나지[退失]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해탈(解脫)의 섭수(攝受)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에25) 경(經)에서 "마음으로 청정(淸淨)을 행(行)하는 필추(苾芻)는 시시때때로 바르게 작의(作意)해서 5상(相)을 사유(思惟)해야 한다. 내지…… "라고 말씀하셨듯이,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는 증상심자(增上心者)는 이에
  
25)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아홉 번째로 심청정(心淸淨)의 행(行)을 필추(苾芻)는 5상(相)에 대해서 사유(思惟)한다는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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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정행(心淸淨行)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제 악(惡) 불선(不善)인 욕(欲) 등의 심사(尋思)와 친리(親里) 등에 대한 심사(尋思)는 모두 이 행(行)에 대해서 능히 장애가 된다. 연(軟) 중(中) 상(上)의 심사(尋思)를 행(行)하는 자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세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처음의 것은 그 밖의 상(相)을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에 그 사유를 다시 현행(現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심사(尋思)의 깊은 과환(過患)을 보기 때문에 혹은 다시는 생각하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심사(尋思)로 하여금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안으로 마음 등을 잘 안주[安]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처음부터 곧 그 일체를 모두 다 현행(現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현재의 방편으로 심사(尋思)의 행(行)을 점점 다하여 엷어지게끔 하고 거친 것[麤]이 그치고 나서 점차로 제복(制伏)하게 하는 것이다. 아직 심사(尋思)의 길[路]과 심사(尋思)의 소연(所緣)에 대해서 깊이 포외(怖畏)를 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땅히 염환(厭患)과 함께 작용하는 마음으로써 사유력(思惟力)을 많게 하여 그 심사(尋思)와 함께 작용하는 마음에 대하여 조련(調練)하고 제복(制伏)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나누면 다섯 가지26)가 된다.
  다음에27) 『탕진경(盪塵經)』에서 불(佛) 세존(世尊)께서 "생금(生金)을 도련(陶鍊)하는 법과 같이 그 마음을 도련(陶鍊)해야 한다. 내지……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등의 의미는 어떻게 알아야만 하는가?
  말하자면 생금(生金)을 도련(陶鍊)하는데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
  
26) 연(軟) 중(中) 상(上)의 세 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 가운데, 두 번째의 중품(中品)의 보특가라가 둘로 나누어지고, 세 번째의 상품(上品)의 보특가라가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가 된다.
27)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열 번째로 『탕진경(盪塵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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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첫째는 때를 제거하는 도련[除垢陶鍊]이며, 둘째는 섭수하는 도련[攝受陶鍊]이고, 셋째는 부드럽게 하는 도련[調柔陶鍊]이다.
  때를 제거하는 도련[除垢陶鍊]이란 금성(金性) 중에서 점차 거칠고[麤] 보통이고[中] 미세한[細] 때[垢]를 제거하여 내지 오직 깨끗한 금사(金沙)만을 있게 하는 것이다. 섭수하는 도련[攝受陶鍊]이란 곧 그것을 자주[鄭重] 녹이고 굽는 것[銷煮]을 말한다. 부드럽게 하는 도련[調柔陶鍊]이란 녹이고 굽고 나서는 곧 미세하게 티[瑕隙] 등의 찌꺼기를 연마하여 다스리는[鍊治] 것을 말한다. 금성(金性) 내에 생금(生金)이 있는 것과 같이, 종성위(種性位)에 마음이 깨끗한 행자(行者) 또한 이와 같은 줄 알아야만 하니, 능히 반열반(般涅槃)을 증득하는 것에 감능(堪能)하는 자를 말한다.
   어떠한 위(位)부터 마음이 깨끗한 행자(行者)라고 이름하는가?
   정신(淨信)을 얻은 것으로부터 출가(出家)를 구하는 위(位)까지이다. 이 출가(出家)와 재가위(在家位)에서는 거칠고 보통이며 미세한 세 가지 더러움[垢穢]이 있다. 그 재가자(在家者)는 두 가지의 장애 때문에 출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는 불선업(不善業)으로서 항상 즐겨 신(身) 어(語) 의(意)의 악행(惡行)에 편안히 머무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사악견(邪惡見)으로서 세간(世間)의 진아라한(眞阿羅漢)의 정행(正行)과 정지(正至)를 없다[撥無]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정신(淨信)을 얻은 위(位) 이전에 능히 장애가 된다.
  욕(欲) 등의 심사(尋思)는 출가자(出家者)를 장애하는 것이니, 그것 때문에 마음에 희락(喜樂)이 생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친(親) 등의 심사(尋思)는 희락(喜樂)을 장애하는 것이니, 그것 때문에 항상 선법(善法)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을 끊기 때문에 항상 선법(善法)을 닦아 속히 원만(圓滿)하고 순정(純淨)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유심유사(有尋有伺)는 깨끗한 금사(金沙)와 같아서 이를 마음의 때를 제거하는 도련[心除垢陶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치 거듭 녹였지만 굽지[銷煮] 않은 생금(生金)과 같다. 만약 다시 심사(尋思)를 그치게 하고 내지 제 4정려(靜慮)에 구족하여 안주한다면 이를 마음을 섭수하는 도련[心攝受陶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를 섭수(攝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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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때문에, 마치 그 녹여서 구운[銷煮] 생금(生金)과 같다. 만약 삼마지(三摩地)가 유행(有行)에 의해서 구속[拘執]되지 않으며 내지 …… 라고 할 경우에는 신통법(神通法)에서 그 바라는 것에 따라서 능히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이를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도련[心調柔陶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치 미세한 티[瑕隙] 등의 찌꺼기를 연마하여 다스린[鍊治] 그 생금(生金)과 같다.
  다음에28) 경(經)에서 "3상(相)29)에 대해서 작의(作意)하여 사유(思惟)해야만 한다. 내지 …… "고 말씀하신 것은 마땅히 시시때때로 사마타(奢摩他) 등의 차별(差別)의 상(相)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해야 하며, 한결같이 혼침과 도거[沈掉] 등을 대치하려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지상[止]과 거상[擧]에 대해서 아직 익히지 않은 자는 오직 한결같이 이 혼침과 도거의 상[沈掉相]을 수습하는데, 이와 같이 수습하는 자는 방편도위(方便道位)에 머물러 있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시시때때로 사상(捨相)을 사유하여 이와 같이 해서 원만을 이루는 도위[成滿道位]에 머물러 있으면, 또한 이것에 대해서 한결같이 닦기 때문에, 연기법(緣起法)과 성제(聖諦)에 대해서 사택(思擇)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정정(正定)하지도 않고 제 루(漏)를 다하지도 않으며, 제 제(諦) 중에 아직 현관(現觀)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현관(現觀)할 수 없고, 혹은 이미 현관(現觀)했을 경우에도 누진(漏盡)을 얻을 수가 없다.
  처음의 두 가지30)는 삼마지(三摩地)가 능히 갖추어지는[成辦] 도(道)이며,
  
28)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의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열 한 번째로 3상(相)에 대해서 사유(思惟)하는 경(經)의 내용을 풀이한다.
29) 지(止)와 거(擧)와 사(捨)의 상(相)을 말한다. 만약 지상(止相)과 거상(擧相)을 닦으면 정(定)의 가행(加行)에 속한다. 연기(緣起) 등에 대해서는 바르게 사택(思擇)하지 않기 때문에 심(心)이 정정(正定)에 이른 것은 아니어서 현관(現觀)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자주 사상(捨相)을 사유하여 모든 루(漏)를 다 제거해야만이 도(道)를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30) 혼침과 도거의 상(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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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의 한 가지31)는 삼마지(三摩地)에 의지하여 제 루(漏)를 다하는 도(道)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이 가운데의 요의(要義)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다음에32)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4정법(正法)이 있다.
  무엇 등을 넷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원리(遠離)하는 것이고, 둘째는 수습(修習)하는 것며, 셋째는 수습의 과[修果]이고, 넷째는 성교(聖敎)에 대해서 다툼[乖諍]이 없는 것이다.
  원리(遠離)하는 것이란 산림(山林) 나무 아래[樹下] 공한처[空閑] 정실(靜室)을 말한다.
  수습(修習)하는 것이란 그곳에 머무르면서, 즉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의 두 가지 법을 부지런히 닦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사마타(奢摩他)를 수습하고 나서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지하여 해탈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먼저 초정려(初靜慮) 내지 제 4정려(靜慮)를 얻고 나서 그는 곧 이 삼마지(三摩地)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실(如實)하게 고(苦)를 알고 내지 도(道)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는 곧 이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지하여 견도단(見道斷)의 제 번뇌(煩惱)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는 것이다.
  무엇을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습(修習)하고 나서 사마타(奢摩他)에 의지하여 마음에 해탈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여실(如實)하게 고(苦)를 알고 내지 도(道)를 알고 그는 이와 같은 증상혜(增上慧)를 의지하기 때문에 정려(靜慮)를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곧 이와 같은 사마타(奢摩他)에 의하기 때문에 수도단(修道斷)의
  
31) 사상(捨相)을 말한다.
32) 경(經)의 도리에 대해서 해석하는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열 한가지 부문으로 경(經)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두 번째의 4정법(正法)으로써 성교(聖敎)를 섭지(攝持)하는 것에 대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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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번뇌(煩惱)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는 것이다.
  위와 같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습(修習)하고 나서 여러 가지의 계(界)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다. 견도소단(見道所斷)의 여러 가지의 행(行)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斷界)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수도소단(修道所斷)의 여러 가지의 행(行)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욕계(離欲界)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일체에 있는 집착이 모두 다 영원히 멸(滅)하기 때문에 멸계(滅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를 수습의 과[修果]라고 이름한다.
  성교(聖敎)에 대해서 다툼[乖諍]이 없다는 것은 소위 대사(大師)와 여러 제자(弟子)의 의(義)나 문(文)이나 구(句)가 문(文) 구(句) 의(義)에 대해서 평등윤흡(平等潤洽)33)하여 서로 간에 수순(隨順)하여 이도(異道)가 시설한 견해(見解)의 갖가지로 일치하지 않고 차별하여 동일하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제 1구(句)는 소위 전구(前句)로서, 만약 이 구(句)로써 첫 번째 것을 물으면 곧 이 구(句)로써 두 번째 것을 대답하는 것이다. 가령 첫 번째에 온(蘊)에 의지하여 물었는데 다시 두 번째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 묻는다면 곧 제 1구(句)와 평등윤흡(平等潤洽)하여 서로간에 수순한 것[隨順]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
  5) 비삼마희다지(非三摩 多地)
  
  이미 삼마희다지(三摩 多地)를 설하였다.
  무엇을 비삼마희다지(非三摩 多地)34)라고 하는가?
  이 지(地)의 상(相)에는 간략하게 열 두 가지35)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33)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 상좌(上座)의 대답이나 그의 제자의 대답이나 여래(如來)의 대답이 모두 동일한 것을 평등윤흡(平等潤洽)이라고 한다.
34) 비정지(非定地)라고도 번역된다.
35) 『본론(本論)』 제 63권(卷)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 열 두 가지의 부정지(不定地) 가운데 일곱 번째는 상계(上界)의 앞의 5작의(作意), 아홉 번째와 열 번째는 상계(上界)의 7작의(作意), 여덟 번째는 이 상계(上界)의 염법(染法)이며 이 지(地)는 단지 앞의 지(地)를 바꾸어 놓았을 뿐아니라 상이계(上二界)의 일체의 산법(散法)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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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하지 않는[不定] 자성(自性)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5식신(識身)을 말한다.
  경안(輕安)을 빠뜨림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욕계계(欲界繫)의 제 심(心)과 심법(心法)을 말한다. 그 심(心)과 심법(心法)에는 비록 또 다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만 경안(輕安)을 머금어서[含潤] 구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발취하지 않기[不發趣]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욕(欲)을 수용하는 자가 여러 가지의 욕(欲) 가운데에 깊이 염착(染著)을 내어서 항상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극도의 산란(散亂)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처음 정(定)을 닦는 자가 묘오욕(妙五欲)에 대해서 마음이 따라가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혹은 커지고 줄어드는 덩어리[太略聚]가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처음 정(定)을 닦는 자가 안으로 마음이 줄어들어 혼침과 수면[惛睡]에 가리워 지는 것을 말한다.
  혹은 아직 증득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처음 정(定)을 닦는 자가 비록 산란(散亂)이 없고 덩어리[聚]를 줄여서 그 마음을 괴롭히지는[嬈惱] 않더라도 아직은 제 작의(作意)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제 심(心)과 심법(心法)을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아직은 원만함이 있지 않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비록 작의(作意)를 얻었을지라도 아직 가행구경(加行究竟)과 그것36)의 과(果)를 증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염오가 섞였기[雜染汚]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비록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를 증득했을지라도 갖가지 애미(愛味) 등의 혹(或) 때문에 그 마음을 염오(染汚)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자재하지 않음[不自在]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
  
36) 가행구경(加行究竟)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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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비록 이미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를 얻고, 그 마음 또한 번뇌의 염오(染汚)가 없을지라도 제 정(定)의 상(相)에 들어가고 머물고 나오는데 있어서 아직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고, 아직 바라는 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딱딱하고 껄끄럽고 어려운 것을 말한다.
  혹은 청정하지 않음[不淸淨]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비록 자재로워서 그 바라는 대로 껄끄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지만 오직 세간정(世間定)만을 닦아서 얻기[修得] 때문에, 번뇌(煩惱) 수면(隨眠)의 제 심(心)과 심법(心法)을 영원히 해칠 수 없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일어남[起]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얻은 정(定)에서 비록 물러나지 않았지만 정(定)에서 나오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물러남[退]이 있기 때문에 비정지(非定地)라고 이름하니, 얻은 삼마지(三摩地)를 물러나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6) 유심지(有心地)와 무심지(無心地)
  
  이미 비삼마희다지(非三摩 多地)를 설하였다.
  무엇을 유심지(有心地)라고 하며, 무엇을 무심지(無心地)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 두 지(地)는 모두 5문(門)에 의해서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지시설건립문(地施設建立門)이며, 둘째는 심란불란건립문(心亂不亂建立門)이며, 셋째는 생불생건립문(生不生建立門)이며, 넷째는 분위건립문(分位建立門)이며, 다섯째는 제일의건립문(第一義建立門)이다.
  지시설건립(地施設建立)이란 말하자면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 의지(意地)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의 이 네 가지는 한결같이 유심지(有心地)이며,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 중에 무상정(無想定)과 무상생(無想生) 및 멸진정(滅盡定)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한결같이 유심지(有心地)이며, 무상정(無想定) 또는 무상생(無想生) 및 멸진정(滅盡定)은 무심지(無心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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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불란건립(心亂不亂建立)이란 말하자면 4전도(顚倒)로 그 마음을 전도하는 것을 난심(亂心)이라고 이름하며, 만약 4전도(顚倒)로 마음을 전도하지 않으면 불란심(不亂心)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가운데에 난심(亂心) 역시 무심(無心)이라고 이름한다. 본성을 잃었기[失壞] 때문이다. 마치 세간에서 마음이 광란(狂亂)한 자를 보면 곧 이 사람은 무심인(無心人)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광란(狂亂)하여 마음이 본성을 잃었기 때문에 이 문(門)에서는 여러 전도[倒]하는 여러 난심(亂心)을 무심지(無心地)라고 이름하며, 불란심(不亂心)일 경우를 유심지(有心地)라고 이름한다.
  생불생건립(生不生建立)이란 8인연(因緣) 때문에 그 마음이 어떤 경우는 생기고, 어떤 경우는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니, 말하자면 근(根)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요, 경(境)이 현전(現前)하지 않기 때문이요, 작의(作意)를 빠뜨렸기 때문이요,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요, 상위(相違)하기 때문이요, 이미 끊어졌기[已斷] 때문이요, 이미 멸했기[已滅] 때문이요, 이미 생겼기[已生] 때문이다. 마음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제 인연(因緣)에 의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이에 곧 생겨나는 것은 이 가운데에 생(生)의 인연(因緣)을 갖추었기 때문에 마음은 곧바로 생기게 되는 것이니, 유심지(有心地)라고 이름한다.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인연(因緣)을 만나기 때문에 마음은 곧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무심지(無心地)라고 이름한다.
  분위건립(分位建立)이란 6위(位)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것을 유심지(有心地)라고 이름함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 등이 여섯 가지인가?
  무심수면위(無心睡眠位) 무심민절위(無心悶絶位) 무상정위(無想定位) 무상생위(無想生位) 멸진정위(滅盡定位) 그리고 무여의열반계위(無餘依涅槃界位)를 말한다. 이와 같은 6위(位)를 무심지(無心地)라고 이름한다.
  제일의건립(第一義建立)이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중의 무심지(無心地)를 말한다. 왜냐 하면 이 계(界)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도 또한 영원히 멸(滅)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위(位)에서는 전식(轉識)이 멸(滅)하기 때문에 무심지(無心地)라고 이름하며,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영원히 멸진(滅盡)하지 않는다면 제일의(第一義)의 무심지(無心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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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 것이다.
  
  7) 문소성지(聞所成地) ①
  
  이미 유심(有心) 무심지(無心地)를 설하였다.
  무엇을 문소성지(聞所成地)라고 하는가?37)
  만약 간략하게 설하면 5명처(明處)38)의 명(名) 구(究) 문신(文身)의 무량(無量)한 차별에 대해서 각혜(覺慧)39)를 우선[先]으로 하여 청문(聽聞)을 받아들이고[領受], 독송(讀誦)하고, 기억[憶念]하며, 명신(名身) 구신(句身) 문신(文身)에 의지하여 의미[義]에 대해서 전도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解了] 이와 같은 것을 문소성지(聞所成地)라고 이름한다.
  무엇 등을 5명처(明處)라고 이름하는가?
  내명처(內明處) 의방명처(醫方明處) 인명처(因明處) 성명처(聲明處)
  
37) 문소성지(聞所成地)는 크게 여섯 부분으로 기술되는데, 첫째는 5명처(明處)의 이름을 열거하고 이를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것이고, 셋째는 의방명처(醫方明處)를 해석하는 것이며, 넷째는 인명처(因明處)를 해석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성명처(聲明處)를 해석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공업명처(工業明處)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내명처(內明處)는 사(事)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상차별(想差別)을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성교(聖敎)를 섭수하는 의(義)의 상(相)과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네 가지 부분[門]으로 기술된다. 인명처(因明處)는 7종(種)의 종표(宗標)를 드러내어 논(論)의 체성(體性)을 해석하고, 논(論)의 처소(處所)를 밝히며, 논(論)의 소의(所依)를 밝히며, 논(論)의 장엄(莊嚴)을 해석하며, 논(論)의 타부(墮負)를 해석하며, 논(論)의 출리(出離)를 해석하며, 논(論)의 다소작법(多所作法)을 해석하는 8종(種)으로 기술된다. 성명처(聲明處)는 법(法)을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의(義)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시(時)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수(數)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처소근재(處所根栽)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의 여섯 가지로 기술된다.
38) 인도고대의 학과(學科)를 총칭(總稱)하는 것인데, 첫째는 내명처(內明處)로서 불교(佛敎)를 말하고, 둘째는 의방명처(醫方明處)로서 의술(醫術)과 약학(藥學)을 말하고, 셋째는 인명처(因明處)로서 변론학(辯論學)을 말하고, 넷째는 성명처(聲明處)로서 문전(文典)과 문학(文學)을 말하고, 다섯째는 공업명처(工業明處)로서 공예(工藝)와 미술(美術)을 말한다.
39) 사고분별(思考分別)하는 의식(意識)의 지력(智力)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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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업명처(工業明處)를 말한다.
  무엇을 인명처(因明處)라고 말하는가?40)
  간략하게 설하면 네 가지 상(相)에 의한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사(事)를 시설(施設)하고 건립(建立)하는 상(相)에 의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想)의 차별을 시설하고 건립하는 상(相)에 의하는 것이며, 셋째는 성교(聖敎)를 섭수(攝受)하는 의(義)의 상(相)에 의하는 것이며, 넷째는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의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事)를 시설하여 건립하는 상(相)이라고 하는가?41)
  세 가지의 사(事)에 일체의 제 불(佛)의 언교(言敎)를 종합적으로 섭수(攝受)하는 것이니, 첫째는 소달람사(素怛纜事)요, 둘째는 비나야사(毘奈耶事)요, 셋째는 마달니가사(摩怛履迦事)42)이니, 이와 같은 3사(事)는 섭사분(攝事分)43)에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다.
  무엇을 상(想)의 차별(差別)을 시설(施設)하여 건립(建立)하는 상(相)이라고 하는가?44)
  구(句)와 미혹(迷惑)과 희론(戲論)과
  
40) 이하는 첫째 5명처(明處)의 이름을 열거하고 이를 해석하며, 둘째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며, 셋째 의방명처(醫方明處)를 해석하며, 넷째 인명처(因明處)를 해석하며, 다섯째 성명처(聲明處)를 해석하며, 여섯째 공업명처(工業明處)를 해석하는 문소성지(聞所成地)의 여섯 부분 가운데에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것이다. 내명처(內明處)는 사(事)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상차별(想差別)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과 성교(聖敎)를 섭수하는 의(義)의 상(相)과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네 가지 부분[門]으로 기술된다.
41) 이하는 내명처(內明處)의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첫 번째로 사(事)를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에 대하여 밝힌다.
42) 마달니가(摩怛履迦)란 범어 M t k 의 음역(音譯)이다. 이는 12부경(部經)의 하나인 논의의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나중에 논장(論藏)으로 성립되었다.
43) 본론(本論)의 85권(卷)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44)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두 번째의 상차별(想差別)을 시설건립(施設建立)하는 상(相)으로서 4종(種)의 올타남(嗢拕南)으로 종요(宗要)를 나타내고 해석하고 있다. 이하는 첫 번째 올타남(嗢拕南)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여기에는 구(句)와 미혹(迷惑)과 희론(戲論)과 주(住)과 진실(眞實)과 정(淨)과 묘(妙)와 적정(寂靜)과 성(性)과 도리(道理)와 가시설(假施設)과 현관(現觀)의 12부분[門]의 뜻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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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住)와 진실(眞實)과 정(淨)과 묘(妙)와
  적정(寂靜)과 성(性)과 도리(道理)와
  가시설(假施設)과 현관(現觀)이라네
  句迷惑戲論 住眞實淨妙
  寂靜性道理 假施設現觀
  
  무엇을 구(句)라고 하는가?
  내육처(內六處)와 무량(無量)한 경계(境界)와 무량(無量)한 방소(方所)와 무량한 시분(時分)을 말한다.
  다시 3계(界)가 있으니,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며, 다시 3계(界)가 있으니, 소천세계(小天世界) 중천세계(中天世界)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말한다. 다시 4중(衆)이 있으니, 재가중(在家衆) 출가중(出家衆) 오파삭가중( 波索迦衆) 비인중(非人衆)이 있다. 다시 3수(受)가 있으니,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말한다.
  다시 3세(世)가 있으니, 과거세(過去世) 미래세(未來世) 현재세(現在世)를 말한다. 다시 3보(寶)가 있으니,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한다. 다시 3법(法)이 있으니,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무기법(無記法)을 말한다. 다시 3잡염(雜染)이 있으니, 번뇌잡염(煩惱雜染) 업잡염(業雜染) 생잡염(生雜染)을 말한다. 다시 4성제(聖諦)가 있으니,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다시 9차제등지(次第等至)가 있으니, 초정려등지(初靜慮等至)로부터 멸상수등지(滅想受等至)까지를 말한다. 다시 37보리분법(菩提分法)이 있으니, 4념주(念住) 4정단(正斷) 4신족(神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8도지(道支)를 말한다. 다시 4사문과(沙門果)가 있으니, 예류과(豫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최승(最勝)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말한다. 다시 여러 가지 승묘(勝妙)한 공덕(功德)이 있으니, 무량(無量) 해탈(解脫) 승처(勝處) 변처(遍處) 무쟁(無諍) 원지(願智) 무애해(無恚解) 6신통(神通) 등을 말한다.
  다시45) 방광대승(方廣大乘)의 5사(事)가 있으니, 상(相) 명(名) 분별(分
  
45) 이하는 14부문[門]의 공덕으로써 대승법(大乘法)에 대해서 나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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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別) 진여(眞如) 정지(正智)를 말한다. 다시 2공성(空性)이 있으니, 보특가라공성(補特伽羅空性) 및 법공성(法空性)을 말한다. 다시 2무아성(無我性)이 있으니, 보특가라무아성(補特伽羅無我性) 및 법무아성(法無我性)을 말한다. 다시 2변(邊)을 원리(遠離)하는 처(處) 중의 관행(觀行)이 있으니, 이증익변(離增益邊) 및 이손감변(離損減邊)을 말한다. 다시 4종(種)의 진실(眞實)이 있으니, 세간에서 이루어지는 진실[世間所成眞實] 도리로 이루어지는 진실[道理所成眞實] 번뇌장정지에서 행해지는 진실[煩惱障淨智所行眞實] 소지장정지에서 행해지는 진실[所知障淨智所行眞實]을 말한다.
  다시 4심사(尋思)가 있으니, 명심사(名尋思) 사심사(事尋思) 자성가립심사(自性假立尋思) 차별가립심사(差別假立尋思)를 말한다. 다시 4여실변지(如實遍知)가 있으니, 명심사에서 끌어당긴 여실변지[名尋思所引如實遍知] 사심사에서 끌어당긴 여실변지[事尋思所引如實遍知] 자성가립심사에서 끌어당긴 여실변지[自性假立尋思所引如實遍知] 차별가립심사에서 끌어당긴 여실변지[差別假立尋思所引如實遍知]를 말한다
   다시 3종(種)의 자성(自性)이 있으니,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을 말한다. 다시 3무성성(無性性)이 있으니, 상무성성(相無性性) 생무성성(生無性性) 승의무성성(勝義無性性)을 말한다.
  다시 5상대보리(相大菩提)가 있으니, 말하자면 자성(自性)때문이요, 공능(功能)때문이요, 방편(方便) 때문이요, 구르기[轉]46) 때문이요, 환멸[還] 때문이다. 다시 5종(種)의 대승(大乘)이 있으니, 첫째는 종자(種子)이며, 둘째는 취입(趣入)이며, 셋째는 차제(次第)이며, 넷째는 정행(正行)이며, 다섯째는 정행과(正行果)이니, (차례대로) 최초(最初)의 발심(發心)과 유정(有情)을 불쌍히 여기는 것[悲愍]과 바라밀다(波羅蜜多)와 중생을 거두는 일[攝衆生事]
  
46) 굴린다[轉]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잠깐동안 여래(如來)께서 아직 해탈하지 않은 유정(有情)에 대해서 멈추지 않고 교화(敎化)하고 굴리는 것이고, 둘째는 구경(究竟)이며 부처님의 생각하기 어려운 덕(德)으로서 모든 유정(有情)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멈추지 않고 유전(流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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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자타상속성숙(自他相續成熟)이다.
  다시 5무량상(無量想)이 있으니, 유정계무량상(有情界無量想) 세계무량상(世界無量想) 법계무량상(法界無量想) 소조복계무량상(所調伏界無量想) 조복방편계무량상(調伏方便界無量想)을 말한다. 다시 진실의수지(眞實義隨至)가 있으니, 일체 무량법(無量法)에 대해서 두루 수지(隨至)47)하는 진여 및 그것에 대한 지(智)를 말한다. 다시 부사의위덕승해무장애지(不思議威德勝解無障礙智)와 32대사부상(大士夫相)과 80종(種)의 수형상(隨形相)과 4종의 일체상청정(一切相淸淨)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3념주(念住)와 3불호(佛護)와 대비(大悲)와 망실이 없는 법[無忘失法]과 습기를 뽑아 없애는 것[拔除習氣]과 일체상묘지(一切相妙智) 등이 있다.
  위와 같은 여러 구(句)들을 오직 2구(句)로 간략히 할 수 있으니,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한 구(句)와 대승(大乘)에게 설한 구(句)이다.
  무엇을 미혹(迷惑)이라고 하는가?
  4전도(顚倒)를 말하니, 첫째는 무상(無常)에 대해서 상(常)이라고 계탁하는 전도(顚倒)이며, 둘째는 고(苦)에 대해서 낙(樂)이라고 계탁하는 전도(顚倒)이며, 셋째는 부정(不淨)에 대해서 정(淨)이라고 계탁하는 전도(顚倒)이며, 넷째는 무아(無我)에 대해서 아(我)라고 계탁하는 전도(顚倒)이다.
  
  무엇을 희론(戲論)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번뇌(煩惱) 및 번뇌와 섞인 제 온(蘊)을 말한다.
  무엇을 주(住)라고 하는가?
  4식주(識住)48) 혹은 7식주(識住)49)를 말한다.
  무엇을 진실(眞實)이라고 하는가?
  진실(眞實) 및 4성제(聖諦)를 말한다.
  
47) 진여(眞如)를 변지(遍至)라고 이름하며, 변지(遍至)의 진여(眞如)를 연(緣)하는 무분별정지(無分別正智)를 수지(隨至)라고 이름한다.
48) 색(色) 수(受) 상(想) 행(行)을 말한다.
49) 신이상이(身異想異) 신이상일(身異想一) 신일상이(身一想異) 신일상일(身一想一)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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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정(淨)이라고 하는가?
  3청정성(淸淨性)을 말하니, 첫째는 자체청정성(自體淸淨性)이며, 둘째는 경계청정성(境界淸淨性)이며, 셋째는 분위청정성(分位淸淨性)이다.
  무엇을 묘(妙)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불(佛) 법(法) 승보(僧寶)를 최미묘(最微妙)라고 이름하니, 가장 제일(第一)의 시설(施設)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무엇을 적정(寂靜)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선법욕(善法欲)으로부터 내지 일체의 보리분법(菩提分法) 및 소득(所得)의 과(果)를 모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성(性)이라고 하는가?
  자상(自相)이나 공상(共相)이나 가립상(假立相)이나 인상(因相)이나 과상(果相) 등의 제 법(法)의 체상(體相)을 말한다.
  무엇을 도리(道理)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의 연기(緣起) 및 4도리(道理)50)를 말한다.
  무엇을 가시설(假施設)이라고 하는가?
  오직 법(法)에 대해서만 보특가라(補特伽羅)를 가립(假立)하는 것 및 오직 상(相)에 대해서만 제 법(法)을 가립(假立)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현관(現觀)이라고 하는가?
  6현관(現觀)을 말하니,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음에51)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겠다.
  방소(方所)와 위(位)와 분별(分別)과
  작(作)과 집지(執持)와 증(增)과 감(減)과
  명(冥)과 언(言)과 소각(所覺)과 상(上)과
  
50) 관대도리(觀待道理) 작용도리(作用道理) 증성도리(證誠道理) 법이도리(法爾道理)를 말한다.
51) 네 가지 내명처(內明處)의 해석 중에 두번째로 상차별시설건립(想差別施設建立)의 상(相)은 4올타남(嗢拕南)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두 번째의 올타남으로서 이를 14부문[門]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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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리(遠離)와 전(轉)과 장호(藏護)라네
  方所位分別 作執持增減
  冥言所覺上 遠離轉藏護
  
  무엇을 방소(方所)라고 하는가?
  색온(色蘊)을 말한다.
  무엇을 위(位)라고 하는가?
  수온(受蘊)을 말한다.
  무엇을 분별(分別)이라고 하는가?
  상온(想蘊)을 말한다.
  무엇을 작(作)이라고 하는가?
  행온(行蘊)을 말한다.
  무엇을 집지(執持)라고 하는가?
  식온(識蘊)을 말한다.
  무엇을 증(增)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증가[增]요, 둘째는 업(業)의 증가이다. 증가[增]에 두 가지가 있는 것과 같이 감소[減]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명(冥)이라고 하는가?
  무명(無明)과 의(疑)를 말한다.
  무엇을 언(言)이라고 하는가?
  제 여래(如來)의 12분교(分敎)를 설하여 언(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소각(所覺)이라고 하는가?
  이러 저러한 말[言]과 음성[音]으로 설해지는 의미[義]를 소각(所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상(上)이라고 하는가?
  4사문과(沙門果)를 말한다.
  무엇을 원리(遠離)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원리(遠離)를 말하니, 첫째는 악행(惡行)의 원리(遠離)이며,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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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는 욕(欲)의 원리(遠離)이며, 셋째는 자구(資具)의 원리(遠離)이며, 넷째는 궤료(憒鬧)52)의 원리(遠離)이며, 다섯째는 번뇌(煩惱)의 원리(遠離)이다.
  무엇을 전(轉)이라고 하는가?
  3계(界) 5취(趣)를 말한다.
  무엇을 장호(藏護)라고 하는가?
  과거(過去)를 연연해하고, 미래(未來)를 희구하며, 현재(現在)를 탐착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에53)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겠다.
  사택(思擇)과 현행(現行)과
  수면(睡眠) 및 상속(相屬)과
  제 상섭(相攝)과 상응(相應)과
  설(說)과 임지(任持)와 차제(次第)라네
  思擇與現行 睡眠及相續
  諸相攝相應 說任持次第
  
  무엇을 사택(思擇)이라고 하는가?
  일행(一行)54)과 순전구(順前句)55)와 순후구(順後句)56)와 4구(句)57)와 무사구(無事句)58)를 말한다.
  다시 유색법(有色法) 무색법(無色法)과 유견법(有見法) 무견법(無見法)과 유대법(有對法) 무대법(無對法)과 유루법(有漏法) 무루법(無漏法)과
  
52) 시끄러운 곳을 의미한다.
53) 네 가지 내명처(內明處)의 해석 중에 두번째로 상차별시설건립(想差別施設建立)의 상(相)은 4올타남(嗢拕南)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세 번째의 올타남으로서 이를 9부문[門]으로 해석한다.
54) 일법(一法)으로서 일체가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55) 협소한 것으로써 넓은 것을 물을 때에는 순전구(順前句)로 대답한다.
56) 넓은 것으로써 협소한 것을 물을 때에는 순후구(順後句)로 대답한다.
57) 상호간에 협소한 것과 넓은 것이 있으면 4구(句)의 분별(分別)로서 대답한다.
58) 도리가 아닌 질문을 부정하여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차지답(遮止答)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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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과 유쟁법(有諍法) 무쟁법(無諍法)과 유미착법(有味著法) 무미착법(無味著法)과 의탐기법(依耽嗜法) 의출리법(依出離法)과 세간법(世間法) 출세간법(出世間法)과 유계속법(有繫屬法) 무계속법(無繫屬法)과 내법(內法) 외법(外法)과 추법(麤法) 세법(細法)과 열법(劣法) 승법(勝法)과 원법(遠法) 근법(近法)과 유소연법(有所緣法) 무소연법(無所緣法)과 상응법(相應法) 불상응법(不相應法)과 유행법(有行法) 무행법(無行法)과 유의법(有依法) 무의법(無依法)과 인법(因法) 비인법(非因法)과 과법(果法) 비과법(非果法)과 이숙법(異熟法) 비이숙법(非異熟法)과 유인법(有因法) 비유인법(非有因法)과 유과법(有果法) 비유과법(非有果法)과 유이숙법(有異熟法) 비유이숙법(非有異熟法)과 유집수법(有執受法) 무집수법(無執受法)과 대종조법(大種造法) 비대종조법(非大種造法)과 동분법(同分法) 피동분법(彼同分法)과 유상법(有上法) 무상법(無上法)이 있다.
  또한 과거법(過去法) 미래법(未來法) 현재법(現在法)과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무기법(無記法)과 욕계법(欲繫法) 색계법(色繫法) 무색계법(無色繫法)과 학법(學法) 무학법(無學法) 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과 견소단법(見所斷法) 수소단법(修所斷法) 무단법(無斷法)이 있다.
  또한 4연(緣)이 있으니,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또한 4의(依)가 있으니, 첫째는 보특가라가 아닌 법에 의지하는 것이며, 둘째는 글자가 아닌 이치[義]에 의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요의(不了義)가 아닌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는 것이며, 넷째는 알음알이[識]가 아닌 지혜[智]에 의지하는 것이다.
  또한 4무량법(無量法)과 4념주법(念住法)과 4정단법(正斷法)과 4신족법(神足法)과 5근법(根法)과 5력법(力法)과 7각지법(覺支法)과 8지성도법(支聖道法)과 4행적법(行跡法)59)과 4법적법(法跡法)60)과 사마타법(奢摩他法)과
  
59) 고지통행(苦遲通行) 고속통행(苦速通行) 락지통행(樂遲通行) 락속통행(樂速通行)을 말한다.
60) 무탐적(無貪迹) 무진적(無瞋迹) 정념적(正念迹) 정정적(正定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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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발사나법(毘鉢舍那法)과 증상계법(增上戒法)과 증상심법(增上心法)과 증상혜법(增上慧法)과 해탈법(解脫法)과 승처법(勝處法)과 변처법(遍處法)이 있다.
  위와 같은 등의 무량(無量) 무변(無邊)한 법(法)을 사택(思擇)해야만 한다.
  무엇을 현행(現行)이라고 하는가?
  제 번뇌전(煩惱纏)을 말한다.
  무엇을 수면(睡眠)이라고 하는가?
  제 번뇌수면(煩惱隨眠)을 말한다.
  무엇을 상속(相屬)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내육처(內六處)는 일신(一身) 중에서 전전하며 상호 서로 묶어서 엮는 것[繫屬]임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 법이 저 법을 능히 끌어당기면 피차(彼此) 서로간에 묶어서 엮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제 근(根) 경(境)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서로간에 묶어서 엮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섭(攝)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열 여섯 가지의 섭(攝)61)이 있으니, 첫째는 계섭(界攝)이며, 둘째는 상섭(相攝)이며, 셋째는 종류섭(種類攝)이며, 넷째는 분위섭(分位攝)이고, 다섯째는 불상리섭(不相離攝)이고, 여섯째는 시섭(時攝)이고, 일곱째는 방섭(方攝)이고, 여덟째는 일분섭(一分攝)이고, 아홉째는 구분섭(具分攝)이고, 열째는 승의섭(勝義攝)이고, 열 한째는 온섭(蘊攝)이고, 열 둘째는 계섭(界攝)이고, 열 셋째는 처섭(處攝)이고, 열 넷째는 연기섭(緣起攝)이고, 열 다섯째는 처비처섭(處非處攝)이고, 열 여섯째는 근섭(根攝)이다.
  무엇을 상응(相應)이라고 하는가?
  이 상(相)에 간략히 다섯 가지62)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자성(自
  
61) 열 여섯 가지의 섭(攝)에 대해서는 본론(本論) 제 54권(卷)의 「결택분(決擇分)」에서 설명되고 있다.
62) 『대법론(對法論)』 제 5에서 기술되고 있으며 본론(本論) 제 54권(卷)의 「결택분(決擇分)」에서 설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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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이 아닌 타성(他性)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둘째는 타성(他性)에서 상위(相違)가 아닌 불상위(不相違)와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상위(不相違)의 연(軟) 중(中) 상품(上品)에서 다른 품(品)이 아닌 연(軟) 중(中) 상품(上品)과 스스로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넷째는 연(軟) 중(中) 상품(上品)에서 이시(異時)가 아닌 동시(同時)에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동시(同時)에서 이지(異地)가 아닌 동지(同地)와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무엇을 설(說)이라고 하는가?
  4종(種)의 언설(言說)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견언설(見言說)이며, 둘째는 문언설(聞言說)이며, 셋째는 각언설(覺言說)이며, 넷째는 지언설(知言說)이다.
  무엇을 임지(任持)라고 하는가?
  4식(食)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단식(段食)이며,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며,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무엇을 차제(次第)라고 하는가?
  6종(種)의 차제(次第)를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유전차제(流轉次第)이며, 둘째는 성소작차제(成所作次第)63)이며, 셋째는 선설차제(宣說次第)이며, 넷째는 생기차제(生起次第)이며, 다섯째는 현관차제(現觀次第)이며, 여섯째는 등지차제(等至次第)이다.
  다음에64)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겠다.
  소작(所作)과 소연(所緣)과
  또한 유가(瑜伽)와 지(止)와 관(觀)과
  
63) 출가수구(出家受具)의 7방편(方便)을 닦아서 견도(見道)를 얻는 등의 차제(次第)를 말한다.
64) 네 가지 내명처(內明處)의 해석 중에 두번째로 상차별시설건립(想差別施設建立)의 상(相)은 4올타남(嗢拕南)으로 기술되는데, 이하는 그 네 번째의 올타남으로서 이를 10부문[門]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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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의(作意)와 교수(敎授)와
  덕(德)과 보리(菩提)와 성교(聖敎)라네
  所作及所緣 亦瑜伽止觀
  作意與敎授 德菩提聖敎
  
  무엇을 소작(所作)이라고 하는가?
  여덟 가지의 소작(所作)을 말하니, 첫째는 멸(滅)의 의지(依止)65)이며, 둘째는 전(轉)의 의지(依止)66)이며, 셋째는 변지(遍知)의 소연(所緣)67)이며, 넷째는 희락(喜樂)의 소연(所緣)68)이며, 다섯째는 득과(得果)이며, 여섯째는 이욕(離欲)이며, 일곱째는 근(根)을 돌리는 것[轉]이며, 여덟째는 신통(神通)을 인발(引發)하는 것이다.
  무엇을 소연(所緣)이라고 하는가?
  네 가지의 소연(所緣)69)을 말하니, 첫째는 편만(遍滿)의 소연(所緣)이며, 둘째는 정행(淨行)의 소연(所緣)이며, 셋째는 선교(善巧)의 소연(所緣)이며, 넷째는 정번뇌(淨煩惱)의 소연(所緣)이다.
  무엇을 유가(瑜伽)라고 하는가?
  네 가지나 아홉 가지를 말한다. 네 가지 유가(瑜伽)란 첫째는 신(信)이며, 둘째는 욕(欲)이며, 셋째는 정진(精進)이며, 넷째는 방편(方便)이다. 아홉 가지 유가(瑜伽)란 첫째는 세간도(世間道)이며, 둘째는 출세간도[出世道]이며, 셋째는 방편도(方便道)이며, 넷째는 무간도(無間道)이며, 다섯째는 해탈도(解脫道)이며, 여섯째는 승진도(勝進道)이며, 일곱째는 연품도(軟品道)이며, 여덟째는 중품도(中品道)이며, 아홉째는 상품도(上品道)이다.
  무엇을 지(止)라고 하는가?
  
65) 악(惡)을 없애기 위해서 의지(依止)가 되는 것을 말한다.
66) 선(善)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의지(依止)가 되는 것을 말한다.
67) 변지소연(遍知所緣)이란 두루 고(苦) 낙(樂)의 연생법(緣生法) 등을 알아서 염리(厭離)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68) 희락소연(喜樂所緣)이란 멸(滅) 도(道)의 2제(諦)를 희락(喜樂)하는 것을 의미한다.
69) 『대법론(大法論)』 제 11권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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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종(種)의 주심(住心)70)을 말한다.
  무엇을 관(觀)이라고 하는가?
  3사(事)의 관(觀)이나 4행(行)의 관(觀)이나 6사차별소연(事差別所緣)의 관(觀)을 말한다. 3사(事)의 관(觀)이란 첫째는 유상(有相)의 관(觀)이며, 둘째는 심구(尋求)의 관(觀)이며, 셋째는 사찰(伺察)의 관(觀)이다. 4행(行)의 관(觀)이란 말하자면 제 법(法)에 대하여 간택(簡擇)을 행하는 관(觀)과 극간택(極簡擇)을 행하는 관(觀)과 두루[遍] 심사(尋思)를 행하는 관(觀)과 두루[遍] 사찰(伺察)을 행하는 관(觀)이다. 6사차별소연(事差別所緣)의 관(觀)이란 첫째는 의소연(義所緣)의 관(觀)이며, 둘째는 사소연(事所緣)의 관(觀)이며, 셋째는 상소연(相所緣)의 관(觀)이며, 넷째는 품소연(品所緣)의 관(觀)이며, 다섯째는 시소연(時所緣)의 관(觀)이며, 여섯째는 도리소연(道理所緣)의 관(觀)이다.
  무엇을 작의(作意)라고 하는가?
  7종(種)의 작의(作意)를 말하니, 요상작의[了相] 등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교수(敎授)라고 하는가?
  5종(種)의 교수(敎授)를 말하니, 첫째는 가르침[敎]의 교수(敎授)이며, 둘째는 증득[證]의 교수(敎授)이며, 셋째는 차제(次第)의 교수(敎授)이며, 넷째는 무전도[無倒]의 교수(敎授)이며, 다섯째는 신변(神變)의 교수(敎授)이다.
  무엇을 덕(德)이라고 하는가?
  무량해탈(無量解脫) 등을 말하니, 구(句)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보리(菩堤)라고 하는가?
  3종(種)의 보리(菩堤)를 말하니, 첫째는 성문보리(聲聞菩堤)이며, 둘째는 독각보리(獨覺菩堤)이며, 셋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다.
  
70) 안주심(安住心) 섭주심(攝住心) 해주심(解住心) 전주심(轉住心) 복주심(伏住心) 식주심(息住心) 멸주심(滅住心) 성주심(性住心) 지주심(持住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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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성교(聖敎)라고 하는가?
  교수[授]에 대하여 귀의(歸依)하고, 학처(學處)를 제립(制立)하고, 설청(說聽)을 시설하며, 사도(師徒)의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을 건립하며, 욕(欲)의 애미(愛味)를 질책하며, 욕(欲)의 과실(過失)을 보이며,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법(法)을 현설(顯說)하며, 출리(出離) 및 원리(遠離)를 교도(敎導)하며, 공덕(功德)을 칭찬(稱讚)하고, 내지 광설(廣說)의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정품(淸淨品)의 법(法)을 말한다.
  무엇을 성교(聖敎)를 거두는 의상(義相)이라고 하는가?71)
  여기에는 능수습(能修習)의 법(法)이 있으니, 제 선법(善法)에 대하여 의지[志]를 오롯이 하여 소작(所作)을 상속(相續)하고, 소작(所作)의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수습해야 할[所修習] 법(法)이 있으니, 모든 제 선법(善法)을 말한다. 과환(過患)이 있는 법이 있으니,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할 법을 말한다. 염오(染汚)가 있는 법(法)이 있으니, 마땅히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복(制伏)해야 하며, 처음에 마땅히 끊어야 할 법(法)을 말한다. 장애(障礙)의 법(法)이 있으니, 현관구경(現觀究竟)에 위배되는 법(法)을 말한다. 수순법(隨順法)이 있으니, 현관구경(現觀究竟)에 수순(隨順)하는 법(法)을 말한다. 진여(眞如)에 포함되는[所攝] 법이 있으니, 마땅히 깨닫아야[覺悟] 할 법(法)이다. 승덕(勝德)에 포함되는 법(法)이 있으니, 끌어일으켜야[引發] 할 법(法)을 말한다. 세간(世間)을 수순(隨順)하는 법(法)이 있으니, 마땅히 수습해야 하는 것과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과 끊고 나서[斷已] 현행하는 법[現行法]을 말한다. 구경(究竟)을 얻는 법(法)이 있으니, 스스로 이치[義]를 구경(究竟)하여 증득해야 할 법(法)이다.
  무엇을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이라고 하는가?72)
  여기에 일체유정(一切有情)이 머무름[住]에는, 즉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
  
71) 이하는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세 번째로 성교(聖敎)를 거두는 의상(義相)에 대하여 5대(對) 10법(法)으로 해석한다.
72)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첫 번째로 3종(種)의 유정에 대하여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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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만 한다. 일별(日別)의 머무름[住]과 목숨이 다하는[盡壽] 머무름[住]과 좋아할 만한[可愛] 선법(善法)이 생겨서 전전(展轉)하며 머무름[住]을 말한다. 처음 것은 식(食)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며, 두 번째 것은 명행(命行)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며, 세 번째 것은 제 선법(善法)에 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증상력(增上力)에 의한다. 제 불선(不善) 무기법(無記法)에도 또한 불방일(不放逸)의 법(法)과 상사(相似)한 것이 있으니, 살생(殺生) 등의 것[事]과 위의(威儀)의 공교(工巧) 등에 대해서 심제(審諦)하여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불선(不善)에 대한 불방일(不放逸)이란 현법(現法)에서 내지 반열반(般涅槃)을 능히 얻기 때문에, 그리고 후법(後法)에서 선취(善趣)에 나아가기 때문에 많은 소작(所作)이 있다.
  다음에73) 유정세간(有情世間) 및 기세간(器世間)에 의지하여 두 가지 법이 있으니, 능히 일체의 여러 희론(戲論)의 사(事)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능취법(能取法)과 그것의 소의(所依)인 소취법(所取法)을 말한다.
  또한 제 세간(世間)에는 간략히 두 가지의 잡염(雜染)의 근본(根本)이 있으니, 능히 무의(無義) 무리(無利)의 잡염(雜染)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진실(眞實)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행[解行]이 없고, 그리고 그것을 으뜸[先]으로 하여 무의(無義)를 희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정법(正法) 밖의 제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에게는 간략하게 두 가지의 잡염(雜染)의 근본(根本)이 있으니, 살가야견(薩迦耶見)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아(我)는 항상[常]하다고 추구하고 아(我)는 끊어진다[斷]고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제 유정(有情)에게는 간략하게 두 가지의 뭇 고(苦)의 근본(根本)이 있으니, 유루법(有漏法)에 대해서 희애(喜愛)와 함께 작용하며[俱行] 있게 되는 기원(期願)과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非理]에서 끌어당기게 되는 염리(厭離)와 함께 작용하며 있게 되는 기원(期願)을 말한다.
  
73)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두 번째로 법수(法數)가 이(二)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24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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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두 가지의 스승과 제자의 교수(敎授) 교계(敎誡)와 상위(相違)하는 법이 있으니, 여러 제자가 교회(敎誨)의 어언(語言)을 감인(堪忍)할 수 없는 것이며 그리고 스승의 전도된 견해[倒見]로 자주 사행(邪行)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은 곧 백품(白品)의 두 가지 법(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정행(正行)의 경계를 매우 거스릴[違越] 수 있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스스로의 비법(非法)으로부터 증상(增上)하여 생기게 되는 불가애(不可愛)의 과(果)에 대해서 고려(顧慮)하지 않고 소작(所作)의 죄(罪)에 대해서 수치(羞恥)스러워 하지 않으며, 그리고 현법(現法)에서 다른 것을 살해하고 묶는 쇠퇴(衰退) 등의 일에 대해서 고려(顧慮)하지 않고 소작(所作)의 죄(罪)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은 곧 백품(白品)의 두 가지 법(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능히 행자(行者)로 하여금 조그마한 공력(功力)을 써서 범행(梵行)에 안주하고 마침내 훼손[唐損]하지 않게끔 하는 두 가지의 전도 없는[無倒] 건립이 있으니, 첫째는 바르게 학처(學處)를 세우되, 만약 거스르는 것[違越]이 있을 경우에는 곧 대죄(大罪)를 획득하는 것이며, 만약 거스르는 것이 없을 경우에는 곧 대복(大福)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바르게 출리(出離)를 세워서 거스르는 자를 속히 다시 출리(出離)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능히 작자(作者)로 하여금 자타(自他)의 이익을 얻게끔 하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원리(遠離)에 머무르는 자는 마음이 항상 정(定)에 안주하여 현법의 락에 안주하는 것[現法樂住]이며, 둘째는 시끄러움[憒鬧]에 머무르는 자가 와서 법(法)을 구할 때에는 때때로 그를 위해서 설해 주어서 능히 정법(正法)을 상속하고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안으로는 바르게 작의(作意)하고 밖으로는 다른 이의 법음[他音]을 듣게 하여 두 가지 인연 때문에 현법(現法)에서 제[諦]의 현관(現觀)에 들어가게 하거나, 미래의 제 근(根)을 성숙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인(因)의 소생법(所生法)에 대해서 바르게 인(因)을 통달하는 것이며, 둘째는 여래(如來)께서 설하신 모든 심심(甚深)74)
  
74)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의 요의교(了義敎)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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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심(甚深)과 상사(相似)한 공(空)과 상응(相應)하는 경(經)75)으로서 일체의 연생(緣生) 및 제 연기(緣起)에 대하여 수순(隨順)하고 작의(作意)하며 자주 자주 사유(思惟)하는 것이다.
  능히 근(根)이 성숙한 보특가라(補特伽羅)로 하여금 속히 통혜(通慧)76)를 증득하게 하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교수(敎授) 교계(敎誡)에 대해서 첨(諂) 광(誑)을 원리(遠離)하는 것이고 둘째는 염리(厭離)를 으뜸[先]으로 하여 신(身) 어(語) 의(意)의 행(行)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조희(調戲)77)를 원리하는 것이다.
  또한 한곳에 머무르며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자로 하여금 전전(展轉)하여 모두 안락(安樂)에 머무르도록 할 수 있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다른 이가 핍박[逼惱]하는 것을 감인(堪忍)하는 것이며, 둘째는 스스로 다른 이를 핍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한곳에 머무르며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자로 하여금 아직 생겨나지 않은 다툼[違諍]을 막아서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그 생겨난 것은 속히 멈추도록 하여 투송(鬪訟)이 없고 쟁경(諍競)이 없게끔 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전전(展轉)하여 서로 자심(慈心)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평등(平等)하게 재법(財法)78)을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또한 속히 마음으로 하여금 삼마지(三摩地)를 얻어서 청정한 범행(梵行)에 머물도록 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옛날에 지었던 것과 설했던 것을 기억[憶持]하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만약 범하는 것이 있으면 법다이 참회하여 제거하며, 만약 범하는 것이 없으면 곧 환희를 내어서 밤낮으로 수학(隨學)하여 일찍이 게을러 그만두는 일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신(身) 어(語) 의(意)의 일체의 사업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요지하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제 과실(過失)에 대해서 끝내 위범(違犯)이 없고 이 인연 때문에 또한 우(憂) 회(悔)가 없어서 그에 따라 따르며 환희를 생기게 하
  
75) 『반야(般若)』 등의 미요의경(未了義經)을 말한다.
76) 신통(神通)과 지혜(智慧)를 의미한다.
77) 장난거리를 의미한다.
78) 물질적 재산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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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내지 …… 해탈지견(解脫知見)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능히 뭇 고(苦)를 뛰어넘는, 즉 능히 제 악취(惡趣)의 고(苦)를 초월하고 그리고 능히 생사(生死)의 대고(大苦)를 초월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깊이 현법(現法)을 보는 것으로서 미래의 제 과환(過患)을 보기 때문에 악행(惡行)을 원리하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이 항상 정(定)에 안주하여 정근(精勤)하며 보리분법(菩提分法)을 수습(修習)하는 것이다.
  능히 단(斷)을 수습하여 원리(遠離)에 머무르는 자로 하여금 안락(安樂)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다. 첫째는 제 경계에 대하여 잡염(雜染)을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악(惡)의 심사(尋伺)로 인해 그 마음이 요란(擾亂)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반드시 이익을 위해서 양(量)을 헤아려서 소화하기 위해서 무릇 씹어 먹는 것[噉食]이며 능히 단(斷)을 수순(隨順)하여 몸을 조적(調適)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선품(善品)을 닦는 제 필추(苾芻) 등으로 하여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제 근(根) 경(境)에 대해서 바른 방편을 부지런히 하여 법상(法相)을 연구(硏究)하는 것이며, 둘째는 때를 알고 양(量)을 알며 적은 수면(睡眠)을 익히는 것이다.
  또한 증상(增上)의 심학(心學)과 혜학(慧學)을 능히 무너뜨리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사학(邪學)을 건립하여 정학(正學)을 거스르고[違越] 유예(猶豫)79)를 품는 것이며, 둘째는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사견(邪見)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은 곧 백품(白品)의 두 가지 법(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미 보리(菩提)의 자량(資糧)을 적집(積集)하였으나 아직 현관(現觀)에 들어가지 못한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속히 현관(現觀)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현재(現在)와 과거(過去)의 자타(自他)의 쇠퇴함[衰]과 번성함[盛]을 사유하는 것이며, 둘째는 제행(諦行)에 포함되는 전도 없는 작의(作意)를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또한 관행자(觀行者)가 최극구경(最極究竟)의 구(垢)를 여의고 범행(梵行)
  
79) 이럴까 저럴까 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망설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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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속히 원만히 할 수 있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제현관(諦現觀)을 닦는 것이며, 둘째는 뒤의 이욕(離欲)에 대해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고 제 등지(等至)에 대해서 애미(愛味)함이 없어서 여러 가지 장난(障難)을 원리하는 것이다.
  또한 관행자(觀行者)로 하여금 속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일체의 승덕(勝德)을 일으킬 수 있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9상주심(相住心)이며, 둘째는 여섯 가지 사[六種事]에 의해서 정정심(正定心)으로써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것이니, 성문지(聲聞地)80)에서 자세히 분별하게 될 것과 같다.
  또한 관행자(觀行者)에게는 두 가지의 정(淨)이 있으니, 작의(作意)의 정(淨)과 소의(所依)의 정(淨)을 말한다. 3세(世)에 대해서 어리석음[愚癡]을 원리하고 지혜[智]가 청정하기 때문에 작의(作意)의 정(淨)이라고 이름하며, 3계(界)의 제 번뇌품(煩惱品)의 추중법(麤重法)을 원리하기 때문에 소의(所依)의 정(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음이 잘 해탈한 여러 아라한(阿羅漢)이 안으로 증득한 것[內自所證]에는 두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현법(現法)에서 고(苦)의 인(忍)이 영원히 다한 것이며, 둘째는 이것을 으뜸[先]으로 하기 때문에 미래세[當來世]의 고(苦)가 필경 생기지 않는 것이다.
  
80) 『본론(本論)』 제 30권(卷)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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