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4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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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4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7) 문소성지 ②
  
  2종(種)의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에 대하여 설하였다.
  다음에1) 10상(相)을 3문(門) 3종(種) 및 3근(根)에 의거하여 제 유정(有情)에 대하여 악행(惡行)을 일으키고[發起] 유정(有情)을 제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세 가지[三種]를 설하겠다.
  10상(相)이라는 것은 생명(生命)과 재물(財物)과 처첩(妻妾)을 파괴[壞]하고, 또는 실의(實義)와 선우(善友)와 찬미(讚美)와 하는 사업[所爲事業]을 파괴하고, 또는 남의 재물을 집수(執受)하여 자기가 소유하려고 하고, 남에게 좋아하지 않는 일[不愛事]을 만나도록 하며, 진실(眞實)을 비방(誹謗)하는 모든 악견(惡見)의 의(意)의 3탁(濁)을 말한다.
  3문(門)이라는 것은 첫째는 작업(作業)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毁壞] 문(門)이며, 둘째는 의요(意樂)를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문(門)이며, 셋째는 방편(方便)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문(門)이다.
  10상(相) 가운데에 앞의 일곱 가지는 작업(作業)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1)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세 번째로 법수(法數)가 삼(三)으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30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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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며, 그 다음의 두 가지는 의요(意樂)를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며, 마지막의 한 가지는 방편(方便)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것인데 악견(惡見)을 말한다. 악견(惡見)에 의하기 때문에 수치(羞恥)와 자비(慈悲)와 제 악(惡)을 떠난 행(行)을 모두 다 훼손하고 무너뜨려서 수치가 있지 않으며 자비가 있지 않으며 널리 여러 악[衆惡]을 짓는다.
  세 가지라는 것은 첫째는 몸[身]으로 짓는 것所作)이며, 둘째는 말[語]로 짓는 것이며, 셋째는 생각[意]으로 짓는 것이다.
  3근(根)이라는 것은 첫째는 자신에게 요익한 상[爲自饒益相]이며, 둘째는 남에게 손해를 주는 상[爲損害他相]이며, 셋째는 말하자면 비법(非法)에 대하여 법(法)의 상(想)을 짓고 짓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하여 지겠다는 상(想)을 지어서 굳게 집착하여 현행(現行)하는, 남을 전도하는 상[於他顚倒相]이다.
  다시 유정(有情)에게 제 근(根)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3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의지(依止)에 있는 사법(邪法)의 종자(種子)이며, 둘째는 제 경계(境界)에 대하여 부정상(不正相)을 취하는 것이며, 셋째는 사사로이 은밀한 곳[私隱處]에 대하여 바르지 않은 사유[不正思惟]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는 곧 욕탐(欲貪) 진에(瞋恚) 해(害)를 주는 품(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4처소(處所)2)에 의하여 세 가지의 바르지 않은 심사[不正尋思]를 일으키니, 자기(自己) 등에게 네 가지의 백품(白品)3)의 법처(法處)를 획득하기 위하여 혹은 잃지 않기 위하여 욕(欲)의 심사(尋思)를 내며, 능히 그것을 장애하는 원(怨) 중(中)의 2품(品)의 유정의 처소(處所)에 대하여 진에의 심사(尋思)를 내며, 친우(親友)의 품(品)의 유정의 처소에 대하여 해(害)의 심사(尋思)를 내는 것이다. 왜냐 하면 친우(親友)의 품(品)일 경우, 어떤 때는 범한 것[違犯]인데도 그것에 대하여 전혀 끊으려는[斷滅] 욕(欲)을 일으키지 않고
  
2) 자신(自身)의 이익(利益) 등의 4종(種)의 백법(白法) 원(怨) 중(中) 친(親)의 넷을 말한다.
3) 리(利) 예(譽) 칭(稱) 낙(樂)의 넷을 말한다. 네 가지의 흑품(黑品)은 쇠(衰) 훼(毁) 기(譏) 고(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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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미(輕微)한 고초(苦楚)의 방편(方便)인 훈벌(訓罰)의 욕(欲)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 상위하는 모든 백품(白品)을 상응하는 대로 알아야만 한다.
  간략하게 두루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종자(種子)를 거두는 네 가지의 내법종자(內法種子)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종자(世間種子)이며, 둘째는 출세간종자[出世種子]이며, 셋째는 청정하지 않은 종자[不淸淨種子]이며, 넷째는 청정한 종자[淸淨種子]이다.
  세간종자(世間種子)란 욕계[欲] 색계[色] 무색계(無色界)의 계(繫)의 종자를 말하며, 출세간종자란 3승(乘)과 3승(乘)의 과(果)를 증득할 수 있는 8성도(聖道) 등의 청정한 종자[淸淨種子]를 말하며, 청정하지 않은 종자란 욕계계(欲界繫)의 제 행(行)의 종자(種子)를 말한다.
  청정한 종자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청정[世間淨]이며, 둘째는 출세간청정[出世間淨]이다. 색계[色] 무색계[無色]의 계(繫)의 제 행(行)의 종자를 세간의 청정[世間淨]이라고 이름하며, 3승(乘)과 3승(乘)의 과(果)를 증득할 수 있는 8성도(聖道) 등의 모든 종자(種子)를 출세간청정[出世淨]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인(因)으로부터 생겨나는 유루법(有漏法)의 인(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만약 이것에 대하여 정리(正理)대로 방편(方便)을 닦지 않으면 능히 여러 가지 괴로움[苦]이 생기게 되며, 만약 정리(正理)대로 방편을 닦으면 괴로움[苦]과 그 원인[因]에 대하여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끊을 수 있다. 말하자면 욕계계법(欲界繫法)에 대하여 염오(染汚)를 희구(希求)하듯이, 색계[色] 무색계(無色界)의 계법(繫法)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또한 제 유정에게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게 하는 세 가지의 제 번뇌(煩惱)의 취(趣)가 있으니, 승욕(勝欲)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發意] 희구(希求)하는 것을 첫 번째의 번뇌(煩惱)의 취(趣)라고 이름하며,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뛰어난 자체(自體)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 희구(希求)하는 것을 두 번째의 번뇌(煩惱)의 취(趣)라고 이름하며, 삿된 해탈[邪解脫]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 희구(希求)하는 것을 세 번째의 번뇌(煩惱)의 취(趣)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제 유정류(有情類)의 욕(欲)을 근본(根本)으로 하여 작업(作業)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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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方便)이 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뛰어난 욕[勝欲]을 얻기 위하는 것이며, 둘째는 뛰어난 자체(自體)를 얻기 위하는 것이며, 셋째는 뛰어난 해탈도[勝解脫道]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3계(界)의 제 유정류(有情類)에게 자체(自體)를 섭수(攝受)하는 제 행(行)에 위세(威勢)가 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위세(威勢)를 견인(牽引)하는 것이며, 둘째는 위세(威勢)를 능히 얻는 것이며, 셋째는 위세(威勢)를 원만히 이루는 것[成滿]이다. 위세를 견인하는 것이란 능히 업(業)을 끌어당기는 것이며, 위세(威勢)를 능히 얻는 것이란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현재전(現在前)하는 것이며, 위세(威勢)를 원만히 이루는 것이란 이것에 머무르며 정(淨) 부정(不淨)의 제 업(業)의 이숙(異熟)을 받는 것이다.
  또한 무명(無明)에 머무르는 제 유정류(有情類)에게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능히 3세(世)의 자체(自體)4)의 차별(差別)을 만드는 세 가지의 무명온(無明蘊)이 있으니, 과거세(過去世)에 대한 전제(前際) 등의 무지(無知)는 능히 현재(現在)의 자체(自體)를 생기게 하는 것과 현재세(現在世)에 대한 전제(前際) 등의 무지(無知)는 능히 미래(未來)의 자체(自體)를 생기게 하는 것과 미래세(未來世)에 대한 전제(前際) 등의 무지(無知)는 곧 미래에 대하여 능히 다음 다음 미래[當來]의 자체(自體)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구경(究竟)의 성인(聖人)이 되지 못한 이가 여러 이생(異生)의 생사(生死)의 재환(災患)과 함께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만약 그것에 대해서 깊이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되면 속히 세 가지의 교만[憍]과 방일[逸]을 끊어 없애고 현법열반(現法涅槃)의 방편을 수습해야 한다. 첫째는 무병(無病)이 쇠퇴(衰退)하는 것이며, 둘째는 소년(少年)이 쇠퇴(衰退)하는 것이며, 셋째는 수명(壽命)이 쇠퇴(衰退)하는 것인데, 그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땅히 미래에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이라고 관(觀)해야 한다.
  또한 유정류(有情類)에게는 탐(貪) 진(瞋) 치(癡)의 박(縛)이 의지하게 되는 처소[所依處所]에 신분(身分)의 차별이 있어서 능히 제 유정류(有情
  
4) 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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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類)를 계박(繫縛)하여 대고(大苦)인 생사(生死)의 뇌옥(牢獄)에 가두게 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요익(饒益)하는 것이며, 둘째는 능히 손해(損害)하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평등(平等)하여 두 가지를 모두 여의는 것이다.
  또한 3처소(處所)에 생기는 여러 가지의 괴로움[苦]이 있어서 두루 유정(有情)의 모든 뭇 괴로움을 거두어들이니, 첫째는 모임으로 생겨나는 괴로움[合會所生苦]요, 둘째는 떠남에서 생겨나는 괴로움[乖離所生苦]요, 셋째는 평등하게 상속하는 괴로움[平等相續苦]이다. 첫 번째 것은 손해위(損害位)에 의해서 화합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것은 요익위(饒益位)에 의해서 변괴(變壞)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것은 일체위(一切位)에서 상속(相續)하여 구르는 추중(麤重)에 포함되는 제 행(行)에서 생기는 것이다. 오직 뭇 현성(賢聖)만이 이를 괴로움이라고 깨닫고 제 이생(異生)들은 그렇지 않다.
  또한 세 가지의 마음에 고거법(高擧法)이 있으니, 사문과(沙門果)를 구하려고 방편(方便)을 닦는 자인 예류과지(豫流果支)를 위해(違害)하고 능히 사문(沙門)을 장애하여 증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첫째는 자신으로써 다른 이를 견주어서[敎量] '나는 뛰어나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고거(高擧)를 내는 것이며, 둘째는 자신으로써 다른 이를 견주어서 '나와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고거(高擧)를 내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으로써 다른 이를 견주어서 '나는 열등하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고거(高擧)를 내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의 종자(種子)가 있어서 능히 일체(一切)의 제 행(行)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이미 과를 부여한 것[已與果]이며, 둘째는 아직 과를 부여하지 않는 것[未與果]이며, 셋째는 과가 바로 현전하는 것[果正現前]이다.
  또한 세 가지 제 행(行)의 언설(言說)이 의지하게 되는 처소[所依處所]가 있으니, 과거 미래 현재를 말한다.
  능히 모든 색법(色法)의 자상(自相)을 포섭하는 3상(相)이 있으니, 현색[顯] 형색[形] 작용(作用)5)을 안립(安立)하는 안식소취(眼識所取)의 색(色)6)을 말한다. 자신의 처소7)에서 다른 색(色)의 행하고 머물고 안립하는 것
  
5) 표색(表色)을 말한다.
6) 무표색(無表色)을 말한다.
7)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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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장애하는 근색(根色)과 또는 일체 경계의 색(色)이니, 일체는 모두 10색(色) 및 정지(定地)의 색(色)8)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정정(淨定)을 얻어서9)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 방편을 닦는 자의 모든 색(色)들10)은 안[內]의 마음이 변화한 경계이거나 또는 아직 원만하지 않는 변화한 마음의 결과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제 번뇌로 인하여 따라 다니게 되는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러 가지 이생심(異生心)이며, 둘째는 아직 원만하지 못한 학의 마음[學心]이며, 셋째는 이미 원만을 이룬 학의 마음[學心]이다.
  또한 법을 청문(聽聞)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法)에 대해서, 의(義)에 대해서 능히 수지(受持)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능히 받아들일[領受] 뿐 능히 지니지[任持] 않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받아 지니는 것[受持]이다.
  또한 수행자가 신(身) 어(語) 의(意)의 무상성(無常性)을 관(觀)하고 관(觀)에 취입(趣入)하는 데에 으뜸[上首]이 되는 세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입출식(入出息)이며, 둘째는 심사(尋伺)이며, 셋째는 상사(想思)이다.
  또한 마땅히 존중[敬養]을 받아야만 할 세 가지 존귀하고 뛰어난 것[尊勝]이 있으니, 첫째는 나이가 뛰어난 것[增上]이며, 둘째는 족성(族姓)이 뛰어난 것이며, 셋째는 공덕(功德)이 뛰어난 것이다.
  또한 머무르는 정(定)과 부정(不定)의 인(因)에 세 가지가 있으니, 두 가지는 정인(定因)이요, 한 가지는 부정인(不定因)이다. 첫째는 악취(惡趣)의 정인(定因)이며 무간업(無間業)을 말한다. 둘째는 선취(善趣) 열반(涅槃)의 정인(定因)이며 무루(無漏) 유루법(有漏法)을 말한다. 셋째는 부정인(不定因)이며 그 밖의 법(法)을 말한다.
  
8) 무견무대(無見無對)의 정과색(定果色)을 말한다.
9) 정정(淨定)을 얻은 자의 색(色)은 통과색(通果色)으로서 안[內]의 마음이 변화한 경계[境]이다.
10) 방편을 닦는 자의 색(色)은 아직 원만하지 않은 변화한 마음의 결과[果]의 경(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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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성교(聖敎)를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전전(展轉)하여 죄(罪)를 들추는 세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신(身) 어(語)가 현행(現行)하여 학처(學處)를 위범(違犯)하는 것을 바로 본 것[現見]이며, 둘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이며, 셋째는 그 밖의 상(相)으로써 견주어서 아는 것이다.
  또한 제 여래(如來)는 스스로 3불호(不護)의 덕(德)을 구족하셨다고 설하셨는데, 외도(外道)의 여러 스승들이 안으로 뭇 악(惡)을 품고서 스스로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아닌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여래께서 진실한 일체지(一切智)라는 믿음[信]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삿된 집착에서 생기게 되는 것인 큰불에서 일어나는 유정(有情)의 소뇌(燒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탐애(貪愛)의 소뇌(燒惱)이며, 둘째는 수우(愁憂)의 소뇌(燒惱)이며, 셋째는 전도(顚倒)의 소뇌(燒惱)이다.
  또한 복(福)을 좋아하여 삿되게 밖의 불[外火]를 섬기는 승해(勝解)의 유정(有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헛된 속임[虛誑]이 없는 불을 섬겨야 할 것을 나타내 보이는 세 가지 불이 있으니, 실로 불은 아닐지라도 불이라는 이름을 가립(假立)하는 것이다. 첫째는 부모(父母)이며, 둘째는 처자(妻子)이며, 셋째는 진실한 응공(應供)의 복전(福田)이다.
  
  또한 락욕(樂欲)이 더욱더[增上] 생기는 자를 위해서 진실(眞實)이 더욱더 생기는 도(道)를 설하는 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재부(大財富)을 얻는 보시(布施)이며, 둘째는 선취(善趣)에 머물게 되는 지계(持戒)이며, 셋째는 고수(苦受)를 원리(遠離)하고 한결같이 시달림이 없는 락세계(樂世界)에 태어나게 되는 정(定)을 닦는 것이다.
  또한 제 욕(欲)을 받는 자에게 열(劣) 중(中) 승(勝)의 욕(欲)의 세 가지가 있으니, 제 욕(欲)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낙(樂)에 관대(觀待)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많은 공력(功力)을 써서 연(緣)에 의지하려는 제 욕(欲)이며, 현전(現前)에 머무르는 모든 제 욕(欲)을 말한다. 둘째는 적은 공력(功力)을 써서 마음에 의지하려는 제 욕(欲)이며, 락화천(樂化天)의 모든 제 욕(欲)을 말한다. 셋째는 매우 적은 공력(功力)을 써서 마음에 의지하려는 제 욕(欲)이며, 타화천(他化天)의 모든 제 욕(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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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제 욕(欲)을 뛰어넘는 열(劣) 중(中) 승(勝)의 낙(樂)의 세 가지가 있으니, 심사(尋伺)가 있는 희(喜)이며, 둘째는 심사(尋伺)가 없는 희(喜)이며, 셋째는 희를 여의는[離喜] 낙(樂)이다.
  또한 알아야 할 대상[所知]을 깨달아서[覺悟] 능히 3승(乘)으로 하여금 뭇 고(苦)를 출리하게끔 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음[音]을 듣는 종류이며, 둘째는 안으로 바르게 사유[正思惟]하는 종류이며, 셋째는 긴 시간동안 지관(止觀)을 수습하는 종류이다.
  또한 알아야 할 대상[所知]을 깨닫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구박(具縛)이며, 둘째는 불구박(不具縛)이며, 셋째는 전혀 박(縛)이 없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의 마땅히 지어야 할 것[事]이 있어서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세 가지[三事]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신(信) 등의 일체의 선법(善法)을 수습(修習)한다. 첫째는 견도소단(見道所斷)의 제 번뇌(煩惱)를 영원히 끊고 나서 예류과(豫流果)를 증득하는 것이며, 둘째는 수도소단(修道所斷)의 제 번뇌(煩惱)를 영원히 끊고 나서 점차로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는 것이며, 셋째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고 나서 현법의 락에 머무르는 것[現法樂住]이다.
  또한 세 가지 부분[分]에 의해서 모든 소지(所知)의 경계를 환하게 비추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3안(眼)을 건립하니, 첫째는 육안(肉眼)으로서 능히 드러나는데[顯露] 장애하는 것이 있지 않아서 유견(有見)의 제 색(色)을 능히 비추는 것이며, 둘째는 천안(天眼)으로서 드러나는 것[顯露]과 드러나지 않는 것[不顯露]의 장애가 있는 것과 장애가 없는 것의 유견(有見)의 제 색(色)을 비추는 것이며, 셋째는 혜안(慧眼)으로서 일체종(一切種)의 색(色) 또는 비색(非色)의 모든 제 법(法)을 비추는 것이다.
  또한 현행(現行)하는 번뇌의 원적(怨敵)을 능히 해치는 세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선우(善友)를 믿고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무리들이 섞여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안으로 바르게 작의[正作意]하여 알아야 할[所知] 진실(眞實)에 대한 도리를 깨닫는 것이다.
  다시 능히 전전(展轉)하여 다음 다음에 소증(所證)을 증득하고 열반(涅槃)을 얻게 하는 세 가지의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이 있으니, 첫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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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尸羅)에 대한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이며, 둘째는 마음에 대한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에 머무르는 것이며, 셋째는 알아야 할 진실(眞實)에 대하여 도리를 깨닫는데 대한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이다.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에 세 가지가 있은 것처럼 바른 교계의 방편을 자주 수습하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른 교계의 방편[正敎誡方便]에 대하여 바로[現前] 수습할 때에 세 가지 법(法)에 의해서 안온(安穩)의 머무름을 얻으니, 첫째는 공(空) 무원(無願) 무상(無相)의 멸진등지(滅盡等至)이며, 둘째는 4정려(靜慮)이며, 셋째는 4무량(無量)이다.
  또한 간략하게 능히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증득하게 하는 세 가지의 심일경성(心一境性)11)이 있으니, 첫째는 의언(意言)에 대해서 갖가지로 차별하는 소연(所緣)의 행상(行相)12)이며, 둘째는 의언(意言)에 계속하여[無間] 갖가지로 차별하는 소연(所緣)의 행상(行相)13)이며, 셋째는 의언(意言)을 벗어나[超度] 하나의 경계에 오롯이 머물러서[專注] 종종(種種)의 차별이 없는 소연(所緣)의 행상(行相)14)이다.
  또한 능히 악하고 삿된 처(處)에 대해서 헛되이 존귀하고 뛰어난 것[尊勝]이라고 계탁하고 중용(中庸)에 처한 교화해야 할[所化] 유정(有情)을 섭수(攝受)하여 성도(聖道)에 끌어당기게 하는 세 가지 처(處)가 있으니, 첫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최고의 뛰어난 신통(神通)을 보이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염(染) 정(淨)에 대해서 막고[遮止] 열게[開許] 하는 것이며, 셋째는 묘법(妙法)을 선설(宣說)하여 바르게 교수하고[正敎] 바르게 교계하는 것[正誡]이다.
  또한 세 가지 정(淨)이 있으니, 락정외도(樂淨外道)가 밖의 물을 섬겨서 잠시 바깥의 때를 제거하고서 스스로 자신은 제일(第一)의 청정(淸淨)을 얻
  
11) 초습업(初習業)과 이습행(已習行)과 이초도(已超度)의 세 가지 작의(作意)와 상응(相應)하는 정(定)이다.
12) 문(聞) 사(思)의 두 가지 혜(慧)를 말한다.
13) 수혜(修慧)를 말한다. 세간(世間)의 3혜(慧)와 상응하는 정(定)이다.
14) 분별지(分別智)와 상응하는 정(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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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었다고 말하며, 일으키는 사만(邪慢)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 이 세 가지를 건립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의미[義]에서의 정(淨)은 부정처(不淨處)에 태어나는 것을 초월하는 인(因)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가지의 모니(牟尼)가 있다. 모니계(牟尼戒)를 지니는 제 외도(外道)들이 잠시 말[語言]을 그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은 진실한 적정(寂靜)을 얻었다고 말하며, 일으키는 삿된 집착을 끊어 없애기 위해서, 또한 전도 없는 모니(牟尼)를 선설(宣說)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진실된 모니(牟尼)를 건립하는 것이다. 곧 성인(聖人)이 좋아하는 것이면서 계(戒)에 포함되는 신(身) 어(語)의 2업(業)과 무루심(無漏心)이다.
  또한 능히 원리(遠離)에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지 않은 심사[不正尋思]가 현행(現行)하는 것을 끊어 없애게 하는 세 가지 법(法)이 있으니, 다른 이가 비방[誹毁]하고 자신이 비방하고 대리(大利)를 잃는[退失]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참(慚) 괴(愧) 애경(愛慶)을 말한다.
  또한 도(道)와 도과(道果)에 의하여 세 가지의 최승무상(最勝無上)이 있으니, 무상지(無常智) 고지(苦智) 무아지(無我智)와 락속통(樂速通) 등의 4종(種)의 행적(行跡)과 일체의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 유학(有學) 무학(無學) 시해탈(時解脫)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의 최승무상(最勝無上)을 말한다. 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은 먼저 그 지(智)를 얻고 그 지(智)에 의하기 때문에 번뇌를 끊는 것이며, 다음으로 행적(行跡)을 닦으며, 행적을 닦고 나서 심해탈(心解脫)을 얻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명(明)이 있으니, 전(前) 후(後) 중제(中際)에 대한 단(斷) 상(常)의 2변(邊)과 삿되게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집착하는 우치(愚癡)의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무명성(無明性)을 나타내기 위해서 3명(明)15)을 건립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세 가지의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를 설하였다.
  
15) 첫째는 숙명명(宿命明)으로서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을 아는 것이며, 상견(常見)을 대치(對治)한다. 둘째는 천안명(天安明)으로서 미래의 과법(果法)을 아는 것이며, 단견(斷見)을 대치(對治)한다. 셋째는 누진명(漏盡明)으로서 번뇌(煩惱)를 다하여 얻는 지(智)이며, 사견(邪見)을 대치(對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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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16) 네 가지 종류를 설하겠다.
  능히 일체의 소지(所知)와 지(智)를 섭수(攝受)하는 네 가지 법(法)이 있으니, 신(身)과 문(聞) 사(思) 수(修)의 증상(增上)의 염주(念住)로써 의지로 삼아 신경(身境)을 연(緣)하는 혜(慧)를 말하며, 신(身)과 신경(身境)을 연(緣)하는 혜(慧)와 같이, 수(受) 심(心) 법(法)과 수(受) 심(心) 법(法)의 경(境)을 연(緣)하는 혜(慧)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으니, 첫째 집취박(執取縛)17), 둘째 영수박(領受縛)18), 셋째 요별박(了別縛)19), 넷째 집착박(執著縛)의 네 가지 박(縛)을 말한다. 심(心)은 신(身)에 대해서는 집취박(執取縛)에 의해서 계박[縛]되고, 수(受)에 대해서는 안의 영수박(領受縛)에 의해서 계박되고, 색(色) 등의 경계상(境界相)에 대해서는 요별박(了別縛)에 의해서 계박되니, 곧 설한 바 신(身) 등에 대해서는 탐(貪) 진(瞋) 등의 대(大) 소(小)의 번뇌의 집착박(執著縛)에 의해서 계박된다고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계박[縛]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4념주(念住)를 세우는 것이다.
  또한 욕근(欲勤)을 우선[先]으로 하여 과환(過患) 및 대치(對治)를 관찰하는 것을 의지로 삼는 네 가지20)가 있으니, 능히 현행(現行)의 제 불선법(不善法)을 끊는 것,21) 그리고 그 계(繫)를 끊는 것,22) 능히 선법(善法)을 얻는 것,23) 그리고 능히 증장(增長)하는 것이다.24)
  
16)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네 번째로 법수(法數)가 사(四)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46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17) 심(心)이 소의(所依)의 색신(色身)을 집취(執取)하여 자체(自體)로 할 때 색신(色身)은 곧 심(心)을 계박[縛]하니, 이를 집취박(執取縛)이라 한다.
18) 수(受)는 깊게 소연(所緣)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受)와 함께하는 심(心)은 수(受)에 계박[縛]된다고 하는 것이다.
19) 요별하는 주체[能了別]로서의 심(心)이 소연(所緣)의 경계(境界)에 계박[縛]되는 것을 말한다.
20) 4정단(正斷)을 말한다.
21) 율의단(律儀斷)을 말한다.
22) 단단(斷斷)을 말한다.
23) 수습단(修習斷)을 말한다.
24) 방호단(防護斷)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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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심(住心)을 바라기 위해서, 승정(勝定)을 얻기 위해서 방편(方便)을 닦는 자가 마음이 뜻대로 머물러 능히 생장(生長)하게 하는 문(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출리(出離)를 즐기는 욕(欲)이며, 둘째는 수지(受持) 독송(讀誦) 회과(悔過)25) 정진(精進)이며, 셋째는 능히 현선(賢善)의 정상(定相)의 마음을 취하는 것이며, 넷째는 공한처(空閑處)에 머무르면서 제 법(法)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일정하게 마음에 머무르는데[心定心住]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심유사의 희심이 있어 머무르는 것[有尋有伺有喜心住]이며, 둘째는 무심무사의 희심이 있어 머무르는 것[無尋無伺有喜心住]이며, 셋째는 무심무사의 희심을 여의고서 머무르는 것[無尋無伺離喜心住]이며, 넷째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일체고락(一切苦樂)의 마음을 벗어나서[超度] 머무르는 것이다.
  소지(所知)의 진실(眞實)에 네 가지가 있으니,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의 두 품(品)이 구별되기 때문에 네 가지를 건립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알고 잘 알면 능히 견(見) 수소단(修所斷)의 일체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첫째는 염오품(染汚品)의 과(果)의 진실(眞實)이며, 둘째는 그 품(品)의 인(因)의 진실(眞實)이며, 셋째는 청정품(淸淨品)의 과(果)의 진실(眞實)이며, 넷째는 그 품(品)의 인(因)의 진실(眞實)이다.
  또한 네 가지의 상(想)을 으뜸[先]으로 하는26) 희론박(戲論縛)이 있으니, 첫째는 소욕(小欲)27)에 대한 상(想)을 으뜸으로 하는 희론박(戲論縛)이며, 둘째는 대색(大色)28)에 대한 상(想)을 으뜸으로 하는 희론박(戲論縛)이며, 셋째는 무량(無量)한 공(空)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대한 상(想)을 으뜸으로 하는 희론박(戲論縛)이며, 넷째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대한 상(想)을 으뜸으로 하는 희론박(戲論縛)이다.
  또한 제 유정(有情)에 있어서 에(恚) 해(害) 불락(不樂) 욕탐(欲貪)을
  
25)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26) 일곱 가지 유상(有想)에 의하기 때문에 유정(有頂)을 제외한다.
27) 욕계(欲界)를 말한다.
28) 색계(色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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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치하고 잘 수습할 때 능히 대복(大福)을 일으키고 능히 이욕(離欲)으로 나아가게 하는 네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자(慈)이며, 둘째는 비(悲)이며, 셋째는 희(喜)이며, 넷째는 사(捨)이다.
  또한 색계(色界)를 벗어나 원분(遠分)을 성취하게끔 하는 데에 네 가지 법(法)이 있으니, 공처(空處) 식처(識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또한 해탈(解脫)을 속히 원만히 하려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가 성해탈(聖解脫)을 원하여 뛰어난 임지법(任持法)으로써 4애(愛)29)의 증상력(增上力)을 끊게 하기 위한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의복(衣服) 음식(飮食) 와구(臥具)에 대해서 구하는 것이 적은 것이며, 작난(作亂) 없고 시간이 비어서 헤아릴 것이 없는 것이며,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마음에 산란(散亂)을 여의는 것이며, 즐겨 번뇌를 끊고 즐겨 정도(正道)를 닦는 것이다.
  또한 도과(道果)를 수습하고 제 번뇌를 끊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는 것이며, 둘째는 수소단(修所斷)의 하품(下品)의 결(結)과 상(上) 중품(中品)을 끊는 것이며, 셋째는 남김없이 이것을 끊는 것이며, 넷째는 상분(上分)의 결(結)을 남김없이 끊는 것이다.
  또한 예류지(預流支)를 증득하여 능히 행자(行者)로 하여금 불(佛)의 성교(聖敎)와 선취(善趣) 가운데에 필경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데에 네 가지30)가 있다. 대사(大師)한테서 그리고 참된 깨달음[眞覺]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이 마음의 청정을 내는 것이며, 대사(大師)에 대해서와 같이 소증법(所證法)과 증득한 법으로 인해서 닦아 증득하는[修證] 행자(行者)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마음의 청정[心淸淨]이라고 이름하며, 네 번째의 한 가지를 색의 청정[色淸淨]이라고 이름하는데, 성인(聖人)이 좋아하는 계(戒)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앞의 세 가지는 성교(聖敎)에 대해서 동요(動搖)가 있지 않은 것이며, 마지막 한 가지는 선취(善趣)에 대해
  
29) 희탐(喜貪)과 함께 작용하는 애(愛)와 이런 저런 낙(樂)을 희구(希求)하는 애(愛)와 후유(後有)의 애(愛)와 독애(獨愛) 혹은 자체애(自體愛)를 말한다.
30) 불(佛) 법(法) 승(僧) 계(戒)의 4불괴정(不壞淨)을 말한다. 이는 신(信)과 계(戒)의 둘을 체(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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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동요(動搖)가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예류지(預流支)를 증득하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설법사(說法師)와 교수자(敎授者)에 대해서 능히 잘 위범(違犯)하는 것 없이 받들어 모시는 것[承事]이며, 둘째는 전도 없이 스승이 설한 법과 교수법(敎授法)을 청문(聽聞)하는 것이며, 셋째는 들은 법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사유[正思惟]하고 잘 통달하는 것이며, 넷째는 닦은 것[所修]을 성취[成辦]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지(一切智)를 포섭하는 네 가지 지(智)가 있으니, 첫째는 오직 무루(無漏)로서 제 법(法)에 대해서 능히 현견(現見)하는 지(智)이며, 둘째는 한결같은[一向] 무루(無漏)로서 제 법(法)에 대해서 현견(現見)하지 않는 지(智)이며, 셋째는 한결같은 유루(有漏)로서 어떤 경우는 이치에 맞게 끌어당기는 것[如理所引]이며 어떤 경우는 이치에 맞지 않게 끌어당기는 것[不如理所引]이며 어떤 경우는 이치에 맞는 것도 아니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닌 것에서 끌어당긴 것[非如理非不如理所引]의 세간(世間)의 지(智)이며, 넷째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통하는 타심차별(他心差別)의 지(智)이다.
  또한 전환품(轉還品)31)의 진실에 대해서 능히 취하는 지(智)가 있어서 능히 제 루(漏)를 다하는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품과진실지(轉品果眞實智)32)이며, 둘째는 전품인진실지(轉品因眞實智)33)이며, 셋째는 환품과진실지(還品果眞實智)34)이며, 넷째는 환품인진실지(還品因眞實智)35)이다.
  또한 능히 믿는 자로 하여금 번뇌를 끊게 하기 위해서 바른 방편[正方便]을 닦게끔 하는 데에 네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상속(相續)하며 은근하게[殷重] 작용(作用)하는 정진(精進)이며, 둘째는 정지(正知)에서 행(行)하는 염(念)이며, 셋째는 사마타(奢摩他)이며, 넷째는 비발사나(毘鉢舍那)이다.
  
31) 유전품(流轉品)의 전품(轉品)과 환멸품(還滅品)의 환품(還品)을 합쳐서 전환품(轉還品)이라고 하는 것이다.
32) 고제(苦諦)를 연(緣)하는 지(智)이다.
33) 집제(集諦)를 연(緣)하는 지(智)이다.
34) 멸제(滅諦)를 연(緣)하는 지(智)이다.
35) 도제(道諦)를 연(緣)하는 지(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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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능히 법(法)을 통달하여 능히 상루소의(上漏所依)의 족적(足跡)을 다하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성도(聖道)를 얻기 위해서 유루(有漏)의 혜(慧)를 닦는 것36)이며, 이미 득도(得道)하고 나서 제 번뇌(煩惱)를 없애고 제 현상[事]을 없애는 것이며, 남김없이 영원히 제 번뇌와 현상[事]을 끊는 것이며, 얻은 바 도(道)와 같이 계속해서 다시 수습하는 것37)이다.
  또한 전전상응(展轉相應)하며 행(行)이 있고 연(緣)이 있어서 화합하여 구르며 동일한 연(緣)으로 구르는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한다.
  
  또한 이미 불(佛)의 성교(聖敎)에 들어간 자로 하여금 성교(聖敎)를 애락(愛樂)하게 할 수 있는 네 가지의 호(護)가 있으니, 첫째는 명호(命護)38)이며, 둘째는 역호(力護)39)이며, 셋째는 심번뇌호(心煩惱護)40)이며, 넷째는 정방편호(正方便護)41)이다.
  또한 능히 정견(正見)을 얻어서 전도 없는 이치[無倒義]를 행(行)하는 소의(所依)의 처소에 네 가지42)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에 의해서 행시(行時)가 청정하고 뒤의 한 가지에 의해서 주시(住時)가 청정하다. 근문(根門)을 지키는 자는 제 경계(境界)에 대해서 따르지도 않고,43) 거슬리지도 않으며,44) 근문(根門)을 지키기 위해서 증상력(增上力)을 염(念)하고 정지(正知)로써 행하는 것이다.45) 원리(遠離)에 머무르는 자는 염오(染汚)없는 마음으로 오로지 하나의 연(緣)에 따른다[專注].46)
  또한 네 가지 행(行)에 의해서 능히 명(明)과 해탈(解脫)을 증득하는 줄 알
  
36) 3현위(賢位)와 4선근(善根)의 7방편도(方便道)의 수문(修門)을 말한다.
37) 무학위(無學位)의 작용(作用)이다.
38) 자타(自他)의 정명(正命)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39) 신력(身力)을 지켜서 다른 이를 이익(利益)하게 하는 것이다.
40) 정법(正法)을 지키기 위해서 도리어 번뇌를 일으켜 불적(佛敵)을 꺽는 것이다.
41)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정법(正法)을 지키는 것이다.
42)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정념(正念)을 말한다.
43) 무탐(無貪)을 설명하는 것이다.
44) 무진(無瞋)을 설명하는 것이다.
45) 무치(無癡)를 설명하는 것이다.
46) 정념(正念)을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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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야만 한다. 염(念) 안(眼) 혜(慧)에 의해서 능히 명(明)을 증득하고, 또한 신(身)에 의해서 능히 부동(不動)과 시해탈(時解脫)을 증득한다.
  다시 광대하고 갖가지로 차별적인 제 소조색(所造色)이 일어나는 데에 능히 의지(依止)가 되는 네 가지 법(法)이 있으니, 첫째는 견성(堅性)이며, 둘째는 습성(濕性)이며, 셋째는 난성(煖性)이며, 넷째는 가벼움[輕] 등의 동성(動性)이다.
  또한 능히 이미 태어난 제 유정(有情)의 종류를 지키고 오래 머물도록 하며, 능히 유(有)를 심구(尋求)하는 자를 섭익(攝益)하는 데에 네 가지 법(法)47)이 있으니, 섭사분(攝事分)48)에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에 제 식(識)이 유전(流轉)하는 소의(所依)의 족적(足跡)에 네 가지가 있다. 제 색(色)에 대해서 보고 나서 취향(趣向)하고, 탐애(貪愛)에 의하기 때문에 취하여 소연(所緣)49)으로 삼는 것이다. 소의(所依)50) 경계(境界)51)와 함께 있으면서 건립하는 것이다. 제 색(色)에 대한 것과 같이 수(受) 상(想) 행(行)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제 필추(苾芻)들은 현법(現法)의 몸[身]과 목숨[命]을 연연해 함[顧戀]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의복(衣服) 음식(飮食) 와구(臥具)에 대해서 희구(希求)의 애(愛)를 내며, 후법(後法)의 몸과 목숨을 연연해하는 것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후유(後有)에 대하여 희구(希求)의 애(愛)를 내며, 열반(涅槃)에 대한 어리석음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그래서 무유(無有)에 대해서 희구(希求)의 애(愛)를 낸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네 가지의 희구(希求)의 애(愛)가 있으니, 의복(衣服)의 애(愛) 음식(飮食)의 애(愛) 와구(臥具)의 애(愛) 유무유(有無有)의 애(愛)52)를 말한다.
  또한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짓지 말아야 할 것을 현행(現行)하게 하
  
47) 단(段) 촉(觸) 사(思) 식(識)의 4식(食)을 말한다.
48) 본론(本論) 제 94권(卷)에서 기술하고 있다.
49) 6경(境)을 말한다.
50) 5근(根)을 말한다.
51) 6경(境)을 말한다.
52) 후유(後有)의 애(愛)와 무유(無有)의 애(愛)를 합하여 유무유(有無有)의 애(愛)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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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조작하게 하는 데에 네 가지 법(法)53)이 있으니, 말하자면 가애(可愛)의 사(事)를 수순하는 것이며, 불가애(不可愛)의 사(事)를 거스르는[違逆] 것이며, 강한 적을 포외(怖畏)하여 그 마음을 전도하는 것이며, 현법(現法)과 후법(後法)의 과(果)에 대하여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청문(聽聞)과 기론(記論)으로 능히 의심하는 것을 끊고 능히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능히 뛰어난 결택력을 지니게[任持] 하는 데에 네 가지54)가 있다. 법(法)의 실상에 대해서 마땅히 일향기(一向記)로 응하는 것이며, 제 유정(有情)의 업과(業果) 이숙(異熟)에 대해서 마땅히 분별기(分別記)로 응하는 것이며, 한결같이 묻지 않는 은밀한 설에 대해서 힐문기(詰問記)로 응하는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不如理]에 대해서 마땅히 사치기[置記]로 응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어찌 기(記)라고 이름하는가? 그 묻는 말을 기설해야 하는데 불(佛) 세존(世尊)께서는 기설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데에 네 가지의 혜사(惠捨)가 있으니, 세 가지는 청정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오직 자신계(自身戒)만을 보아 구족(具足)하는 것이며, 혹은 다시 오직 타계(他戒)만을 보아 구족(具足)하는 것이며, 혹은 자신(自身) 타계(他戒)를 보아 구족(具足)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청정하지 않은 것으로서 말하자면 자신(自身) 타계(他戒)를 보아도 두 가지 모두 구족(具足)하지 않는 것이다. 그 청정한 자는 장차 선취(善趣)에 태어나서 자산(資産)이 풍요롭게 되며, 청정하지 않은 자는 장차 악취(惡趣)에 태어나서 자산(資産)이 부족하게 된다.
  
53) 탐(貪) 진(瞋) 포(怖) 무명(無明)을 말한다.
54)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을 풀이할 때에 질문의 성질에 따라서 답을 풀이하는 방식이 네 가지로 나뉘는 것을 말한다. 4기(記) 4답(答) 4종답(種答) 4종문답(種問答) 4종기론(種記論) 4기론(記論) 4종기답(種記答)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일향기(一向記)로서 직접적인 긍정방식으로 답을 풀이하는 것이며, 둘째는 분별기(分別記)로서 분석하고 해부한 뒤에 긍정 또는 부정의 방식으로 답을 풀이하는 것이며, 셋째는 힐문기(詰問記) 또는 반힐기(反詰記)로서 직접적으로 답을 주지 않고 먼저 반문(反問)한 상대방에게 도로 질문하여 그를 이해시키거나 혹은 질문의 뜻을 밝힌 다음에 답을 주는 것이며, 넷째는 사치기(捨置記)로서 질문한 자가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을 물을 경우에 내버려 두고 답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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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뭇 방편(方便)을 포섭하여 능히 일체의 대중을 바르게 거두고 교화하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요익방편(饒益方便)이며, 둘째는 섭수방편(攝受方便)이며, 셋째는 인도방편(引導方便)이며, 넷째는 수치방편(修治方便)이다.
  또한 업(業)으로부터 태어나게 되는 제 유정(有情)의 종류가 이런 저런 취(趣)에 태어나는 데에 네 가지의 의지(依止)하는 문(門)이 있으니, 첫째는 업(業)과 알의 껍데기에 의한 것이고, 둘째는 업(業)과 태의 막에 의한 것이고, 셋째는 업(業)과 축축함에 의한 것이고, 넷째는 오직 업(業)에만 의한 것이다.
  또한 이런 저런 곳에 생(生)을 받는 유정(有情)에게는 네 가지의 죽음[死]이 있으니, 첫째는 자신에 의해서 죽는 것으로서 희망의분천(希忘意忿天)에서 생(生)을 받는 자를 말하며, 둘째는 다른 이에 의해서 죽는 것으로서 갈라람(羯羅藍) 알부담(頞部曇) 폐시(閉尸) 건남(鍵南)의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자를 말하며, 셋째는 두 가지에 의해서 죽는 것으로서 욕계(欲界)에 있는 그 밖의 유정(有情)을 말하며, 넷째는 두 가지에 의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서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와 유정(有頂)을 마지막으로 하는 모든 유정(有情)을 말한다.
  다시 네 가지의 청정도(淸淨道)가 있으니, 첫째는 공용(功用)의 근(根)이 원만하지 않으면서 또한 희락(喜樂)이 원만하지 않은 것이며, 둘째는 공용(功用)의 근(根)이 원만하면서 희락(喜樂)이 원만하지 않은 것이며, 셋째는 희락(喜樂)이 원만하면서도 공용(功用)의 근(根)이 원만하지 않은 것이며, 넷째는 희락(喜樂)이 원만하면서도 또한 공용(功用)의 근(根)이 원만한 것이다.
  또한 네 가지의 청정도(淸淨道)가 있으니, 첫째는 악(惡)을 등지는 설법(說法)과 비나야(毘奈耶)이며, 둘째는 선(善)을 향하는 설법(說法)과 비나야(毘奈耶)이며, 셋째는 자량도(資糧道)이며, 넷째는 청정도(淸淨道)이다. 이 가운데에 첫 번째 것은 어떤 사람이 외도(外道)의 견(見)과 무의(無義)를 이끄는 고절행(苦切行)55)에 대하여 마음으로 애락(愛樂)하지 않고 또한 인가(忍可)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어떤 사람이 온(蘊) 계(界) 처(處) 연기(緣
  
55) 고행(苦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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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起) 처비처(處非處) 등의 제 선교(善巧)에 대하여 애락(愛樂)하고 인가(忍可)하고 또한 능히 춥고 더운 등의 괴로움을 감인(堪忍)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것은 깨끗한 시라[淨尸羅]로서 근문(根門) 등을 지키는 등의 여러 선(善)한 자량(資糧)에 포함되는 정법(正法)을 말한다. 네 번째 것은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로서 제 번뇌(煩惱)를 끊고 현법락주(現法樂住)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네 가지의 증상심(增上心)의 방편(方便)이 있으니, 아직 욕(欲)을 여의지 못한 자는 불환과(不還果)를 얻기 위하여, 혹은 불환과(不還果)는 미지정(未至定)에 의하여 현법락주(現法樂住)를 구하기 위하여,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제 악법(惡法)을 끊고 선취(善趣)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자기(自己)의 제 번뇌(煩惱)를 끊고 뛰어난 결택(決擇)을 얻기 위한 것을 말한다.
  또한 2업(業)에 네 가지의 상(相)의 차별이 있으니, 유전[轉]에 포함되는 업(業)의 차별(差別)에 세 가지가 있으며, 환멸[還]에 포함되는 업(業)에는 총(總) 한 가지를 세운다. 첫 번째업[初業]은 한결같이[一向] 능히 불애과(不愛果)인 악취(惡趣)의 이숙(異熟)을 부르는 것이며, 두 번째 업은 한결같이 가애(可愛)의 낙과(樂果)인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이숙(異熟)을 부르는 것이며, 세 번째 업(業)은 능히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果)인 욕계(欲界)의 천(天) 인(人)의 이숙을 부르는 것이며, 네 번째 업은 능히 앞의 세 가지 업을 끊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네 가지의 제 유정(有情)의 종류의 증상(增上)의 근무(勤務)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즐겁지만 이익되지는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이익되지만 즐겁지는 않는 것이며, 셋째는 즐겁기도 하고 이익도 되는 것이며, 넷째는 즐겁지도 않고 이익되지도 않는 것이다.
  또한 제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태어남[生] 등의 괴로움[苦]과 떨어지지 않고 화합하게 하는 네 가지 문(門)이 있으니, 첫째는 제 욕(欲)을 염착(染著)하는 문(門)이며, 둘째는 색(色) 무색(無色)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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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等至)에 염착(染著)하는 문(門)이며, 셋째는 외도(外道)의 제 견(見)의 문(門)이며, 넷째는 이 법(法)에 머무르나 아직 안(眼)56)을 얻지 못한 자(者)의 무지(無智)의 문(門)이다.
  또한 성도(聖道)를 닦아서 이 4문(門)에서 생기게 되는 뭇 괴로움으로부터 속히 이계(離繫)를 얻게 하며 능히 유정으로 하여금 괴로움과 화합하게 하는 것과 같이, 능히 흐름[流]을 따라서 후유업(後有業)을 취하여 해탈하기 어려운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두루 모든 보특가라(補特伽羅)를 포함하는 네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이생(異生)이며, 둘째는 아직 욕(欲)을 여의지 못한 유학(有學)이며, 셋째는 이미 욕(欲)을 여읜 유학(有學)이며, 넷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뛰어넘은 모든 무학(無學)이다.
  또한 네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율의(律儀)에 머무르지만 남을 위해서는 능히 정법(正法)을 선설(宣說)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스스로 율의(律儀)에 머무르지 않지만 남을 위하여 능히 정법(正法)을 선설하는 것이며, 셋째는 두 가지를 능히 짓는 것이며, 넷째는 두 가지를 능히 짓지 않는 것이다.
  또한 네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 첫째는 족성(族姓)이 비천[卑下]하면서 백법(白法)을 현행(現行)하는 것이며, 둘째는 족성(族姓)이 존귀[尊高]하면서 악법(惡法)을 현행(現行)하는 것이며, 셋째는 족성이 비천하면서 악법(惡法)을 현행하는 것이며, 넷째는 족성이 존귀하면서 백법을 현행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첫 번째 것은 현법(現法)에는 괴로움이 있지만 후법(後法)에는 그렇지 않으며, 두 번째 것은 후법(後法)에는 괴로움이 있지만 현법(現法)에는 그렇지 않으며, 세 번째 것은 2세(世)가 모두 괴로움이며, 네 번째 것은 2세(世)가 모두 즐거움이다.
  또한 네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 첫째는 괴로움을 스스로 맡고[任] 남에게는 맡기지 않지만 비복(非福)을 낳는 것으로서 외도(外道)의 스스로 고계(苦戒)를 받는 자를 말한다. 둘째는 괴로움을 남에게 맡기고
  
  
56) 혜안(慧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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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맡지 않지만 비복(非福)을 낳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이 불율의(不律儀)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괴로움을 (자타[自他]) 모두에게 맡기지만 비복(非福)을 낳는 것으로서 여러 국왕(國王)과 제사장[祠祀主] 말[馬]로 제사지내는 등을 말한다. 넷째는 괴로움을 자타(自他)에게 맡기지 않지만 대복(大福)을 낳는 것으로서 정려(靜慮)에 머무르는 자와 제 악(惡)을 여읜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말한다.
  또한 간략하게 네 가지의 말의 실수[語失]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이 아닌 것[不實]이며, 둘째는 어긋난 것[乖離]이며, 셋째는 덕을 훼손하는 것[毁德]이며, 넷째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無義]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네 가지의 말의 덕[語德]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간략하게 네 가지의 성스럽지 않은[非聖] 망어(妄語)가 있으니,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전도(顚倒)하여 말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않았다고 하고 느낀 것[覺]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고, 안 것[知]을 모른다고 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을 현성(賢聖)의 진리의 말[諦語]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미 네 종류로 되는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를 설하였다.
  다음에57) 다섯 종류에 대하여 설하겠다.
  제 욕탐품(欲貪品)의 추중(麤重)에 따라다니며[隨逐] 유전(流轉)하는 잡염(雜染)에 포함되는 행취(行聚)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의(所依) 소연(所緣)의 자성(自性)의 행취(行聚)이며, 둘째는 자성(自性)을 능히 받아들이는[領納] 행취(行聚)이며, 셋째는 능히 분별(分別)하고 언설(言說)하는 분위(分位)에서 제 법(法)의 상(相)의 자성(自性)을 취하는 행취(行聚)이며, 넷째는 자성(自性)을 능히 작용하는 행취(行聚)이며, 다섯째는 자성(自性)을 능히 요별(了別)하는 행취(行聚)이다. 이 다섯 가지와 상위(相違)하는 것을 욕탐품(欲貪品)의 추중(麤重)을 여읜 환멸(還滅)의 청정(淸淨)에 포함
  
  
57)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다섯 번째로 법수(法數)가 오(五)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24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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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는 자성(自性)의 행취(行聚)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욕(欲)을 수용(受用)하는 자가 사랑하는 대상[所愛]의 경계(境界)이며, 제 욕(欲)을 즐기는 자가 항상 추구(追求)하는 것이며, 항상 수용하는 것이며, 제 욕(欲)을 등진 자가 항상 바르게 관찰[正觀察]하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 추구(追求)하는 것과 심사(尋思)하는 것과 염착(染著)하는 것의 현상[事]에 의하여 네 가지의 애락(愛樂)이 있으니, 말하자면 미래(未來)에 대하여 애락(愛樂)하는 것의 현상[事]은 곧 추구하는 것이 되며, 과거(過去)에 대하여 애락(愛樂)하는 것의 현상[事]은 심사하는 것이 되며, 현재(現在)에 대하여 애락(愛樂)하는 것의 현상[事]은 염착(染著)하는 것이 된다. 이것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애락(愛樂)하는 것의 현상[事]이며, 둘째는 그것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애락(愛樂)하는 바의 수(受)이다.
  또한 유정(有情)이 얻는 애(愛) 비애(非愛)를 받는 업과(業果) 이숙(異熟)의 자체(自體)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천(天) 인(人) 나락가(那落迦) 방생(傍生) 아귀[鬼]의 취(趣)를 말한다.
  또한 이익[利養]을 잃는 인행(因行)이면서 또한 열반(涅槃)을 등지는 인행(因行)에 다섯 가지58)가 있으니, 말하자면 이 처(處)에서 이익[利養]을 수용(受用)하거나, 저기로부터 얻거나, 소득(所得)의 물건이거나, 할 것[所爲]을 얻거나, 이와 같이 얻거나 간에 이 여러 가지 경우[處]에 마음으로 아까워 함[吝惜]을 내는 것이다.
  또한 수행자(修行者)로 하여금 먼저 정계(淨戒)와 다문(多聞)을 훼손하고59), 다음으로 지관(止觀)과 선액(善 )을 없애는 데에60) 다섯 가지의 법(法)이 있으니, 말하자면 제 욕(欲)에 대하여 마음으로 애염(愛染)을 내는
  
  
58) 5간(慳)으로서 처간(處慳) 가간(家慳) 시물간(施物慳) 칭찬간(稱讚慳) 법간(法慳)을 말한다. 뒤의 기술에 순차(順次)대로 배대하면 된다.
59)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의 2개(蓋)에 의하여 정계(淨戒)과 다문(多聞)을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60) 혼침(惛沈) 수면개(睡眠蓋)와 도거(掉擧) 악작개(惡作蓋)의 2개(蓋)에 의하여 지관(止觀)을 결감하게 하며, 의개(疑蓋)에 의하여 선액(善 )을 없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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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61)이며, 능히 깨달음을 일으키고[覺發] 기억[憶念]하고 교수(敎授)하며 교계(敎誡)하는 자한테 마음으로 진에(瞋恚)를 내며 아직 시라(尸羅)를 받지 못한 사람을 그로 하여금 받지 않게 하며 먼저 받았을지라도 후에 버리도록 하는 것이며,62) 혹은 혈(穴)을 뚫는63) 혼침과 수면[惛睡]에 탐착(耽著)하게 하는 것이며,64) 항상 적정(寂靜)하지 않게 염오(染汚)를 추회(追悔)하는 것이며,65) 항상 의혹(疑惑)을 품고, 들었던 법[所聞法]에 대하여 능히 영수(領受)하지 않고 비록 처음에 영수(領受)하더라도 곧바로 망실(忘失)하는 것이며66), 비록 망실하지 않을지라도 결정(決定)을 증득하지 않게 하는 것67)이다.
  또한 두 가지의 하분(下分)이 있으니, 말하자면 견도(見道)는 수도(修道)의 하분(下分)이며, 욕계(欲界)는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하분(下分)인데, 이 두 가지의 하분에 의해서 5하분결(下分結)를 설하는 것이다. 처음의 하분(下分)68)에 의하여 살가야견(薩迦耶見) 계금취(戒禁取) 의(疑)를 설하는 것이며, 두 번째의 하분(下分)69)에 의하여 탐욕(貪欲)과 진에(瞋恚)를 설하는 것이다.
  또한 두 가지의 상분(上分)이 있으니,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상분(上分)에 의하여 5상분결(上分結)을 설하는 것이다. 혹은 차별(差別)이 없는 결(結)이 있으니, 색탐(色貪)과 무색탐(無色貪)을 말하며, 혹은 차별(差別)이 있는 결(結)이 있으니, 애상정려자(愛上靜慮者)의 도거[掉]와 만상정려자(慢上靜慮者)의 만(慢)과 무명상정려자(無明上靜慮者)의 무명(無明)을 말한다.
  또한 믿고 공경[信敬]하지 않는 것을 집지(執持)하는 자에게는 마음이 조유(調柔)하지 않고 제 선근(善根)의 근본[本]을 능히 키우지 않는 데에 다섯
  
  
61) 탐욕개(貪欲蓋)이다.
62) 진에개(瞋恚蓋)이다.
63) 마음이 혼매(惛昧)한 것을 형용(形容)하는 말이다.
64) 혼침(惛沈) 수면개(睡眠蓋)이다.
65) 도거(掉擧) 악작개(惡作蓋)이다.
66) 도거(掉擧) 악작개(惡作蓋)이다.
67) 의개(疑蓋)이다.
68) 견도(見道)를 말한다.
69) 욕계(欲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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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대사(大師)께서 설한 정법(正法)과, 증상계학(增上戒學)과, 증상심학(增上心學)과, 증상혜학(增上慧學)에 대해서 그리고 정각(正覺)을 일으킨 자와 바르게 교수하는 자[正敎授者]와 바르게 교계하는 자[正敎誡者]와 더불어 범행(梵行)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믿음과 공경을 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번뇌(煩惱)를 끊기 위하여 정정진(正靜進)하는 데에 다섯 가지의 장애[障]가 있으니, 첫째는 등지(等至)와 생(生)에 탐착(耽著)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에 탐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방일(放逸)이며, 넷째는 악혜(惡慧)이며, 다섯째는 하열(下劣)하거나 증상(增上)하는 그 마음의 만(慢)이다.
  다시 능히 감인(堪忍)하지 않는 어떤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다른 원적(怨敵)한테 다섯 가지의 사행(邪行)을 일으킨다. 감인하지 않는 자는 다른 원적(怨敵)에 대하여 먼저 진심(瞋心)과 원한과 혐오[怨嫌]의 의요(意樂)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 친한 벗에 대하여 파괴(破壞)하는 것을 락욕(樂欲)하는 것이며, 항상 그에게 우고(憂苦)를 일으키려고 하여 널리 모든 불요익(不饒益)의 일[事]를 짓는 것이며, 스스로 받은[所受] 청정한 시라(尸羅)를 파괴하는 것이며, 신(身) 어(語) 의(意)로 많은 악행(惡行)을 행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의 악하고 삿된 행을 행하기 때문에 능히 후세(後世)에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두 가지의 등류(等流)의 과환(過患)을 부르니, 한 가지는 현법등류(現法等流)의 과환(過患)이며, 또 한가지는 후법이숙(後法異熟)의 과환(過患)이다. 말하자면 이 생 가운데에 원적(怨敵)들이 많고, 친한 벗과 분리[乖離]되며, 다른 사람 때문에 갖가지 우고(憂苦)를 일으켜서 불가애(不可愛)의 일[事]이 항상 현재전(現在前)하며,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많은 우회(憂悔)를 일으키며, 목숨이 끊어지고 난 후에는 악취(惡趣)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여 능히 감인(堪忍)하는 자는 다른 원적(怨敵)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정행(正行)을 일으킨다. 이것에 의하여 부르게 되는 승리(勝利)의 차별(差別)은 상응하는 것과 같이 알아야만 한다.
  능히 현법(現法)과 후법(後法)의 일체(一切)의 우고(憂苦)를 생기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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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가지의 법이 있다. 첫째는 친속(親屬)70)이 멸망하는 것이며, 둘째는 소유한 재보(財寶)를 도리에 맞지 않게 상실(喪失)하는 것이며, 셋째는 질병(疾病)에 몸이 연(緣)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는 능히 현법(現法)의 우고(憂苦)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시라(尸羅)를 훼범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일체를 훼방(毁謗)하는 여러 가지 악하고 삿된 견해[惡邪見]인데, 이 두 가지는 능히 후법(後法)의 우고(憂苦)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다섯 가지의 법은 현법(現法)과 후법(後法)의 모든 희락(喜樂)을 능히 생기게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아라한(阿羅漢)은 현재 몸을 돕는 재물(財物)을 추구(追求)하고 또한 항상 수용(受用)하더라도 능히 세 가지의 삿된 추구(追求)와 두 가지의 삿된 수용(受用)을 뛰어넘는다. 능히 살생(殺生)과 투도(偸盜)와 망어(妄語)에서 끌어당기는 세 가지의 삿된 추구(追求)를 벗어나며, 또한 능히 처첩(妻妾)과 축적(蓄積)의 두 가지의 삿된 수용(受用)을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단(斷)을 닦는 자가 다섯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그 바라는 바에 따라서 제 선품(善品)에 대하여 방편(方便)으로 수행(修行)하며 또한 능히 구경(究竟)의 통혜(通慧)를 속히 증득한다. 첫째는 닦는 바 단(斷)에 대하여 맹리하게 락욕(樂欲)하고 가르침[敎] 그대로 봉행(奉行)하는 것이며, 둘째는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하여 여실(如實)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셋째는 몸의 체력[身力]이 건강[康强]한 것이며, 넷째는 끊임없이 상속(相續)하며 방편(方便)을 닦는 가운데에 그 마음이 용맹[勇銳]한 것이며, 다섯째는 지(止) 거(擧) 사(捨)의 상(相)과 시절[時] 분위[分]에 통달하는 지혜(智慧)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능히 해탈(解脫)을 원만히 하고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을 염리(厭離)하는 다섯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제 법(法)에 대하여 세 가지의 어리석음[愚]이 있으면 이것이 의지(依止)가 되어서 세 가지의 전도(顚倒)를 일으키는데, 세 가지의 어리석음[愚]이란 첫째는 시절(時節)의 어리석음[愚]이며 둘째는 분위(分位)의 어리석음[愚]이며 셋째는 자성(自性)의 어리석음
  
  
70) 친족(親族)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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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愚]이다. 세 가지의 전도(顚倒)란 첫째는 무상(無常)에 대하여 항상하는 것[常]이라고 계탁[計]하는 전도(顚倒)이며 둘째는 괴로움[苦]에 대하여 즐거움[樂]이라고 계탁[計]하는 전도(顚倒)이며 셋째는 무아(無我)에 대하여 아(我)라고 계탁[計]하는 전도(顚倒)이다. 그리고 이익[利養]을 엿보고[規求] 수명(壽命)을 희망(希望)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대채해야 할 법[所治法]을 대치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취상(取相)을 일으키니, 말하자면 제 법(法)에 대하여 무상상(無常相)을 취하고 또한 고상(苦相)을 취하며 제 법(法)에 대하여 무아상(無我相)을 취하고 음식(飮食)에 대하여 악역상(惡逆相)71)을 취하고 그 명근(命根)에 대하여 중요상(中夭相)72)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정(定)을 닦고 지(智)를 닦는 두 승행자(勝行者)가 바른 심해탈(心解脫)을 키우는[生長] 문(門)에 다섯 가지가73) 있다. 정(定)의 승행자(勝行者)는 진리[諦]에 의거한 성언론(聖言論)을 들은 것을 따르기[因] 때문에 법의(法義)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正解]이며, 청문(聽聞)에 따르는 것과 같이 광대(廣大)한 소리로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며, 타인(他人)을 위하여 묘의(妙義)를 여는 것[開闡]을 따르는 것이며, 공한처(空閑處)에 있으면서 자세히 진리[諦]를 사유(思惟)하고 법의(法義)를 바르게 이해[正解]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지(智)의 승행자(勝行者)가 상품(上品)의 산란[亂]한 탐욕(貪欲)에 대하여 대치(對治)하여 전도 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또한 관행(觀行)을 닦는 자가 의요(意樂)와 방편(方便)을 모두 구족(具足)하는 데에 다섯 가지74)가 있다. 말하자면 열반(涅槃)과 보리(菩堤)에 대하여 맹리한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을 의요(意樂)의 구족(具足)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끊임없이[無間] 은중(殷重)하게 정지(正智)를 수습(修習)하고 사
  
  
71) 악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상(相)이다.
72) 살아있는 도중에 일찍 죽는다고 생각하는 상(相)이다.
73) 정(定)의 승행자(勝行者)의 네 가지의 문(門)과 지(智)의 승행자(勝行者)의 한 가지 문(門)을 합하여 다섯 가지가 되는 것이다.
74) 열반(涅槃) 보리(菩提) 정지(正智) 사마타(奢摩他)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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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행하는 것을 방편(方便)의 구족(具足)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제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애(愛)과 비애(非愛)의 업과(業果) 이숙(異熟)을 받게 하며 몸[身]과 마음[心]을 괴롭혀서[煩惱] 모든 뭇 괴로움을 거두어들이는[攝]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고(苦) 낙(樂) 우(憂) 희(喜) 사(捨)를 말한다.
  또한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의요(意樂)와 방편(方便)을 성취하고 모두 다 구족하여 불퇴전(不退轉)하기 때문에 관행자(觀行者)로 하여금 속히 성제현관(聖諦現觀)을 증득하게 하며 또한 여러 가지의 뛰어난 선품(善品)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었지만 아직 나머지 결(結)을 다하지 못한 유학[學]의 생(生)에는 다섯 가지75)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중유(中有)에 머물러서 곧 능히 끝내[究竟]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며, 둘째는 초정려(初靜慮)에 처음 생(生)을 받고 나서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생(生)을 받고 난 이후에 적은 공력(功力)을 써서 성도(聖道)가 현전(現前)하여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며, 넷째는 많은 공력(功力)을 써서 성도(聖道)가 현전(現前)하여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며, 다섯째는 색계(色界)의 변제(邊際)76) 내지 색구경(色究竟)에서 반열반(般涅槃)을 얻고 혹은 무색계(無色界)의 변제(邊際) 내지 유정(有頂)에서 끝내[究竟]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다.
  또한 제 4정려(靜慮)를 섞어서 닦는[雜修] 과(果)로서 불환(不還)을 얻은 자에게는 다섯 가지77)의 생지(生地)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하품(下品)의 정려과(靜慮果)의 생지(生地)이며, 둘째는 중품(中品)의 정려과(靜慮果)의 생
  
  
75) 중반(中般) 생반(生般) 무행반(無行般) 유행반(有行般) 상류반(上流般)의 5종(種)의 불환과(不還果)를 말한다.
76) 변제(邊際)의 본래 뜻은 구경(究竟)으로서 끝나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근처의 주변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77) 색계(色界)의 제 4정려(靜慮) 가운데 무번(無煩) 무열(無熱) 선견(善見) 선현(善現) 색구경(色究竟)의 5정거천(淨居天)으로서 이는 불환과(不還果)의 성자(聖者)가 태어나는데에 있어서 과보(果報)의 차별(差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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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生地)이며, 셋째는 상품(上品)의 정려과(靜慮果)의 생지(生地)이며, 넷째는 상승품(上勝品)의 정려과(靜慮果)의 생지(生地)이며, 다섯째는 상극품(上極品)의 정려과(靜慮果)의 생지(生地)이다.
  또한 능히 3계(界)의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끝내[究竟] 결정(決定)하게 하는 다섯 가지의 관행을 닦는 자의 관찰작의(觀察作意)가 있다. 말하자면 매우 두텁게[深厚] 욕상(欲相)을 억념(憶念)하고 분별(分別)하고 사유(思惟)할지라도, 제 욕(欲)에 대하여 이에 취입(趣入)하지 않고, 자유자재로[任運] 마음을 평등히[捨心] 하여, 이욕(離欲)의 상(相)에 대하여 홀연히[率爾] 사유하고, 곧바로 능히 자유자재하게 그 마음으로 취입(趣入)하는 것이다. 욕(欲)과 이욕(離欲)의 상(相)에서와 같이, 이와 같이 에(恚) 무에(無恚)의 상(相)과, 해(害) 무해(無害)의 상(相)과, 색등지(色等至)에서 생기는 상(相)과 무색등지(無色等至)에서 생기는 상(相)과 열반(涅槃)의 상(相)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미 다섯 종류로 되는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를 설하였다.
  다음에78) 여섯 종류에 대하여 설하겠다.
  아(我) 유정(有情) 명자(命者) 견(見) 등에 떨어져 있는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무아(無我)에 취입(趣入)하게 하기 위하여, 여섯 가지의 상(相)에 의하여 아소의사(我所依事)의 차별(差別)79) 경계사(境界事)의 차별80) 자성사(自性事)의 차별 수용인사(受用因事)의 차별81) 수용사(受用事)의 차별82) 수설사(隨說事)의 차별83) 작용사(作用事)의 차별84) 희망사(希望事)의 차별85)인 여덟 가지의 유정사(有情事)의 차별(差別)을 선설(宣說)하는
  
  
78)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여섯 번째로 법수(法數)가 육(六)으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62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79) 6근(根)을 말한다.
80) 6경(境)을 말한다.
81) 수(受)의 인(因)이므로 6촉(觸)을 말한다.
82) 6수(受)를 말한다.
83) 언설(言說)의 인(因)이므로 6상(想)을 말한다.
84) 6사신(思身)을 말한다.
85) 6애신(愛身)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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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사(事)의 차별에 대하여 아직 잘 순숙(純熟)하지 않으면서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곧바로 아(我)가 있다고 말하고, 안(眼) 등의 근(根)에 의하여 색(色) 등의 경(境)에 대해서 촉(觸)과 수(受)에 의하여 갖가지로 수용(受用)하고, 이와 같은 명(名)과 이와 같은 종(種)과 이와 같은 성(姓)과 이와 같은 식(食)이 있다고 하고, 자타(自他)를 따라서 언설(言說)을 일으키고, 일체법(一切法)과 비법(非法)의 행(行)을 조작(造作)하고, 가애(可愛)의 사(事)에 대해서는 화합하고 오래 머무르며[久住] 증익하길 희망(希望)하고, 불가애(不可愛)의 사(事)에 대해서는 화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손감(損減)하길 희망(希望)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사(事)의 차별에 대하여 이미 잘 순숙(純熟)하면서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이 때 망계(妄計)가 모두 다 생기게 되지 않는다.
  또한 3보(寶)와 3학(學)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의 경멸(輕 )하는 것86)이 있다. 능히 선법(善法)으로 하여금 어떤 경우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물러나게 하며, 어떤 경우는 이미 얻은 것을 물러나게 하며, 불(佛)의 성교(聖敎)를 버리고 내지 작은 믿음[微信]도 또한 모두 잃게하는 것[退失]이다. 불(佛) 법(法) 승보(僧寶)와 증상계학(增上戒學) 증상심학(增上心學)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악우(惡友)에 의하기 때문에 증상(增上)의 심(心) 혜(慧)에 대해서 삿되고 편벽된 교계(敎誡) 교수(敎授)를 얻게끔 하며, 악어(惡語)에 의하기 때문에 전혀 얻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는 삿되고 편벽함[邪婬]과 얻는 것이 없는 것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법(善法)을 잃게 된다. 이것과 상위하는 것이 백품(白品)의 여섯 가지 법(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유정심(有情心)이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不如理作意]와 함께 작용하며 색(色) 등의 경(境)에 대하여 여섯 가지의 탐(貪)에 의지처가 되는[所依處] 평등한 분위(分位)가 있다. 탐(貪)에 의지처가 되는 평등한 분위(分位)와 같이, 이와 같이 진(瞋)에 의지처가 되는 불평등(不平等)의 분위(分位)
  
  
86) 3보(寶)를 믿지 않는 것과 3학(學)을 배우지 않는 것을 합하여 여섯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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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치(癡)에 의지처가 되는 비평등(非平等)의 분위(分位)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굴러서 스스로의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가지의 최극청정(最極淸淨)87)이 있다. 제일(第一)의 구경(究竟)으로서 끊임없이[無間] 결함도 없이[無缺] 염오(染汚)도 없이 항상 평등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행하거나[行] 머무를[住] 경우에 눈으로 인식되는 색[眼所識色] 내지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意所識法]에 대하여 항상 평등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또한 제 색근(色根)과 소의처(所依處)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의지하는 데[所依止]에 장애(障礙)함이 없이 인도(引導)하고 안양(安養)하며 이런 저런 생긴 것[彼彼生]에 대하여 자재(自在)하며 구르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있다. 4대종(大種)과 공계(空界)와 식계(識界)를 말한다.
  이와 같은 식계(識界)는 능히 현재에 복(福)과 비복(非福)의 업(業)을 모으고 지녀서 능히 미래[當來]의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果)를 이끌며, 또한 식(識)이 의지하게 되는[所依止] 다섯 가지의 색근(色根) 및 소의처(所依處)88)를 집지(執持)하여 헐고 없어지지[爛壞] 않게끔 한다. 또한 현법(現法)에 의하여 다음 다음에 생기게 되는 식(識)의 자재력(自在力)은 제 유정(有情)을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업(業)에 차별적으로 구르게끔 한다.
  다시 제 수행자(修行者)가 가히 초월(超越)하기 어려운 3처(處)가 있으니, 첫째는 욕탐(欲貪) 에(恚) 해(害)의 불락(不樂)의 하계(下界)에 포함되는 것을 초월(超越)하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행상(一切行相)의 현행(現行)을 초월하는 것이며, 셋째는 유정(有頂)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초월하기 어려운 곳[處]을 초월하는 것은 여섯 가지의 무상(無上)89)에 의하여 대치(對治)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4무량(無量)은 처음 것의 대치이며,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는 두 번
  
  
87) 6항주(恒住)를 말한다.
88) 의근(意根)을 말한다.
89) 4무량(無量)과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와 아만(我慢)을 영원히 다하는 것[永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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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째 것의 대치이며, 아만(我慢)을 영원히 다하는 것은 세 번째 것의 대치이다. 이와 같은 대치해야 할 것[所對治]을 영원것[覆藏]이며, 셋째는 같은 부류[等類]에게 이익[利養]을 받고서 자기의 소것[欺誑]이며, 다섯째는 학처(學處)를 거스르는 것[違越]이며, 여섯째는 법(法)과 의(義)에 대하여 전도(顚倒)하여 집착(執著)하는 것이다.
  유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의복(衣服) 등에 대하여 다시 서로 속이는 또한 위와 히 해치기 때문에 제 삼마지(三摩地)는 모두 다 원만하게 성취하며[成滿], 잘 대치(對治)를 닦기 때문에 소대치(所對治)를 해쳐서 그것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다시는 현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아만(我慢)을 끊은 자는 끝내 그 아(我)가 되지 않고 구경(究竟)하는 것인가, 구경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이와 같은 의혹(疑惑)의 전(纏)에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의혹(疑惑)이 있으면 반드시 아만(我慢)을 여의지 못하고, 만약 아만(我慢)을 여의면 반드시 의혹(疑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다툼[諍]의 근본이 되는 것[根本處]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전전상위(展轉相違)하면서 불여의(不如意)를 짓는 것이며, 둘째는 제 악(惡)을 덮고 감추는 같은 다툼[諍]의 근본이 되는 것을 능히 끊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있다. 자심(慈心)에서 일으키게 되는 신(身) 어(語) 의업(意業)은 처음의 것과 두 번째의 것을 능히 끊으며, 같이[同] 이익[利養]을 받는 것은 세 번째 것과 네 번째 것을 능히 끊으며, 같이 시라(尸羅)에 나아가는 것은 다섯 번째의 것을 능히 끊으며, 같이 정견(正見)에 나아가는 것은 여섯 번째의 것을 능히 끊는다.
  또한 일체의 모든 수행자(修行者)의 위덕(威德)과 구경(究竟)을 포함할 수 있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있다. 신경(神境) 천이(天耳) 숙주(宿住) 타심(他心) 생사지통(生死智通)은 능히 위덕(威德)에 포함되는 것이며, 누진지통(漏盡智通)은 능히 구경(究竟)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을 얻지 못한 보특가라(補特伽羅)에게는 간략하게 제현관(諦現觀)을 능히 장애하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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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90) 세 가지의 우치(愚癡)91)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세 가지의 전도(顚倒)92)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익[利養]을 엿보고, 수명(壽命)을 희망(悕望)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의 차별(差別)이란 악견(惡見) 악문(惡聞) 악설(惡說) 악분별처(惡分別處)에 수순하는 법(法)에 대하여 악견(惡見) 악문(惡聞) 악설(惡說) 악분별사(惡分別事)를 희락(喜樂)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희락(喜樂)은 아직 성제현관(聖諦現觀)을 얻지 않는 이생심(異生心)에게 가장 흔들리게[漂動] 할 수 있는 것이며 매우 장애(障礙)하는 것이다.
  성자(聖者)에게는 그렇지 않아서 그러므로 이것을 명분(明分)93)에 넣어 설하는 것이며, 해탈성숙분(解脫成熟分)94)에 넣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능히 장애하는 법[能障礙法]을 대치하는 것이 여섯 가지의 바른 취상[正取相]인 줄 알아야만 한다.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은 다섯 가지의 취상(取相)95) 및 일체세간(一切世間)의 불가락(不可樂)의 취상(取相)을 말한다.
  또한 두 가지의 구족수념(具足隨念)에는 능히 마음이 사라지는 제 수행자(修行者)로 하여금 곧바로 그 마음을 책려하고 환희(歡喜)를 생기게끔 하는 여섯 가지 행(行)96)의 차별이 있다. 말하자면 귀의구족수념(歸依具足隨念)에 세 가지가 있으며, 증구족수념(證具足隨念)에 세 가지가 있다.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한 수념(隨念)의 행(行)을 귀의수념(歸依隨念)이라고 이름하며, 열반(涅槃)에 나아가는 행(行)97)과 자재(資財)로 나아가는 행(行)98)
  
  
90) 3전도(顚倒)를 일으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것들이며, 이익[利養]을 엿보는 것이 네 번째 것이며, 수명(壽命)을 희망하는 것이 다섯 번째 것이며, 차별의 내용이 여섯 번째의 것이다.
91) 시절(時節) 분위(分位) 자성(自性)의 3우(愚)를 가리킨다.
92) 상(常) 낙(樂) 아(我)를 가리킨다.
93) 자량도(資糧道)를 말한다.
94) 가행도(加行道)를 말한다.
95) 무상상(無常相) 고상(苦相) 무아상(無我相) 식악역상(食惡逆相) 명중요상(命中夭相)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96) 6행(行)이란 불(佛) 법(法) 승(僧) 시(施) 계(戒) 천(天)의 6염(念)을 말한다.
97) 지계(持戒)를 의미한다.
98) 보시(布施)의 행(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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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천(生天)에 나아가는 행(行)99)에 대한 수념행(隨念行)을 증수념(證隨念)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무상(無上)이라고 세우고 일체의 제 외도(外道)와 함께하지 않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있다. 말하자면 대사(大師)를 뵈옵고 정법(正法)을 듣는 것과 정신(淨信)을 얻는 것과 일체의 모든 학처(學處)를 따라서 배우는 것과 '불(佛) 세존께서는 정등각자(正等覺者)이시며 능히 일체법(一切法)을 설하신다 ……'고 말하는 대사한테서[大師所] 수념(隨念)의 행(行)을 일으키는 것과 또한 대사에게 신(身) 어행(語行)으로써 받들어 모시고[承事] 공양(供養)하는 것이다.
  또한 능히 탐애(貪愛)을 다하기 위하여 관행(觀行)을 닦는 자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나는 지금 여전히 탐애가 있고 탐애가 없지 않다'고 증지(證知)하게 하는 여섯 가지의 법(法)이 있다. 색경(色境)으로부터 법경(法境)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을 묶어서 거두는 것[繫攝]이다.
  또한 여섯 가지의 인연(因緣)100) 때문에 실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제 업(業)이지 종가성(種家姓)으로써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줄 알아야만 한다. 하열(下劣)한 종성(種姓)의 보특가라(補特伽羅)도 불선(不善)을 낳으면 악취(惡趣)에 가고, 또한 선업(善業)을 낳으면 선취(善趣)에 가며, 또한 현법(現法)에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며, 존귀하고 뛰어난 종성[貴勝種姓]의 세 가지 또한 그러하다.
  여섯 가지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에 대해서 설하였다.
  다음으로 일곱 가지101)에 대해서 설하겠다.
  능히 여러 가지 진리[諦]에 대해서 여실하게 깨달아서 원만히 해탈하는 데에 일곱 가지 법(法)이 있으니,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에 첫째 택법(擇法),
  
  
99) 수정(修定)을 의미한다.
100) 하열종성(下劣種姓)의 세 가지와 귀승종성(貴勝種姓)의 세 가지를 합한 것을 말한다.
101) 내명처(內明處)를 해석하는 네 가지 부분[門] 가운데에 네 번째로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의 상(相)에 대하여 10부분[門]으로 밝힌다. 이하는 10부분 가운데의 일곱 번째로 법수(法數)가 칠(七)로 시작되는 법문(法門)에 대하여 15가지의 대법(對法)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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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정진(精進), 셋째 희(喜)의 세 가지가 있으며, 사마타품(奢摩他品)에 또한 첫째 안(安), 둘째 삼마지(三摩地), 셋째 사(捨)의 세 가지가 있고, 염(念)은 두 가지 품(品)에 통하는 것이다.
  또한 근(根) 때문에, 과(果) 때문에, 해탈(解脫) 때문에 일곱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를 건립하는 것이다. 향도(向道)102)에서는 둔근기[鈍根]와 이근기[利根]에 의하기 때문에 수신(隨信)과 수법행(隨法行)을 건립하며, 과도(果道)103)에서는 곧 이 두 가지를 신해탈(信解脫)과 견도(見到)라고 이름한다. 정장(定障)104)을 해탈하지만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하지는 않기 때문에 신증(信證)을 건립하며,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하고 정장(定障)을 해탈하지 않기 때문에 혜해탈(慧解脫)을 건립하며, 정장(定障)과 번뇌장(煩惱障)을 모두 해탈하기 때문에 구분해탈(俱分解脫)을 건립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인연과 일곱 가지 행(行) 때문에 수행자로 하여금 마음에 내정(內定)을 얻게 하고 마음을 하나의 연(緣)에 바르게 두게 하는 것이다. 취입(趣入)과 안주(安住)와 섭수(攝受)의 인연(因緣)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반드시 시여(施與) 등의 행(行)이 있다고 훤히 아는 세간의 정견(正見)과 이것에 의지하여 거가(居家)105)를 다그쳐서[迫 ] 거가(居家)는 진염(塵染) 등의 행(行)이라고 훤히 알고 출리(出離)에서 끌어당기는 정사유(正思惟)를 취입(趣入)의 인연(因緣)이라고 이름하며, 이미 취입(趣入)하고 나서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을 수지(受持)하는 것을 안주(安住)의 인연(因緣)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취입(趣入)의 인연(因緣)과 안주(安住)의 인연(因緣)과 뒤의 방편작의(方便作意)의 수행에 있어서 모든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을 섭수(攝受)의 인연(因緣)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세간(世間)의 재(財)106)를 즐겨 구하는 자는 낙(樂)을 얻기 위하여 비록 즐겨 일체(一切)의 범재(凡財)를 적집할지라도 아직은 능히 일곱 가지의 성재(聖財)107)에서 생겨나는 낙(樂)은 얻을 수가 없다.
  
  
102) 4사문향(沙門向)의 도(道)를 말한다.
103) 4사문과(沙門果)의 도(道)를 말한다.
104) 선정(禪定)의 장애이다.
105) 재가(在家)를 말한다.
106)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을 의미한다.
107) 신(信) 계(戒) 참(慚) 괴(愧) 문(聞) 사(捨) 혜(慧)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本論) 제 5권에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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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信)과 함께 작용하는 청정(淸淨)의 낙(樂)과 선취(善趣)에 태어나서 일어나게 되는 낙(樂)과 스스로의 묘호(妙好)108)를 돌아봐서 제 악(惡)을 행하지 않고 후회[追悔]하지 않아서 생기게 되는 낙(樂)과 타인의 비방과 헐뜯음을 돌아보고 제 악(惡)을 행하지 않고 후회[追悔]하지 않으므로 생기게 되는 낙(樂)과 법(法)과 의(義)에 대해서 정해(正解)109)와 함께 작용하는데서 생기게 되는 낙(樂)과 후세(後世)의 자재(資財)가 모자라는 것이 없는데서 생기게 되는 낙(樂)과 승의제(勝義諦)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깨달아서[覺悟] 생기게 되는 낙(樂)을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은 무량(無量) 무변(無邊)의 무죄(無罪)의 낙(樂)이다.
  세간(世間)의 재(財)를 즐겨 구하고 모으는 자는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현법(現法)의 자재(資財)에 모자람이 없는데서 생기게 되는 유죄(有罪)의 망상(妄想)의 낙(樂)만을 얻을 뿐이다.
  또한 일곱 가지 마혹품(魔惑品)의 힘[力]이 있다. 첫째는 성교(聖敎)를 미워하는 것[憎嫉]이고, 둘째는 능히 악취(惡趣)에 나아가서 악행(惡行)을 현행(現行)하는 것이며, 셋째는 스스로의 묘호(妙好)를 돌아보지 않는 장애법[障法]을 즐겨 익히는 것이며, 넷째는 타인의 비방과 헐뜯음을 돌아보지 않아서 장애법을 즐겨 수습(修習)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선(善) 불선(不善)과 유죄(有罪) 무죄(無罪)와 열(劣) 승(勝)과 흑(黑) 백(白)과 연기(緣起)를 자세히 분별(分別)하는 법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解了] 못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인색하고 더럽고 낡은 마음[慳垢弊心]으로 뭇 도구[具]를 모으는 것이며, 일곱째는 지혜가 협소하고 열등하여 어리석음[愚癡]을 증장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마혹품(魔惑品)의 힘[力]을 항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성스런 법(法)과 율(律)의 신(信) 등의 7력(力)110)인 줄 알아야만 한다.
  
  
108) 절묘한 것을 의미한다.
109) 일반적으로 정해(正解)라고 하면 정각(正覺)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110) 7성재(聖財)의 력(力)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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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일곱 가지의 제일의(第一義)의 법(法)인 열반(涅槃)으로 대치해야 할 법[所對治法]이 있어서 능히 정법(正法)으로 하여금 쇠퇴하고 은몰(隱沒)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법(法)은 세 가지의 쇠손(衰損)에 포함되는데, 수용쇠손(受用衰損)과 증상의요쇠손(增上意樂衰損)과 방편쇠손(方便衰損)을 말한다.
  의복(衣服) 등에 대해서 묘호(妙好)를 즐겨 구하며, 많이 구하기를 락욕(樂欲)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게 되는 갖가지 수용(受用)을 수용쇠손(受用衰損)이라고 이름하며, 도(道)와 도과(道果)인 열반(涅槃)에 대해서 마음으로 신해(信解)하지 않음을 증상의요쇠손(增上意樂衰損)이라고 이름하며, 해태(懈怠)와 실념(失念)과 심란(心亂)과 악혜(惡慧)를 방편쇠손(方便衰損)이라고 이름한다.
  수용쇠손(受用衰損)이란 탐(貪)의 불선근(不善根)의 품류(品類)이며, 의요(意樂) 방편쇠손(方便衰損)은 치(癡)의 불선근(不善根)의 품류(品類)이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은 곧 백품(白品)의 7법(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능히 정법(正法)을 물러나지 않게 하고 머물게 하는 일곱 가지 제일의(第一義)의 법인 열반품(涅槃品)의 법(法)이 있다. 첫째는 문소성(聞所成)의 혜(慧)이며, 둘째는 사소성(思所成)의 혜(慧)이며, 셋째는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이며, 넷째는 악연(惡緣) 때문에 의지(依止)를 해치지[侵損]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바르게 재법(財法)을 구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것이며, 일곱째는 공양할만하고 공양하지 않을 만한 보특가라에 대해서 능히 잘 '이는 공양할만하다', '이는 공양할만하지 않다'라고 간택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문혜(聞慧)에 의하기 때문에 미요의(未了義)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이해하며[解了], 사혜(思慧)에 의하기 때문에 잘 결정하지 않은 의[未善決定義]에 대해서 능히 잘 사유(思惟)하며, 수혜(修慧)에 의하기 때문에 제 번뇌를 끊으며, 악연(惡緣)으로 의지(依止)를 해치지[侵損] 않기 때문에 수단(修斷)을 감능(堪能)하며, 바르게 재법(財法)을 구하기 때문에 속히 통혜(通慧)를 증득하며, 증상만(增上慢)이 없기 때문에 하품(下品)에서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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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한 것에 대해서 희족(喜足)을 내지 않으며, 능히 잘 보특가라를 간택(簡擇)하기 때문에 제 세간의 지혜와 큰복을 가진 자[諸世智大福者] 등에 대해서 즐겨 친근하지 않고 또한 공양하지 않으며, 소욕자(少欲者) 등에게만 즐겨 친근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또한 제 유정(有情)의 종류가 생을 받는[受生] 처소에 일곱 가지가 있다. 그 처소에서 생(生)을 받는 유정(有情)은 제 식(識)이 현전하여 상속하여 머무르는데, 3계(界) 가운데에 악취(惡趣)와 무상(無想)의 유정(有情)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제외된다. 악취(惡趣)에서는 매우 혐오하는 것[厭]만 있기 때문에 식주(識住)를 건립하지 않는 것이며, 무상(無想)의 유정(有情)은 한결같이 전식(轉識)이 현행(現行)하지 않기 때문에 식주(識住)를 건립하지 않는 것이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행(行)과 불행(不行)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식주(識住)를 건립하지 않는 것이다.
  신(身)의 다른 부류[異類]이기 때문에 종종신(種種身)이라고 이름하며, 상(想)의 다른 부류이기 때문에 종종상(種種想)이라고 이름하며, 이것과 상위(相違)한 것은 일종신(一種身) 일종상(一種想)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생겨나는 신형(身形)과 갖가지 색상(色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범세(梵世) 이하는 신형(身形)에 있어서 다른 부류이다. 범세(梵世)에서 처음 몸을 받을 때에 그곳에 여러 범중(梵衆)들은 모두 '우리들은 모두 대범(大梵)의 소생(所生)이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 때에 범왕(梵王) 또한 '이 제 범중(梵衆)은 모두 나의 소생(所生)이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은 그러한 생각은 다른 종류에는 있는 것이 아니다. 제 2정려(靜慮) 이상의 모든 제 천(天)에는 몸의 광명[身光]이 똑같이 비추기 때문에 일종신(一種身)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광음천중(光陰天衆)의 선후(先後)에 태어나는 자는 범세(梵世)가 맹렬히 불타오르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이때 곧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의 상(想)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도 다른 종류의 상(想)이 있다.
  또한 두루 일체의 번뇌품(煩惱品)의 추중(麤重)을 포함하는 제 유정(有情)의 일곱 가지 추중(麤重)이 있다. 열계(劣界)의 탐(貪) 진품(瞋品)의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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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麤重)과 중계(中界) 묘계(妙界)의 탐품(貪品)의 추중(麤重)과 열(劣) 중(中) 묘계(妙界)의 만(慢)과 무명(無明)과 견(見)과 의(疑)의 품(品)의 추중(麤重)을 말한다.
  또한 외도(外道)의 악설(惡說)의 법(法)과 율(律)에는 일곱 가지의 과실(過失), 즉 해(解)의 과실(過失)과 행(行)의 과실(過失)과 의지(依止)의 과실(過失)과 사유(思惟)의 과실(過失)과 공용(功用)의 과실(過失)과 증상심(增上心)의 과실(過失)과 증상혜(增上慧)의 과실(過失)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그 외도(外道)들은 비록 법(法)에 대해서 적게 청문(聽聞)하고 수지(受持)할지라도 항상 4전도(顚倒)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무릇 언론(言論)을 일으키고 오로지 남을 헐뜯기 위해서, 그리고 비난[徵難]을 벗어나기 위한 것을 승리(勝利)로 삼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겨나는 이해[解]는 모두 과실(過失)이 있다. 받은 금계(禁戒)가 삿된 규범[邪範]과 삿된 생활[邪命]을 섭수(攝受)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출리(出離)를 얻을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다. 받드는 스승과 벗은 오직 전도(顚倒)의 도(道)만을 능히 선설(宣說)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으며, 모든 사유(思惟)는 삿되게 출리(出離)를 구하고 마음을 훼손[損壞]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으며, 모든 공능(功能)은 방편(方便)을 여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다. 그 증상심(增上心)은 망념(忘念)의 애(愛) 만(慢) 무명(無明) 의(疑) 위에 있는 정려(靜慮)에 포함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다. 그 증상혜(增上慧)는 62견(見)으로 손괴(損壞)되기 때문에 또한 과실(過失)이 있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은 선설(善說)의 법(法)과 율(律)에 또한 일곱 가지 과실(過失)이 없는 것[事]인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필추(苾芻)들이 일으키게 되는 위범(違犯)의 쟁사(諍事)로 하여금 그치도록 하는 일곱 가지 법(法)111)이 있다. 나머지는 섭사분(攝事分)에서 설명
  
  
111) 7멸쟁법(滅諍法)을 말한다. 즉 현전비니(現前毘尼)와 억념비니(憶念毘尼)와 불치비니(不癡毘尼)와 자언비니(自言毘尼)와 멱죄상비니(覓罪相毘尼)와 다인멱죄상비니(多人覓罪相毘尼)와 여초부지(如草敷地)이다. 이 7비니(毘尼)는 언쟁(言諍) 멱쟁(覓諍) 범쟁(犯諍) 사쟁(事諍)의 4쟁(諍)을 멸한다. 자세한 것은 율(律)에서 설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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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될 것임을 마땅히 알라. 여기에 일곱 가지의 위범(違犯)의 쟁사(諍事)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첫째는 현전(現前)의 개오(開悟)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事]이며, 둘째는 과거에 실념(失念)한 개오(開悟)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112)이며, 셋째는 자재(自在)롭지 못한 개오(開悟)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이며, 넷째는 심사(尋思)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결택(決擇)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스스로 후회하는 것[自悔]에 대해서 범쟁(犯諍)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인괴(忍愧)를 건립하여 두 무리가 전전(展轉)하며 죄를 들추어 범쟁[諍]하는 것이다.
112) 수행승(修行僧)이 행한 행위가 계율상의 범죄가 되는지 어떤지를 가리는 싸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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