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10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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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10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3. 분별세품 ③
  무명(無明)은 어떠한 뜻인가?
  이를테면 그 자체 '명(明)이 아닌 것[非明]'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안(眼) 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의 뜻은 '명이 없는 것[無明]'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명의 본질은 마땅히 비유(非有)라고 해야 할 것이다.2)
  [무명은] 그 자체로서 실재한다는 뜻과, 그 밖의 다른 뜻으로 변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니
  마치 친구 아닌 이[非親]·비진실[非實]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明所治無明 如非親實等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친구에 반대되는 온갖 원적으로서 친구와 서로
  
  
  
1) 무명이 비명(非明)의 뜻이라면, 명은 바로 5위 75법 가운데 혜(慧)를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혜를 제외한 '안(眼)' 등의 74법은 비명이며, 따 라서 그 모두를 무명이라 해야 한다는 힐난.
2) 만약 무명을 명의 부재[無]라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실유의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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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되는 개념을 '친구 아닌 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친구와는 다른 [모든]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친구의 부재라는 말도 아니다.3) 또한 진리의 말씀[諦語]을 '진실'이라고 이름할 때, 이것에 반대되는 거짓[虛?]의 언어를 일컬어 '비진실'이라고 하니, 이는 진실과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진실의 부재라는 말도 역시 아니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 이라고 말한 것은, 비법(非法), 비의(非義), 비사(非事 : 불선을 말함) 등은 [법이나 의(義)·사(事)와] 그 성질이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재도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4)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도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바로 명(明)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명과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명의 부재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무명이 개별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5)
  '[무명은] 행(行)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진실된 논거[證,경증과 이증]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結) 등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악혜(惡慧)는 [무명이] 아니니, 견(見)이기 때문이며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說爲結等故 非惡慧見故
  與見相應故 說能染慧故
  
  
  
3) 즉 친구(mitra)에 반대되는 원적을 '친구 아닌 이(amitra)'라고 할 때, 그러한 이는 친구 이외의 모든 이를 말하는 것도, 친구의 성질이 부재하는 어떤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듯이, 무명(avidy ) 또한 명(vidy )이 아닌 것도, 명의 속성이 결여된 것도 아닌, 명에 반대되는 실유의 개념이라는 뜻.
4) 이를테면 검은 색을 '흰 색이 아닌 것'이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희지않은 모든 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흰색이 부재하는 그 어떤 색을 의미하 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흰색에 반대되는 검은 색을 말하는 것으로서, 흰색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색이다.
5) 이하 무명의 개별적 실재성을 밝힌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무명을 악혜(惡慧) 즉 염오혜로 이해하여 그것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다시 말해 무명을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명의 부재' 비리작의에서 비롯된 '선혜(善慧)의 결여'로 이해하였는데, 앞서 유부가 '무명은 명의 부재가 아니다'고 한 것도 여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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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무명을 결(結)·박(縛)·수면(隨眠)·누(漏)·액()·폭류(瀑流) 등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 즉 그 밖의 다른 안(眼) 등이나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결'이나 '박' 등의 사(事)가 된다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법[有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7)
  만약 그렇다면 악처자(惡妻子) 즉 아내가 사악할 경우 아내가 없는 것[無妻子]과 같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악혜(惡慧)도 마땅히 무명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명은 아니니, 그것은 바로 견(見)을 갖기 때문이다. 즉 온갖 염오혜를 일컬어 악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다.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견'이 아닌 [염오]혜(이를테면 탐·진·치와 상응하는 혜)를 바로 무명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에 [혜가 아니다]. 무명이 만약 혜(즉 5견 이외의 악혜)라고 한다면, '견'과 상응하지 않을 것이니, 두 가지의 혜와 함께 상응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즉 심·심소의 事平等에 위배됨)
  
  
  
6) 이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결(結, sa yojana)은 유정을 결박시키는 의식작용으로, 애(愛)·에(恚)·만(慢)·무명·견(見)·취(取)·의(疑) ·질결(嫉結) 등 아홉 가지. 박(縛, bandhana)은 속박의 뜻으로, 애탐·진에·무명박 등 세 가지. 수면(anu aya)은 심신의 상속과 함께 증장하며 그것을 항상 계박하는 번뇌로서, 욕탐·진·견·의·만·유탐·무명·수면 등 일곱 가지. 누(漏, srava)는 6근으로부터 누출되어 유정을 3계에 오래 머물게 하 고 해탈로 나아가는 것을 장애하는 의식작용으로, 욕(欲)·유(有)·무명루 등 세 가지. 폭류(ogha)는 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내듯이 유정의 뛰어난 일을 표탈(漂奪)시키는 의식작용으로, 욕·유·견·무명폭류 등 네 가지. 액(, yoga)은 유정을 6취 나 9지(地) 등의 존재로 속박시키는 의식작용으로 내용은 폭류와 같다. 이상의 번뇌론에 대해서는 본론 「수면품」 권제21(p.943 이하)과 권제20(p.934 이하)을 참조할 것.
7) 명(明) 즉 혜를 제외한 일체법 역시 무명(정확히는 非明)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일체법은 '결' 등의 번뇌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은 그와는 다른 별도의 실재라는 뜻.
8) 온갖 악혜 중에는 다섯 가지의 염오혜(즉 5見 : 유신견·변집견·사견·계금취·견취)가 있는데, 이는 판단작용[推度]으로 정의되는 '견(見)'을 본 질로 한다. 즉 염오혜 역시 확인 판단된 것이기 때문이다.(본론 권제2, p.86 '먼저 審慮하고 決度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 한다' 참조) 그러나 무명은 무 지로서 몽매성(蒙昧性)의 작용이기 때문에 판단작용의 '견'과는 다르며, 따라서 악혜와 무명은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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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탐욕은 마음을 오염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9) 즉 혜가 능히 혜 자체를 오염시킬 수는 없으니, 마치 마음과는 다른 존재인 '탐'이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듯이 무명 역시 그것과는 다른 존재인 혜를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온갖 염오혜가 선혜(善慧)와 뒤섞여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설하여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함에도 어찌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바로 탐이 마음을 오염시켜 (즉 탐이 마음과 뒤섞여)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어찌 반드시 [개별적으로] 현기(現起)하여 마음과 상응해야만 비로소 '능히 오염시킨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탐의 힘에 의해 마음이 손박(損縛)되어 해탈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후에 그러한 탐의 훈습이 전멸(轉滅)할 때 마음은 바로 해탈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않게 할지라도 혜와는 상응하지 않으니, 다만 무명에 의해 혜를 손탁(損濁)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분별하면 이치상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10)
  스스로 분별한 바를 누가 능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탐이 마음과 다른 것처럼 혜와는 다른 별도의 무명이 존재하니, 이러한 설이 뛰어난 설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번뇌는 모두 무명이다"고 하였다.11)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동일한 이치로써 비판 부정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온갖 번뇌가 모두 무명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결(結) 등의 번뇌 중에 [무명을] 별도로 설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역시 '견' 등과도 상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12) 또한 역시 '무명이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
  
  
9) 『잡아함경』 권제26 제710경(대정장2, p. 190중) 참조.
10) 보광과 법보 모두 경부(經部)의 구석(求釋)으로 해석한다. 즉 경량부에서는 마음의 오염을 잠재(종자)적 형태로든 현행의 형태로든 무명이 뒤섞인 상태[間雜]로 이해함으로써 무명과 혜는 일대 일로 대응하는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무명을 악혜 즉 염오혜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 이는 경부 이사(異師) 실리라다(室利羅多)의 설이다. 즉 그는 무명을 일체 번뇌의 총명(總名)으로 이해하였다. 유신견 등의 제 번뇌 역시 전도된 견해이기 때문에 무지를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칭우)
12) '견'도 번뇌의 일종이기 때문에 바로 무명의 일종이라 해야 하며, 어떤 존재가 자기 자신과 상응한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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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13) 만약 그러한 경에서 차별시켜 설하였다고 한다면 혜를 오염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차별시켜 설해야지] 총명(總名)으로 설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14)
  무명은 개별적인 존재[別法]를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이러한 개별적 존재의 본질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존재의 상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4]제(諦)와 [3]보(寶)와 업과 그 과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을 말한다.
  아직 잘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어떠한 법을 일컬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그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같이 '아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두 가지에는 다 같이 허물이 있으니, 무명을 논설하면서 설한 바와 같다. 이것(알지 못하는 것)은 이를테면 '아는 것'에 반대[對治]되는 개별적 존재이다.
  이것도 아직 잘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그것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
  이 같은 종류의 존재는 법이(法爾)로서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예컨대 다른 어떤 곳에서 "무엇을 일컬어 안(眼)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청정한 색으로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고 설한 것처럼, 무명도 역시 그러하니, 오로지 그 작용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15)
  
  
13) 경에서 '탐욕이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하였지만, 만약 무명이 번뇌의 총명이라면 경에서 마땅히 보다 광의인 '무명이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설하 였을 것이나 어디에도 그렇게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은 번뇌가 아니다.
14) 경에서 무명이 마음을 오염시킨다고도 말할 수도 있지만 협의의 차별로서 탐욕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혜를 오염시키는 것에 대해 서도 총명(즉 무명)으로 설하지 말고 차별하여 개별적인 명칭으로 설해야 한다는 뜻.
15) 『품류족론』 권제1(한글대장경118, p. 18) 참조. 즉 존재 그 자체는 논설하기 어렵고 다만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작용을 통해 추리한다. 즉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명이다. 참고로 중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혜의 공능을 손상시키니, 이 것이 바로 전도된 견[倒見]의 원인이다. 이는 관찰하려는 속성[觀德]을 장애하는 과실로서, 알려질 법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며, 심·심소를 은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현종론』 권제14, 한글대장경200, p.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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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大德) 법구(法救)는 설하기를, "이러한 무명은 바로 온갖 유정의 시아(恃我, asm ti) 즉 자신을 믿어 으스대는 종류의 존재[類性, myat ]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만과는 다른 존재인가, 어떤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와 같이 이미 알았고, 이와 같이 이미 보았기에 존재하는 모든 애(愛)와 존재하는 모든 견(見)과, 존재하는 모든 유성(類性)과 모든 아·아소에 대한 집착과 아만에 대한 집착과 수면을 단변지(斷遍知)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이 적멸(寂滅)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는 바로 아만과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16)
  그러한 존재[類性]가 바로 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안 것인가?
  그 밖의 다른 번뇌라고는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그 밖의 다른 만(慢) 등으로는 설할 수 없는 것인가?17)
  만약 여기서 더 이상 자세하게 추구할 경우 말이 번잡해지기 때문에 바야흐로 그만 마치기로 한다.
  
  명색(名色)은 무슨 뜻인가?
  색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본론 권제1) 분별하였으니, 여기서는 오로지 '명(名, nama)'에 대해서만 분별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名)이란 무색의 4온(蘊)이다.
  名無色四蘊
  
  
  
16) 『잡아함경』 권제34 제962경(대정장2, p. 245하) 참조. 여기서 여시지(如是知) 여시견(如是見)은 4제에 대한 지견(知見)을 말하고, '애'는 애착 을, '견'은 5견을, 존재하는 모든 유성(類性)은 무명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이는 그 뒤에 논설되는 아만과는 다른 유정의 존재[恃我性類, asm ti sattvamay t]가 있음을 논증하는 경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는 적멸'이란 무여열반을 말한다.
17) 그 밖의 다른 만(慢)이란 과만(過慢)·만과만(慢過慢)·아만(我慢)·증상만(增上慢)·비만(卑慢)·사만(邪慢)을 말한다. 본론 권제19(p.878)에서 상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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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무색(無色)의 4온을 어떠한 까닭에서 '명'이라 일컬은 것인가?
  설정된 명(名)과 근과 경의 세력에 따라 [소연의] 뜻을 전변시키기(일으키기) 때문에 '명'이라고 하였다.18)
  무엇을 일러 '명'의 세력에 따라 뜻을 전변시킨다고 함인가?
  이를테면 [겁초에] 여러 가지 법에 대해 세간에서 함께 그 명칭을 설정함에 따라 그러한 각각의 뜻을 전변시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소·말·색·향 따위의 말과 같다.
  이것(무색의 4온)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명'이라고 일컫게 된 것인가?
  [무색의 4온은] 그러한 각각의 경계를 전변시켜(일으켜) ['명'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또한 '명'과 유사하기 때문에, '명'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19)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네 가지 무색온은 이러한 몸을 버리고 다른 생으로 옮겨 나아가니, 전변하는 것이 '명'과 같기 때문에 '명'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20)
  '촉(觸)'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은 여섯 가지로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다.
  觸六三和生
  
  논하여 말하겠다. 촉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안촉(眼觸) 내
  
  
  
18) '명(n ma)'이란 무색인 수·상·행·식의 4온으로, 이를 '명'이라고 한 까닭은, 이러한 무색의 4온은 '소'·'말' 등과 같이 겁초에 설정된 말[名 ,즉 불상응행법의 하나로서 명사적 개념]과 근·경의 세력에 의해 드러내어야 할 대상의 뜻을 전변(nam) 즉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19) 무색의 4온은 '명'에 소연이 되어 그것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일체법은 색법과 비색법으로 분류되는데 4온은 '명'과 마찬가지로 비색법으 로 분류되기 때문에, 무색의 4온은 은밀하여 명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명'이라 이름하였다.
20) 즉 죽으면 육체의 색온은 이산괴멸하지만 심식 등의 4온은 전변 상속하기 때문에 '명'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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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의촉(意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슨 뜻인가?
  세 가지의 화합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말하자면 근(根)·경(境)·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촉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앞의] 다섯 촉은 세 가지 화합에 의해 생겨날 수 있으니, 근·경·식이 구시(俱時)에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근은 과거이고, 법경은 어떤 경우 미래이기도 하며, 의식은 현재인데,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촉)을 바로 화합이라 이름한 것은 이를테면 그 사이에 인과의 뜻이 성립하기 때문에, 혹은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화합이라고 일컬을 수 있으니, 이를테면 근·경·식 세 가지는 다 같이 촉을 낳는데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여러 논사들의 각혜(覺慧)가 동일하지 않다.21)
  어떤 이(경부사)는 설하기를, "세 가지의 화합을 바로 '촉'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다음의 경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세 가지 법의 취집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고 하였다."22)
  그러나 어떤 이(유부 비바사사)는 설하기를, "마음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나는 개별적인 법을 설하여 촉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들도 다음의 경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다. "경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육육(六六)의 법문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6내처(內處)이며, 두 번째는 6외처(外處)이며, 세 번째는 6식신(識身)이며, 네 번째는 6촉신(觸身)이며, 다섯 번째는 6수신(受身)이며, 여섯 번째는 6애신(愛身)이다'고 하
  
  
  
21) 보광에 의하면 경부는 촉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고서 '삼사(三事)의 화합 그 자체가 바로 촉이며, 삼사를 배제한 촉은 실재하지 않는다(三和成 觸說)'고 주장하였는데(후술), 이러한 촉 비실유설은 『대비바사론』 권제149(한글대장경123, p. 539)상에서는 비유자(譬喩者)의 설이다.
22) 『잡아함경』 권제3 제68경(대정장2, p. 18상)의 "緣眼及色眼識生, 三事和合生觸" 혹은 같은 경 권제13 제306경(동p.87하)의 "眼色緣生眼識, 三事 和合觸" 등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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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였다.23) 즉 이 계경 중에서 근·경·식 이외에 별도로 6촉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촉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세 가지의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고 주장하는 자(경부)는 뒤에 인용한 『육육법경』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수(受)와 애(愛)가 법처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24)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애'와 '수'와 '촉'을 떠나 그 밖의 다른 법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종의에서는 촉을 떠나 별도로 세 가지가 존재하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촉과 세 가지를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 것인가?25) 비록 근과 경이 식을 낳지 않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근과 경에 의탁하지 않고 존재하는 식은 없기 때문에 이미 세 가지를 설하고서 다시 별도로 촉을 설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 되는 것이다.26)
  어떤 다른 논사가 [경부를] 구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갖 안(眼)과 색(色)이 모두 온갖 안식(眼識)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온갖 안식이 모두 온갖 안과 색의 결과인 것도 아니다. 즉 [양자가] 인과관계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별도로 설하여 세 가지라고 하였지만, 인과관계에 놓이게 될 경우에는 총괄하여 촉이라 하였다."27)
  '세 가지의 화합을 떠나 별도의 촉이 존재한다'고 설한 자(유부)는 앞에서
  
  
  
23) 『육육법경(六六法經)』은 『잡아함경』 권제13 제304경(대정장2, p. 86하).
24) 즉 6근·6경·6식 이외 6촉을 따로이 설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촉의 개별적 실재성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6수·6애를 별도로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법처 이외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25) 즉 경량부에 의하면 근·경·식 삼사화합이 바로 촉이기 때문에 양자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촉과 삼사를 따로이 구별하여 설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어찌 계경에서는 구별하여 설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힐난.
26) 즉 삼사가 화합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촉과는 별도의 삼사가 각기 존재하기 때문에 경에서 따로이 설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미 식이 일어난 이상 화합하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삼사와 촉을 함께 설하는 것은 무의미한 동어반복일 뿐이라는 뜻.
27) 이를테면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천안을 낳는 경우 욕계의 안근과 색경은 안식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처럼 식이 반드시 근·경의 화합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삼사와 촉를 별도로 설할지라도 허물이 없다는 뜻. 여기서 어떤 다른 논사는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 칭우에 의하면 상좌 실 리라다(室利羅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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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한 "이와 같이 세 가지 법의 취집 화합을 일컬어 촉이라 한다"는 경문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부파에서 외워 전승하는 경문은 이와 다르다. 혹은 제불(諸佛)의 출현을 즐거움 등이라고 설하는 것처럼 원인 상에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한 것일 뿐이다."28)
  이와 같이 논의를 계속 전개하여 서로 힐난하고 해석하면 말이 번잡하고 많아지기 때문에 마땅히 여기서 그만 마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법자(對法者)는 설하기를, "촉은 [삼사와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다시 종합되어 두 가지가 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와 상응하는 것은 유대(有對)이며
  여섯 번째와 구기하는 것은 증어(增語)이다.
  五相應有對 第六俱增語
  
  논하여 말하겠다. 안(眼) 등의 5촉(觸)을 설하여 유대촉(有對觸)이라 이름하니, 유대의 근(공간적 점유성을 갖는 5근)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6 의촉(意觸)을 설하여 증어촉(增語觸)이라고 이름한다.29) 여기서 '증어'란 이를테면 명(名)을 말하는데, '명'은 바로 의촉이 소연으로 삼는 장경(長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따로이 설하여 증어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30) 이를테면 마치 "안식은 단지 푸르다는 사실만을 능히 인식할 뿐 '푸른 것'[이
  
  
28) '삼사화합이 촉이다'고 하는 경문은 유부 소전(所傳)이 아니던지 혹은 다만 삼사라는 원인 상에 촉이라는 결과를 일시 설정하여 그렇게 말할 것일 뿐이라는 뜻. '제불의 출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 주35) 참조할 것.
29) 증어촉(adhivacana-sa parsa)은 구역에서는 의언촉(依言觸)이라고 하는데, 언어적 개념[名, n ma]을 소연으로 삼는 촉이다. 즉 '증어'란 '명' 의 다른 명칭으로, 『광기』에 의하면 반드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는 '명'이 말[語]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말을 뛰어난 방편으로 삼아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에, 명의 세력에 의해 말이 뛰어나게 되기 때문에 '증어'라고 이름하였다.
30) 증어촉의 소연인 '명'은 전5촉 즉 유대촉의 그것(유대색)에 비해 탁월하고도 수승한 특장(特長)의 경계이기 때문에 장경(長境, adhikam lambana)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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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는 명 즉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푸르다는 사실도 인식할 뿐더러 '푸른 것'[이라는 명]도 역시 인식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31) 그래서 [증어촉의 소연을] '장경'이라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촉의 명칭이 소의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면 증어촉의 명칭은 소연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의식은 말을 증상(增上 : 즉 표준이 되는 근거)으로 삼아 비로소 경계로 전전(展轉)하지만 5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만을 유독 '증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것과 상응하는 촉을 '증어촉'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유대촉이라는 명칭은 소의에 따른 것이라면, 증어촉이라는 명칭은 상응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개별적인 상응관계에 따라 다시 여덟 가지의 종류가 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과 무명과 두 가지가 아닌 촉은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한 것이고]
  애(愛)와 에촉(?觸)은 그 두 가지와 상응한 것이며
  낙(樂) 등의 촉은 3수(受)에 따른 것이다.
  明無明非二 無漏染汚餘
  愛?二相應 樂等順三受
  
  논하여 말하겠다. 촉은 명·무명 등과 상응하여 세 가지 종류가 되는데, 첫 번째가 명촉(明觸)이며, 둘째가 무명촉(無明觸)이며, 셋째가 비명비무명촉(非明非無明觸)이다. 이 세 가지는 차례대로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밖의 것'이란 이를테면 무루와 아울러 염오를 제외한 나머지, 즉 유루의 선과 무부무기를 말한다.
  
  
  
31) 즉 전자가 감성적 인식이라면 후자는 오성적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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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무명촉 중의 일부는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다시 애(愛)와 에(恚)의 두 가지 촉을 설정하였으니, 애탐과 진에의 수면(隨眠)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일체의 촉을 모두 다 포섭하여 다시 세 가지 촉이 되는데, 첫 번째는 순락수촉(順樂受觸)이며, 둘째는 순고수촉(順苦受觸)이며, 셋째는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다.32) 즉 이러한 세 가지 촉은 능히 낙 등의 수(受)를 인기하기 때문에, 혹은 낙 등의 수에 의해 영납(領納)되기 때문에, 혹은 수의 행상(行相)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수(順受)'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떻게 촉이 수에 의해 영납되고, 그 행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가?
  수의 행상은 촉의 그것과 지극히 유사할 뿐더러 촉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곧 이와 같은 촉을 모두 합하면 열 여섯 가지의 종류가 된다.33)
  '수(受)'는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즉 觸)으로부터 6수(受)가 생겨나니,
  다섯은 신(身)에 속하고, 나머지는 심(心)에 속한다.
  從此生六受 五屬身餘心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6촉으로부터 6수가 생겨나니, 말하자면 안촉에서 생겨난 수[眼觸所生受] 내지 의촉에서 생겨난 수[意觸所生受]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수' 중에서 앞의 다섯 가지를 설하여 신수(身受)라고 하는데, 색근(色根)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의촉에서 생겨난 '수'를 설
  
  
  
32) 각기 낙수(樂受)·고수(苦受)·사수(捨受)와 상응하는 촉이다.
33) 안(眼) 등의 6촉과 유대촉과 증어촉, 명(明) 등의 3촉, 애촉과 에촉, 그리고 순락수촉 등의 3촉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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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심수(心受)라고 하는데, 단지 마음만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다.
  '수'는 '촉'보다 뒤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구시(俱時, 즉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34)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구시에 생기하니, 촉과 수는 전전 상속하며 서로에 대해 구유인(俱有因)이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두 가지 법이 구시에 생겨난다면 어떻게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이라는 [차별의] 뜻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여 성립하지 않는 것인가?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법(즉 능생법)은 어떠한 공능도 갖지 않는 것이다.35)
  이것과 입종(立宗,즉 주장명제) 사이에는 의미상 어떠한 차별도 없다. 즉 '두 가지 법이 구시에 생겨날 때 능생과 소생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서 [그 이유로써]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법은 공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였지만 이것의 의미는 앞의 주장과 같으니, 거듭하여 설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3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낳는 과실을 갖게 될 것이다.37)
  인정하였기 때문에 과실이 아니다. 즉 우리(有部)의 종의에서는 이 두 가지('촉'과 '수')는 구유인이 되며, 역시 또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결과(즉 사용
  
  
  
34) 이는 계기(繼起) 상속설을 주장하는 경량부의 물음이다. 즉 유부에서는 '촉'과 '수'는 구유인이 되기 때문에 동시에 구기한다고 주장한 반면, 경 량부는 구유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양자는 다만 이시(異時)에 계기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하 구기설과 계기설에 대한 유부 비바사사와 경부사 사이에 논쟁이 이어진다.
35) 즉 두 가지 법이 구기한다면 그것은 능생(janaka, 생겨나게 하는 것)과 소생(janya, 생겨나는 것)의 구기함인데, 그럴 경우 능생의 법은 그것과 동시에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난문.
36) 즉 경부사가 제출한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해 그 밖의 다른 법은 공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는 이유명제[因]는 사실상 '두 가지 법이 구생할 때 능생과 소생의 차별이 없다.'는 주장명제[宗]와 그 의미가 동일하기 때문에 참다운 능증(能證)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
37) 만약 앞에서 제출한 이유가 박약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즉 두 가지 법이 구생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인(因)이 된다고 할 경 우 어느 것이 능생이고 어느 것이 소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능생과 소생의 차별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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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가 된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비록 그렇다고 인정하였을지라도 계경 중에서는 이 두 가지 법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된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계경에서는 단지 '안촉(眼觸)을 연으로 삼아 안촉소생(眼觸所生)의 수(受)를 낳는다'고 만 설하고 있을 뿐으로, 일찍이 경에서 '안수(眼受)를 연으로 하여 안수소생(眼受所生)의 촉(觸)을 낳는다'고 설한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뜻(즉 구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능생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어떤 법이 상식적으로 능히 그러한 법을 낳았다고 한다면, 이 법과 그 법이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상식[極成]으로서, 이를테면 먼저 씨앗이 있고 나서 뒤에 싹이 있으며, 먼저 우유가 있고 나서 뒤에 낙(酪)이 있으며, 먼저 타격이 있고 나서 뒤에 소리가 있으며, 먼저 의근이 있고 나서 뒤에 의식이 있다는 등의 사실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먼저 원인이 있고, 뒤에 결과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식이지만, 상식적으로 동시인과 또한 존재하니, 마치 안식 등은 안·색과 동시에 존재[俱有]하며, 4대종은 소조색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우리(경부)는] 여기서도 역시 먼저 근과 경이 연이 되고서 능히 뒤에 식을 낳으며, 먼저 대종이 조합 취집하고 나서 뒤의 소조색을 낳는다고 인정하니, 어떠한 이치로 이를 능히 부정할 것인가?
  그림자와 싹과 같은 것은 어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38)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39) "촉이 생겨난 뒤에 비로소 수가 생겨난다. 즉 근과 경이 먼저 있고 나서 다음에 식이 일어나며,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촉'이라 한 것으로, 제3찰나에 이러한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40)
  
  
38) 이하 경부가 이에 대해 답변하지 않은 것은 앞서 구유인을 비판하면서(본론 권제6)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그림자와 몸'으로 되어 있 지만, 앞에서의 논설에 따라 그림자와 싹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39) 보광에 따르면 여기서 어떤 이는 경부 중의 상좌(上座)이며, 칭우에 의하면 대덕(大德, Bhadanta) 실리라다(室利羅多, r l ta)이다. 이하 경 부상좌와 유부의 대론이 이어진다.
40) 이 논사의 주장에 따르면 먼저 제1찰나에 근·경이 일어나고, 그것을 연으로 하여 제2찰나에 식이 발생한다. 곧 식이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삼사 화합의 촉의 순간으로, 그러한 촉을 연으로 하여 제3찰나에 수가 낳아진다. 이 같은 촉·수의 관계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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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식에는 모두 수가 존재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온갖 식 또한 마땅히 모두 촉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41)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선행된 단계의 촉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뒤의 촉의 단계에서 수를 낳게 된다. 따라서 온갖 촉의 순간에는 모두 수가 존재하는 것이다.42) 그리고 존재하는 식으로서 촉을 본질[體]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43)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떠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이를테면 혹 어느 때 대상을 달리하는 두 가지 촉이 있을 경우, '앞의 수의 단계[前位]의 촉'을 원인으로 삼아 '뒤의 촉의 단계[後位]의 수'를 낳는다고 할 때, 어떻게 대상을 달리하는 수가 대상을 달리하는 촉으로부터 낳아질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수가 이러한 마음과 상응한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마음과 함께 동일한 대상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44)
  
  
41) 만약 촉·수가 구기하지 않고 계기한다면 제2찰나 식이 일어나는 순간 '수'는 부재해야 하며, 제3찰나 '수'가 낳아지는 순간 '식'은 이미 낙사(落 謝)하였으므로 그것은 더 이상 삼사화합의 촉이 될 수 없다. 즉 유부에 의하는 한 수·상·촉 등의 10대지법은 항상 식과 상응 구기하기 때문에 이 같은 물음이 낳아진 것이다.
42) 주40)의 도표를 참조할 것. 즉 제2찰나에 생겨난 촉은 제1찰나의 촉을 원인으로 하는 수와 동시에 존재하며, 제3찰나에 존재하는 촉은 제2찰나의 촉을 원인으로 하는 수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촉이 일어날 때는 모두 반드시 수가 존재한다.
43) 즉 현행하는 식(識)은 반드시 근(根)을 소의로 하고, 경(境)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나므로, 식의 현현 자체가 바로 촉(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44) 주40)의 도표를 참조할 것. 예컨대 색(色)과 성(聲)을 소연으로 하는 두 가지 촉이 생겨날 경우, 제1찰나의 안촉(眼觸)을 원인으로 삼아 낳아진 수는 제2찰나 이촉(耳觸)의 순간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소연평등(所緣平等)에 따라 마음과 동시존재하는 제 심소는 각기 동일한 소 연을 갖지 않으면 상응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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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그렇다고 할 경우, 만약 촉을 성립시키는 식은 바로 촉으로서 수를 갖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단계 이전에는 식으로서 수를 갖지만 그 자체 촉은 아니니, 연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4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열 가지 대지법(大地法)을 파괴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결정코 일체의 마음의 품류와 항상 구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정코 [일체의 마음의 품류와] 항상 구기한다고 하는 사실은 어떠한 교의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인가?
  본론(本論,즉 아비달마)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다.46)
  우리들은 다만 계경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을 뿐 본론은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그것(觸·受俱起說)을 파괴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그래서 세존께서도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47) 혹은 대지법의 뜻이 반드시 온갖 마음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을 대지법의 뜻이라고 할 것인가?
  이를테면 세 가지의 지(地)가 있으니, 첫 번째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이며, 둘째는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이며, 셋째는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이다. 다시 세 가지의 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선지(善地)이며, 둘째는 불선지(不善地)이며, 셋째는 무기지(無記地)이다. 다시 세 가지의 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학지(學地)이며, 둘째는 무학지(無學地)이며, 셋째는 비학비무학지(非學非無學地)이다. 만약 어떤 법이 앞의 온갖 지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면 그것을 '대지법'이라 이름하며, 만약 어떤 법이 오로지 선지 중에만 존재하는
  
  
  
45) 촉의 순간은 수가 아니고 수의 순간은 촉이 아니라면 어떠한가? 즉 촉은 근·경·식 삼사화합하는 상태이고, 수는 그 뒤 식이 대상을 영납(領納) 하는 상태라면, 촉과 수는 동시가 아니기 때문에 각기 동일한 소연의 수와 촉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46) 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 권제2(대정장26, p. 698하).
47) 『비나야잡사(毘奈耶雜事)』 권제37(대정장24, p.389중), "世尊告阿難陀曰, 如是應知. 敎類眞僞 ,始從今日當依經敎, 不依於人……." 곧 경량부(Sautr ntika)는 아비달마가 아니라 경을 지식의 근거(量, pram a)로 삼기 때문에[以經爲量] 불려진 명칭이다. 그러나 『석론』에서는 '량'이 라는 말이 배제되어 '우리는 경을 의지처로 삼는다[以經爲依]'로 번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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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라면 그것을 '대선지법'이라고 이름하며, 만약 어떤 법이 오로지 염오지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한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법은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번갈아가며 생기니, 그것이 다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떤 이(經部 上座 室利羅多)의 설은 이상과 같다. 그리고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의 경우는 외워 전승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요즈음 더해진 것이지 본론(本論)에서 외워 전승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48)
  만약 '촉'이 생겨나고 난 후에 비로소 '수'가 생겨난다고 한다면 다음의 경문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과 색을 연으로 삼아 안식과,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과, 구기(俱起)하는 수(受)·상(想)·사(思)를 낳는다"고 하였다.49)
  [경에서는] 다만 '구기하는'이라고만 말하였지 '촉과 구기하는'이라고는 설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우리(경부)의 종의와 어떻게 어긋나기에 반드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무간(無間)에 대해서도 역시 '함께[俱]'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자(慈)와 구행(俱行)하는 염각지(念覺支)를 닦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50) 따라서 그것은 경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이러한 수(受), 이러한 상(想), 이러한 사(思), 이러한 식(識), 이와 같은 제법은 서로 뒤섞이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겠는가?51) 그러므로 식은 결코 수 등을 떠나 존재하는
  
  
48) 유부가 설하는 대지법 내지 대불선지법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p.161 이하)에서 논설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경부상좌 실리라타의 그 것과는 크게 다르다.
49) 『잡아함경』 권제11 제273경(대정장2, p. 72하); 권제13 제306경(동, p. 87하) "緣眼色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경문을 '안과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삼사화합이 촉이며, 촉은 수·상·사와 구생한다'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안과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 과; 삼사화합의 촉과; [촉과] 구생하는 수·상·사를 낳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의 답론에 보듯이 '[촉과] 구생하는'에서의 '촉'은 역자의 가 필이던지, 아니면 현존의 『잡아함경』이 당시의 것과는 다른 것이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50) 『잡아함경』 권제27 제744경(대정장2, p. 197하), "是比丘心與慈俱修念覺分" 즉 유루의 자정(慈定)을 닦고 나서 바로 무루의 염각지를 닦는다는 뜻으로, 이 때 '구(俱)'는 등무간(等無間)의 의미이지 '함께(saha)'가 아니다.
51) 『중아함경』 권제58 『대구치라경(大拘?羅經)』(대정장2, p. 791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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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없다.
  지금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서로 뒤섞인다[相雜]'고 함은 무슨 뜻인가? 그 경에서는 또한 설하기를, "온갖 소수(所受)가 바로 소사(所思)이며, 온갖 소사가 바로 소상(所想)이며, 온갖 소상이 바로 소식(所識)이다"고 하였다. 즉 그대는 소연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서로 뒤섞였다고] 말한 것인지 찰나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말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구나!
  '목숨[壽]과 체온[煖]이 구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이 '서로 뒤섞인다'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예증으로 볼 때 이 설도 결정코 찰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계경에서 '세 가지 화합이 촉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식이 있으면서 세 가지가 화합하지 않을 것인가? 혹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같이 세 가지가 화합하더라도 '촉'이라 이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식(識)과 구기하는 법은 모두 촉을 가져야 하며, 존재하는 온갖 촉으로서 '수' 등과 구생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결정코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방론(傍論)을 이미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본의(本義)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심수는 다시 열여덟 가지가 되는데
  의근행(意近行)이 다르기 때문이다.52)
  此復成十八 由意近行異.
  
  
  
  
52) 6수 중 제6 의촉소생수를 심수(心受)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희(喜)·우(憂)·사(捨)의 자성에 따라 세 가지 의근행(意近行)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같은 세 가지의 영납은 오로지 의(意)와 상응할 뿐이지만 각기 여섯 경계[境]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가 된다. 즉 이러한 희 등의 3법은 의근을 가까운 연[近緣]으로 삼아 경계로 자주 유행(遊行)하기 때문에, 혹은 이러한 3법이 의근의 가까운 연이 되어 의근으로 하여금 경계로 자주 유행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manopavic ra)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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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간략히 설한 하나의 심수(心受) 중에는 의근행(意近行)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시 나누어져 열여덟 가지가 된다. 그리고 게송에서 '다시'라고 하는 말은 앞의 논설에 편승하여 이후의 논설을 제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53)
  무엇을 일러 열여덟 가지 의근행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희(喜)·우(憂)·사(捨) 각각에 대한 여섯 가지의 근행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열여덟 가지로 설정된 것인가? 만약 자성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오로지 세 가지만 있어야 할 것이니, 희·우·사의 세 가지는 각기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상응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오로지 한 가지만 있어야 할 것이니, 일체의 수는 모두 의근(意根)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소연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면 마땅히 단지 여섯 가지만이 있어야 할 것이니, 색 등의 6경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 열여덟 가지가 된 것은 세 가지 모두를 갖추었기 때문이다.54) 여기서 열다섯 가지의 색 등의 근행을 부잡연(不雜緣)이라 이름하는데, 경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법근행은 모두 두 가지(잡연과 부잡연)와 통한다.55)
  의근행이란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희 등이 의근을 근연(近緣)으로 삼아 온갖 경계로 자주 유행(遊行)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하였다]"고 하였다.56) 그러나
  
  
53) 즉 18의근행에 관한 논설은 독립적인 논설이 아니라 심수(心受)에 따른 논의라는 뜻으로, 이 문장은 범본이나 석론에는 없는 현장의 가필이다. 아마도 중간의 '촉·수 구기'의 방론이 길어졌기 때문에 이같이 가필하였을 것이다.
54)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자성과 한 가지의 상응과 여섯 가지의 소연으로 말미암아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으로, '희' 등 수(受)의 세 자성은 의근과 상응할 뿐이지만, 6경에 따른 차별도 있기 때문이다.
55) 색 등의 의근행은 오로지 자신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부잡연이라면, 법근행 세 가지(즉 법경에 대한 3수의 의근행)의 경우 오로지 법경을 소연으로 삼을 때는 부잡연이지만 6경 중 두 가지 내지 여섯 가지를 소연으로 삼을 때는 잡연이다.
56) 전설(kila)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뜻에 따르면'이라는 뜻으로 예의 논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는 중현에 의해서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즉 그는 '만약 그렇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한다면 상(想) 등도 역시 의근과 상응하고 의근으로 말미암아 작용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비판하고 있다.(『현종론』 권제15, 한글대장경200, p. 391) 다음의 어떤 이의 설이 유부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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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설하기를, "희 등이 능히 근연이 되어 의근으로 하여금 경계로 자주 유행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수(身受)는 의근행이라고 하지 않는 것인가?
  오로지 의식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近)'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며, 무분별이기 때문에 역시 '행(行)'이라고도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57)
  그렇다면 제3정려의 의지(意地)의 낙근(樂根)은 [역시 의식에만 의지하는데] 어찌하여 의근행 중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초계(初界 : 즉 욕계)에는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58) 또한 [낙근과] 대응하는 고근에 포섭되는 의근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9)
  만약 오로지 의지에 속한 것(즉 의식상응)만이 [의근행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 희수(喜受)에 따르는 색에 대해 '희'의 근행을 일으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것인가?
  5식신(識身)에 의해 인기된 의지(意地)의 '희' 등의 근행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마치 부정관(不淨觀)은 안식에 의해 인기되지만 이렇게 인기된 부정관은 오로지 의지에 포섭되는 것과 같다.60) 또한 그 경에서는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已]……(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앞의 물음은] 마땅히 힐난의 물음이 되지 않
  
  
57) 그렇다면 반대로 의근행은 오로지 의식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근(近)'이라 이름하였으며, 삼세 등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에 '행'이라고 이름하였다.(『현종론』 권제15, 앞의 책, p. 391)
58) 즉 욕계에는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계에도 역시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 유부에서는 상계에 설정되는 법은 원칙적으로 욕계에도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59) 낙근에 상대가 되는 고근이 제3정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없는 낙근을 의근행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60) 4념주(念住)의 하나인 부정관은 제6의식의 작용이지만 처음에는 안식에 의해 인기(引起)되듯이 색에 대한 '희'의 근행도 물론 의식과 상응하는 것이지만 처음에 5식신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그렇게 설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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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록 [색을] 보지 않았거나 내지는 [촉을] 느끼지 않았다 할지라도 희·우·사를 일으킬 경우 이것도 역시 의근행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욕계 중에서는 마땅히 색계의 색 등을 연으로 하여 의근행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색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향·미·촉의 경계를 연으로 하는 온갖 의근행을 일으키는 일도 마땅히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을 보고서……'라는 따위 말은 보다 명료함에 따르는 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 등을 보고 나서 소리 등에 대해 희·우·사를 일으켰을 경우 그것도 역시 의근행이지만 뒤섞임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같이 설한 것이니, 거기서는 근과 경을 확정하여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색 등은 '희' 등의 3수(受)에서 오로지 능히 한 가지 근행에 따라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근행에 따라 생겨나는 일이] 있으니, 상속에 근거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소연에 근거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61)
  온갖 의근행 중의 몇 가지가 욕계계(繫)이며, 욕계 의근행에는 몇 가지 소연이 있는 것인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물음도 역시 이와 같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여덟 가지이며
  색계와 상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와 세 가지이다.
  欲緣欲十八 色十二上三
  
  [색계의] 두 정(定)의 계(繫)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이고
  여덟 가지는 자계(自界)를,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하며
  
  
  
61) 즉 어떤 한 개인의 상속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색은 오로지 희수 내지 사수에 따르는 것이지만, 소연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일한 색이라 하더라도 어떤 자에게는 희수에 따른 근행을, 어떤 자에게는 고수에 따른 근행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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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의 두 정의 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여섯 가지이고
  네 가지는 자계를, 한 가지는 상계를 소연으로 한다.
  二緣欲十二 八自二無色
  後二緣欲六 四自一上緣
  
  무색계의 첫 번째 근분(近分)의 계와
  색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네 가지이며, 자계는 한 가지를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경계 한 가지만을 소연으로 한다.
  初無色近分 緣色四自一
  四本及三邊 唯一緣自境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의근행은 모두 열여덟 가지 모두이며,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의 수도 역시 그러하다.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열두 가지로서, 향·미의 여섯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니, 거기에는 그러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2)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세 가지만이 있을 수 있으니, 거기에는 색 등의 다섯 가지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3)
  욕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색계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오로지 열두 가지 의근행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섯 가지 우수(憂受)을 제외한 그것이다.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의근행도 역시 열두 가지가 있다.64) 그리고 향·미의 네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62) 즉 색계에는 단식(段食)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식성인 향·미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며(본론 권제2 참조), 따라서 희(喜)·우(憂)·사(捨)에 걸친 여섯 가지 근행이 없는 것이다.
63) 무색계에는 법경(法境)에 대한 희·우·사의 3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 가지 의근행만을 소연으로 한다.
64) 희수와 사수의 두 가지가 욕계의 6경을 소연으로 하기 때문에 열두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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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가지는 자계(自界, 즉 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며,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65) 제3정려와 제4정려에서는 오로지 여섯 가지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사수(捨受)의 그것이다. 그리고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에도 역시 여섯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향·미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자계(즉 색계)의 소연이 되며, 한 가지는 무색계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색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무색계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近分)에는 오로지 네 가지 종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사수의 그것이 단지 색·성·촉·법을 소연으로 삼을 뿐이다.66) 그리고 제4정려를 소연으로 삼는 경우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소연이 있다고 인정하는 자에 따라 설한 경우이다.67) 그러나 만약 그러한 지에서는 오로지 하지를 총괄하여 소연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만 그것이 뒤섞인 것을 소연[雜緣]으로 하는 법근행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도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무색계의]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 : 식무변처 이상의 3지의 근분)에는 오로지 한 가지 의근행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다만
  
  
65) 색계에 우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거기서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을 경우, 거기에는 전5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법을 경계로 하는 희·사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다.
66) 공무변처의 근분이란 제4정려의 염오함을 원리(遠離)한 상태로서, 여기서는 제4선의 색 등을 관하여 추(酥)·고(苦)·장(障) 등으로 관하는데, 다만 사수만이 있기 때문에 그 대상 색·성·촉·법에 대해 네 가지 근행을 일으킬 뿐이다
67) 『대비바사론』 권제139(한글대장경123, p. 312)에서는 이러한 근분지의 계속과 그 소연관계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색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 네 가지 근행(색·성·촉·법)이 있으며, 자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오로지 사(捨)의 법근행 한 가지 뿐이다. 둘째는 색·성·촉·법을 각기 따로이 구별하지 않고 총괄하여 잡다한 하나의 소연[雜緣]으로 삼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법근행만이 있으며, 자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사의 법근행 한 가지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제1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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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지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으니, 무색계의 근본지에서는 하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위의 세 변지에서는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지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뒤(즉 「정품(定品)」,본론 권제28)에서 마땅히 분별할 것이다.68)
  이러한 의근행은 무루와도 통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여덟 가지는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十八唯有漏
  
  
  
  
68) 이상 18의근행의 3계 계속(繫屬)과 소연의 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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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의근행으로서 무루와 통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는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고 말한 것인다.
  누가 몇 가지의 의근행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색계 선심을 획득하지 않았다면, 욕계의 일체의 근행과, 초·제2 정려의 여덟 가지(미·향을 제외한 네 가지 경계의 喜와 捨)와, 제3·제4 정려의 네 가지(捨)와, 무색계의 한 가지(法)를 성취하는데, 성취한 상계(上界)의 의근행은 모두 하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니, 오로지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미 색계의 선심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다면,69) 욕계의 일체 의근행과 초정려의 열 가지 의근행을 성취하며, 그 밖의 경우는 앞에서와 같다. 즉 이러한 초정려 중에서는 오로지 네 가지의 희(喜)만을 성취하니 그것은 염오하여 하지의 향·미경을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捨)의 의근행은 여섯 가지를 전부 성취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경우(이미 욕탐을 떠난 경우)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0)
  만약 색계에 태어났다면 오로지 욕계의 사(捨)의 법근행(法近行) 한 가지 만을 성취할 것이니, 이를테면 바로 통과심(通果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71)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온갖 의근행의 뜻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따라 설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경의 뜻은 이와는 다르다. 왜냐 하면 어떤 이가 이러한 지(地)에서 이미 이염(離
  
  
  
69) 이는 초정려의 근분지(近分地), 즉 미지정에 든 자를 말함.
70) 이를테면 "이미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만약 제2 정려의 선심을 아직 획득하지 않은 자라면, 그는 욕계와 초정려의 열두 가지 근행을 성취할 것이니 , 이를테면 여섯 가지 우(憂)를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제2 정려 등의 경우에 대해서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이미 제2 정려의 선심을 획 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초정려의 이탐을 획득하지 않은 자라면, 제2 정려의 열 가지 근행을 성취할 것이니, 이를테면 '희'는 단지 네 가지로서 오로지 염오 하기 때문이며, '사'는 여섯 가지를 전부 성취하니, 이미 제2정려의 근분의 선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의 제3·제4 정려와 무색계의 경우에 대해서 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현종론』 권제15, 앞의 책, p. 397)
71) 색계천이 성취하는 욕계 의근행은 통과심과 구기(俱起)하는 '사' 한 가지 뿐인데, 이 역시 색 등의 6경을 총합한 일법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기 때 문에 법의 사근행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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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染)을 획득하였다면 이러한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의근행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루의 희·우·사의 세 가지는 모두 근행에 포섭되지 않는다. 오로지 잡염(雜染)이 의(意)와 더불어 소연으로 서로를 이끌어 자주자주 행하게 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이 바로 의근행이다."72)
  어떻게 의(意)와 서로를 이끌어 자주자주 행하는 것인가?
  혹은 애착[愛]하고 혹은 증오[憎]하고 혹은 사택(思擇)하지 않고 멍청한 것[不擇捨]이다.73) 곧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 [경에서는] 6항주(恒住)를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색을 보고 나서 기뻐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며, 마음은 항상 평정[捨]에 머물러 염정지(念正知)를 갖추어라. 내지는 법을 알고 나서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74) 그리고 아라한에게도 세간의 선법을 연으로 하는 '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잡염의 희는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설(6항주설)은 다만 잡염의 근행을 막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또한 '희' 등의 의근행은 탐기(耽嗜)와 출리(出離)의 소의로서 차별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것을 "서른 여섯 가지의 사구(師句)가 된다"고 하였는데,75) 즉 이러한 말씀[句]의 차별은 대사(大師)가 설하였기 때문이다.76) 여기서 탐기의 소의란 이를테면 온갖 염오함의 수(受)를 말하며, 출리의 소의
  
  
72)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의하면 이설(異說) 혹은 경부 이사(異師), 칭우에 의하면 논주 세친이다. 법보는 논주가 일시 이설을 빌려 유부를 비판 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근행이란 오로지 염오로서, 이것에 의해 의근이 자주 소연의 경계로 근행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이염하였다면 이러한 지 에서는 필시 근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73) 애착은 탐(貪), 증오는 진(瞋), 사택하지 않고 버려두는 것은 치(癡)이다. 곧 '희'는 탐과, '우'는 진과, '사'는 치와 함께하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는 의(意)와 더불어 서로를 이끌어 자주자주 소연으로 행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하였다는 뜻.
74) 『잡아함경』 권제13 제340경(대정장2, p. 93상), "有六常行, 云何爲六? 若比丘 眼見色不苦不樂 捨心住正念正智……." 즉 6항주( a s tat vih r )란 잡염(雜染)을 떠난 마음의 평등성, 정직성, 무경각(無警覺), 임운성(任運性)에 머무는 것으로(『집이문족론』 권제15, 한글대장경115, p. 310), 곧 사(捨)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때 '사'는 심소 중의 행사(行捨)의 뜻으로, 3수의 '사'가 아니다.
75) 탐기의 소의가 되는 열여덟 가지(6경 각각의 喜·憂·捨 耽嗜依)는 근행하여 대치되는 것이며, 출리의 소의가 되는 열여덟 가지(6경 각각의 喜· 憂·捨 出離依)는 근행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다.
76) 즉 탐기와 출리의 소의가 되는 18의근행은 깨달은 자이신 위대한 스승[大師]께서 능히 알고, 능히 설할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스승의 표식이 되기 때문에 '사구(師句, st pada)'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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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 이를테면 온갖 선(善)의 수를 말한다.
  이와 같이 논설한 수(受)의 유지(有支) 중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뜻의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7)
  어떠한 까닭에서 그 밖의 나머지 유지(有支)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 밖의 지(支)는 이미 설하였거나 마땅히 설할 것이기 때문이다.
  餘已說當說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나머지 유지에 대해서는 이미 설한 것도 있고, 혹은 앞으로 마땅히 설할 것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논설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 중에서 식지(識支)는 앞(본론 권제1, p.30)에서 이미 '식이란 말하자면 각기 요별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의처(意處)로 일컬어진다'는 등으로 논설한 바와 같으며, 6처의 지(支)도 역시 앞(본론 권제1, p.14)에서 이미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5근이라고 한다'는 등으로 논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행(行)과 유(有)의 두 가지 지에 대해서는 「업품」에서 마땅히 논설할 것이며, 애(愛)와 취(取)의 두 가지 지에 대해서는 「수면품」에서 마땅히 논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온갖 연기를 간략하게 설정하면 세 가지가 된다고 하였으니(본론 권제9), 이를테면 번뇌와 업과 이숙과의 사(事)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외물(外物)의 비유로써 각기 차별되는 공능을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77) 12연기라는 존재의 갈래[有支] 중 '수'는 간략히 설하면 이상과 같지만, 널리 설하면 무량의 뜻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를 그만 마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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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번뇌를 설하자면, 그것은
  종자와 같고, 또한 용과 같으며
  풀의 뿌리나 나무의 줄기와 같고
  아울러 겨가 쌀을 싸고 있는 것과 같다.
  此中說煩惱 如種復如龍
  如草根樹莖 及如糠裏米
  
  업은 겨에 싸여 있는 쌀과 같고
  약초와 같고 꽃과 같으며
  온갖 이숙의 결과인 사(事)는
  익은 음식물과 같다.
  業如有糠米 如草藥如花
  諸異熟果事 如成熟飮食
  
  논하여 말하겠다. 어찌하여 이 세 가지를 종자 등과 서로 유사하다고 한 것인가?78)
  이를테면 종자로부터 싹과 잎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로부터 번뇌와 '업'과 '사'가 생겨난다. 용이 못을 지키면 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 것처럼 번뇌가 업을 지키면 생의 상속은 무궁하다. 풀의 뿌리를 아직 뽑지 않았으면 싹은 베어도 베어도 다시 생겨나는 것처럼 취(趣)도 멸하고 멸하여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79) 나무의 줄기로부터 빈번히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겨나는 것처럼 온갖 번뇌로부터 '혹'과 '업'과 '사'가 자꾸자꾸 일어난다. 겨가 쌀을 싸고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지만, 쌀 자체로서는 능히 싹 등을 낳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과 혹의 득(得)이 업을 싸고 있어 능히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업 자체로서는 능히 초래하지 못한다.
  
  
78) 이하 본론 권제9(p.434)에서 논설한 혹(惑, kle a)·업(karma)·사(事, vastu)의 상호 상생관계 즉 '혹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사가 생겨나며, 사로부터 사와 혹이 생겨난다'를 상기하기 바람
79) 즉 5취의 현행과(現行果)가 소멸하더라도 번뇌가 있는 한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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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이 종자 따위와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쌀이 겨에 싸여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도 번뇌에 싸여 있어 능히 이숙을 초래한다. 온갖 약초가 결과로 성숙하는 것을 후변(後邊 : 병의 최후)이라고 하듯이 업도 결과를 맺으면 다시 이숙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꽃은 과실에 대해 그 생기의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듯이 업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능히 이숙의 결과를 낳는다.
  '업'이 쌀 등과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익은 음식물은 마땅히 수용되는 것일 뿐 전생(轉生)하여 또 다른 음식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숙의 결과인 '사'도 이미 성숙되었으면 능히 또 다른 생의 이숙을 초래할 수 없다. 만약 온갖 이숙과로서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한다면, 또 다른 생은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어 마땅히 해탈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사'가 음식물과 같다고 한 사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번뇌'와 '업'과 '사'는 생(生)에서 생으로 상속하지만, 결코 4유(有)를 벗어나지 않으니, 중(中)·생(生)·본(本)·사유(死有)가 바로 그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본론 권제9, p.408)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여기에서는 마땅히 그것의 염(染)·불염의 뜻과 3계에서의 존재유무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종류의 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성이니
  자지(自地)의 번뇌 때문이며
  나머지는 3성이고, 무색계에는 3유뿐이다.
  於四種有中 生有唯染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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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由自地煩惱 餘三無色三
  
  논하여 말하겠다. 4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성일 뿐이다.
  어떠한 혹(惑 : 번뇌)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인가?
  자지(自地)의 온갖 혹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지(地)에 태어날 경우 이러한 지의 일체 번뇌는 이러한 지의 생유를 염오하게 한다. 그래서 대법자(對法者)는 모두 "온갖 번뇌 중에서 결생위(結生位)에서 [생을] 윤택(潤澤)시키는 공능을 갖지 않는 번뇌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결생은 오로지 번뇌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뿐 스스로의 힘으로 현기하는 전(纏)과 구(垢)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80) 그리고 비록 이러한 결생위 중에서는 신심(身心)이 어둡고 저열할지라도 자주 일어났었고, 혹은 [전생을] 근인(近因)으로 하여 현행한 인발력(引發力)으로 말미암아 [근본]번뇌는 현기하[여 생을 윤택시키게 되]는 것이다.81)
  그리고 중유의 첫 찰나의 상속 역시 필시 염오성으로서, 생유와 같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생유 이외] 그 밖의 나머지 3유는 각각 3성(性)과 통하니, 이를테면 본유와 사유와 중유(제2찰나 이후)의 세 가지는 각기 선성이기도 하고 염오성이기도 하며 무기성이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 무색계는 중유를 제외한 세 가지의 유(有)만 있을 뿐이니, 무색계
  
  
  
80) 즉 결생위에서는 자지의 일체 번뇌에 의해 오염된다고 하였지만, 결생의 순간에는 심신의 상태가 어둡고 저열하여 사택력이 없기 때문에 사택력에 의해 일어나는 간(慳)·질(嫉)·분(忿)·부(覆)·회(悔) 등의 10전(纏)과 뇌(惱)·해(害)·한(恨)·첨(諂)·광(誑)·교(憍)의 6구(垢)는 일어나지 않으며 , 따라서 생유는 그것에 의해서는 오염되지 않는다. 생유는 다만 열 가지 근본번뇌(貪·瞋·慢·無明·疑·有身見·邊執見·邪見·戒禁取·見取)와 그것 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무참·무괴·혼침·도거 등의 힘에 의해 오염될 뿐이다. 10근본번뇌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9(p.860 이하)를, 10전과 6번뇌구에 대 해서는 본론 권제21(p.953 이하)을 참조 바람.
81) 이 논설은 '결생위에서는 심신이 어둡고 저열하다면 근본번뇌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답이다. 즉 그것은 무시이래 끊임없이 일 어난 타력(惰力)에 의해, 전생을 근인(近因)으로 하여 현행된 번뇌력에 의해 결생시에 저절로 현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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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에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별도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유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욕계와 색계[에서의 4유의 존재유무]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거기에 4유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정의 연기에 대해 이미 널리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유정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4유 중에] 머물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는 것이니
  단식(段食)은 욕계계이며, 그 본질은 오직 3처(處)로서
  색처(色處)는 그것의 본질이 아니니
  자신의 근(根)과 해탈에 능히 이익되지 않기 때문이다.
  有情由食住 段欲體唯三
  非色不能益 自根解脫故
  
  촉(觸)·사(思)·식(識)의 세 가지 식(食)은
  유루로서, 3계와 통하는 것이며
  의성(意成)과 구생(求生)·식향(食香)·
  중유(中有)·기(起)는 [중유의 다섯 이름이다.]
  觸思識三食 有漏通三界
  意成及求生 食香中有起
  
  앞의 두 가지 식(段·觸食)은 현세의
  소의와 능의(能依)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뒤의 두 가지 식(思·識食)은 당유(當有)를
  각기 순서대로 이끌어내고 일으키는 것이다.
  前二益此世 所依及能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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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二於當有 引及起如次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설하기를, "세존께서는 어떤 일법을 스스로 깨달았는데, 올바로 깨닫고 올바로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온갖 유정으로서 일체의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물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82)
  어떠한 것을 '식(食, h ra)'이라고 한 것인가?
  식(食)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단식(段食)이며,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사식(思食)이며,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단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미세한 것[細]과 거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미세한 단식이란 중유의 '식'을 말하니, 그것은 향(香)을 먹기 때문이다. 또한 천(天)과 겁초(劫初 : 세계가 이루어지던 태초) 유정의 '식'을 말하니, 배설의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며83) 마치 기름이 모래에 스며들듯이 4지(支)에 흩어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혹은 더러움에서 생겨난 미세한 벌레[細汚蟲 : 이를테면 이나 벼룩 따위]나 어린 아기 등이 먹는 것을 일컬어 미세한 단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거친 단식이다.
  이와 같은 단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있는 것으로, 단식에 대한 탐을 떠나야 상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오로지 욕계계이다.
  84)
  향·미·촉의 세 가지는 일체가 모두 단식 그 자체이니, 조각으로 나누어야 마시고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입이나 코로써 이리 저리 나누어 그것을 섭취하는 것이다.
  광선이나 그림자, 덥거나 시원함 따위를 어떻게 '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82) 『잡아함경』 권제17 제489경(대정장2, p. 124하), "……謂一切衆生由食而存."
83) 겁초의 유정은 지미(地味, 단식의 시초)·지피병(地皮餠)·임등(林藤)을 먹어 배설의 더러움이 없었으나 그 후 그것이 고갈되어 벼를 먹음으로써 두 배설기관이 생겨나게 되었다.(본론 권제12, p.574 참조) 원문에는 '변질의 더러움[變穢]'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따라 '배설의 더러움[便穢]'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84) 색계에는 비록 가장 미묘하고 능히 섭취 증익할 만한 색·성·촉의 경계가 있을지라도 필경 분할하여 씹어 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단식 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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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러한 말은 다수에 따라 논한 것이다"고 하였다.85) 또한 비록 씹어 삼켜 먹는 것은 아닐지라도 능히 몸을 유지하게 하는 것도 역시 미세한 '식'에 포섭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바르고 씻는 것 따위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색처도 역시 조각으로 나누어야 마시고 삼킬 수 있는데, 어째서 단식이라 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자신과 대응하는 근(즉 안근)과 해탈자에게 능히 [섭취되어] 이익 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저 '먹는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근과 대종(이를테면 생리조직)에 섭취되어 이익 되게 하고, 그런 후 그 밖의 다른 근이나 대종에도 그러한 이익을 미쳐야 한다. 그러나 색처를 마시거나 삼킬 때에는 자신의 근이나 대종에 대해서도 이익 되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다른 근이나 대종에까지 미칠 것인가? 즉 그러한 온갖 근의 경계는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86) 그리고 혹 어느 때 색을 보고서 희락(喜樂)이 생겨날 경우, 이는 색을 연으로 하여 촉이 생겨났기 때문에 바로 '식(즉 촉식)'이지 색이 아니다.87) 또한 불환자(不還者)나 아라한은 식의 탐욕[食貪]으로부터 해탈하였으므로 비록 여러 가지 지극히 좋은 음식을 보더라도 어떠한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촉식(觸食)이란 이를테면 [근·경·식]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 촉을 말한다.88)
  
  
85) 단식의 본질이 촉처라면, 촉처에 포섭되는 태양의 빛, 나무의 그림자, 불의 뜨거움, 바람의 시원함과 같은 것을 어찌 식(食)이라 할 수 있는가? 하면 추울 때에는 따뜻함이, 더울 때는 시원한 바람이나 나무 그림자가 몸을 증익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식을 '조각으로 나 누어[段別] 삼켜 먹는 것[呑?]'이라고 함은 몸을 증익시키는 대다수의 경우에 따라 그렇게 정의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86) 색처는 안근의 대상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非至境임) 보여지는 것이지 향·미·촉처처럼 섭취되는 것이 아니다. 즉 만약 색이 먹혔다면 그 것은 설(舌)·신(身)의 경계(즉 觸境)일 뿐, 안(眼) 등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안 등의 근과 그 대종을 이익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87) 아직 이욕하지 못한 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고 희락을 낳았을 경우, 그것도 신체를 증익함이 있기 때문에 색처 또한 '식'이 아니냐 하는 난문의 답이다. 즉 이러한 희락은 색을 소연으로 하는 순락수촉(順樂受觸)이기 때문에 촉식에 포섭된다.
88) 촉식(혹은 樂食, pars h ra)은 삼사화합의 촉을 본질로 하는 희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의 섭취에 의해 신체가 장양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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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식(思食)이란 이를테면 의업(意業)을 말한다.89)
  식식(識食)이란 이를테면 식온(識蘊)을 말한다.90)
  즉 이러한 세 가지는 오로지 유루로서, 3계를 통하여 모두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째서 식(食) 자체는 무루와 통하지 않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온갖 유(有)를 능히 돕는 것, 이것이 바로 '식'의 뜻이다. 그러나 무루는 온갖 유를 소멸하기 위해 닦아서 생겨나는 것[修生]이다." 또한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바와 같다. "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부다(部多)의 유정을 안주(安住)하게 하고, 아울러 생을 구하는 자[求生者]를 도와 이익되게 한다. 그러나 무루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식의 체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부다(bh ta)'라는 말은 이생(已生)의 뜻을 나타내는데, 온갖 취(趣)로서 이미 생겨난 것을 모두 '이생'이라고 하는 것이다.91)
  다시 '생을 구하는 자'라고 설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이는 중유(中有)를 가리키는 말이니, 불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명칭으로서 중유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의성(意成, mano-maya)이니, 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정혈(精血) 등의 외적인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구생(求生, sa bhavai in)이니, 항상 기뻐하며 당래 태어날 곳을 찾아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92)
  
  
89) 사식(혹은 念食, sa cetan h ra)은 제6의식이 희구하는 대상에 대해 낳은 희망의 작용으로, 사(思)를 본질로 한다. 이것은 온갖 근을 자조(資 助)하는 에너지이다.
90) 식식(vij~ n h ra)은 능히 유정의 신명(身命)을 존속시키는 심식 그 자체이다.
91) 부다(部多, bh ta)란 이루어진 것,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이미 지나가 버린, 획득 등 다수의 뜻을 갖지만(보광에 의하면 너무나 뜻이 많아 음역하였다) 여기서는 유정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역에서는 '이생(已生)'으로 번역되고 있다.
92) 여기서 '생'이란 생유를 말하는 것으로, 중유는 생유로 나아가는 것을 진정코 추구하기 때문에 '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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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는 식향신(食香身, gandharva-k ya)이니, 향식(香食)에 힘입어 태어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중유(中有, antar bh va)이니, 두 가지 취(趣) 중간에 존재하는 온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起, abhinirv tti)라고 이름하니, 당래의 생에 대향하여 잠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으로,93) 계경에서 "유괴(有壞) 자체가 일어나고 유괴의 세간이 생겨난다"고 설한 바와 같다.94) 즉 여기서 '일어난 것[起]'은 말하자면 중유인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하기를,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어 기(起)의 결(結)을 끊었지만 아직 생(生)의 결을 끊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즉 이 경에서는 널리 4구(句)를 설하였으니, 두 가지 계의 탐을 떠난 여러 상류반(上流般)을 제1구로 삼았으며, 중반열반(中般涅槃)을 제2구로 삼았으며, 여러 아라한을 제3구로 삼았으며, 앞의 여러 행상(行相)을 제외한 나머지를 제4구로 삼았던 것이다.95)
  또한 '부다(部多)'란 아라한을 말하며, 그 밖의 유애자(有愛者)를 설하여 '생을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96)
  몇 가지의 '식'이 능히 부다(즉 이미 태어난 본유)로 하여금 안주하게 하고, 몇 가지의 '식'이 구생(求生, 즉 중유)의 유정을 도와 이익되게 하는 것인가?
  
  
  
93) 혹은 사유(死有)와 무간에 지체(支體)의 결여됨이 없는 소의신으로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이다.
94) '유괴(savyabadha)'란 유뇌괴(有惱壞) 혹은 유고(有苦)의 뜻이다. 즉 이 경문은 '뇌괴할 만한 자체(自體,즉 중유)가 일어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같은 성격의 세간(생유)이 생겨났다'는 뜻으로, 이 문장 가운데 '일으키다[起, abhinirvartya]'는 말로써 중유의 한 명칭(abhinivrtti)으로 삼았다는 경 증이다.
95) 제1구는 기결(起結)은 끊었지만 생결(生結)은 끊지 못한 경우로서, 상류반불환은 욕계·색계의 번뇌를 끊은 자는 다시 상지로 전생하여 반열반하 기 때문이다. 제2구는 생결은 끊었지만 기결을 끊지 못한 경우로서, 중반불환은 욕계 몰후 중유에서 반열반하므로 더 이상 생유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이다 . 제3구는 기결도 생결도 모두 끊은 경우로서, 중유로도 생유로도 더 이상 상속하지 않는 아라한이 여기에 해당하며, 제4구는 두 가지 모두 끊지 못한 자 로서 이생범부가 그러하다.
96) 이는 앞서 4식은 왜 무루와 통하지 않는가에 대해 제출된 경증에 대한 이석(異釋)으로, 그럴 경우 4식은 아라한을 안주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루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보광에 의하면 이 이석자는 '부다'를 이미 지나가 버린 것, 삼계의 번뇌를 지나쳐 버린 무생자(無生者), 즉 아라한으 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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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두 가지 모두가 4식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즉 [단식에 대해] 애탐을 갖는 모든 이[有愛者]도 역시 단식을 소연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으로 인해 자조(資助)되어 후유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세존께서 "4식은 모두 병(病)과 등창과 화살의 뿌리가 되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97)
  사식(思食)도 역시 현신(現身)을 안주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98) 다음과 같은 세간에 전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한 아비가 있었는데, 때마침 기근을 만나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자신이 이미 굶주리고 여위어 감당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떠나기 전에] 자루에다 재를 가득 담아 벽에 걸어놓고 두 아들을 위로하여 "이것은 보릿가루를 담은 자루이다"고 말하였더니, 두 아들은 희망을 갖고서 오랜 시간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사람이 와서 자루를 열어 보여 주자 아들은 그것이 바로 재인 것을 보고 절망하여 바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큰 바다에서 많은 상인들이 조난을 당하여 배는 부서지고 음식물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물거품이 쌓인 것을 보고 해안인가 의심하여 그곳에 속히 이르기를 희망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러 해안이 아닌 것을 알고는 절망하여 바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에서는 다음의 이야기를 설하고 있다. "큰 바다에 어떤 큰 중생이 있었는데, 해안 위로 올라가 알을 낳고서는 모래로 파묻어 놓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어미가 만약 항상 생각하면 그 알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잊어버리게 되면 알은 바로 깨어져 버렸
  
  
  
97) 이 논설은 촉(觸)·사(思)·식(識)의 3식이 구생(求生)의 유정 즉 중유를 도와 이익되게 하는 것(즉 생유로 낳아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단 식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이다. 경증의 출처는 미상이고 다만 『잡아함경』 권제15 제374경(대정장2, p. 103상)에 '4식에 대한 희탐이 식-명색-제행-당래유-생노병사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병·종기·화살(무상)은 바로 5취온의 비유로서, 단식도 그것을 애탐하는 자로 하여금 후유를 낳게 하는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98) 이 논설은 앞의 논설과는 반대로 단식이 부다(즉 유정)를 안주하게 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사식 등의 3식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이다. '촉'과 '식'은 '사'와 상응하기 때문에 그 밖의 2식도 사식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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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99)
  이것은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식(食)'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어찌 다른 이(어미)의 사식(思食)이 능히 자신(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치 상으로 볼 때 마땅히 '알이 항상 어미를 생각하면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잊어버리는 즉시 목숨을 마치게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촉의 상태(즉 따뜻하게 품고 있을 때의 촉감)에 있을 때를 생각하여 어미에 대한 기억을 일으키는 것이다.
  온갖 유루법이 모두 유(有)를 북돋우어 증장[滋長]시키거늘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식(食)'으로서 오로지 네 가지만을 설한 것인가?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네 가지를 설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이를테면 앞의 두 가지 '식'(단식·촉식)은 능히 이러한 신체의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를 증익하고, 뒤의 두 가지 '식'(사식·식식)은 능히 당유(當有)를 인기하며, 능히 당유를 일으키는 것이다.100)
  여기서 '소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유근신(有根身)으로, 단식이 능히 그것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며, '능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심·심소로서, 촉식이 능히 그것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한다.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식은 이미 생겨난 존재[已生有, 즉 현재생의 유정]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한 것이다. 또한 '당유'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미래의 생유로서, 그러한 당래의 생유를 사식이 능히 인기하며, 사식이 인기하고 나서 업에 의해 훈습(熏習)된 식(識)의 종자(種子)에 따라 후유(後有)가 일어날 수 있다.101) 즉 이와 같은 두 가지 식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未生有]를 인기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하다. 그래서 비록 유루법이 모두 유(有)를 북돋우어
  
  
99) 『집이문족론』 권제8(한글대장경115, p. 175)에서는 반대로 '알이 어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허물어지지 않았지만 어미를 잊게 되면 바로 허 물어진다'고 하였다. 『대비바사론』 권제130(한글대장경123, p. 108)에서도 이같이 인용되고 있다.
100) 앞의 두 가지 식 중 단식은 현재신의 소의인 유근신(有根身)을 증익하고, 촉식은 그것의 능의인 심과 심소를 자익(滋益)하며, 이에 따라 사식이 인업(引業)과 종자가 되어 미래 생유[當有]를 인기하고 식식은 그것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각기 이미 생겨난 명색을 도와 이익되게 하고, 또한 후유를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하는 공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네 가지만을 '식'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101) 식(識)이 취과(取果)의 공능을 일으키는 것을 일컬어 '종자'라고 한다.(『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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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장시킬지라도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오로지 4식만을 설한 것으로, 앞의 두 가지는 이미 생겨난 것을 기르기 때문에 길러준 어머니[養母]와 같고, 뒤의 두 가지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낳아준 어머니[生母]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단(段)은 바로 식(食)인가?
  '단'이면서 '식'이 아닌 것도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102) 제1구는 이를테면 마시거나 씹는 것을 인연으로 하는 것(즉 '단')이면서 온갖 근과 대종을 손괴(損壞)하는 것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식이다. 제3구는 이를테면 마시거나 씹는 것을 인연으로 하는 것이면서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제4구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행상을 제외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촉 등의 식에 대해서도 그것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4구를 갖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 촉 등을 인연으로 하여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면서도 '식'이 아닌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지(地)를 달리하는 촉 등과 무루의 촉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먹고 나서 먹은 자의 신체를 손상시키는 온갖 것도 역시 '식(食)'이라고 이름하니, 처음에는 신체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즉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식은 능히 두 때에 걸쳐 식의 작용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식'이라 이름하니, 첫 번째는 처음 먹을 때로서 능히 허기짐과 목마름을 해소하는 때이고, 둘째는 소화가 되고 나서 근과 대종을 북돋우는 때이다"고 하였다.
  어떤 취(趣), 어떤 생(生)에는 각기 몇 가지의 '식'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5취·4생은 모두 4식을 갖추고 있다.
  어떻게 지옥에 단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102) 제1구는 단(kava k ra, 분할하여 씹거나 마셔서 섭취되는 것)이면서 '식'이 아닌 경우. 제2구는 '식'이면서 '단'이 아닌 경우, 제3구는 '단' 이면서 '식'인 경우, 제4구는 '단'도 '식'도 아닌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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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쇠구슬이나 끓는 구리쇳물이 어찌 단식이 아니겠는가?
  만약 능히 해를 가하는 것임에도 역시 '식'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4구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03) 또한 『품류족론』에서 말하기, "무엇을 일러 단식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능히 온갖 근과 대종을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식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104)
  그 같은 설은 바야흐로 능히 북돋우어 이익되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을 설하여 '식'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앞의 4구와] 어긋나지 않는다. 즉 지옥 중의 뜨거운 쇠구슬 따위는 먹고 나서 능히 손해가 되는 것일지라도 능히 잠시 동안이나마 기갈을 해소하여 '식'의 특징[相]을 획득하기 때문에 역시 '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고지옥(孤地獄)의 단식은 인간의 그것과 같기 때문에 5취 중에는 모두 4식이 존재하는 것이다.105)
  세존께서 설하신 바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욕탐을 떠난 백 명의 외도선인(仙人)에게 능히 먹을 것을 베푼다 할지라도 섬부림(贍部林, 남섬부주를 말함)의 이생(異生) 한 명에게 능히 먹을 것을 베풀면, 이것의 과보는 그것(전자)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는데, 섬부림 중의 어떤 이생을 말한 것인가?106)
  어떤 이는 "섬부주(贍部洲)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유복자(有腹者)이다"고 해석하였다.
  그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경에서는] '한명에게'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에서 만약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생에게 먹을 것을 베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상으로 당연히 소수의 욕탐을 떠난 외도선인에게 먹을 것을 베푼 것보다 뛰어날 것인데 ,어찌 기이하게 서로를 비교하여 [이생에게 베푼 것이] 뛰어나다고 찬탄하였겠는가?
  
  
  
103) 즉 제1구에서 온갖 근과 대종을 손괴(損壞)하는 것은 '식'이 아니다고 하였다.
104) 『품류족론』 권제7(한글대장경117, p. 149). 그러나 이를 『석론』(권제8)에서는 『분별도리론(分別道理論)』이라고 전하고 있다.
105) 고지옥은 8한(寒)·8열(熱)지옥 이외 산야 하천 하늘 지하 어디에도 존재하는 고립된 지옥을 말한다.(본론 권제11 참조)
106) 이는 '식(食)'을 베풀 때의 공덕에 관한 논의로서, 이 이야기는 『중아함경』 권제39 『수달다경(須達多經)』(대정장1, p. 677하)에 나오며, 『 대비바사론』 권제130(한글대장경123, p. 115)에서 다수의 평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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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는 바로 깨달음에 가까이 이른[近佛] 보살이다"고 하였다.
  이치상으로 볼 때 역시 또한 그렇지 않으니, 그에게 베풀면 구지(俱,ko i,수의 단위로서 천만)의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난 복덕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여기서의 이생은 바로 이미 순결택분(順決擇分)을 획득한 자이다"고 하였다.107)
  이러한 말[名]도 역시 뜻에 맞지 않으니, 일찍이 계경이나 본론(本論, 아비달마)에서 '순결택분을 획득하고서 섬부림 중에 머문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로지 그들(비바사사) 스스로가 분별한 것일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최후신(最後身)의 보살로서 섬부림 중에 머물고 있는 자를 일컬어 바로 그 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108)
  이러한 설이 이치에 맞으니, 그 때 보살은 욕탐을 떠난 선인과 동등하기 때문에 그들 선인과 서로 비교하여 뛰어나다고 찬탄한 것이다. 비록 보살에게 보시하는 복덕이 수승하고 가이없다 할지라도 앞의 것과 비교하여 바야흐로 백 배가 뛰어나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09) 즉 후에 세존께서 그 이생(즉 최후신의 보살)을 제외하고서 다시 외도와 예류향의 승열(勝劣)을 비교한 일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때의 이생은 최후신의 보살이 아니라 순결택분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그 이생(즉 순결택분)을 예류향에 대비시켜야 하
  
  
107) 순결택분이란 견도 즉 예류의 성자위에 들기 직전의 단계로서,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을 말한다. 즉 4선근은 결정 적 진리인식[決擇]인 견도에 이르게 하는 근거이자 첩경이기 때문에 '순결택분'이라고 한 것이다. 본론 권제23(p.1038 이하)에서 상론함.
108) 최후신의 보살이란 성도이전의 석가보살을 말한다. 즉 그는 더 이상 미래 후유(後有)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109) 주106)에서 언급한 중아함의 『수달다경』에서는 백 명의 범부보다 한 명의 수다원에게 보시하는 것이 뛰어나며, 백 명의 수다원보다 한 명의 사 다함에게 보시하는 것이…… 내지 한명의 벽지불에게, 백 명의 벽지불보다 한 명의 여래에게 보시하는 것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같이 앞의 것에 편승하 여 비교하였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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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였을 것이다.
  
  이상 유정의 연기와 머무름에 대해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앞(본론 권제5, p.235)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목숨을 다하여 죽을 때 등에 대해 바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때는 어떠한 식(識)이 현전하며 어떠한 수(受)와 상응하여 사유와 생유가 존재하는 것인가?110)
  게송으로 말하겠다.
  
  단선근(斷善根)과 속(續)선근과
  이염(離染)과 거기서 물러나는 것과, 죽고 태어나는 것은
  오로지 의식 중에서만 그럴 수 있다고 인정되며
  사유(死有)와 생유는 오로지 사수(捨受)일 뿐이다.
  斷善根與續 離染退死生
  許唯意識中 死生唯捨受
  
  선정심과 무심에는 두 가지(死와 生)가 있지 않고
  두 가지 무기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며
  서서히 죽을 때[漸死]에는 발과 배꼽과 마음에서
  최후의 의식이 소멸하는 것이니,
  非定無心二 二無記涅槃
  漸死足臍心 最後意識滅
  
  하계(下界 : 악취)와 인·천과 불생(不生)이 그러하며,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것은 수(水) 등 때문이다.
  
  
  
110) 앞에서 논설한 4유(有) 가운데 생유와 사유는 오로지 한찰나일 뿐인데, 그럴 경우 이와 같은 찰나 중에서는 어떠한 식(識)이 현기하며; 이러한 식은 다시 어떠한 수와 상응하며; 선정심과 무심으로도 그것(사유와 생유)을 획득할 수 있는가; 3성 중 어떠한 성질의 식에 머물러야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인가; 명종 시에 식은 어디서 멸하는 것인가; 죽음의 순간인 단말마(斷末魔)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하 이에 대해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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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下人天不生 斷末摩水等
  
  논하여 말하겠다. 선근을 끊을 때와 선근을 상속할 때, 3계 9지[界地]의 염오함을 떠날 때와 그러한 이염(離染)으로부터 물러날 때, 목숨을 마칠 때와 생을 받을 때, 이러한 여섯 가지 상태 중에서는 법이(法爾)로서 오로지 의식만이 현전한다고 인정할 뿐 다른 것(전5식)은 현전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설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최초로 결생하는 중유까지도 함께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11)
  또한 사유와 생유의 의식은 오로지 사수와 상응할 뿐이라고 인정하니, 사수와 상응하는 마음은 명리(明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밖의 수(고·낙수)는 명리하여 사유와 생유에 따르지 않는다.112)
  또한 이러한 두 때(죽을 때와 태어날 때)는 오로지 산심(散心)으로서 정심(定心)이 아니니, 요컨대 유심의 상태여야 하지 필시 무심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정심에 있을 때에는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계지(界地)가 다르기 때문이며, 가행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능히 [소의신을] 섭익(攝益)하기 때문이다.113) 그리고 무심(無心)에 있을 때에도 역시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무심의 상태에서는 필시 목숨[命]이 손상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14) 만약 소의신이 장차 변괴(變壞)
  
  
111) 즉 상계로부터 몰하여 하계에 태어날 때 중유의 첫찰나도 역시 '생'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112) 사수 즉 비고락수(非苦樂受)의 성질은 명리(明利)하지 않아 죽거나 태어나는 순간에 의식과 상응할 수 있지만, 고·락의 두 가지 수는 그 성질이 지극히 명리하여 죽거나 태어나는 순간에 의식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명리한 식(識)의 상태에서 죽거나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죽거나 태어 날 때에는 반드시 어둡고 저열[昧劣]해지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15, 앞의 책, p. 410)
113) 즉 예컨대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상계의 선정에 들 경우 정심은 소의신과 계지(界地)가 다르기 때문에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설혹 계지 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정심은 뛰어난 가행력에 의해 인발된 것이어서 지극히 명리하기 때문에, 또한 선정심은 능히 소의신을 섭익하기 때문에 그 때는 죽는 일이 결코 없다. 죽는 것은 의식이 어둡고 저열하거나 소의신이 해손될 때이다.(상동)
114) 즉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다른 이에게 살해당하여 마치기도 하고, 혹은 임의로 목숨이 끝나기도 한다. 그런데 무심의 상태에 있을 때 는 수승한 법을 임지(任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가 능히 살해할 수 없으며, 반드시 출정(出定)하여 마음을 인출해야 하기 때문에 임의로 목숨을 마치 지도 않는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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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정적으로 소의신에 속한 마음을 다시 일으키고, 그런 후에 비로소 [변괴하여] 목숨을 마치는 것이니, 그 밖의 달리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무심의 상태에 있는 자는 능히 생을 받을 수 없으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즉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생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사유(死有)는 3성(性)의 마음과 통할지라도 열반에 드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무기뿐이다.115) 그리고 만약 욕계에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이숙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라면 그는 '열반에 드는 마음도 역시 위의로와 이숙과의 무기를 갖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욕계에 사수와 상응하는 이숙이 없다고 설하는 경우라면 그는 '열반에 드는 마음에는 단지 위의로만 있고 이숙과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오로지 무기심만이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인가?
  무기는 세력이 미약하여 마음의 끊어짐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목숨을 마치는 단계에서 의식은 어떠한 신체부위에서 최후로 소멸하는 것인가?116)
  갑작스레 목숨을 마치는 자는 의식과 신근이 문득 함께 소멸한다.117) 그러나 만약 서서히 죽는 자로서 하계와 인(人)과 천(天)으로 가는 이는 각기 순서대로 발과 배꼽과 마음(즉 심장)에서 의식이 소멸한다. 즉 말하자면 악취에 떨어지는 자를 설하여 하계로 가는 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그러한 이의 의식은 최후로 발에서 소멸한다. 만약 인취로 나아가는 이라면 의식은 배꼽에서 소멸하며, 만약 하늘로 왕생하는 자라면 의식은 마음 즉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아라한을 설하여 '불생(不生)'이라 이름하니, 그들의 최후심 역
  
  
115) 즉 열반에 들 때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염심이 없으며, 선심과 공교(工巧)·통과(通果)의 무기심은 강성하여 마음의 멸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선심에는 이숙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위의로(威儀路)와 이숙생(異熟生)의 두 무기심 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116) 색근을 소의로 하는 안 등의 5식도 그것이 머무는 처소가 없는데 어떻게 의식이 머무는 처소가 있을 것인가. 여기서 의식이 최후로 소멸하는 곳 이란 최후까지 온기가 있어 활동하는 부위를 말한다.
117) 따라서 의식이 멸하는 별도의 처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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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들의 의식이 멸하는 곳은 정수리이다"고 하였다.
  즉 올바로 목숨을 마칠 때에는 신근은 발 등의 처소에서 소멸하므로 의식도 따라서 그곳에서 소멸하는 것이니, 목숨을 마칠 때가 되면 신근은 점차 소멸하여 발 등의 처소에 이르러 문득 모두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약간의 물을 뜨거운 돌 위에 두게 되면 점차 줄어들고 점차 소실되어 마침내 어떠한 곳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서서히 목숨을 마치는 자는 목숨을 마칠 때를 당하여 다수의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고수(苦受)에 핍박되는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것[別物]을 일컬어 '말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118) 그렇지만 몸 가운데 별도의 마디[支節]가 있어 그것을 건드리면 바로 죽음에 이르게 되니, 이것을 '말마'라고 한다. 즉 만약 수(水)·화(火)·풍(風) 중의 어느 하나가 증성하게 되면 [다시 말해 평등하게 인연화합하지 않게 되면]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말마를 건드리게 되고, 이로 인해 극심한 고수가 생겨나 그로부터 머지않아 마침내 목숨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단말마(斷末摩) 즉 '말마가 끊어졌다'고 하지만] 이는 이를테면 장작이 잘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끊어졌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끊어져 지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단'이라고 하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계(地界)는 어떠한 연유에서 말마를 끊지 않는 것인가?
  내적인 재앙과 환란[災患]으로서 제4의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적인 세 가지 재앙과 환란이란 풍(風)·열(熱)·담(痰)으로서, 그것들은 각기 [역순으로] 수·화·풍이 증가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11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것은 외적인 기세간[外器]의 3재(災)와 유
  
  
  
118) 말마(末摩, marma, 또는 死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급소로서, 지극히 작은 부위이나 몸 가운데 백여 곳이 있다고 한다.
119) 의방명(醫方明) 즉 고대인도의 의학에서는 심장 위의 담분(痰分), 심장 아래로부터 배꼽 이상의 열분(熱分), 배꼽 아래의 풍분(風分) 등 신체에 는 세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병드는 것을 내적 삼재(三災)라고 설한다. 즉 네 번째 재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계(地界)는 말마를 끊지 않는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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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하다"고 하였다.120)
  그런데 온갖 천취의 유정[天子]이 장차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는 먼저 다섯 종류의 소소한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121) 첫 번째로는 의복과 장엄구에서 듣기에 좋지 않은 소리가 나는 것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광명이 갑자기 어둡고 저열해지는 것이며, 셋째로는 목욕할 적에 물방울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며, 넷째로는 그 전의 본성은 시끄럽게 치달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경계에만 머무르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눈은 고요한 한 곳을 응시하였지만 지금은 자주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더라도 결정코 목숨을 마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다섯 가지 커다란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 첫 번째로는 옷이 티끌과 먼지에 더럽혀지는 것이며, 둘째로는 꽃다발이 시들고 마르는 것이며, 셋째로는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것이며, 넷째로는 악취가 몸에 배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자리[本座]를 즐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면 결정코 죽게 되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유정세간이 태어나고, 머무르고, 몰하는 것을 논의하면서 3취(聚)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무엇을 3취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성(正性)과 사성(邪性)과 부정(不定)의 취(聚)는
  성자와 무간업을 지은 이와 그 밖의 유정들이다.
  正邪不定聚 聖造無間餘
  
  논하여 말하겠다. 즉 첫 번째는 정성정취(正性定聚)이며, 둘째는 사성정취
  
  
  
120) 화·수·풍의 세 가지 재앙은 외계 물질적 세계를 파괴하지만 지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적인 신체상의 재앙도 이에 따른다는 뜻. 기세간의 3재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에서 논설됨.
121) 천취(天趣) 중에는 단말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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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邪性定聚)이며, 셋째는 부정성취(不定性聚)이다.
  무엇을 '정성'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탐(貪)을 남김없이 끊고, 진(瞋)을 남김없이 끊고, 치(癡)를 남김없이 끊었으며, 일체의 번뇌를 모두 남김없이 끊은 자, 이를 일컬어 '정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定)'이란 이를테면 성자를 말한다. 성자란 이미 무루의 도가 생겨난 이로서, 온갖 악법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한 것이다. 곧 물러남이 없는 필경(畢竟)의 이계(離繫)의 득(得)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결정코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정정(正定)'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이미 순해탈분(順解脫分)을 획득한 모든 이도 역시 '정(定)'으로 열반을 획득하는데, 어째서 '정정'이 아닌 것인가?122)
  그들은 후에 혹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또한 예류자(預流者)의 극칠반유(極七返有) 등과 같지 않아서 열반을 획득하는 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123) 또한 그들은 아직 능히 사성(邪性)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정'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사성(邪性)'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지옥과 아귀와 방생, 이것을 일컬어 '사성'이라 한다. 그리고 '정(定)'이란 이를테면 5무간업(無間業)을 말하니, 무간업을 지은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사정(邪定)'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정성정과 사성정 이외의 유정을 부정성(不定性)이라고 이름하니, 그들은 이러한 두 인연(즉 正·邪)과 관계하여 둘 중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정적으로 어느 한 가지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2) 순해탈분이란 5정심(停心)과 별상·총상염주의 3현위(賢位)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도는 견도(見道) 열반으로 나아가는 자량이 되기 때문에 ' 순해탈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계의 유정을 성자가 아니라 현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2에서 상론한다.
123) 첫 번째 성자인 예류과(수다원)는 인천(人天)을 최대한 일곱 번 왕래한 후 반열반에 들며, 두 번째 성자인 일래과(一來果, 사다함)는 한번만 더 왕래한 후, 세 번째 성자인 불환과(아나함)는 더 이상 왕래함이 없이 몰후 반열반한다. 자세한 것은 본론 권제23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