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13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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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13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4. 분별업품(分別業品) ①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이 유정세간과 기세간에는 각기 다수의 차별이 있으니, 이러한 차별은 무엇에 의해 생겨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간의 차별은 업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사(思)와 사의 소작(所作)이니,
  사는 바로 의업(意業)이며
  사의 소작이란 이를테면 신업과 어업이다.
  世別由業生 思及思所作
  思卽是意業 所作謂身語
  
  논하여 말하겠다. [세간의 차별은] 단일한 생주(生主)가 일찍이 욕각(欲覺)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유정들의 업의 차별에 의해 생겨날 뿐이다.1)
  
  
1) 외도들은 만유가 생주(生主, Prajapati)나 자재천(自在天, Mahesvara)과 같은 초월적 신이나 자성(自性, prak ti)이나 자아(puru a)와 같은 근원적 원리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하든지, 혹은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유부에서는 만유차별의 참된 원인을 업으로 파악하고, 이하 이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여기서 욕각(欲覺)이란 생주신이 '내가 다(多)가 되리라' '내가 번식하리라'고 의욕하는 것을 말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세계는 바로 이러한 근원적 실재의 의욕으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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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다 같이 업으로부터 생겨났으면서도 울금(鬱金)과 전단(栴檀, 향의 일종) 등은 매우 애호하고 즐길 만한 것인데 내적(즉 유정)인 신체 형태 등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인가?
  온갖 유정의 업의 종류가 이와 같기 때문이다. 즉 [선·악이 뒤섞인] 잡업(雜業)을 지어 내적인 신체 형태를 초래하게 되면 항상 9창문(瘡門)에서 부정(不淨)을 유출하는데,2) 그러한 부정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외적 자구(資具)를 초래하여 [울금과 같은] 색·향·미·촉 등의 매우 애호하고 즐길 만한 것을 낳게 된다.3) 그러나 온갖 천중(天衆)들은 순정(純淨)의 업을 짓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초래된 두 가지 현상[事]은 모두가 미묘하다.4)
  이 같은 세간의 차별이 업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업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심소(心所)인 사(思)와 사의 소작(所作)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째는 사업(思業)이며, 둘째는 사이업(思已業)이다"고 하였던 것이다.5) 여기서 사이업이란 이를테면 사(思)의 소작, 즉 '사'에 의해 조작된 업을 말한다.6)
  이와 같은 두 가지 업은 다시 세 가지로 분별되니, 이를테면 유정의 신업(身業)과 어업(語業)과 의업(意業)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업은 어떠한 방식으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소의신에 근거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자성에 근거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등기(等起)에 근거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7)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 허물이 있는 것인가?
  
  
  
2) 9창문은 두 개의 귀와 눈과 콧구멍과 한 개의 입과 두 배설기관.
3) 여기서 내적 소의신은 이숙인이 초래한 이숙과이며, 외적인 자구는 능작인에 의해 초래된 증상과이다.(본론 권제6, p.314 주153 참조)
4) 순정의 업이란 부잡업(不雜業)인 선업을 말한다. 즉 천중들은 오로지 선업만을 짓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초래된 내적 신체와 외적 자구가 모두 미묘한 것이다,
5) 『중아함경』 권제27 「달범행경(達梵行經)」(대정장1, p. 600상).
6) 업의 본질[體]은 심소인 사(思, cetana, 즉 의지적 작용)와 그것에 의해 외적으로 표출[動發]된 이른바 '사'의 소작(所作)인데, 전자를 사업(思業, cetana-karma)이라 하고, 후자를 사이업(思已業, cetayitva-karma)이라고 한다.
7) '소의'란 업 즉 활동의 근거가 되는 신체를 말하고, '자성'이란 활동 그 자체를 말하며, '등기'란 활동의 원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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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소의신에 근거하였다고 한다면 오로지 한 가지 업(즉 신업)만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일체의 업은 모두 소의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성에 근거하였다고 한다면 오로지 어업만을 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세 가지 종류 가운데 오로지 말[語]이 바로 업이기 때문이다.8) 만약 등기에 근거하였다고 한다면 역시 또한 오로지 한 가지 업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일체의 업은 모두 의(意)의 등기이기 때문이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세 가지 업을 건립한 것은 그 순서대로 위의 세 가지 근거에 의한 것이다"고 하였다.9) 그렇지만 심소인 '사(思)'가 바로 의업이고, '사'에 의해 조작된 업을 둘로 나누어 신업와 어업이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사'에 의해 등기(等起)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업과 어업의 자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신·어의 두 업은
  다 같이 표(表)·무표(無表)를 자성으로 한다.
  身語二業 俱表無表性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이 설한 온갖 업 중에서 신업과 어업은 다 같이 표업과 무표업을 자성으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0)
  
8) 즉 신업이나 의업의 경우, 몸이나 뜻이 바로 업은 아니다. 그러나 말은 그 자체가 바로 업이기 때문에 자성업이다.
9) 『대비바사론』 권제113(한글대장경122, p. 301). 즉 자성에 근거하여 어업을, 소의에 근거하여 신업을, 등기에 근거하여 의업을 설정하였다.
10) 어업과 신업은 다 같이 외부로 나타나기 때문에 표업(vijnapti-karma)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외부로 표시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업의 본질인 '사'에는 그러한 작용이 없기 때문에 표업이라 할 수 없으며, 표업의 성질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무표업(avijnapti-karma)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무표업(혹은 무표색)이라고 하는 것은 신업·어업과 같은 대종소조로서, 행위할 때와는 다른 마음에 있거나 무심의 상태에 있거나 간에 항상 상속하여 선악의 이숙을 낳는 힘을 말한다.(본론 권제1, p.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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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신표업·어표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표업은 '행동'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신체의 형태[形]'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하니,
  온갖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로서 멸진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원인 없이 멸무(滅無)하기 때문으로,
  [원인이 있다면] 생인은 능히 멸인이 되어야 한다.
  身表許別形 非行動爲體
  以諸有爲法 有刹那盡故
  應無無因故 生因應能滅
  
  그러나 '형태' 역시 실유가 아니니,
  [그럴 경우 색처는] 두 근에 의해 취해지기 때문이며
  [형색]극미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표업은 '말소리[言聲]'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한다.11)
  形亦非實有 應二根取故
  無別極微故 語表許言聲
  
  논하여 말하겠다. '사(思)'의 힘에 의해 이러 저러한 신체적 형태[身形]를 개별적으로 일으키는 것을 신표업이라 이름한다.12)
  
  
11) 이상 10구 중 앞의 9구는 신표업의 본질[自性]에 대해, 제10구는 어표업의 본질에 대해 밝히고 있다. 먼저 제1구에서 신표업의 본질이 신체적 형태, 즉 형색(形色)임을 밝힌 다음 이하 5구에서 '신표업은 일정한 시간에 걸친 행동을 본질로 한다'는 정량부(正量部)의 잠주설(暫住說)을 비판하고, 다음의 3구에서는 경량부의 입장에서 다시 제1구의 유부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즉 논주 세친은 경량부의 형색 비실유론에 근거하여 유부의 신표업설을 예의 '인정한다[許, i yate]'는 말로서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현은 그의 『현종론』 (권제18,한글대장경200, p. 482-483)에서 이를 완전히 개작하며, 경량부의 형색비실유론을 다시 비판하고 있다.
12) 이는 유부의 신표업설로, '사'의 심소 즉 의지적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상하굴신 등의 신체적 형태를 신표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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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부파에서는 설하기를, "행동(行動)을 신표업이라 이름하니, 신체가 움직일 때 업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3)
  이를 타파하기 위해 [본송에서 신표업의 본질은 잠주멸의] '행동이 아니다'고 설한 것이니,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유찰나(有刹那) 즉 찰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찰나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법(존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찰나(k a a)를 갖는 법을 '유찰나(k a ika)'라고 이름한다.14) 이는 마치 지팡이(da a)를 갖은 사람을 일컬어 '지팡이를 지닌 이[有杖, da ika]'이라 하는 것과 같다. 즉 온갖 유위법은 존재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 [다시 말해 현행하는 순간] 이로부터 무간에 바로 소멸하여 무(無)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약 [어떤 법이] 여기(이 찰나)에서 생겨났으면 여기에서 소멸하지, 이로부터 다른 곳(찰나)으로 전지(轉至)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다찰나에 걸친] '행동'을 신표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유위법이 모두 유찰나(즉 찰나적 존재)라고 한다면 다른 곳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 성립하게 될 것이다.15)
  
  
13) 여기서 어떤 부파는 칭우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 보광에 의하면 정량부(正量部)이다. 보광에 따르면 유위법 중 심·심소나 소리 빛 등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일련의 행동이라 할 수 없지만, 불상응행이나 신표업, 색신(色身), 산천초목 등의 색법은 유부에서처럼 생성 내지 소멸을 일찰나에 구유(俱有)한 것이 아니라 생성의 초시(初時)와 소멸의 후시(後時) 그리고 그 사이의 주(住)·이시(異時) 등에 걸쳐 상당시간 지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색신은 일련의 전체적인 하나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 역시 잠주멸(暫住滅)하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하다. 즉 유부의 경우 표업의 본질은 소의신의 형색이며, 그것은 행위된 순간 바로 소멸(찰나멸)하지만 무표색을 인기함으로써 행위의 상속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행위는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소멸 또한 찰나멸하지 않고 잠주멸한다고 주장하는 정량부에 있어 표업의 본질은 일련의 행위전체[行動]이며, 그것은 결과를 산출할 때까지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4) 설일체유부에 있어 유위제법은 찰나적 존재[有刹那, k a ika]로서, 찰나든 겁(劫)이든 시간은 오온상에 가립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찰나'는 '법(즉 존재)'과 동의어이다.
15) 모든 존재가 찰나적이라고 한다면 업의 전지(轉至) 상속(相續), 즉 결과를 낳기까지의 상속을 해명할 수 없고, 마침내 업의 상속을 부정하는 단멸론에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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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유위법은 모두 유찰나이지만 그 이치는 지극히 잘 성립하니, 후찰나에 반드시 멸진(滅盡)하기 때문으로, 말하자면 유위법의 소멸은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원인을 근거로 하는 것은 말하자면 결과이다. 그렇지만 소멸은 무(無)로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원인을 근거로 하지 않는 것이다.16) 소멸이 이미 원인을 근거로 하지 않으니, 잠시 생겨났다가 바로 소멸한다. 만약 법이 생겨나는 순간[初位] 바로 소멸하지 않으면 뒤의 순간에도 역시 응당 마땅히 그러할 것으로, 뒤의 법과 처음 생겨나는 법은 그 자성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뒤의 순간에 멸진하는 것이라고 하면 앞의 순간에도 멸진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만약 뒤의 법은 [앞의 법과] 다름이 있어 바야흐로 소멸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이를 다름이 있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17)
  어찌 세간에서 바로 보고 있지 않는가? 땔감 등은 불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멸무(滅無)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 어떤 인식수단[量]도 현량(現量, 직접지각)을 뛰어넘지 못한다. 따라서 법의 소멸은 모두 원인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땔감 등이 불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소멸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가?
  땔감 등은 불과 화합한 이후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다 같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땔감 등은 불과 화합하여 소멸하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인가, 전찰나의 땔감 등이 생겨나서 스스로 소멸하고 그 후 더 이상 다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16) 원인에 근거하는 결과란 전찰나 법의 소멸이 아니라 그 같은 소멸에 따라 등기(等起)하는 후찰나의 법이다.
17) 만약 정량부가 주장하듯이 찰나에 소멸하지 않고 지속한다면, 전찰나와 후찰나의 법은 동일한 자성의 법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순간 소멸하지 않으면 후찰나에도 역시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후찰나에 소멸한다면 양자는 동일한 자성의 법이므로 전찰나에도 역시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법이 몇번이고 멸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전후 찰나의 법이 다르기 때문에 후찰나에 소멸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지속(동일법의 상속)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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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게 된 것인가?' 이는 바람과 등불, 손과 요령소리가 화합하는 경우와도 같다.18) 따라서 이러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량이 아니라] 비량(比量) 즉 추리에 의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비량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소멸은 무(無)로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원인에 근거하여 땔감 등이 비로소 소멸하였다고 할 경우, 마치 '생겨나는 것은 원인에 근거하며,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듯이 마땅히 일체의 소멸로서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렇지만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지각이나 불빛·음성 등은 그 밖의 다른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찰라에 스스로 소멸한다. 따라서 땔감 등의 소멸도 역시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지각과 소리의 경우 전법(前法)은 후법(後法)을 원인으로 하여 소멸한다"고 하였다.19)
  그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전후의] 두 법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20) 또한 의혹[惑]과 앎[智], 괴로움과 즐거움, 탐욕[貪]과 진에[瞋] 등은
  
  
18) '땔감 등은 불과 화합하여 소멸하고, 등불이나 요령소리가 바람이나 손과 화합하여 소멸하는 것은 직접 지각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법의 소멸은 반드시 원인에 근거해야 한다'고 할 경우, 이를테면 요령소리(혹은 등불)가 소멸하는 것은 거기에 손을 대었기(바람이 불었기) 때문인가, 스스로 소멸하였기 때문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일체법의 소멸에는 원인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각이나 소리 따위처럼 원인없이 저절로 소멸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일체법 중에 원인에 의해 소멸되는 법과 원인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소멸하는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요령소리는 손을 대거나 대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찰나찰나에 소멸한다. 다만 손을 대지 않았을 경우 소멸하는 순간 후법이 속생(續生)하지만, 손을 대었을 경우 후법이 속생하지 않을 뿐으로, 소멸 자체는 객관적인 원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19)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의하면 승론(勝論) 이사(異師). 『광기』에서는 '뒤의 물이 핍박하기 때문에 앞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20) 논주 세친의 비판. 즉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을 소멸하는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양자는 동시에 병존해야 한다. 그러나 전찰나의 법이 현재할 때는 후찰나의 법은 미래에 있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생겨나지 않은 법이 현재의 법을 소멸할 수 없다. 혹은 후찰나의 법이 현재할 때 전찰나의 법은 이미 과거로 소멸하였으므로 이미 소멸한 법을 다시 소멸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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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치상 함께할 리가 없다. 또한 만약 어떤 상태에서 명료하였던 지각이나 소리가 무간에 명료하지 않은 지각이나 소리를 낳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불명료한 동류의 법이 명료한 동류의 법을 능히 소멸할 수 있을 것인가? [설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하여 일어나는 후법이 전법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경우] 최후찰나의 지각과 소리는 다시 무엇에 의해 소멸할 것인가?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등불의 소멸은 지속함이 없는 것[住無]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하였고,21) 또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등불이 소멸하는 것은 법(法)과 비법(非法)의 힘에 의해서이다"고 하였다.22)
  이것은 다 같이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無)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며(전자의 경우), 법과 비법은 생멸의 원인이 아니며, 찰나찰나에 수순함과 어긋남이 상반되기 때문이다.23) 혹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일체의 유위법 중에 모두 이러한 원인의 뜻이 있다고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본 논쟁은 마땅히 여기서 끝내야 할 것이니,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유찰나 즉 찰나적 존재로서 그 밖의 다른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땔감 등의 소멸이 불과의 화합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숙변(熟變)이 생겨나는 중에서도 하(下)·중(中)·상(上)이 있을 것이므로 응
  
  
  
21)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의하면 상좌부와 정량부, 칭우에 의하면 세친상좌 즉 고(古)세친.
22) 법(法, dharma)과 비법(非法, adharma)은 승론철학의 24속성[德] 가운데 하나로 공덕과 악덕의 뜻이다. 『광기』에 의하면 이런 두 가지 힘에 의해 능히 제법을 낳기도 하고, 또한 멸하기도 한다. 예컨대 캄캄한 방에 등불이 생겨날 경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는 공덕이므로 법이 생겨난 것이지만 필요로 하지 않는 이(이를테면 절도자)에게는 악덕이기 때문에 비법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반대로 등불이 소멸하는 경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악덕이므로 비법이 소멸한 것이며, 필요로 하지 않는 이에게는 공덕이므로 법이 소멸한 것이다. 곧 "법과 비법에 결부되어 윤회하고, 법과 비법을 떠남으로써 해탈한다." (『바이세시카 수트라』6. 2. 15)
23) '지속함이 없다'는 것은 바로 비존재로서, 그것이 특정 사실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법과 비법은 서로 상반되는 원리로서 예컨대 동일한 등불이라도 독서가에게는 공덕이지만 도적에게는 악덕이다. 이러한 상반된 사실이 동시 구유(俱有)하여 생멸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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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마땅히 생기의 원인이 바로 소멸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4)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불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땔감 등으로 하여금 중·상의 숙변을 낳게 하고 하·중의 숙변을 멸하게 한다. [생인과 멸인이] 혹 어떤 경우 같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유사하기도 하여 하·중의 숙변을 낳는 원인이 바로 능히 하·중의 숙변을 멸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면, 생인(生因) 자체가 바로 멸인(滅因)이 될 것이며, 혹은 [또한 마땅히] 소멸과 생기의 원인은 그 상(相)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25) 나아가 응당 마땅히 이것과 같기 때문에 혹은 이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거나, 그것은 다시 이것과 같기 때문에 혹은 유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령 불꽃이 차별되어 생겨나는 중에 능생(能生)의 원인과 능멸(能滅)의 원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헤아려 볼 수 있다 할지라도 재[灰]나 눈 [雪]·초(醋)·해[日]·물[水]·땅과 화합하여 능히 땔감 등의 숙변을 낳게 하는 중에서는 어떻게 생·멸의 원인이 다르다는 것을 헤아려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26)
  
  
24) 숙변이란 나무가 불에 타면서 그 색깔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만약 땔감 따위가 소멸함에 있어 불과의 화합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한다면, 땔감은 타면서 색깔의 변화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하숙(下熟,적은 변화로서, 이를테면 황색), 중숙(中熟,이를테면 갈색), 상숙(上熟,이를테면 검은 색)이 생겨난다고 할 경우, 하숙이 멸하면 중숙이 생겨나고, 상숙이 생겨나면 중숙이 멸하기 때문에 중숙의 생인(生因)이 하숙의 멸인(滅因)이 되고, 또한 상숙의 생인이 중숙의 멸인이 된다. 다시 말해 생의 원인[生因]이 멸의 원인[滅因]이 되어 동일한 원인이 생·멸의 작용을 갖는다고 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25) 두 가지 이유에서 불이 땔감의 소멸에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논의한다. 첫째 하숙을 낳는 원인이 바로 하숙을 멸하고 내지 상숙을 낳는 원인이 상숙을 멸한다고 하는 경우, 생인이 바로 멸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혹은 생인과 멸인은 다르지만 양자의 불은 상잡(相雜)하여 유사하기 때문에 하숙을 낳는 원인이 하숙을 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 그 상(相)이 유사한데 어째서 하나는 소멸의 원인이고, 하나는 생기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
26) 불꽃이 찰나찰나 여러 형태로 타오르는 중에 능히 타오르고 능히 소멸하는 불꽃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을지라도 정량부에 의하는 한 재[灰] 등은 찰나멸이 아니며 생기 은복의 차별상이 없으며, 땔감 등이 이들과 화합하여 숙변하는 경우에도 전후 차별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하·중의 멸인과 중·상의 생인이 다르다고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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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물을 끓이면 닳아 없어지는 것을 지금 바로 볼 수 있는데, 그 때 불은 화합하는 중에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가?27)
  [물은] 현상의 불[事火]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화계(火界)의 힘이 증대되고, 화계가 증대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수취(水聚)로 하여금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미약하게 생겨나게 하여 마침내 가장 미약해진 후에는 더 이상 상속하지 않게 되니, 이것을 불이 [물]과 화합하여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28)
  따라서 어떤 원인이 있어 제법을 소멸하게 하는 일은 없다. 법은 스스로 그렇게[自然] 소멸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허물어지는 성질[壞性] 때문이다. 스스로 그렇게 소멸하기 때문에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하며, 생겨나자 마자 바로 소멸함으로 말미암아 찰나멸의 뜻이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곧 [일체의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이기 때문에 결정코 [다찰나에 걸친]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이들은] 무간에 다른 방처에 태어나는 중에서, 마치 풀을 태우며 불꽃이 옮겨가듯이 그와 같은 행(行)의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행동'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신표업의 본질은 바로 [신체적] 형태 즉 형색(形色)이라고 하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29)
  그런데 경부(經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30) "형색(形色)은 실유
  
  
27) 불이 땔감의 멸인(滅因)이 아니라면 물을 끓일 때 점차 닳아 없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하는 정량부의 반문.
28) 여기서 화계는 물을 구성하는 지·수·화·풍 4계 중의 화계를 말한다. 즉 솥의 물은 불과 화합함으로써 물 속의 화대(火大)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수취(즉 현상의 물)는 점차 줄어 더 이상 속생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물이 없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솥 밑의 불이 아니라 물 자체 내의 화계의 힘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 자체의 힘의 변동에 의해 없어지게 된 것이다.
29) 앞에서 설한 것처럼 유부에 의하는 한 사업(思業)에 의해 등기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身形]이다. 이를테면 표업은 예비적 행위[加行, 즉 사업], 본격적 행위[根本業道], 그리고 그에 따른 부수적 행위[後起] 등으로 구성되어 일정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전체를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없고, 오로지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살인의 경우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의 행위가 완성되며, 이 때 행위자의 신체적 형태가 바로 신표업의 본질인 것이다.(본론 권제16, p.736 이하에서 상론)
30) 유부에서는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 즉 색처의 본질로서 장·단·방·원 등의 형색(形色)과 청·황·적·백 등의 현색(顯色)을 상정하고 그 실재성을 주장하였지만(본론 권제1, p.15), 경량부에 있어 형색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제 현색의 집합 차별에 의해 가설된 개념(prajnapti)일 뿐이다. 따라서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가 아니라 '사(思)' 즉 의지이며, 표업이란 다만 의지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밖으로 표출된 형태 즉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지나지 않는다. 이하 경량부의 형색 비실재론과 표·무표업론에 대해 논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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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實有)가 아니다. 즉 현색(顯色)의 적취가 한쪽 면으로 많이 생겨날 때 그것을 일시 설정[假立]하여 '길다[長色]'고 하며, 이러한 긴 것에 근거하여 그 밖의 다른 색취가 한쪽 면으로 적게 생겨날 때 그것을 일시 설정하여 '짧다[短色]'고 하며, 네 방면으로 아울러 많이 생겨난 것을 일시 설정하며 '네모졌다[方色]'고 하며, 일체의 처소에서 두루 원만하게 생겨난 것을 일시 설정하여 '둥글다[圓色]'고 하니, 그 밖의 형색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마치 불타는 막대를 보는 것과 같으니, 한 방면으로 무간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일컬어 '길다'고 하고, 그것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색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색의 본질[體]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개별적인 존재로서 형색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색이 두 감관[根]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색취(色聚)에 존재하는 길이[長] 등의 차별은 안근과 신근이 함께 보고 감촉하여야 능히 알 수 있게 된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하나의 색이] 두 가지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허물을 범하게 되니, 이치상으로 색처는 두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촉(觸)에 의해 길이 등의 상을 취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현색에 의해 능히 형색을 취하게 되는 것이며,31) [따라서 형색은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촉과 형색은 하나의 색취 중에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신근이] 촉을 취함으로써 [의식이] 능히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32) 이는 마치 [안
  
  
31) 즉 신근이 촉경을 취할 때 그러한 촉경에 의해 의식이 장·단 등의 상을 취하며, 또한 안근이 현색을 취할 때에도 의식은 장단 등의 상을 취하기 때문에, 장단 등의 형색은 촉과 현색에 의해 일시 설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뜻.
32) 이는 '일색이근소취(一色二根所取)'의 허물에 대한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해명이다. 즉 촉(觸)과 형(形)은 실유로서 하나의 색취 중에 구기하기 때문에 신근이 촉경을 취할 때 일어난 의식이 그곳으로 나아가 장단 등의 형색을 기억하는 것이지 촉경 중에서 신근이 직접 형색을 취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같은 과실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중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장단의 형색은 견고성[堅,地의 자성]이나 습윤성[濕,水의 자성] 등이 신근에 의해 알려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즉 어둠 속에서도 견고성이나 습윤성 등은 알려지지만, 장단은 그렇지 않기 때문으로, 요컨대 먼저 견고함 등의 상을 분별하고 난 다음에 길이 등 비량에 의한 지식[比智]이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에 길이 등의 형색은 신근의 경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다수의 촉이 생겨나는 어떤 일 면을 신근으로써 그 같은 촉을 분별하고 나서 비로소 능히 유추하고 헤아리는 것[比度]이니, 곧 촉과 함께 작용하는 안식에 의해 견인된 의식이 이와 같은 여러 형상으로 차별되는 형색을 향수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불의 색을 보거나 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능히 이와 함께 작용하는 불의 감촉과 꽃의 색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현종론』 권제18, 앞의 책, p.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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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이] 불을 보고서 [의식이] 바로 불의 연기를 기억하며, 아울러 [비근이] 꽃의 향기를 맡고서 [의식이] 능히 꽃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두 가지 법(즉 불과 연기, 혹은 꽃과 향기)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를 취함에 따라 그 밖의 다른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지만, 촉과 형색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촉을 취함에 따라 능히 형색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만약 촉[경]과 형색은 결정코 동일한 적취물이 아니지만 그럴지라도 촉[경]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색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현색도 역시 마땅히 촉경에 의해 결정코 기억해야 할 것이며, 혹은 형색은 현색과 같이 마찬가지로 결정코 [촉경과 구생하는 일이] 없으므로 촉경을 취하는 상태에서도 응당 마땅히 형색을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33)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촉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색을 기억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은 비단 등에 다양한 형색이 보이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일처(一處)에 다수의 형색이 실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나 이치상 그렇지 않으니,34) 예컨대 다수의 현색[이 그러하
  
  
33) 촉경과 형색이 구생하지 않을지라도 촉경을 취하면 형색을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현색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며, 혹은 현색과 촉경은 구생하지 않기 때문에 촉경을 취할 때 청 황 등의 색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형색도 역시 촉경과 구생하지 않기 때문에 촉경을 취하더라도 장단 등의 길이를 알지 못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경량부의 재난(再難).
34) 하늘거리는 비단을 좌측에서 보면 말의 형색처럼, 우측에서 보면 소의 형색처럼, 정면에서 보면 사람의 형색처럼 보일 경우, 만약 형색이 실재한다면 한 곳에 다수의 실체가 존재해야 하지만, 그러나 만약 형색이 실체라면 그와 같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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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은 것]과 같다.35) 그렇기 때문에 형색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유대(有對)의 실색(實色)은 반드시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극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극미를 '길다[長]'는 등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수의 사물(극미)이 이와 같이 안포(安布, 배열)되어 차별된 상에 대해 '길다'는 등으로 일시 설정하는 것이다.36) 그런데 만약 형색극미가 이와 같이 안포된 것을 일컬어 '길다' 등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붕당(朋黨)을 이루는 것일 뿐이니, 지극히 상식적인 이치[極成]가 아니기 때문이다.37) 이를테면 만약 형색에 별도의 극미자상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취집하여 이와 같이 안포됨으로써 '긴 것' 따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온갖 형색은 마치 현색이 그러하듯이 개별적인 극미의 자상을 갖지 않는데 어떻게 취집 안포할 수 있을 것인가?
  온갖 항아리는 현색의 상은 동일하지만 형색의 상은 다르다는 것을 지금 바로 보고 있지 않은가?38)
  이미 분별하지 않았는가? 다수의 사물(극미)이 안포 차별된 것을 '길다'는 등으로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라고. 수많은 개미 등은 형상은 다르지 않지만
  
  
  
35) 현색은 유대이기 때문에 다수의 현색극미가 한 곳에 모일 수가 없다.
36) 이는 극미설에 근거한 형색실유설의 비판이다. 유대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이지만 극미에 장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예컨대 지팡이는 긴[長] 형색을 지녔을지라도 절단하면 짧은[短] 형색이 되기 때문에, 각각의 형색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푸른색의 지팡이를 짤라도 누런 색이 되지 않는다. 곧 장 단 등의 형색은 그 자체 극미의 자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현색극미가 배열되어 다른 것과 차별될 때, 그것을 일시 장단 등으로 언표한 데 지나지 않는다. 즉 현색이 적집체는 어떠한 부분도 그 같은 현색의 상을 갖기 때문에 청색 등의 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極成]이지만, 형색의 적집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37) 즉 장단 등의 형색극미가 모여 '긴 것[長色]' 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으로, 이는 실체와 속성, 형색과 현색의 개별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승론(勝論)에 동조하는 것일 뿐이라는 뜻. 승론의 경우 '긴 것[長體]'이라 함은 24속성 중의 하나인 양(量)의 일종이다. 즉 '긴 것이란 다수의 존재가 적집 차별되어 생겨난 것 중 세 개의 극미로 이루어진 미세한 것과 화합한 것으로서, 어떤 하나의 실체에 대해 길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것을 긴 것이라 이름한다.' 『승론십구의론(勝論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 589)
38) 다 같이 흰색의 항아리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색과는 별도로 형색이 존재한다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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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렬과 안포(배열)에 차별이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형색이 현색에 의존하는 이치 또한 역시 그러한 것이다.39)
  어둠 속에서,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그루터기 등의 사물을 볼 때, 형색은 알 수 있어도 현색은 잘 알 수 없는데, 어찌 현색 등의 안포를 형색이라 하겠는가?
  어둠 속에서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현색을 잘 알 수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다만 '길다'는 등의 분별을 일으킬 뿐이다.40)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둠 속에서 다수의 나무나 사람을 볼 때 다만 나무의 행렬[行] 또는 운집해 있는 무리[軍]만을 알 뿐 그 각각의 개별적인 상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 어느 때 현색과 형색을 다 같이 알지 못하는 경우, 오로지 전체적인 집합체[總聚]를 알 뿐이다.41)
  [신표업의 본질이] '행동'이라거나 '형색'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이미 비판하고 부정하였으니, 그렇다면 너희들 경부종(經部宗)에서는 무엇을 설정하여 신표업의 본질로 삼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와 마찬가지로] 형색을 설정하여 신표업이라 하지만, 그것은 다만 가설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42)
  '다만 가설적인 것을 신표업의 본질로 삼는다'고 이미 주장하였으니,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법을 설정하여 신업이라 한 것인가?
  만약 어떤 업이 소의신에 근거한 것이면 그것을 신업이라 하니, 이를테면 몸을 여러 다양한 형태로 운동하게 하는 '사(思)'가 몸을 매개[身門]로 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신업'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어업과 의업의 경우도 그
  
  
  
39) 개미의 형상은 동일하지만 그것이 늘어선 형태의 차별에 따라 길다 둥글다고 하듯이 현색이 어떻게 배열되었는가에 따라 긴 항아리, 둥근 항아리 등으로 불린다는 뜻.
40) 즉 어두운 곳이나 먼 곳의 사물은 그 현색이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에 다만 의식이 '길다'는 등의 분별을 일으켜 앞에 뭔가 긴 물체 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현색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지 못하였을 뿐이라는 뜻.
41) 전체적인 집합체는 현색과 형색이라는 개별적 존재에 근거한 가상(假相)으로, 곧 가상의 형색의 보았다고 하여 그것으로써 현색을 떠나 형색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
42) 경량부에서는 업의 본질을 사(思) 즉 의지로 보기 때문에 신표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적인 의지가 신체상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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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 상응하는 바(口와 意)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을 설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두 가지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째는 사업(思業)이요, 둘째는 사이업(思已業)이다"고 설하였겠는가?43)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행위하기] 이전에 가행(加行)의 단계에서 사유사(思惟思, 즉 그렇게 사유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나는 당래 마땅히 해야 할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사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유하고 난 다음 작사사(作事思, 즉 행위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앞에서 생각했던 바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말을 발하는 것[動身發語]을 일컬어 '사이업'이라고 한다.4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표업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표업이 존재하지 않으니 욕계의 무표업도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크나큰 과실은 이치상으로 능히 막을 수가 있다. 즉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표업의 두 가지 수승한 사(思)에 따라 일어난 '사'의 차별을 일컬어 '무표'라고 하는 것이니,45)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43) 본권 주5) 참조.
44) 논주 세친의 또 다른 저술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대정장31p.785하)에서는 뭔가 행위하려는 의식작용을 심려사(審慮思, gati-cetana)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심찰(審察)하는 의식작용을 결정사(決定思, niscaya-cetana)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바로 본론에서의 '사유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 외적 행위 즉 표업인 동발승사(動發勝思, vidhavana-cetana)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작사사'에 해당한다.
45) 유부에서는 표업의 본질을 근본업도가 성취된 순간의 신체적 형태(즉 身形과 言聲)에서 구하며, 그 때 그것은 바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無表色]로 잔재 수전(隨轉)하다가 득(得) 비득(非得) 등의 제 원리에 의해, 혹은 다양한 제연(諸緣)에 의해 마음과 결합함으로써 당래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행위의 인과상속의 근거로서 '득'과 '무표' 등을 설정하고 그 모두의 실재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표업의 본질을 '사'로 보아 그러한 사의 힘[思種子]이 전이 상속하여 행위가 진행되기 때문에 가행 근본 후기라고 하는 다찰나에 걸친 행위의 연속과 성취에 관한 난점(이러한 난점으로 인해 정량부에서는 소위 '행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해소될 뿐더러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 역시 무표를 대신하여 '사'의 상속으로써 능히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이론으로 이어지는 경량부 특유의 교설로서, 유부 법유론 비판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권오민, 『유부 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제2부 제3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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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응당 '수심전(隨心轉)의 업'이라 일컬어야 할 것이니, 마치 선정 시의 무표가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것[俱轉]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허물은 없으니, 심려(審慮)와 결정(決定)의 뛰어난 사(思)와 동발승사(動發勝思)에 의해 낳아지기 때문이다.46) 나아가 설령 표업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사'의 힘에 근거해야 하니, 그 성질이 둔중(鈍重)하기 때문이다.47)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형색은 바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표업은 형색(즉 신체적 형태)을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표업의 본질은 바로 말소리[言聲]이다.
  
  무표업의 상(相)에 대해서는 이미 앞(즉 본론 권제1)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경부(經部)에서는 역시 또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것(무표)은 실유가 아니다. 왜냐 하면 오로지 이전의 서한(誓限)으로 말미암아 [살생 등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도 역시 과거대종에 근거하여 시설된 것이지만 그러나 과거의 대종은 그 자체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온갖 무표색에는 색의 특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48)
  
  
46) 경량부에 의하면 수심전의 무표는 말하자면 현행의 사(思) 심소 상에 가립된 것으로 입정 시에만 나타나는 것이지만, 현행의 업종자[思種]는 심려·결정사를 원인(遠因)으로 하고 동발승사를 근인(近因)으로 하여 등기하는 것으로, 무심의 상태에서도 항상 상속하기 때문에 양자는 엄격히 구분된다.
47) 즉 표업의 실유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질이 맹리(猛利)하지 않기 때문에 '사'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무표업을 낳을 수 없다. 즉 그래야만 우연히 일어난 표업은 무표업을 낳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8) 즉 별해탈율의를 수지하고 목숨을 다할 때까지 살생 등을 짓지 않는 것은, 서원이라는 어표업에 근거한 무표업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의 의식작용인 사(思)와 그것의 잠재력 즉 사종자(思種子)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유부의 무표색은 과거 대종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지만 과거제법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무표색은 색법의 특상, 이를테면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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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이것도 역시 실유이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 색과 무루색과 [복업의] 증장을 설하고 있으며
  스스로 짓지 않아도 [업도를 성취하는] 따위 때문이다.
  說三無漏色 增非作等故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에서 "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이 세 가지를 처(處)로 삼아 일체의 색을 포섭하는 것이니, 첫 번째의 색은 유견유대(有見有對)이며, 두 번째의 색은 무견유대(無見有對)이며, 세 번째의 색은 무견무대(無見無對)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제1증)49)
  또한 계경 중에서 무루색이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50) "무루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과거·미래·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 애에(愛恚,탐욕과 진에를 말함)를 일으키지 않고, 내지는 식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을 일러 무루법이라 이름한다." 그럴 때 무표색을 제외한 어떠한 법을 일컬어 무견무대색이라 할 것이며, 무루색이라고 할 것인가?(제2증)
  또한 계경에서 '복업(福業)의 증장이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청정한 믿음을 지닌 선남자, 혹은 선여인으로서 유의(有依)의 일곱 가지 복업의 일을 성취한 자이면, 걸어다니거나, 혹은 머물러 있거나, 혹은 자고 있거나, 혹은 깨어있거나 항상 상속하여 복업이 점차로 증가하며, 복업이 계속하여 일어나게 된다. 무의(無依)의 복업의 일을 성취한 자도 역시 그러하다."51) 그럴 때 무표업을 제외한다면,
  
  
49) 『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대정장2, p. 91하). 여기서 무견무대색은 바로 무표색이다. 즉 경 후반에서 제6의식의 대상이 되는 무견무대의 법을 의식처럼 비물질[非色]이라 하지 않았으니(意內入處者 若心意識非色 不可見無對), 이는 바로 법처에 포섭되는 색 즉 무표색을 뜻한다는 것이다.
50) 같은 경 권제2 제56경(동, p. 13).
51) 『중아함경』 권제2 「세간복경」(대정장1, p. 427). 여기서 유의(有依, aupadhika) 즉 물자를 시여하는 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이란, 비구중에게 방사(房舍)나 전각을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좌상(座床) 내지 와구를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새로 지은 청정한 묘의(妙衣)를 시여하는 일, 방사의 대중에게 아침의 죽과 중식을 시여하는 일, 인민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는 일, 일기가 불순할 때에는 스스로 승원으로 나아가 공양하는 일, 비구들로 하여금 풍우한설(風雨寒雪)에 옷이 젖을까 근심하지 않게 하여 밤낮으로 편안히 선정사유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의(無依, niraupadhika) 즉 시물 없이 짓는 출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이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가 모처로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이곳에 오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이곳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환희 용약심을 품는 일, 청정심을 갖고 스스로 가 친견하는 일, 예경하고 공양하는 일, 삼귀의하는 일, 금계(禁戒)를 받는 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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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마음과는 다른 마음(즉 염오심이나 무기심)이 일어나거나 혹은 무심일 때 어떠한 법에 의지하여 복업의 증장을 설할 것인가?(제3증)
  또한 스스로는 업을 짓지 않았지만 다만 다른 이를 보내어 지었을 경우,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사자는] 마땅히 업도(業道)를 성취하지 않게 될 것이니, 남을 보내는 표업(즉 교사의 어표업)은 그러한 업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업은 지어야 할 바[所作]의 업을 능히 바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지어야 할 바의 업을 짓게 하더라도 이것의 성질은 [그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제4증)52)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들이여! 마땅히 알라. 법처란 말하자면 외처(外處)로서, 이는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무대이다"고 하였다.53) [물론 여기에서는] '무색'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만약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이 말씀은 모자람이 있어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제5증)
  또한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8도지(道支)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정려에 들 때에는 말 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제6증)54)
  
  
52) 즉 다른 사람에 시킨 것(어표업)은 그(살인자)가 한 행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살인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만 예비적 행위(加行)이지 본격적인 행위[근본업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자가 살인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표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53) 『잡아함경』 권제13 제322경, 앞서 인용한 경문의 후반부.
54) 무루도 즉 무루정려에서는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으며, 세속의 현실생활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8성도 중의 정어·정업·정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상태에서도 그것의 무표가 여전히 존속하기 때문에 8성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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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겠는가?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기에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수습하였으며 그 모두의 원만함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명(正命)은 [견도] 이전에 이미 획득하여 청정 선백(鮮白)하였다."55)
  이 경문은 일찍이 세간의 이욕도(離欲道)를 이미 획득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앞의 주장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56)
  또한 만약 무표색을 부정할 경우 역시 또한 별해탈율의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를 받은 후 계가 상속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다른 연(緣)의 마음을 일으킬지라도 여전히 필추 등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제7증)57)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살생 등을 떠나는 계를 일컬어 제당계(堤塘戒)라고 하니, 장시간 능히 상속하여 강물을 막는 방죽처럼 범계(犯戒)의 허물을 막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당'이라 이름할 수 없었을 것이다.(제8증)
  이상의 증거에 따라 실로 무표색은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이러한 논증이 비록 다양하고 여러가지로 희유하고 기특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치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인용한 경증 중 바야흐로 첫 번째 경에서 '세 가지의 색이 있다'고 말한 것 [가운데 무견무대색]에 대해 유가사(瑜伽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려를 닦을 때 선정의 힘에 의해 생겨난 선정의 경계가 되
  
  
  
55) 즉 이 경문으로 볼 때 정어(正語) 등의 뒤의 세 지(支)는 선정 중의 무루의 무표가 아니다. 그것이 만약 무루의 무표라면 견도위에 이르러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
56) 이는 즉 견도 이전 범부위에서 유루6행관으로써 욕계의 번뇌를 떠날 때 욕계불선의 사업(邪業) 등의 세 가지를 떠난 행자에 대해 설한 경문으로, 무루정 중에서는 반드시 무루의 8성도를 획득하기 때문에 앞의 주장과 상위하지 않는다는 뜻.
57)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계의식을 행하여도 그 힘이 상속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염오심이나 무기심을 일으킬지라도 이미 계를 받은 이상 비구라고 일컬어야 한다. 다시 말해 별해탈율의를 수지하고서 일생 범계(犯戒)하지 않는 것은 율의의 무표색이 계체(戒體)가 되어 소의신 중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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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색은 안근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견'이라 이름한 것이며, 처소에 장애받지 않기 때문에 '무대'라고 이름한 것이다"(제1증 비판)5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색이라 이름하겠는가?(유부의 난문)
  이와 같은 논란은 [그대들이 주장하는] 무표색의 경우와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또한 경에서 설한 무루의 색에 대해 [유가사는] "선정의 힘에 의해 생겨난 색계 무루정에 근거한 색을 설하여 바로 무루의 색이라고 한다"고 하였다.(제2증 비판)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무학의 소의신의 색과 온갖 외색(外色)은 모두 다 무루이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누(漏,번뇌)의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루'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온갖 안근(眼根) 내지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였겠는가?59)
  이는 '누' 즉 번뇌를 능히 대치(對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루'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60)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무학의 소의신의 색 등)은 마땅히 유루이면서 또한 역시 무루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서로 뒤섞이는 과실이 있다.
  만약 이러한 ['번뇌를 능히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루이다'는] 이치에 의거하여 유루라고 설하였다면 일찍이 이러한 이치에 의거하여 무루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며, 무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한데,61) 여기에 무슨 뒤섞
  
  
58) 유가사(Yogacara) 즉 관행자(觀行者)가 색계 제4정려를 닦을 때, 정력(定力)에 의해 나타나는 경계가 무견무대색으로, 그것은 이를테면 청황적백의 4현색과 지수화풍의 4대가 세계 중에 충만하다고 하는 8변처(遍處)의 색과 같은 것이다. 변처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9에서 논설한다.
59) 『잡아함경』 권제8 제229경(대정장2, p. 56상), "云何有漏法? 謂眼色 眼識 眼觸 眼觸因緣生受 內覺 若苦 若樂 若不苦不樂……."
60) 그렇다면 반대로 번뇌를 능히 대치하는 것은 '무루'이다. 앞에서는 번뇌의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을 무루라고 하였다.
61) 만약 이러한 ['누 즉 번뇌의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는] 이치에 의거하여 무루라고 설하였다면 일찍이 이러한 이치에 의거하여 유루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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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대들처럼] 색처를 한결같이 유루라고 한다면 다음의 경문은 무엇 때문에 [유루라고] 차별시켜 설하였을 것인가? 즉 "유루(有漏)·유취(有取)의 온갖 색은 마음을 덮는 것[栽覆]이며, 성(聲) 등도 역시 그러하다."62)
  또한 계경에서 설한 '복업이 증장한다'는 말에 대해 선대(先代)의 궤범사(軌範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법이력(法爾力)으로 말미암아 복업이 증장하는 것이니, 어떤 시주(施主)가 시여한 이러저러[如如]한 재물을 이러저러[如是如是]한 향수자가 수용할 때와 같다. 즉 온갖 향수자가 시물을 수용하는 공덕(功德)과 섭익(攝益)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63) 그 후 시주의 마음에 비록 다른 연(緣, 불선 혹은 무기)이 생겨날지라도 앞서 시여를 연으로 한 사(思, 즉 의지)의 훈습(熏習, 즉 종자)이 미세하게 상속하여 점점 전변(轉變) 차별(差別)되면서 생겨나니,64) 이것에 의해 당래 다수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 중에서는] 밀의(密意)로서 '항시 상속하여 복업이 점차 증장하며 복업이 계속 일어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 다른 상속(즉 향수자)의 공덕과 섭익의 차별에 의해 다른 상속(시주자)의 마음에―비록 다른 연이 생겨날지라도―그 같은 전변이 생겨날 수 있는가' 하면, 이러한 의문과 난점은 무표색의 경우와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즉 그것(무표색의 주장)은 다시 어떻게 다른 상속의 공덕과 섭익의 차별에 의해 다른 상속으로 하여금 별도로 실재하는 진실의 무표의 존재를 낳게 할 수 있는 것인가?"65)(제3증 비판)
  
  
62) 『잡아함경』 권제13 제332경(대정장2, p. 92중), "世尊告諸比丘 有六覆. 云何爲六? 謂色有漏 是取 心覆藏……." 즉 만약 유부처럼 앞의 15계를 한결같이 유루라고 한다면 이 경에서 구태어 색을 유루 유취의 온갖 색이라고 차별하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뜻.
63) 여기서 공덕(gu a)과 섭익(anugraha)은 예컨대 시여받은 음식 등에 의해 4무량 등의 공덕을 닦고 자신의 몸을 이익되게 하거나, 혹은 4무애해를 닦아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는 것. 즉 그것에 의해 시여자의 상속에 복업이 증장한다.
64)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주115)를 참조 바람.
65) 세간의 복이나 출세간의 복이 단절되지 않고 상속 증장되는 것은 선행된 의지[思]와 그것이 훈습된 종자가 미세하게 상속하여 전변·차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선행을 하고자 생각[思]하여 그렇게 하였을 때 그러한 생각의 힘[思種子]이 잠재되어 그 후 그가 다른 연의 마음(즉 악심이나 무기심)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이전에 훈습된 사종자가 찰나찰나에 걸쳐 미세하게 상속 전변하여 차별됨으로써 세간의 복은 증장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종자의 힘을 자연적이고도 본래적인 힘 즉 '법이력'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무표와 동일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유부처럼 무표를 주장할 경우, 출세간의 복업[無依]에는 마땅히 표업이 부재하기 때문에 무표색 또한 있을 수 없게 되는 논리적 난점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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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만약 무의(無依) 즉 출세간의 온갖 복업의 경우에는 어떻게 복업을 상속하여 증장하게 되는 것인가?
  역시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사(思)를 자주 익힘에 따라 [상속하여 복업이 증장하게 되며], 나아가 꿈 속에서도 항상 ['사'가] 수전(隨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표를 주장할 경우 무의의 복에는 이미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데, 거기에 어찌 무표가 존재할 것인가?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유의(有依)의 온갖 복업도 역시 그러한 대상[境,즉 시여]을 소연으로 하는 사(思)를 자주 익힘으로 말미암아 항시 상속하고 증장하게 된다"고 하였다.6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의 경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경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청정한 시라(尸羅, sila 戒)를 갖추고서 조련(調練)한 선법(善法)을 성취한 온갖 필추들이 타인이 시여한 온갖 음식을 받고 나서 무량심(無量心)의 선정에 들고 신증(身證)이 구족하여 머물게 되면,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시주자의 무량의 선복(善福)은 상속신을 더욱 윤택하게 할 것이고 무량의 안락이 그의 몸에 흘러 들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시주자의 복업은 항상 그러한 때 증장하는 것으로, 어찌 결정코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뛰어난 '사'가 항상 있어야 그렇게 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사(思)의 훈습(즉 종자)이 [시주자의 소의신 중에서] 미세하게 상속하여 점차 전변 차별되면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결정코 이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논주의 평석)
  
  
  
66) 이는 경부(經部) 이사(異師)의 설로서, 앞의 무의의 복업에 대한 해석처럼 유의의 복업도 단순히 향수자의 공덕과 섭익에 의해 상속 증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 시여를 생각하는 뛰어난 사(思) 심소에 의해 복업이 증장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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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스스로는 업을 짓지 않았지만 다만 다른 이를 보내어 업도를 행하였을 경우,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논설해야 할 것이다. "본래의 가행(加行)에 의해 심부름꾼이 교사(敎唆)에 따라 시킨 일을 성취하였을 때, 법이(法爾)로서 능히 교사자에게 [가행의 사(思)종자가] 미세하게 상속하면서 전변 차별되어 [업도의 사종자가] 생겨나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당래 다수의 과보를 능히 초래하게 된다.67) 나아가 스스로 업을 지어 구경(究竟)에 이를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은 도리에 의해 [당래의 과보가 초래하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제4증 비판)
  즉 응당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이러한 [사종자가] 미세하게 상속하면서 전변 차별되는 것을 일컬어 '업도'라고 한다. 이는 곧 결과(곧 사종자)에 대해 원인(신·어업을 낳는 사)의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으로, 이것은 신·어업(즉 動發勝思)에 의해 인기된 결과이기 때문이니, 마치 무표업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종(論宗)에서 무표를 역시 신·어의 업도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68)
  그런데 대덕(大德)은 설하기를, "취온(聚蘊) 중에서 삼시에 일어나는 사(思)로 말미암아 살생의 죄에 저촉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나는 당래 살생할 것이다, 지금 살생한다, 이미 살생하였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69)
   단지 이것만에 의해 업도가 구경(究竟)에 이르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어
  
  
  
67) 남을 시켜 살인을 행하게 하였을 경우, 그 때 이미 교사자의 몸 속에는 그러한 예비적 행위(가행)의 의지력(思種子)이 훈습되어 상속하며, 나아가 청부자가 살인(근본업도)을 성취하는 순간 그 행위의 원인인 가행의 종자는 상속의 특수한 변화(전변과 차별)를 일으키기 때문에 살인행위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
68) 즉 유부에서 무표를 역시 신·어업의 업도라고 하듯이, 사종자를 업도라고 할 수 있다는 뜻. 왜냐 하면 사종자는 심려·결정사와 동발승사를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다만 원인(즉 '사')의 차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본권 주 45), 46)참조.
69) 여기서 대덕은 보광에 의하면 법구(法救)로서, 『대비바사론』 권제118(한글대장경122,p.431)에 언급되고 있다. 즉 무표나 사종자를 따로이 설정할 필요없이 다만 과거·현재·미래 3세에 걸쳐 일어나는 사(思)의 차별이 바로 업도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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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등을 아직 살해하지 않았으면서 '이미 살해하였다'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무간업(無間業)을 성취하는 일은 없다.70) 그러나 착오 없이 스스로 지은 살생의 일에 대해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킬 경우 바로 살생의 죄에 저촉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대덕의 말을] 설할 경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무표'에 대해서만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품어 그것의 존재를 결정코 부정하면서 [사(思)의] 훈습이 상속하면서 전별 차별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종자)도 그것(무표)도 모두 알기 어려우니, 지금 이 중에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업도는 바로 마음의 종류(種類)라고 하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몸의 가행으로 말미암아 [지어야 할] 일이 구경에 이르렀을 때 교사자의 몸 가운데 심신(心身)과는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무표의 존재가 생겨난다고 하는 이와 같은 종의에 대해서는 능히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71) 그리고 만약 이것(思)에 의해 인기된 그러한 가행이 [해야 할] 일을 낳아 구경에 이르렀을 때, 이것(교사자의 업도)은 그것(所作事의 구경)으로 말미암아 [심신을 떠나지 않는 근본업도의 사종(思種)으로서] 상속하고 전변 차별되어 생겨나게 된다. 곧 이와 같은 종의에 대해서는 가히 기뻐할 만한 하니, 단지 마음 등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서만 능히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논설한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이미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데, 거기에 어찌 무표가 존재할 것인
  
  
  
70) 삼시에 걸친 의사[思]만으로는 업도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밖에도 목적에 부합하는 신체적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논주의 비평.
71) 즉 업도는 마음으로 계기(繼起) 상속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어떤 이에게 살인을 교사하고서(가행) 살인행위가 성취되는 순간 교사자의 몸 속에 심신과는 다른 별도의 존재인 무표색이 생겨나 그것에 의해 상속한다고 주장할 경우, 교사자는 직접 살인이라고 하는 표업을 성취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의 무표업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경량부에서는 심신과는 다른 개별적 실체로서의 무표색을 부정하며,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마음의 종류(즉 사종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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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 바로 그것이다.72)
  또한 법처를 설하여 '무색'이라 말하지 않았으니, 앞(제1·제2증 비판)에서 설한 바와 같이 선정의 경계가 되는 무견무대가 법처에 포섭되는 색이기 때문이다.(제5증 비판)
  또한 그(유부종)는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도지(道支)에 여덟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고 하는 말을 마땅히 '바로 도(무루도, 즉 무루정)에 머물고 있을 때 어떻게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을 획득할 것인가?'라는 말로 설했어야 할 것이다.(제6증 비판) 즉 이러한 무루도의 단계에서 올바른 말을 발하고[正語] 올바른 작업을 일으키며[正業], 옷 등을 구한다[正命]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인가?
  그(무루정에 든 견도의 행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무루의 무표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출관(出觀)한 후에 이전의 세력에 의해 능히 세 가지 정도(正道)를 일으키고 세 가지 사도(邪道)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즉 원인 중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무표에 어(語)·업(業)·명(命)의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7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러한 뜻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인가? 즉 비록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무루]도에 머물 때 그와 같은 의요(意樂)와 의지(依止)를 획득하기 때문에 출관한 후에 이전의 세력에 의해 능히 세 가지 정도를 일으키고 세 가지 사도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원인 중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8성도지를 모두 안립할 수 있는 것이다.74)
  
  
72) 즉 무의의 복에는 표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교사자에게는 근본업도로서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무표업이 없어야 한다는 힐난.
73) 무루정에 들어서는 정어·정업·정명을 직접 일으키지 않지만, 일찍이 획득하였던 그것의 무표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루정 중에서도 8정도가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다. 즉 무루정 중에서의 무표를 원인(因)으로 삼아 출정 후 3사(邪)가 아니라 3정(正)을 일으키는 것(果)으로, 무루정에서는 다만 원인 상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여 3정이 있다고 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한 3정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74) 경량부에 의하면 무루정에 들 때 의요(asaya, 어떠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식으로, 열 가지 심대지법 중 思cetana와 欲chanda를 본질로 함)와 수승한 소의신(asraya)을 획득하기 때문에 그러한 세력에 의해 출정 후에도 능히 3정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출정 후의 3정(果)은 입정(因)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앞서 유부의 무표(因)와 3정(果)의 경우에서처럼 원인으로써 결과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무루정에서도 8성도지는 모두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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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75) "오로지 사어(邪語) 등의 일을 짓지 않는 것을 설하여 '도지(道支)'라고 하니, 이를테면 [무루]정 중에 있을 때 성도(聖道)의 힘으로 말미암아 결정코 [사어 등의] 부작(不作)을 능히 획득한다. 즉 이러한 선정에서는 어떠한 것도 짓지 않지만, 이것은 무루도에 의해 안립된 것이기 때문에 '무루[성도](혹은 正道)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모든 곳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진실의 법체(法體)에 의거하여 비로소 그 명칭이 설정되는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획득과 불획득, 칭찬과 헐뜯는 것, 찬탄과 비방, 괴로움과 즐거움의 8세법(世法)과 같다.76) 즉 이것(불획득)은 의복이나 음식을 획득하지 않는다는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정어 등)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도 역시 마땅히 이에 준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사원(思願)의 힘에 의해 먼저 기한[要期]를 세워 능히 신·어의 악업을 막아 방지한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별해탈율의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77) 그런데 만약 '[무표를 부정한다면] 다른 연(緣)의 마음을 일으킬 경우 마땅히 별해탈율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허물(犯戒)을 일으키려고 할 때 [사(思)의] 훈습력에 의해 그것을 기
  
  
75)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이사. 그는 정어(正語) 등을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사어(邪語) 등을 짓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루정에서도 당연히 8정도가 성취될 수 있다.
76) 8세법이란 세간의 유정이 따르는 법으로, 여기서의 뜻은 획득하지 않은 상태를 '불획득'이라고 이름할 뿐 거기에 대응하는 개별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8세법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권제173,앞의 책124, p. 533을 참조)
77) 별해탈율의의 효능(즉 防非止惡의 힘) 역시 사(思)에 의해 지속한다. 예컨대 수계의식을 행할 때, 마음을 일으켜 구족계를 수지할 것을 결정[思願]하고, 그 힘에 따라 평생토록 살생 등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며, 이후 이것에 의해 살생 등의 악업을 막는 것이다. 곧 수계의식의 효능은 사종자(思種子)의 상속에 의한 것이지 무표에 의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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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하여 바로 중지하기 때문이다.(제7증 비판)
  계(戒)가 허물을 막는 방죽[堤塘]이 된다고 하는 뜻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에 준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먼저 결정코 악업을 짓지 않겠다는 서원[誓限]을 세우고, 이후 자주 기억하고 늘 부끄러워하는 생각[慚愧]을 떠올려 능히 스스로 제지하여 범계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허물을 막는 방죽이 된다고 하는 뜻은, 마음이 그것을 받아 지니려고 하는 상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표에 의해 능히 범계를 막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실념(失念)하여 파계하지 않는 자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제8증 비판)78)
  바야흐로 이러한 여러 다양한 쟁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그만 마치기로 한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무표색이라 이름하는 실체[實物]가 존재하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의로 삼는 바이다"고 하였다.
  
  앞(본론 권제1)에서 무표업은 대종소조성(大種所造性)이라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표업의 대종소조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와는 다른 대종소조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무표업)의 능조(能造)의 대종은
  표업의 소의(즉 대종)와는 다른 것이다.79)
  此能造大種 異於表所依
  
  논하여 말하겠다. 무표업과 표업은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동일한 화합에 의해 거칠고[麤] 미세한[細] [두 가지] 결과가 있다고 하는
  
  
  
78) 즉 실체인 무표색에 의해 마치 강물을 막는 방죽처럼 범계를 막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실념하여 파계하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올바른 논의가 아니다는 뜻.
79) 이 게송은 범본이나 『구사석론』에는 부재하는 것으로, 현장 역본인 『구사론』 『순정리론』 『현종론』에서만 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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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은 이치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80)
  표업과 대종이 반드시 동시에 생겨나는 것처럼 무표색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소조색은 대개 대종과 동시에 생겨난다. 그렇지만 현재·미래의 소조색 중의 일부는 역시 또한 과거의 대종에 근거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일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계의 후찰나의 무표는
  과거의 대종에 의해 생겨난다.
  欲後念無表 依過大種生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으로서 초찰나 이후에 존재하는 무표는 과거의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이것(과거대종)을 소의(所依)로 삼아 무표는 일어날 수 있으며, 현신(現身)의 대종(무표와 더불어 함께 구기하는 소의신 중의 대종)은 다만 능히 의지(依止)가 될 뿐이다.81) 즉 그 순서에 따라 [과거의 대종은 무표업의] 전인(轉因)이 되고, [현재의 대종은] 수전인(隨轉因)이 되니, 마치 바퀴가 손과 땅에 의해 땅위를 굴러간다고 하는 것과 같다.82)
  [대종은 5지(地 : 욕계와 4정려지)와 통하며, 신·어업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떤 지의 신·어업은 어떠한 지의 대종소조인가?
  
  
  
80) 무표색은 무견무대이기 때문에 미세한 대종의 소조이며, 표색은 유견유대이기 때문에 거친 대종의 소조로서, 그 화합이 동일하지 않다.
81) 소의(asraya)와 의지(sa nisraya)의 관계는 친소(親疎) 정도의 차이로서, 전자가 생모라면 후자는 유모 정도의 의미이다.
82) 여기서 '전인'이란 무표의 전기인(轉起因)이 되는 과거의 대종으로서, 수레를 끄는 손에 비유된다. 즉 여기서 '전(轉)'이란 일으킨다는 뜻으로 무표를 직접 낳는 원인[能生因]을 말한다. 그리고 '수전인'은 무표의 의지(依止)가 되는 현재의 대종으로, 수레가 가는 땅에 비유된다. 즉 무표는 바로 이 같은 현재 대종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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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는 자지(自地)의 소의가 되며,
  무루는 생겨나는 처(處)에 따른다.
  有漏自地依 無漏隨生處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신·어의 두 업은 오로지 욕계에 계속되는 대종소조이며, 나아가 제4정려에 계속되는 신·어의 두 업은 오로지 바로 그러한 지의 대종소조이다.
  그러나 만약 무루의 신·어업이라면, [5지의 소의신에 의해] 이러한 지에 태어남에 따라 마땅히 이러한 지의 대종소조로 생기하여 현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무루업이 바로 이러한 지의 대종소조인 것은, 무루법은 계(界)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필시 대종이면서 무루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의신의 힘에 의해 무루업이 생겨나기 때문이다.83)
  이 같은 표업과 무표업은 어떠한 존재이며, 또한 어떠한 유형의 대종소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표업은 무집수(無執受)이며
  또한 역시 등류성이고 유정수이다.
  無表無執受 亦等流情受
  
  산위(散位)에서의 무표의 소의는 등류성이고
  유집수이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지만
  
  
  
83) 이상 무루의 무표는 '무루의 대종소조'가 아니라 그것이 생겨나는 지에 따른다는 이유를 밝힌 것으로, 첫째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초정려에 들어 일어난 무표는 초정려의 대종소조이니, 무루는 3계에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무루의 대종소조가 아닌 까닭은 무루의 대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무루의 무표는 소의신에 의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소의신이 태어나는 지의 대종소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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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로부터 생겨난 무표의 소의는 장양(長養)이고
  무집수이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다.
  散依等流性 有受異大生
  定生依長養 無受無異大
  
  그리고 표업은 오로지 등류성이며
  소의신에 소속되는 것은 유집수이다.
  表唯等流性 屬身有執受.
  
  논하여 말하겠다. 지금 이 본송 중에서는 먼저 무표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즉 이러한 무표업은 무집수(無執受)이니, 변애(變礙)의 성질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84) 또한 역시 등류성(等流性)이기도 하다.85) [본송에서] '또한 역시'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무표는 바로 찰나성의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첫 번째 무루법(즉 고법지인)의 무표가 그러하다.86) 그 밖의 무표는 모두 등류성이니, 말하자면 동류인(同類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유정수(有情數)일 뿐으로, 내적 존재(즉 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욕계 [산심(散心)]에 존재하는 무표업은 등류성이며, 유집수이며, [표업과는]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니, [본송에서]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는 말은 신표업과 어표업의 일곱 가지 무표는 각기 다른 대종소조임을 나타낸다.87) 그리고 정려로부터 생겨난 무표업은 다시 두 가지로 차
  
  
84) 무표는 비록 색법이지만 비집적의 존재이기 때문에 심·심소의 소의가 되지 않는다. 즉 무표색은 안(眼)·이(耳)와는 달리 감각을 갖지 않은 대종소조이다.
85) 환언하면 무표는 선·불선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며, 극미의 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며, 동류인을 갖기 때문에 바로 등류성의 존재라고 한 것이다.
86) 즉 첫 번째 무루법(즉 苦法智忍)과 구생하는 무표업은 유찰나로서, 게송에서 '역시 또한'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등류성인 동시에 찰나성의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는 뜻.
87) 신·어표업의 일곱 가지란, 불살생·불투도·불사음의 세 가지 신업과 불악구·불망어·불양설·불기어의 네 가지 어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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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되는데, 이를테면 온갖 정려율의(즉 定俱戒를 말함)와 무루율의(道俱戒를 말함)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는 다 같이 선정에 의해 장양(長養)되는 것으로서, 무집수이며,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다. 여기서 '다른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러한 무표업의 일곱 가지는 다 같이 일구(一具)의 4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임을 의미한다.88)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정려 중에서는] 마음이 오로지 단일한 것처럼 무표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표업(有表業)은 오로지 등류성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유표업으로서 소의신에 소속되는 것(즉 신표업)이라면 유집수이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산심에서의 무표업과 동일하다.89)
  표업이 생겨날 때 요컨대 본래의 몸의 형량(形量)을 파괴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9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만약 [본래의 몸을] 파괴한다면 이숙의 색이 끊어져 마땅히 다시 속기(續起)해야 할 것으로, 이는 비바사(毘婆沙)의 종의에 어긋나는 것이다.91) 그러나 만약 파괴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한 소의신에 두 가지 형량(본래 몸과 표업의 형색)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이 생겨난 별도의 등류의 대종이 있어 유표업을 짓는 것으로, 본래의 [이숙]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신체의 부분에 근거하여 유표업을 일으킬지
  
  
  
88) 정려 중에서는 마음이 단일하여 차별이 없을 뿐더러 소의가 되는 대종에도 차별이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의 무표는 동일한 대종소조이다.
89) 말하자면 유정수이고, 아울러 소의가 되는 대종은 등류성이고 유집수로서 각기 다른 4대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90) 여기서 몸의 형량이란 우리들 이숙신의 형태와 크기를 말한다. 이는, 이를테면 손으로서 표업을 일으킬 경우 손에는 새로이 생겨난 대종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손보다 커야 할 것이고(그럴 때 본래의 손은 파괴됨), 온몸으로 표업을 일으켰을 경우 새로 생겨난 대종이 온몸에 증익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몸보다 커야 할 것인데, 사실은 어떠한가 하는 물음이다.
91) 이숙색은 일단 단절되면 다시 속기(續起)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사(婆沙)의 종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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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도 마땅히 본래의 신체보다 커야 할 것이니, 새로이 생겨난 대종이 두루 증가하여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두루 증가하여 더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표업을 두루 낳을 수 있을 것인가?
  신체 중에 큰 구멍이 있기 때문에 [표색과 대종을] 서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92)
  업의 두 가지와 세 가지와 다섯 가지 갈래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93)
  그렇다면 이러한 업의 성(性)과 계(界)와 지(地)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표는 유기(有記)이나 그 밖의 것은 3성과 통하고
  불선업은 오로지 욕계에만 있으며
  무표업은 욕계와 색계에 두루 존재하고
  (선·무부의) 표업은 오로지 유사(有伺)의 두 지에만 있다.
  無表記餘三 不善唯在欲
  無表遍欲色 表唯有伺二
  
  욕계에는 유부(有覆)의 표업이 없으니,
  등기심(等起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欲無有覆表 以無等起故
  
  논하여 말하겠다. 무표업은 오로지 선·불선의 성질과 통할 뿐으로, 무기의 무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92) 이숙신은 꽉 막힌 것이 아니라 틈이 있어 마치 모래에 물을 부어도 그 부피가 증가하지 않듯이, 유표업을 일으키더라도 신체의 크기가 증가하는 일은 없다는 뜻.
93) 두 가지의 차별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 세 가지 차별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과 의업(意業). 다섯 가지의 차별은 신업과 어업의 표·무표업과 의업(즉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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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의 마음은 그 세력이 미열(微熱)하여 강력한 업(즉 무표업을 말함)을 인발하여 능히 낳게 할 수도 없으며, 원인(즉 표업)이 소멸하였을 때라도 그 결과(무표)가 계속 일어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94) 그리고 [본송에서] 말한 '그 밖의 것'이란 표업과 사업을 말하니, 이 같은 세 가지 업은 선·불선·무기와 모두 통한다.
  [이러한 신·어의 표·무표업과 사업] 중에서 불선업은 욕계에만 존재하고 그 밖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상(上) 2계의 유정은] 이미 불선근과 무참(無慚)·무괴(無愧)를 끊었기 때문이다.95) 그리고 선과 무기의 업은 온갖 지(地)에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본송 중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욕계와 색계의 두 계에는 모두 무표업이 존재하지만, 무색계 중에는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표업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떠한 처소에서 신·어의 표업이 낳아지는 일이 있으면 바로 그것에 따라 그러한 처소에 신·어의 율의(律儀)가 존재하는 것이다.9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몸은 욕·색의 2계에 태어났으면서 무색정에 든 경우에도 마땅히 율의가 존재해야 할 것이니,97) 마치 무루심을 일으킬 때 무루의 무표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가 않으니, 그것(무루의 무표)은 계(界)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색계에 만약 무표가 존재한다면 마땅히 대종에서 생겨나지 않은 무표가 존재해야 할 것이며, 또한 유루의 무표라도 다른 계지(界地)의 대종을 소의로 삼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98) 또한 모든 색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무
  
  
94) 무표업은 바로 선이나 악의 강력한 마음에 의해 등기(等起)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95) 탐·진·치의 세 가지 불선근과 무참·무괴는 욕계에만 존재한다. 즉 색계·무색계에는 그것을 끊어야 비로소 태어나기 때문에 상 2계에는 불선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96) 이러한 이유에서 무표업은 욕계·색계에 두루 존재하는 것으로, 제2정려 이상에서도 하지의 설식(舌識)을 빌려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색계 중에서는 신·어의 표업이 낳아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는 신·어의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97) 무색계에 4대종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욕계·색계에 태어나 무루정에 들 때 생처(生處)의 대종으로 무색의 무표를 지어야 한다는 힐난.
98) 무색계에 무표색이 없는 첫 번째 이유. 무루의 무표는 더 이상 3계에 계박되지 않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유루의 무표는 3계에 계박되기 때문에 다른 세계 즉 생처(生處)인 욕계·색계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조작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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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정에 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정 중에서 능히 색을 낳을 수 없다. 즉 무색정에서는 색상(色想)을 조복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악계(惡戒 : 살생 등의 불율의)를 대치하기 위해 시라(尸羅 : sila, 戒)를 일으키는 것으로, 오로지 욕계 중에서만 온갖 악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색계는 욕계에 대하여 네 종류의 원격함[遠]을 갖추었으니, 첫째가 소의원(所依遠)이며, 둘째가 행상원(行相遠)이며, 셋째가 소연원(所緣遠)이며, 넷째가 대치원(對治遠)이다.99) 그래서 무색계에는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색은 오로지 두 유사지(有伺地 : 즉 有尋有伺와 無尋唯伺地)에만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욕계와 초정려에만 통하는 것으로, 그 이상의 지에는 표업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유부무기의 표업은 결정코 욕계에 존재하지 않으며,100) 오로지 범세(梵世, 즉 초정려) 중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대범천이 거짓[誑諂]의 말을 하였다고 일찍이 들은 적이 있으니, 이를테면 자신의 대중들 가운데에서 마승(馬勝)이 따져 묻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스스로를 찬탄하였다는 것이다.101)
  상지(제2정려 이상)에는 이미 언어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찌 성처(聲處)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외적인 대종(이를테면 바람)을 원인으로 하여 소리가 발생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위의 세 정려에도 역시 무부무기의 표업은 존
  
  
  
99) 이러한 네 종류의 원(遠)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7 주55)를 참조할 것.
100)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101) 즉 마승(Asvajit, 또는 Assaji, 최초의 불제자로서 5비구 중의 1인)이 대범왕에게 '4대종은 어떠한 상태에서 멸진하여 없어지는가'라고 묻자 대범왕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교란(矯亂)되어 말하기를, "나는 범천의 무리 가운데 대범으로, 자재신으로서 기세간의 작자이며, 유정의 화작자이며, 낳은 자이며 기르는 자로서, 바로 모든 존재의 아버지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후 마승을 대중들 밖으로 불러내어 첨언(諂言)을 부끄러워하며 사과한 후 다시 부처님께 가 물었다고 한다.(『장아함경』 권제16 『견고경(堅固經)』) 이 이야기는 본론 권제4(p.179)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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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하지만 선심도 없고 염오심도 없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상지에 태어나면 하지의 선심이나 염오심을 일으켜 능히 신·어표업을 낳지 않으니, [하지의 선심은] 저열하기 때문이며, [하지의 염오심은] 끊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의 설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02)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제2정려 이상에는 표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욕계 중에는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표업을 발동시키는 등기심(等起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심(尋)·사(伺)의 마음이 있어야 능히 표업을 발동시킬 것인데, 제2정려 이상에는 도무지 이 같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오로지 수소단으로서, 견소단의 번뇌는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이른바 내문전(內門轉)이기 때문에 욕계 중에는 결정코 유부무기이면서 수소단인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103)
  104) 그렇기 때문에 표업은 위의 세 정려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욕계 중에는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법은 단지 등기(等起)에 의해서만 선·불선의 성질 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102) 즉 유여사는, 위의 세 정려에서는 선심은 저열하고 염심은 끊었기 때문에 선·염오의 표업이 일어나지 않지만 초정려의 마음을 빌려 무부무기의 표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부무기의 표업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소의신의 계계(界繫)에 의해 표업의 유무를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서는 능히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의 계계에 의해 표업의 유무를 논의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발표심(發表心,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표업의 직접적 원인으로서 소의이지만, 신체는 오로지 간접원인으로서 의지(依止)일 뿐이며, 또한 표업의 성질은 표업 자체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자체는 무기임) 발표심에 의해 판단되기 때문에, 초정려에만 표업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선설(善說)로 평취한 것이다.
103) 유부무기 가운데 표업을 일으키는 것은 외면에서 일어나는[外門轉] 정의적 번뇌인 수소단의 번뇌로서, 욕계 유부무기에는 유신견·변집견과 이와 상응하는 무명이 있지만(본론 권제19, p.893 이하를 참조할 것), 이것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견소단이기 때문에 표업을 일으킬 수 없다.
104) 여기서 불상응행은 생(生) 등의 4상(相)과 아울러 득(得)과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 즉 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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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인가?
  네 종류의 원인에 의해 선한 성질 등을 성취하는 것이니, 첫째는 승의(勝義)에 의한 것이며, 둘째는 자성(自性)에 의한 것이며, 셋째는 상응(相應)에 의한 것이며, 넷째는 등기(等起)에 의한 것이다.
  어떤 법의 어떤 성질은 어떤 원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의선은 해탈(즉 열반)이며
  자성선은 참(慚)·괴(愧)와 선근이다.
  勝義善解脫 自性慚愧根
  
  상응선은 그것(자성선법)과 상응하는 것이며
  등기선은 [상응법에 의해 등기한] 색업 등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불선'이라 이름하며
  승의무기는 두 가지 영원한 것[常,즉 무위]이다.
  相應彼相應 等起色業等
  翻此名不善 勝無記二常
  
  논하여 말하겠다. 승의선(勝義善)이란 진실의 해탈을 말한다. 즉 열반 중에서는 최고로 안온(安隱)하며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적멸하였기 때문으로, 마치 어떠한 병도 없는 것[無病]과 같다.
  자성선(自性善)이란 참(慚)·괴(愧)와 선근을 말한다. 즉 유위법 중에 오로지 참·괴와 무탐(無貪) 등의 세 종류의 선근은 [다른 선법과] 상응하거나 다른 어떤 법에 의해 등기될 필요 없이 그 자체의 성질이 선이기 때문으로, 마치 좋은 약[良藥]과도 같다.
  상응선(相應善)이란 그러한 [참 등의 자성선]법과 상응하는 선법을 말한다. 즉 심·심소법은 요컨대 참·괴, 그리고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할 때 비로소 선한 성질을 성취하며, 만약 그러한 참 등의 법과 상응하지 않을 경우 선한 성질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것은 마치 좋은 약에 섞인 물과도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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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등기선(等起善)이란 신업·어업과 불상응행을 말한다.104) 즉 이것은 바로 자성선이나 상응선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좋은 약이 섞인 물[良藥汁]을 먹고 낳은 우유와도 같다.
  그런데 이류(異類)의 마음에 의해 생겨난 득(得) 따위가 어떻게 선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성(善性)에 네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다고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선에도 이와 서로 반대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것인가?
  승의불선(勝義不善)이란 생사(生死)의 법을 말한다. 즉 생사 중에 존재하는 온갖 법은 모두 괴로움을 자성으로 삼아 지극히 안온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고질병과도 같다.
  자성불선(自性不善)이란 무참·무괴와 세 가지 불선근를 말한다. 즉 유루법 중에서 오로지 무참·무괴와 아울러 탐·진·치 등의 세 가지 불선근은 [다른 불선법과] 상응하거나 다른 어떠한 법에 의해 등기될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바로 불선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과도 같다.
  상응불선(相應不善)이란 그러한 [무참 등의 자성불선]법과 상응하는 법을 말한다. 즉 심·심소법은 요컨대 무참·무괴와 불선근과 상응할 때 비로소 불선성을 성취하며, 만약 상응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에 섞인 물과도 같다.
  등기불선(等起不善)이란 [불선심에 의해 등기된] 신·어업과 불상응행을 말한다. 즉 이것은 바로 자성불선이나 상응불선에 의해 등기된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이 섞인 물을 먹고 낳은 우유와도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생사(生死)를 승의불선이라고 한다면] 유루법으로서 무기이거나 혹은 선한 성질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니, 그것들은 모두 생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만약 승의에 근거하여 말할 경우 참으로 말한 바와 같겠지만,105) 여기에서
  
  
104) 여기서 불상응행은 생(生) 등의 4상(相)과 아울러 득(得)과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 즉 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한다.
105)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유루법으로서 선 혹은 무기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 불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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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이숙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 즉 온갖 유루법으로서 능히 그 성질을 무엇이라고 기표(記表)할 수 없는 이숙과라면 '무기'라는 명칭을 설정하고, 능히 좋아할 만한[可愛] 이숙과라고 기표할 수 있으면 그것을 일컬어 '선'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승의무기(勝義無記)란 이를테면 두 가지 무위를 말하니, 커다란 허공(虛空)과 비택멸(非擇滅)은 오로지 무기성일 뿐으로, 더 이상 다른 갈래[異門]로 분별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06)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등기(等起)의 힘이 신·어업으로 하여금 선·불선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신·어업의 소의가 되는] 대종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107)
  행위작자의 마음은 애당초 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지 4대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힐난의] 예가 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선정심에 수전하는 무표는 바로 선정에 있을 때의 작의(作意)에 의해 인생(引生)된 것이 아니며, 또한 역시 동류가 아니기 때문에 산심(散心)의 가행에 의해 인발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선(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도 마땅히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08)
  이와 같은 뜻에 대해 마땅히 힘써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06) 심소법으로서 그 자체 무기성인 것과, 무기심과 두루 상응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등기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상응·등기무기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기에는 유위법으로서 무기인 자성무기와 무위법으로서 무기인 승의무기 두 가지가 있다.
107) 예컨대 탐 등에 의해 등기된 신·어업을 불선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탐 등의 마음에 의해 인기한 대종도 신·어업과 동일 찰나에 등기되기 때문에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힐난.
108) 만약 작자의 마음은 애당초 업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4대종이 선 불선을 성취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입정할 때에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무표 또한 입정 전의 가행위(加行位)의 산심(散心)에서 인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애당초 그것(선)을 목적으로 입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하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며, 혹은 반대로 색계선심에서 인기된 천안·천이도 역시 무기가 아니라 선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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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견소단의 혹(惑)은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이른바 내문전(內門轉)의 번뇌이기 때문에 능히 표업을 발동시킬 수 없다.10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 중에서는 '사견(邪見)으로 말미암아 사사유(邪思惟)와 사어(邪語)와 사업(邪業)과 사명(邪命) 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설한 것인가?
  그것은 이러한 경설과 상위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등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원인이 되거나 그것의 찰나가 되는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차례대로
  전인(轉因)이라 이름하고, 수전인(隨轉因)이라 이름함을.
  等起有二種 因及彼刹那
  如次第應知 名轉名隨轉
  
  견소단의 식(識)은 오로지 전인이고
  오로지 수전인인 것은 5식이며,
  수소단의 의식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고
  무루와 이숙의 마음은 두 가지가 모두 아니다.
  見斷識唯轉 唯隨轉五識
  所斷意通二 無漏異熟非
  
  전인이 선 등의 성질일 경우
  수전인은 각기 3성 모두 허용될 수 있지만
  모니(牟尼)의 경우 선이면 반드시 선이고
  
  
  
109) 견소단의 번뇌는 나쁜 스승이나 사설(邪說)·사교(邪敎)에 유도되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지적인 번뇌[迷理惑]이다. 따라서 견소단의 식(識)은 오로지 전인(轉因)이 될 뿐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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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이면 무기이거나 혹은 선이다.
  於轉善等性 隨轉各容三
  牟尼善必同 無記隨或善
  
  논하여 말하겠다. 표업·무표업을 등기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인등기(因等起)와 찰나등기(刹那等起)가 바로 그것이다. [업에] 선행하여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동일찰나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차례대로 처음의 것을 전인(轉因)이라 이름하고, 두 번째 것을 수전인(隨轉因)이라고 이름한다.110) 즉 인등기는 장차 업을 짓고자 할 때, ['나는 지금이나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마땅히 지어야 할 업을 조작하리라'고 사유하고 나서] 능히 업을 인발(引發)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전인'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찰나등기는 바로 업을 지을 때 [선행한 전인의 마음에 의해 인발된 업과]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수전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수전인은 업에 대해 어떠한 공능을 갖는 것인가?
  만약 수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록 선행하는 원인(즉 전인)이 있어 능히 업을 인발하더라도 죽은 자의 경우처럼 업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11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수전인이 존재하지 않는] 무심정(無心定)에서는 어떻게 계(戒)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인가?
  모든 유심자(有心者)에게 있어 업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수전인의 마음은 업에 대해 작용을 갖는 것이다.
  
  
  
110) 인등기(hetu-samutthana)란 표업·무표업을 인기하는 심·심소를 말하는데, 업을 짓고자 할 때 현재의 인등기심은 미래의 업을 인기하기 때문에 '전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곧 여기서 '전'이란 일으킨다[起]는 말이다. 그리고 찰나등기(tatk a a- samutthana)란 업과 동시병존하면서 업의 생기에 충족조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업이 현재하는 찰나에 그것과 불상리의 관계로서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수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111) 예컨대 내일 소풍을 가겠다고 인등기의 마음을 일으켰을지라도 그 직후 죽을 경우 실제의 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실제의 업과 동일찰나에 수전하는 마음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전인에는 표업을 일으키는 공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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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견소단의 식(識)은 표업을 발동시킴에 있어 오직 전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즉 능히 표업을 일으키는 심(尋)·사(伺)가 생기하는 데 자량이 될 뿐이기 때문에 수전인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외면에서 생겨나는 이른바 외문전(外門轉)의 마음(즉 심·사와 상응하는 마음)이 바로 업을 일으킬 때, 이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견소단의 식이 만약 표색(表色)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마땅히 견소단이 되어야 하지만 [색은 견소단이 아니다].
  만약 [표색을] 견소단으로 인정하는 경우,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112)
  이는 즉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위배되며, 또한 명(明)·무명(無明)과 상위하지 않기 때문에 유루업의 표색은 견소단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유루업의 표색은 견소단이 아니라는] 도리에 대해 마땅히 다시 성립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표색을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대종도 역시 견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다 같이 견소단인 마음의 힘에 의해 생기한 것이기 때문이다.113)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예컨대 [대종은] 선도 불선도 아니며, 혹은 다시 그렇다고 인정할지라도 이치상 역시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114)
  응당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온갖 대종은 결정코 견소단이나 비소단(非所斷)이 아니기 때문이며, 일체 종류의 불염오법은 명(明)·무
  
  
  
112)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사에 의해 제기된 힐난이다. 즉 표업의 본질을 형색이 아니라 인등기의 심소(즉 思)로 이해한 경량부로서는 신·어표업도 당연히 견소단이다. 그러나 유부에서는 아비달마본론에서 '색은 견소단이 아니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표색은 명(明)·무명과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색은 견도 즉 명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함께하며, 무명과도 불상리의 관계로서 함께하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라고 하였다.(후술)
113) 이는 유부의 반난(反難)으로, 만약 표색을 견소단으로 인정할 경우, 그것을 조작하는 대종도 역시 견소단이라 해야 할 것이니, 견소단인 사견(邪見) 등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114) 신·어의 표색은 인등기(因等起)의 마음에서 의욕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동성(同性)이지만, 다시 말해 인등기의 마음이 불선이면 표색도 불선이며, 따라서 견소단이지만, 대종은 그렇지 않고 항상 무기이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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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無明)과 상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같은 경설은 다만 앞의 인등기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설하였기 때문에, [견소단의 혹은 내문전(內門轉)이기 때문에 능히 표업을 발동시킬 수 없다는 설과] 상위하지 않는 것이다.115)
  그러나 만약 5식신(識身)의 경우라면 오로지 수전인이 될 뿐이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며, 외문(外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116) 수소단의 의식(意識)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유분별이기 때문이며, 외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의 무루와 이숙생의 마음은 전인도 수전인도 되지 않으니, 오로지 선정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가행에 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일어나기 때문이다.117)
  이와 같은 즉 [전과 수전의 관계를] 4구(句)로 차별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인이면서 수전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소단의 마음이 그것이다. 수전인이면서 전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5식이 그것이다. 전인이면서 역시 수전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수소단인 3성의 의식이 그것이다. 전인도 아니고 수전인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무루와 이숙생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전인(轉因)과 수전인(隨轉因)의 마음은 반드시 동일한 성질인가?
  이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앞의 전인의 마음이 만약 선한 성질이라면 뒤의 수전인의 식(識)
  
  
  
115) 즉 앞에서 인용한 '사견으로 말미암아 사사유·사어 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경설은 사견이 인등기가 되어 사어(邪語) 등의 표업을 발동시키려는 마음을 돕는다는 뜻으로 설해진 것이지 찰나등기가 되어 바로 사견이 직접 사업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견소단의 혹은 내문전의 번뇌이기 때문에 찰나등기가 되어 능히 표업을 발동시킬 수 없다는 설과 상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6) 즉 무분별이기 때문에 전인이 되지 않으며, 외면에서 일어나는 식이기 때문에 수전인이 된다.
117) 즉 무루의 마음은 오로지 선정 중에 존재하는 내문전이기 때문에 외문전인 신·어업을 일으키는 전·수전인이 되지 않는 것이며, 이숙의 마음은 전생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으로 그 성질이 저열하기 때문에 고의적인 의지[故思]에 의해 일어나는 신·어업의 전·수전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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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선 등의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전인의 성질이 불선·무기일 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오로지 모니(牟尼)이신 세존의 전인과 수전인의 식만은 대부분 동일한 성질이며, 일부 동일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전인이 만약 선심이라면 수전인도 역시 선심이며, 전인의 마음이 만약 무기라면 수전인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혹 어떤 때에 무기심에 따라 선심이 일어나는 경우는 있어도 선심에 따라 무기심이 일어나는 일은 일찍이 없었으니, 불 세존께서 혹 설법 등을 행함에 있어 마음이 증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쇠퇴하여 없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 세존께서는 항상 선정 중에 계시기 때문에 마음은 오로지 선성(善性)으로 무기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那伽)는 다니실 때도 선정에 들어 있고
  나가는 머물고 있을 때에도 선정에 들어 있으며
  나가는 앉아 있을 때에도 선정에 들어 있으며
  나가는 누워 있을 때에도 선정에 들어 있다.118)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경설은 부처님의 뜻이 만약 산심을 즐거워하지 않으실 경우 네 가지 위의(威儀)에서도 능히 항상 선정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지만 [선정 이외] 다른 상태(즉 산심)에서는 위의로(威儀路)와 이숙에 의해 생겨난 마음과 통과심(通果心)을 일으키는 일이 없지는 않다.119)
  온갖 유표업이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하는 경우 전인(轉因)의 마음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수전인(隨轉因)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118) 『중아함경』 『용상경(龍象經)』 (대정장1, p. 608중). 여기서 '나가(naga)'는 용(龍) 즉 세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대중부에서는 유부와는 달리 부처님의 행(行)·주(住)·좌(坐)·와(臥)는 항상 선정 중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선일 뿐으로 무기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119) 부처님은 뭔가 만드는 기술 즉 공교처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4종의 무부무기 가운데 세 가지만을 논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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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령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만약 전인과 같다고 한다면 욕계 중에도 마땅히 유부무기의 무표업이 존재해야 할 것이니, 유신견과 변집견이 능히 전인이 되기 때문이다.120) 혹은 마땅히 일체 종류의 견소단의 마음이 모두 능히 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전인과 같다고 말한다면 악·무기심과 함께 획득되는 별해탈율의의 표업은 선성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121)
  이 같은 힐난에 대해 마땅히 힘써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인의 마음과 같이 표업은 선 등의 성질을 성취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논주 세친의 正釋) 그렇지만 그것은 견소단인 전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니니, 수소단인 전인의 마음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122) 그리고 만약 표업으로서 수전인이 되는 마음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 선 등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견으로 말미암아 사사유 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그 같은 경문은 단지 앞의 인등기에 근거한 것일 뿐 찰나등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욕계 중에는 결정코 유부무기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응당 마땅히 다만 '그 같은 경문은 오로지 그 밖의 다른 마음과 떨어져 있는 인등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견소단의 마음이 능히 전인이 될지라도 욕계에는 결정코 유부무기의 표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20)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은 견소단의 혹으로서 유부무기이기 때문이다.
121) 예컨대 별해탈계를 받는 최초의 순간은 비록 선심일지라도 제3갈마 시에 악이나 무기심이 일어날 경우, 이 같은 마음과 동시에 별해탈의 계체(戒體)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22) 예컨대 나의 존재를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 먼저 그 같이 생각하고서 외문전(外門轉)의 수소단인 유심유사(有尋有伺)의 마음으로써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견소단인 전인과 무간에 수소단인 선·악·무기 등의 전인이 일어나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닌 수소단의 전인에 의해 표업의 성질이 결정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