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지자지두(智者智 )선는 성이 진씨(陳氏)라는 사람으로 날 때부터 겹눈동자 귀인의 상(貴相)이었다. 열다섯살에 장사(長沙)땅 부처님에게 가서 출가하겠다고 서원하였는데 염불하는 중 꿈꾸듯 황홀한 가운데서 바다에 맞닿은 산이 보였다. 산꼭대기에서 스님 한 분이 손짓하며 부르기를 “너는 여기 살게 될 것이며 여기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깨고 나서 더욱 지극 정성을 드렸다. 열여덟살에 상주(湘州) 과원사(果願寺) 법서(法緖)스님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율장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정도 아울러 닦았다.
당시 무진(武津)사람인 혜사(慧思)선사는 명성이 높고 수행이 깊었는데, 그의 도풍을 멀리 전해듣고는 기갈든 사람보다 더 만나보고 간절하게 만나보고 싶어 하였다. 혜사스님이 살던 곳은 당시 진(陳)나라와 제(齊)나라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법을 중히 여기고 목숨을 가벼히 여겨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니 혜사스님이 말하였다.
“옛날 영산회상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는데 그 인연으로 지금 다시 온 것이다.”
그리고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보여주고 4안락행(四安樂行)을 설하였다.
선사는 밤낮으로 고행하면서 가르침대로 마음을 갈고 닦았다. 이 때 법을 구하는 마음은 불탔으나 살림살이는 가난하여 잣나무를 끊여 향을 대신하고 주렴을 걷어올려 달빛 속으로 나아가고 달이 지면 소나무 잣나무에 불을 붙여 밝혔으며 그것도 떨어지면 밤나무로 이어갔다.
그렇게 열나흘이 지나 법화경을 외우다가 약왕품(藥王品)에서 “모든 부처가 함께 칭찬하되 ‘이야말로 참된 정진이요. 이야말로 참된 법이니 이것을 여태껏 공양드리는 길이라 한다”’한 구절에서 심신이 툭 트였다. 계속 정에 들어 고요한 가운데 관조해 보니 마치 높이 뜬 해가 깊숙한 골짜기를 비추듯 법화를 깨닫고 맑은 바람이 허공에 노닐듯 모든 법상(法相)을 통달했다. 그리하여 체험한 것을 혜사선사께 아뢰니 혜사선사는 다시 자기가 깨달은 바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을 말해주고 나흘밤을 정진케 하였는데, 그때 정진화의 공은 백년 정진한 것보다 나았다. 혜사선사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그대가 아니면 중득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들었던 정(定)은 법화삼매(法華三昧) 전에 나타나는 방편이며, 나타나 지속된 것은 법화의 선다라니(族陀羅尼 : 假有를 돌려 空으로 들어가는 대지혜로서 法華 六卽位 중 제5위)이다. 설령 문자법사 천만명이 그대의 논변을 따르려 해도 안될 것이니 설법하는 사람 중에 그대가 제일이다.”
그 후 의동대장군(儀同大將軍)인 기군리( 佛君理)의 청으로 와관사(互官寺)에 주지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물러나며 문도를 기군리에게 보내 말하였다.
“제가 예전 남악선사 회상에 있다가 처음 강동(江東)으로 건너왔을 때 법의 거울은 더욱 맑았고 마음 거문고는 자주 올렸습니다. 제가 처음 와관사에 왔을 때 40명이 함께 좌선하여 20명이 법을 얻었고, 다음해에는 백여명이 좌선하여 20명이 법을 얻었으며, 그 다음 해는 2백명이 좌선하여 10명이 법을 얻었습니다. 그 후 대중은 점점 많아졌으나 법을 얻는 사람은 점점 적어졌고 도리어 제 수행에 방해만 되니 제 수행력을 알만 합니다. 천태산에 관한 기록에 보면 선궁(仙宮)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그 산에서 인연을 쉬며 봉우리를 쪼아먹고 개울물을 마시면서 평생의 원을 펼쳐볼까 합니다.”
진(陳)나라 태건(太建) 7년(575) 가을, 천태산에 들어가니 노승 한 분이 길을 인도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서 절을 지으려 하신다면 산밑에 터가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스님께 드리겠습니다.”
“지금 같은 시절에는 초막도 꾸미기 어려운데 하물며 절을 짓겠는가?”
“지금은 때가 아니나 삼국이 통일되면 세력있는 사람이 여기에 절을 세울 것입니다. 절이 다 지어지면 나라도 맑아질 것이니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때 천태산에는 정광(定光)선사란 분이 있었는데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산에 산 지 30여년에 자신을 감추고 도를 발혀 그와 어울리기는 쉬웠으나 그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예언한 일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지자선사는 그날 저녁 정광선사의 초막에서 묵게 되었는데 정광선사가 말하기를“예전에 손짓하며 부르던 일이 기억나느냐?”하기에 그가 사는 곳을 보니 영락없이 전에 꿈에서 본 산과 같았다.
수양제(隋煬帝)가 사람을 보내 스님을 석성(石城)으로 오게 하였으나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 명이 여기에 있는 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것도 없이 도끼를 주워들고 오늘 인연줄을 끊어버리겠다.”
그리고는 무량수를 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하였다.
“정토를 장엄하는 아미타불의 48원과 꽃 연못 보배 나무에 머물기는 쉬우나 사람이 없다. 지옥의 불덩이 수레를 눈앞에 보고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래도 극락에 가서 날 수 있는데 하물며 계율과 지혜를 닦은 사람이겠는가 .그들은 늘 도를 닦아온 수행력이 있으므로 결실이 헛되지 않으며 부처님의 음성과 모습은 진실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이때 지랑(智朗)스님이 청하였다.
“선사께서는 어느 지위에 이르셨으며,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면 어디에 가서 나십니까? 또 저희들은 누구를 종사로 삼아야 합니까?”
“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6근청정위(六根淸淨位)를 원교 6즉(六郞)의 계위중 상사즉위(相似郞位)에 해당하며, 눈·코·귀 등의 6(六根)이 청정함을 얻는 지위를 얻었을 것이나 남을 위하느라 내가 손해를 보아 5품위(五品位)에 머물렀다. 그대가 어느 곳에 나느냐고 물었는데 나의 모든 스승과 도반들이 관음보살을 시종하고 있으니 그들이 와서 나를 맞아갈 것이다. 누구를 종사로 삼아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듣지 못했는가? ‘계율[波羅提木又]이 그대의 스승이며 4종삼매(四鍾三味)가 그대들의 밝은 길잡이니 그대들의 무거운 짐을 버리게 하고 3독(三毒)을 없애줄 것이다. 또한 4대를 다스리고 업의 결박을 풀어주며 마군을 부수고 선미(禮味)를 맛보게 하며 아만의 깃발을 꺽고 삿된 길을 멀리하게 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은 무위의 구렁텅이[無抗 ]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비탄의 장애[大悲難]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 하였으니 오직 이 큰 스승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나와 그대들은 법으로 만나 법으로 친해졌고 불법의 등불을 전하고 익혔으니 그렇게 해서 권속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우리 문도가 아니다.”
말을 마치자 선정에 든 듯하였다.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는 복주(福州)사람으로 머리를 깎고 천태산 국청사에 가서 구족계를 받으려 하였다. 그때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두 스님이 미리 길을 닦아 놓고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생불[肉身大士]이 여기 와서 구족계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길옆의 깊숙한 풀숲에 숨어 있다가 선사가 그 앞으로 지니가자 별안간 호랑이 시늉을 하고 포효하며 뛰어나왔다. 선사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니 한산이 말하기를 “연산회상에서 헤어진 뒤 다섯 생에 인간의 주인이 되어 오니 지금은 옛 일을 다 잊었구나”라고 하였다.
그후 백장(百丈)선사를 찾아갔다. 하루는 모시고 있던 차에 백장선사가 “불이 있는지 화로 속을 뒤적여보아라”하여 화로 속을 뒤적여보고는 “불이 없습니다”하였다. 백장선사가 몸소 일어나 깊숙히 뒤적여 조그마한 불덩어리를 꺼내 보이니 선사는 여기서 깨달았다. 절을 하고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니 백장선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잠시 나타나는 단계일 뿐이다. 경에 말하지 않았던가.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인연을 살펴야 한다고. 시절이 이르면 마치 미망에서 홀연히 깨어난 듯하고 잊었던 것을 문득 기억해 내는 것과 같아서 비로소 자기 물건인 줄을 깨달아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그리고는 선사에게 전좌(典座)소임을 맡겼다.
그때 사마두타(司馬頭陀)가 호남(湖南)에서 찾아와 백장선사에게 말하였다.“장사(長沙) 서북쪽에 있는 산꼭대기는 터가 좋아서 천명 대중은 살 만합니다.”
“내가 그곳에 가면 어떻겠소?”
“스님은 골인(骨人)인데 그곳은 육산(肉山)이니 알맞은 곳이 아닙니다.”
“제일좌(第一座)가 가면 되겠는가?”
“아닙니다.”
“전좌는 어떻소?”
“그 사람이야말로 위산( 山)의 주인입니다. 그곳에 가서 10년만 있으면 대중이 모여들 것입니다.
이리하여 선사는 위산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살게 되었다. 도토리와 밤으로 식량을 삼고 새와 원숭이와 벗이 되어 그림자가 산밖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조용히 좌선하였다. 그렇게 9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산지도 오래 되었건만 결국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구나. 본시 내 뜻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혼자 살아서 무슨 이이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암자를 버리고 떠나려고 골짜기 입구에 다다르니 호란이, 표범, 뱀, 구렁이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이곳에 인연이 있다면 너희들은 각각 흩어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를 마음대로 잡아먹어라”하니 말이 끝나자 다들 흩어졌다.
이에 다시 암자로 돌아왔는데 천신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이 산은 옛날 가섭불 때에도 도량이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시 짓게 될 것입니다. 이 산을 항시 수호하신다면 반드시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 해에 대안(大安)선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와서 선사를 도와 총림을 일으켰다.
정인사(淨因寺) 도진(道臻 : 1014∼1093)선사는 복주(福州) 고전(古田)에서 태어났다. 정산법원(淨山法遠)선사에게서 종지를 얻고 뒤에 정인사 회련(懷璉)선사를 찾아가니 회련선사가 수좌로 삼았다가 오(吳)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선사에게 법석을 잇게 하였다.
신종(神宗)황제가 한번은 경수궁(慶壽宮)에 초청하여 높은 법좌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문답하게 하였는데 좌우상하 모두가 이제껏 듣지 못했던 법문을 들었다.
도진선사는 사람됨이 순박하고 도타우며 마음이 깊은데다 겸손하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같았지만 일단 논변을 했다 하면 종횡무진으로 막히는 곳이 없었다. 또한 몸가짐이 매우 검소해서 바지 한 벌을 12년이나 입었다. 태사(太史) 황정견(黃庭堅)은 선사의 진영(眞影)에 제(題)를 붙였다.
늙은 호랑이는 이빨이 없고
잠든 용은 울부짖지 않으니
수풀에 달빛 어둡고
천지에 구름 음산하도다
먼 산으로 눈썹 그리니
살구꽃 같은 뺨이여
봄바람에 실려 시집갈 대에
중매장이 필요 없었네
늙은 할머니 그 옛날
열다섯 젊은 시절에
이 쪽은 칠하고 저 쪽은 지우고
화장할 줄 알고 왔다오.
老虎無齒 臥龍不吟
千林月墨 大合雲陰
遠山作眉 紅杏恩貞
嫁與春風不用媒
老婆三五少年日
也解東塗西技來
주(註)
5품위 또는 죠品弟子位라고 하여 천태종에서 원교(圓敎) 8위(八位) 중의 제1위(第-位)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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