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증오 지(證悟智)법사는 태주임씨(台州林氏) 자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책을 읽으면 한눈에 외웠으며 의술이나 점복에 관한 책까지도 모두 통달하였다.
하루는 경을 강설하는 곳에 갔다가 「관무량수경」설법을 듣게 되었다. 귀를 기울여 한참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감탄하기를 “해 떨어지는 곳이 나의 고향이다. 지금 이 경을 듣고 있으니 마치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은 듯하구나”하고는 머리를 깎고 불조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따르겠다고 서원하였다.
백련사(白運寺) 선(僊)법사에게서 쉬면서 ‘완전한 도리와 변하는 도리[具變之道]’에 대해 물으니 선법사가 등룡(燈龍)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성품을 여의고 아니다 아니다 함도 끊어져〔雜性絶非] 본래 그 자체는 비고 고요하니 이것이 ‘완전한 이치’요, 4성 6범이 보는 경계가 다르니 여기에 ‘변하는 도리’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법사는 깨닫지 못했다.
그 후에 땅을 쓸면서 「법화경」을 외우다가 “법은 항상하여 성품이 없으니 부처종자가 이로부터 일어남을 알지니라〔知法常無性佛種從綠起〕”한 구절에서 깨달아 마음이 활짝 트였다. 선법사가 보고는 “기쁘다 ! 큰 일을 마쳤구나. 법화지관(法華止觀)은 이것이 핵심인데 그대가 이것을 깨달아냈으니 깊고도 묘한 경계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마음이 훤히 트이고 자유로와서 사람들에게 자주 이 법문을 하였다.
법사는 닷새마다 한번씩 잠을 잘 뿐 나머지는 요체에 푹 젖어 지내면서 오직 공부가 잘 되지 않을까만을 걱정하였다. 한번 동산(東山)에 자리잡고는 24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동산, 서산 두 산의 학인들이 와서 논변해보았으나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법사는 늘 후학들이 명상(名相)의 굴레 속에 갇히고 책 속에 달라붙어 심지어는 한 종파의 경전만을 받아들여 문자학을 일삼으면서 다른 종파는 업신여겨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음을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문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여 격려하였다. “우리 부처님께서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정진이다’ 하신 말씀을 어째서 생각지 않느냐. 이 한 구절에 깨달음의 기연이 있는데 어째서 직접 맞닥뜨려보지 않느냐?”
그 후 왕명으로 상축사(上竺寺)에 주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진공(奏公)이 묻기를 “지(止)와 관(觀)은 같은 법입니까, 다른 법입니까?” 하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같은 법입니다. 이것을 물에 비유하면 조용하고 맑은 것은 지(止)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비춰볼 수 있는 것은 관(觀)인데 물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또한 군대와 같아서 부득이할 때만 쓰는 것이니 어둡고 산란한 중생들의 중병을 ‘지관’이란 약으로 그 심성을 고쳐내서 온전한 바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법계에서는 고요함〔寂然J을 지(止)라 하고, 고요하면서 향상 비춤[照]을 관(觀)이라 합니다. 그러니 오로지 지(止)할 바를 고집한다면 어디서 관(觀) 할 바를 찾겠습니까? 마치 공께서 허리띠를 드리우고 흘을 단정히 들고서 묘당에 앉아 있을 때,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도 천하를 흥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법사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불법의 묘한 도리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하였다.
동산(東山)의 능(能) 행인(行人)은 교(敎)와 관(觀)에 밝은 분이었다. 굳은 의지로 정진하여 한번 참실(懺室 : 참회법을 행하는 집)에 들어가서는 추우나 더우나 변치않고 49년을 계속하니 절강(浙江) 땅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은 한번도 스스로를 수행인이라고 한 일이 없었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지자대사는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하고 네 차례 좌선하는 것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는데 하물며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초암(草菴) 인(因)법사가 한번은 함께 수행을 하였는데 무릎을 곁대고 앉아서 보니, 언제까지고 흐트러지거나 기대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혹 병이 나도 며칠동안 밥을 먹지 않았을 뿐, 참선은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병은 저절로 낫곤 하였다.
능행인은 성격이 강직하고 결백하여 명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시주물이 들어오면 언제나 대중들에게 나눠주고 털끝만치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다 떨어진 누더기 뿐이었다. 여름이 되면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대들보 위에 묶어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그것을 내려서 추위를 막았다. 늘 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길렀으나 호랑이가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고, 혹 비바람 치는 캄캄한 밤에 언덕 위 무덤에서 좌선하는 데 심신이 편안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절에는 산신이 있어서 영험으로 그 지방을 교화하였는데 능행인은 항상 그 산신과 친하게 지냈다. 어쩌다 향이 다 떨어지면 원주가 그때마다 능행인에게 알렸다. 능행인이 곧 기도를 드리면 이튿날 시주하는 사람들이 문이 메워지게 찾아오곤 하였다. 스님네들이 그 까닭을 물어보면 그들은 “어젯밤에 누군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절에 상주물이 다 떨어졌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공양을 올리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분양 선소(汾陽善昭 : 947∼1024)선사는 태원(太原)사람이다. 도량과 식견이 넓고 깊어 겉치레가 없고 큰 뜻을 품어 무슨 글이든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하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세상이 싫어져 출가하였는데 명망높은 선지식 70여 분을 찾아뵙고 그들 가풍의 묘한 종지를 모두 터득하였다. 또한 가는 곳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산수구경을 즐기지 않으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사를 운치없는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자 선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옛분들은 행각할 때 성인의 마음과 통하지 못했다는 그것 하나로 말을 달려 스승을 찾아가 결단을 보았을 뿐, 어찌 산수를 구경하는 일로 절을 찾아갔겠는가 ! ”
그 후 수산 성념(首山省念)선사를 찾아뵙고 물었다.
“백장스님이 자리를 말아올린 뜻이 무엇입니까?”
“곤룡포 소맷자락을 떨쳐 여니 온 몸이 드러난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 자취 끊겼다.”
선사는 마침내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만고에 푸른 못과 번 하늘에 뜬 달은 두번 세번 애써 걸러내서야 알 수 있다”하고는 절을 올리고 대중에게 돌아갔다. 당시 섭현 귀성(葉縣歸省)선사가 그곳에 수좌로 있었는데 선사에게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갑자기 그렇게 자긍하느냐고 물으니 “이곳이 바로 내가 신명을 버릴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장사 태수(長沙太守) 장공(張公)이 네 곳의 큰절 중에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선택해서 주지를 해달라고 청했으나 선사는 “나는 오래도록 죽이나 먹고 밥이나 먹는 중일 뿐인데, 부처님의 마음 종지를 전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두 여덟 차례를 청했으나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에 태자원(太子院)으로 맞이하려 하니 선사는 산문을 굳게 닫고 높이 누워버렸다. 석문 온총(石門蘊聰)선사가 문을 밀어제치고 들어가서는 비난하기를 “불법은 큰 일이고 조용히 물러나 있는 일은 작은 지조인데 그대는 불법을 짊어질만한 힘이 없거늘 지금이 어느 때라고 편안하게 잠만 자려 하시오!” 하니 선사는 벌떡 일어나면서 “그대가 아니면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오. 빨리 가서 여법하게 준비해 두시오. 내 곧 가리다”라고 하였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는 한번 선상에 앉아 30년 동안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용덕부윤(龍德府尹) 이공(李公)이 승천사(承天寺)로 모시려 하여 사자가 세번이나 되돌아와서 청했으나 가지 않으니 사자가 벌을 받을 참이라 다시 찾아와 말하였다. “반드시 선사와 함께 가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니 선사께서는 생각해 주십시오.” 선사는 “하필 같이 갈 것이야 있겠나. 그대가 먼저 가면 나는 나중에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식사를 마련하라 하고 행장을 챙기라 하면서 “나는 간다”하고는 젓가락을 멈추고 입적하였다.
도사 장펑숙(張平淑)은 노장의 도〔淸虛]를 매우 좋아하였다. 신선도를 닦는 곳에서 정여빈자(頂汝貧子)를 만났는데 그가 하도락셔(河圖洛書 : 易書)를 지고 있는 용마도를 꺼내 보이니 마침내 그 뜻을 알았다. 오랜 노력 끝에 공부를 성취하고서 말하기를
“내 몸은 비록 단단해졌으나 본각(本覺)의 성품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불경을 탐구하였는데 「능엄경(楞嚴經)」을 읽다가 느낀 바 있어서 「오진편(悟眞編)」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선종가송(禪宗歌頌)’을 지었다.
그 서문에서는 「능엄경」에 나오는 107가지 신선을 인용하면서 “비록 그들이 천만년을 산다해도 정각(正覺)을 닦지 않으면 신선의 과보가 다해 다시 태어날 때 6도 속에 흩어져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도를 닦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텅 비어[太虛] 안팎이 하나여야 하니, 만약 거기서 티끌 하나라도 세우면 곧 번뇌가 된다. 이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묘한 도리로서 「금강경」과 「원각경」, 이 두 경을 통달하면 금단(金丹 : 신선이 되는 비법)의 뜻이 저절로 밝아진다. 그런데 하필 도교와 불교를 분별할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그러므로 장평숙은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불교에 귀의해야 목적[空竟〕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조스님이 상당하였을 때 백장스님이 앞으로 나가 자리를 말아서 거두자 마조스님은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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