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도사 여동빈(呂洞賓)은 하양(河陽) 만고(滿故) 사람으로 당나라 천보(天숲 :742~755)년간에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인데 여러번 진사(進土)시험에 웅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화산(華山)에 놀러 갔다가 종리권(鍾離權)을 만났다. 종리권은 진대(普代)에 낭장(郞將)을 지내다가 난리를 피해 양명법(養命法: 건강장수하는 비결)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여동빈을 시험해 보려고 먼저 재물을 주어 보기로 하였다. 하루는 여동빈이 종리권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종리권이 돌 한덩어리를 주워 약을 바르니 금새 황금덩이가 되었다. 그것을 여동빈에게 주면서 앞으로 길을 가다가 팔으라고 하니, 여동빈이 묻기를 “이것도 부서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종리권이 “5백년은 되어야 부서진다”고 하자, “뒷날 사람을 속일 것이다” 하면서 던져버렸다.
종리권이 다시 여색으로 시험하려고 여동빈에게 산에 들어가 약을 캐오라하고 조그만 초막을 꾸며 놓았다. 그 안에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가 여동빈을 맞으면서 “지아비가 죽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는 손을 잡으며 가까이 오려 하였다. 여동빈은 여자를 밀어제치면서 “가죽부대로 나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는데, 말이 끝나자 여자는 보이지 않고 종리권이 그곳에 있었다.
이에 종리권이 금단술(金丹術)과 천선검법(天仙觀法)을 전수하니 드디어 아무 걸림없이 다니는 경계를 얻고 시를 지었다.
아침에는 남월(南越) 땅에 갔다가
저녁에는 창오(蒼梧) 들녘에 노니네
소매 속의 푸른 뱀
날아오르는 기운이 으스스한데
사흘동안 악양루에 있어도
알아보는 이 없어서
소리높이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갔도다.
朝遊南越幕蒼梧 袖裏靑蛇 氣
三日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
한번은 용아(龍牙 居遁 :835∼923)스님을 찾아뵙고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용아스님이 게송을 지어 주었다.
어찌하여 아침시름이 저녁시름에 이어지는가
젊어서 공부 안하면 늙어서 부끄러우리
이룡(驪龍)은 명주(明珠)를 아끼지 않는데도
지금사람들 그것을 구할 줄 모른다네
何事朝愁與幕愁 少年不學老還羞
明珠不是驪龍借 自是時人不解求
한번은 악주( 州) 황룡산(黃龍山)을 지나가다가 붉은〔紫色〕 기운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도인이 살지나 않을까 하여 산에 들어가보니, 마침 기(機)선사가 상당법문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선사는 이상한 사람이 자리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는 큰소리로 꾸짖었다.
“대중 속에 법을 훔치려는 자가 있구나!”
그러자 여동빈이 썩 나서서 물었다.
“좁쌀 한알 속에 세계를 갈무리하고, 반되짜리 솥 안에 산천을 삶으니, 이 무슨 도리인지 한번 말해보시오.” 선사가 “시체나 지키는 귀신이로구나”하니, 여동빈은 “주머니 속에 장생불사하는 약이 있다면 어쩌겠소?” 하였다. 선사가 “설령 8만겁을 산다 해도 결국에는 허무 속에 떨어질 것이다” 하니 여동빈은 분한 기색도 없이 떠났는데, 밤이 되자 칼을 날려 선사를 위협하였다. 선사는 미리 알고는 법의로 머리를 감싸고 방장실에 앉아 있었다. 칼이 들어와 몇바퀴 돌다가 선사가 손으로 가리키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여동빈이 사죄하자 선사가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물었다.
“반되짜리 솥 안은 묻지 않겠지만, 어떤 것이 좁쌀 한알에 세계를 갈무리하는 일인가?” 여동빈은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노래하는 아이*를 잡아당겨
거문고를 부쉬버리니
지금은 물 속의 금(金)을
그리워 하지 않네
황룡스님을 보고나서야
이제껏 마음 잘못썼음을 알게 되었네
拗却瓢兒碎却琴 如今不戀水中金
自從一見黃龍後 始覺從前錯用心
급사(給事) 풍즙(馮 )거사는 젊어서 상상(上庠 :태학,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하루는 과거에서‘생이란 덕이 수레바퀴처럼 비치는 것이다〔生者德之光輪〕라는 글로 장원급제하였는데 그 글은 「원각경(圓覺經)」의 이치로 밝힌 것이었다. 그는 비록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불법을 잊지 않고 이름난 스님들을 두루 찾아뵙고 법을 물었다.
그가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였다. 불안(佛眼)스님을 따라 거닐다가 우연히 동자가 마당에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만상 가운데 훌로 몸을 드러냈구나!”라고 읊었다. 불안스님이 등을 두드리면서 “좋다!” 하였는데 거사는 그리하여 깨달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노남(瀘南)의 태수(太守)가 되었을 때, 한번은 좌선을 하다가 글을 지었는데 거기에 ‘공무를 보는 여가에 즐겨 좌선을 하며 옆구리를 침상에 대고 자는 일이 적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는 청정한 공부에 더욱 뜻을 두어 가는 곳마다 수준 높은 참선회를 만들어 승속을 일깨웠다. 또한 전란이 일어나 경전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받는 봉급을 오로지 경을 사는데 보시하였다. 그때 그가 지은 게송이 있다.
나는 별난 성미 타고나서
재물은 있는대로 허공에 저축하네
자손을 위한 계책은 세우지 않고
수레나 말을 타고 거드름피우지 않으며
노리개를 사는 데 충당하지도 않고
성섹을 즐기는 일에 쓰지도 않는다
송곳 꽂을 땅도 없고
한조각 기왓장 올릴 집도 없으며
달마다 받는 봉급은
오적 경전 사는데 보시하노니
경을 펼쳐 보는 이는
하나도 남김없이 깨달아 들기 바라네
옛 부처님은 게송 반마디를 듣기 위해
오히려 야차(夜叉)에게까지 온 몸을 버렸으니
그러므로 나도 재물을 아끼지 않고
미혹한 이들에게 열어 보인다
묻노니, 재물 아끼는 사람들아
하루종일 이리저리 저울질하다가
홀연히 죽는 날이 닥쳐오면
생사를 면할 수 있겠는가.
我賦●痂癖 有財貯公虛
不作子孫計 不爲車馬逋
不充玩好用 不買聲色娛
置錐無南畝 片瓦無屋盧
所得月俸給 唯將贖梵書
庶使披閱者 成得入無餘
古佛爲半偈 尙乃捨全軀
是以不惜財 開示諸迷徒
借問惜財人 終日較 銖
無常忽到地 寧免生死無
소흥 23(紹興:1]t53)년 거사는 장사(長沙)에 태수로 있었는데 갑자기 친지들에게 7월 23일을 기해서 세상을 마치겠다고 알렸다.
그날이 되자 뒷마루에 높이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을 맞이하다가 계단을 내려가 대궐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조운사(漕運使)를 오라하여 군(郡)의 사무를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승복을 입고 스님네들이 신는 신발을 신고 높은 자리에 걸터 앉아, 모든 관리와 승속에게 각기 도에 정진하여 불법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침내 주장자를 뽑아 들고 무릎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셨다.
청헌공(淸獻公) 조변(趙 )은 나이 40여세에 성색을 멀리하고 조사의 도에 마음을 두었는데, 마침 불혜법천(佛憲法泉 : 宋나라 운문종스님으로 雲居曉舜의 법제자)선사가 형주(衢州) 남선사(南禪寺)에 와서 살고 있었다. 공은 날마다 스님을 찾아 뵈었는데 스님은 허튼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후 공이 청주(靑州)를 다스릴 때 일을 보는 여기에는 좌선에 힘쓸 때가 많았다. 하루는 갑자기 벼락소리에 몹시 놀라면서 활연히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묵묵히 공청에 앉아 괜스레 책상에 기대니
마음근원은 깊은 물같이 움직임 없었네
벼락치는 소리에 정문(頂門)이 열리니
본디 내 밑천을 불러일으켰구나
默坐公堂虛隱凡 心源不動湛如水
一聲霹靂頂門開 喚起從自己底
법천스님이 듣고 말하기를, “조열도(趙悅道 : 청헌공의 字)는 황훌경을 두드렸구나!”라고 하였다.
앙산 혜적(仰山慧寂 : 802∼887)선사는 소주 섭씨(韶州葉氏) 자손이다. 삭발한 뒤 큰 구슬 하나를 얻는 꿈을 꾸었는데 그 빛이 사람을 쏘는 듯하였다. 꿈을 깨고나서 말하기를, “이는 더할 수 없는 마음 보배인데 내가 얻었으니, 이것으로 내 마음 자리를 밝혀야겠다” 하고는 제방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탐원(耽源)선사를 찾아뵙고 묘한 이치를 깨닫고 나서 뒤에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를 찾아뵙고 마침내 깊은 종지를 얻었다.
혜적선사가 위산선사께 물었다.
“어디가 참 부처가 머무는 곳입니까?”
“생각없는 생각[思無思〕의 묘한 법으로 불꽃같은 신령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라. 그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오면 성품과 모습이 항상하고 현상과 이치가 둘이 아니어서 참 부처가 여여(如如)할 것이다.”
혜적선사는 이 말끝에 활짝 깨쳐 비밀스런 인가를 받았다. 대중을 거느리고 왕분산(王奔山)에 자리를 잡았으나 교화할 인연이 맞지않아 원주(袁州)에 이르러 앙산(仰山)을 찾아갔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두 산신이 맞이하면서 물었다.
“깊고 험한 이 산에 어찌 오셨습니까?”
“암자 터를 하나 보러 왔소.”
“저희들은 복이 있어 스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이 산을 시주하여 스님께 드리겠으니 여기 머물러 사십시오.”
“그대들이 이미 나에게 시주했으나 필시 넓은 마음을 가졌겠구나. 다른 스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할 것 같으면 내가 그대들의 시주를 받겠다.”
산신이 좋다하고 집운봉(集雲峰) 아래를 가리키며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하였다. 선사는 마침내 그곳에 초암을 짓고 살면서 나무열매를 따먹고 개울물을 마시며 종일 꼿꼿하게 좌선하였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산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앞으로 대중이 많아지면 이 제자는 살 곳이 불편할 것이니 거처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과 우뢰가 크게 일더니 산신당이 30리 바깥 도전(堵田)으로 옮겨가고 옛 산신상과 큰 소나무들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 갔다. 무창(武昌) 3년 여름 4월의 일이었다.
한번은 이역승이 하늘을 날아 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하기를, “특별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동쪽나라에 왔는데 오늘 뜻밖에도 작은 석가〔小釋迦]를 만났다”라고 하니, 이로부터 위산스님과 양산스님의 종풍이 크게 세상에 떨쳤다.
선사가 입적하려 할 때 산신이 찾아와 남길 말씀이 있느냐고 물으니 선사가 말하였다.
“내 몸은 허깨비나 물거품 같아서 인연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올 때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갈 때인들 더 무엇을 구하겠는가?”
“모든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천룡(天龍)이 나타나 남기실 말씀을 청했습니다. 저도 이를 어기지 않게해 주십시오.”
선사는 법통을 얻은 스승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의 기일(忌日)이 정월 8일이니 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감히 그 날을 어기지 못하고 있다.
*瓢兒 : 길에서 음악을 켜고 표규(瓢 : 범패의 일종)를 부르며 구걸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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