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 - 1. 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7:09

    1. 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 앞으로 올 날들

상당(上堂)이라는 자리는 그렁저렁 상대 유한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오직 상(相)을 떠나고 개념을 떠난 절대적인 말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예전에 어떤 도인은 지지리 애써서 상당에 모셔 놓았더니, 눈만 끔벅끔벅 하시다 법문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는 가 버리더랍니다. 그래서 원주스님이 뒤따라가면서 우리가 애써 모셨는데 왜 한 마디도 않고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도인은, "경(經)을 잘 설(說)하는 데는 강사(講師)가 있고, 법(法)을 잘 설하는 데는 법사(法師)가 있고, 나는 선사(禪師)인데, 선사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 법에는 묵은 해, 새해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약속으로 묵은 해, 새해를 정했을 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운문(雲門)스님은 정월 초하룻날 원단의 상당(上堂)에 올라가셔서 대중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고 닥쳐오는 달의 소식을 물을 테니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즉 지나간 달의 소식에 대해서는 대중들에게 묻지 않고 앞으로 도래하는 달의 소식을 한 마디 말해 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중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습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운문대사는 자문자답했습니다. "연년시호년(年年是好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즉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운문스님께서 말씀하신,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의 뜻은 과연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운문스님 말씀은 절대로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사 지금 당장 아파서 곧 죽어버릴 것 같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도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 그 모든 법문의 뜻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 날, 때마다 좋은 때입니다. 이렇게 해서 항시 행복한 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요(大要)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인생의 모든 고통을 몽땅 소멸시켜서 정말로 위없는 행복을 체험하고, 자기 이웃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고(人生苦)가 충만한 우리 중생들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해마다 좋은 해가 될 것인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해마다 좋은 해이며, 바로 못 보면 날마다 불행한 날일 뿐입니다.

사업에 이득을 좀 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불행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런 문제는 모두가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 '같은' 것이지 참다운 행복은 못 되는 것이고 결국은 인생고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가령 부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 없이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는 또 몹쓸 일도 하겠지요. 자기 양심에 가책된 일도 하고, 또는 남한테 원망도 받고, 자기 이웃은 배고픈데 자기만 배부르게 먹으니까 그 자체가 벌써 죄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나 허물 위에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쌓은 탑이나 마찬가지로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좀 오래 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과 더불어서 흔적도 없습니다.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면서 보편적인, 어느 누구한테나 어떠한 경우에나 어느 때나 행복하게 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운문대사의, "연년시호년 일일시호일"이란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절대시간이 존재하고, 절대공간이 존재하는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 보면 내 몸뚱이가 이렇게 존재하고, 내 미운 사람이 대상으로 저렇게 존재하며,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하고, 또는 그렇게 욕심내는 감투도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도 역시 존재하는, 이런 차원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고의 패턴, 의식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성자의 보편적인 말씀이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그냥 자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 마음은 무한의 컴퓨터

부처님께서는 80 평생을 지내시다가 구시나가라 성(城)의 사라쌍수 밑에서 나뭇잎 같은 것들을 깔고, 당신 법의만 덮고 오른쪽 팔뚝을 베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가실 때가 임박해서 이웃 나라들에도 공포(公布)를 했단 말입니다.

그때 구시나가라 근처에 있는 비아리국에는 기운이 아주 센 역사(力士)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역사들이 "우리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로 가시는 길을 좀 다듬어야 되겠다" 하고 울력을 부쳤습니다. 부처님께서 통과하실 길이 소로(小路)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시원스럽게 길을 다듬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험로(險路)에 집채만큼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들 몇십 명이 모여서 그 바위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치워 버려야 부처님께서 험로를 걷지 않으시고 편한 길로 가시는데, 지금같이 포크레인도 있고 하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마는, 아무리 기운이 세다 해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함께 모여 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 법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기운이 좀 세다고 그것만 믿었습니다. 당시 각국의 16왕자가 모두 부처님을 숭상하므로 자신들도 부처님을 숭상하기는 했지만, 사실 부처님 법을 제대로 몰랐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기운을 믿고 그 행패가 매우 심했습니다. 남의 것을 윽박질러 강제로 빼앗아 먹기도 하고, 폐해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열반에 들기 전에 저들을 제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허름한 수행자의 몸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경우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중생을 제도할 때는 몸을 바꾸기도 하는데, 그것을 동사섭(同事攝)이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범부들이 앉아서 이말 저말 하고 생각하는 것이 동사섭이 아니라, 도인들이 중생의 근기를 보고 그 근기에 맞추어서 몸을 변신하는 것을 '동사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허름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우리는《아함경》이나《화엄경》혹은《법화경》이나 기타 경론(經論)에 나오는, 신통자재하는 것을 절대로 미신이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부처님 덕택으로 가끔 비행기를 탑니다만, 한 삼백 명이나 이백 명,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비행기가 공중을 난다고 생각할 때, 그야말로 참 희귀한 신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다 사람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머리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 그것은 무한공덕과 가능성이 입력된 컴퓨터나 똑같습니다. 원만한 자비도 그곳에 다 갖추어져 있고, 지혜도 다 입력되어 있고, 행복이나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이라는 컴퓨터에 다 입력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이른바 무한의 컴퓨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 나와라!" 하면 지혜가 나오는 것이고, "행복 나와라!" 하면 행복이 나오고, 무엇이든 주문만 하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 즉 불심을 가리켜서 여의주(如意珠)라, 혹은 여의보주(如意寶珠)나 마니보주(摩尼寶珠)라 합니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성자한테만 있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아직 계발이 못 된 사람도 역시 갖추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한테만 갖추어져 있고, 일반 동물들은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 동물한테도 똑같이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이나 지극히 미세한 존재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인생과 우주의 근본실체를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에나 똑같이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천지우주는 불심이라 하는 청정무구한 무량공덕을 갖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 무량공덕을 갖춘 마음을 토대로, 그 위에서 물리적ㆍ화학적 변화와 같은 작용에 따라,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의 법칙을 따라서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아직 공부가 안 된 사람들은 안 되겠지만, 부처님 같은 분은 그러한 불심과 하나로 계합되신 분입니다. 무량공덕인 마음과 딱 하나가 된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인 불심과 하나가 된 부처님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신통묘지가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과학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방법으로 원자력과 같은 무서운 힘을 내지만, 그 원자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한의 성능인 불심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당신 몸을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셔서 그 역사(力士)들 앞에 나투셨습니다. 그리고는, "동자들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나이도 많고 육중한 사람들을 '동자'라고 불렀으니 다들 기가 찼겠지요. 부처님께서 "동자들아!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는가?"라고 핀잔 비슷하게 말씀하시자, 평소 아만심에 가득 차서 행패나 부리던 역사들은 당연히 골이 났겠지요.

그러나 그 역사들은 자신들이 부처님을 믿는데, 그 수행자가 승복을 입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체 누구인데 그와 같이 오만불손하게 말을 하느냐?" 하며, "눈으로 뻔히 보다시피 이렇게 집채만한 바위를 치우려고 애쓰고 있지 않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때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신 부처님께서 미소를 띠시며, "아니, 그것 하나 움직이지 못하느냐?"라고 응대하셨습니다. 그러자 더욱더 골이 난 역사들이 "그러면 그대가 한 번 해보아라" 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손도 대지 않으신 채 발가락 두 개로 그 바위를 휙 들어올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꼼짝도 하지 않던 바위가 몇십 미터 밖으로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길 밖으로 굴러나간 것이 아니라 길 가운데로 갔단 말입니다. 또 치워야 했겠지요.

역사들은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했습니다. '저 스님이 보통이 아니다.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했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공대(恭待)를 했습니다. "기왕이면 길 밖으로 치워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손으로 바윗덩이를 들어서 저 공중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위가 윙 소리를 내면서 역사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그네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듯이 말입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그 바위를 손바닥으로 받아 훅 불어 버리니 가루가 되어서 간 곳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역사들도 이젠 눈이 좀 틔고 귀도 좀 열리고 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야말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본래의 원만한 모습으로 다시 환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