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 - 2. 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7:11
 

    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 몇십 번 곱해도 영은 영

그때 그 역사들의 환희심은 그야말로 얼마나 마음에 사무쳤겠습니까? 역사들이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연 그 돌은 실체가 있습니까? 우리 범부의 견해로는 공간성도 있고 시간성도 있어서, 돌고 있는 그 돌의 실체가 실제로 있다고 대답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 실체가 있다고 대답하면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그 말이 맞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인지라, 제법이 다 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 몇십 명이 들어도 움직이지 못한 바위이지만 본바탕은 역시 공인 것입니다. 그래야《반야심경》의 색즉공도 맞고 오온개공도 맞고 그렇게 되겠지요.

어째서 공(空)인가? 아시는 바와 같이 돌이나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나 내 몸뚱이나 결국 각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각 원소는 또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들이 적당히 결합해서 운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미세한 소립자는 또 무엇인가? 이런 것이 본래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라 하는 하나의 정기(精氣)가 적당히 진동하고 적당히 운동해서 하나의 모양을 낸, 그것이 양성자요 중성자요 전자입니다.

이것은 이미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한 도리 아닙니까?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다고 합니다만, 현대물리학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양자역학에 따르면, 다만 에너지의 파동이 전자요 양성자며 또한 중성자입니다. 그런 미립자들이 적당히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됩니다. 또한 그런 원자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고, 무엇 되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근본물질인 에너지 또는 정기뿐이며, 그것은 공(空)인지라, 그것이 이렇게 합하나 저렇게 합하나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제로(zero)를 몇십 번 곱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나누든 간에 영(零)은 영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원래 물질이 아닌,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그러한 미립자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모여서 모양이야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림자 같은 모양을 어떻게 나투든 간에 결국은 끝내 공은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은 그런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본래 공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색이 곧 공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을 분석해서 모두 쪼개 본 뒤에 나오는 결론이 공이란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색즉공이란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물질이 바로 공이므로 내 몸뚱이도 이대로 바로 공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겉모습, 즉 그림자만 봅니다. 따라서 실체는 못 봅니다.

그러면 실체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이고 우주의 정기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여불성입니다. 중도실상인 우리 불성입니다. 따라서 성자는 나를 보나 남을 보나 이목구비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안 봅니다. 나를 보나 남을 보나 '모두가 다 법계연기, 즉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냈구나'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산도 냇물도 모두가 다 진여법성이 인연 따라서 연기법(緣起法)으로 잠시간 모양을 냈을 뿐이란 말입니다. 잠시간입니다. 아주 잠시간! 잠시간 모양을 내 가지고라도 그것이 머물러만 있는다면 공간성도 있고 시간성도 있을 테지만, 잠시간 인연 따라 모양을 나투어서도 순간 찰나도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과거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도 얻을 수가 없으며, 미래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하나의 물질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멸되어 없어지거나 지나가면 과거라 하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미래라고 하며, 시시각각으로 변동하고 있으면 현재라고 할 뿐이지, 원래는 과거도 현재도 물론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도리에서 볼 때는, 즉 본체에서 볼 때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절대공간도 절대시간도 없고, 절대물질 또한 없습니다. 이것이《반야심경》의 도리입니다.

괴테식으로 말해서 내일 당장에 최후의 심판이 다가와 모두 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들은 슬퍼할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인들은 '일일시호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사라진 뒤에도 날마다 좋은 날뿐입니다. 설사 내 몸이 금방 사라진다 하더라도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같은 어른이 태어났으니 석가족은 그야말로 부자가 되고 감투를 많이 쓰고 오래 살고 그랬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과는 그렇지 않아서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이 몽땅 몰살당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도 한둘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석가 귀족들을, 여인들도 그 땅에 묻어서 죽이기도 하고 창으로 죽이기도 했단 말입니다. 석가족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무거운 돌을 등에 업고서 밧줄에 묶이어 호수에 던져지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신통자재(神通自在)하던 분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던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이라는 존자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사세왕이 그렇게 잔인 무도한 짓을 할 때 목건련이 부처님께, "아사세왕을 저쪽 삼천대천세계 밖으로 던져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지금 아사세왕이 내 말을 들으면 재앙을 면할 수 있지만 업장이 무겁고 선근이 없어서 도저히 듣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핍박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석가족들은 생전에 부처님 법을 닦았기에 죽자마자 바로 도리천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이라는 것이 현상적인 차원에 입각해서 '오직 이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런 것들이 최상이겠지만, 생사를 초월한 도리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석가족도 오히려 해마다 좋은 해[年年是好年]이고,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어, 죽으면 당장에 천상에 태어나 인간세상보다 훨씬 고통이 적은 곳에서 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니 당장에 깨달아 버리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안 되므로 공부를 하거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서 고행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처님 법을 어떻게 닦아야 본래 부처의 자리, 생사를 초월한 자리를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닦아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대체로 모두가 다 범부입니다. 범부는 자기의 본바탕도 모르고 우주의 본질도 모릅니다. 석가나 달마스님, 혹은 서산대사나 공자, 예수, 노자와 같은 분들은 우주의 실상과 자기의 참정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본바탕을 못 봅니다. 본바탕을 보게 되면 본바탕하고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자입니다. 겉에 뜬 그림자와 같은 현상만 보는 사람들은 성자가 못 된 우리 범부중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중생 차원에서는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본바탕인 우주와 인생의 본 생명자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볼 수가 없으면 차라리 그렁저렁 살면 될 것이지, 출가도 하고 자기 가족을 떠나 와서 선방에 들어앉아 애쓸 필요가 있을까?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인데 돈도 많이 벌고, 모두가 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는 이런 때 선방에 가만히 앉아서 지내는 것은 그야말로 지독히 비생산적인 것이 아닐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지금 현대식 사고방식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권력만능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자인 우리 견해로는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스님네들 가운데도 사회에 나가서 참여도 하고, 도시에 나가서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그래야지 산중에서 자기만 좋자고 공부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때일수록 꼭 바른 견해를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산중에 있든 도시 가운데 있든 그 처소는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처소가 문제가 아니라 성자가 되기 위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교육자는 교단에서 자신과 학생들의 성불을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이고, 부모님들은 가정에서 자기 자녀와 더불어 성불하기 위해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면 또 허물 많은 공산주의 국가가 나오고, 또 허물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나와서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돈이 제일이고 물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고 자기 몸뚱이가 제일이고 자기 가족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는 별스러운 짓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주의가 생기고 무슨 운동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 국가만 좋아지고 자기 민족만 좋아지는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민족주의(民族主義) 말입니다.

성자의 길, 예수나 석가 혹은 공자가 가신 그러한 길을 벗어나서, 현상적인 것을 진실로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나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그렇게 싸우고 아귀다툼하다 끝나 버립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범부의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간에 중생심(衆生心)을 꼭 벗어나야 합니다. 끝내 못 벗고 그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생 몇만 생에 가서라도 끝내는 다 벗고 맙니다. 금생에 잘못 살면 지옥에도 가고 아귀로도 가고 하면서 윤회의 고통을 계속하여 받게 됩니다. 분명히 윤회는 있습니다. 개미나 구더기가 될 수도 있고, 땅벌레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계속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모두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늦으면 늦을수록 그만큼 고생을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몸뚱이를 뛰쳐 나오는 법

우리가 윤회를 할 때에는 마음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하게 과보를 받게 됩니다. 탐내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혹은 표독한 마음을 쓰게 되면 그 과보를 다 받게 됩니다. 마치 공부를 열심히 하면 대학교에 합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낙방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했으므로 낙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도 이와 같아서 낙제가 될 사람을 꼭 합격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인과 그대로입니다. 5만큼 공부하면 5만큼 이루어지고, 5만큼 좋게 마음 쓰면 5만큼 좋게 됩니다.

부처님 법의 요체는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의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매미도 허물을 벗어야 성충이 되고, 누에고치도 자신의 몸에서 실크를 뽑아 누에고치를 만들지만 그 속에서 안주하면 영원히 갇혀 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껍질을 벗고 뛰쳐 나와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이 몸뚱이를 뛰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은 텅텅 비어 있고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윗덩어리도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잘못 보아서 바윗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도인들은 바위 구멍에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단단하다거나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마음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중생심을 벗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수녀가 되며, 신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 번 되었을 때는 응당 준엄하게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이란 우주의 모든 것이 본래 텅텅 비어 있고, 다만 진여불성뿐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형성된 우리의 말[口]과 우리의 몸[身], 그리고 우리의 사고[意]를 말합니다.

남과 내가 둘이 아닌데 살생을 하면 되겠습니까? 또한 음탕한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물질이란 도대체 허망한 것이고, 본래는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뚱이 편하자고 부당한 수입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훔칠 이유도 없고, 부정을 저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거짓말이나 욕설, 혹은 이간하는 말은 모두가 허망무상한 것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마약을 복용하겠습니까?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본래 무아, 무소유, 바르게 본 견지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행동, 우리의 말입니다. 그게 바로 계행의 본래 의미입니다.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계행은 부처님 당시에나 어울리는 것이었고, 현대에는 현대에 적합한 계행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여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잘 지키려고 애써도 빗나가고 마는데, 합리화시키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에도 잘못 배우고 금생에도 잘못 배워 버릇이 잘못 들었기 때문에, 지키려고 아무리 애써도 미끄러지고 실패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니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리학도 배우고 법학도 배우고 다른 여러 가지 학문을 많이 배우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다 소중한 공부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닫고 참다운 자기가 된다는, 참다운 진아(眞我)를 발견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있다' '없다' 하는 분별시비와 사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많이 쌓아도 바벨탑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다 허물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기능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이 못 되면 다시 무슨 주의, 무슨 철학이 나와서 옥신각신하고 또 싸우게 됩니다.

오히려 '있다' '없다' 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부처님 마음과 우주만유의 참다운 에너지인 우주정기하고 하나가 되고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잠재의식에는 워낙 배운 것이 많기 때문에,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또는 주문도 외워서 본래적인 우리 마음자리인 진여불성으로 가려고 애쓰지만, 자꾸만 반발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방에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동안 앉아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사념 없이 오로지 맑은 마음으로 지속될 때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