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7/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6:22
 

 

서장 대 강좌 7- 1 강

 

 

p. 116

     14.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 (2)

이 분은 내각의 자문 담당이라고 요즘 말로 하면 그런 직책입니다. 대혜스님에게서 부러운 점이 첫 째는 대혜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지혜와 학덕. 이런 것이 가장 부럽고 본받고 싶은 부분이지요.

깨달음의 지견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쉽게 와 닿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수행자라면, 또 불교에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혜스님 같은 이런 아주 명쾌한 지혜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조금 이상한 이야기일런지는 모르지만, 강의 첫날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중국천하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모두 대혜스님 에게 와서 법을 묻고,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대혜스님의 신도였었다는 사실.

그래서 깨달으신 분들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재가신도임에도 불구하고 대혜스님의 신도중에는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들이 상당수가 있었다는 이것은 아마 부처님의 제자 중에도 재가제자들이 그렇게 많은 분들이 깨달았을까?

사실 좀 의심스럽고요.

그 다음에 존경을 제일 많이 받으신 분은 오조 스님의 제자인 北宗(북종)의 신수대사. 신수대사가 육조단경에서 보면 육조 스님에게 밀리는 것처럼 되어있습니다만, 그것은 육조스님 쪽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북종선 에서 볼 것 같으면 세상에 그 분같이 존경을 많이 받으신 분이 또 없습니다.

 

  천자가 3대로 내려오면서 왕사· 국사로 모셨고, 二京法主(이경법주)라고 해서 南京(남경)· 西京(서경). 東京(동경)인가요? 그 스님 생애에 서울을 두 곳으로 옮겼는데요.

두 곳 서울에서 항상 법주 노릇을 했어요.

요즘 우리 불교에서 會主(회주)라는 말 잘 쓰는데, 회주라고 하는 것도 영 비불교적이라는 냄새는 안 풍기지만 그래도 법주라는 말보다는 사실은 못해요.

회주라는 말은 사회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주라는 말은 사회에서 못 써요.

우리 흔히 거사. 처사라는 말을 쓰는데 처사는 사회에서도 쓰는 말이지만,

거사라는 말은 사회에서 못 써요.

그것을 우리가 알고 써야 됩니다.

  불교에서는 반드시 거사님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처사라고 하면, 물론 재가불자들에게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상당히 고귀한 단어이긴 해요. 그렇지만 다른 유교 선비들에게도 처사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사는 좀 공통성이 있는 반면에 좀 불교적이지는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법주. 회주라고 하는 말도 옛날 전통적인 관념에서 보면 법주라는 말이 옳습니다. 훨씬 좋잖아요. 법 주!

 

그런데 옛날부터 회주라는 말을 많이 써서 어느 절에서도 저보고 회주라고 이름을 걸어 놓기도 했습디다만, ‘불교가 좀 俗化(속화)되어서 그런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런 신수대사가 계시지만 그런 분들이 크게 부러운 것은 아니고, 대혜스님의 그 지견과 그 박식과 그러면서 학덕이 아주 뛰어나고, 또 신도님들 모두가 당대의 최고 지성이었다는 점들이 부러운 점이라면 참 부러운 점이라고 평소에도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부추밀 계신에게 답한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든가 봅니다.

매일 이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을 염두에 두고 勇猛精進(용맹정진) 해서 순수하고 한결 같아서 잡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정말 불교에 깊이 몸담고, 대혜스님보고 불교에 깊이 몸담고 불교에 애착을 가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이상하지만, 정말 불교에 진정한 애착을 갖고 그 중에서도 정말 正法(정법).

정법에 어떤 열의가 있는 분으로서는 정말 진정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은 참 이렇게 뛸 듯이 기쁜 마음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루 동안 치열하게 작용할 때에 반드시 상응합니까?

이것은 이 분이 공무원이다 보니까 추밀 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할 일이 많고, 처리해야할 공무가 많겠지요?

그러니까 하루 동안 치열하게 작용할 때에 이 “일대사인연을 위해서 공부하는 그 관심이 늘 한결같으냐?”이런 말입니다.

깨어 있고 잠자는 양변에서 한결 같습니까?

이것은 화두가 늘 들리느냐?”여기서는 그런 의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한결같이 空(공)에 빠지고 고요한 데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고요한 데 빠져선 안 됩니다 하면서 여기서 고요에 빠진 사람들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쭉 내려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세속 생활이 참 번다하고 복잡한데 공부에 맛을 좀 들여서 마음이 조용해지고 환경이 조용해지고 편안해지고, 그러면 그만 그것이 불교인양 공부의 극치인양 그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파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불교에 인연을 맺고,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해서 좀 안심을, 마음을 놓게 되면 그것으로서 더 이상 진보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은 불가사의해서 그렇게 쉽게 손에 와 닿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검은 산 아래 귀신 집에서 살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黑山下鬼窟裏(흑산하귀속리)라 해서 캄캄한데 말하자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은 조용해서 편안할지 모르지만 공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그렇게 되어서야 정상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未來際(미래제)가 다해도 뚫고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낸 편지를 어제 받고, 당신이 반드시 이미 고요함에 치우친 삼매에 耽着(탐착) 했을 것으로 염려했었는데, 直閣公(직각공)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고서야 과연 생각했던 바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이 분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참선하다 보니까 그만 고요한데에 빠져 버렸다 이겁니다.

특히 간화선은요. “왜 간화선인가?”그랬지 않습니까?

이것은 활발발한 어떤 작용 속에서 거기서 뭔가 진실을 규명해 내고,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그 속에서 진실을 같이 운용해 가는 그런 공부지요.

그래서 그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앉아있는 폐단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 간화선이다.”그랬습니다.

결코 조용히 앉아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간화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묵조선이지요.

 

대혜스님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는 그 대상이 바로 그런 고요한데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대혜스님 말씀이 대개 세상을 사는 여유 있는 선비가 오랫동안 세상살이에 빠져 있다가 홀연히 사람으로부터 고요한 곳을 향한 공부의 가르침을 받아 잠깐 가슴속에 일이 없으면, 문득 집착하여 구경 안락을 삼는다. 비유하자면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음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돌로 풀을 눌러 놓으면 그것이 잠깐은 그 풀이 밖으로 안 나오지만, 언젠가 그 풀이 노란 싹을 옆으로 비집고 나오는 예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보잖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잡념 이라할까? 어떤 번뇌 망상. 잡된 것이 그렇게 도사리고 있다가 언젠가 비집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풀 그 자체. 그것을 뽑아버린다든지 잘라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풀 그 자체를 누를 것도 없고, 풀 그 자체. 그 자체가 진실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활발발 하게 정신 작용을 하는 그 실체를 우리가 봐 버리는 것.

실체를 진리로 또는 진실로 우리가 봐 버리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뒤에도 또 나옵니다.

좀 더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좋아하시는 일반신도들을 가만히 보면, 기도를 한참 한다든지 아니면 절을 하고나면 뭔가 느끼지 못했던 후련한 것이 있습니다.

아주 후련하고 또 흐뭇하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절을 많이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하고 법당에서 나올 때, 아주 후련하고 가뿐한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그 느낌이 사람을 잡는 겁니다. 그 순간은 좋아요.

그 순간은 좋은데 그것이 불교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절도 하지 않고 기도도 아니 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지적한 것을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 절 하고나니까 너무 기분 좋아.” “기도 하고나니까 너무 기분 좋아.”

이런 소리 하지요?

바로 여기서 지적한 그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아무 망상 없이 고요한데 한참 몇날 며칠 그렇게 있다가 나오면 뭔가 시원하고 그렇거든요.

그리고는 그것뿐입니다.

사실은 그것은 불교에서 아무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 마음은 편안할지 모르지만 불교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혜스님이 얼마나 열을 올리면서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대혜스님같이 욕 잘하고, 대혜스님같이 열 잘 올리고 화 잘 내는 분도 사실은 드물어요.

왜냐? 정법이 아니니까요.

정법이 아니니까 열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비판 아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점잖은 스님이. 점잖은 도인스님이 그렇게 열을 내고 비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잠시 소식이 끊어진 것을 알았으나 뿌리가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찌 적멸을 투철히 증득할 기약이 있겠습니까?

적멸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 조용해서 느끼는 그런 적멸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절 많이 해서 느끼는 그런 후련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약간의 소득은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도 이 간화선은 우리가 논하는 자리에서는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다음 페이지에 자세히 나오는데 한 번 더 읽고 좀 더 심도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p. 117

  眞正(진정)한 적멸이 앞에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치열하게 생멸하는 가운데서 곧 단번에 뛰어나야 단번에 뛰어난다는 것은 “거기서 눈이 열려야” 이런 말이지요.

단번에 뛰어나야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문득 곧 큰 강을 휘저어서 우유를 만들며,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들며, 時機(시기)에 임하여 주고 빼앗으며 죽이고 살리기를 자유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옳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적멸하다든지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는 “적멸한 것이다.” 또 “공적한 것이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목석처럼 되어야 적멸한 자리이고 공적한 자리이냐?

   여기에 대혜스님의 말씀처럼 치열하게 생멸하는 가운데서 거기에서 한 생각의 눈을 떠야만 그것이 진짜 “적멸의 의미다.”그랬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어떤 적멸을 알아야 되고, 부단히 작용하는 그 자리에서 적멸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비행기가 600키로, 어떤 경우에는 800키로로 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어디 달리는가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요. 800키로 900키로로 달리는 그 속도는 치열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치열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

  여기에 보면 치열하게 생멸하는 가운데 이 생멸이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 마음이 1찰라에 900 생멸한다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보통 1찰라는 불교에서 흔히 계산하기를 1초의 120분의1 이라고 그래요. 요즘 마이크로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1초의 120분의1 1찰라입니다.

그 1찰라 사이에 900 생멸하는 것이 우리의 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렇게 부단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생각입니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약간 변한다든지, 가면서 이것저것 간판을 또는 사람을 훑어보면서 짧은 시간에도 많은 사람을 분별하는 그런 정도는 우리가 알 수가 있는데, 1초의 120분의1 이 1찰라이고 1찰라 속에 생각이 900번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끊임없이 그렇게 생멸을 반복하는 이 세계에서의 생멸이라고 합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면 그냥 일상생활입니다.

우리가 주고받고 사람 만나고 일어나는 사건들 다 감지하는 그런 모든 생활입니다.

우리가 오늘하루 중에 얼마나 많은 생활을 했습니까?

엄청난 활동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정말 움직이지 아니하는 그 세계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900키로 1000키로를 달리는데 동요하지 않는 사실.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실. 그렇게 하나도 움직이지 아니하면서도 900키로를 달리고, 잠깐 사이에 서울 부산을 오고가고 합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1찰라에 생각이 900번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지만, 그런 가운데 정말로 변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아니 하는 그 實體(실체)!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저 바다에 물결이 수 없이 출렁거립니다.

쉼 없이 출렁거리지만 물을 떠 보십시오.

어제 물이나 오늘물이나 오늘도 수천 번 수만 번 출렁거렸지만 항상 그 물입니다.

변함이 없다고요.

이렇게 비유를 들면 뭔가 ‘아!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리 인간의 실체도 그렇구나!’  비유를 들면 조금 짐작은 가는데...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서 알아차린다.

부처님도 그런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해해야지 이것을 그냥 내리누르고 기도를 한다든지 화두를 든다든지 해서 하~~ 일어나는 망상을 어떻게 하든지 내리눌러서 머리에 상기아만 오르고, 상기병심하면 평생 못 고칩니다.

우리 도반들 보면 상기가 나면, 간화선 교과서에 보면 얼른 좌복 위에서 내려와서 도량을 돌라고 그랬습니다.

돌면 위로 올라갔던 기가 발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내려가서 기를 다 흩어버리고 다시 좌복 위에 앉으라고 이렇게 딱 되어 있는데도, 오래앉아 버티는 것을 제일로 치는 겁니다.

오래앉아 버티는 것을요.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 결가부좌도 막 억지로 시키는 겁니다.

 

  오늘도 아침에 제가 법문을 들었는데요.

어떤 큰 스님이 결가부좌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에는 안 맞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 체질에는 반가부좌 라야지요.

인도 사람들 호리호리하고 그냥 막 요가 잘하는, 인도 사람들 체질에는 결가부좌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체질에는 절대 안 맞습니다. 절대 하지마세요.

그것 하다가 관절염 걸린 도반들 여럿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공부인줄 아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되지도 않는 마음을 내리누르려고 대혜스님이 여기  표현했듯이 돌로 풀을 짓누르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한들 1찰라에 900번 생멸하는 마음이 가만히 있어 지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마음의 실체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도 모르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900키로 1000키로를 달리지만 움직이지 아니하는 비행기.

차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그...

어디를 봐도 비행기는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제가 오늘 오면서 그랬어요. “비행기가 움직이느냐? 안 움직이느냐?” 물어보니까 갑자기 물으니까 아무리 봐도 안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부산에서 서울까지 옵니까?

아무리 봐도 비행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서울까지 45분 만에 왔어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고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부단히 치열하게 생멸하는 가운데 정말 생멸하지 않는 이치가 그냥 있습니다.

그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짓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혜스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돌로 풀을 짓누르는 것과 같아서 잠깐 생각이 멈추는 듯하지만, 그것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표현을 아주 잘 해놨습니다.

파도치는 데서의 비유라든지 비행기의 비유라든지 이것을 우리의 일상 치열하게 생멸하는 가운데서 寂滅(적멸)하는 道理(도리)! 움직이지 아니하는 도리!

그것의 작용과 비 작용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 부산과 서울을 45분 만에 오고가면서도 실체를 가만히 보면 하나도 안 움직이고 있어요.

비행기는 안 움직인다고요. 묘한 도리잖아요.

 

  우리의 삶도 그와 같습니다.

그 양면을 치우치지 말고 이해해야 됩니다.

치우치지 말고 그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이 중도적인 안목! 中道正見(중도정견)입니다.

그 양면을 어디에도 조금도 치우치지 말고 바로 이해해서 수용해서 사는 것. “이것이 왜 움직이느냐?” “왜 안 움직이느냐?” 이렇게 할 일이 아닙니다.

움직이기도 하고 안 움직이기도 하는 그 양면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

 

여기에 보면 큰 강을 휘저어서 우유를 만든다. 했는데 세상이 확 뒤바뀐다 이 말입니다.

그때부터는 보는 안목이 달라져버립니다.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든다. 이렇게 했어요.

  경전 성립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한 5~600년경에 성립된 것이 화엄경입니다.

대승경전은 거의 다 그래요.

그런데 “최초에 화엄경을 설했다.”그러거든요. 5~600년 뒤에 편찬한 그 사람이, 부처님이 처음에 성도한 그 부처님의 정신세계에다 초점을 맞춰서 결집한 것입니다.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그 순간에다가 초점을 맞춰서 결집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부처님이 다 설하고 어쩌고, 그것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다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어디 석가모니만 부처라고 하라는 이유가 없잖아요.

 

  화엄경에 보면 始成正覺(시성정각). 부처님이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니 其地(기지)가 堅固(견고)하여 金剛所成(금강소성)이라.

그 땅은 견고해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

화엄경의 이런 대목을 접하면 그냥 환의심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앉아 있던 자리. 사자좌는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로 만들어졌고, 또 보리수 밑에 앉았었잖아요?

보리수도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로 만들어졌고, 화엄경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다가야에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뛰어가 봤지요.

정말 금은보화로 이루어졌는지? 우리나라 땅 보다도 훨씬 척박합니다.

돌 자갈 모래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당신이 앉았던 사자좌는 돌덩이 하나였어요.

깔고 앉았던 길상초라고 하는 풀도 그 주변에 많이 나는 풀을 그냥 손으로 뜯어서 깔고 앉았는데 화엄경에서 표현하기를 우리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은보화로 되어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 그러면 정말 깨달음의 내용을 순수하게 추호의 방편도 없이 순수하게 다 털어 내놨다고 하는 화엄경이 거짓말이냐?

어떻게 이렇게 과장이 심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과장도 아닙니다.

뭘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야 과장이라도 하지요.

전혀 근거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의 표현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한강을 다 휘저어서 우유를 만들고,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든다. 이것이 다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그 시각에서 볼 때 세상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존귀하고 더 값지고, 사실 “다이아몬드다.” “금은보화다.” 이런 표현을 그 당시로서는 최고, 지금도 그렇지요.

최고의 보배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안목으로서 세상을 볼 때 사실은 그 보다도 더 하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이다.” 표현한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가보니까 금은보화 없더라고요.

또 보리수도 그냥 보통 보리수나무지 금은보화로 되어있지 않았어요.

나무는 나무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나무 아니겠습니까?

금은보화로 되었다면 그것은 금은보화지 나무입니까?

그래서 그 표현이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실입니다.

 

  그 분의 깨달음의 안목으로 볼 때 세상은 온통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온통 그렇게 보여...

보통 인간의 정으로, 한 인간을 사랑만 해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부처님같이 정말 왕자의 자리도 벗어 버리고, 온갖 것 인생 다 포기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그 큰 깨달음으로 세상을 볼 때 어떻겠습니까?

화엄경은 아주 정말 멋지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대혜스님도 깨닫고 나서 화엄경을 봤다는 내용이 저기 있었습니다만, 화엄경에 근거를 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안목으로 세상을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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