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2. 28. 16:27
 

 

서장 대 강좌 7- 2 강

 

 

p. 117

  옛 성인이 이를 일러 다함없는 無盡藏陀羅尼門(무진장다라니문)이다.

또 다함없는 無盡藏神通遊戱門(무진장신통유희문)이다.

또 다함없는 無盡藏如意解脫門(무진장여의해탈문)이다.

그 깨달음의 경지를 뭐라고,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무진장다라니문.무진장신통유희문.무진장여의해탈문.

이런 식으로 표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어찌 참다운 대장부의 능히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진짜 대장부가 할 일이다 이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런데 관심을 갖고, 여기에 눈이 좀 열려야 이것이 참 장부이고, 부처님 법을 만난 인연입니다.

 

그러나 또한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다 내 마음의 항상 하는 본분일 뿐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고 저의 어떤 불교적 사상에서도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미 있는 것. 우리 사람 사람들이 각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기존의 것. 절대 밖에서 찾지 말라. 밖에서 찾아봐야 그것 몇 푼어치 안 된다.

진짜 소중한 것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분사라고 합니다.

선의 용어로 “本分事(본분사)”자기 본분의 일입니다.

이 이상은 없습니다.

여기 보면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다 내 마음의 항상 하는 본분일 뿐이다.

  원컨대 당신은 빨리 정신을 차리고 결단코 이 일을 기약 하십시오.

廓徹大悟(확철대오)하면 가슴속 밝음이 백천 개 日月(일월)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한 생각으로 밝게 통달하되 한 털끝도 분별심이 없을 것이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능히 이와 같으면 어찌 단지생사의 길 위에서만 힘을 얻겠습니까?

다른 날에 다시 권력을 잡아서 임금을 요순 지위에 올리기를 손바닥 가리키는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불교는 물론 생사해탈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런 깨달음의 안목을 갖게 되면 정치. 그것도 그냥 간단하다 이겁니다. 정치도 정말 멋지게 잘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이 분은 추밀 정도면 상당한 벼슬인 모양입니다.

다시 권력을 잡아서 임금을 요순 지위에 올리기를 그러니까 충성을 잘하고 재상노릇을 잘해서 임금을, 요임금. 순임금같이 만든다 이겁니다.

깨달음의 안목을 갖고 있으면 그런 능력도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가 둘이 아니니까요.

理(이)에만 밝고 事(사)에 어두우면 그것은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지요.

 

  대통령이 뭐든 만능인인 것처럼 전부 이야기를 하는데요.

대통령은 적당이 둔해도 사실은 상관없습니다.

리고 대통령한테 모든 것을 바라려고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얼마나 훌륭한 참모를, 정말 사심 없이 정직한 마음으로 참모를 쓰느냐에 관건이 달렸습니다.

오늘 날 세상이 얼마나 다종다양한 길이 있는데, 그것을 혼자서 다 아는 것처럼, 전부 그렇게 나와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전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단 사심 없이 정직한 전문가에게 맡겨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혼자 다 합니까?

 

  그렇게 할 줄 아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을 아주 聖君(성군)처럼 만들고, 대통령을 아주 정말 멋지고 건사한 대통령으로, 그런 보좌만 할 줄 안다면 정말 건사한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겁니다.

보좌가 시원치 않아서... 보좌가 왜 시원치 않으냐?

대통령이 정직하게, 정말 바른 안목을 가지고 사심 없이 사람을 못 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맨 날 이것저것 가리고 그저 사심이 개재 되어서 사람을 제대로 못 써서 그런 겁니다.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혼자서 알 수도 없는 것이고요.

  대혜스님도 여기서, 이런 이들은 정치에 상당한 지위에 있으니까요.

제대로 된 안목만 갖추면 정치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겁니다.

회사를 경영하는데도 아주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분사라는 것.

기존의 것이라고 하는 것.

내 자신 속에 이미 갖춰져 있는 것.

그것 외에 달리 다른 것은 아무리 빌고 달고 해봐야 그것이 그렇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얻어진들 몇 푼어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마침 염화실 도서출판에서 작은 임제록이 나왔는데요.

여기 서문에 보면 어떤 신도님이 기도도 남 못지않게 무던히도 많이 하다가‘야~ 이게 아닐 텐데?

이게 아닐 텐데?’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해서 어느 날,

임제록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제록을 보고는‘아~! 이것이구나!’‘이것이구나!’그것을 서문에다 써 놨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 겁니다.

그대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임제록을 들고 저를 찾아온 겁니다.

“보살님이 그렇게 감동을 많이 받았다면,

그 마음에 와 닿는 내용들을 메모해 오세요.”그랬더니 노트 한 권을 메모해 왔어요.

그래 그것을 그대로 뽑아서 “작은 임제록”이라고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도 써 놨지만,

 

‘내가 부처님한테 언제 얼마나 어떻게 많이 맡겨 놨기에 내가 그토록 달라고 조르는가?

이것도 조르고 저것도 조르고 자식이 학교 갈 때는 자식이 공부 잘 해달라고 조르고,

남편이 사업할 때는 사업 잘 되라고 조르고,

집안에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있을 때는 건강을 달라고 조르고,

’수 십년을 조르며 쫓아 다녔는데 어느 날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내가 언제 맡겨 놔뒀지?

부처님한테 맡겨 놓지도 않고 이렇게 조르는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날 탄생한 것이 “작은 임제록”입니다.

임제록을 보고는 깨달은 겁니다.‘아~! 부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것이 진짜 불교구나!’그래서는 환희심에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겁니다.

다 적어오라니까 그 서툰 글씨로 하나하나 노트를 정성스럽게 써 왔더라고요.

“작은 임제록”이 임제록에서 감동받은 대목입니다.

 

p. 120

       15.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 (3)

  편지를 보니, ‘처음 조금 고요하게 앉으니 공부가 또한 스스로 아름답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감히 망령되게 고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요한 것이 참 좋다.”이렇게 하면서도 ‘감히 망령되게 고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했습니다.

우리가 봐도 이 말은 참 모순이 많아요.

대혜스님 같이 날카로운 분에게 걸렸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어떤 사람이 자기 귀를 막고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으면서 남이 듣지 못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령을 훔쳐 가면서 자기 귀를 막고 훔쳐가는 겁니다.

요령은 덜렁덜렁 소리 나니까‘아, 귀를 막으면 안 들리겠다.’싶어서 자기 귀를 막으니 다른 사람은 다 듣는데 자기만 못 듣는 식이다 이겁니다.

우리가 봐도 모순이 많은데 대혜스님 눈에 오죽하겠습니까?

비유를 아주 지독하게 해버렸지요?

자기 귀를 막고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으면서 남이 듣지 못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너 안 들리지?”“안 들리지?”이러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참으로 이것은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만드는 일일뿐입니다.

만약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하면, 일용하는 하루 가운데 어둡고 어리석어서 혼이 흩어지지 않는 죽은 사람과 같게 됩니다.

여기도 불교가 생사해탈 아닙니까?

그런데 생사의 마음을 타파한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무슨 물건이 있어야 깨든지 말든지 하지, 깨는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타파한다. 타파한다 했으니까 깰 破(파)자를 써 놨으니까요.

  생사심이 본래심입니다.

1찰라에 900생멸하는 것이 본래 우리 마음의 속성이라고요.

만약에 마음이 생멸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죽은 마음입니다.

완전히 죽은 마음이라고요.

아무 쓸모없는 마음입니다.

생멸해야 뭘 분별하든지 말도 알아듣고, 사람도 분별하고, 추운지 더운지도 알지요.

만약에 생멸하지 않는다면 그런 분별 못합니다.

목석도 기후를 분별해요.

기후를 분별한다고요.

춥고 더운 것을 분별합니다.

또 공기가 오염 됐는지 청정한지 목석도 분별 다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분별 못한다면 말이 됩니까?

 

  그럼 뭐냐? 생사심을 타파한다.

생멸심을 타파한다는 그 말이...

생멸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마음이다.

이렇게 아는 겁니다.

그럼 아무 문제가 없어요.

생멸심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생사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요.‘아, 죽는 것이 인생이구나!’‘죽는 것이 인생이구나!’

이렇게 알면 끝입니다.

세상에 누구 어느 놈 안 죽은 놈 있나요?‘아, 죽는 것이 인생이구나!’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참 아름답게 단풍 들어서 잘 떨어진다.’안 떨어지면 나무를 차가면서 떨어뜨리면서 거기서 뒤집어쓰면서 놀이를 하지 않습니까?

  자연현상은 그렇게 잘도 이해를 하고 수용을 잘해요.

낙엽이 안지면 왜 안지나? 하면서요.

낙엽 지는 것은 잘 수용하면서 내 개인의 낙엽 지는 것은 도대체 수용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가족의 낙엽 지는 것도 도대체 수용 못하고요.

도대체 수용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죽는 것이 인생이다.’생멸하는 것이, 생멸한다는 사실이 참 마음이다.

생멸하는 이것이 진짜 마음이다.

생멸하지 아니하면, 생멸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마음도 아니다.

목석도 아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생멸심을 타파하는 겁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아는 것이 생사해탈입니다.

그것이 생사해탈이라고요.

생사해탈 했다는 사람들.

조사스님들. 도통 많이 하신 분들. 다 생사해탈 했습니다.

그렇다고 안 죽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사해탈 했다고 하면서, 결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거든요.

생사해탈 했다고 하면서 안 죽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생사해탈 했다고 하면서 죽습니다.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아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죽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아요.

거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현상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즐기듯이, 즐기듯이 내 인생의 낙엽도 그렇게 즐기고 받아들이는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 이상 무슨 해탈이 더 있겠습니까?

 

  안 죽는다. 안 죽는다하니까 이 육신이 천년만년 산 사람이 어느 누가 있습니까?

천년만년 산다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지요.

그러니까 솔선수범해서 부처님도 열반하셨고 달마도 열반하셨고 도인들이 먼저 가신 겁니다.

이 이치를 알아야 되는데 불교공부 잘못하면 뭔가 잘못 인식이 되어서 이상하게 알고 있는 그런 상황이 많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도 당연히 아셔야 될 일이지만, 정말 이런 공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분들이 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하면, 다시 무슨 한 가지 공부를 앉아서 고요함을 이해하고 시끄러움을 이해하겠습니까?

열반회상에 廣額(광액)이라는 백정이 칼을 놓고 문득 성불했으니 어찌 이것이 고요한 공부를 하는 데서 나왔겠습니까?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하루에 소를 몇 마리씩 잡고,

이마가 반질반질 하고 아마 대단히 능글맞게 생긴 사람인가 봐요.

廣額(광액)이라는 백정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칼을 도마 위에다 착 꽂으면서, 제가 아주 본 듯이 얘기하지요?

  칼을 착 도마 위에다 꽂으면서

“나도 천불의 일수다.”책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일천 부처님 가운데 나도 들어간다.”이 말입니다.   

“석가도 부처라면 나도 부처다.”여기에 그 분을 불러 놨잖아요?

성불했으니 이 어찌 고요한 공부를 하는 데서 나왔겠습니까?

이 사람이 언제 참선했습니까?

언제 기도했습니까?

언제 고요하게 화두 들고 무슨 끙끙대고 그런 시실이 언제 있었느냐 이겁니다.

  치열하게 일상생활 하는 그것이. 열심히 달리는 거기에 보라고요.

움직이지 아니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움직이지 아니하면서도 목적지에 다 도달합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지지고 볶고 살면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거기에 바로 지지고 볶고 사는 그 사실이 그대로 도요 불법이요 진리라고 하는 사실. 도니 불법이니 진리니 선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벗어나서는 도대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증거를 갖다 대놨잖아요.

열반회상에 廣額(광액)이라는 백정이 칼을 놓고 문득 성불했다.

  그가 어찌 초심자가 아니겠습니까마는, 당신은 이를 보고 정히 그렇지 않다고 하여 대개 불교가 조금 머릿속에 끼어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지요.

 

모름지기 그릇 생각하기를 ‘그는 옛 부처가 나타난 것이지 지금 사람은 이런 힘이 없다.’ 고 할 것입니다.

보나마나 아마 당신은 그런 이야기를 소개 받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머리 굴릴 꺼라는 말입니다.

대다수 우리 한국의 불자들도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이런 생각 뜯어 고치는 것이 가 순위입니다.

앉아있는 참선을 전부 일으켜 세워서 일상생활 속에 뛰어 들게 하는 생활 선으로...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불교가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자꾸 선방에 가서, 선방에 가서 한 번씩 생활하는 것도 이런 이치 알자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 알자고 가는 것이지 앉는 시간 채워서 뭐가 나오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큰 오산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이는 스스로의 훌륭함을 믿지 않고 열등한 사람 되기를 달게 여기는 것입니다.

초학자니 만학이니 이것이 없습니다.

구참이다. 초학이다.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불교에 입문한지 여러 해 되었으면 구참 이라고 하고,

오늘 왔으면 초학자라고 하는 말이야 있겠지만,

그러면 10년 20년 30년 된 구참 이라고 해서 불교 압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승복을 입고 프로의 입장에 들어가서 프로라고 불교를 공부해도 불교 아는 사람 솔직하게 잘 없습니다.

이것은 외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 외형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구참이나 초학이나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양대학에서 보면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하는데 그것도 너무 세속적인 어떤 기술을 배우는 문제라든지 또는 세속학문을 공부하는데다 맞추어서 그런 것을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부터 깨야 됩니다.

그것 깨면서 진정한 불교를 이해시키는 길이 됩니다.

그것 깨면 하나의 길이 됩니다.

첫째 가르치는 사람이 모르니까요.

“이것은 초급이니까 초급반에 가서 어떻게 하세요.”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초급반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이라는 것이 정말 진실한 불교에, 순수 불교에, 정법 불교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부 세속의 기준에다 맞추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꼭 아셔야 됩니다.

 

  우리 이 문중에서는 初學(초학)과 晩學(만학)을 논하지 않고, 또한 오래 참구한 것과 먼저 들어온 것도 묻지 않습니다. 만약 참으로 고요하기를 구한다면 모름지기 생사의 마음을 타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사의 마음을 타파한다.

표현을 타파로 해 놨으니까 그런데 아까도 설명 했듯이 1찰라에 900생멸하는 그런 생사심이 그대로 마음이다.

우리가 찾고자하는 그 마음이다.

마음의 실체가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파도가 겁나게 친다 해도 그대로 물입니다.

겁나게 치는 파도가 물이라고요.

900키로로 달리면서도 비행기는 가만히 있다니까요.

말로는 모순이 되지요.

말로는 모순이 되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물결은 그렇게 심하게 치지만 물은 그대로입니다.

어제 물이나 오늘 물이나 수만 번 어제 물결친 그 물도 똑 같습니다.

다시 수만 번을 쳐도 그 물입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곧 물이다”우리 일상생활에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그 삶이 그대로 도다. 그대로 불법이다.

 

그래서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

우리 불교의 제1 교과서. 소위 所依經典(소의경전)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금강경은 만인의 교과서가 되어야 됩니다.

금강경은 부처님 믿으라는 말 한 마디도 없습니다.

금강경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앙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온 인류의 교과서가 되어야 된다는 주장을 옛날부터 합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고 그랬지 않습니까?

제일 큰 법이 탐 진 치.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

이것이 일체법 중에 제일 큰 법입니다.

그리고 108번뇌. 8만4천 번뇌 모두가 일체법입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고 우리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누구나 다 달달 외우고 수십 번 사경하고, 어디가도 강의 듣고, 불자가 된지 10년 20년 된 분들은 금강경 강의를 아마 10번은 더 들었을 겁니다.

어디 49재에 참석해서 읽은 것만 해도 수십 번.

100번을 넘었을지도 몰라요.

그 말 속에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다.

 

일체 법 중에 제일 큰 법이 탐 진 치인데, 그것이 그대로 불법이라니까요.

탐 진 치 빼버리고 인간의 삶이 어디 있습니까?

탐 진 치 없는 인생이 어디 있냐고요.

이것 아무데나 가서 못 듣는 이야기입니다. ㅎㅎㅎㅎㅎㅎ~~~

  대개 일반불교에서는 탐 진 치를 제발 없애야 된다.

없애야 된다하고, 그것을 떨쳐 내야 된다.

번뇌를 떨쳐 내야 된다고 하지요.

우리 선불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니까요.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금강경만 하더라도 금강경은 大乘始敎(대승시교)입니다.

대승시교위에 頓敎(돈교). 圓敎(원교)가 있습니다.

一乘圓敎(일승원교)는 저 위에 있습니다.

경전을 좌판 할 때 금강경은 중간에 있잖아요. 아함12. 방등8. 21째 담반야.

아함부경 12년 설 하고,

방등부 8년 설 하고,

그리고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 하고,

그 다음에 법화열반을 다시 8년간 설 하고요.

어떻게 보면 중간에 있는 겁니다.

중간 정도 수준인데도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잖아요.

중간 정도 수준인 데도요.

 

  그러면 법화경. 화엄경은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잖습니까?

이것을 제대로 알고, 그야말로 탁 다 들어내서 깨우쳐주는 운동이 좀 있어야 되는데요.

참 좋은 불교를 너무 안타깝게...

그래서 생사의 마음이 타파한다는 이 말은, 치열하게 파도치는 그 물결이  生死性(생사성)

‘이것이 그대로 물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

타파는 무슨 뭘 깨뜨리나요?

컵이라면 던져 버리면 깨지지요.

마음은 그렇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있어야 깨지지요.

이런 사실을 확연히 아는 것이 간화선의 제1 지침서인 『서장』아닙니까?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생사의 마음이 타파되면 저절로 고요하게 될 것입니다.

‘아~!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내 마음이구나!’

이래 버리면 더 이상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고, 잠재우려고 할 필요가 없어져버립니다.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고요.

물결은 출렁거리면 출렁거릴수록 보기 좋은 겁니다.

출렁거릴수록 보기 좋다니까요.

아주 치열한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수용이 되는 것이지요.

야~ 이것 참 대단한 것입니다.

“탐 진 치 삼독이 그대로 불법이다.”꼭 기억하세요.

그것 빼고 우리 인생은 없습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적정의 방편이 정히 이런 것인데 이것이 좌선해라. 뭐 해라. 고요해라. 고요해라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도리를 알려고 하는 것인데’이 말입니다.

스스로 이 말세의 그릇된 무리들[邪師輩]은 옛 성인의 方便說(방편설)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마음을 어디 화두에다 집중 시켜라.

뭘 어떻게 해라.

어떻게 해라는 것은 하나의 방편설입니다.

그러니까 총명한 사람들은,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할까요?

6조스님 같이 재수 ㅎㅎㅎ~~~ 좋은 사람들은 불교 佛자도 모르고,

나무 팔러 갔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 듣고 척 그냥 끝내 버리고요.

 

  3조 승찬대사도 40중반까지 문둥병을 앓다가 어디서 도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도사한테 가면 혹시 무슨 좋은 소식이 있을까 싶어서 2조 혜가스님을 찾아가서 “제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몹쓸 병을 앓게 됩니까?

저로 하여금 참회하고, 제가 죄라고 생각해서 이런 병을 앓으니까 병보다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몹쓸 병을 앓는가 하는 이 사실이 저는 더 짐이 됩니다. 스님께 참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혜가스님이 “그대가 그렇게 죄업 때문에 그렇다면 당신이 천근만근 무게로 죄업이라는 것을 의식 속에 가지고 끙끙대고 사니까 그 죄업을 나에게 보여 다오. 그러면 내가 참회시켜 주든지 씻어주든지 쪼개주든지 깨주든지 알아서 하겠다.”

  그 고마운 말씀에 그 토록 자기 자신을 짓누르던 천근만근의 죄업의 무게를 찾아보니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는 겁니다.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흐르고, 목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그래도 도저히 찾아지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항복하고 “저를 그 토록 짓누르는 죄업인데도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자네가 찾을 길이 없는 것이라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확실하게 있다면 왜 못 찾겠나?

없으니까 못 찾는 것이 아니냐?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니고,

어디 두고 온 것도 아니고.” 그 말 한 마디에 그만 시원해져 버렸습니다.

安心法門(안심법문).

마음이 편안해져 버렸습니다.

그걸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 다 끝나 버렸습니다.

부처 佛자 알고 그렇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천수경 외우고 반야심경 외워서 깨달은 것도 아니라고요.

그런 것 전혀 모르고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초심자니 구참이니 이런 불교에 오면,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니까요.

최소한도 선불교에 오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것이 최고급 불교지요.

저~기 딴 불교에 가면 탐 진 치를 어떻게 하더라도 씻어내고,

참회해서 덜어내라고 하지요.

여기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탐 진 치.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을 빼놓고는 우리의 삶이 있을 수가 없고,

우리의 삶이 없는 곳에 무슨 도니 불법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도교에서도, “道라는 것은 한 순간도 내 자신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떠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모든 것들의 일체가 방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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