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참선수행방법] 5.공부할 때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通達無我法者 2008. 1. 4. 11:15

5.공부할 때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공부하는 이에게는 두 가지의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하나는 초심자(初心者)의 어려움과 쉬움이요, 다른 하나는 구참자(久參者)의 어려움과 쉬움이다.

◎ 초심자(初心者)의 어려움과 쉬움

초심자의 병통(病痛)은 망상(妄想)과 습기(習氣)가 놓아지지 아니한다는 점이다. 무명(無明)·아만·질투·장애·탐내는 마음·성내는 마음·어리석은 마음·애욕·나태 등을 좋아하며, 나와 남의 잘잘못을 따지고 뱃가죽만 가득 채운다면 어떻게 도(道)와 어울릴 수 있겠는가. 부잣집 출신인 경우에 습기를 잊지 못하여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하니, 어떻게 공부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떠한 신분으로 출가 하셨는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문자를 배워 문장을 찾고 글귀를 뽑아내어 옛 사람의 말을 사용하여 알음알이를 짓는다. 그는 스스로 대단히 여겨 크게 아만심을 일으키고 있지만, 한 바탕 큰 병을 만나면 비명이 하늘에 닿는다. 섣달 그믐[죽는 날]이 되어서 비로소 허둥지둥 하지만, 평소의 알음알이는 아무 곳에도 쓸데가 없어 그제야 후회한들 소용이 없을 뿐이다.

약간의 도심(道心)이 있는 사람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른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두려워하여 제거하고 또 제거해 보지만 제거하지 못한다. 종일토록 번뇌하다가 스스로 업장이 깊고 두터움을 원망하니 이로 말미암아 도심(道心)을 잃고 물러난다. 어떤 이들은 망상과 더불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씩씩거리며 주먹을 들어 기운을 돋우며 가슴을 내밀고 눈을 부릅떠서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벌일 기세를 보이며 망상과 한판 사생결단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희롱 당하여 피를 토하며 발광을 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허무[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 저들이 이미「귀신굴」에 태어났음을 알아야 한다. 비우려해도 비워지지 않고, 깨달으려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하지만, 도를 깨닫기를 구하거나,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큰 망상임을 알아야 한다. 모래로는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니 당나귀의 해(12간지에 없는 해)가 올 때까지 구한다해도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두 가지[枝]의 맑은 향기에 부딪쳐 곧 환희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을 겨우 꿰뚫은 것처럼 우연히 부딪친 것이요 참으로 공부가 익어서가 아니다. 환희마(歡喜魔)가 이미 마음에 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고요한 가운데서는 맑고 깨끗해서 공부가 잘 되지만 시끄러운 가운데서는 공부가 잘 안 되자,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동정(動靜) 두 마왕의 권속이 되어 버렸다.

위와 같은 부류는 대단히 많다.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 길을 바로 들어서지 못하면 진실로 어려움이 많다. 깨달음은 있으나 비춤이 없으면 산란하여 「낙당(落堂-당호를 얻음. 곧 깨달음을 인가 받음)」하지 못하고 비춤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또한 고인 물(死水)에 앉아 빠져 죽게 된다.

공부 하기가 비록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떠한 것이 초심자의 쉬움인가. 무슨 교묘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놓아 버릴 뿐이다. 어떠한 것을 놓아 버리느냐 하면, 곧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장례를 치를 때 그 시체에다 대고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보라.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를 몇 방망이 때려 보라. 대거리를 하지 아니할 것이다. 평소에 심술을 잘 부리던 자도 심술을 부리지 아니하며,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던 자도 그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평소에 습기(習氣)와 오염(汚染)이 많던 자도 그것이 없다. 아무것도 분별하지 않으며 무엇이라도 놓아 버린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우리의 이 몸뚱어리가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곧 한 구의 시체가 되고 만다. 우리가 놓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몸뚱어리를 중요하게 여겨 나와 남, 옳고 그름, 사랑과 미움, 취하고 버림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몸뚱어리가한 구의 시체라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할 것이며,그것을 본래의 나라고 보지 아니할 것이니 무엇인들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다만 놓아 버려야 한다.

하루 종일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한가하고 바쁘고를 막론하고,온 몸이 통째로 하나의 의념(疑念)이 되어 평온하고 온화하게 중단 없이 의심하여 가라. 터럭만큼도 다른 생각을 섞지 말라. 화두를 드는 것이 마치 천장검(天長劍)을 의지한 것처럼 하여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라. 어떠한 망상도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이 그대의 한가로움을 깨트리겠는가.

또 어찌 부질없이 고요함과 움직임을 분별하여 집착하는가. 만일 공(空)에 집착하여 망상을 두려워하면 그것은 또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것이다. 청정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청정이 아니다. 공(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며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긷고 나무하는 것이 묘도(妙道) 아님이 없고, 김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참선이다. 하루종일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 도 닦는다고 하지 않는다.

◎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어떤 것이 구참자의 어려움인가. 구참자는 참된 의심이 눈앞에 나타날 때면 깨달음도 있고 비춤도 있지만 생사(生死)에 속해 있으면 깨달음도 없고 비춤도 없고 허무에 떨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 대개는 여기에 이르면 깨끗이 벗어나지 못하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 이르면 정(定) 가운데서 조그만 지혜가 일어나, 옛 사람의 몇몇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서는 곧 의정을 놓아버린다. 스스로 확철대오(確撤大悟) 했다고 생각하여 시를 읊조리고 게송을 지으며 눈을 끔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려 선지식이라고 떠들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는 자들은 마군의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달마스님의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담장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있다」는 뜻과 육조스님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명(明) 상좌의 본래 면목인가?」라는 뜻을 잘못 알고서는 고목이나 바위덩이처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지극한 원칙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장소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것도 바로 이러한 꽉 막힌 자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이 구참자의 쉬움인가. 이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자만하지 말고, 중간에서 걷어치우지도 말고, 면밀하게 공부해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더욱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더욱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번 이르면 통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선지식을 찾아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한산(寒山)대사는 노래(頌)했다.

高高山頂上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四顧極無邊 사방을 돌아보니 끝이 없구나.
靜坐無人識 조용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孤月照寒泉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
泉中且無月 샘물에는 원래 달이 없으며
月是在靑天 달은 푸른 하늘에 있다.
吟此一歌曲 노래 한 곡조 불러 보나니
歌中不是禪 노래 가운데 선(禪)이 있지 아니한가.

첫 두 구절은 참된 실상이 홀로 드러나 일체에 구속되지 않고, 온 대지에 빛이 밝아서 터럭만큼도 장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네 구절은 진여(眞如)의 미묘한 본체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애당초에 알 수 없고 3세 제불도 나의 그 자리를 찾지 못하므로 아는 사람 없다고 한 것이다.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는 말은 이러한 경계를 비유한 저 노인네의 방편이다. 최후의 두 구절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알까봐 특별히 우리들을 일깨운 것이다. 모두가 선 아님이 없다.

⊙ 결론(結論)

이제 나는 한 강설을 마쳤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넝쿨을 펴는 것이오 쓸데없는 길을 갈래 내는 것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참다운 뜻이 없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아니하면 고함을 질렀다.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요즘은 옛날과 같지 않아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동참하라. 구경(究竟)에 있어서 손가락은 무엇이며 달은 무엇인가. 참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