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④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9:11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 금빛 사자의 노래

여기에 걸맞는 견서사자게(堅誓獅子偈)를 하나 더 소개하고서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무수겁(無數劫) 전에 사자도 범도 말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털이 금색찬란한 금모사자(金毛獅子)가 있었는데 이 사자는 털이 금색으로 찬란한 만큼 식(識)도 높았습니다.

그때 마침 벽지불(辟支佛), 즉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하신 신선 도인이 산중 숲속에서 깊은 삼매에 잠겨 있었습니다. 삼매에 들어서 어떤 동물이나 어떤 맹수가 오든지 간에 하여튼 설법을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금모사자도 가끔 이 벽지불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때는 동물도 지금의 동물 같지 않고서 식(識)이 보다 발달된 동물이 있었던 시기였겠지요.

금모사자는 처음에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벽지불을 만나서 차근차근 법문을 들으니, 불법승 삼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소중하고, 부처님 법(法)이 소중하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소중하고, 법 따라서 행동하는 출가한 분들이나 재가인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삼보의 소중함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벽지불 아라한은 설법하실 때 항시 가사(袈裟)를 입고 설법을 했습니다. 마침 그때 포수가 사냥을 나와서 아주 찬란한 금모를 지닌 사자가 벽지불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설법을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포수인지라 마땅히 그 금모사자의 금색찬란한 가죽이 욕심 났겠지요. 포수는 '내가 금색이 찬란한 사자를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왕자한테 드리면 왕자가 나한테 큰 상을 내리겠지' 하는 흑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사자를 잡으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몸집도 굉장히 크고 외형도 무시무시한 힘이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보통 사자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금모사자같이 괴력을 갖추고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사자를 포수인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활을 쏘려고 맘 먹으면, 그야말로 금모사자인지라 영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에 단박에 그걸 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저 사자가 가사를 걸치고 있는 아라한 밑에 저처럼 고분고분 들어가 무릎을 꿇는 걸 보니까, 내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활과 독화살을 가사 속에 감추고 가면 접근할 수가 있겠지' 하는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포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활을 그 가사 속에 숨기고 갔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금모사자가 이제 환희심을 내서 자기 발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고서 다소곳이 있단 말입니다. 이때를 놓칠세라 포수는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한 발만 맞아도 독이 온몸에 번져서 죽을 수 있는 그런 독화살이었습니다.

아무리 괴력이 있고 힘 있는 금모사자라 하더라도 역시 무서운 독이 있는 화살을 맞았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화살을 맞고서 그냥 죽을 수는 없었겠지요. 더구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사자인지라 비록 독화살을 맞았지만,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원망과 사무치는 진심(嗔心) 때문에 그때 분출되는 힘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진심을 낸 금모사자는 한순간에 포수를 덮쳐서 죽이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삼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법문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방삼보계(謗三寶戒)가 생각나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금모사자가 읊은 슬픈 노래가 '견서사자게'입니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 향어괴색복(向於壞色服)"이라,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끝내 남을, 특히 괴색 법의를 입은 사람을 향해서는 해치고자 하는 악심을 품지 않겠습니다." 괴색(壞色)은 가사의 색입니다. 모든 색을 다 합하면 괴색이 됩니다.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을 한데 모으면 그때는 괴색이 됩니다. 우리 법의를 가리켜서 괴색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여 비록 독화살을 나한테 쏘았다 하더라도 괴색 가사를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악심을 품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냥꾼은 배신자요, 자기 욕심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며 더욱이 스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신명을 바칠지언정 결코 악심을 품지 않겠다는 겁니다.

출가인들을 너무 돋보이게 말씀드려서 한편 언짢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소중한 것입니다. 재가인도 소중하고 다 소중합니다만, 특히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좋은 때 집을 떠나서 이십대 삼십대부터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하는, 또 늙은 말년에 오십, 육십이 되어서 자손들한테 시봉받고 편히 지낼 수 있는 분들이 혼자 지낸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가정의 단란을 맛본 분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 출가인들이 설사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괴색 승복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사자 역시 스님도 아닌 엉뚱한 나쁜 사냥꾼이 입었지만 그 괴색복 때문에 악심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지극히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나쁜 마음으로 해서 가사를 걸쳤다 하더라도, 가사를 걸친 그것만으로도 그 사냥꾼은 나중에 성불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에 취한 바라문 외도(外道)가 부처님한테 계(戒)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술에 취했는데 부처님께서 그 청정한 안목으로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오! 비구여 잘 왔구나!" 그 한마디로 바라문의 머리를 깎아 버리고 법의를 입혀 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과 그 사람의 원력(願力)으로 해서, 무슨 계를 받는다, 준다 하는 말 없이 그냥 "비구여 잘 왔구나!" 그 말 한마디에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법의가 입혀지고 계를 받아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계 받은 사람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술 김에 계를 받았지만 술을 깨고 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겠지요. 따라서 아난존자 같은 분들이 부처님께 책망 조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존께서는 다 아시면서 그와 같이 술 취한 사람에게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주십니까?" 하고 힐난 조로 말했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담바라화(優曇婆羅華)는 비록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보다 더 향기롭다." 비록 파계하고 나서 가버렸지만 한번 가사를 걸친 그 공덕 때문에 계율을 전혀 안 받은 사람보다는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술 취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계를 받겠다는 마음을 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기 잠재의식에 훈습되어서 몇 생 후에는 그 인연으로 성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설사 술 김에 계를 받았다 해도, 계를 안 받은 사람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마치 우담바라화 꽃이 비록 시들었다 하더라도 여느 일반 꽃보다도 더 향기롭듯이, 그 사람은 일반 사람보다는 더 소중한 선근(善根)을 심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깨달음도 한 걸음부터

비록 우리의 갈 길이 멀다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곧장 가기는 어렵습니다. 차근차근 선근을 가꾸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치로 아는 것으로 해서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다 말할 수 있지만, 우선 도덕적인 윤리 행동으로 우리의 생리(生理)가 정화되어야 합니다.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체험으로 도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도를 증명하신 분들, 참다운 증오(證悟)를 하신 분들은 파계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욕계 번뇌가 끝나고 색계, 무색계 번뇌가 끝나서 삼계 번뇌가 다 끝나 버리면 시공을 초월합니다. 시간, 공간을 초월하고 인과를 초월하는 그분들이 어떻게 계율에 어긋나겠습니까? 인과에 얽매여서 좋다, 궂다, 사랑스럽다, 밉다 하는 그런 마음, 유위 공덕에 얽매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지, 그런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분들은 죄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 자기[我]에 걸리고, 음욕에 걸리고, 또는 어떤 유위 상대적인 것에 걸리면 스스로 도인을 자칭한다 해도 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가인이든 재가인이든 마땅히 부처님의 법을 그냥 말로 이해하고 알 뿐만 아니라, 참답게 증명해서 영원한 희락(喜樂), 영원한 법락(法樂)을 맛보기 위해서는 꼭 청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 같은 분도 공부하는 방편문(方便門)으로 첫째가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했습니다. 지계청정하지 않으면 단지 생각으로 아는 것에 그칩니다. 사실은 법력이 없단 말입니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땅히 선오후수(先悟後修), 다시 말하여 먼저 부처님의 대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실상묘혜(實相妙慧)라 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우주의 실상을 바로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범부지(凡夫地)에서 보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성자가 보는 사실 그대로를 관(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좋은 말씀을 나의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계율이 앞서야 합니다. 청정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가 다겁생래로 지나오면서 지은 누겁의 습기(習氣)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훈습(薰習)된 것은 그냥 단박에는 못 녹입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빨리 갈 수 있으나, 선근이 얕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녹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계(五戒), 또는 십계(十戒), 더 나아가서 부처님의 청정대계인 보살계(菩薩戒)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가 열립니다. 생리(生理)와 심(心)이 둘이 아니고, 몸과 불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그때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계율을 앞세우면서 실상지혜(實相智慧)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도 하느님도 다 들어 있습니다. 물도, 불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를 생각하는 즉시 부처입니다. 중생을 생각하면 중생이고, 물을 생각하여 사무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이 물로 화하는 것입니다. 불을 생각하여 사무치면 우리 몸에서 불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모든 생명의 근원이 곧 영원한 정광명, 적광(寂光)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는 적광토(寂光土)인 것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적광정토(寂光淨土), 밀엄국(密嚴國), 모두가 다 이와 같은 광명세계를 말씀한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근본실상 광명자리에 마음을 안주시켜서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선오후수의 공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빨리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불기 2532년 1월, 태안사 삼년결사 및 금륜회 동안거 용맹정진 회향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