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②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9:06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 일체중생의 성불

부처님께서는 희락 가운데서 위없는 경지, 환희 가운데서도 최상의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를 성취하셨습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시고 보니 자기 혼자만 성불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보리수라든지 보리수의 이파리 하나하나, 보리수의 줄기 하나하나, 또 그 주변에 있는 숲,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부처님의 성불과 동시에 같이 성불해 버렸단 말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성불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산하대지 산천초목 일체중생이 동시에 성불했다는 그 의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산을 보고 땅도 보고 여러 가지 모습을 봅니다. 여러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장에 가려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업장이 녹아지면 녹아진 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바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이와 같이 업장이 녹아서 참다운 나, 진정한 자기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주의 참모습을 봅니다. 우주의 참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아무런 생명이 없어 보이는 산이나 돌멩이 하나까지도 실상은 모두가 살아 있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러기에《화엄경》<약찬게(略纂偈)>에 보면 산도 살아 있고, 냇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일체 동물 모두가 우리 인간과 차이 없이 생명을 갖추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물에는 용왕(龍王)이 있고, 도량에는 도량신(道場神)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양이 이러니까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모양없는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 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아니지요. 그와 똑같이 산에도 역시 모양은 산이지만 그냥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의 혼(魂)이 있습니다. 산의 혼은 결국 산신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있으면 나무라는 모양뿐만 아니라 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신(木神)입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있으면 그때는 석신(石神)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神)만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오해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존재도 거기에는 다 혼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이 거기에 갈무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그것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른 본래면목을 볼 수 있는 안목, 본질을 보는 안목에서는 모두가 다 생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엇이나 순수생명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덕분에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라는 인생 고해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도인들이나 정통 조사님들 역시 부처님같이 온전히는 다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무상대도의 맛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는 전쟁도 하고 어떤 때는 온갖 무시무시한 고뇌를 겪지만, 여러 성자들의 가르침 덕분에 참다운 영생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고, 희망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는 그냥 좋다거나 또는 마음이 개운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수오묘한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경계를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마명대사의《기신론(起信論)》에 따라서 깨달음의 차서(次序)를 말하면, 네 가지 차원에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무상대도라 하더라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깊고 얕은 관계를 잘 모르면 자칫 암중모색을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단지 첫 단계인 초범(初梵)에 도달해 놓고, '다 됐다' 여길 수도 있는 것이고 중간쯤 가서 '다 되었구나' '이것이 무상대도구나'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맨 처음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대도(無上大道)이기 때문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체공덕을 갖춘 자리여야 합니다.

우선 우리 욕계에서는 욕계 나름대로 먹는 것, 입는 것, 이성끼리 만나서 사는 것 등의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갖추어져 있는 온갖 공덕이 없을 때는,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욕계를 버리고 무상대도로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 중생은 부처님 경계에 들어 있는 무한공덕, 즉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공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 법신 부처인 우리 자성(自性)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불경에 나와 있는 말씀만 해도 백사십불공법(百四十不共法)이 있습니다. 즉 백마흔 가지의 공덕이나 재미, 행복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간추려서 말씀한 것이지 사실은 계산 잘하는 도인들이 몇 겁을 두고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백사십불공법은 보통사람들이나 낮은 차원의 성인들은 공유할 수 없는,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입니다.

또한 동시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의 능력이 있습니다. 삼명육통은 간단히 말하면 시간이나 공간이나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간에 얽매이고 공간에 얽매이고, 인과율에 얽매이면 그것은 '도(道)'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성품은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공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불성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삼명육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성과 온전히 하나 되었을 때는 석가모니와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우리의 법성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그 자리를 온전히 체험했다면 그것은 마땅히 인과율을 초월하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법신 공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 가운데 원래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 때문에 부처님, 즉 우주실상의 이름을 다보여래(多寶如來)라 했습니다. 또는 그 몸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서 우주를 다 포섭하므로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라고도 하고, 공덕이 하도 환희에 차 있기에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고도 했습니다. 또는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고도 합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는 것은 환희가 충만해 있는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자성공덕, 우리의 불심은 환희심이라는 점에서 보나 공덕이 많은 보배라는 점에서 보나 무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행복이 충만한 자리, 광명이 충만한 자리니까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청정하니까 청정광불(淸淨光佛)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본래면목인 자성, 즉 본성은 그 공덕이나 행복이 무한하기 때문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런 환희를 조금도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론을 따라서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늘 상기하고 되새기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명을 내걸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환희심이 충만하고 무한한 공덕을 발휘할 수 있는 부처님 자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 깨달음의 경계

그러나 그렇게 행복한 자리라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나쁜 버릇 때문에, 또한 금생에 지은 버릇 때문에 단박에는 성불을 못 합니다. 그래서 성불하는 과정을 이와 같이 네 가지 깨달음의 경계로 구분했습니다.

먼저 본각(本覺)입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가 불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조금도 안 하는 무식자라 하더라도, 어떤 존재든 모두가 본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성 청정심 또는 본원각성(本源覺性)입니다. 따라서 본각이라는 치원에서는 모두가 성불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실 때, '모든 존재가 다 본각을 지녔구나' '모든 것이 다 부처구나' 하고 보셨단 말입니다. 불안청정(佛眼淸淨)한 안목으로 보셨으니까 그와 같이 바로 보시는 겁니다.

이와 같이 본각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우리 중생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각은 있지만 닦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불성은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의 공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비록 본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면 상사각(相似覺)을 얻습니다. 비록 본각과 똑같지는 않지만 본각에 거의 닮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시각(始覺)이라고도 합니다. 비로소 본각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본각을 알기 시작할 때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했습니다.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아닙니까?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의식이 청정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본각을 어렴풋이 깨닫는 상사각, 시각의 경계에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분들이 항상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체험을 못합니다. 이치로야 좀 재주가 있으면 깨달을 수 있지만 참다운 증오(證悟)는 어렵습니다. 참다운 법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계율을 지켜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생리를 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을 안 지키면 정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마음이 정화되고, 역으로 마음이 정화되면 몸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설사 바른 지견(知見)이 있다 해도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지 않아서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 청정해짐으로써 비로소 불심 가운데 들어 있는 자성공덕인 본 깨달음을 맛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만큼 되면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 때문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해서 재미를 느끼고 도취해서 '공부가 다 되었구나' 생각하고 여기서 만족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근세에도 안 나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始覺)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경계만으로는 아직 육근청정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므로,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율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시 인과에 묶여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생사를 못 벗어납니다. 시간, 공간, 인과율을 초월해야만 생사를 벗어납니다.

부처님 법을 온전히 알고서 시각 혹은 상사각에 머물지 않고, '아직 멀었구나' 하고 더욱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더욱 닦으면 차근차근 수분각(隨分覺)의 경계에 듭니다. 즉 자기가 닦는 분수에 따라서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초지(菩薩初地)에서는 초지만큼, 이지(二地)에서는 이지만큼 차근차근 깨달아 올라갑니다. 올라갈수록 부처님 공덕을 발휘하게 됩니다.

《화엄경》《능엄경》등의 대승경전에서는 깨달아서 올라가는 단계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그런 경전을 제대로 보지 않거나 설사 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전 말씀은 모두가 다 문자다' '방편이다' 해서 그것을 의중에 두지 않고 아만심(我慢心)을 내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경전에도 상징과 비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경전에 전하는 부처님 말씀은 모두 참다운 금구설(金口說)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참다운 진리에 입각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라가는 과정을 분명히 느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보살초지부터 십지(十地)까지 올라갑니다. 경전에서는 보살지의 각 단계, 즉 초지(初地), 이지, 삼지, 사지, 오지, 육지, 칠지, 팔지, 구지, 십지(十地) 중 어디에 오르면 얼마만큼의 공덕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올라야 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 체계가 없다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성불의 목적지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법 체계도 이와 같이 뚜렷이,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주문이나 화두나 염불 또는 부처님 법에 입각한 다른 어떤 정당한 법을 하나 택했으면 그 다음 문제는 방금 말한 이런 과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공부가 어디에 머물지 않고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으며, 마침내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깨달음이 완성되는 원만무결한 자리,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입니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가장 끄트머리의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묘각(妙覺), 대각(大覺) 또는 정각(正覺)이라고도 합니다. 구경각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하다고 해서 묘각(妙覺)이라고 합니다. 위없는 각이라고 할 때는 무상각(無上覺)이라고 합니다. 또는 가장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에 정각(正覺)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우리 중생은 본래 갈 수 있는 참다운 고향에 완전히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처 이르지 못하면 여전히 번뇌가 남아 있게 됩니다. 그때는 설사 시각을 떠나서 수분각의 십지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생사윤회를 다시 합니다. 다시 죽어서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묘각(妙覺)에 이르면, 그때는 온전히 번뇌를 다 녹이고 자기 본래성품인 불성과 우주의 본래성품인 불성이 딱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때 비로소 윤회하지 않게 됩니다. 윤회가 사라질 때 우리 중생은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