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마음의 고향-①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通達無我法者 2008. 1. 4. 11:59

    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 부처님의 깨달음

자기 신명을 내걸고 진리를 구해 보지 않은 분들은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또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무명으로 헤매다가 그 무명 때문에 인간이 가지가지의 죄업을 지어서 심각한 인생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절한 인생고를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또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진리를 모르기에 우리 마음이나 이 세계는 항시 어두운 암흑 가운데 싸여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길을 몰라서 신구의(身口意)로 가지가지의 많은 악업(惡業)을 행한단 말입니다. 악업을 행하면 그에 상응한 고(苦)를 받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因)해서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인해서 고(苦)를 받습니다. 무명은 혹(惑)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미혹된 무명과 미혹으로 해서 짓는 여러 가지의 번뇌, 그리고 번뇌로 인해서 행하는 신구의 삼업(三業), 즉 몸으로 짓는 행동,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뜻으로 짓는 무명업(無明業),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의 가지가지의 고뇌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혹업고(惑業苦)는 전전(轉轉) 무변(無邊)해서 끝도 갓도 없이 영원히 인류를 윤회의 수레바퀴 가운데 몰아넣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혹업고 삼업을 벗어나는 길이 비로소 부처님의 '성도(成道)'로부터 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안이하게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육 년 고행이라는 심각한 고행을 거쳐서 깨달으셨습니다. 또 육 년 고행만 하신 것이 아니라, 무수 세월 동안, 불교용어로 말하여 이른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 하는 과거에 헤아릴 수도 없는 여러 생을 거듭하면서 선행을 쌓고 자기 몸을 희생하여 깨달으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느 생에서는 굶주린 범 새끼를 구제하기 위해서 당신 몸을 던지기도 하셨고, 또 어느 생에서는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기 위해서, 중생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서 바다 속의 용왕이 간직하고 있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찾아내기 위해 바닷물을 품는 것과 같은 끝도 갓도 없는 노력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여튼 부처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 동안 몇천 번 몸을 바치셨는데, 도(道)를 얻기 위해서 눈을 바치는 등 사지(四肢)를 바치는 희생적인 삶을 무수히 지내 왔습니다. 이러한 과거 무량세월의 보살행 뒤에 금생에서는 영화로운 왕자로 태어나서도 육 년 고행이라는 심각한 고행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구하실 때는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고행외도(苦行外道)한테 가서 무시무시한 고행을 다했습니다.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피골이 상접해서 다만 앙상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잡수시는 것은 하루에 일마척맥(一麻隻麥), 즉 한 조각의 피마자와 한 조각의 보리 알만 자시고 공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을 위한 고행은 지양하며, 또한 안일을 지양하지만 부처님께서 당초에 하신 것은 그야말로 고행을 위한 고행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고행이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길[無上大道]을 위해서 당신 몸을 불사르고 희생을 하셨던 겁니다.

부처님은 초기에 고행외도에게 가서 배웠으나 고행외도가 올라가는 길은 역시 기껏해야 욕계(欲界)를 초월해서 범천(梵天)에 가는 길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바라신 바는 삼계(三界)를 해탈하고 오직 참다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욕계를 초월하는 길도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욕계마저도 초월하지 못하면 참다운 진리의 빛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욕계만을 초월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방문한 외도는 아라라가란이라는 육사외도였는데 이분한테 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무소유처(無所有處), 즉 무색계(無色界)의 세번째 경계까지 올라가는 선법(禪法)을 공부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경계가 세 가지 있지 않습니까? 제일 밑에 욕계(欲界), 즉 음욕(淫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등의 욕심이 주가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욕계 다음에는 색계(色界)가 있습니다. 색계는 일체 물질의 미묘한 색(色)만 존재하는 경계입니다. 색계 위에는 다만 인간의 심식(心識)만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이러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생사윤회합니다. 헌데 아라라가란이라는 외도는 욕계와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 무색계에서도 세번째 경계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공부를 한 분입니다. 무색계에는 네 개의 천계, 즉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법을 배웠습니다. 이 경계 역시 사실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욕계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과거 전생에 무수한 세월 동안 선근(善根)을 심어서 거기에서 나온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얼마 안 가서 아라라가란이 올라간 선법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처 역시 해탈의 경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소유처라는 하늘에 올라가는, 즉 천상에 올라가는 법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해탈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해탈의 길을 구하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당신보다 더 깊은 도를 아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라라가란이 "내 아들이지만 나보다 더 높이 올라간 분이 우다카이다. 우다카한테 가 보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다카한테 가서 법을 물으니 우다카는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삼계(三界)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 있었습니다. 이 하늘이 삼계에서는 가장 높은 하늘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올라가는 선법을 공부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무색계의 세번째 하늘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가셨으니 거기서 한 발짝 위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삼매(三昧)에 드셔서 그냥 올라가셨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 올라가는 법, 즉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동시에 수명이 팔만대겁(八萬大劫)인 천상에 올라가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겁이라는 것은 무량세월 아닙니까? 그런 팔만대겁까지 갈 수 있는 처(處)가 비상비비상처입니다.

그렇게 오래 산다 하더라도 역시 인연이 다하면 그 천상에서도 미끄러져야 합니다. 다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생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는 욕계에 있으나 색계에 있으나 무색계에 있으나 어느 하늘에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안락해서 모든 것이 다 풍족해도 결국 인연이 다하면 다시 죽어야 합니다.

헌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하시는 길은 죽음이 없는, 생사가 없는 영원한 해탈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있다든지 번뇌가 있으면 해탈의 길이 못 됩니다. 해탈의 길은 영생불멸의 길입니다. 오직 영생불멸의 길을 구하는 것만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구도심이었으므로, 이러한 무색계의 가장 높은 하늘, 중생계 가운데서는 가장 최상천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갔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참다운 도를 구하는 분들은 어느 하늘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광명이 빛나는 색계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안락한 하늘, 팔만대겁 동안 지속되는 그런 하늘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특히 유위(有爲) 상대인 곳에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위(無爲) 적적(寂寂)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이 아니고서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비상비비상처, 즉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찬란하고 황홀한 세계에서, '내가 이만큼 공부했으니 이제는 거의 됐겠구나' 해서 자만심을 좀 품었습니다.

그런 때에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가만히 와서 수행자 싯다르타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가는 곳은 아직은 유위상대인 천상에 불과하니 다시 정각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 진정한 해탈을 구해야 하느니라." 싯다르타의 아만심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이에 싯다르타는 삼세제불에게서 오상성신(五相成身) 법문을 듣게 되고, 그 법문을 가지고 다시 깊은 삼매에 들어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으로 최상안온한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었습니다.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대도를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뒤에 보탠 말은 밀교(密敎)에 있는 말이므로 참고로 할 뿐입니다만, 아무튼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무상대도(無上大道),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셨습니다. 완전무결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는 아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정통 조사(祖師) 모두가 이와 같은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분들입니다.

- 깨달음의 감격

석가모니 부처님은 납월 팔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 즉 금성이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그 순간의 감격스러운 정황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순간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한 법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선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화동지(雨華動地)라 하여, 헤아릴 수 없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땅이 육동(六動)으로 진동했습니다.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성불을 찬탄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신도님께서 저에게 "불경을 보면 꽃비가 내린다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이 말이 참말입니까, 상징에 불과합니까?" 하고 물어 왔습니다. 이것은 불경에 있는 말씀이므로 조금도 흠축이 없는 사실입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할 때, 또는 무상대도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에 대해서 희귀한 일, 아주 귀한 일이 있을 때는 하늘에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라는 꽃이 핍니다. 만주사화는 만다라화보다도 더 찬란하고 영원에 가까운 천상의 꽃이고, 마하만주사화는 만주사화보다도 더 완전무결한 천상의 꽃입니다.

부처님이 무상대도를 이루었을 때, 이러한 천상의 꽃이 마치 비가 오듯 피었습니다. 꽃비가 내렸단 말입니다. 꽃비는 천상의 인간들이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부처님을 찬탄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화동지라고 합니다. 천지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하며, 즉 천지가 좌우전후, 상하 어디도 흠축없이 진동하며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무상대도 성취를 찬탄했습니다.

《법화경》에도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 즉 "하늘에는 천상의 만다라화 꽃이 항시 피어 있고, 하늘에 있는 북은 자연히 울리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소승경전에는 그런 말이 없으나 대승경전에는 부처님께서 무상대도를 성취하실 때나, 또는 여타의 대승법을 찬탄할 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또는 천지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해서 부처님 법을 찬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실 때 부처님은 무상(無上)의 희락을 느끼셨습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 인간의 재미라는 것은 오욕경계, 욕계에 있는 오욕을 맛볼 때 비로소 있는 것이지 오욕을 떠나면 재미가 없지요. 하지만 사실은 오욕을 떠나면 떠날수록, 오욕에서 멀어가면 멀어갈수록 참다운 법락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법락을 미처 맛보지 못하므로, 인간의 재미는 욕계밖에는 없구나, 그저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이성(異性)끼리 잘 사귀고, 물질이 풍족하고, 그런 것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서는 참다운 행복은 없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법락은 더욱더 증장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의 깨달음에서 맨 첫 단계는 환희지(歡喜地) 아닙니까? 환희란 말입니다. 환희라는 것은 자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깨달아서 환희지에 이를 때는 그 안락함과 행복이 어디에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마하가섭은 평생 동안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을 하고 누더기 하나와 바리때 하나로 평생을 지낸, 두타제일로 일컬어지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무상대도의 법을 전수받은 정법 조사입니다. 그런 근엄한 분도 보살 초지(初地)인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좌선중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되는, 이른바 경안지(輕安地)에 이르고, 또 경안이 나아져서 희락지(喜樂地)에 이르면 그때는 기쁨을 어디다 감추지를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락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 세상의 오욕락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 하고서 다시없는 희락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염불삼매라든가 또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삼매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환희를 모릅니다. 물론 삼매라는 것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하든 어떻게 하든 삼매에 딱 들면 그 경계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산란심이 제거되고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에 들기만 하면, 그때는 어떻게 들어가든 욕계가 멀어감에 따라 무한한 환희를 느낍니다.

무한의 환희를 느끼는 것은 그냥 몸과 마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적에 맛보시던 바로 그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라는 천상의 꽃이 비오듯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맛보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마하가섭 같은 근엄한 대(大)도인도 너울너울 춤을 춘단 말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온전히 맛보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은 맛을 봐야 인간 세상의 오욕락에 대해서 집착을 않습니다. 오욕락은 그냥 순간에 불과하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영원한 것입니다.